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공 5년
5년 봄, 진(晉) 헌공(獻公)이 태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기(杞)나라 백희(伯姬)가 와서 그 아들을 위해 조현(朝見)하였다.
여름, 공손자(公孫茲)가 모(牟)나라로 갔다.
노(魯) 희공(僖公)이 제(齊) 환공(桓公), 송(宋) 환공(桓公), 진(陳) 선공(宣公), 위(衛) 문공(文公), 정(鄭) 문공(文公), 허(許) 남(男), 조(曹) 소공(昭公)과 함께 수지(首止)에서 왕태자 정(鄭)을 만났다.
가을, 8월, 제후들이 수지에서 맹세(盟誓)하였으나, 정 문공은 도망쳐 국내로 돌아와 맹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초(楚)나라 사람들이 현(弦)나라를 멸망시키고, 현자(弦子)는 황(黃)나라로 도망쳤다.
9월, 무신(戊申) 삭일(朔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겨울, 진(晉)나라 사람들이 우(虞)공(公)을 사로잡았다.
5년 봄, 주(周)나라 정월, 신해(辛亥) 삭일(朔日), 동지(冬至) 날이었다. 노 희공이 이미 고삭례(告朔禮)를 행하고, 이에 관대(觀臺)에 올라 구름 기운을 살펴보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예(禮)에 합당한 것이었다. 무릇 춘분(春分), 추분(秋分), 하지(夏至), 동지, 입춘(立春),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에는 반드시 구름 기운의 변화를 기록하였으니, 이는 재이(災異)를 방비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진 헌공이 사람을 보내 태자 신생을 시해한 까닭을 알렸다. 처음에 진 헌공이 사위(士蒍)를 시켜 두 공자(公子)를 위해 포(蒲)와 굴(屈) 땅에 성벽을 쌓게 하였는데, 사위가 신중하지 못하여 성벽에 나무를 넣었다. 이오(夷吾)가 진 헌공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진 헌공이 사람을 보내 사위를 꾸짖었다. 사위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상사(喪事)가 없는데 슬퍼하면 근심이 반드시 올 것이며, 전쟁이 없는데 성을 쌓으면 원수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수가 장차 지킬 곳이라면, 어찌 반드시 신중히 해야 하겠습니까? 관직을 맡고서 군명(君命)을 폐기하는 것은 불경(不敬)이요, 원수의 거점을 튼튼히 하는 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충과 경을 잃고서 무엇으로 국군(國君)을 섬기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마음에 덕을 품으면 편안해지고, 종실의 자제들이 곧 성벽이 된다.' 하였습니다. 국군께서는 덕을 닦고 종실 자제들의 단결을 굳게 하신다면, 어떤 성벽이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3년 뒤에는 장차 군사를 쓰게 될 터이니, 어디에 신중함이 필요하겠습니까?" 사위가 물러나와 시를 읊었다. "여우 가죽 옷 털이 뒤섞였구나. 한 나라에 세 주인이 있으니, 내가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이후 화란(禍亂)이 일어나자, 진 헌공이 시인발(寺人披)을 시켜 포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중이(重耳)가 말하였다. "군부(君父)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다." 이에 알리기를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나의 원수이다."라 하고,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치자 시인발이 그의 소매를 베었고, 중이는 이에 적(翟)나라로 도망갔다.
여름, 공손자가 모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다.
수지에서 회합을 가진 것은 왕태자 정의를 만나 주(周) 왕실을 안정시킬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진(陳)나라 원선중(轅宣仲)이 정(鄭)나라 신후(申侯)가 소릉(召陵) 회맹(會盟)에서 자신을 배신한 것을 원망하여, 그러므로 신후에게 권하여 국군이 그에게 하사한 성읍에 성벽을 쌓게 하며 말하였다. "성벽을 아름답게 쌓는 것은 큰 명성이니, 자손 대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도와서 청하겠소." 이에 신후를 위해 제후들에게 청하여 성벽을 쌓았다. 아름답게 쌓은 뒤, 원선중이 정 문공에게 참언(讒言)을 하였다. "하사한 성읍을 그토록 아름답게 쌓은 것은 반란을 준비하려는 것입니다." 신후가 이로 인해 정 문공에게 죄를 얻었다.
가을, 제후들이 회맹을 하였다. 주 혜왕(惠王)이 주공(周公)을 보내 정 문공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너를 위로하여 초(楚)나라를 따르게 하고, 다시 진(晉)나라로 너를 보좌하게 하니, 이로써 너는 조금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정 문공이 주왕의 명령을 기뻐하였으나, 제(齊)나라가 자신이 조현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므로 도망쳐 국내로 돌아와 맹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숙(孔叔)이 그를 말렸다. "국군께서는 가벼이 행동하실 수 없습니다. 가벼이 행동하면 친근한 이를 잃게 됩니다. 친근한 이를 잃으면 화가 반드시 옵니다. 곤궁해진 뒤에 맹세를 청하게 되면 잃는 것이 너무 많아, 국군께서는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정 문공이 듣지 않고, 그의 군대를 버리고 도망쳐 돌아왔다.
