양공 10년
十年 봄, 노(魯) 양공(襄公)이 진(晉) 도공(悼公), 송(宋) 평공(平公), 위(衛) 헌공(獻公), 조(曹) 성공(成公), 거자(莒子), 주자(邾子), 등(滕) 성공(成公), 설백(薛伯), 기(杞) 효공(孝公), 소주자(小邾子), 제(齊)나라 태자 광(光)과 함께 저(柤) 땅에서 오(吳)나라 사람들을 만났다.
여름, 5월 갑오일(甲午日)에 마침내 부양(偪陽) 나라를 멸망시켰고, 양공이 저 땅에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초(楚)나라 공자 정(貞)과 정(鄭)나라 공손 첩(公孫輒)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공격했다.
진(晉)나라 군대가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가을, 거(莒)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동쪽 국경을 침략했다.
노 양공이 진 도공, 송 평공, 위 헌공, 조 성공, 거자, 주자, 제나라 태자 광, 등 성공, 설백, 기 효공, 소주자와 함께 정나라를 공격했다.
겨울, 도적이 정나라 공자 비(公子騑), 공자 발(公子發), 공손 첩을 죽였다.
정나라의 호뢰(虎牢)에 성을 쌓고 주둔했다.
초나라 공자 정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했다.
노 양공이 정나라를 공격하던 곳에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10년 봄, 저 땅에서 회합한 것은 오자 수몽(吳子壽夢)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3월 계축일(癸丑日)에 제나라의 고후(高厚)가 태자 광의 상례(相禮)로서 먼저 종리(鍾離)에 도착하여 여러 후작들과 회견했으나 고후의 태도가 공손하지 못했다. 사장자(士莊子)가 말했다. “고자가 태자의 상례로서 여러 후작들을 만나러 왔으니, 본래 나라를 보위해야 하는데 그들이 모두 이처럼 공손하지 못하니, 이는 나라를 버리는 것이다. 아마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여름, 4월 무오일(戊午日)에 저 땅에서 공식 회합이 열렸다.
진나라의 순언(荀偃)과 사개(士匄)가 부양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향술(向戌)에게 봉토로 주기를 청했다. 순앙(荀罃)이 말했다. “부양성은 작지만 매우 견고하니, 함락시켜도 용맹하다고 할 수 없고, 함락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굳이 청하므로, 병인일(丙寅日)에 부양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맹씨(孟氏)의 가신 진근보(秦堇父)가 보급 수레를 끌고 전지에 도착했다. 부양 사람들이 성문을 열자, 여러 후작의 군사들이 틈을 타서 쳐들어갔으나 현문(懸門)이 갑자기 내려졌다. 추(鄒) 사람 흘(紇)이 힘껏 현문을 들어 올려 성 안으로 쳐들어간 군사들이 빠져나오게 했다. 적사미(狄虒彌)가 큰 수레바퀴를 세워 가죽 투구를 씌워 방패로 삼고, 왼손으로 그것을 들고 오른손으로 창을 뽑아 한 줄을 이루었다. 맹헌자(孟獻子)가 말했다. “《시경(詩經)》에 이른바 ‘힘이 범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부양 사람들이 베를 내걸자, 진근보가 베를 잡고 성에 올랐는데, 성가퀴에 거의 닿았을 때 그들이 베를 끊자 진근보가 떨어졌다. 그들이 다시 베를 내걸자, 진근보가 깨어난 뒤 다시 올라가기를 이와 같이 세 번 반복했다. 부양 사람들이 감복하여 사양하자, 진근보가 비로소 물러나서, 그가 끊긴 베를 몸에 지니고 군중에서 사흘 동안 돌며 보여주었다. 여러 후작의 군대가 부양에 오래 머물자, 순언과 사개가 순앙에게 청하기를 “우기가 다가오니 아마 철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군대를 돌리도록 명령하소서.” 지백(知伯, 순앙)이 노하여 궤를 그들 사이에 던지며 말했다. “그대들이 두 가지 일을 이루고 나서 내게 고하라. 나는 명령이 혼란할까 두려워서 그대들을 어기지 않았다. 그대들이 이미 군주를 수고롭게 하고 여러 후작들을 동원하여, 또 늙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서, 다시 나에게 허물을 돌리려 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대를 돌리자고 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함락시켰을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늙고 쇠약하여, 어찌 이러한 죄명을 감당하겠는가? 7일 안에 함락시키지 못하면 반드시 그대들을 문책할 것이다.” 5월 경인일(庚寅日)에 순언과 사개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양을 공격하여,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진격했다. 갑오일(甲午日)에 부양을 멸망시켰다. 《춘추(春秋)》에 ‘드디어 부양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한 것은, 이번 행동이 석(柘) 땅의 회맹에서 직접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부양을 향술에게 주려 하자, 향술이 사양하며 말했다. “만약 군주께서 굽히시어 송나라를 위로하시고, 부양으로 우리 군주의 강토를 열어 주신다면, 신하들이 편안해질 것이니, 어찌 이보다 더 큰 상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오로지 저 개인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제가 여러 후작들을 동원하여 스스로 봉토를 구하는 것이니,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나이다.” 이에 부양을 송 평공에게 주었다.
