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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

진기26

제 26 편

【진기二十六】 병자년(丙子年)부터 임오년(壬午年)까지 모두 7년이다.

열종효무황제 상지중(烈宗孝武皇帝上之中) 태원 원년(太元元年, 병자년, 서기 376년)

봄, 정월 임인 초하루에 효무제(孝武帝)가 관례를 행했다. 황태후가 조서를 내려 정권을 반환하고, 다시 숭덕태후(崇德太后)로 칭해졌다. 갑진일(초사흗날)에 대사면을 시행하고 연호를 바꿨다. 병오일(닷샛날)에 효무제가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았다. 회계내사(會稽內史) 치음(郗愔)을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 · 도독절강동오군제군사(都督浙江東五郡諸軍事)로, 서주자사(徐州刺史) 환충(桓沖)을 거기장군(車騎將軍) · 도독예강이주지육군제군사(都督豫江二州之六郡諸軍事)로 임명하고, 경구(京口)에서 고숙(姑孰)으로 옮겨 진수하게 했다. 사안(謝安)이 왕온(王蘊)을 지방 장관으로 삼으려 했기에, 먼저 환충의 서주자사 직을 해임시킨 것이다. 을묘일(열나흗날)에 사안에게 중서감(中書監)과 녹상서사(錄尚書事)를 더해 주었다.

2월, 신묘일(스무하루)에 전진(前秦) 천왕(天王) 부견(苻堅)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이 듣건대, 제왕이 현명한 이를 구할 때는 수고롭지만, 현명한 이를 얻으면 편안해진다고 했는데, 이 말이 참으로 들어맞는구나! 지난날 승상(왕맹)을 얻었을 때는 항상 제왕이 쉽게 되는 것 같았으나, 승상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짐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이미 반은 허옇게 세었으며,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어느새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구나. 지금 천하에 승상이 없으니, 혹시 정교(政敎)가 쇠퇴하고 무너질까 염려되니, 각각 시신(侍臣)을 나누어 보내 여러 군과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질고를 묻도록 하라."

3월, 전진 군대가 남향(南鄉)을 침범하여 점령했고, 산중의 만족(蠻族) 삼만 호(戶)가 전진에 항복했다.

여름, 5월, 갑인일(열닷샛날)에 대사면을 시행했다.

당초 장천석(張天錫)이 장옹(張邕)을 죽일 때, 유숙(劉肅)과 안정(安定) 사람 양경(梁景)이 모두 공로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로 인해 총애를 받아 장씨(張氏) 성을 하사받고 자신의 아들처럼 여겨져 정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천석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직접 처리하지 않았고, 적장자(嫡長子) 장대회(張大懷)를 폐위시키고 총애하던 첩(妾) 초씨(焦氏)의 아들 장대예(張大豫)를 세워 초씨를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으니, 인심이 분노하고 원망했다. 그의 종제(從弟)인 종사중랑(從事中郎) 장헌(張憲)이 관(棺)을 이고 나와 직언하며 간했으나, 장천석은 듣지 않았다. 전진 천왕 부견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장천석이 비록 스스로 번신(藩臣)이라 칭하고 관직을 받았으나, 신하로서의 도리가 순수하지 않으니, 사지절(使持節) · 무위장군(武衛將軍) 무도(武都) 사람 구장(苟萇), 좌장군(左將軍) 모성(毛盛), 중서령(中書令) 양희(梁熙), 보병교위(步兵校尉) 요장(姚萇)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서하(西河)에 접근하게 하고, 상서랑(尚書郎) 염부(閻負)와 양수(梁殊)는 조서를 받들어 장천석을 불러 입조하게 하라. 만약 왕명을 거역하면 진군하여 토벌하라." 이때 전진의 보병과 기병은 모두 13만 명이었고, 군사(軍司) 단겸(段鏗)이 주앙(周颺)에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군대로 싸우는데, 누가 감당하겠는가!" 주앙이 말했다. "융적(戎狄) 이래로 이런 적은 없었다." 부견은 또 진주자사(秦州刺史) 구지(苟池), 하주자사(河州刺史) 이변(李辯), 양주자사(涼州刺史) 왕통(王統)에게 명하여 세 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구장의 후원군이 되게 했다.

