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 제52편 평진후와 주보 열전
승상 공손홍은 제나라 치천국 설현 사람이니, 자는 계(季)이다. 젊을 때 설현의 옥리(獄吏)를 지내다가 죄를 지어 파직되었다. 집이 가난하여 바닷가에서 돼지를 쳤다.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춘추》와 여러 학설을 배웠다. 계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삼갔다.
건원 원년에 천자가 막 즉위하여 현량문학지사(賢良文學之士)를 불러들였다. 이때 공손홍은 이미 예순 살이었는데, 현량으로 징소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것이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았다. 황제가 노하여 그를 무능하다 여기니, 공손홍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광 5년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문학지사를 징소하자, 치천국에서 다시 공손홍을 천거했다. 공손홍이 나라 사람들에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일찍이 서쪽으로 가서 명에 응하였다가 무능하여 파직되어 돌아왔으니, 바라건대 다른 사람을 골라 천거하시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굳이 공손홍을 천거하니, 공손홍이 마침내 태상(太常)에게 나아갔다. 태상이 징소한 유사(儒士)들에게 각자 대책(對策)을 짓게 하였는데, 백여 명 가운데 공손홍의 성적이 꼴찌였다. 대책을 올리자 천자가 공손홍의 대책을 뽑아 첫째로 삼았다. 그를 불러 입궁하여 알현하니, 용모가 매우 단정하여 박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마침 서남이(西南夷)의 길을 열고 군현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파촉(巴蜀)의 백성들이 이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공손홍을 보내 시찰하게 하였다. 그가 돌아와 복명하며 서남이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극력 비방하였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았다.
공손홍은 사람됨이 도량이 넓고 견문이 넓었으며, 항상 군주의 가장 큰 병폐는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데 있고, 신하의 가장 큰 병폐는 검소하지 못한 데 있다고 여겼다. 공손홍은 베 이불을 덮고, 밥을 먹을 때 두 가지 이상의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계모가 죽자 삼년상을 치렀다. 조정에 나아가 일을 의논할 때마다 그는 단지 일의 시초만 진술하고 군주가 스스로 선택하게 하였으며, 조정에서 면전에서 꾸짖거나 논쟁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천자가 그를 살펴보니 행실이 돈후하고 논변이 뛰어나며, 문법(文法)과 이사(吏事)에 능숙하고 또 유술(儒術)로 꾸미는 데 능하여, 황제가 매우 좋아하였다. 2년 사이에 좌내사(左內史)로 승진하였다. 공손홍이 일을 아뢰었을 때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조정에서 다투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汲黯)과 함께 단독으로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급암이 먼저 의견을 내놓고, 공손홍이 뒤에서 추궁하여 보충하면, 천자가 항상 매우 기뻐하여 말한 바가 모두 채택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더욱 가까워지고 존귀하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공경들과 어떤 건의를 약속했다가, 황제 앞에 이르러서는 모두 약속을 어기고 황제의 뜻을 따랐다. 급암이 조정에서 공손홍을 꾸짖어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들은 대개 교활하고 진심이 없소. 처음에 우리와 함께 이 건의를 세웠다가, 지금 모두 어겼으니,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공손홍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나를 아는 자는 나를 충성스럽다 여기고, 나를 모르는 자는 나를 충성스럽지 않다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공손홍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황제 곁의 총신들이 매번 공손홍을 비방할수록, 황제는 도리어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원삭 3년에 장구(張歐)가 파직되자, 공손홍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이때 마침 서남이를 개통하고, 동쪽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북쪽에 삭방군(朔方郡)을 축성하고 있었다. 공손홍이 여러 번 간언하여, 이는 중원을 피폐하게 하여 쓸모없는 땅을 기르는 것이니, 이 공사들을 중지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천자가 주매신(朱買臣) 등을 보내 공손홍을 힐난하며, 삭방군 설치의 편리함을 논하게 하였다. 열 가지 계책을 제시하자, 공손홍은 하나도 반박하지 못하였다. 공손홍이 이에 사죄하여 말하기를 "저는 산동(山東)의 비루한 사람이라, 삭방군 설치가 이토록 편리한 줄을 몰랐습니다. 바라건대 서남이 개통과 창해군 설치는 중지하고, 오로지 삭방군 경영에 힘쓰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허락하였다.
