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회 묘 터를 도모하다 음험하여 역적을 낳다, 봄볕을 밟다 요염하여 간음을 일으키다
제101회 음흉하게 묘지를 도모하여 역적을 낳고 봄볕을 밟으며 요염하여 간음을 저지르다
채경이 무학에서 병법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지붕 모퉁이를 쳐다보던 그 관리를 추궁하니, 이 사람의 성은 나(羅)요 이름은 감(戩)이며, 조적은 운남군(雲南軍) 달주(達州) 사람으로, 현재 무학유(武學諭)의 직책에 있었다. 당시 채경은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차서 막 발끈하려던 참이었으나, 천자께서 행차하신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기에, 채경은 이 일을 접어두고 여러 관료들을 거느리고 성가를 맞이하여 무학으로 들어간 후, 절을 올리고 세 번 만세를 불렀다. 도군 황제께서 무예 강론을 마치셨을 때, 이때 무학유 나감이 채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먼저 아뢰었다.
“무학유 소신 나감이 만 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삼가 회서(淮西)의 강적 왕경(王慶)이 반란을 일으킨 형편을 성상께 아뢰나이다. 왕경이 회서에서 난을 일으킨 지 지금까지 5년이 되었사오나, 관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나이다. 동관(童貫)과 채유(蔡攸)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회서로 정벌하러 갔으나, 전군이 전멸하고 말았나이다. 그들은 처벌이 두려워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고, 폐하를 속여 군사들이 수토(水土)에 맞지 않아 잠시 군사를 멈추었다고 하여, 마침내 큰 화를 키우게 하였나이다. 왕경의 세력은 더욱 창궐하여, 지난달에는 또 신의 고향인 운안군(雲安軍)을 함락시키고, 약탈하고 간음하고 살육하여 그 참혹함을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려우며, 모두 여덟 개의 군주(軍州)와 여든여섯 개의 주현(州縣)을 점령하였나이다. 채경은 재상으로서 천자를 보필하는 몸이온데, 그 아들 채유가 이와 같이 군사를 전멸시키고 장수를 죽여 나라를 욕되게 하고 군대를 패배시켰사오나, 오늘 성가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도 의연히 윗자리에 앉아 병법을 논하며 큰소리치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병들고 마음이 미친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속히 채경 등 나라를 그르친 간신들을 베어 주시고, 장수를 선발하여 군대를 일으키시어 신속히 토벌하시어, 백성들을 도탄과 재앙에서 구원하시고, 사직을 끝없이 보존하시면, 신하와 백성의 다행이옵고, 천하의 다행이옵니다!”
도군 황제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크게 노하여, 채경 등이 사실을 숨긴 죄를 엄중히 꾸짖으셨다. 그러나 채경 등이 교묘한 말로 천자에게 둘러대어 아뢰는 바람에, 즉시 죄를 주지는 않으시고, 거가(車駕)를 돌리어 환궁하셨다.
이튿날, 또 박주 태수 후몽(侯蒙)이 경성에 이르러 조정의 발령을 기다리며, 상소를 올려 동관과 채유가 군사를 패배시키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직언하였다. 또 천거하여 아뢰었다.
“송강(宋江) 등은 재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사오며, 요(遼)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와서는 또 하북(河北)을 평정하였사오니, 지금 이미 개선하여 군사를 돌리고 있나이다. 현재 왕경이 창궐하오니,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시어 송강 등에게 먼저 포상을 내리시고, 이 군대로 하여금 회서를 정벌하게 하시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옵니다.”
휘종 황제께서 윤허하시고, 즉시 성지를 내려 성하원(省院)에 내려 송강 등의 관작(官爵)을 봉하고 상주는 일을 의논하게 하셨다. 성하원의 관원들이 채경 등과 의논하여 회주(回奏)하였다.
