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 제53편 남월 열전
남월왕위타(尉佗)는 진정(真定) 사람으로 성은 조(趙)씨다. 진나라 때 이미 천하를 병합하고 양월(楊越)을 공격하여 평정한 뒤, 계림(桂林)·남해(南海)·상군(象郡)을 설치하고, 귀양 간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월인(越人)과 섞여 살게 한 지 13년이 되었다. 위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 용천현(龍川縣)의 현령으로 임용되었다. 진이세(秦二世) 때에 이르러, 남해위(南海尉) 임오(任囂)가 병이 중하여 죽게 되자, 용천령 조타(趙佗)를 불러 말하였다.
“진승(陳勝) 등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었소. 진나라가 포악한 정치를 행하니 천하 백성이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항우(項羽)·유계(劉季)·진승·오광(吳廣) 등이 각각 주군(州郡)에서 군대를 모아 호랑이처럼 천하를 다투고 있소. 중원은动荡不安하여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고,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저마다 세력을 세우고 있소. 남해군은 변방에 치우쳐 있어, 내가 저 도적 군대가 이곳 땅을 침범할까 두렵소. 나는 군대를 일으켜 새로 닦은 길을 끊고 스스로 방비하며 제후들의 변고를 기다리려 했으나, 마침 병이 중해졌소. 게다가 번우(番禺)는 험준한 산세를 등지고 남해를 장벽으로 삼고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되고, 중원 사람들도不少 도움을 주고 있소. 이 또한 한 주(州)의 주인이 될 만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소. 군중의 장리(長吏)들은 함께 의논할 만한 자가 없어, 그대를 불러 이 일을 알리려는 것이오.”
즉시 임명 문서를 조타에게 주어 남해위의 직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임오가 죽은 뒤, 조타는 즉시 격문을 횡포(橫浦)·양산(陽山)·황계관(湟谿關)에 알리기를 “도적 군대가 장차 이르려 하니, 빨리 길을 끊고 병력을 모아 스스로 방어하라!”고 하였다. 이에 점차 법에 따라 진나라가 설치한 장리들을 주살하고, 자신의 당파를 시켜 군현의 관직을 대행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조타는 곧 군대를 내어 계림군과 상군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남월무왕(南越武王)이라 칭하였다.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중원 백성의 수고로움을 생각하여 조타를 그냥 두고 토벌하지 않았다.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육가(陸賈)를 보내어 형세에 따라 조타를 남월왕으로 세우고, 부절(剖符)을 나누어 통사(通使)하게 하며 백월(百越)을 어루만져 남월이 남쪽 변경의 근심이 되지 않게 하고, 장사국(長沙國)과 접경하게 하였다.
고후(高后) 시절, 유관 부서에서 남월이 변경 관시(關市)에서 철기를 사들이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조타가 말하였다.
“고제(高帝)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고 사자와 물자를 통하게 하셨는데, 지금 고후가 참언을 듣고 만이(蠻夷)를 차별하여 기물(器物)의 왕래를 끊었소. 이는 반드시 장사왕(長沙王)의 계책으로, 중원에 의지하여 남월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병합하여 자신의 영지로 삼아 공을 세우려는 것이오.”