급암이 말하기를 "공손홍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녹봉이 매우 많소. 그런데도 그가 베 이불을 덮는 것은, 이는 속임수요"라고 하였다.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공손홍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습니다. 구경(九卿) 가운데 저와 사이가 좋은 이는 급암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만, 그가 오늘 조정에서 저를 꾸짖은 것은 참으로 제 병통을 지적한 것입니다. 삼공의 신분으로 베 이불을 덮는 것은, 실은 위선을 꾸며 명예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듣건대 관중(管仲)이 제환공(齊桓公)의 상국(相國)이 되어 세 곳의 저택을 두었는데, 사치가 군주에 비길 만하였으나 제환공은 그를 의지하여 패자가 되었으니, 이는 위로 군주에게 월등한 것입니다. 안영(晏嬰)이 제경공(齊景公)의 상국이 되어 밥을 먹을 때 두 가지 이상의 고기 반찬을 먹지 않고, 첩이 비단을 입지 않았으나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으니, 이는 아래로 백성들과 수준을 맞춘 것입니다. 지금 저 공손홍이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 이불을 덮으니, 구경 이하에서 소리(小吏)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습니다. 이는 실로 급암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급암의 충성이 아니었다면, 폐하께서 어찌 이런 말을 들으셨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가 겸양한다고 여겨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마침내 공손홍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하였다.
공손홍은 사람됨이 시기심이 많고,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은 깊었다. 일찍이 공손홍과 틈이 있었던 자들은, 겉으로는 화목한 척하면서도 몰래 보복하였다. 주보언(主父偃)을 죽게 하고 동중서(董仲舒)를 교서(膠西)로 전보시킨 것은 모두 공손홍의 힘이었다. 그는 매끼 한 가지 고기와 거친 밥만 먹었다. 옛 친구와 그가 좋아하는 빈객들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의식을 공급받았고, 공손홍의 녹봉은 모두 그들에게 공급하는 데 쓰여,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선비들도 이로 인해 그를 현덕하다 여겼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모반하여, 당여(黨與)를 추궁하는 일이 긴박해졌다. 공손홍이 병이 중하여, 스스로 공로 없이 후에 봉해지고 승상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명군을 보좌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하의 정도를 따르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지금 제후들에게 반역의 음모가 있으니, 이는 모두 재상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한 탓이라, 자신이 문득 병들어 죽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가 함께 따르는 떳떳한 도리에 다섯 가지가 있고, 이 떳떳한 도리를 행하는 덕(德)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장유(長幼)의 차례, 이 다섯 가지는 천하가 함께 따르는 떳떳한 도리입니다. 지혜(智慧), 인애(仁愛), 용감(勇敢), 이 세 가지는 천하의 공통된 덕이니, 이 떳떳한 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행하면 인(仁)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면 지(智)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알면 용(勇)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 셋을 알면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안 뒤에야 남을 다스리는 법을 압니다. 천하에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으니, 이는 백대가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큰 효도를 행하시고, 삼왕(三王)을 본받으시며, 주나라의 다스림을 세우시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정을 겸비하시어, 현능한 이를 권장하고 녹봉을 주며,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십니다. 지금 신 공손홍은 자질이 둔하고 공로가 없사오나, 폐하께서 지나치게 행오(行伍) 가운데서 발탁하시어 열후(列侯)에 봉하시고 삼공의 지위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신 공손홍의 품행과 재능은 이에 부족하며, 평소에 또 부신지병(負薪之病)이 있어, 개마(狗馬)보다 먼저 구학(溝壑)에서 죽어 마침내 은혜에 보답하고 책임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후인(侯印)을 돌려드리고, 퇴직하기를 청하여, 어진 이에게 길을 양보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답하기를 "옛날에는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덕 있는 자를 기렸으며, 지키는 때에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난을 만나면 무공(武功)을 숭상하였으니, 이 이치를 바꾼 적이 없느니라. 짐이 전에 다행히 높은 자리를 이어받아,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오직 함께 천하를 다스릴 자와 함께하려 하노니, 너는 마땅히 이 뜻을 알지어다. 대개 군자는 선한 자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나니, 네가 삼가 행한다면 짐이 항상 마음에 새기리라. 네가 불행히 상로(霜露) 같은 작은 병에 걸렸으니, 어떤 병인들 낫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상소하여 후인을 돌려주고 퇴직을 청함은, 이는 짐의 덕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로다. 지금 정사가 잠시 한가하니, 너는 마땅히 생각을 줄이고 정신을 집중하며, 다시 의약(醫藥)을 더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와 술, 여러 비단을 휴가 선물로 하사하였다. 몇 달이 지나 병이 낫자, 계속하여 정사를 보았다.
원수 2년에 공손홍이 병이 중하여, 마침내 승상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공손도(公孫度)가 작위를 이어 평진후가 되었다. 공손도는 산양태수(山陽太守)를 10여 년 지내다가 법을 어겨 후작을 잃었다.