“왕경이 완주(宛州)를 함락시켰사오며, 어제 우주(禹州), 재주(載州), 내현(萊縣) 세 곳에서 급보를 알려 왔나이다. 그 세 곳은 동경(東京) 소속의 주현으로 신경(神京)에 가까우니, 폐하께서 진관(陳瓘), 송강 등에게 명령하시어 개선하여 경성으로 돌아오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군마를 통솔하여 별처럼 밤을 새워 우주 등지로 급히 구원하게 하소서. 신 등이 후몽을 행군참모(行軍參謀)로 천거하나이다. 나감은 평소에 전략(韜略)이 있사오니, 그를 후몽과 함께 진관의 군중(軍中)으로 보내어 부리게 하소서. 송강 등은 지금 토벌 중에 있사오니, 관직을 올려 주는 것이 편치 않사오니, 회서에서 개선하여 승전보를 올리기를 기다린 후에 따로 상과 봉작을 의논하옵소서.”
원래 채경은 왕경 그곳의 병사들이 강하고 장수들이 사나운 줄 알았기에, 동관, 양전(楊戩), 고구(高俅)와 의논하여 일부러 후몽과 나감을 진관에게 보내어, 송강 등이 싸움에 패하기만을 기다렸다가, 후몽과 나감이 아무리 도망가려 한들 하늘에라도 오를 터이냐? 그때야 한꺼번에 그물로 모두 잡지 못하겠는가 하여서였다. 이야기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이 네 간신들의 조의(條議)를 도군 황제께서 일일이 윤허하시고, 성지를 내려 칙서를 쓰게 하시고, 곧 후몽과 나감으로 하여금 조칙을 휴대하고, 또 상으로 내리는 금은, 비단 필, 포복, 의갑, 말, 어주(御酒) 등의 물건을 거느리고, 즉시 길을 떠나 하북으로 달려가 송강 등에게 유시(諭示)하게 하셨다. 또 해당 부서에 명하여 하북에서 새로 수복한 각 부주현(府州縣)에 결원된 정관(正官)과 좌이관(佐貳官)을 속히 천거하여 보충하고, 기한을 정하여 별처럼 밤을 새워 부임지로 달려가게 하셨다. 도군 황제께서 결단하심이 끝나자, 또 왕보(王黼)와 채유 두 사람이 황제를 권하여 간악(艮岳)으로 가서 즐기시게 하였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후몽이 조칙과 장수들에게 상줄 물건 등을 싣고, 삼십오 수레에 가득 채워 동경을 떠나 하북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길에서 별일 없이, 하루 이틀이 지나, 호관산(壺關山)과 소덕부(昭德府)를 지나 위승주(威勝州)에 이르렀는데, 성에서 이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서 송군(宋軍)이 적의 괴수를 압송해 오는 것을 만났다. 이는 송강이 먼저 개선(凱旋) 조칙을 받고, 마침 경영(瓊英)이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송강이 경영 모자(母子)와 섭청(葉清)의 정효(貞孝)와 절의(節義)에 관한 일, 원흉 적수를 사로잡은 공로, 그리고 교도청(喬道清), 손안(孫安) 등이 투항하여 천조(天朝)를 따른 일, 공이 있는 사람들을 낱낱이 상세히 기록하여 표문(表文)을 지어 조정에 주청(奏請)하였다. 곧 장청(張清), 경영, 섭청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적수를 압송하여 먼저 가게 하였다. 이에 장청이 앞으로 나아가 후참모(侯參謀) 및 나감과 서로 만나 인사를 마쳤다. 장청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급히 진안무(陳安抚)와 송선봉(宋先鋒)에게 알렸다. 진관과 송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였다. 후몽 등이 성지를 받들고 성 안으로 들어와 용정(龍亭)과 향안(香案)을 진열하였다. 진안무와 송강 이하 여러 장수들이 정제하게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자, 배선(裴宣)이 절을 올리라고 호령하였다. 절을 마치자, 후몽이 남쪽을 향하여 용정의 왼쪽에 서서 조서(詔書)를 읽었다.