송 평공이 초구(楚丘)에서 향례(享禮)를 베풀어 진 도공을 대접하면서, 상림(桑林)의 춤을 사용하기를 청했다. 순앙이 사양했다. 순언과 사개가 말했다. “여러 후작들 가운데 송과 노 두 나라에서는 그곳에서 예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노나라에는 체악(禘樂)이 있어서 빈객을 대접하고 제사를 지낼 때 모두 사용합니다. 송나라가 상림의 춤으로 군주를 대접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무사(舞師)가 정하(旌夏)라는 큰 깃발을 들고 들어오자, 진 도공이 두려워하여 방 안으로 물러났다. 정하를 제거한 뒤에야 향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저옹(著雍)에 도착했을 때, 진 도공이 병이 났다. 점을 치니, 점괘에 상림의 신이 재앙을 내린다고 나타났다. 순언과 사개가 송나라로 달려가서 기도를 청하려 하자, 순앙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미 그 예를 사양했는데, 그들이 굳이 사용한 것이다. 만약 귀신이 있다면, 마땅히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야 할 것이다.” 진 도공의 병이 점차 나았다. 부양자(偪陽子)를 데리고 돌아와 무궁(武宮)에서 포로를 바치고, 그를 ‘이포(夷俘)’라고 불렀다. 부양은 운(妘) 성이었다. 주(周) 내사(內史)를 보내 부양 종족의 후손을 선택하여 곽인(霍人)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예에 합당한 일이었다. 군대가 돌아오자, 맹헌자가 진근보를 수레의 우측에 앉히고, 후에 아들 진비자(秦丕茲)를 낳았는데, 일찍이 공자(孔子)를 섬겼다.
6월, 초나라 자양(子囊)과 정나라 자이(子耳)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군대를 자모(訾毋)에 주둔시켰다. 경오일(庚午日)에 송나라를 포위하고 동문(桐門)을 공격했다.
진나라 순앙이 진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가 진나라를 침범한 데 대한 보복을 했다.
위 헌공이 송나라를 구원하여 군대를 양우(襄牛)에 주둔시켰다. 정나라 자전(子展)이 말했다. “반드시 위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나라에 친근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진나라에 죄를 짓고, 또 초나라에 죄를 지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사(子駟)가 말했다. “나라가 이미 곤궁해졌습니다.” 자전이 말했다. “두 대국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곤궁한 것이 망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대부들이 모두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나라의 황이(皇耳)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침략했는데, 이는 초나라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었다. 손문자(孫文子)가 정나라 군대를 추격할지를 점쳐서, 점괘를 정강(定姜)에게 바쳤다. 강씨(姜氏)가 주사(繇辭)를 물으니, “점괘가 산릉(山陵)과 같아서, 사람이 출정하나 그 우두머리를 잃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씨가 말했다. “출정하는 자가 우두머리를 잃으면, 우리 방어하는 자에게 이롭습니다. 대부들이 생각하십시오.” 위나라 사람들이 정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손과(孫蒯)가 견구(犬丘)에서 정나라의 황이를 사로잡았다.