主부언은 제나라 임치 사람이었다. 그는 종횡술을 익히다가 말년에야 《주역》, 《춘추》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웠다. 제나라 유생들 사이를 유랑했으나 그를 잘 대해 주는 이가 없었다. 제나라 유생들이 함께 그를 배척하여 제나라에 몸담을 수 없게 되었다. 집이 가난하여 돈을 빌릴 곳도 없었으므로, 북쪽으로 연나라, 조나라, 중산나라 등을 유람했으나 그를 잘 대해 주는 이가 없어 빈객으로서 매우 곤궁했다. 효무황제 원광 원년에, 그는 제후 중에 설득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서쪽으로 입관하여 위장군을 알현했다. 위장군이 여러 차례 황제에게 그를 추천했으나 황제는 부르지 않았다. 그가 자금이 떨어져 오래 머물자, 많은 공경과 빈객들이 그를 싫어하게 되었고, 이에 그는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아침에 상소를 올렸는데, 저녁에 궁중으로 불려 들어가 알현했다. 그는 아홉 가지 일을 진술했는데, 그중 여덟 가지는 법률에 관한 것이었고, 한 가지는 흉노를 공격하는 것을 간하는 것이었다. 그의 상소 내용은 이러했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간절한 간언을 싫어하지 않아 견문을 넓히고, 충성된 신하는 무거운 벌을 피하지 않고 직언하므로 일에 실책이 없고 공업이 만대에 전해진다고 합니다. 지금 신은 감히 충성을 숨기거나 죽음을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올리오니, 폐하께서 바라건대 죄를 용서하시고 잠깐 살펴보소서.
《사마법》에 이르기를, ‘나라가 아무리 커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아무리 태평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하였습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면 천자는 성대한 개선례를 행하고, 봄과 가을에 사냥을 하며, 제후들은 봄에 군대를 정비하고 가을에 병사를 훈련시키니, 이는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더구나 분노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병기는 흉한 도구이며, 싸움은 지엽적인 일입니다. 고대의 군주는 한 번 노하면 반드시 시체가 널리고 피가 흐르게 하였으므로, 성왕은 이를 신중히 여겼습니다. 승리에 힘쓰고 무력을 남용하는 자는 후회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옛날 진시황은 승리의 위세를 믿고 천하를 잠식하여 육국을 병합하고 해내를 통일하여 공업이 삼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리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고 흉노를 치려 하였습니다. 이사가 간하기를, ‘안 됩니다. 흉노는 성곽에 거주하지 않고 축적한 것이 없어 새처럼 옮겨 다녀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가벼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양식이 반드시 끊기고, 양식을 갖추고 가면 무거워 기회를 쫓지 못합니다. 그들의 땅을 얻어도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없고, 그 백성을 만나도 부리거나 지킬 수 없습니다. 이기면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하니, 이는 백성의 부모가 될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하고 흉노에게 쾌감을 얻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으나 진시황은 듣지 않고, 이에 몽염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호인을 쳐서 천 리의 땅을 개척하고 황하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곳은 본래 염전 지대여서 오곡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천하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북하를 지키게 했습니다. 군대가 밖에 노출된 지 십여 년,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끝내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원이 부족하고 병기가 충분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형세가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식량을 나르게 하되, 황현, 척현, 낭야 등 바닷가 군현에서부터 북하까지 운송하게 하니, 대략 삼십 종의 곡식을 실어야 한 석이 도착했습니다. 남자는 힘써 농사지어도 먹을 것이 부족하고, 여자는 길쌈을 하여도 장막을 만들 천이 부족했습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고아와 늙은이, 약한 자들이 서로 살릴 수 없었고, 길에서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아, 천하 사람들이 이로부터 진나라를 배반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황제가 천하를 평정하고 변경에서 땅을 개척할 때, 흉노가 대곡 밖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치려 했습니다. 어사 성진이 간하기를, ‘안 됩니다. 흉노의本性은 짐승처럼 모이고 새처럼 흩어져, 그들을 쫓는 것은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의 성대한 덕으로 흉노를 치는 것은, 신은 개인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고황제는 듣지 않고 북쪽으로 대곡까지 진군하여, 과연 평성에서 포위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황제는 크게 후회하여 유경을 보내 화친의 맹약을 맺게 하고, 그제야 천하에서 전쟁이 그쳤습니다. 그러므로 병법에 이르기를, ‘십만 군대를 출동시키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한다.’ 하였습니다. 진나라는 항상 많은 백성을 모으고 수십만 군대를 노출시켜, 비록 적군을 섬멸하고 장수를 베고 선우를 사로잡는 공이 있더라도, 깊은 원한을 맺기에 충분할 뿐, 천하의 소모를 보상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위로는 부고를 비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피폐하게 하여 외국에 잠시 쾌감을 얻는 것은, 완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저 흉노는 제압하기 어려운 것이 한 시대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둑질과 침략을 업으로 삼으니, 천성이 본래 그렇습니다. 위로 우, 하, 은, 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본래 그들을 구속하여 다스리지 않았고, 금수처럼 기를 뿐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약 위로 우, 하, 은, 주의 통치 경험을 본받지 않고, 가까운 시대의 실책을 본받는다면, 이것이 신이 가장 걱정하는 바이자 백성들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더구나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고통스러우면 생각이 바뀝니다. 이에 변경의 백성들은 피폐하고 괴로워져 이심을 품고, 장수와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며 외인과 결탁하므로, 위타와 장함이 그들의 사사로운 마음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 진나라의 정령이 행해지지 못한 까닭은 권력이 이 두 사람에게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득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주서》에 이르기를, ‘안위는 정령을 발하는 데 달려 있고, 존망은 누구를 쓰는 데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이 일을 자세히 살피시고, 조금 마음을 기울여 깊이 생각하소서.”