후몽이 단조(丹詔)를 읽기를 마치자, 진관과 송강 등이 세 번 만세를 부르고, 두 번 절하며 사은(謝恩)을 마쳤다. 후몽이 금은, 비단 필 등의 물건을 가져다가 차례대로 명단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진안무와 송강, 노준의(盧俊義)에게는 각각 황금 오백 냥, 금 비단 열 필, 금 비단 포복 한 벌, 명마 한 필, 어주 두 병을 주고; 오용(吳用) 등 서른네 명에게는 각각 백금 이백 냥, 채단(彩緞) 네 필, 어주 한 병을 주고; 주무(朱武) 등 일흔두 명에게는 각각 백금 백 냥, 어주 한 병을 주었다. 나머지 금은은 진안무가 방법을 강구하여 채워서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마쳤다. 송강이 또 장청, 경영, 섭청에게 명하여 전호(田虎), 전표(田豹), 전표(田彪)를 압송하여 경성으로 가서 헌포(獻俘)하게 하였다.
공손승(公孫勝)이 와서 고하며, 형님께 오룡산(五龍山) 용신묘(龍神廟)의 오룡상(五龍像)을 수리할 것을 청하였다. 송강이 허락하여 공장(工匠)을 보내어 수리하고 소조(塑造)하게 하였다.
송강이 대종(戴宗)과 마령(馬靈)을 보내어 각 길의 수성 장수들에게 유시(諭示)하게 하되, 새 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곧바로 교대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경을 토벌할 것이라고 하였다. 송강이 또 며칠 동안 처리한 끝에, 각지의 새 관원들이 모두 도착하였고, 각 길의 수성 장좌(將佐)들이 군병을 통솔하여 잇따라 도착하였다. 송강이 흠상(欽賞)한 은냥을 나누어 주기를 마쳤다. 송강이 소양(蕭讓)과 김대견(金大堅)으로 하여금 석비(石碑)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마침 오월 오일 천중절(天中節)을 맞아, 송강이 송청(宋清)으로 하여금 큰 연회를 베풀어 태평을 축하하게 하였다. 진안무를 윗자리에 모시고, 새로 부임한 태수와 후몽, 나감 및 본주의 좌이관(佐貳官) 등이 그 다음 자리에 앉았고, 송강 이하로는 장청이 북경(北京)으로 간 자를 제외한 일백일곱 명과 하북에서 항복한 장수 교도청, 손안, 변상(卞祥) 등 열일곱 명이 정제하게 양옆으로 나누어 앉았다. 이에 자리에서 진관, 후몽, 나감이 송강 등의 공훈을 칭찬하였다. 송강, 오용 등은 세 지기(知己)의 후의에 감격하여, 어떤 이는 조정의 일을 논의하고, 어떤 이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술잔이 오가고 등불이 휘황하게 밤이 깊도록 마시다가 파하였다.
이튿날, 송강이 오용과 의논하여 군마를 정돈하고 주관(州官)들과 작별한 뒤, 위승주를 떠나 진관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추호도 침범함이 없었다. 백성들은 향화(香花)와 등촉(燈燭)을 들고 길에 이어져, 송강 등이 적적(賊敵)을 소탕해 주어 “우리 백성들이 다시 천일(天日)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며 감사하였다.
