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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

진기22

제 22 편

《자치통감》 제100권 【진기(晉紀) 22】 을묘년(乙卯年)부터 기미년(己未年)까지, 모두 5년간의 기록이다.

봄, 정월, 전구지공(前仇池公) 양의(楊毅)의 동생 양송노(楊宋奴)가 그의 고모의 아들 양식왕(梁式王)을 시켜 양초(楊初)를 시해하였다. 양초의 아들 양국(楊國)이 양식왕과 양송노를 죽이고 스스로 구지공(仇池公)이 되었다. 환온(桓溫)이 표문을 올려 양국을 진북장군(鎮北將軍)·진주자사(秦州刺史)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2월, 전진(前秦)에 심한 메뚜기 재해가 발생하여 온갖 풀이 다 먹혀 없어지고, 소와 말이 서로의 털을 뜯어먹었다.

여름, 4월, 연왕(燕王) 모용준(慕容俊)이 화룡(和龍)에서 계성(薊城)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유주(幽州)·기주(冀州)의 백성들이 모용준이 동쪽으로 천도할 것이라고 여겨 서로 놀라며 각처에 모여 무리를 이루었다. 신하들이 토벌을 청하자, 모용준이 말했다. “이 소인들은 짐이 동쪽으로 순행하므로 서로 선동하여 난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이제 짐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자연히 안정될 것이니 토벌할 가치가 없다.”

난릉태수(蘭陵太守) 손흑(孫黑), 제북태수(濟北太守) 고주(高柱), 건흥태수(建興太守) 고옹(高瓮), 그리고 전진의 하내태수(河內太守) 왕회(王會), 여양태수(黎陽太守) 한고(韓高)가 모두 관할하는 군현(郡縣)을 거느리고 전연(前燕)에 항복하였다.

전진의 회남왕(淮南王) 부생(苻生)은 어릴 때부터 한쪽 눈이었으며, 성품이 난폭하였다. 그의 조부 부홍(苻洪)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내 듣자니 애꾸눈 아이는 눈물이 한 방울뿐이라는데, 정말이냐?” 하자, 부생이 노하여 비수를 뽑아 자기 몸을 찔러 피가 나게 하며 말했다. “이것도 한 방울의 눈물입니다.” 부홍이 크게 놀라 채찍으로 그를 때렸다. 부생이 말했다. “저는 태어나서 칼과 창에는 견디나 채찍질은 견디지 못합니다!” 부홍이 그의 아버지 부건(苻健)에게 말했다. “이 아들은 광포하고 패역하니 마땅히 일찍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가업을 망칠 것이다.” 부건이 부생을 죽이려 하였으나, 부건의 동생 부웅(苻雄)이 말렸다. “아이는 자라면 자연히 고쳐질 것이니, 어찌 이리 서두르십니까?” 부생이 자라서는 천균(千鈞)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고, 맨손으로 맹수와 싸웠으며, 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만큼 빨리 달렸고, 창술과 활쏘기에 당시에 비길 자가 없었다. 헌애태자(獻哀太子)가 죽자, 강황후(强皇后)가 작은아들 진왕(晉王) 부류(苻柳)를 세우려 하였다. 전진의 주 부건이 참문(讖文)에 “세 마리 양에 다섯 눈[三羊五眼]”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부생을 태자로 세웠다. 사공(司空)·평창왕(平昌王) 부청(苻菁)을 태위(太尉)로, 상서령(尚書令) 왕타(王墮)를 사공으로, 사례교위(司隸校尉) 양릉(梁楞)을 상서령으로 임명하였다.

요양(姚襄)의 부하들이 대부분 요양에게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자, 요양이 그들을 따랐다. 5월, 요양이 외황(外黃)에서 관군장군(冠軍將軍) 고계(高季)를 공격하였는데, 마침 고계가 죽어 요양이 진군하여 허창(許昌)을 점거하였다.

6월, 병자일(丙子日), 전진의 주 부건이 병상에 누웠다. 경진일(庚辰日), 평창왕 부청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궁(東宮)으로 들어가 태자 부생을 죽이고 스스로 서려 하였다. 당시 부생은 서궁(西宮)에서 병든 부건을 시중들고 있었는데, 부청은 부건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 동액문(東掖門)을 공격하였다. 부건이 변란을 듣고 단문(端門)에 올라 병사를 배치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무리들이 부건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며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여 흩어졌다. 부건이 부청을 붙잡아 그의 죄를 열거하고 죽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묻지 않았다.

임오일(壬午日), 대사마(大司馬)·무도왕(武都王) 부안(苻安)을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임명하였다. 갑신일(甲申日), 부건이 태사(太師) 어준(魚遵), 승상(丞相) 뇌약아(雷弱兒), 태부(太傅) 모귀(毛貴), 사공 왕타, 상서령 양릉, 좌복야(左僕射) 양안(梁安), 우복야(右僕射) 단순(段純), 이부상서(吏部尚書) 신뢰(辛牢) 등을 불러 유조(遺詔)를 받들어 보좌하게 하였다. 부건이 태자 부생에게 말했다. “육이(六夷)의 추장과 장수들, 그리고 대권을 쥔 대신들이 너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든 마땅히 점차 제거해야 한다.”

신(臣) 사마광(司馬光)이 말한다: 임종 때에 위탁한 대신은 후계자를 보도하고 인도하는 이른바 날개와 같은 존재이다. 이미 그의 날개가 되어 주었으면서도 도리어 그것을 베라고 가르친다면, 패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충성스럽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들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미 중임을 맡기고도 또 그들을 의심한다면, 화를 초래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을유일(乙酉日), 부건이 죽으니, 시호를 경명황제(景明皇帝)라 하고, 묘호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병술일(丙戌日), 태자 부생이 즉위하여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수광(壽光)으로 고쳤다. 신하들이 아뢰기를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연호를 고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하니, 부생이 노하여 발의한 자를 철저히 추궁하여 우복야 단순임을 알아내고 그를 죽였다.

가을, 7월, 이부상서 주민(周閔)을 좌복야로 임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에게 고하기를 “무릉왕(武陵王) 사마희(司馬晞)의 부중에서 군기를 대대적으로 수선하며 모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사마욱이 태상(太常) 왕표지(王彪之)에게 묻자, 왕표지가 말했다. “무릉왕의 뜻은 오직 사냥과 말 달리기에 있을 뿐이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조용히 처분하시어 다른 논의를 안정시키시고, 다시 이 일을 꺼내지 마소서!” 사마욱이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전진의 주 부생이 어머니 강씨를 황태후로 높이고, 비(妃) 양씨를 황후로 세웠다. 양씨는 양안의 딸이다. 그의 총신(寵臣)인 태자문대부(太子門大夫) 남안(南安) 사람 조소(趙韶)를 우복야로, 태자사인(太子舍人) 조회(趙誨)를 중호군(中護軍)으로, 저작랑(著作郎) 동영(董榮)을 상서(尚書)로 임명하였다.

전량왕(前涼王) 장조(張祚)가 음란하고 포학하여 도리가 없으므로, 위로는 아래로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다. 장조가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의 강성함을 꺼려, 장액태수(張掖太守) 색부(索孚)를 보내 장관을 대신하여 포한(枹罕)을 진수하게 하고, 장관에게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을 토벌하도록 하였으며, 또 그의 부장(部將) 역촉(易揣)·장령(張玲)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 3천 명을 이끌고 장관을 습격하게 하였다. 장액 사람 왕난(王鸞)이 술수(術數)를 알아 장조에게 말했다. “이 군대가 출병하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양국(涼國)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장조의 세 가지 불도(不道)한 행위를 진술하였다. 장조가 크게 노하여 왕난이 요언(妖言)으로 무리를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어 내보였다. 왕난이 형을 받을 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군대는 밖에서 패하고, 군왕은 안에서 죽을 것이니 이는 필연적이다!”라고 하였다. 장조가 그의 일족을 멸하였다. 장관이 이 소식을 듣고 색부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장조를 공격하며, 각 주군(州郡)에 격문을 돌려 장조를 폐하여 후작(侯爵)의 신분으로 사저(私邸)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양녕후(涼寧侯) 장요령(張曜靈)을 왕으로 세울 것을 선포하였다. 역촉·장령의 군대가 막 황하를 건넜을 때, 장관이 그들을 격파하였다. 역촉 등은 단기(單騎)로 도망쳐 돌아갔고, 장관의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니 고장성(姑臧城)이 진동하여 두려워하였다. 효기장군(驍騎將軍) 돈황(敦煌) 사람 송혼(宋混)의 형 송수(宋修)가 장조와 원한이 있어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8월, 송혼이 동생 송징(宋澄)과 함께 서쪽으로 도망하여 무리 1만여 명을 모아 장관에게 호응하고, 군대를 돌려 고장성을 향해 나아갔다. 장조가 양추호(楊秋胡)를 시켜 장요령을 동원(東苑)으로 끌고 가 그 허리를 꺾어 죽이고, 모래 구덩이에 묻었으며, 시호를 애공(哀公)이라 하였다.