이에 조타는 스스로 존호를 더하여 남월무제(南越武帝)라 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장사국의 변경 성읍을 공격하여 여러 현을 함락시킨 뒤 물러났다. 고후는 장군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를 보내어 조타를 치게 하였다. 마침 더위와 습기가 심하여 병사들에게 큰 역병이 돌아, 군대가 오령(五嶺)을 넘지 못하였다. 1년여가 지나 고후가 죽자, 한군(漢軍)은 곧 철병하였다. 조타는 이로 인해 군대로 변경에서 위세를 떨치고, 재물로 민월(閩越)·서구(西甌)·낙월(駱越)을 매수하여 그들을 복속시켜 부리게 하니, 강역이 동서로 1만여 리에 이르렀다. 이에 황옥거(黃屋車)를 타고 좌도기(左纛旗)를 세우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중원 황제와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효문제(孝文帝) 원년(기원전 179년), 조정에서 막 천하를 안정시키고, 사자를 보내 제후와 사방의 이적(夷狄)에게 자신이 대국(代國)에서 와서 즉위한 뜻을 알리고, 성대한 은덕을 선양하였다. 이에 조타를 위해 진정에 있는 부모의 무덤에 수묘(守墓)하는 백성을 두고, 해마다 제때 제사하게 하였다. 또 조타의 종형제(堂兄弟)를 불러들여 높은 관직과 후한 상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다. 조승상(丞相) 진평(陳平) 등에게 조칙을 내려 사자로 남월에 갈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니, 진평이 말하기를 “호치(好畤) 사람 육가(陸賈)는 선제(先帝) 때 일찍이 남월에 사신으로 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하고 남월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 기회에 조타가 스스로 제위에 오른 것을 꾸짖으며, 사자 한 명조차 보내어 보고하지 않은 것을 나무랐다.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남월왕이 매우 두려워하며 글을 올려 사죄하고 스스로 일컫기를 “만이(蠻夷)의 대장로(大長老) 신(臣) 타(佗)입니다. 이전에 고후가 남월을 격리하고 소원하게 하자, 신은 은밀히 장사왕이 참언으로 나를 해친 것이라 의심하였고, 또 멀리서 고후가 나의 종족을 모두 죽이고 선인의 무덤을 파서 불태웠다는 말을 듣고, 이에 자포자기하여 장사국의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은 지대가 낮고 습하며, 만이 가운데에 있어 동쪽의 민월은 수천 명에 불과하면서도 왕이라 칭하고, 서쪽의 구락(甌駱) 나라(裸國)도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습니다. 늙은 신이 감히 제호(帝號)를 도용한 것은 다만 잠시 즐기기 위한 것일 뿐, 어찌 감히 천왕(天王)께 알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길이 한(漢)의 번신(藩臣)이 되어 진공(進貢)의 직분을 지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에 나라 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내가 듣건대 두 마리의 수탉은 함께 설 수 없고, 두 명의 현인(賢人)은 같은 시대에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한나라 황제는 현명한 천자이다. 지금부터 제도(帝制)와 황옥거(黃屋車) 및 좌도기(左纛旗)를 없애라.” 하였다. 육가가 돌아와 보고하자, 효문제가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효경제(孝景帝) 때까지 남월왕은 신하를 칭하며 사람을 보내 조현(朝見)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남월왕은 국내에서는 여전히 몰래 원래의 제호와 명칭을 사용하였고, 천자에게 사신을 보낼 때는 왕이라 칭하며 조정의 명을 받들기를 제후와 같이 하였다.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에 죽었다.
조타의 손자 조호(趙胡)가 뒤를 이어 남월왕이 되었다. 이때 민월왕 추영(郢)이 군대를 일으켜 남월의 변경 성읍을 공격하자, 조호가 사람을 보내 상소하기를 “양월(兩越)은 모두 한의 번신(藩臣)이므로, 마음대로 군대를 일으켜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지금 민월이 군대를 일으켜 나를 침범하니, 내가 감히 마음대로 군대를 내지 못하고 오직 천자의 조칙(詔勅)으로 판단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천자가 남월의 인의(仁義)를 가상히 여겨 직분과 맹약을 잘 지킨다고 여겨, 이를 위해 군대를 내어 두 장군을 보내 민월을 토벌하게 하였다. 군대가 아직 오령을 넘지 못했는데, 민월왕의 동생 여선(餘善)이 추영을 죽여 항복하자, 이에 군대를 철수하였다.
천자는 장조(莊助)를 보내어 남월왕에게 조정의 뜻을 설명하게 하였다. 조호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천자께서 나를 위해 군대를 내어 민월을 토벌하셨으니, 나는 죽어도 은덕을 갚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태자 영제(嬰齊)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장조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막 침략을 당했으니, 사자는 먼저 돌아가소서. 나는 지금 밤낮으로 행장을 준비하여 입조하여 천자를 뵙겠소.” 하였다. 장조가 떠난 뒤, 남월의 대신들이 조호에게 간언하였다.