가을, 7월, 초나라 자양과 정나라 자이가 우리나라 서쪽 국경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蕭) 땅을 포위했다. 8월 병인일(丙寅日)에 소 땅을 함락시켰다. 9월, 자이가 송나라 북쪽 국경을 침략했다. 맹헌자가 말했다. “정나라에 아마 재앙이 있을 듯하구나! 군대의 싸움이 지나치다. 주나라조차 지나친 싸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하물며 정나라야 말해 무엇하랴? 재앙이 있다면, 아마 집정하는 세 대부에게 떨어질 것이다!”
거나라 사람들이 여러 후작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그래서 우리나라 동쪽 국경을 공격했다.
여러 후작들이 정나라를 공격할 때, 제나라 최저(崔杼)가 태자 광을 먼저 군중에 도착하게 하여, 그래서 등나라보다 앞에 섰다. 기유일(己酉日)에 군대가 우수(牛首)에 주둔했다.
처음에, 자사가 위지(尉止)와 다툼이 있었다. 여러 후작들의 군대를 막을 준비를 할 때, 자사가 위지의 전차를 줄였다. 위지가 적을 사로잡자, 자사가 또 그와 다투었다. 자사가 위지를 억누르며 말했다. “네 전차가 예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포로를 바치지 못하게 했다. 처음에, 자사가 밭의 경계를 나누면서, 사씨(司氏), 두씨(堵氏), 후씨(侯氏), 자사씨(子師氏)가 모두 토지를 잃었다. 그래서 이 다섯 족이 뜻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공자들의 무리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자사가 국정을 잡고, 자국(子國)이 사마(司馬)이며, 자이(子耳)가 사공(司空)이며, 자공(子孔)이 사도(司徒)였다. 겨울, 10월 무진일(戊辰日)에 위지, 사신(司臣), 후진(侯晉), 두녀보(堵女父), 자사복(子師僕)이 반란자들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쳐들어갔다. 아침에 서궁(西宮)의 조정에서 집정 관료들을 공격하여, 자사, 자국, 자이를 죽이고, 정 간공(鄭簡公)을 협박하여 북궁(北宮)으로 데려갔다. 자공은 이 일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춘추》에서 그들을 ‘도적’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들이 대부의 신분이 없기 때문이다. 자서(子西)가 도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하지 않고 나와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뒤 도적을 쫓았다. 도적이 북궁으로 들어가자, 자서가 돌아가서 비로소 갑옷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가신과 처첩들이 대부분 흩어져 달아나고, 기물들이 많이 없어졌다. 자산(子産)이 도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지기를 설치하고, 각 부서의 관리를 배치하며, 부고(府庫)를 닫고, 재물을 삼가 보관하며, 수비를 완비하고, 대열을 정돈한 뒤에 나왔다. 전차 17대가 있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뒤 북궁에서 도적을 공격했다. 자희(子蟜)가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를 도와, 위지와 자사복을 죽이고, 도적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후진은 진(晉)나라로 도망가고, 두녀보, 사신, 위편(尉翩), 사제(司齊)는 송(宋)나라로 도망갔다.
子孔이 국정을 장악하여 맹서를 제정하고, 관직의 서열에 따라 집정의 명령을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대부, 각 부서의 관리, 공자들의 자제들이 따르지 않자, 그들을 주살하려 하였다. 자산이 그를 말리고 맹서를 불태울 것을 청하였다. 자공이 동의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맹서를 제정한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여러 사람이 노한다고 불태워 버린다면, 이는 여러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니, 나라가 또한 다스려지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산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분노는 범하기 어렵고,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두 가지 어려운 일을 합쳐서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차라리 맹서를 불태워 여러 사람을 안정시키고, 그대는 원하는 바를 얻으며, 여러 사람도 편안해질 수 있으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 권력 독점은 이루기 어렵고, 여러 사람의 분노를 범하면 화를 입게 되니, 그대는 반드시 그들을 따라야 합니다.” 이에 창문 밖에서 맹서를 불태우니, 여러 사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제후의 군대가 호뢰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오와 제에 성을 쌓고, 사방과 위강이 그곳을 지켰다. 《춘추》에 “정나라 호뢰를 지켰다.”고 기록한 것은, 호뢰가 정나라 땅이 아니며, 장차 정나라에 돌려줄 것임을 의미한다. 정나라가 진나라와 강화하였다.