전진의 주 부생이 위대장군(衛大將軍) 부황미(苻黃眉)를 광평왕(廣平王)으로, 전장군(前將軍) 부비(苻飛)를 신흥왕(新興王)으로 봉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평소에 그가 가까이하던 자들이었다. 대사마 무도왕 부안을 불러 태위를 겸하게 하였다. 진왕 부류를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병주목(并州牧)으로 임명하여 포판(蒲坂)을 진수하게 하고, 위왕(魏王) 부수(苻廋)를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예주목(豫州牧)으로 임명하여 섬성(陕城)을 진수하게 하였다. 중서감(中書監) 호문(胡文), 중서령(中書令) 왕어(王魚)가 부생에게 말했다. “요사이 혜성이 대각성(大角星) 근처에 나타나고, 형혹성(熒惑星)이 동정성(東井星宿)에 들어갔습니다. 대각성은 제왕의 별이고, 동정성은 진(秦)나라의 분야(分野)입니다. 점괘에 따르면, 3년이 못 되어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을 것이며, 대신이 살해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덕(德)을 닦아 재앙을 없애소서!” 부생이 말했다. “황후가 짐과 더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리니, 이는 상사에 응할 수 있다. 모태부(毛太傅), 양거기장군(梁車騎將軍), 양복야(梁僕射)는 유조를 받들어 보좌하였으니, 이는 대신에게 응할 수 있다.” 9월, 부생이 양황후와 모귀, 양릉, 양안을 죽였다. 모귀는 황후의 외삼촌이었다.

우복야 조소, 중호군 조회는 모두 낙주자사(洛州刺史) 조구(趙俱)의 종제(從弟)로서, 부생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조구를 상서령으로 임명하였다. 조구가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며 조소와 조회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다시는 종묘(宗廟)를 생각하지 않고, 문(門)을 멸할 일을 하려 하는구나! 모귀와 양릉이 무슨 죄가 있어 죽임을 당했으며, 내가 무슨 공이 있어 그들을 대신하겠느냐? 너희들은 스스로 할지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근심으로 죽었다.

전량(前凉) 송혼(宋混)의 군대는 무시(武始)의 대택(大泽)에 주둔하며 장요령(张曜灵)을 위해 발상을 치렀다. 윤월(闰月), 송혼의 군대가 고장(姑臧)에 도착하자, 전량왕 장조(张祚)는 장관(张瓘)의 동생 장구(张琚)와 아들 장숭(张嵩)을 체포하여 죽이려 했다. 장구와 장숭이 이 소식을 듣고 시정의 백성 수백 명을 모집하여 “장조는 무도하다. 내 형의 대군이 이미 성 동쪽에 도착했으니, 감히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고 외치며 서문을 열어 송혼의 군대를 맞이했다. 영군장군(领军将军) 조장(赵长) 등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내합(内阁)으로 들어가 장중화(张重华)의 어머니 마씨(马氏)를 전(殿) 밖으로 모셔내고, 량무후(凉武侯) 장현경(张玄靓)을 군주로 세웠다. 이총(易揣)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전중(殿中)으로 들어가 조장 등을 체포하여 죽였다. 장조는 전상(殿上)에서 칼을 누르며 큰 소리로 외쳐 측근들에게 힘껏 싸우라고 명령했으나, 장조는 평소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싸우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결국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송혼 등은 그의 목을 베어 내외에 알리고 시체를 길가에 버리니,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외쳤다. 평민의 예장(礼葬)으로 그를 장사 지내고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송혼과 장구는 표문을 올려 장현경을 대장군(大将军), 양주목(凉州牧), 서평공(西平公)으로 추대하고, 경내를 사면하며 다시 건흥(建兴) 43년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당시 장현경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장관이 고장에 도착하여 장현경을 량왕(凉王)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사지절(使持节),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诸军事), 상서령(尚书令), 양주목, 장액군공(张掖郡公)을 맡고, 송혼을 상서복야(尚书仆射)로 임명했다. 농서(陇西) 사람 이엄(李俨)이 본군(本郡)을 점거하고 장관의 명령을 받지 않으며 강동(江东)의 연호를 사용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장관은 부장 우패(牛霸)를 보내 토벌하게 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서평(西平) 사람 위린(卫𬘭)도 본군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우패의 군대는 무너져 도망쳤다. 장관은 동생 장구를 보내 위린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주천태수(酒泉太守) 마기(马基)가 군사를 일으켜 위린에 호응하자, 장관은 사마(司马) 장요(张姚)와 왕국(王国)을 보내 그를 공격하여 참수했다.

겨울, 10월, 예주자사(豫州刺史) 사상(谢尚)을 도독병기유삼주제군사(都督并冀幽三州军事)로 임명하여 수춘(寿春)을 진수하게 했다.

진북장군(镇北将军) 단감(段龛)이 연주(燕主) 모용준(慕容俊)에게 편지를 보내 평등한 신분으로 호칭하며, 그가 황제를 칭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용준이 노하여 11월, 태원왕(太原王) 모용각(慕容恪)을 대도독(大都督), 무군장군(抚军将军)으로 삼고, 양오(阳骛)를 부장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단감을 공격하게 했다.

전진(前秦)은 신뢰(辛牢)를 대행 상서령(代理尚书令)으로, 조소(赵韶)를 좌복야(左仆射)로, 상서 동영(董荣)을 우복야(右仆射)로, 중호군(中护军) 조회(赵诲)를 사례교위(司隶校尉)로 임명했다.

12월, 고구려왕 고규(高钊)가 사자를 전연(前燕)에 보내 인질을 바치고 공물을 납부하며 어머니를 돌려받기를 청했다. 연주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将军) 조감(刁龛)을 보내 고규의 어머니 주씨(周氏)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고규를 정동대장군(征东大将军), 영주자사(营州刺史)로 임명하고 낙랑공(乐浪公)에 봉했으며, 왕위는 예전과 같이 했다.

상당(上党) 사람 풍앙(冯鸯)이 전연의 태수 단강(段刚)을 쫓아내고 안민성(安民城)을 점거하며 스스로 태수라 칭하고, 사자를 보내 동진(东晋)에 투항했다.

전진의 승상(丞相) 뢰약아(雷弱儿)는 성격이 강직하여, 조소와 동영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항상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논하며 그들을 볼 때마다 이빨을 갈았다. 조소와 동영이 진주(秦主) 부생(苻生)에게 뢰약아를 무고하자, 부생은 뢰약아와 그의 아홉 아들, 스물일곱 손자를 죽였다. 이에 각 부의 강족(羌人)들은 모두 이심(离心)을 품었다. 부생은 비록 상중(丧中)에 있었지만, 여전히 유흥과 음주를 즐기며, 활을 당기고 칼을 드러내며 조신들을 접견했다. 망치, 집게, 톱, 끌 등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도구들을 항상 곁에 두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비(后妃), 공경(公卿) 이하에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여 명을 죽였으며, 정강이를 자르고, 갈비뼈를 뽑고, 목을 톱질하고, 태아를 가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연주 모용준은 단감이 강성하다고 여겨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만약 단감이 군사를 내어 황하를 막으면 우리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을 것이니, 직접 여호(吕护)를 공격한 후 돌아오는 것이 낫다.” 모용각은 경장(轻装) 부대를 나누어 먼저 황하 기슭으로 보내 배를 준비하며 단감의 의향을 살폈다. 단감의 동생 단억(段罴)은 용맹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단감에게 말했다. “모용각은 용병에 능하고, 게다가 인원이 많고 세력이 큽니다. 그가 황하를 건너 성 아래까지 진격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아마도 항복하려 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굳게 지키시고, 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황하 변에서 그를 저지하겠습니다. 만약 요행히 이긴다면, 형님께서 대군을 이끌고 뒤따르시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차라리 일찍 항복하는 것이 나으며, 그래도 천호후(千户侯)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단감이 듣지 않았다. 단억이 거듭 간청하자, 단감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봄, 정월, 전연 태원왕 모용각이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광고(广固)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단감이 3만 명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병신일(丙申日), 모용각이 치수(淄水)에서 단감을 크게 무찌르고, 단감의 동생 단흠(段钦)을 사로잡고 우장사(右长史) 원범(袁范) 등을 참수했다. 제왕(齐王) 용개려위(龙辟闾蔚)가 부상당했으나, 모용각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았지만, 용개려위는 이미 죽었고, 항복한 병사는 수천 명이었다. 단감은 도망쳐 성 안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고, 모용각은 진군하여 광고를 포위했다.

전진의 사공(司空) 왕용(王墉)은 성격이 강직하고 과격했으며, 우복야 동영과 시중(侍中) 강국(强国)이 아첨으로 총애를 받자, 왕용은 그들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매번 조회에 나갈 때 동영을 보아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왕용에게 말했다. “동군(董君)은 존귀하고 총애받음이 비할 데 없으니, 그대는 마땅히 마음을 조금 낮추어 그를 접대해야 합니다.” 왕용이 말했다. “동룡(董龙)은 무슨 계구(鸡狗)인가, 나라의 선비(国士)로 하여금 그와 말하게 하려는가!” 마침 천상(天象)에 변이가 있자, 동영과 강국이 진주 부생에게 말했다. “지금 하늘의 견책(谴责)이 매우 심하니, 마땅히 높고 귀한 대신(大臣)으로 응징해야 합니다.” 부생이 말했다. “높고 귀한 대신은 대사마(大司马)와 사공(司空)뿐이다.” 동영과 강국이 말했다. “대사마는 나라의 지극한 친척이니 죽일 수 없습니다.” 이에 왕용을 죽였다. 형장에 임하여 동영이 그에게 말했다. “오늘도 감히 동룡을 계구에 비할 수 있겠는가?” 왕용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꾸짖었다. 낙주자사(洛州刺史) 두욱(杜郁)은 왕용의 생질(甥)이었는데, 좌복야 조소가 그를 미워하여 부생에게 무고하며 진(晋)에 대해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하자, 부생이 그를 죽였다.

임술일(壬戌日), 부생이 태극전(太极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상서령 신뢰를 주관(酒监)으로 삼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부생이 노하여 말했다.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지 않는가? 아직도 앉아 있는 자가 있구나!” 그가 활을 당겨 신뢰를 쏘아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취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모두 땅에 엎드려 모자까지 떨어뜨렸으나, 부생은 이에 기뻐했다.