송강 등이 남쪽으로 정벌하러 간 이야기는 접어두고, 다시 ‘몰우전(沒羽箭)’ 장청이 경영 및 섭청과 함께 전호 등을 압송한 죄수 수레를 거느리고 이미 동경에 이르렀다. 먼저 송강의 편지를 숙태위(宿太尉)에게 전하고, 또 금주와 진기한 완석(玩石)을 보냈다. 숙태위가 이를 상황(上皇)께 전달하니, 천자께서 크게 가상히 여기시어 경영 모자의 정절과 효성을 칭찬하시고, 칙명을 내려 특별히 경영의 어머니 송씨(宋氏)를 ‘개휴정절현군(介休貞節縣君)’으로 추증(追贈)하시고, 해당 지방 관청으로 하여금 패루(牌樓)와 사묘(祠廟)를 세워 정절을 표창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경영을 ‘정효의인(貞孝宜人)’으로 봉하고, 섭청을 ‘정배군(正排軍)’으로 삼고, 흠상(欽賞)으로 은 오십 냥을 내려 그 의리를 표창하였다. 장청은 옛날 원래의 직책을 회복하였다. 또 세 사람에게 명하여 송강을 도와 회서를 정벌하게 하고, 공을 이루면 승진시켜 상을 주기로 하였다. 도군 황제께서 법사(法司)에 칙명을 내려 반적 전호, 전표, 전표를 저자거리로 압송하여 능지처참(凌遲處斬)하게 하셨다. 이에 경영이 부모의 초상화를 지니고 와서 감참관(監斬官)에게 고한 뒤, 구신(仇申)과 송씨의 초상화를 법장(法場) 가운데에 걸고, 상 앞에 탁자를 놓았다. 오시 삼각(午時三刻)이 되어 전호가 능지처참당한 후, 경영이 전호의 목을 탁자 위에 놓고 부모님께 피로 제사를 지내며 목 놓아 울었다. 이때 경영의 이 일은 동경(東京)에 이미 널리 퍼져, 그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섰는데, 경영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영이 제사를 마치고, 장청, 섭청과 함께 궐(闕)을 향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세 사람은 동경을 떠나 곧바로 완주(宛州)를 향하여 출발하여 송강의 왕경 정벌을 도우러 갔으니, 이 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독자 여러분, 말머리를 굳게 기억하고 귀담아들으시며, 왕경이 어릴 적부터 자라기까지의 일을 밝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왕경은 본래 동경 개봉부의 부배군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왕혁은 동경의 큰 부자로, 관청에 줄을 대고 송사를 부추기며 교활하고 간사한 짓을 일삼고 선량한 사람들을 모함하고 배척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조금씩 용납해 주었습니다. 그는 한 풍수사를 믿어 어떤 묘지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곳은 귀한 아들을 낳게 하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은 본래 왕혁의 친척 집안이 장사 지낸 곳이었는데, 왕혁이 풍수사와 공모하여 모함하였습니다. 왕혁이 나서서 그 집을 상대로 거짓 소장을 써서 고소하였고, 소송은 여러 해 동안 끌었으며, 그 집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왕혁을 당해내지 못하여 동경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후일 왕경이 반란을 일으켜 삼족이 모두 주살되었으나, 오직 이 집만은 먼 곳에 있어 관가에서 왕혁이 해를 입힌 사실을 조사해내어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왕혁이 그 묘지를 빼앗아 부모를 장사 지내고, 아내는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습니다. 왕혁이 꿈에 호랑이가 집 안으로 들어와 당 서쪽에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마리 사자가 달려들어 호랑이를 물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왕혁이 깨어나자, 아내가 곧 왕경을 낳았습니다. 그 왕경은 어릴 적부터 방탕하여, 열여섯 일곱 살이 되자 몸이 장대하고 힘이 세졌으나 글 읽기는 하지 않고, 오직 닭싸움과 말 타기, 창과 몽둥이 놀기만 좋아하였습니다. 왕혁 부부는 오직 왕경 하나만을 두어 몹시 사랑하고, 늘 잘못을 덮어주며 버릇없이 키웠기에, 자라서는 어찌 제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경은 도박에 돈을 쓰고, 창녀와 자고, 술을 마셨습니다. 왕혁 부부도 때때로 그를 훈계하였습니다. 왕경이 반항하는 성질이 발동하여 부모를 욕보였습니다. 왕혁은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내버려두었습니다. 육칠 년이 지나 집안 재산을 깡그리 탕진하고, 오직 타고난 재주 하나로 본부에서 부배군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돈이 조금만 생기면, 형제들과 함께 종일토록 술과 고기를 먹으며 놀다가,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주먹을 휘둘러 때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습니다.
