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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공

희공 33년

제 33 편

삼십삼년 봄, 주왕 정월, 진(秦)군이 활(滑)나라로 들어갔다.

제후가 국귀보를 노(魯)나라에 보내 빙문하였다.

여름, 4월 신사일, 진(晉)나라 사람과 강융(姜戎)이 효산(崤山)에서 진(秦)군을 격파하였다.

계사일, 진문공(晉文公)을 장사지냈다.

적(狄)인이 제(齊)나라를 침입하였다.

희공(僖公)이 주(邾)나라를 쳐서 자기루(訾婁)를 빼앗았다.

가을, 공자수(公子遂)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쳤다.

진(晉)나라 사람이 기(箕) 땅에서 적인을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희공이 제나라로 갔고, 12월, 희공이 제나라에서 돌아왔다.

을사일, 희공이 소침(小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리가 내렸으나 풀이 죽지 않았고, 오얏나무와 매화나무가 열매를 맺었다.

진(晉)나라 사람, 진(陳)나라 사람, 정(鄭)나라 사람이 허(許)나라를 쳤다.

삼십삼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주(周)나라 도성 북문을 지나가는데, 수레 위 좌우 병사들이 투구를 벗고 수레에서 내렸다가, 삼백 대의 병거 병사들이 다시 수레에 올라탔다. 왕손만(王孫滿)이 당시 아직 어렸는데, 이 상황을 보고 주왕에게 말하였다. “진군은 경솔하고 무례하니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경솔하면 지략이 부족하고, 무례하면 소홀해집니다. 험한 곳에 들어가면서 소홀하고, 또 계획을 세울 수 없다면, 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군이 활(滑)나라에 도착했을 때, 정(鄭)나라 상인 현고(弦高)가 마침 주나라 도성으로 장사하러 가다가 진군을 만났다. 그는 먼저 잘 다룬 소가죽 네 장을 바치고, 이어서 소 열두 마리를 바치며 진군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우리 군주께서 장군님께서 행군하여 우리 나라를 지나신다 하시어, 감히 와서 장군님의 부하들을 위로합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부유하지 않지만, 장군님의 부하들이 오래 머무르셨기에, 만약 머무르신다면 하루 치 양식을 준비하고, 만약 출발하신다면 하룻밤 치 경비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급히 정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정목공(鄭穆公)이 사람을 보내 객관을 살펴보니, 기자(杞子), 봉손(逢孫), 양손(楊孫) 등이 이미 짐을 꾸리고, 무기를 갈고, 말을 먹이고 있었다. 목공이 황무자(皇武子)를 보내 그들을 사절하며 말하였다. “여러분이 우리나라에 오래 머물렀으나, 육포와 곡식과 가축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출발하실 터이니, 정나라에는 원포(原圃)가 있고, 진나라에는 구유(具囿)가 있듯이, 여러분께서 가서 사슴을 사냥하시어, 우리나라가 한가해지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기자는 제나라로 도망쳤고, 봉손과 양손은 송나라로 도망쳤다. 맹명(孟明)이 말하였다. “정나라에 이미 방비가 있으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격해도 이길 수 없고, 포위해도 후원이 없으니, 우리는 그냥 돌아갑시다.” 이에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갔다.

제나라의 국장자(國莊子)가 노나라에 와서 빙문하였다. 교외에서 맞이하는 예로부터 폐백을 증여하는 데까지 예의가 모두 갖추어지고 민첩함을 드러냈다. 장문중(臧文仲)이 희공에게 말하였다. “국자(國子)가 정사를 맡고 있으니, 제나라에 아직 예의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회하러 가셔야 합니다. 신이 듣기로, 예의 있는 나라에 순종하는 것이 국가의 보장이라고 합니다.”

진나라의 원진(原軫)이 말하였다. “진나라가 건숙(蹇叔)의 의견을 어기고, 탐욕 때문에 백성을 고생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입니다.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적을 놓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적을 놓아주면 화를 불러오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불길합니다. 반드시 진군을 쳐야 합니다.” 난지(欒枝)가 말하였다. “아직 진나라의 은혜를 갚지도 않고 그들의 군대를 친다면, 이 어찌 돌아가신 군주님을 대할 면목이 있겠습니까?” 선진(先軫)이 말하였다. “진나라가 우리의 국상을 애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같은 성씨의 나라를 공격했으니, 진나라는 무례한 것이니, 무슨 은혜를 말하겠습니까? 내가 듣기로, ‘하루 적을 놓아주면 여러 대의 화를 끼친다’고 했습니다. 자손을 위해 계획하는 것, 이것이 돌아가신 군주님을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명령을 내리고 신속히 강융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진양공(晉襄公)이 검은 상복을 입고, 양홍(梁弘)이 병거를 몰고, 내구(萊駒)가 우(右)를 맡았다.

