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에서 더 편하게 《사기》 앱: 전문 검색, 책갈피, TTS, 오프라인
테마
글자 크기 18
본기

은본기 제3

제 3 편

은나라 시조 이름은 설(契)이며, 그의 어머니는 간적(简狄)이라 하였는데 유융씨(有娀氏)의 딸이자 제곡(帝喾)의 둘째 부인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하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주워 삼켰는데, 이에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자라서 우(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웠다. 제순(帝舜)이 이에 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백성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오상(五常)의 윤리가 순조롭지 못하니, 그대는 사도(司徒)가 되어 공경히 오교(五教)를 펴되, 오교는 너그러움에 있느니라.” 하고, 그를 상(商) 땅에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唐尧), 우순(虞舜), 대우(大禹) 시대에 일어나 공업이 백성들 사이에 드러나 백성들이 이로 인해 안정되었다.

설이 죽자 아들 소명(昭明)이 즉위하였다.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相土)가 즉위하였다.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昌若)이 즉위하였다.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曹圉)가 즉위하였다. 조어가 죽자 아들 명(冥)이 즉위하였다. 명이 죽자 아들 진(振)이 즉위하였다. 진이 죽자 아들 미(微)가 즉위하였다. 미가 죽자 아들 보정(报丁)이 즉위하였다. 보정이 죽자 아들 보을(报乙)이 즉위하였다. 보을이 죽자 아들 보병(报丙)이 즉위하였다. 보병이 죽자 아들 주임(主壬)이 즉위하였다. 주임이 죽자 아들 주계(主癸)가 즉위하였다. 주계가 죽자 아들 천을(天乙)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바로 성탕(成汤)이다.

성탕(成汤) 때에 이르러, 설(契)로부터 탕(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번 도읍을 옮겼다. 탕이 처음에 박(亳)에 살면서 선왕의 옛 거처를 따라 《제고(帝诰)》를 지었다.

탕이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갈백(葛伯)이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이 비로소 그를 토벌하였다. 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물을 보면 자신의 형상을 알 수 있고, 백성의 상황을 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지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밝으십니다! 간언을 들을 수 있어야 도의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며, 선한 사람들은 모두 조정의 관직에 두어야 합니다. 힘쓰고 힘쓰소서!” 하였다. 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천명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겁게 벌주고 죽여서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하고 《탕정(汤征)》을 지었다.

이윤(伊尹)의 이름은 아형(阿衡)이다. 아형이 탕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없어, 유신씨(有莘氏)의 시집가는 노비가 되어 솥과 도마를 지고 다니며 요리하는 맛으로 탕을 설득하여 왕도를 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윤은 은자(隐士)였는데, 탕이 사람을 보내 초빙하고 맞이하여 다섯 번을 왕복한 뒤에야 비로소 따라가서 탕에게 고대 성왕과 아홉 군주의 일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탕이 그를 발탁하여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윤이 탕을 떠나 하나라로 갔다가, 뒤에 하나라를 싫어하여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 북문으로 들어가다가 여구(女鸠)와 여방(女房)을 만나 《여구(女鸠)》와 《여방(女房)》을 지었다.

탕이 밖으로 나가니 들판에서 어떤 사람이 사방으로 그물을 치고 축원하여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방에서 오는 것들이 모두 내 그물 안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탕이 말하기를 “아, 이렇게 하면 그것들을 모두 잡아들이는구나!” 하고는 곧 그물의 세 면을 없애고 축원하여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오른쪽으로 가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만이 내 그물 안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제후들이 이 일을 듣고 말하기를 “탕의 덕이 참으로 지극하여 금수에게까지 미치는구나.”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포악하고 정치가 음란하였으며, 제후 곤오씨(昆吾氏)가 난을 일으켰다. 탕이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제후들을 거느렸는데, 이윤이 탕을 따랐고, 탕이 직접 큰 도끼를 들고 곤오를 토벌하고 이어 하나라의 걸왕을 토벌하였다. 탕이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에게 고하노니, 모두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의 걸왕에게 죄가 많기 때문이다. 나도 너희 무리들이 하나라에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상제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하나라의 걸왕이 죄악이 많아 하늘이 그를 주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지금 너희 무리들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우리 무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우리의 농사를 폐하고 가혹한 정사를 행한다.’ 할 것이다. 너희들은 또 말하기를 ‘그에게 죄가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할 것이다. 하나라 왕은 무리들의 노력을 다 써버리고 하나라 나라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무리들은 게으르고 화목하지 않아 말하기를 ‘이 태양이 언제나 없어질까? 우리는 너와 함께 없어지기를 원한다!’ 하였다.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내가 반드시 가서 정벌할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나와 함께 하늘의 벌을 집행한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릴 것이다. 너희들은 믿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식언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맹세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 처자에게 벌을 주어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이 말로 군사들에게 경계하고 《탕서(汤誓)》를 지었다. 이에 탕이 말하기를 “내가 매우 용맹하다.” 하고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일컬었다.