흉노 대인(匈奴大人) 유무환(刘务桓)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유합두(刘阏头)가 뒤를 이어 대국(代国)을 배반하려 했다. 2월, 대왕(代王)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순행하여 황하 기슭에 이르자, 유합두가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했다.

전연 태원왕 모용각이 단감이 관할하는 여러 성들을 초무(招抚)했다. 기축일(己丑日), 단감이 임명한 서주자사(徐州刺史) 양도공(阳都公) 왕등(王腾)이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하자, 모용각은 왕등에게 원래의 직책으로 양도(阳都)에 돌아가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전진(前秦)의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진왕(晉王) 부류(苻柳)가 참군(參軍) 염부(閻負)와 양수(梁殊)를 보내 전량(前涼)에 사신으로 가게 하고, 서신으로 양왕(涼王) 장현정(張玄靚)을 설득하게 하였다. 염부와 양수가 고장(姑臧)에 도착하자, 장관(張瓘)이 그들을 만나 말하였다. "나는 진(晉)나라의 신하입니다. 신하는 국경 밖의 교류가 없는데,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진왕께서는 그대와 이웃하여 번병(藩屛)이 되셨습니다. 비록 산하가 막혀 있지만, 풍속이 서로 통하고 길이 서로 만나므로, 이에 화친을 닦고자 온 것입니다. 그대께서 어찌 이상하게 여기십니까!" 장관이 말하였다. "나는 진실로 진나라를 섬겨 지금까지 여섯 대를 이어왔습니다. 만약 부정동(苻征東)과 사절을 통한다면, 이는 위로는 선군의 유지를 어기고 아래로는 사민의 절개를 훼손하는 것이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진실(晉室)이 쇠미하여 천명(天命)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양국(涼國)의 선왕(先王)께서 북쪽으로 두 조(趙)를 섬기셨으니, 이는 시기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대진(大秦)의 위덕이 바야흐로 성대하니, 양왕(涼王)께서 만약 하우(河右)에서 스스로 제왕을 칭하려 하신다면, 이는 결코 진(秦)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려 하신다면, 어찌 진(晉)나라를 버리고 진(秦)나라를 섬겨 복록을 보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장관이 말하였다. "중원 사람들은 약속을 저버리기를 좋아합니다. 옛날 석씨(石氏)의 수레와 말이 돌아가자마자, 오랑캐의 기병이 이미 이르렀습니다. 나는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중원의 제왕은 정치와 교화가 각각 같지 않았습니다. 조(趙)나라는 간사하고 진(秦)나라는 돈독히 신의를 지키니, 어찌 한결같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장선(張先)과 양초(楊初)가 모두 병력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자, 선제(先帝)께서 토벌하여 사로잡으시고 그 죄를 사면하시고 작록(爵祿)으로 총애하셨으니, 이는 본래 석씨(石氏)가 감히 비할 바가 아닙니다." 장관이 말하였다. "만약 진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진(秦)나라의 위덕이 적수가 없는데, 어찌하여 먼저 강남(江南)을 취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면 천하가 모두 진(秦)나라의 소유가 될 터인데, 정동장군께서 어찌 굳이 사자를 보내셨습니까!"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강남은 문신(文身)의 땅으로, 풍속이 비루하고 도(道)가 탁할 때는 먼저 반역하고, 교화가 흥할 때는 마지막에 복종합니다. 주상(主上)께서는 강남은 반드시 병력으로 정복해야 하지만, 하우(河右)는 도의(道義)로써 위무할 수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자를 보내 먼저 화친을 밝히신 것입니다. 만약 그대께서 천명을 알지 못하신다면, 강남은 몇 년의 수명을 더 누릴 수 있겠지만, 하우는 아마 그대의 땅이 아닐 것입니다." 장관이 말하였다. "나는 세 주(州)를 걸쳐 점거하고, 갑병(甲兵)이 십만이며, 서쪽으로는 총령(葱嶺)을 감싸고 동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이르렀습니다. 남을 공격할지라도 오히려 남음이 있거늘, 하물며 스스로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진(秦)나라를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귀주(貴州)의 하산(河山)이 험고함이, 소함(崤函)과 같겠습니까? 인민의 물산이 풍요로움이, 진옹(秦雍)과 같겠습니까? 두홍(杜洪)과 장거(張琚)는 조씨(趙氏)의 옛 업을 의지하고, 병력이 강하고 재물이 풍부하여, 관중(關中)을 주머니에 넣고 사해(四海)를 휩쓸 뜻이 있었으나, 선제(先帝)의 군기가 서쪽을 가리키자 그들은 얼음 녹고 구름 흩어지듯 하여, 열흘 한 달 사이에 주인이 바뀐 줄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주상께서 만약 귀주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여기시어, 노하여 백만의 궁수(弓手)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서쪽으로 진군하신다면, 귀주가 장차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습니다." 장관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 일은 마땅히 양왕(涼王)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나로서는 끝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부와 양수가 말하였다. "양왕께서 비영서조(英明睿智早熟)하시나, 나이가 어리십니다. 그대께서 이윤(伊尹)과 곽광(霍光)과 같은 중임을 몸에 지니셨으니, 국가의 안위(安危)는 그대의 한 번 거동에 달려 있습니다." 장관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장현정의 이름으로 사자를 보내 전진에 번국(藩國)을 칭하였고, 전진은 장현정이 스스로 칭한 관작(官爵) 그대로 그에게 수여하였다.

장군 유도(劉度)가 노씨(盧氏)에서 전진의 청주자사(青州刺史) 왕랑(王朗)을 공격하였다. 전연(前燕)의 장군 모용장경(慕輿長卿)이 직관(軹關)으로 들어와 배씨보(裴氏堡)에서 전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강철(強哲)을 공격하였다. 전진주(前秦主) 부생(苻生)이 전장군(前將軍) 신흥왕(新興王) 부비(苻飛)를 보내 유도를 막게 하고,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鄧羌)을 보내 모용장경을 막게 하였다. 부비가 아직 이르기도 전에 유도는 물러갔다. 등강이 모용장경과 교전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모용장경과 갑사(甲士)의 수급(首級) 2천여 급을 포로로 잡았다.

환온(桓溫)이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황실의 원릉(園陵)을 수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십여 차례나 올렸으나, 모두 허락되지 않았다. 조정에서 환온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삼고 도독사 이주제군사(都督司冀二州諸軍事)로 삼아, 요양(姚襄)을 토벌하게 하였다.

3월에, 전진주 부생이 삼보(三輔)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위교(渭橋)를 수축하게 하였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굉(程肱)이 간언하며 농사를 방해한다고 하였으나, 부생이 그를 죽였다.

여름 4월에, 장안(長安)에 큰 바람이 불어 집을 뒤집고 나무를 뽑았다. 전진의 궁중이 놀라 소란해지며, 어떤 이는 도적이 왔다고 하여 궁문을 낮에도 닫았는데, 닷새 만에 그쳤다. 전진주 부생이 도적이라고 말한 자를 추궁하여 그 심장을 파내었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강평(强平)이 간언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리셨으니, 폐하께서 마땅히 백성을 사랑하고 신령을 공경하며, 형벌을 늦추고 인덕(仁德)을 숭상하여 이에 응하셔야 재앙을 없앨 수 있습니다." 부생이 노하여 그의 정수리를 뚫고 죽였다. 위장군(衛將軍) 광평왕(廣平王) 부황미(苻黃眉), 전장군(前將軍) 신흥왕(新興王) 부비(苻飛),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鄧羌)이, 강평이 태후(太后)의 동생이므로, 이마를 조아리며 굳게 간언하였으나, 부생이 듣지 않고, 부황미를 좌풍익(左馮翊)으로, 부비를 우부풍(右扶風)으로 강등시키고, 등강은 함양태수(咸陽太守)를 대행하게 하였으나, 그들의 용맹을 아껴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5월에, 태후 강씨(强氏)가 근심과 원한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명덕(明德)이라 하였다.

요양(姚襄)이 허창(許昌)에서 낙양(洛陽)의 주성(周成)을 공격하였다.

6월에, 전진주 부생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짐(朕)이 황천(皇天)의 명을 받아 만방(萬邦)에 임(臨)하였노라. 대통(大統)을 계승한 이후로 무슨 좋지 못한 점이 있기에, 비방하는 말이 천하에 선동되었느냐! 사람을 죽인 것이 천 명을 넘지 않았으니, 잔혹하다고 말하는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적지 않으니, 드물다고 하지 않겠다. 바야흐로 형벌을 더욱 무겁게 하려 하노니, 너희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지난해 봄 이후로, 동관(潼關) 서쪽에서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와 이리가 해를 끼쳤다. 낮에는 길을 막고 밤에는 집을 열어젖히며, 여섯 가지 가축을 먹지 않고 오로지 사람만을 잡아먹어, 모두 칠백여 명을 죽였다. 백성들이 경작과 직조를 폐하고 마을에 모여 살았으나, 호랑이와 이리의 해가 그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전진의 군신(群臣)이 상주하여 재앙을 물리치기를 청하자, 부생이 말하였다. "짐승이 배고프면 사람을 먹고 배부르면 저절로 그칠 것이니, 무슨 물리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늘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바로 죄지은 자가 많기 때문에, 나를 도와 그들을 죽이는 것일 뿐이다."

병자일(丙子日)에, 전연(前燕)의 헌회태자(獻懷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세상을 떠났다.

요양(姚襄)이 낙양(洛陽)을 공격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사(長史) 왕량(王亮)이 간언하며 말하였다. "명공(明公)의 영명(英名)이 세상에 덮이고, 병사는 강하며 백성은 따릅니다. 지금 견고한 성 아래에 군대를 머물게 하여 힘이 꺾이고 위세가 손상되면, 혹여 다른 적이 허를 틈탈까 염려되니, 이는 위망(危亡)의 길입니다!" 요양이 듣지 않았다.