이때 조나라 사람 서악과 제나라 사람 엄안이 모두 당시의 일에 대해 상소를 올려 각각 한 가지 일을 말했다. 서악이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화환은 토붕(土崩)에 있고, 와해(瓦解)에 있지 않으니, 고금이 모두 같습니다. 무엇을 토붕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진나라 말년의 경우가 이것입니다. 진섭은 천승지국의 존귀한 지위도 없었고, 한 자 땅의 봉지도 없었으며, 자신은 왕공대인의 명문가 후손도 아니었고, 마을의 명성도 없었으며, 공자, 묵자, 증자의 현명함도 없었고, 도주공, 의돈의 부유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궁벽한 마을에서 일어나 창자루를 들고, 팔을 걷어붙이며 크게 외치자 천하 사람들이 바람처럼 호응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백성들이 곤궁한데 군주가 돌보지 않고, 아래에서 원망하는데 위에서 알지 못하며, 풍속이 이미 무너졌는데 정사가 닦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진섭이 의지한 바입니다. 이것을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화환은 토붕에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와해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 초, 제, 조의 군대가 이 경우입니다. 일곱 나라가 대역을 도모하여 모두 만승의 군주라 칭하며 수십만 군대를 거느렸고, 위세는 그들의 경내를 엄격히 다스리기에 충분했으며, 재물은 그들의 사민을 격려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한 치, 한 자의 땅을 빼앗지 못하고, 오히려 중원에서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의 권력이 평민보다 가볍거나 군대가 진섭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때 선제의 은덕이 쇠퇴하지 않았고, 고토에 편안하고 풍속을 즐기는 백성이 많았으므로, 제후들은 외부의 원조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와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화환은 와해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로써 본다면, 천하에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있다면, 비록 평민 중의 곤궁한 사람이라도 먼저 난을 일으켜 천하를 해칠 수 있으니, 진섭이 그렇습니다. 하물며 삼진의 군주가 아직 존재할 수도 있겠습니까! 천하가 비록 크게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비록 강대한 나라와 강력한 군대가 있더라도 몸을 돌릴 틈도 없이 사로잡히니, 오, 초, 제, 조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군신과 백성이 능히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경우는 안위의 명확한 관건이니, 현명한 군주가 마땅히 유의하여 깊이 살펴야 할 바입니다.”
근래 관동(關東)의 오곡이 풍년들지 못하고, 농사 형편이 회복되지 않아 백성 대다수가 곤궁에 빠졌습니다. 여기에 변경의 전쟁까지 겹쳐, 이치대로 헤아려 관찰해 보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 곳을 잃게 될 형편입니다. 편안하지 못하면 쉽게 동요합니다. 쉽게 동요하는 것이 바로 토붕(土崩)의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홀로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을 살피고, 안위의 관건을 밝혀 조정의 정치를 닦아 아직 형성되지 않은 화근을 없앱니다. 그 요점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바라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강대한 나라와 강성한 군대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들짐승을 쫓고 새를 쏘며, 유원(苑囿)을 넓히고 방탕하게 구경하며, 달리기를 극진히 즐기셔도 편안히 지내실 수 있습니다. 금석사죽(金石絲竹)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장막 속의 은밀한 일과 배우와 광대의 웃음이 앞에서 끊이지 않아도 천하에 오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명성(名聲)이 어찌 반드시 상탕(商湯)이나 주무왕(周武王) 같아야 하며, 풍속이 어찌 반드시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 때와 같아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는 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 타고난 성명(聖明)과 너그럽고 후한 인자함의 자질을 지니셨으니, 진실로 천하를 사업으로 삼으신다면 상탕과 주무왕의 명성을 어렵지 않게 따를 수 있고, 성왕과 강왕의 풍속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확립되면, 그런 뒤에 존귀하고 안온한 실질 위에 처하여 당세에 명성을 드날리고 널리 칭송을 받으며, 천하를 가까이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신복시키며, 은덕을 여러 대에 걸쳐 성대히 남기시어, 남면하여 병풍을 등지고 소매를 걷어 왕공들과 읍양(揖讓)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폐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제 듣건대 왕업을 도모하여 비록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최소한도는 반드시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안정되면, 폐하께서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시며, 무엇을 하여 이루지 못하시며, 무엇을 정벌하여 굴복시키지 못하시겠습니까!
엄안(嚴安)이 상소하여 말했습니다.