하나라의 걸왕이 유융(有娀)의 옛 땅에서 싸움에 패하여 명조(鸣条)로 도망쳐 하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탕이 이어 삼종(三㚇) 나라를 토벌하여 그곳의 보옥을 노획하니, 의백(义伯)과 중백(仲伯)이 《전보(典宝)》를 지었다. 탕이 하나라를 이긴 뒤 하나라의 사직신(社神) 제사를 바꾸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하사(夏社)》를 지었다. 이윤이 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제후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여 탕이 곧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평정하였다.

탕이 돌아오는 길에 태권도(泰卷陶)에 이르러 중회(仲虺)가 고문(诰文)을 지었다. 이미 하나라의 운명을 폐하고 박(亳)으로 돌아와 《탕고(汤诰)》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삼월에 왕이 친히 동쪽 교외에 이르러 제후와 여러 군장들에게 경고하여 말하기를 ‘백성들에게 공로가 없지 않도록 하고, 너희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겁게 벌주고 죽여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 대우(大禹)와 고요(皋陶)가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하여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으므로 백성들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동쪽으로는 장강(长江)을 다스리고, 북쪽으로는 제수(济水)를 다스리고, 서쪽으로는 황하(黄河)를 다스리고, 남쪽으로는 회수(淮河)를 다스려 네 큰 강이 이미 잘 다스려지니 만민이 비로소 거처를 갖게 되었다. 후직(后稷)이 백성들에게 파종을 가르쳐 농업으로 온갖 곡식을 심게 하였다. 삼공(三公)이 모두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으므로 후손들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옛날 치우(蚩尤)와 그의 대부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상제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사실로 증명된다. 선왕의 가르침은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도의를 행하지 않으면 그의 봉국(封国)에 벼슬하지 말라. 너희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였다.” 이 말로 제후들에게 명령하였다. 이윤이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었고, 고단(咎单)이 《명거(明居)》를 지었다.

탕이 이에 역법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어 흰색을 숭상하고 조회 시간을 낮으로 정하였다.

탕이 죽자 태자 태정(太丁)이 아직 즉위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이에 태정의 아우 외병(外丙)을 세우니 이가 바로 제외병(帝外丙)이다. 제외병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외병의 아우 중임(中壬)을 세우니 이가 바로 제중임(帝中壬)이다. 제중임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자, 이윤이 이에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을 세웠다. 태갑은 성탕(成汤)의 적장손(嫡长孙)이니, 이가 바로 제태갑(帝太甲)이다. 제태갑 원년에 이윤이 《이훈(伊训)》, 《사명(肆命)》, 《조후(徂后)》를 지었다.

제태갑이 즉위한 지 3년이 되었으나 현명하지 못하고 포악하여 탕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덕을 무너뜨리므로, 이윤이 이에 그를 동궁(桐宫)으로 유배 보냈다. 3년 동안 이윤이 대리하여 정사를 주관하고 제후들을 접견하였다.

제태갑이 동궁에 거주한 지 3년 만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꾸짖어 선한 도리로 돌아오므로, 이윤이 이에 제태갑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고 정권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제태갑이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모두 은(殷) 나라에 귀부하고 백성들이 이로 인해 편안해졌다. 이윤이 그를 칭찬하여 이에 《태갑훈(太甲训)》 세 편을 지어 제태갑을 드높여 칭송하고 그를 태종(太宗)이라 일컬었다.