“한나라가 군대를 내어 추영을 주살한 것은, 또한 이로써 남월을 위협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선왕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천자를 섬김은 예절을 잃지 않는 데 있을 뿐, 중요한 것은 좋은 말에 이끌려 조현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조현하면 돌아올 수 없으니, 이는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이에 조호는 병을 핑계로 끝내 입조하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나 조호가 진실로 병이 중해지자, 태자 영제가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조호가 죽으니,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영제가 즉위한 뒤, 곧 선왕인 무제(武帝)의 옥새를 감추어 두었다. 영제가 장안(長安)에서 입조하여 시위할 때, 한단(邯鄲) 구씨(樛氏) 여자를娶 아내로 삼아 아들 조흥(趙興)을 낳았다. 즉위한 뒤에 글을 올려 구씨 여자를 왕후(王后)로, 조흥을 태자(太子)로 세워 줄 것을 청하였다. 한나라에서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영제를 완곡히 설득하여 입조하게 하였으나, 영제는 생살여탈권을 독단하고 제멋대로 행사하기를 좋아하여, 입조하면 강제로 한나라 법령을 따르게 되어 내지 제후와 동등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래서 병을 핑계로 고집하며 끝내 입조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 차공(次公)을 보내어 입조하여 시위하게 하였다. 영제가 죽으니,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하였다.
태자 조흥이 뒤를 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태후(太后)가 되었다. 태후는 아직 영제의 첩이 되지 않았을 때, 패릉(霸陵) 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와 사통한 적이 있었다. 영제가 죽은 뒤,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 한나라에서 안국소계를 보내어 남월에 가서 남월왕과 왕태후에게 입조하여 내지 제후와 동등하게 대우받도록 타일렀다. 또 변사(辯士) 간대부(諫大夫) 종군(終軍) 등을 보내어 뜻을 전하게 하고, 용사 위신(魏臣) 등으로 부족한 점을 보좌하게 하였으며,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이 군대를 거느리고 계양(桂陽)에 주둔하여 사자의 소식을 기다리게 하였다. 남월왕은 나이가 어리고, 태후는 중원 사람으로서 일찍이 안국소계와 사통하였는데, 이번에 그가 사자로서 또 그녀와 사통하였다. 남월국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많은 사람이 태후에게 붙지 않았다. 태후는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또한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하려 하여, 여러 차례 남월왕과 여러 신하에게 한나라에 귀속하기를 청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사자를 통해 상소하여, 내지 제후와 동등하게 대우해 주고, 3년에 한 번 조현하며, 변경의 관새(關塞)를 폐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천자가 이를 허락하고, 남월 승상 여가(呂嘉)에게 은인(銀印)을 주고, 내사(內史)·중위(中尉)·태부(太傅)의 인신(印信)도 주었으며, 나머지 관직은 스스로 설치하게 하였다. 남월의 기존 형벌인 경형(黥刑)과 이형(劓刑)을 폐지하고 한나라 법률을 채택하여, 내지 제후와 동등하게 하였다. 사자들은 모두 남월에 머물러 그들을 안정시켰다. 남월왕과 왕태후는 행장을 정리하고 후한 예물을 준비하여 입조할 준비를 하였다.
남월 승상 여가(呂嘉)는 나이가 매우 많았고, 세 대의 남월왕을 보좌했으며, 그의 종족 중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은 자가 70여 명이었다. 남자는 모두 남월왕의 딸과 혼인했고, 여자는 모두 남월왕의 형제나 종실에게 시집갔으며, 창오(蒼梧)의 진왕(秦王)과도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국내에서 지위가 매우 현저했고, 월인(越人)들은 그를 신뢰하여 많은 이들이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그의 인심은 남월왕을 능가했다. 남월왕이 상소하여 내속(內屬)을 청했을 때, 그는 여러 차례 간하여 남월왕을 막으려 했으나 남월왕이 따르지 않았다. 여가는 반역할 마음을 품고 여러 번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사신들은 모두 여가의 동향을 주시했지만, 형세가 급박하여 그를 주살하지는 못했다. 남월왕과 왕태후도 여가 등이 먼저 발난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한나라 사신의 위세를 빌려 여가 등을 주살하려고 모의했다. 사신들은 모두 동쪽을 향해 앉았고, 태후는 남쪽을 향해 앉았으며, 남월왕은 북쪽을 향해 앉았고, 승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앉아 술자리를 함께했다. 여가의 아우는 장수로 있어 군사를 거느리고 궁 밖을 지키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태후가 여가에게 말했다: “남월이 한나라에 귀속되는 것은 국가에 이로운 일인데, 승상은 불편하다고 여기니, 어찌 된 일인가?” 