초나라의 두곡오도(鬪穀於菟)가 현나라를 멸망시키고, 현자는 황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강(江), 황(黃), 도(道), 백(柏) 여러 나라가 제(齊)나라와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현나라의 인척(姻戚)이었다. 현자가 이러한 관계를 믿고 초나라를 섬기지 않았으며, 또 방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진 헌공이 다시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치려 하였다. 궁지기(宮之奇)가 간하였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울타리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가 반드시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진나라의 탐욕을 열어서는 안 되며, 적을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한 번으로도 이미 지나쳤는데, 어찌 다시 두 번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속담에 이른바 '수레의 가로장과 바퀴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차가워진다.'는 것은 바로 우나라와 괵나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공이 말하였다. "진나라는 나와 동종(同宗)이니,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궁지기가 대답하였다.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주(周) 태왕(太王)의 아들입니다. 태백은 부친의 명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괵중(虢仲)과 괵숙(虢叔)은 왕계(王季)의 아들이며, 문왕(文王)의 경사(卿士)가 되어 왕실에 공훈이 있어, 공훈을 기록한 맹서(盟書)는 맹부(盟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진나라가 장차 괵나라를 멸하려 하는데, 우나라에 대해서는 또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더욱이 우나라가 환숙(桓叔)과 장백(莊伯)의 가문보다 더 가깝겠습니까? 만약 진나라가 그들을 아꼈다면, 환숙과 장백의 가문은 무슨 죄가 있어 그들을 죽였습니까? 그들이 총애를 받아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가까운 친척이 총애를 받아 위협이 되면 오히려 그들을 죽였거늘, 하물며 국가이겠습니까?" 우공이 말하였다. "내가 제사 지내는 제물(祭物)이 풍성하고 정결하니, 신령(神靈)이 반드시 나를 도울 것이다." 궁지기가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귀신은 어떤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직 덕(德)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가까이함이 없고,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제사 지내는 기장과 피는 향기롭지 않고, 밝은 덕만이 향기롭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바뀌지 않지만,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이 바치는 제물만이 진정한 제물이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니, 만약 덕이 없다면 백성이 화순하지 않고 신령도 제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신령이 의지하는 바는 덕에 있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우나라를 취하고서도 밝은 덕을 발휘하여 향기로운 제물을 바친다면, 신령이 어찌 그것을 뱉어내겠습니까?" 우공이 듣지 않고 진나라 사자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궁지기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떠나며 말하였다. "우나라는 올해 납제(臘祭)를 기다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한 번의 행동으로 진나라는 다시 군사를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8월 갑오일(甲午日)에 진 헌공이 상양(上陽)을 포위하였다. 진 헌공이 복언(卜偃)에게 물었다. "내가 성공할 수 있겠는가?" 복언이 대답하였다. "공략할 수 있습니다." 진 헌공이 말하였다. "언제인가?" 복언이 대답하였다. "동요(童謠)에 노래하기를 '병(丙)자의 아침, 용미성(龍尾星)이 숨어 보이지 않네. 군복이 정제되고 위엄 있으니, 괵나라의 깃발을 빼앗으리. 작화성(鶉火星)이 불처럼 밝고, 천책성(天策星)은 희미하게 빛나네. 화성(火星)이 한가운데 있을 때 군대를 이루니, 괵공은 도망가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아마 9월 10월 사이일 것입니다. 병자일(丙子日)의 아침, 해는 미성(尾星) 자리에 있고, 달은 천책성 자리에 있으며, 작화성이 정남(正南)에 있으니, 반드시 이때일 것입니다." 겨울, 12월 병자(丙子) 삭일에 진(晉)나라가 괵나라를 멸망시켰다. 괵공 축(醜)이 도망쳐 경사(京師)로 갔다. 진나라 군대가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에 틈을 타 우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우공과 대부(大夫) 정백(井伯)을 사로잡아 진(秦)나라 목희(穆姬)의 시첩(媵妾)으로 삼았으나, 우나라의 제사는 유지하고 우나라의 공부(貢賦)는 주왕(周王)에게 귀속시켰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기록하기를 '진나라 사람들이 우공을 사로잡았다.' 하였으니, 이는 우나라를 책망하고 일이 매우 쉬웠음을 밝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