하루는 왕경이 오경에 관아로 들어가 점고를 마치고 직무를 끝낸 뒤, 한가히 걸어 성남으로 나와 옥진포에서 놀았습니다. 이때는 휘종 정화 6년이었습니다. 중춘 날씨에 노닐던 사람들은 개미 떼 같고, 군마는 구름 같았습니다.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상원의 꽃이 피고 버들은 잠들었는데, 노니는 무리 속에 미인이 섞였네. 굴레 번쩍이는 말은 향기로운 들판에서 울고, 옥루의 사람은 살구꽃 하늘에 취했네. 왕경이 혼자 한참 놀다가, 그 포구 안 연못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아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주점에 가서 석 잔 마시고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습니다. 잠시 후, 연못 북쪽에서 열 명 남짓한 간판, 우후, 반당, 양모 등이 한 채의 가마를 에워싸고 왔는데, 가마 속에는 꽃다운 듯 아리따운 한 젊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경치를 보려고 죽렴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왕경은 여색을 좋아하여, 이러한 빼어난 여자를 보자 넋이 나갔으며, 그 간판과 우후들이 추밀 동관의 집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경은 멀찍이 가마를 따라 그 무리와 함께 간악에 이르렀습니다. 그 간악은 경성 동북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도군 황제가 쌓은 곳으로, 기이한 봉우리와 괴이한 바위, 고목과 진기한 새, 정자와 누각, 연못과 관사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바깥쪽에는 붉은 담장과 붉은 문이 있어 궁문과 같았고, 내시와 금군이 지키고 있어 보통 사람은 발끝도 문 앞에 대지 못하였습니다. 그 무리가 가마를 멈추고, 양모가 여자를 부축하여 가마에서 내리자, 곧장 간악문 안으로 아리땁고 요염하게 걸어 들어갔습니다. 문을 지키던 금군과 내시들이 모두 길을 비켜주며 그녀가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원래 그 여자는 동관의 아우 동섬의 딸이자, 양견의 외손녀였습니다. 동관이 그녀를 양녀로 삼아 자신의 딸로 기르며, 채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하였으니, 곧 채경의 손자며느리였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교수라 하였고, 나이는 열여섯이었습니다. 그녀는 동관에게 아뢰어, 천자가 이틀 동안 이사사 집에서 즐기고 있는 틈을 타 간악에 놀러 가고자 하였습니다. 동관이 미리 금군과 인부들에게 분부하였기에, 감히 막지 못한 것입니다. 그 교수가 들어간 지 두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왕경 그 놈은 멍하니 밖에서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져 동쪽 거리 주점에 가서 술과 고기를 좀 사서 급히 여섯 일곱 잔을 마시고, 그 여자가 갈까 두려워 계산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은전 이전짜리 한 덩이를 꺼내 점소이에게 던지며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계산하리라.” 왕경이 다시 간악 앞에 이르러 또 한참을 머물자, 마침 그 여자가 양모와 함께 가볍게 연꽃걸음을 옮기며 간악에서 나왔는데, 곧바로 가마에 오르지 않고 간악 바깥의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왕경이 다가가 그 여자를 보니, 참으로 빼어났습니다. 《혼강룡》 사(詞)가 증거입니다: 풍채가 빼어나 수려하니, 어찌 금옥 같은 방에 감출 수 있으랴? 앵두 같은 작은 입술, 가을 물 같은 두 눈동자. 어젯밤 갠 하늘에 초승달이 맑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 아침 애간장 끊어지게 작은 양주를 보았으랴. 향기롭고 우아한 혜란의 무리, 향기로운 소매는 아리따운 연꽃 같아, 두 마음속 원숭이는 달과 꽃갈고리에 이끌리네. 왕경이 좋은 곳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사슴처럼 뛰고 뼈가 녹고 힘이 빠져, 마치 눈사자가 불에 녹듯, 순간 반쪽이 녹아내렸습니다. 그 교수는 사람들 틈에서 곁눈질로 왕경의 용모를 보았습니다: 봉황의 눈에 짙은 눈썹은 그린 듯하고, 가는 수염에 흰 얼굴 붉은 빛이 도네. 정수리는 평평하고 이마는 넓으며 관골이 충만하고, 칠척 장신은 건장하고 튼튼하네. 남의 여자를 훔치고 꾀기에 능하며, 요염한 짓과 간음을 즐기네. 응시하며 사람들 앞에 우뚝 서 있으니, 준수하고 풍류가 끝이 없네. 