이로써 한나라 사신을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사신들은 망설이며 서로를 바라볼 뿐, 끝내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여가는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태후는 크게 노하여 창으로 여가를 찔러 죽이려 했으나, 남월왕이 태후를 막았다. 여가는 이에 나가서, 그의 아우의 병사들을 나누어 거처를 호위하게 하고, 병을 핑계로 남월왕과 한나라 사신을 보려 하지 않았다. 이어 은밀히 대신들과 함께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남월왕은 본래 여가를 주살할 뜻이 없었고, 여가도 이를 알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태후는 음란한 행실이 있어, 국인들이 그녀를 따르지 않았고, 그녀는 홀로 여가 등을 주살하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천자가 여가가 남월왕을 따르지 않고, 남월왕과 왕태후가 세력이 약해 제어하지 못하며, 한나라가 파견한 사신들도 나약하여 결단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자는 또 남월왕과 왕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귀속했으니 오직 여가만이 난을 일으킨다면, 병사를 일으켜 토벌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 장삼(莊參)에게 2천 명을 이끌고 남월에 사신으로 가도록 하려 했다. 장삼이 말했다: “만약 우호적으로 간다면 몇 사람이면 족하고, 만약 무력을 쓴다면 2천 명으로도 일을 이루기에 부족합니다.” 그는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천자는 이에 장삼을 파면했다. 협현(郟縣)의 장사이며 전 제북상(濟北相)이었던 한천추(韓千秋)가 분연히 말했다: “남월이 이렇게 좁은 땅이고, 또 남월왕과 왕태후가 내응이 있으니, 오직 승상 여가만이 해가 될 뿐입니다. 제가 용사 2백 명을 얻어 반드시 여가의 목을 베어 돌아오겠습니다.” 이에 천자는 한천추와 왕태후의 아우 추락(樛樂)을 보내 2천 명을 이끌고 남월 경내로 들어가게 했다. 여가 등은 이에 반역하여, 국내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왕은 젊습니다. 태후는 중원 사람이고, 또 한나라 사신과 음란하여 오직 한나라에 귀속하려는 마음뿐이며, 선왕의 모든 보물을 천자에게 바쳐 자신을 아첨하고,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장안에 간 후에는 그들을 노략하여 팔아 노비로 삼으려 합니다. 그녀는 오직 한때의 사욕만을 취할 뿐, 조씨의 국가를 돌보지 않고 자손 만대를 위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에 여가는 그의 아우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월왕과 왕태후 및 한나라 사신을 공격하여 죽였다. 또 사람을 보내 창오의 진왕과 각 군현에 알리고, 명왕(明王)의 장남이자 남월왕의 아내가 낳은 술양후(術陽侯) 조건덕(趙建德)을 왕으로 세웠다. 한천추의 군대는 남월에 들어간 후 몇 개의 작은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남월인들은 곧바로 길을 비켜주고 양식을 공급하다가, 번우(番禺)에서 40리 떨어진 곳에서 남월이 군사를 내어 한천추 등을 공격하여 모두 섬멸했다. 남월인들은 사람을 보내 한나라 사신의 부절을 상자에 담아 변방 요새에 두고, 경솔하고 거짓된 말로 사죄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내어 요해처를 지켰다. 이에 천자가 말했다: “한천추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군대 선봉 중에서 뛰어난 자였다.” 이에 그의 아들 한연년(韓延年)을 성안후(成安侯)로 봉했다. 추락의 누이는 왕태후로서 먼저 한나라에 귀속하기를 원했으므로, 그의 아들 추광덕(樛廣德)을 용항후(龍亢侯)로 봉했다. 이에 천자가 사면령을 내려 말했다: “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을 때, 제후들이 서로 공격했으며, 사람들은 신하가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만을 비난했다. 지금 여가, 조건덕 등이 반역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편안히 지내니, 내가 죄인들과 강회(江淮) 이남의 수군 누선군(樓船軍) 10만 명을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한다.”
원정 5년(기원전 112년) 가을, 위위 노박덕(路博德)이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계양(桂陽)에서 출발하여 회수(匯水)를 따라 내려갔고, 주작도위(主爵都尉) 양복(楊僕)이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예장(豫章)에서 출발하여 횡포(橫浦)를 따라 내려갔다. 원래 한나라에 귀속했던 두 명의 남월후(南越侯)가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려장군(下厲將軍)이 되어 영릉(零陵)에서 출발하여, 어떤 이는 이수(離水)를 따라 내려가고 어떤 이는 곧장 창오(蒼梧)에 이르렀다. 또 치의후(馳義侯)를 보내 파촉(巴蜀)의 죄인들을 이용하고 야랑(夜郎)의 군대를 징발하여 장가강(牂柯江)을 따라 내려가게 하니, 각로 군대가 모두 번우(番禺)에서 회합했다.