가을, 7월, 염부와 양수가 고장(姑臧)에 도착했다. 장천석이 속관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입조하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요, 만약 따르지 않으면 진(秦) 군대가 반드시 이를 터이니, 어찌해야 하는가?" 금중록사(禁中錄事) 석륵(席仂)이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그들에게 귀중한 재물을 보내어 그 군대를 물린 뒤, 천천히 계책을 세우는 것이, 굽혔다 폈다 하는 전략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여 말했다. "우리는 대대로 진(晉) 조정을 섬겨 충성과 절의가 천하에 알려졌소. 지금 한번 적의 조정에 투신하면 조상을 욕되게 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소! 게다가 하서(河西)는 지세가 험준하여 백 년 동안 근심이 없었소. 만약 경내의 모든 정예 병력을 동원하고, 서쪽으로는 서역(西域)을 끌어들이고, 북쪽으로는 흉노(匈奴)와 연합하여 그들을 막는다면,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없다고 장담하겠소!" 장천석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항복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염부와 양수에게 말하게 했다. "너희는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냐, 죽어서 돌아가고 싶으냐?" 양수 등이 말과 기세가 굽히지 않자, 장천석이 노하여 그들을 군문(軍門) 앞에 묶어 놓고 군사들에게 번갈아 활을 쏘게 하며 말했다. "맞히지 못하는 자는 나와 마음이 같지 않은 자다." 그의 어머니 엄씨(嚴氏)가 울며 말했다. "진(秦)의 군주는 한 주(州)의 땅으로 천하를 휩쓸며 다스려, 동쪽으로 선비(鮮卑)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파촉(巴蜀)을 취하여, 군대가 나아갈 때 장애가 없었고,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소. 네가 만약 그에게 항복한다면 몇 년의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좁은 한 구석에 의지하여 큰 나라에 맞서고, 또 그 사자를 죽이니, 망하는 것이 멀지 않았소!" 장천석이 용양장군(龍驤將軍) 마건(馬建)을 보내 2만 명의 군대로 전진을 막게 했다.

전진 사람들은 장천석이 염부와 양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8월에 양희, 요장, 왕통, 이변이 청석진(清石津)에서 강을 건너 하회성(河會城)에서 양(凉)나라의 효렬장군(驍烈將軍) 양제(梁濟)를 공격하니 양제가 항복했다. 갑신일(초이레)에 구장이 석성진(石城津)에서 강을 건너 양희 등과 합세하여 전축성(纏縮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마건이 두려워하여 양비(楊非)에서 물러나 청새(清塞)를 지켰다. 장천석이 또 정동장군(征東將軍) 장거(掌據)를 보내 3만 명의 군대로 홍지(洪池)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5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금창성(金昌城)에 주둔했다. 안서장군(安西將軍) 돈황(敦煌) 사람 송호(宋皓)가 장천석에게 말했다. "신은 낮에는 인사를 관찰하고, 밤에는 천문을 관측하건대, 진(秦) 군대는 막을 수 없사오니, 항복하심이 낫습니다." 장천석이 노하여 송호를 선위호군(宣威護軍)으로 강등시켰다. 광무태수(廣武太守) 신장(辛章)이 말했다. "마건은 항오(行伍) 출신이니, 반드시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을 것입니다." 구장이 요장을 보내 정예 기병 3천을 선봉으로 삼게 했다. 경인일(열사흗날)에 마건이 1만 명을 이끌고 맞서 항복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신묘일(열나흗날)에 구장과 장거가 홍지에서 교전하여 장거가 패배했고, 그의 전마(戰馬)가 난병(亂兵)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의 속관 동유(董儒)가 자기 말을 그에게 주었다. 장거가 말했다. "내가 세 번이나 여러 군(軍)을 도독(都督)하고, 두 번 부절(符節)을 잡았으며, 여덟 번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열 번 외병(外兵)을 통솔했으니, 받은 총애와 신임이 지극했도다. 지금 마침내 이곳에서 곤경에 처했으니, 이는 나의 죽을 자리라, 어디로 가겠는가!" 마침내 막사에 들어가 투구를 벗고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진(秦) 군대가 군사 석륵을 죽였다. 계사일(열엿샛날)에 진(秦) 군대가 청새에 들어가자, 장천석이 사병(司兵) 조충철(趙充哲)을 보내 군대로 맞서게 했다. 진(秦) 군대가 조충철과 적안(赤岸)에서 교전하여 조충철을 크게 무찌르고,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3만 8천 명이었으며, 조충철은 전사했다. 장천석이 성을 나가 친히 싸웠으나, 성 안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장천석이 수천 기병과 함께 고장으로 도망쳤다. 갑오일(열이레)에 진(秦) 군대가 고장에 도착하자, 장천석이 흰 수레를 타고 흰 말을 몰며,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관을 이고 군문에 항복했다. 구장이 그의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운 뒤, 그를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양주(涼州)의 군과 현이 모두 전진에 항복했다.