태종이 죽자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하였다. 제옥정(帝沃丁) 때에 이윤이 죽었다. 이윤을 박(亳)에 안장한 뒤, 고단(咎单)이 이에 이윤의 정사를 기록하여 《옥정(沃丁)》을 지었다.

옥정이 죽자 아우 태경(太庚)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태경(帝太庚)이다. 제태경이 죽자 아들 제소갑(帝小甲)이 즉위하였다. 제소갑이 죽자 아우 옹기(雍己)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옹기(帝雍己)이다. 은나라의 국운이 쇠퇴하여 어떤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제옹기가 죽자 아우 태무(太戊)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태무(帝太戊)이다. 제태무가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박(亳)에 한 쌍의 뽕나무와 닥나무가 조정에 함께 자라 하룻밤 사이에 두 아름이나 되는 굵기로 자랐다. 제태무가 매우 두려워하여 이척에게 물었다. 이척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요괴가 덕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제왕의 정치에 혹시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왕께서 마땅히 덕을 닦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태무가 그 말을 따르자 그 요괴 같은 나무가 곧 시들어 죽었다. 이척이 무함(巫咸)에게 태무를 칭송하였다. 무함이 왕가를 다스리는 데 뚜렷한 성과가 있어 《함애(咸艾)》와 《태무(太戊)》를 지었다. 제태무가 종묘에서 이척을 칭송하며 그를 신하로 대우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척이 사양하며 《원명(原命)》을 지었다. 은나라가 다시 번성하여 제후들이 모두 와서 귀부하였으므로 그를 중종(中宗)이라 일컬었다.

중종이 죽자 아들 제중정(帝仲丁)이 즉위하였다. 제중정이 도읍을 오(隞)로 옮겼다. 하단갑(河亶甲)이 상(相)에 거주하였다. 조을(祖乙)이 도읍을 형(邢)으로 옮겼다. 제중정이 죽자 아우 외임(外壬)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외임(帝外壬)이다. 중정 시기의 기록은 결락되어 온전하지 않다. 제외임이 죽자 아우 하단갑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하단갑(帝河亶甲)이다. 하단갑 때에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河亶甲가 죽고, 아들 제조을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조을이 즉위하자 은나라는 다시 흥성했다. 무현이 관직을 맡았다.

조을이 죽고, 아들 제조신이 즉위했다. 제조신이 죽고, 동생 와갑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와갑이다. 제와갑이 죽자, 와갑의 형인 조신의 아들 조정을 세웠으니, 이가 바로 제조정이다. 제조정이 죽자, 동생 와갑의 아들 남경을 세웠으니, 이가 바로 제남경이다. 제남경이 죽자, 제조정의 아들 양갑을 세웠으니, 이가 바로 제양갑이다. 제양갑 때에 은나라는 쇠퇴했다.

중정 이후로 적자를 폐하고 여러 형제의 아들들을 세웠는데, 이들 형제의 아들들이 때로는 서로 다투며 잇달아 세워져 아홉 대 동안 혼란스러웠고, 마침내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제양갑이 죽고, 동생 반경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반경이다. 제반경 때에 은나라는 이미 황하 이북에 도읍을 정했는데, 반경이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했으니, 이는 다섯 번째 천도였으며 고정된 처소가 없었다. 은나라 백성들은 탄식하며 서로 원망하고, 옮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반경이 이에 제후와 대신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옛날 선왕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가 함께 천하를 평정하여, 그 법도는 따를 만하다. 이를 버리고 힘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덕을 이루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박에서 도읍을 다스리고 탕의 정령을 시행하니, 이에 백성들이 이로써 편안해졌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성했다. 제후들이 조회하러 온 것은 그가 성탕의 덕을 따랐기 때문이다.

제반경이 죽고, 동생 소신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소신이다. 제소신이 즉위하자 은나라는 다시 쇠퇴했다. 백성들이 반경을 그리워하여 이에 《반경》 세 편을 지었다. 제소신이 죽고, 동생 소을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소을이다.