여름, 4월 신사일, 효산에서 진군을 격파하고, 백리맹명시(百里孟明視), 서기술(西乞術), 백을병(白乙丙)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에 검은 상복을 입고 진문공을 장사지냈다. 진나라가 이로부터 검은 상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문영(文嬴)이 세 장수를 풀어주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그들이 실로 우리 두 나라 군주 사이를 이간질하였으니, 우리 군주께서 그들을 얻으시면, 그들의 고기를 먹어도 한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폐하께서 친히 그들을 벌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을 돌려보내 진나라에서 형벌을 받게 하여, 우리 군주의 뜻을 만족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양공이 승낙하였다. 선진이 조회하여 진나라 죄수에 대해 묻자, 진양공이 말하였다. “부인이 그들을 위해 청하였기에, 내가 이미 그들을 풀어주었다.” 선진이 노하여 말하였다. “장수와 병사들이 전장에서 힘을 다해 잡은 자들을, 부인이 한순간에 도성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전과를 허물고 적의 기세를 돋우니,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에 침을 뱉었다. 진양공이 양처보(陽處父)를 보내 그들을 뒤쫓게 하였다. 황하 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이미 배에 타고 있었다. 양처보가 왼쪽의 참마를 풀어, 진양공의 명령이라고 속여 맹명에게 선물하였다. 맹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같은 포로를 죽여 북을 제사 지내지 않고, 돌아가 진나라에서 형벌을 받게 하시니, 우리 군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만약 임금님의 복으로 목숨을 건진다면, 삼 년 후에 돌아와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진목공(秦穆公)이 소복을 입고 교외에서 기다리며, 군대를 향해 울며 말하였다. “내가 건숙의 충고를 어겨, 그대들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맹명을 교체하지 않은 것도, 나의 허물이다. 대부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한 번의 허물 때문에 그의 큰 공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적인이 제나라를 침입한 것은, 진나라에 상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희공이 주나라를 쳐서 자기루를 빼앗은 것은, 승형(升陉) 그 전투에 대한 복수였다. 주나라 사람들은 방비하지 않고 있었다. 가을, 양중(襄仲)이 다시 주나라를 쳤다.

적인이 진나라를 쳐서 기 땅에 이르렀다. 8월 무자일, 진양공이 기 땅에서 적인을 격파하였다. 극결(郤缺)이 백적(白狄)의 수장을 사로잡았다. 선진이 말하였다. “한 필부가 임금 앞에서 뜻을 펴고도 벌을 받지 않았으니, 내 감히 스스로를 벌하지 않겠는가?” 투구를 벗고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적인이 그의 머리를 돌려보냈는데, 얼굴 빛이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 처음에, 구계(臼季)가 사신으로 기(冀) 땅을 지나다가, 결(缺)이 김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아내가 밥을 주는 것이 매우 공손하여 서로 손님처럼 대하였다. 구계가 그를 데리고 함께 돌아왔다. 진문공에게 말하였다. “공경함은 덕행이 집중된 표현입니다. 공경할 수 있으면 반드시 덕행이 있을 것입니다. 덕행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이니, 그를 등용하시기를 청합니다. 신이 듣기로, ‘나가는 것은 손님을 만나는 듯이 하고, 일을 맡는 것은 제사에 참여하는 듯이 하라, 이것이 인(仁)의 기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문공이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죄가 있는데, 괜찮겠는가?” 구계가 대답하였다. “순임금이 죄인을 벌하여 곤(鯀)을 유배 보냈지만,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우(禹)를 기용하였습니다. 관중(管仲)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원수였지만, 그의 재상이 되어 그를 성공하게 하였습니다.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도 아들은 공손하지 않고, 형이 우애하지 않아도 아우는 공손하지 않으며,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순무와 무를 캘 때, 그 뿌리가 나쁘다고 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 그의 장점을 취하시면 됩니다.” 진문공이 극결을 하군대부(下軍大夫)로 임명하였다. 기 땅에서 돌아와, 진양공이 삼명(三命)의 예로 선차거(先且居)에게 중군을 통솔하게 하고, 재명(再命)의 예로 선모(先茅)의 현을 서신(胥臣)에게 하사하며 말하였다. “극결을 천거한 것이, 그대의 공이다.” 일명(一命)의 예로 극결을 경(卿)으로 임명하고, 또 기 땅을 하사하였으나, 아직 군직은 없었다.

겨울, 희공이 제나라에 조회하러 가고, 아울러 제나라가 적인의 침입을 당한 것을 위문하였다. 돌아와서 소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이는 편안함을 탐했기 때문이다.

진나라, 진나라, 정나라가 허나라를 쳐서, 그것이 초나라에 가까이한 것을 토벌하였다. 초나라의 영윤 자상(子上)이 진나라와 채나라를 쳤고, 진나라와 채나라가 초나라와 강화하자, 초군이 이에 정나라를 쳤다. 초군이 공자 하(瑕)를 돌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귤질문(桔柣門)에서 성문을 공격하였다. 공자 하의 병거가 주씨지왕(周氏之汪)에서 전복되었고, 외복곤둔(外僕髡屯)이 그를 붙잡아 정나라에 바쳤다. 문부인(文夫人)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괴성(鄶城) 아래에 장사지냈다.

진나라의 양처보가 채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의 자상이 구원하러 가서 진나라 군대와 지수 강을 사이에 두고 주둔하였다. 양처보가 초군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자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문치는 이치에 순종하는 자를 범하지 않고, 무치는 적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소. 그대가 싸우려 한다면, 내가 삼십 리를 물러나리니, 그대가 강을 건너 진을 치되, 빠르고 느림은 모두 그대의 명령에 따르겠소. 그렇지 않다면, 우리로 하여금 잠시 쉬게 하시오. 군대를 피로하게 하고 재물을 소모하는 것도 이익이 없소." 하고는 곧 전차를 갖추고 기다렸다. 자상이 강을 건너려 하자, 대손백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진나라 사람들은 신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한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로 하여금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이에 초군이 삼십 리를 물러났다. 양처부가 선언하기를 "초군이 도망쳤다." 하고는 돌아갔다. 초군도 돌아갔다. 태자 상신이 자상을 무고하여 말하기를 "그가 진나라의 뇌물을 받고 그들을 피하였으니, 이는 초나라의 수치입니다. 이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하였다. 초성왕이 자상을 죽였다.

희공을 장사지냄에 하관이 매우 늦었고, 또 신주를 만들었으니, 이는 예법에 맞지 않았다. 무릇 군주가 죽으면, 곡을 마친 후에 그 신위를 조묘에 부제하고, 부제한 후에 신주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의 신주를 따로 제사할 때는, 증제, 상제, 체제 때에는 조묘에 합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