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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

소공 32년

제 32 편

三十一年 봄, 주력 정월에 소공이 간후(干侯)에 머물렀다. 감(阚) 땅을 빼앗았다.

여름, 오(吳)나라가 월(越)나라를 쳤다.

가을, 칠월.

겨울, 중손하지(仲孫何忌)가 진(晉)나라 한불신(韓不信), 제(齊)나라 고장(高張), 송(宋)나라 중기(仲幾), 위(衛)나라 세숙신(世叔申), 정(鄭)나라 국삼(國參), 조(曹)나라 사람, 거(莒)나라 사람, 설(薛)나라 사람, 기(杞)나라 사람, 소추(小邾)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성주(成周)에 성을 쌓았다. 십이월 기미일에 소공이 간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삼십이년 봄, 주력 정월에 소공이 간후에 있었다. 이는 그가 대외적으로 화합하지 못하고 대내적으로 사람을 등용하지 못했음을 이른다.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다. 이는 오나라가 월나라에 대해 처음으로 군사를 쓴 것이다. 사묵(史墨)이 말했다. “사십 년이 채 못 되어 월나라가 아마 오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월나라는 세성(歲星)의 위치에 있는데 오나라가 이를 치니, 반드시 세성이 내리는 재앙을 입을 것입니다.”

가을, 팔월에 주 천자가 부신(富辛)과 석장(石張)을 진나라에 보내 성주의 성을 증축해 줄 것을 청했다. 천자가 말했다. “하늘이 재앙을 주나라에 내려, 나의 형제들이 모두 난심을 품어 백부(伯父)의 근심이 되게 하였소. 나의 가까운 생질과 외삼촌 나라들도 바빠서 편안히 살 곳이 없게 된 지가 지금까지 십 년이 되었소. 수고로이 지키며 변방을 지킨 지 오 년이 되었으나, 나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소. 마치 농부가 풍년을 바라며 조마조마하게 추수 시기를 기다리는 듯 걱정하고 있소. 백부께서 큰 은혜를 베푸셔서 문왕과 무왕의 공업을 다시 세우고 주실의 근심을 덜어 주시며 문왕과 무왕의 복을 구하여 맹주의 지위를 굳게 하고 아름다운 명성을 드날리신다면,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오. 옛날 성왕(成王)이 제후를 모아 성주에 성을 쌓아 동도(東都)로 삼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소. 지금 나는 성왕에게 복을 빌고 그의 위엄을 빌려 성주의 성을 수리하여 지키는 사람들이 더 이상 수고롭지 않게 하고 제후들이 편안히 지내며 간악한 무리가 멀리 달아나게 하고자 하오. 이는 모두 진나라의 힘에 달렸소. 그러니 백부께 맡기오니, 백부께서는 이 일을 깊이 생각해 주시오. 나 개인이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고 백부께도 영광이 있게 하시오. 선왕께서도 이와 같이 행하셨소.”

범헌자(范獻子)가 위헌자(魏獻子)에게 말했다. “병사를 보내 성주를 지키게 하는 것보다는 성을 증축하는 것이 낫습니다. 천자가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후일에 일이 있더라도 진나라는 참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천자의 명령을 따라 제후들의 부담을 덜어 준다면 진나라에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 일에 힘쓰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위헌자가 말했다. “좋습니다.” 백음(伯音)을 보내어 대답하게 했다. “천자께서 명령을 내리셨으니,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달려가 제후들에게 알리겠습니다. 공사의 진도와 규모는 천자께서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겨울, 십일월에 진나라의 위서(魏舒)와 한불신이 경사(京師)에 이르러 적천(狄泉)에서 제후의 대부들과 회합하여 지난 맹약을 다시 닦고 성주의 성을 증축할 것을 명령했다. 위서가 남쪽을 향해 (군주의 자리에) 앉자, 위나라의 표의(彪傒)가 말했다. “위자(魏子)는 반드시 큰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자신의 직위를 넘어 큰일을 명령하는 것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놀고 편안히 지내지 말며, 하늘의 변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탕히 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감히 직위를 넘어 큰일을 도모하겠습니까?”