환온(桓溫)이 강릉(江陵)에서 북벌(北伐)을 개시하여, 도호(督護) 고무(高武)를 보내 노양(魯陽)을 점거하게 하고, 보국장군(輔國將軍) 대시(戴施)를 황하 가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진격하였다. 그가 요속(僚屬)과 함께 평승루(平乘樓)에 올라 중원을 바라보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신주(神州)를 가라앉게 하여 백 년이 폐허가 되도록 만든 것은, 왕이보(王夷甫) 무리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도다!" 기실(記室) 진군(陳郡) 사람 원굉(袁宏)이 말하였다. "운명(運命)에는 흥하고 폐함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이 사람들의 허물이겠습니까!" 환온이 안색을 변하며 말하였다. "옛날 유경승(劉景升)이 천 근(斤)이나 되는 큰 소가 있었는데, 먹는 꼴과 콩이 보통 소의 열 배였으나, 무거운 것을 싣고 먼 곳에 감에는, 여윈 암소만도 못하였도다. 위무제(魏武帝)가 형주(荊州)에 들어가서, 그것을 잡아 군사들에게 위문하였다."

8월 기해일(己亥日)에, 환온이 이수(伊水)에 도착하자, 요양이 포위를 풀고 그를 막으려 하여, 정예 부대를 물 북쪽 숲 속에 매복시키고, 사자를 보내 환온에게 말하였다. "삼가 폐하께서 친히 왕사(王師)를 이끌고 오셨으니, 요양이 이제 몸을 바쳐 귀순하려 합니다. 원컨대 삼군(三軍)을 명하여 조금 물러나게 하시면, 내가 길가에서 엎드려 맞이하겠습니다." 환온이 말하였다. "나는 스스로 중원을 회복하고 산릉(山陵)에 제사 지내려는 것일 뿐,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려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서로 만남은 눈앞에 있는데, 어찌 굳이 사자를 번거롭게 하는가!" 요양이 물을 등지고 싸웠다. 환온이 진을 배열하고 나아가며, 친히 갑옷을 입고 독전(督戰)하였다. 요양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이 죽었다. 요양이 부하 수천 기(騎)를 이끌고 낙양 북산(北山)으로 도망쳤는데, 그날 밤, 백성들이 처자를 버리고 요양을 따라온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요양이 용맹하고 백성을 아꼈으므로, 비록 여러 번 패했으나, 백성들이 요양이 있는 곳을 알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며 달려가 그에게 투항하였다. 환온의 군중에서 요양이 이미 부상하여 죽었다는 말이 퍼져, 환온에게 포로가 된 허창과 낙양의 남녀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양이 서쪽으로 도망가자, 환온이 쫓아가지 못하였다. 홍농(弘農) 사람 양량(楊亮)이 요양에게서 와서 투항하자, 환온이 요양의 사람됨을 물으니, 양량이 말하였다. "요양의 신명(神明)한 기우(器宇)는 손책(孫策)과 같은 부류이고, 웅무(雄武)함은 그보다 뛰어납니다."

주성(周成)이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하자, 환온(桓温)은 옛 태극전(太极殿) 앞에 주둔하였다가 얼마 뒤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기축일(己丑日)에 환온은 여러 황릉(皇陵)을 배알하였는데, 훼손된 곳은 수리하고 각각 능령(陵令)을 두었다. 환온은 표문을 올려 진서장군(镇西将军) 사상(谢尚)을 도독사주제군사(都督司州诸军事)로 임명하여 낙양(洛阳)을 진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사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환온은 영천태수(颖川太守) 모목지(毛穆之), 도호(督护) 진오(陈午), 하남태수(河南太守) 대수(戴施)를 남겨 2천 명을 이끌고 낙양을 지키며 산릉(山陵)을 호위하게 하고, 항복한 군대 3천여 가(家)를 강(江)과 한(汉) 사이로 옮기고 주성을 압송하여 돌아갔다.

요양(姚襄)은 평양(平阳)으로 도망쳤고, 전진(前秦)의 병주자사(并州刺史) 윤적(尹赤)이 또 부하들을 이끌고 요양에게 항복하자, 요양은 이에 양릉(襄陵)을 점거하였다. 전진의 대장군(大将军) 장평(张平)이 그를 공격하자, 요양은 장평에게 패배하여 이에 장평과 형제의 의를 맺고 각자 군대를 물렸다.

단감(段龛)은 그의 부하 단모(段某)를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자,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서주자사(徐州刺史) 순섬(荀羡)이 군사를 이끌고 단모를 따라 구원하도록 하였다. 순섬이 낭야(琅邪)에 도착하였으나, 전연(前燕) 군대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왕등(王腾)이 견성(鄄城)을 침범하자, 순섬이 양도(阳都)를 공격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연이어 내려 성벽이 무너져 순섬이 왕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겨울, 10월, 계사삭일(癸巳朔日)에 일식이 있었다.

전진의 주(主) 부생(苻生)이 밤에 대추를 너무 많이 먹고 아침에 병이 나서 태의령(太医令) 정연(程延)을 불러 진단하게 하였다. 정연이 말하였다. “폐하께는 다른 병이 없고, 다만 대추를 너무 많이 드셨을 뿐입니다.” 부생이 노하여 말하였다. “너는 성인이 아니거늘, 어찌 내가 대추를 먹은 줄 알겠느냐!” 마침내 그를 죽였다.

전연의 대사마(大司马) 모용각(慕容恪)이 광고(广固)에서 단감을 포위하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모용각이 말하였다. “용병의 형세에는, 마땅히 느릿하게 할 때가 있고, 마땅히 급하게 할 때가 있으니, 분명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적과 내가 세력이 균등하고, 밖에 강력한 원군이 있어 배후를 찔릴 화가 두렵다면, 공격을 급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강하고 적이 약하며, 밖에 원군이 없어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하다면, 마땅히 그들을 얽매고 포위하여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병법에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한 것이다. 단감의 병력은 아직 많고, 이반하는 마음이 없다. 제남(济南)의 싸움은 정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나, 단감이 용병에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일 뿐이다. 지금 그들이 견고한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니,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맹렬히 공격하면 수십 일 안에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죽는 사졸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중원에 일이 생긴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니, 내가 생각할 때마다 밤에 잠도 잊을 정도인데, 어찌 가볍게 사졸들을 죽음으로 내몰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항복시키는 것이지, 속성의 공을 구할 필요는 없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이는 저희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군중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마다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이에 높은 담을 쌓고 깊은 해자를 파서 그들을 포위하였다. 제(齐) 땅의 백성들이 다투어 식량을 실어 나르며 전연 군대에 공급하였다.

단감은 성을 에워싸고 스스로 지켰으나, 땔나무와 물을 긷는 길이 끊겨 성 안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 단감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웠다. 모용각이 포위망 안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미리 기병을 나누어 각 성문에 주둔시켰다. 단감이 직접 돌진하여 간신히 성 안으로 들어왔을 뿐,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전멸하였다. 이에 성 안의 사기가 꺾여, 굳게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 11월, 병자일(丙子日)에 단감은 두 손을 등지고 묶여 나와 항복하였고, 주탁(朱秃)과 함께 계성(蓟城)으로 압송되었다. 모용각은 새로 귀순한 백성들을 안무하고, 제 땅을 완전히 평정한 뒤, 선비(鲜卑), 호(胡), 갈(羯) 3천여 호를 계성으로 이주시켰다. 전연의 주 모용준(慕容俊)은 주탁에게 오형(五刑)을 집행하고, 단감을 복순장군(伏顺将军)으로 임명하였다. 모용각은 모용진(慕容尘)을 남겨 광고를 지키게 하고, 상서좌승(尚书左丞) 국은(鞠殷)을 동래태수(东莱太守)로, 장무태수(章武太守) 선우량(鲜于亮)을 제군태수(齐郡太守)로 임명한 뒤 돌아갔다.

국은은 국팽(鞠彭)의 아들이었다. 국팽은 당시 전연의 대장추(大长秋)였는데, 편지를 보내 국은을 훈계하며 말하였다. “왕미(王弥)와 조의(曹嶷)에게는 반드시 자손이 있을 터이니, 너는 잘 초무(招抚)하여 옛 원한을 추궁하지 말아라. 그래야 화란의 근원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국은이 찾아내어 산 속에서 왕미의 조카 왕립(王立)과 조의의 손자 조암(曹岩)을 찾아내어 그들을 만나 깊이 사귀며 의를 맺었다. 국팽은 또 사자를 보내 그들에게 수레와 말, 의복을 선물하니, 군(郡)의 백성들이 이로 인해 매우 화목해졌다.

순섬은 단감이 이미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비(下邳)로 물러나, 장군 제갈료(诸葛攸)와 고평태수(高平太守) 유장(刘庄)을 남겨 3천 명을 이끌고 낭야를 지키게 하였다. 참군(参军) 초국(谯国) 사람 대수(戴遂) 등이 2천 명을 이끌고 태산(泰山)을 지켰다. 전연의 장수 모용란(慕容兰)이 변성(汴城)에 주둔하자, 순섬이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겸사공(兼司空) 산기상시(散骑常侍) 차관(车灌) 등을 절(节)을 지니고 낙양으로 보내 다섯 황릉을 수리하게 하였다. 12월, 경술일(庚戌日)에 황제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세마포 상복(细麻布丧服)을 입고 태극전에서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

사주도독(司州都督) 사상이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단양윤(丹杨尹) 왕호지(王胡之)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나, 왕호지는 부임하기도 전에 죽었다. 왕호지는 왕억(王廙)의 아들이었다.