제 듣건대 주(周)나라는 천하를 소유하여 그 다스림이 삼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성왕과 강왕 때가 가장 번성하여 형벌을 사십여 년 동안 놓아두고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쇠약해질 때에도 또한 삼백여 년을 지속하였으므로 오패(五霸)가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오패는 항상 천자를 도와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며, 포악한 자를 주벌하고 간사한 것을 금지하여 천하를 바로잡고 천자를 높였습니다. 오패가 죽은 뒤에는 성현(聖賢)한 사람이 이어지지 못하여 천자는 외롭고 약해져서 호령을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제후들이 제멋대로 횡행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고, 사람이 많은 자가 적은 자를 억압하여, 전씨(田氏)가 제(齊)나라를 찬탈하고, 육경(六卿)이 진(晉)나라를 분할하여 열국(列國)으로 병립하였으니, 이때가 백성들이 고통받기 시작한 때입니다. 이에 강한 나라는 공벌(攻伐)에 힘쓰고, 약한 나라는 방비를 준비하여, 합종연횡(合縱連橫)하며 전차가 달리고 수레 굴대가 서로 부딪쳐, 갑옷과 투구에 이(虮虱)가 생기고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진왕(秦王)에 이르러 천하를 잠식(蠶食)하고 전국(戰國)을 병합하여, 칭호를 황제(皇帝)라 하고 천하의 정치를 주관하였습니다. 제후의 성을 헐고 그 병기를 없애 종정(鐘鼎)과 종가(鐘架)를 주조하여 다시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광대한 백성들이 전국 시대의 고난을 면하고 성명(聖明)한 천자를 만나, 사람마다 모두 스스로 새 삶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진(秦)나라가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부역을 줄이고 인의(仁義)를 중히 여기며 권력과 이익을 가볍게 하고, 돈후(敦厚)함을 숭상하고 지혜와 교활함을 얕잡아 보며, 풍속을 바꾸고 교화를 천하에 행하였다면, 대대(代代)로 반드시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진나라는 이러한 기풍을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옛 습속을 답습하여 지혜와 교활함과 권력과 이익을 숭상하는 자를 등용하고, 돈후하고 충성스럽고 미더운 자를 물리쳤습니다. 법령은 가혹하고 정치는 각박하여 아첨하는 자가 많아졌으며, 황제는 날마다 칭송하는 말만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교만해졌습니다. 해외에 위엄을 떨치고자 하여, 이에 몽염(蒙恬)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흉노(匈奴)를 쳐서 땅을 열고 변경을 넓혀 북하(北河)에 주둔시키고, 수레와 배로 양식을 실어 뒤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또 위도수(尉屠睢)를 보내 누선지사(樓船之士)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치고, 감록(監祿)을 보내 수로를 파서 양식을 운반하게 하여 깊이 월(越) 땅으로 들어갔으나, 월인들은 도망쳤습니다. 세월이 오래 끌고 양식이 끊어져 부족해지자, 월인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진병(秦兵)이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진나라는 이에 위타(尉佗)를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월 땅에 주둔시켰습니다. 그때 진나라의 화근은 북쪽으로 호인(胡人)과 맺어지고, 남쪽으로 월인과 얽혀, 무용지지(無用之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아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을 지속하는 동안 성년 남자는 갑옷을 입고 싸웠고, 성년 여자는 물자를 운반하여 고통스러워 살 수가 없어 길가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잇따랐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진(陳) 땅에서 일어나고, 무신(武臣)과 장이(張耳)가 조(趙) 땅에서 일어나고, 항량(項梁)이 오(吳) 땅에서 일어나고, 전담(田儋)이 제(齊) 땅에서 일어나고, 경구(景駒)가 영(郢) 땅에서 일어나고, 주시(周市)가 위(魏) 땅에서 일어나고, 한광(韓廣)이 연(燕) 땅에서 일어나니, 궁산심곡(窮山深谷)의 호걸들이 함께 일어나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후(公侯)의 후손도 아니고 장관(長官)의 관리도 아니었습니다. 털끝만한 권세도 없이 거리와 골목에서 일어나 창자루를 잡고 시세에 응하여 모두 움직였으며, 도모하지 않고도 함께 일어나고 약속하지 않고도 함께 모여, 땅을 넓히고 영토를 밀어 나아가 패왕(霸王)이라 일컫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시세와 교화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진나라는 존귀하기가 천자가 되고 부유하기가 천하를 소유하였으면서도, 세통(世統)을 끊고 제사(祭祀)를 중지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다루는 데 지나친 해악입니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쇠약함에서 잘못을 저질렀고, 진나라는 강함에서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바꿀 수 없는 화근입니다.