기축일에 사미잠(士彌牟)이 성주를 수리하는 공사를 계획했다. 길이를 재고 높이를 헤아리며 두께를 측정하고 도랑의 깊이를 재며 흙을 취할 곳을 살피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의논하며 공사 기한을 예산하고 인력을 계산하며 자재를 고려하고 식량을 기록하여 제후들에게 노역을 분배했다. 각 제후국의 크기에 따라 노역을 나누고 구역을 정하여 기록을 각 제후국 대부들에게 주고 나서 유자(劉子)에게 올렸다. 한간자(韓簡子)가 이를 감독하여 기정 방안으로 삼았다.

십이월에 소공이 병이 위독해져서 대부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으나 대부들이 받지 않았다. 자가자(子家子)에게 쌍호(雙琥) 한 쌍, 환(環) 하나, 벽(璧) 한 개와 가벼운 의복을 내리니 자가자가 받았다. 대부들도 모두 상을 받았다. 기미일에 소공이 세상을 떠났다. 자가자가 상으로 받은 물건들을 장부고(掌府庫) 관리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내가 감히 국군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대부들도 모두 상을 돌려주었다. 《춘추》에 “공이 간후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기록한 것은 그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서 죽었음을 이른다.

조간자(趙簡子)가 사묵에게 물었다. “계씨(季氏)가 그의 국군을 쫓아냈는데도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제후들도 그를 친근히 합니다. 국군이 밖에서 죽었으나 그를 괘씸하게 여기는 자가 없으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사묵이 대답했다. “만물이 생겨날 때, 어떤 것은 둘이 되고, 어떤 것은 셋이 되고, 어떤 것은 다섯이 되며, 어떤 것은 보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삼진(三辰)이 있고, 땅에는 오행(五行)이 있으며, 몸에는 좌우가 있어 각각 짝이 있습니다. 왕에게는 공(公)이 있고, 제후에게는 경(卿)이 있어 모두 보좌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늘이 계씨를 태어나게 하여 노(魯)나라 국군을 보좌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노나라 국군은 대대로 방탕하고 덕을 잃었으며, 계씨는 대대로 부지런히 일하여 백성들이 이미 국군을 잊어버렸습니다. 비록 밖에서 죽었더라도 누가 그를 가엾게 여기겠습니까? 사직(社稷)에는 고정된 제사 주인이 없고, 군신(君臣)에는 고정된 지위가 없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마루가 깊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산마루가 된다.’고 했습니다. 삼왕(三王)의 후손들도 지금은 모두 평민이 되었으니, 이는 당신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역경》의 괘에서 진뢰(震雷)가 건천(干天) 위에 있는 것을 대장(大壯)이라 하니, 이는 하늘의 법칙입니다. 옛날 성계우(成季友)는 환공(桓公)의 작은아들이었고 문강(文姜)이 총애한 아들이었습니다. 임신 초기에 점을 쳤는데, 점쟁이가 보고하기를 ‘태어나면 좋은 이름이 있을 것이고, 이름은 우(友)이며, 공실(公室)의 보좌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태어나자 과연 점쟁이가 말한 대로 손에 ‘우’ 자가 있었고, 그래서 ‘우’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후에 노나라에 큰 공을 세워 비(費) 땅에 봉해지고 상경(上卿)이 되었습니다. 문자(文子)와 무자(武子)에 이르러 대대로 그 공업을 더하여 지난 업적을 폐하지 않았습니다. 노문공(魯文公)이 세상을 떠나자 동문수(東門遂)가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워 노나라 국군이 이로부터 나라를 잃고 정권이 계씨에게 떨어졌습니다. 이 국군에 이르기까지 이미 네 명의 국군을 겪었습니다. 백성들이 국군을 알지 못하는데, 국군이 어찌 나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국군 된 자는 예기(禮器)와 명호(名號)를 삼가 지켜 남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