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8년
8년 봄, 주 왕력(周王曆) 정월에 노나라 군대가 낭(郎) 땅에 주둔하며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갑오일(甲午日)에 군대를 정비하였다.
여름,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와 함께 성(郕)나라를 포위하였으나, 성나라는 제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가을, 노나라 군대가 귀국하였다.
겨울, 11월 계미일(癸未日)에 제나라의 공손 무지(公孫無知)가 그의 군주 제양공(齊襄公, 제공 제아)을 시해하였다.
8년 봄, 종묘(宗廟)에서 군대를 정비한 것은 예(禮)에 합당하였다. 여름,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와 함께 성나라를 포위하였으나, 성나라는 제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중경보(仲慶父)가 제나라 군대를 공격할 것을 청하자, 노 장공(魯莊公)이 말하였다. "안 된다. 나는 실로 덕(德)이 부족한데, 제나라 군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는 나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하서(夏書)》에 이르기를 '고요(皐陶)가 덕을 힘써 행하니, 덕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선 덕을 닦는 데 힘쓰며 때를 기다리자." 가을, 노나라 군대가 귀국하였다. 군자(君子)는 이로 인해 노 장공을 칭송하였다.
제 양공이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를 보내 규구(葵丘)를 지키게 하면서, 오이가 익을 때(여름) 가서 지키라고 약속하며 말하였다. "내년 오이가 익을 때 사람을 보내 교대하리라." 수비 기한이 차자, 제 양공의 교대 명령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교대를 청하였으나 제 양공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모반을 꾀하였다. 제 희공(齊僖公)의 동복(同母) 동생 이름은 이중년(夷仲年)인데, 공손 무지를 낳았다. 공손 무지는 제 희공의 총애를 받아 의복과 예절 대우가 적자(嫡子)와 같았다. 제 양공이 즉위하여 그의 대우를 낮추자, 연칭과 관지보가 그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연칭에게는 제 양공의 궁중에 있는 종매(從妹)가 있었는데, 총애를 받지 못하자, 그들로 하여금 제 양공의 동정을 염탐하게 하였다. 공손 무지가 말하였다. "일이 성공하면, 너를 부인(夫人)으로 세우겠다."
겨울 12월, 제 양공이 고분(姑棼)에서 놀고, 이어 패구(貝丘)에서 사냥하였다. 큰 멧돼지를 보자, 시종이 말하였다. "이는 공자 팽생(公子彭生)입니다." 제 양공이 노하여 말하였다. "팽생이 감히 나타나다니!" 활을 쏘았다. 멧돼지가 사람처럼 일어나 울부짖었다. 제 양공이 두려워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돌아와서 도인비(徒人費)에게 신발을 찾으라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그를 채찍질하여 피가 흐르게 하였다. 비(費)가 달아나 나가다가 문에서 반적(叛賊)을 만나 붙잡혀 결박당하였다. 비가 말하였다. "내가 어찌 저항하겠는가?" 옷을 풀어 등을 드러내어 보이니, 반적이 그를 믿었다. 비가 먼저 들어가 궁중을 살피겠다고 청하였다. 그는 제 양공을 숨긴 후 나와서 그들과 싸우다가 궁문 안에서 죽었다. 석지분여(石之紛如)는 섬돌 아래에서 죽었다. 반적이 이내 궁중으로 들어가 침상에서 맹양(孟陽)을 죽이고 말하였다. "이는 군주가 아니다. 닮지 않았다." 문 아래에서 제 양공의 발을 보고는 마침내 그를 죽이고, 공손 무지를 군주로 세웠다.
당초, 제 양공이 즉위한 후 정사가 일정하지 않았다. 포숙아(鮑叔牙)가 말하였다. "군주가 백성들을 방종하게 하니, 화란이 장차 일어나려 한다." 이에 공자 소백(公子小白)을 섬겨 거(莒)나라로 도망갔다. 화란이 일어난 후, 관이오(管夷吾)와 소홀(召忽)이 공자 규(公子糾)를 섬겨 노(魯)나라로 도망갔다. 당초, 공손 무지가 옹린(雍廩)을 학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