지금 남이(南夷)를 초무(招撫)하여 야랑(夜郎)이 조공하게 하고, 강백(羌僰)을 항복시키며, 예주(濊州)를 빼앗고, 성읍(城邑)을 세우며, 흉노(匈奴) 깊숙이 들어가 그 용성(龍城)을 불태우려 하여, 논의하는 자들은 이를 아름답게 여깁니다. 이는 신하들의 이익일 뿐, 천하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중원(中原)에는 개 짖는 소리의 놀라움도 없는데, 밖에서는 먼 변방을 방비하는 폐해를 입어 나라를 피폐하게 하고 백성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무궁한 욕망을 따르고 한때의 쾌락을 펴며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화근이 엮여 풀리지 않고 전쟁이 그쳤다가 다시 일어나 가까운 사람은 근심하고 먼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은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에서 갑옷을 단조하고 칼날을 갈며, 화살대를 바로잡고 활시위를 쌓아두며, 군량을 운반하기를 그칠 때가 없으니, 이는 천하가 함께 근심하는 일입니다. 전쟁이 오래되면 변란이 생기고, 일이 번거로워지면 걱정이 생깁니다. 지금 외군(外郡)의 지방은 어떤 것은 거의 천 리에 이르고 수십 개의 성이 있으며, 산천의 형세가 통제할 만하고 토지가 관할할 만하며, 곁에서 제후(諸侯)를 위협하니, 이는 공실(公室)의 이익이 아닙니다. 위로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망한 까닭을 보건대, 공실이 미약하고 약해진 탓이며, 아래로 진(秦)나라가 망한 까닭을 보건대, 법령이 가혹하고 각박하며 욕심이 너무 커서 그칠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수(郡守)의 권력은 육경(六卿)의 중요함에 비할 바가 아니며, 지방은 거의 천 리로서 가항(街巷)의 자본에 비할 바가 아니며, 갑옷과 병기(兵器)의 장비는 창자루의 작용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만세(萬世)의 변고를 만난다면,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소문이 천자에게 올려지자, 천자가 세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어찌하여 이리도 늦게 만나는가!" 이에 황제가 곧 주보언(主父偃), 서락(徐樂), 엄안(嚴安)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번 불려가 상소하여 정사를 논의하였고, 조서를 내려 주보언을 알자(謁者)로 삼고 중대부(中大夫)로 승진시켰습니다. 일 년 사이에 주보언은 네 번 승진했습니다.
주보언이 황제에게 권하여 말했습니다. "옛날 제후의 봉지는 백 리를 넘지 않아, 강하고 약한 형세를 통제하기 쉬웠습니다. 지금 어떤 제후는 수십 개의 성이 이어진 땅을 소유하고, 토지는 사방 천 리에 이르러, 평소에는 사치하고 방탕하여 법을 어기기 쉽고, 위급할 때에는 그 강대한 세력을 이용하여 함께 반역하여 경사(京師)를 칩니다. 지금 만약 법령에 따라 그 봉지를 삭감하면, 반역의 조짐이 싹틀 것이니, 지난날 조조(晁錯)의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는 어떤 이는 열 명이 넘는데, 오직 적장자(嫡長子)만이 작위를 이어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골육지친(骨肉之親)이면서도 한 자의 땅도 하사받지 못하니, 인효(仁孝)의 도리를 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제후에게 명하여 은덕을 널리 베풀어 땅을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후(侯)로 봉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사람마다 모두 자기가 바라는 바를 얻어 기뻐하고, 폐하께서 은덕을 베푸시면서도 실제로는 제후의 나라를 분할하여, 삭감하지 않고도 그 세력이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이에 황제가 그의 계책을 따랐습니다. 주보언이 또 권하여 말했습니다. "무릉(茂陵)이 막 설치되었으니, 천하의 호걸(豪傑)들과 겸병(兼倂)하는 집안, 백성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모두 무릉으로 옮기면, 안으로는 경사를 충실하게 하고, 밖으로는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을 없앨 수 있으니, 이른바 주살하지 않고도 해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황제가 또 그의 계책을 따랐습니다.
위황후를 높여 세우고, 연왕 유정국의 은밀한 죄를 폭로한 일에 주보언은 공로가 있었다. 대신들은 그의 말재주를 두려워하여 그에게 뇌물로 바친 재물이 천 금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주보언에게 권하며 말했다. “그대는 너무 횡포합니다.” 주보언이 말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 머리를 묶고 유학한 지 사십여 년, 뜻을 얻지 못하여 부모는 나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고, 형제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렸소. 내가 곤궁했던 날이 오래되었소. 게다가 대장부가 살아서 오정(五鼎)의 녹을 누리지 못한다면, 죽을 때 오정에 삶기는 형벌을 받는 것이 좋겠소. 나는 해가 지려 하고 길은 아직 먼 상황이라, 거꾸로 걷고 상식을 거스르며 행동하는 것이오.”
주보언은 삭방(朔方)의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며, 밖으로는 황하가 험준한 지세를 이루고, 몽념이 그곳에 성을 쌓아 흉노를 몰아냈으며, 안으로는 군량 수송과 수성(戍守) 및 조운(漕運)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어, 중국의 강토를 넓히고 흉노를 멸망시키는 근본이 된다고 극력 진언했다. 황상이 그의 상주문을 보고 공경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편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공손홍이 말했다. “진나라 때 일찍이 삼십만 명을 징발하여 북하성(北河城)을 쌓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했습니다.” 주보언이 그 편리함을 극력 진술하자, 황상은 결국 주보언의 계책을 채택하여 삭방군을 설치했다.