그 교수는 왕경의 풍류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에게도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때 간판과 우후들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양모가 교수를 부축하여 가마에 오르니, 무리들이 에워싸고 동쪽과 서쪽을 돌아 산조문 밖의 악묘에 와서 향을 피웠습니다. 왕경이 또 악묘까지 따라갔는데, 사람이 산과 바다처럼 많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무리들이 동추밀 처소의 우후와 간판인 것을 보고 모두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그 교수가 가마에서 내려 향을 피우자, 왕경이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으나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또 시종들이 꾸짖을까 두려워, 거짓으로 묘지기와 친한 척하며 그를 도와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면서, 두 눈을 끊임없이 그 교수에게로 굴렸고, 교수도 눈을 자주 훔쳐보았습니다. 원래 채유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고 멍청하였습니다. 그 교수는 집에서 몇 번이나 중매쟁이의 말을 듣고 사실임을 알게 되어, 밤낮으로 억울함을 부르짖고 원망하였습니다. 오늘 왕경의 풍류와 준수를 보고, 그 작은 아가씨의 춘심도 움직였습니다. 그때 동부의 동우후 한 명이 이미 알아보고 배군 왕경임을 알았습니다. 동우후가 왕경의 뺨을 세게 때리며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집의 권속인가! 너는 개봉부의 군건에 불과한데, 네가 어찌 그리도 대담하여 여기서 비집고 다니느냐. 내가 상공께 말하여, 네 이 당나귀 대가리를 목 위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리라!” 왕경이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고 쥐처럼 도망쳐 묘문을 뛰쳐나와, 침을 뱉으며 소리쳤습니다: “쳇! 내가 어찌 이리도 어리석었는가! 두꺼비가 어찌 고니 고기를 먹겠는가!” 그날 밤 참고 화를 삼키며 부끄러운 얼굴로 집에 돌아갔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교수는 집에 돌아와서는 오히려 밤낮으로 생각하고, 시녀들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도리어 그 동우후에게 물어 왕경의 자세한 내력을 알게 하였습니다. 시녀가 어떤 설파와 친하여, 그를 통해 마발육이 되어, 남모르게 왕경을 후문으로 불러들여, 사람도 귀신도 모르게 교수와 간통하게 하였습니다. 왕경 그 놈은 기쁨에 넘쳐 종일토록 술을 마셨습니다.
세월은 흘러 석 달이 지나니, 바로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왕경이 어느 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본부 정배군 장빈 앞에서 실수를 저질러, 이 일이 퍼져 나가 마침내 동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동관이 크게 노하여, 죄를 찾아내어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이 일은 잠시 접어둡니다.
그리고 왕경은 이 일이 발각되어 감히 다시 동부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집에 한가히 앉아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오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 왕경이 긴 의자를 뜰에 내놓고 바람을 쐬다가, 막 집 안으로 들어가 부채를 잡으려는데, 그 의자 네 발이 움직이며 뜰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왕경이 꾸짖었습니다: “이상하다!” 오른발을 들어 의자를 향해 한 번 걷어찼습니다. 왕경이 소리쳤습니다: “아야, 괴롭다!” 차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그쳤을 터인데, 한 번 차자 재앙이 곧 닥쳤습니다. 바로 하늘은 뜻밖의 바람과 구름이 있고,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화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왕경이 이 의자를 차고 어찌하여 괴롭다 소리쳤는지, 다음 회에 풀리기를 기다리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