초나라 자낭이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11월, 제후의 군대가 정나라를 돌아 남쪽으로 가 양릉에 이르렀다.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지 않았다. 지무자(순앵)가 물러나기를 바라며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초나라를 피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교만해질 것이다. 교만해지면 그들과 싸울 수 있다.” 하였다. 난염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피하는 것은 진나라의 치욕이다. 제후를 모아 치욕을 더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홀로 나아가려 한다.” 하였다. 군대가 이에 전진하였다. 기해일에 초나라 군대와 영수 강가에서 대치하였다. 자석이 말하기를 “제후들이 이미 퇴로를 준비하였으니, 반드시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따라 물러나려 해도 따르지 않아도 물러날 것이다. 그들이 물러날 때 초나라 군대가 반드시 우리를 포위할 것이다. 이미 물러나기로 같다면, 초나라를 따르는 것이 낫고, 또한 이로써 물러날 수 있다.” 하였다. 밤에 영수를 건너 초나라 사람들과 맹약하였다. 난염이 정나라 군대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순앵이 동의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실로 초나라를 막을 수 없고, 또 정나라를 보호할 수 없으니, 정나라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들이 우리를 원망하게 하고 돌아가게 하라. 지금 정나라 군대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반드시 그들을 구원할 것이니, 싸워 이길 수 없으면 제후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이길 확신이 없으니,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낫다.” 하였다. 정미일에 제후의 군대가 물러나며 정나라 북쪽 국경을 침략하고 돌아갔다. 초나라 군대도 돌아갔다.
왕숙 진생이 백여와 집정 권력을 다투었다. 주 영왕이 백여를 편애하자, 왕숙 진생이 노하여 달아났다. 황하에 이르렀을 때, 주 영왕이 그를 돌아오게 하고 사교를 죽여 그를 기쁘게 하였다. 왕숙 진생이 돌아오지 않고 황하 가에 머물렀다. 진 도공이 사핑을 보내 왕실의 분쟁을 중재하게 하였다. 왕숙과 백여가 송사를 벌였다. 왕숙의 가재와 백여의 대부 하금이 왕정에서 대질하고, 사핑이 심리하였다. 왕숙의 가재가 말하기를 “가난한 집 출신의 사람들이 윗사람을 능멸하면, 그 윗사람은 일하기 어렵게 됩니다.” 하였다. 하금이 말하기를 “옛날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할 때, 우리 일곱 성씨가 천자를 따랐으며, 희생과 제물이 모두 갖추어져 천자가 그들에게 의지하였고, 붉은 소로 제사하는 맹약을 내려 ‘대대로 실직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만약 가난한 집 출신이라면, 그들이 동쪽에 와서 정착할 수 있었겠습니까? 천자가 또 그들에게 무엇을 의지하였겠습니까? 지금 왕숙이 보좌한 이후로 정사는 뇌물로 이루어지고, 형벌은 총신에게 가해지며, 관리들이 그들의 부유함을 감당하지 못하니, 우리가 어찌 가난한 집 출신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국이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아래 사람에게 바른 길이 없다면, 그것을 무엇이라 공정하다 하겠습니까?” 범선자(사핑)가 말하기를 “천자가 찬성하는 것은 우리 군주도 찬성하고, 천자가 반대하는 것은 우리도 반대한다.” 하였다. 왕숙과 백여로 하여금 송사를 대질하게 하였으나, 왕숙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왕숙이 진나라로 도망갔다. 《춘추》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노나라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정공이 경사가 되어 왕실을 보좌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