원삭 2년, 주보언이 제왕 유차창이 궁중에서 음란하고 방탕하며 행실이 간사하다고 아뢰자, 황상은 주보언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이 제나라에 도착하자, 그의 형제와 빈객들을 모두 불러 오백 금을 나누어 주며 그들을 꾸짖어 말했다. “내가 가난했을 때 형제들은 의복과 음식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내가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소. 지금 내가 제나라 재상이 되자, 여러분 중 어떤 이는 천 리 밖에서 나를 맞이하러 왔소. 나는 여러분과 관계를 끊겠소. 다시는 내 문에 들어오지 마시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제왕이 누이와 간통한 일을 가지고 제왕을 자극했다. 제왕은 결국 죄를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연왕처럼 사형을 당할까 두려워 자살했다. 주관하는 관리가 이 일을 보고했다.
주보언이 처음 서민이었을 때, 일찍이 연나라와 조나라를 유람했는데, 그가 귀하게 된 후 연왕의 일을 폭로했다. 조왕 유팽조는 그가 나라의 화근이 될까 두려워하여 상소로 그의 은밀한 일을 폭로하려 했으나, 주보언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 주보언이 제나라 재상이 되어 함곡관을 나가자, 조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 상소하여, 주보언이 제후들의 뇌물을 받아 제후의 자제들이 대부분 후작에 봉해지게 되었다고 고발했다. 제왕이 자살하자, 황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주보언이 제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했다고 여겨 그를 소환하여 사법 관리에게 심문하게 했다. 주보언은 제후들의 금전을 받은 것은 인정했지만, 실제로 제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황상이 그를 죽이지 않으려 할 때, 이때 공손홍이 어사대부가 되어 말했다. “제왕이 자살하여 후사가 없고, 봉국이 폐지되어 군이 되어 한나라에 귀속되었으니, 주보언이 본래 원흉입니다.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으시면, 천하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어렵습니다.” 이에 주보언을 멸족시켰다.
주보언이 한창 귀하고 총애를 받을 때, 빈객이 천 명에 이르렀으나, 그가 멸족되어 죽자 아무도 거둬 장사 지내지 않았고, 오직 효현 사람 공거(孔车)가 그를 거둬 장사 지냈다. 천자는 후일에 이 일을 듣고, 공거를 충성스럽고 덕망 있는 장자(長者)라고 여겼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손홍은 비록 덕행과 도의를 닦았지만, 또한 시기를 만났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팔십여 년, 황상이 바야흐로 유학을 동경하며 현능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유학을 널리 펴려 하니, 공손홍이 먼저 발탁된 사람이다. 주보언이 집권했을 때 여러 공경들이 모두 그를 칭송했으나, 그의 명성이 무너지고 몸이 죽임을 당하자, 사대부들은 또 다투어 그의 죄악을 논했다. 슬프도다!
태황태후가 대사도와 대사공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듣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요체는 검소함에 있다. 《효경》에 이르기를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순종하게 하는 것은 예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고, ‘예에 있어서는 사치하기보다 차라리 검소함을 취하라’고 했다. 옛날 관중이 제환공을 도와 제후들 사이에서 패자가 되어 아홉 번 제후를 모으고 한 번 천하를 바로잡은 공로가 있었으나, 공자는 그가 예를 모른다고 말했으니, 이는 그가 지나치게 사치하여 임금과 견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라 우임금은 낮고 작은 궁실에 살고 거친 옷을 입었으나, 후세의 성인들은 그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정치가 흥하고 덕행이 훌륭함은 검소함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검소함으로 백성을 교화하면, 존비의 질서가 확립되고, 골육 간의 은정이 친밀해지며, 쟁송의 근원이 가라앉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형벌이 쓰이지 않게 되는 근본일 것이다.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공은 백관의 표율이요, 만민의 모범이다. 곧은 기준을 세우지 않고 굽은 그림자를 얻을 수는 없다. 공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네가 올바른 길로 가면, 누가 감히 올바른 길로 가지 않겠는가’라고. ‘선한 사람을 등용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서로 권면하게 된다’고.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보좌하는 대신이 몸소 검소하게 행동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도의를 중히 여겨, 명백하고 뚜렷한 이는, 고(故) 승상 평진후 공손홍과 같은 이가 없었다.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베 이불을 덮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매 끼에 고기 반찬 하나만을 올렸다. 그가 아는 옛 친구나 교제하는 빈객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주어 남은 것이 없었다. 진실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검소를 절제하고 겉으로는 제도를 따랐다. 급암이 그를 꾸짖어, 이 일이 비로소 조정에 알려졌으니, 이는 제도가 정한 기준보다 더 검소하여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덕행이 훌륭하면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니, 마음속으로는 사치하면서 겉으로는 검소한 체하여 명예를 얻으려는 자들과는 다르다. 그가 병으로 사직을 청하자, 효무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를 포상하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은 그대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생각을 줄이고 정신을 보양하며, 의약으로 보조하라’고 하여,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소와 술, 각종 베와 비단을 하사했다. 몇 달 후 병이 낫자, 계속 정사를 보았다. 원수 2년에 이르러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서 잘 마쳤다.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이가 없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공손홍의 아들 공손도가 작위를 계승하였으나, 후에 산양태수가 되어 법을 범하여 후작의 작위를 잃었다. 덕행을 표창하고 도의를 선양하는 것은, 풍속을 이끌고 교화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니, 이는 성왕의 제도요, 변하지 않는 도리이다. 공손홍의 후손 중에서 마땅히 작위를 계승할 자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고, 식읍 삼백 호를 내리며, 공거(公車)에 불러들여 이름을 상서(尚書)에게 보고하고, 짐이 친히 조정에 나아가 작위를 내리려 한다.”