이 해에, 구지공(仇池公) 양국(杨国)의 숙부 양준(杨俊)이 양국을 죽이고 스스로 섰다. 조정에서는 양준을 구지공으로 임명하였다. 양국의 아들 양안(杨安)은 전진으로 도망쳤다.

봄, 정월, 임술삭일(壬戌朔日, 초하루)에 황제가 관례(冠礼)를 행하고 원복(元服)을 더하였다. 태후가 조서를 내려 섭정을 그만두고 정사를 돌려주고, 대사면을 하였으며, 연호를 바꾸었다. 태후는 숭덕궁(崇德宫)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연(燕)의 주 모용준은 유주자사(幽州刺史) 을일(乙逸)을 불러 좌광록대부(左光禄大夫)로 삼았다. 을일 부부는 함께 사슴 수레(鹿车) 한 대를 탔는데, 그의 아들 을장(乙璋)은 수십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의복과 장식이 매우 화려하여 길에서 맞이하였다. 을일이 크게 노하여 수레 문을 닫고 그와 말하지 않았다. 성 안에 도착하여 을일이 엄격히 을장을 꾸짖었으나, 을장은 여전히 뉘우쳐 고치지 않았다. 을일은 항상 그가 패망할까 걱정하였으나, 을장은 도리어 승진하여 임용되어 역임한 벼슬이 중서령(中书令),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다. 을일이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을 닦아 스스로 서고, 자신을 억제하고 도의를 지켜 겨우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을장은 검소함을 닦지 않고 오직 사치와 방종만을 일삼았는데, 도리어 청요하고 현달한 자리를 차지하였구나. 이것이 어찌 을장의 욕됨과 요행뿐이겠는가, 실로 시대의 쇠퇴함인 것이다.”

2월, 계축일(癸丑日, 의심됨)에 연의 주 모용준이 그의 아들 중산왕(中山王) 모용위(慕容𬀩)를 태자로 세우고, 대사면을 하였으며, 연호를 광수(光寿)로 바꾸었다.

태백성(太白星)이 동정(东井) 별자리에 들어갔다. 진(秦)나라의 관련 관청에서 아뢰었다. “태백성은 벌(罚)의 별이고, 동정은 진나라의 분야(分野)이니, 반드시 폭란(暴乱)한 군사가 경사(京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진의 주 부생이 말하였다. “태백성이 동정에 들어간 것은, 그것이 스스로 목이 말랐을 뿐이니, 무엇이 괴이하다 하겠는가!”

요양이 장차 관중(关中)을 도모하려 하여, 여름, 4월에 북굴(北屈)에서 출발하여 행성(杏城)에 주둔하고, 보국장군(辅国将军) 요람(姚兰)을 보내 부성(敷城)까지 땅을 점령하게 하고, 요무장군(曜武将军) 요익생(姚益生), 좌장군(左将军) 왕흠로(王钦卢)가 각각 군사를 이끌고 여러 부족의 강족(羌人)과 호족(胡人)을 초빙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요람은 요양의 사촌 형이고, 요익생은 요양의 형이었다. 강족, 호족 및 진나라 백성 중 그들에게 귀부한 자가 5만여 호에 달하였다. 진나라 장수 부비룡(苻飞龙)이 요람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요양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황락(黄落)을 점거하였다. 진나라 주 부생은 위대장군(卫大将军) 광평왕(广平王) 부황미(苻黄眉), 평북장군(平北将军) 부도(苻道), 용양장군(龙骧将军) 동해왕(东海王) 부견(苻坚), 건절장군(建节将军) 등강(邓羌)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이끌고 그를 막게 하였다. 요양은 진영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등강이 부황미에게 말하였다. “요양이 환온과 장평에게 패배하여 예기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강하고 흉악하니, 우리가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휘날리며 그의 진영에 바로 다가가면, 그는 반드시 분노하여 나와 싸울 것이니, 한 번 싸움에 그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5월, 등강이 기병 3천을 이끌고 요양의 진영 문 앞에 다가가 진을 치자, 요양이 노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와 싸웠다. 등강은 거짓으로 이기지 못하는 체하며 퇴각하자, 요양이 그를 추격하여 삼원(三原)까지 이르렀다. 등강이 군사를 돌려 공격하고, 부황미 등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착하자, 요양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다. 요양이 타던 준마는 이마가 검은 얼룩말(黧眉䯄)이었는데, 말이 넘어져 진나라 병사가 그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의 아우 요장(姚苌)은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요양은 아버지 요익중(姚弋仲)의 영구(灵柩)를 군대에 싣고 있었는데, 진나라 주 부생은 왕의 예(王礼)로 요익중을 고반(孤磐)에 장사 지내고, 또한 공의 예(公礼)로 요양을 장사 지냈다. 광평왕 부황미 등이 장안(长安)으로 돌아오자, 부생은 그들에게 상을 내리지 않았고, 여러 번 공공연히 부황미를 모욕하였다. 부황미가 노하여 부생을 시해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복법 주살되었다. 이 일에 연루된 왕공친척(王公亲戚)들이 처형된 자가 많았다.

무인일(戊寅日, 의심됨)에 연의 주 모용준은 무군장군(抚军将军) 모용수(慕容垂), 중군장군(中军将军) 모용건(慕容虔), 호군장군(护军将军) 평희(平熙)를 보내 보병과 기병 8만을 이끌고 새북(塞北)의 칙륵(敕勒)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포로로 잡거나 죽인 자가 10여만 명, 말 13만 필, 소와 양이 억만 마리에 달하였다.

흉노 선우 하뢰두가 부락 3만 5천 호를 이끌고 연나라에 항복하니, 연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대군 평성에 안치했다.

진나라 주 부생이 꿈에 큰 물고기가 부풀을 먹는 것을 보았고, 또 장안에 “동해의 큰 물고기가 용이 되어, 남자는 모두 왕이 되고 여자는 모두 공이 되리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부생이 이에 태사·녹상서사·광녕공 어준과 그의 일곱 아들, 열 손자를 주살했다. 금자광록대부 우이가 화를 두려워하여 형주자사직을 청했으나, 부생이 허락하지 않고 그를 중군장군으로 임명하고 불러서 희롱하여 말했다.

“소의 성품은 느리고 무거워 수레의 멍에를 잘 다룬다. 비록 천리마의 발힘은 없으나 움직일 때마다 백 석은 실을 수 있다.”

우이가 말했다.

“비록 큰 수레를 몰 수 있으나 험한 비탈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시험해 보시기를 바라며, 그제야 공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생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시원하구나! 그대는 싣는 것이 가벼운 것을 싫어하는가? 짐이 장차 어공의 작위로 그대를 안치하리라.”

우이가 두려워하여 돌아가 자살했다.

부생은 주야로 술을 마셔 가끔은 여러 달 동안 궁을 나오지 않았다. 아뢰는 일을 살피지 않고, 대개 제쳐두고 처리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취한 가운데 일을 처리했다. 좌우 사람들이 이로 인해 간사한 일을 행하여 상벌에 기준이 없었다. 혹시 신시나 유시에야 조정에 나와 취한 기세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는 스스로 한쪽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잔(殘), 결(缺), 치우칠 편(偏), 다만 지(只), 적을 소(少), 없을 무(無), 갖추지 못할 불(不), 갖출 구(具)’와 같은 말을 꺼려하여, 실수로 이를 범해 죽임을 당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는 소, 양, 나귀, 말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고, 뜨거운 물로 닭, 돼지, 거위, 오리를 데쳐서 전전에 놓아두기를 수십 마리씩 무리 지어 하기를 좋아했다. 혹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 그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하며 직접 보고 즐기기도 했다. 일찍이 좌우에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다스린 이래로, 너희는 밖에서 무슨 말을 들었느냐?”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성명하신 분이 천하를 다스리니 상벌이 분명하고 적절하여, 천하가 오직 태평만을 노래합니다.”

부생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나를 아첨하는구나!”

끌어내어 베었다. 다른 날 또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폐하의 형벌이 조금 지나칩니다.”

또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나를 비방하는구나!”

또 베었다. 공신과 구족, 친척들을 거의 다 죽이고, 여러 신하들이 하루 목숨을 보전하기를 마치 십 년을 견디는 듯이 여겼다.

동해왕 부견은 평소 당시의 명망이 있었고, 옛 요양참군 설찬, 권익과 가까웠다. 설찬과 권익이 은밀히 부견에게 권했다.

“주상은 시기하고 잔혹하며 포악하여 조정 안팎이 마음이 떠났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제사를 주관할 이는 전하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일찍 계획을 세워, 다른 성씨가 차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부견이 이를 상서 여파루에게 묻자, 여파루가 말했다.

“저는 칼고리에 달린 사람일 뿐이어서 큰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저의 고향에 왕맹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모략은 세상에 드문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를 청하여 자문하셔야 합니다.”

부견이 여파루를 통해 왕맹을 초빙하니, 한 번 보자마자 옛 친구와 같았다. 당시 정사를 이야기하자 부견이 매우 기뻐하며 스스로 유현덕이 제갈공명을 만난 것과 같다고 여겼다.

6월, 태사령 강권이 진주 부생에게 아뢰었다.

“어젯밤 석 달이 동시에 나타나고, 살별이 태미원에 들어가 동정성을 연이었습니다. 지난달 상순 이후로 음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으니, 장차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부생이 노하여 요망한 말이라 여기고 곤장을 쳐서 죽였다.

특진·영어사중승 양평로 등이 부견에게 말했다.

“주상은 덕을 잃어 위아래로 원성이 자자하고,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며, 연나라와 진나라 두 나라가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화가 발생하는 날, 집과 나라가 함께 망할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일이니, 일찍 계획을 세우셔야 합니다!”

