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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

소공 22년

제 22 편

二十二年 봄, 제후가 거(莒)나라를 공격했다.

송나라의 화해(華亥), 향녕(向寧), 화정(華定)이 송나라 남리(南里)에서 초나라로 도망쳤다.

창간(昌間)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했다.

여름, 4월 을축일에 주 천자가 붕어했다. 6월, 숙앙(叔鞅)이 경사(京師)로 가서 경왕(景王)을 장사 지내고, 왕실에 동란이 일어났다.

유자(劉子)와 단자(單子)가 왕맹(王猛)을 모시고 황(皇) 땅에 머물렀다.

가을, 유자와 단자가 왕맹을 모시고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겨울, 10월에 왕자 맹(王子猛)이 죽었다.

12월 계유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22년 봄, 주력 2월 갑자일에 제나라 북곽계(北郭啟)가 군대를 이끌고 거나라를 공격했다. 거자가 맞서 싸우려 하자, 원양목우(苑羊牧之)가 간하기를 “제나라 장수의 지위가 낮고 그들의 요구도 많지 않으니,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낫습니다. 큰 나라는 성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거자가 듣지 않고 수여(壽餘)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제후가 거나라를 공격하자, 거자가 강화를 청했다. 사마조(司馬竈)가 거나라에 가서 맹약을 맺고, 거자가 제나라에 가서 맹약을 맺어 직문(稷門) 밖에서 동맹을 체결했다. 거나라는 이로부터 그들의 군주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초나라의 위월(薳越)이 사람을 보내 송나라에 말하기를 “우리 군주께서 귀국에 따르지 않는 신하가 있어 귀국 군주께 근심을 끼쳐 종묘의 수치가 될까 두렵다 하셨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그들을 받아들여 죽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송나라가 답하기를 “과인이 재주가 없어 부형(父兄)들을 잘 섬기지 못하여 귀국 군주께 근심을 끼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군신 사이에 이르기를 ‘군주께서 반드시 신하를 도우라고 말씀하시니, 우리도 명령만 따를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속담에 ‘난리의 집 문 앞을 지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귀국 군주께서 만약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불충한 자를 비호하지 않으시고 난을 일으키는 자를 징계하신다면, 이것이 과인의 소원입니다. 귀국 군주께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했다. 제후들의 수비 병사들이 의논하기를 “만약 화씨(華氏)가 곤경에 빠져 목숨을 걸고 초나라가 공로가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급히 싸운다면, 우리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들을 내보내 초나라의 공으로 삼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굳이 방출을 청하여 송나라 사람들이 따랐다. 기사일에 송나라의 화해, 향녕, 화정, 화곡(華䝙), 화등(華登), 황엄상(皇奄傷), 성장(省臧), 사평(士平)이 초나라로 도망쳤다. 송공이 공손기(公孫忌)를 대사마(大司馬)로, 변앙(邊卬)을 대사도(大司徒)로, 낙기(樂祁)를 사마(司馬)로, 중기(仲幾)를 좌사(左師)로, 낙대심(樂大心)을 우사(右師)로, 낙환(樂輓)을 대사구(大司寇)로 임명하여 국내 백성을 안정시켰다.

왕자 조(王子朝)와 빈기(賓起)가 경왕의 총애를 받았다. 경왕과 빈맹(賓孟)이 그들을 좋아하여 왕자 조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유헌공(劉獻公)의 서자(庶子) 백분(伯蚡)이 단목공(單穆公)을 섬기며 빈맹의 인격을 싫어하여 그를 죽이려 했고, 또 왕자 조의 말을 싫어하여 그것이 화란이라 여기고 제거하려 했다. 빈맹이 교외에 갔다가 수탉이 스스로 꼬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물으니, 시자가 말하기를 “이는 자신이 제사 희생으로 쓰일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빈맹이 급히 돌아가 경왕에게 보고하며 말하기를 “닭은 아마 사람에게 쓰일까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희생은 실로 사람이 쓰는 것이지만, 사람이 희생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스스로 희생이 되는 것이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경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여름, 4월에 경왕이 북산(北山)으로 사냥을 가서 공경들을 모두 따르게 하고, 단자(單子)와 유자(劉子)를 죽이려 했다. 경왕에게 심장병이 있어 을축일에 영기씨(榮錡氏)의 집에서 죽었다. 무진일에 유자(劉子)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단자가 유분(劉蚡)을 세웠다. 5월 경진일에 경왕을 알현한 후 빈기(賓起)를 공격하여 죽이고, 단씨(單氏)의 집에서 여러 왕자들과 맹약을 맺었다.