제소을이 죽고, 아들 제무정이 즉위했다. 제무정이 즉위한 후 은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적합한 보좌 신하를 찾지 못했다.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에게 맡겨, 이를 통해 국가의 민정과 풍속을 살폈다. 무정이 꿈에 성인을 얻었는데, 이름이 열이었다. 꿈에서 본 형상으로 여러 신하들을 대조해 보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을 시켜 교외 들판으로 가서 찾게 하여 부험에서 열을 발견했다. 당시 열은 노역하는 형벌을 받는 자로 부험에서 담을 쌓고 있었다. 무정에게 끌려와 보이니, 무정이 말하기를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와 이야기해 보니 과연 성인이어서 국상으로 발탁하니 은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부험을 그의 성씨로 삼아 부열이라 칭했다.

제무정이 성탕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다음 날 한 마리 꿩이 솥의 귀에 날아와 울자, 무정이 매우 두려워했다. 조기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먼저 정사를 밝히소서.”라고 하였다. 조기가 이에 왕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감찰하여 의를 기준으로 삼아, 주어진 수명은 길고 짧음이 있으나 하늘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그 수명을 끊는 것입니다. 백성 중에 덕을 따르지 않고 죄를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이미 명령을 내려 그들의 덕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아! 대왕께서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을 공경하면, 누구나 하늘의 후손이 아니랴, 일상적인 제사는 예법을 어기고 도의를 폐하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무정이 정사를 밝히고 덕정을 시행하니, 천하가 모두 매우 기뻐했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성했다.

제무정이 죽고, 아들 제조경이 즉위했다. 조기가 무정이 꿩의 상서로움으로 인해 덕을 닦은 것을 칭송하여 그의 묘호를 고종이라 정하고, 이에 《고종융일》과 《고종지훈》을 지었다.

제조경이 죽고, 동생 조갑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갑이다. 제갑은 음란하고 혼란하여 은나라가 다시 쇠퇴했다.

제갑이 죽고, 아들 제렴신이 즉위했다. 제렴신이 죽고, 동생 경정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경정이다. 제경정이 죽고, 아들 제무을이 즉위했다. 은나라가 다시 박도를 떠나 황하 이북으로 옮겼다.

제무을은 포악하고 무도하여, 나무 인형을 만들어 하늘이라 부르고, 이 인형과 노름을 하며 사람을 시켜 인형 대신 말을 두게 했다. 인형이 지면 그를 모욕했다. 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가득 채우고 하늘을 향해 활을 쏘며 이를 ‘천을 쏜다’고 일컬었다. 무을이 황하와 위수 사이에서 사냥하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 번개에 맞아 죽었다. 아들 제태정이 즉위했다. 제태정이 죽고, 아들 제을이 즉위했다. 제을이 즉위한 후 은나라는 더욱 쇠퇴했다.

제을의 장자는 미자계인데, 계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아 계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작은 아들은 신인데, 신의 어머니는 정후여서 신이 계승자가 되었다. 제을이 죽고, 아들 신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신이며, 천하 사람들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

제주는 타고난 총명이 뛰어나고 말재주가 민첩하며, 듣고 보는 것이 날카로웠다. 체력이 남달라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그의 지혜는 간언을 거절하기에 충분했고, 말솜씨는 잘못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재능을 자랑하고 천하에 명성을 떨치며, 모든 사람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는 술 마시고 즐기기를 좋아하며 부인을 총애했다. 특히 달기를 총애하여 달기의 말을 무조건 따랐다. 이에 악사 견에게 새로운 음란한 음악과 북리의 춤, 퇴폐적인 음악을 만들게 했다. 그는 세금을 무겁게 하여 녹대의 금고를 채우고 거교의 곡물 창고를 가득 채웠다. 개와 말, 각종 진기한 보물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채웠다. 더욱이 사구의 정원과 누대를 확장하고, 짐승과 새를 대량으로 잡아 그 안에 넣었다. 그는 귀신을 소홀히 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다. 사구에서 대규모로 유락과 모임을 열어 술로 연못을 가득 채우고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으며, 남녀를 벌거벗은 채로 그 안에서 쫓고 다니게 하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즐겼다.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품었으며, 제후들 중에도 배반하는 자가 있어, 주왕은 형벌을 가중하여 포락의 잔혹한 형벌을 만들었다. 그는 서백 창, 구후, 악후를 삼공으로 임명했다. 구후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다. 구후의 딸은 음란함을 좋아하지 않자, 주왕이 노하여 그녀를 죽이고 구후를 저민 고기로 만들었다. 악후가 이를 위해 극력 간쟁하며 말이 격렬해지자, 주왕은 또 악후를 죽여 육포로 만들었다. 서백 창이 이 일을 듣고 가만히 탄식했다. 숭후호가 이를 알고 주왕에게 고변하자,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서백의 신하 굉요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좋은 말을 구하여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이 이에 서백을 사면했다. 서백은 옥에서 풀려난 후 낙수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의 형벌을 폐지해 줄 것을 청했다. 주왕이 허락하고 그에게 활과 화살, 도끼와 월을 주어 정벌할 권한을 부여하고 서백으로 봉했다. 주왕은 또 비중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이익을 탐하여 은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주왕은 또 악래를 등용했다. 악래는 참소하고 남을 헐뜯기를 잘하여 제후들이 이로 인해 더욱 멀어졌다.