부견이 마음속으로 옳게 여겼으나 부생의 용맹하고 건장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생이 밤에 시비에게 말했다.

“아법 형제들도 믿을 수 없으니, 내일 마땅히 그들을 제거해야겠다.”

시비가 부견과 부견의 형 청하왕 부법에게 알렸다. 부법이 양평로 및 특진광록대부 강왕과 함께 장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은밀히 운룡문으로 들어갔다. 부견이 여파루와 함께 부하 3백 명을 거느리고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뒤를 이으니, 숙위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부견에게 귀순했다. 부생이 아직 취하여 누워 깨어나지 못했다. 부견의 병사들이 이르자 부생이 놀라 좌우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좌우가 대답했다.

“도적입니다.”

부생이 말했다.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가?”

부견의 병사들이 모두 웃었다. 부생이 또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찌하여 빨리 절하지 않는가? 절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

부견의 병사들이 부생을 끌어내어 다른 방에 안치하고, 폐하여 월왕으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이고 시호를 여왕이라 하였다.

부견이 제위를 부법에게 양보하려 하자 부법이 말했다.

“그대는 적자이면서도 현명하니, 마땅히 즉위해야 합니다.”

부견이 말했다.

“형이 연장자이니 마땅히 즉위해야 합니다.”

부견의 어머니 순씨가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국가의 중대한 일을, 어린아이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줄 압니다. 훗날 후회가 있다면 허물은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부견을 세울 것을 청했다. 부견이 이에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대진천왕이라 칭하고 태극전에서 즉위하여, 부생의 총신 중서감 동영, 좌복야 조소 등 20여 명을 주살했다.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영흥으로 고쳤다. 아버지 부웅을 문환황제로 추존하고, 어머니 순씨를 황태후로, 비 순씨를 황후로, 세자 부굉을 황태자로 삼고, 청하왕 부법을 도독중외제군사·승상·녹상서사·동해공으로 삼고, 모든 왕들은 작위를 공으로 강등시켰다. 종조 우광록대부·영안공 부후를 태위로, 진공 부류를 거기대장군·상서령으로 삼았다. 아우 부융을 양평공으로, 부쌍을 하남공으로, 아들 부비를 장락공으로, 부휘를 평원공으로, 부희를 광평공으로, 부예를 거록공으로 봉했다. 한양인 이위를 좌복야로, 양평로를 우복야로, 강왕을 영군장군으로, 여파루를 사례교위로, 왕맹을 중서시랑으로 임명했다.

부융은 문학을 좋아하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귀로 들으면 외우고 눈으로 보면 잊지 않았으며, 힘은 백 사람을 당해내고 말타기와 활쏘기, 찌르기를 잘했으며, 젊었을 때부터 좋은 명성이 있었다. 부견이 그를 사랑하고 중히 여겨, 항상 함께 국사를 의논했다. 부융이 안팎의 일을 다스리자 형벌과 정사가 맑고 밝았으며, 인재를 천거하고 침체된 선비를 발탁하여 보탬이 많았다. 부비 또한 문무 재주가 있었으나, 백성을 다스리고 송사를 판결하는 데는 부융만 못했다.

이위는 순태후의 고종 사촌 동생으로, 평소 위왕 부웅과 사이가 좋았다. 부생이 여러 번 부견을 죽이려 했으나, 오로지 이위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했다. 이위가 순태후의 총애를 받자, 부견이 그를 아버지처럼 대우했다. 이위가 왕맹의 현명함을 알고 항상 부견에게 국사를 그에게 맡기기를 권했으며, 부견이 왕맹에게 말했다.

“이공이 그대를 아는 것은, 포숙아가 관중을 아는 것과 같다.”

왕맹이 형의 예로 이위를 섬겼다.

연주 모용준이 단감을 참수하고, 그 무리 3천여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가을 7월, 진나라 대장군 기주목 장평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니, 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8월 정미 초하루, 황후 하씨를 세웠다. 황후는 전 산기시랑 여강인 하준의 딸이다. 예절은 함강 연간의 예와 같았으나, 경축하지는 않았다.

진왕 부견이 권익을 급사황문시랑으로, 설찬을 중서시랑으로 임명하고, 왕맹과 함께 기밀을 관장하게 했다. 9월, 태사 어준 등의 관직을 추복하고 예를 갖추어 개장하였으며, 자손 중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재능에 따라 등용하였다.

장평이 신흥·안문·서하·태원·상당·상군의 땅을 차지하고, 영채 3백여 개, 이민족과 한인 10여만 호를 거느리며, 정과 진의 관원을 설치하여 연나라와 진나라와 적국이 되고자 했다. 겨울 10월, 장평이 진나라 변경을 침략하자, 진왕 부견이 진공 부류로 하여금 병주·기주 제군사를 도독하고 병주목을 더하여, 포판을 진수하여 그를 막게 했다.

11월 계유, 연주 모용준이 계성에서 업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나라 태후 순씨가 선명대에 유람하다가 동해공 부법의 집 문 앞에 수레와 말이 모인 것을 보고, 마침내 진왕 부견에게 해로울까 두려워하여 이위와 함께 모의하여 부법을 죽이도록 했다. 부견이 부법과 동당에서 이별하며 목놓아 울며 피를 토했다. 추시하여 헌애공이라 하고, 그의 아들 부양을 동해공으로, 부부를 청하공으로 봉했다.

12월 을사, 연주 모용준이 업성 궁전에 들어가 대사면하고, 동작대를 다시 세웠다.

태상 왕표지를 좌복야로 삼았다.

진왕 부견이 상서성(尙書省)을 순시하다가 문서 처리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좌승(左丞) 정탁(程卓)을 파면하고 왕맹(王猛)으로 대체하였다. 부견은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고 해이해진 직무를 닦으며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빈곤한 자를 구휼하며 모든 신을 공경히 예우하고 학교를 세우며 절의를 포창하고 끊긴 가문의 대를 이어주니 진나라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봄, 정월, 사도(司徒) 사마욱(司馬昱)이 머리를 조아리며 조정의 대권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당초 풍앙(馮鴦)이 상당(上黨) 땅으로 항복한 후 다시 장평(張平)에게 의탁하다가 스스로 전연(前燕)에 귀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배반하였다. 2월, 전연의 사도 상용왕(上庸王) 모용평(慕容評)이 풍앙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전진왕 부견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장평을 토벌하며 등강(鄧羌)을 전봉도호(前鋒督護)로 삼아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분수(汾水) 가에 주둔하게 하였다. 장평은 양자 장호(張蚝)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장호는 힘이 세고 민첩하며 건장하여 소를 끌고 뒤로 물러갈 수 있었고, 성벽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는 등강과 10여 일 동안 대치하였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3월, 부견이 동벽(銅壁)에 이르자 장평이 전 병력을 내어 싸웠는데, 장호가 단기로 큰 소리치며 진秦 진영으로 4, 5차례 돌진하였다. 부견이 장호를 생포하는 자에게 상을 걸자 응양장군(鷹揚將軍) 여광(呂光)이 장호를 찌르고 등강이 사로잡아 부견에게 바치니 장평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흩어졌다. 장평이 두려워하며 항복을 청하자 부견이 그를 우장군(右將軍)으로 삼고 장호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삼았다. 장호는 본래 성이 궁(弓)씨로 상당 사람인데, 부견이 매우 총애하고 우대하여 항상 곁에 머물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등강과 장호를 모두 만인적(萬人敵)이라 칭송하였다. 여광은 여파루(呂婆樓)의 아들이다. 부견은 장휘의 부하 백성 3천여 호를 장안으로 옮겼다.

갑술일, 전연주 모용준(慕容俊)이 영군장군(領軍將軍) 모여근(慕輿根)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사도 모용평을 도와 풍앙을 치게 하였다. 모여근이 급속히 공격하려 하자 모용평이 말하였다. "풍앙의 진영은 견고하니 천천히 공격함이 낫소." 모여근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께서 성 아래에 도착한 지 이미 한 달이 되었으나 아직 교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적이 국가의 병력이 이뿐인 줄 알고 서로 굳게 지키며 요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병마가 막 도착하여 형세가 한창 성하니 적들은 두려워하고 모두 이탈할 마음을 품어 계책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급속히 공격하자 풍앙과 그 무리들이 과연 서로 의심하여 풍앙은 야왕(野王)으로 달아나 여호(呂護)에게 의탁하고 그의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여름, 4월, 전진왕 부견이 옹주(雍州)로 가서 오제(五帝)를 제사하고, 6월에는 하동(河東)으로 가서 후토(后土)를 제사하였다.

가을, 8월, 예주자사(豫州刺史) 사혁(謝奕)이 죽었다. 사혁은 사안(謝安)의 형이다. 사도 사마욱이 건무장군(建武將軍) 환운(桓云)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환운은 환온(桓溫)의 아우이다. 사마욱이 복야(僕射) 왕표지(王彪之)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표지가 말하였다. "환운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환온이 상류(上游)를 점거하여 이미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의 아우가 또 서쪽 번방에 있게 된다면 병권이 한 집에 집중되어 이는 뿌리를 깊게 하고 근본을 튼튼히 하는 방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인재는 미리 헤아릴 수 없으니, 다만 전하와 대적하지 않을 사람을 택하실 따름입니다." 사마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소." 임신일, 오흥태수(吳興太守) 사만(謝萬)을 서중랑장(西中郞將)으로 삼아 사주(司州)·예주(豫州)·기주(冀州)·병주(幷州)의 모든 군사를 감독하고 예주자사로 삼았다.