진(晉)나라가 고(鼓)나라를 취했을 때, 종묘에 전리품을 바친 후 고자(鼓子)를 돌려보냈다. 고자가 다시 진나라를 배반하고 선우(鮮虞)에 붙었다. 6월, 순오(荀吳)가 동양(東陽)을 순시하며 군사들에게 마치 식량을 운반하는 척 하고 갑옷을 등에 지고 석양(昔陽) 성문 밖에서 쉬게 한 후, 습격하여 고나라를 멸망시켰다. 고자 원제(鳶鞮)를 붙잡아 진나라로 데려가고, 섭타(涉佗)에게 그를 지키게 했다.

정사일에 경왕을 장사 지냈다. 왕자 조가 벼슬과 녹을 잃은 옛 관리들과 영왕(靈王), 경왕의 족족(族族)들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켜, 교(郊), 요(要), 전(餞) 땅의 갑사(甲士)들을 이끌고 유자(劉子)를 몰아냈다. 임술일에 유자(劉子)는 양(揚) 땅으로 도망쳤다. 단자(單子)가 장궁(莊宮)에서 도왕(悼王)을 맞이하여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왕자 환(王子還)이 밤에 다시 도왕을 장궁으로 데려갔다. 계해일에 단자가 도망쳤다. 왕자 환(王子還)이 소장공(召莊公)과 모의하기를 “단기(單旗)를 죽이지 않으면 승리라 할 수 없습니다. 그와 다시 맹약을 맺으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맹약을 저버리고 이긴 경우도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장공이 따랐다. 번경자(樊頃子)가 말하기를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에 도왕을 받들어 단자를 쫓아가 영(領) 땅에 이르러 성대한 맹약을 맺고 돌아와, 질황(摯荒)을 죽여 단자를 기쁘게 했다. 유자(劉子)가 유(劉) 땅으로 갔다. 단자가 망명했다. 을축일에 평치(平畤)로 도망쳤다. 여러 왕자들이 그를 쫓자, 단자가 왕자 환(還), 고(姑), 발(發), 약(弱), 종(鬷), 연(延), 정(定), 주(稠)를 죽였다. 왕자 조가 경성(京城)으로 도망쳤다. 병인일에 경성을 공격하자 경성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쳤다. 유자(劉子)가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신미일에 공간공(鞏簡公)이 경성에서 패배했다. 을해일에 감평공(甘平公)도 패배했다. 숙앙(叔鞅)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왕실의 동란을 말했다. 민마보(閔馬父)가 말하기를 “왕자 조는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친애하는 자들은 하늘이 버린 자들입니다.”라고 하였다. 단자가 진(晉)나라에 급히 알리려 했다. 가을, 7월 무인일에 도왕을 모시고 평치로 갔다가 다시 포차(圃車)로 가서 황(皇) 땅에 주둔했다. 유자(劉子)가 유(劉) 땅으로 갔다. 단자가 왕자 처(王子處)를 시켜 왕성을 지키게 하고, 평궁(平宮)에서 백공(百工)과 맹약을 맺었다. 신묘일에 심흔(鄩肸)이 황 땅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하여 사로잡혔다. 임진일에 왕성의 시장에서 그를 불태워 죽였다. 8월 신유일에 사도 추(司徒醜)가 왕사(王師)를 이끌고 전성(前城)에서 패배했다. 백공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사일에 단씨(單氏)의 집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경오일에 단씨가 도리어 그들을 공격했다. 신미일에 동원(東圉)을 공격했다. 겨울, 10월 정사일에 진나라의 적담(籍談)과 순탁(荀躒)이 구주지융(九州之戎)과 함께 초(焦), 하(瑕), 온(溫), 원(原)의 군대를 이끌고 도왕을 왕성으로 들여보냈다. 경신일에 단자(單子)와 유분(劉蚡)이 왕사(王師)를 이끌고 교(郊) 땅에서 패배했다. 전성(前城) 사람들이 사(社) 땅에서 육혼(陸渾)을 격파했다. 11월 을유일에 왕자 맹(王子猛)이 죽었으나 정식 장례는 치르지 않았다. 기축일에 경왕(敬王)이 즉위하여 자여씨(子旅氏)의 집에 머물렀다.

12월 경술일에 진나라의 적담, 순탁, 가신(賈辛), 사마독(司馬督)이 군대를 이끌고 음(陰) 땅, 후씨(侯氏), 계천(谿泉)에 주둔하고 사(社) 땅에 주둔했다. 왕사(王師)는 범(汎) 땅, 해(解) 땅에 주둔하고 임인(任人)에 주둔했다. 윤달에 진나라의 기유(箕遺), 낙징(樂徵), 우행궤(右行詭)가 증원군을 이끌고 전성(前城)을 함락시키고 그 동남쪽에 주둔했다. 왕사는 경초(京楚)에 주둔했다. 신축일에 경성을 공격하여 그 서남부를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