원정 6년(기원전 111년) 겨울, 누선장군이 정예 병사를 이끌고 먼저 심협(尋陝)을 함락하고 석문(石門)을 공파하여 남월의 배와 양식을 노획하고, 이어 승세를 타고 나아가 남월군의 예봉을 꺾고, 수만 명을 이끌고 복파장군을 기다렸다. 복파장군은 죄인들을 이끌고 길이 멀어 회합 기일을 놓쳐, 누선장군과 합류했을 때는 천여 명에 불과했으며, 이에 함께 나아갔다. 누선장군이 앞서 번우에 도착했다. 조건덕과 여가는 모두 성을 지키며 방어했다. 누선장군은 스스로 유리한 지세를 선택하여 동남쪽에 주둔했고, 복파장군은 서북쪽에 주둔했다. 마침 날이 저물었고, 누선장군이 남월인을 격파하고 성에 불을 질렀다. 남월인들은 평소 복파장군의 위명을 듣고 있었고, 날이 저물어 그의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복파장군은 이에 진영을 세우고 사신을 보내 남월인을 항복시키고 관인을 내려 주었으며, 다시 그들을 시켜 다른 이들을 항복시키게 했다. 누선장군은 힘껏 공격하여 불태우고 죽였지만, 오히려 적들을 복파장군의 진영으로 몰아넣었다. 새벽이 되자, 성 안의 남월인들은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여가와 조건덕은 이미 밤에 그들의 부속 수백 명을 이끌고 바다로 도망쳐 배를 타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복파장군은 또 항복한 남월의 귀인들을 통해 여가의 행방을 알아내어 사람을 보내 추포하게 했다. 원래 교위였던 사마 소홍(蘇弘)이 조건덕을 잡아 해상후(海常侯)로 봉해졌고, 남월의 낭관(郎官) 도기(都稽)가 여가를 잡아 임새후(臨蔡侯)로 봉해졌다.
창오왕 조광(趙光)은 남월왕과 동성(同姓)으로, 한나라 군대가 옴을 듣고, 또 남월 갈양현령(揭陽縣令) 사정(史定)이 스스로 결정하여 한나라에 귀속했다. 남월의 계림감(桂林監) 거옹(居翁)이 구락(甌駱)을 설득하여 한나라에 귀속하게 하니, 이 사람들 모두 후(侯)로 봉해졌다. 과선장군, 하려장군의 군대와 치의후가 징발한 야랑의 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이에 남월은 아홉 개의 군(郡)으로 설치되었다. 복파장군은 식읍이 더해졌고, 누선장군은 적을 격파한 공으로 장량후(將梁侯)로 봉해졌다.
위타(尉佗)가 처음 왕이 된 이후로 다섯 대를 전해져 93년 만에 남월국은 멸망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위타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임오(任囂)의 발탁 때문이었다. 마침 한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하여, 그는 제후로 봉해졌다. 융려후(隆慮侯)가 남월의 습열과 역병으로 퇴군하자, 위타는 이로 인해 더욱 교만해졌다. 구락이 서로 공격하여 남월도 동요했다. 한나라 군대가 변경에 이르자, 영제(嬰齊)가 입조하여 알현했다. 이후 남월이 멸망한 것은 화근이 추씨(樛氏) 여자에게서 시작되었고, 여가의 소충(小忠)이 위타로 하여금 후사가 없게 만들었다. 누선장군은 사욕을 방종하고 태만하며 오만하여 마음을 잃었고, 복파장군은 곤경을 만나 지혜가 더욱 늘어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성공과 실패의 전환은 마치 새끼줄을 꼬는 것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중원에서 영웅들이 다투어 제후들이 제어하지 못했다. 한나라 세력이 서쪽으로 발전하자, 남월은 남쪽에서 권력을 잡았다. 육가(陸賈)의 유세가 성공하여 위타가 제호(帝號)를 버렸다. 추태후가 입조하여 내속하자, 여가는 포악하고 흉악했다. 군신이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여, 결국 토벌되어 버림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