왕희지(王羲之)가 환온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사만의 재능은 세상을 경륜할 만한 인재이니, 만약 그를 조정에 두신다면 진실로 후진 중의 뛰어난 인물일 것입니다. 지금 그로 하여금 혼란스럽고 피폐한 지방에서 일하게 하심은 거의 그의 재능을 거스르고 직무를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또 사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그대의 초월하고 빼어난 기운으로 졸렬한 무리들과 몸을 낮추어 함께 일하는 것이 진실로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통달한 식견이란 마땅히 시세에 따라 나아감과 물러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항상 군사 중 가장 아래 계층의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하신다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만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서주(徐州)·연주(兗州) 2주 자사 순선(荀羨)이 병이 들자 어사중승(御史中丞) 규담(郗曇)을 순선의 군사(軍司)로 삼았다. 규담은 규감(郗鑒)의 아들이다.

9월, 경진일, 전진왕 부견이 장안으로 돌아와 태위(太尉) 후수(侯守)를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이때 전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부견이 음식을 줄이고 음악을 거두며 후비 이하로 하여금 모두 비단 옷을 벗게 하고 산림과 못의 이익을 개방하여 관청과 백성이 함께 누리게 하며 군사 활동을 중지하고 백성을 휴양시키니 가뭄이 재해로 이어지지 않았다.

왕맹이 날로 총애와 신임을 받으며 대권을 잡자 종실 친척과 공신들이 대부분 그를 시기하였다. 특진(特進) 고성후(姑臧侯) 번세(樊世)는 본래 저족(氐族) 호족으로 일찍이 전진주 부건(苻健)을 도와 관중(關中)을 평정하였는데, 그가 왕맹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밭을 갈아 너는 먹을 것을 얻는단 말인가?" 왕맹이 말하였다. "네가 밭을 갈 뿐만 아니라 밥도 짓게 하겠다!" 번세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반드시 네 목을 장안 성문에 달아 놓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세상에 살지 않겠다!" 왕맹이 이 일을 부견에게 아뢰었다. 부견이 말하였다. "이 늙은 저인을 반드시 죽여야 백관이 비로소 정돈될 것이다." 마침 번세가 입궁하여 일을 아뢸 때 부견 앞에서 왕맹과 논쟁하다가 번세가 일어나 왕맹을 치려 하였다. 부견이 크게 노하여 번세를 참수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왕맹을 볼 때면 숨을 죽이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후조(後趙)가 멸망할 때 그 장수 장평(張平), 이력(李歷), 고창(高昌)이 모두 사자를 보내 전연에 항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진(東晉)에 항복하고 또 전진에 항복하여 각각 작위를 받고 중립하여 스스로를 보존하려 하였다. 전연주 모용준이 사도 모용평을 보내 병주(幷州)에서 장평을 토벌하고, 사공(司空) 양오(陽騖)를 보내 동연(東燕)에서 고창을 토벌하고, 낙안왕(樂安王) 모용장(慕容臧)을 보내 복(濮) 땅에서 이력을 토벌하게 하였다. 양오가 여양(黎陽)에서 고창의 별장(別將)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력은 형양(滎陽)으로 도망가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병주의 백여 개 보루(堡壘)가 전연에 항복하자 모용준이 우복야(右僕射) 열관(悅綰)을 병주자사로 삼아 그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장평이 임명한 정서장군(征西將軍) 제갈양(諸葛驤) 등이 138개의 보루를 이끌고 전연에 항복하자 모용준이 모두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장평은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평양(平陽)으로 도망쳐 다시 전연에 항복을 청하였다.

겨울, 10월, 태산태수(泰山太守) 제갈유(諸葛攸)가 전연의 동군(東郡)을 공격하여 무양(武陽)으로 들어가자 전연주 모용준이 대사마(大司馬)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양오와 낙안왕 모용장의 군대를 통솔하여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제갈유가 패하여 달아나 태산으로 돌아가자 모용각이 마침내 황하를 건너 하남(河南) 땅을 취하고 각각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두었다.

전연주 모용준이 전진과 동진을 도모하려 하여 12월에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현존하는 장정(丁壯)을 조사하게 하고 호당 한 명의 장정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보병 150만을 이루고 이듬해 봄 낙양(洛陽)에서 대거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무읍(武邑) 사람 유귀(劉貴)가 상소하여 "백성이 피폐한데 병사 징발이 법규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극력 진언하였다. 모용준이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이에 삼정(三丁) 중 한 명, 오정(五丁) 중 두 명을 뽑는 방식으로 병사를 징발하고 기한을 늦추어 이듬해 겨울 업성(鄴城)에서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전연의 징발이 빈번하여 관청에서 각각 사자를 보내 길이 서로 뒤섞여 군현(郡縣)이 그 고통을 겪었다. 태위(太尉) 겸 영중서감(領中書監) 봉혁(封弈)이 청하기를 "지금부터 군사상 긴급한 일이 아니면 사자를 보내지 말고, 나머지 부세(賦稅) 징발은 모두 주군(州郡)에 책임을 맡기며, 여러 신하들이 보낸 탄핵과 감독 사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들을 모두 소환하소서."라고 하였다. 모용준이 그의 말을 따랐다.

前연의 태산태수 가견이 산치에 주둔하자, 순섬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공격했다. 가견이 거느린 병사는 겨우 700여 명이었고, 순섬의 병력은 가견의 열 배였다. 가견이 출전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병력이 적으니, 차라리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가견이 말했다. "굳게 지켜도 화를 면하지 못하니, 차라리 출전하는 것이 낫다." 이에 출전하여 몸소 병사들보다 앞서 나아가 순섬의 병사 천여 명을 죽이고 다시 성으로 퇴각했다. 순섬이 성을 공격하자, 가견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 뜻을 세워 공명을 이루고자 했으나, 매번 곤경에 부딪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굴욕을 견디며 사느니, 차라리 절개를 지키고 죽겠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지금 위급하고 곤란하여 계책을 펼칠 곳이 없으니, 너희는 떠나가도 좋다. 나는 여기 남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울며 말했다. "부군께서 나가지 않으시면, 저희도 모두 함께 죽겠습니다." 이에 가견을 부축하여 말에 올렸다. 가견이 말했다. "내가 만약 도망치려 했다면, 반드시 너희를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는 너희를 위해 결사一战을 하려 한다. 형세가 버티지 못하게 되거든 너희는 속히 떠나고, 다시 나를 걱정하지 마라!" 이에 성문을 열고 곧바로 돌진해 나갔다. 순섬의 군대가 사방에서 포위하자, 가견이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좌우로 활을 쏘아 적병이 모두 시위 소리에 쓰러졌다. 순섬의 병사가 많아, 참호 아래에서 다리를 베어 끊자, 가견의 사람과 말이 모두 빠져 생포되었고, 이에 산치를 함락시켰다. 순섬이 가견에게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대대로 진나라의 신하였는데, 어찌하여 근본을 저버리고 항복하지 않는가?" 가견이 말했다. "진나라가 스스로 중원을 버렸지, 내가 배반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이미 군주가 없으니, 강한 자에게 몸을 의탁하여 섬겼을 뿐이다. 이미 남을 섬겼는데, 어찌 절개를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젊어서부터 몸을 닦아 스스로를 세워, 후조와 전연을 거쳤으나 일찍이 뜻을 바꾸지 않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급히 나에게 항복을 권하는가!" 순섬이 다시 그를 꾸짖자, 가견이 노하여 말했다. "어린 놈아, 감히 아들과 딸을 대하듯 네 늙은 아비를 부리려 하느냐!" 순섬이 크게 노하여 그를 붙잡아 빗속에 두었고, 며칠 후 가견은 분개하고 원통해하며 죽었다.

전연의 청주자사 모용진이 사마 열명을 보내 태산을 구원하자, 순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전연이 다시 산치를 탈취했다. 전연의 주 모용준이 가견의 아들 가활을 임성태수로 임명했다.

순섬이 병이 중해져 조정으로 소환되었고, 극담을 북중랑장, 도독서·연·청·기·유오주제군사, 서·연이자사로 임명하여 하비에 주둔하게 했다.

전연의 오왕 모용수가 단말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모용령과 모용보를 낳았다. 단씨는 재주가 높고 성격이 강렬하여, 스스로 귀족 성씨라고 여겨 가축혼황후를 공손하게 섬기지 않았고, 가축혼씨는 이를 마음에 품고 원한을 품었다. 전연의 주 모용준은 평소 모용수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중상시 열호가 이 기회에 영락을 맞추어 단씨와 오국전서령 요동 사람 고필이 무고(巫蠱)를 행했다고 무고하여, 이로써 모용수까지 연루시키려 했다. 모용준이 단씨와 고필을 체포하여 대추장과 정위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으나, 단씨와 고필은 뜻이 굳세어 끝내 굴복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문과 심문이 나날이 급박해지자, 모용수가 그들을 가엾게 여겨 몰래 사람을 보내 단씨에게 말했다. "인생은 결국 한 번 죽는 것이니, 어찌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차라리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 단씨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겠는가! 만약 스스로 무고하여 악역한 죄를 뒤집어쓰면, 위로는 선조를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대왕에게 누를 끼칠 것이니,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 변박하고 대답함이 더욱 명확해졌고, 이로 인해 모용수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단씨는 결국 옥에서 죽었다. 모용준이 모용수를 외직인 평주자사로 발령하여 요동을 진수하게 했다. 모용수가 단씨의 여동생을 후실로 맞이하자, 가축혼씨가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신의 여동생 장안군을 모용수에게 시집보냈다. 모용수가 기뻐하지 않자, 이로부터 가축혼씨는 더욱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흉노 유관두의 부락이 대부분 배반하여 도망치자, 그는 두려워하며 동쪽으로 도망쳐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려다 반쯤 건넜을 때 얼음이 갈라져 뒤따르던 무리가 모두 유실기에게 귀부했고, 유관두는 대나라로 도망쳤다. 유실기는 유무환의 아들이었다.