서백이 나라로 돌아와 은밀히 덕을 닦고 선정을 시행하자, 많은 제후들이 주왕을 배반하고 서백에게 귀부했다. 서백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주왕은 이로 인해 점차 권력을 잃었다. 왕자 비간이 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상용은 현인이었고 백성들이 그를 사랑했으나 주왕은 그를 폐출했다. 서백이 기국을 정벌하여 멸망시키자, 주왕의 신하 조이가 이를 듣고 주나라를 책망하며 두려워하여 급히 달려가 주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이미 우리 은나라의 천명을 끝내려 하여 큰 거북으로 점을 쳐도 조금도 길한 조짐이 없습니다. 이는 선왕이 우리 후손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왕께서 음란하고 포악하여 스스로 하늘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버려 편안히 음식을 누리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하늘의 성품을 헤아려 알지 못하고 상법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 백성 중에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어 그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하여 벌을 내리지 않으며, 천명이 어찌하여 아직 내리지 않는가?’라고 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주왕이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 천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조이가 돌아가서 말하기를 “주왕은 이미 간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서백이 죽은 후, 주무왕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맹진에 이르렀는데, 은나라를 배반하고 주나라와 회맹한 제후가 팔백 명이었다. 제후들이 말하기를 “주왕을 정벌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무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아직 천명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 이에 다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주왕(紂王)은 더욱 음란해져서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미자(微子)가 여러 번 간언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와 의논하고는 떠나버렸다. 비간(比干)이 말하였다: “신하된 자는 죽음으로써 간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강력히 주왕에게 간언하였다. 주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내 듣건대 성인의 마음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이에 비간의 가슴을 갈라 그 심장을 보았다. 기자(箕子)가 두려워하여 미친 척하며 노비가 되었고, 주왕이 또 그를 가두었다. 은(殷)나라의 태사와 소사는 이에 제사용 악기를 가지고 주(周)나라로 도망갔다. 주 무왕(周武王)이 마침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토벌하였다. 주왕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맞서 싸웠다. 갑자(甲子) 날, 주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주왕이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녹대(鹿臺)에 올라 자기 옥의(玉衣)를 입고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주 무왕이 이에 주왕의 목을 베어 흰 기에 매달았다. 달기(妲己)를 죽였다.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비간의 무덤에 흙을 더하여 봉분하고, 상용(商容)의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과 녹보(祿父)를 봉하여 은나라의 제사를 잇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반경(盤庚)의 치국 방략을 시행하게 하였다. 은나라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주 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후대에 와서 제호(帝號)를 낮추어 왕(王)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은나라 후대를 제후로 봉하여 주나라에 예속시켰다.

주 무왕이 세상을 떠난 후, 무경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그들을 주살하고, 미자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은나라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나는 《시경(詩經)》에 의거하여 설(契)의 사적을 편찬하고, 성탕(成湯) 이래로는 《서경(書經)》과 《시경》의 기록을 취하였다. 설은 자성(子姓)이며, 그의 후대가 각지에 분봉되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았으니, 은씨(殷氏), 내씨(來氏), 송씨(宋氏), 공동씨(空桐氏), 치씨(稚氏), 북은씨(北殷氏), 목이씨(目夷氏)가 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길, 은나라의 수레 제도가 훌륭하고, 흰색을 숭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