반고가 칭송하여 말하기를: “공손홍, 복식, 아관은 모두 마치 기러기 날개가 점점 자라나지만 제비와 참새에게 곤란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돼지와 양 사이에 먼 발자취를 남겼으니, 만약 그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이러한 지위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때 한나라가 일어난 지 60여 년이 되어, 해내(海內)는 안정되고 부고(府庫)는 충실하였으나, 사방의 소수민족은 아직 귀순하지 않았고 제도에 결함이 많았다. 황제는 문무(文武)의 인재를 등용하려 하여, 그들을 마치 늦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찾았다. 처음에는 부들로 수레바퀴를 싸서 매승(枚乘)을 맞이하였고, 주보언(主父偃)을 보고는 탄식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우러러 동경하여, 기이한 선비들이 함께 나타났다. 복식(卜式)은 목축하는 일에서 발탁되었고, 상홍양(桑弘羊)은 장사치에서 승진되었으며, 위청(衛青)은 노비에서 분기하였고, 김일제(金日磾)는 항복한 포로에서 출신하였으니, 이 또한 예전에 담을 쌓거나 소를 기르던 무리들이었다. 한나라가 인재를 얻은 것은 이때가 가장 성하였다. 유아(儒雅)한 이로는 공손홍, 동중서, 아관이 있었고, 독실하게 행실을 닦은 이로는 석건, 석경이 있었으며, 질박하고 정직한 이로는 핍암, 복식이 있었고, 현인을 추천한 이로는 한안국, 정당시가 있었으며, 법률 조령을 제정한 이로는 조우, 장탕이 있었고, 문장을 지은 이로는 사마천, 사마상여가 있었으며, 익살스러운 이로는 동방삭, 매고가 있었고, 응대와 말재주를 가진 이로는 엄조, 주매신이 있었으며, 역법을推算한 이로는 당도, 낙하굉이 있었고, 음률을 조화시킨 이로는 이연년이 있었으며, 운용과 계책을 세운 이로는 상홍양이 있었고,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간 이로는 장건, 소무가 있었으며, 장수로는 위청, 곽거병이 있었고, 유명(遺命)을 받은 이로는 곽광, 김일제가 있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많아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세운 공업(功業), 제정한 제도, 전해 내려온 문장은 후대에 미칠 자가 없었다. 효선황제(孝宣皇帝)가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웅대한 기업(基業)을 계속 닦고, 또한 육예(六藝)를 강론하고 우수한 인재를 초빙하여 선발하였으며, 소망지(蕭望之), 양구하(梁丘賀), 하후승(夏侯勝), 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 윤갱시(尹更始)는 유학으로 나아갔고, 유향(劉向), 왕포(王褒)는 문장으로 현달하였다. 장상(將相)으로는 장안세(張安世),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邴吉), 우정국(于定國), 두연년(杜延年)이 있었으며, 백성을 다스린 이로는 황패(黃霸), 왕성(王成), 공수(龔遂), 정홍(鄭弘), 소신신(邵信臣), 한연수(韓延壽), 윤옹귀(尹翁歸), 조광한(趙廣漢) 등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모두 공적이 있어 후세에 기록되었다. 이들 명신(名臣)을 낱낱이 헤아려 보면, 또한 위의 사람들에 버금갈 뿐이다.”
평진후(平津侯)라는 이 큰 유학자는 만년에야 시기를 만났다. 겉으로는 너그럽고 검소하게 보였으나, 마음속에는 시기심을 품었다. 총애를 받아 영화로운 작위를 누리며, 몸소 지체(支體)와도 같았다. 주보언(主父偃)은 추은령(推恩令)을 시행하여, 때를 살펴 법도를 세웠다. 살아서는 오정(五鼎)의 밥을 먹었으나, 죽은 뒤에는 시세(時勢)에 좀먹힌 것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