봄, 2월에 전연의 국주 모용준이 아들 모용홍을 제북왕으로, 모용충을 중산왕으로 봉했다.

전연 사람이 단근을 죽였고, 단근의 아우 단사가 와서 투항했다.

전연의 국주 모용준이 포지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주나라 태자 진(姬晉)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재능이 뛰어난 아들은 얻기 어렵다. 경선(모용준의 아들 모용엽)이 죽은 이후로 나의 관자놀이는 이미 반백이 되었다. 그대들은 경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도좌장사 이적이 대답했다. "헌회태자가 동궁에 계실 때, 신이 중서자를 맡았사온데, 태자의 뜻과 학업을 신이 어찌 감히 모르겠습니까! 태자께서는 여덟 가지 큰 덕을 갖추셨습니다. 지극한 효성은 첫째요, 총명함은 둘째요, 깊고 강직함은 셋째요, 아첨을 미워하고 정직을 좋아함은 넷째요, 학문을 좋아함은 다섯째요, 다재다능함은 여섯째요, 겸허하고 공손함은 일곱째요, 선행을 즐겨 베푸심은 여덟째입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그대의 칭송은 다소 지나치지만, 이 아들이 만약 아직 있다면 내가 죽어도 근심이 없었을 것이다. 경무(태자 모용위)는 어떠한가?" 당시 태자 모용위가 곁에 시중들고 있었는데, 이적이 말했다. "황태자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비록 여덟 가지 큰 덕은 이미 들었사오나, 두 가지 결점이 아직 보충되지 않았습니다. 사냥과 놀이를 좋아하고 음악에 빠지는 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모용준이 고개를 돌려 모용위에게 말했다. "백양(이적의 자)의 말은 병을 고치는 좋은 약이니, 너는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 모용위는 마음속으로 매우 불복했다.

모용준이 전조의 주 석호가 그의 팔을 무는 꿈을 꾸고, 이에 석호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백금을 걸고 찾게 했다. 업성의 여자 이도가 이를 알고 고발하여, 동명관 아래에서 시체를 찾았는데, 시체는 뻣뻣하고 썩지 않았다. 모용준이 시체를 밟고 욕하며 말했다. "죽은 오랑캐 놈이, 감히 산 천자를 놀라게 하느냐!" 석호의 잔혹한 죄행을 낱낱이 들추며 채찍으로 시체를 때린 후, 장수에 던져 넣었으나 시체가 다리 기둥에 걸려 떠내려가지 않았다. 후에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왕망이 이 때문에 이도를 죽이고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전진의 평강호군 고리가 약양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영안위공 후가 이를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4월에 효기장군 등강과 진주자사 담철이 토벌하여 평정했다.

흉노 추장 유실기가 죽자, 그의 아우 유위진이 그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를 대신했다.

5월에 전진의 왕 부견이 하동으로 갔다. 6월에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감로로 고쳤다.

양주목 장관은 의심이 많고 각박하며 포악하여, 오직 자신의 애증에 따라 상벌을 행했다. 낭중 은순이 그를 간언했다. 장관이 말했다. "호랑이는 태어난 지 사흘이면 저절로 고기를 먹을 줄 알게 되니, 남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 이에 인심이 귀부하지 않았다. 보국장군 송혼은 성격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장관이 그를 꺼려 송혼과 그의 아우 송징을 죽이고, 이 기회에 양왕 장현경을 폐출시키고 스스로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하여, 수만 명의 병사를 징발하여 고장에 집결시켰다. 송혼이 이를 알고, 송징과 함께 장사 양화 등 4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급히 남성으로 돌진하여, 각 영에 고하며 말했다. "장관이 모반을 도모하니, 태후의 명령을 받들어 그를 주살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가 2천 명에 이르렀다. 장관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 싸웠으나, 송혼이 그를 격파했다. 장관의 부하 현노가 송혼을 찔렀으나 갑옷을 뚫지 못했고, 송혼이 그를 사로잡자 장관의 무리가 모두 항복했다. 장관과 그의 아우 장구는 모두 자살했고, 송혼이 그의 종족을 멸했다. 장현경이 송혼을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표기대장군, 주천군후로 임명하여 장관을 대신해 조정을 보필하게 했다. 송혼이 이에 장현경에게 양왕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양주목이라 부를 것을 청했다. 송혼이 현노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찔렀지만, 다행히 상처를 내지 못했다. 지금 내가 정사를 보필하니, 너는 두려운가?" 현노가 말했다. "나는 장관의 은혜를 입었으니, 다만 그대를 더 깊이 찌르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 은밀히 두려워할 것이 없소!" 송혼이 그의 의기를 가상히 여겨 심복으로 삼았다.

고창이 전연을 막아낼 수 없자, 가을 7월에 백마에서 도망쳐 형양으로 갔다.

전진왕 부견이 하동에서 돌아와, 효기장군 등강을 어사중승으로 임명했다. 8월, 함양내사 왕맹을 시중, 중서령으로 삼고 경조윤을 겸하게 했다. 특진, 광록대부 강덕은 태후의 동생으로, 주색에 빠져 횡포하고 강력하여 남의 재물과 자녀를 약탈하여 백성의 해가 되었다. 왕맹이 부임하자마자 강덕을 체포하여, 주문에 대한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저자거리에 시체를 내걸었다. 부견이 사자를 급히 보내 사면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왕맹과 등강은 뜻이 같아 악을 미워하고 잘못을 규탄하며 조사하여 처리함에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고, 수십 일 사이에 권귀와 황실 친척 중 죽임을 당하거나, 형을 받거나, 파면된 자가 20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 상하가 놀라 떨었고, 간사한 무리들은 숨을 죽였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었다. 부견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천하에 법도가 있음을 알겠도다!"

태산태수 제모유가 수륙 양군 2만 명을 이끌고 전연을 공격하여 석문으로 들어가 하중의 섬에 주둔했다. 전연 상용왕 모용평과 장락태수 부언이 보병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동아에서 제모유와 교전하여 제모유의 군대가 대패했다.

겨울 10월, 조서를 내려 사만을 하채로 진군하게 하고, 희담을 고평으로 진군하게 하여 전연을 공격하게 했다. 사만은 교만하고 방탕하며 사람을 거만하게 대하여, 오직 읊조리고 노래 부르며 스스로를 높일 뿐, 일찍이 부하들을 위무한 적이 없었다. 그의 형 사안이 이를 깊이 걱정하여 사만에게 말했다. "그대는 원수로서 마땅히 장수들을 자주 만나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오만하고 방종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사만이 이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았으나,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여의를 들어 사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정예 병사들이오." 여러 장수들이 더욱 그를 미워했다. 사안이 사만이 화를 면치 못할 것을 걱정하여, 이에 대솔 이하에 이르기까지 친히 방문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깊이 친근하게 부탁했다. 얼마 후, 사만이 무리를 이끌고 와수와 영수로 들어가 낙양을 구원하려 했으나, 희담이 병으로 물러나 팽성에 주둔했다. 사만이 전연 군대의 성세가 크다고 여겨 희담이 퇴각한 까닭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고, 이에 부하들은 놀라 흩어졌다. 사만은 초라하게 홀로 도망쳐 돌아왔고, 군사들은 그의 패배를 틈타 해치려 했으나, 사안의 연고로 그만두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 조서를 내려 사만을 서인으로 폐하고, 희담을 항저를 건무장군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허창, 영천, 초군, 패군 등의 성들이 잇달아 모두 전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진왕 부견이 왕맹을 이부상서로 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첨사로 승진시켰다. 11월, 다시 좌복야로 임명하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했다.

12월, 무릉왕 사혜의 아들 사□봉을 양왕으로 봉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신유일, 전연 국주 모용준이 병이 위독해져 대사마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내 병은 반드시 낫지 못할 것이다. 지금 두 나라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경모는 어리며, 나라에 어려움이 많으니, 내가 송 선공을 본받아 나라를 그대에게 맡기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모용각이 말했다. "태자는 비록 어리지만, 잔학함을 누르고 태평을 이룰 수 있는 군주입니다. 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정통을 범하겠습니까!" 모용준이 화를 내며 말했다. "형제 사이에 어찌 거짓된 마음을 꾸밀 필요가 있겠는가!" 모용각이 말했다. "폐하께서 만약 신이 천하의 중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어찌 어린 군주를 보좌하지 못하겠습니까!" 모용준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가 주공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적은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니, 그대가 잘 대우하라." 오왕 모용수를 불러 업성으로 돌아오게 했다.

전진왕 부견이 왕맹을 보국장군, 사례교위, 궁중에서 숙직하며 경비하는 임무, 복야, 첨사, 시중, 중서령으로 삼고, 관리 선발의 임무를 겸하게 하는 것은 예전과 같이 했다. 왕맹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산기상시 양평공 부융, 광록대부 산기상시 서하 사람 임군, 처사 경조 사람 주동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부견이 허락하지 않고, 부융을 시중, 중서감, 좌복야로, 임군을 광록대부로 삼아 태자가령을 겸하게 하고, 주동을 상서시랑으로 삼아 태자서자를 겸하게 했다. 왕맹은 당시 36세로, 1년에 다섯 번 승진하여 세력이 조정 안팎을 뒤흔들었다. 어떤 이가 그를 비방하면 부견이 항상 그 사람을 처벌했으므로, 여러 신하 중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좌복야 이위를 호군으로 겸임하게 하고, 우복야 양평로를 사지절, 도독북수제군사, 진북대장군으로 삼아 삭방 이서를 수비하게 하고, 승마사 가옹을 운중호군으로 삼아 운중 이남을 수비하게 했다.

전연이 징발한 군국의 군대가 모두 업성에 집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