9월, 전진 천왕 부견이 양희를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아 고장을 진수하게 했다. 호족(豪族) 7천여 호를 관중(關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처럼 편안히 살게 했다. 장천석을 귀의후(歸義侯)로 봉하고 북부상서(北部尚書)를 제수했다. 당초 전진 군대가 출발할 때, 먼저 장천석을 위해 장안에 저택을 지어 놓았다가, 도착하자 그곳에 살게 했다. 장천석의 진흥태수(晉興太守) 농서(隴西) 사람 팽화정(彭和正)을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치중종사(治中從事) 무흥(武興) 사람 소응(蘇膺), 돈황태수(敦煌太守) 장렬(張烈)을 상서랑(尚書郎)으로, 서평태수(西平太守) 금성(金城) 사람 조응(趙凝)을 금성태수(金城太守)로, 고창(高昌) 사람 양우(楊干)를 고창태수(高昌太守)로 임명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 재능에 따라 발탁하여 임용했다.

양희는 청렴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아껴 하우(河右) 지역이 안정되었고, 장천석의 무위태수(武威太守) 돈황 사람 색반(索泮)을 별가(別駕)로, 송호를 주부(主簿)로 임명했다. 서평(西平) 사람 곽호(郭護)가 병사를 일으켜 전진을 공격하자, 양희가 송호를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했다.

환충이 전진이 양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주자사(兗州刺史) 주서(朱序), 강주자사(江州刺史) 환석수(桓石秀)와 형주도호(荊州督護) 환비(桓罴)를 보내 면수(沔水)와 한수(漢水) 일대에서 유격하며 양주의 성원이 되게 하고, 또 예주자사(豫州刺史) 환이(桓伊)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수양(壽陽)으로 향하게 하며, 회남태수(淮南太守) 유파(劉波)를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서 배를 띄워, 전진을 교란하여 양주를 구원하려 했다. 양주가 패망하여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철수했다.

당초 애제(哀帝)가 전조(田租)를 감면하여, 묘(畝)당 두 승(升)을 거두었다. 을사일(스무여드렛날)에 전지(田地)에 따라 조세를 거두는 제도를 폐지하고, 왕공 이하로는 사람마다 세미(稅米) 삼 석(斛)을 내고, 요역(徭役)을 지는 자는 면제해 주었다.

겨울, 10월, 회북(淮北)의 백성을 회남(淮南)으로 옮겼다.

유위진(劉衛辰)이 대국(代國)의 압박을 받아 전진(前秦)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전진 천왕 부견(苻堅)은 유주자사 행당공(行唐公) 부락(苻洛)을 북토대도독(北討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군사 10만을 이끌고 대국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병주자사 구난(俱難), 진군장군 등강(鄧羌), 상서 조천(趙遷), 이유(李柔), 전장군 주융(朱肜), 전금장군 장호(張蚝), 우금장군 곽경(郭慶)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20만을 이끌고 동쪽은 화룡(和龍)에서 출발하고 서쪽은 상도(上都)에서 출발하여 모두 부락과 합류하게 하고, 유위진을 길잡이로 삼았다. 부락은 부청(苻菁)의 동생이다.

구장(苟萇)이 양주(涼州)를 정벌할 때, 양무장군 마휘(馬暉)와 건무장군 두주(杜周)를 보내 8천 기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은숙(恩宿)에서 출발하여 장천석(張天錫)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고장(姑臧)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다. 마휘 등이 늪지에서 행군하다가 물이 불어나 기한을 어겼으니, 법률에 따라 참수형에 해당하였다. 담당 관청에서 그들을 소환하여 옥에 가두도록 주청하였다. 전진 천왕 부견이 말하였다: "물은 봄과 겨울에는 마르고 가을과 여름에는 넘치는 법이다. 이는 구장이 일을 잘못 판단한 것이지 마휘 등의 죄가 아니다. 지금 천하에 일이 있으니,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공을 세워 죄를 갚도록 명해야 한다. 마휘 등에게 명하여 돌아서 북쪽 군대에 합류하여 색로(索虜, 대국)를 공격하여 죄를 씻게 하라."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만 리 밖에서 장수를 소환하는 것은 급한 상황에 대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부견이 말하였다: "마휘 등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니, 상식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마휘 등은 과연 갑절로 길을 재촉하여 빨리 행군하여 마침내 동로군(東路軍)을 따라잡았다.

11월, 기사(己巳)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대왕(代王)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백부(白部)와 독고부(獨孤部)를 보내 남쪽으로 전진 군대를 막게 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다시 남부대인(南部大人) 유고인(劉庫仁)을 보내 10만 기병을 이끌고 막게 하였다. 유고인은 유위진의 동족이자 탁발십익건의 생질(甥姪)인데, 전진 군대와 석자령(石子嶺)에서 싸워 크게 패하였다. 탁발십익건이 병들어 친히 군대를 지휘할 수 없자, 여러 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쳐 음산(陰山) 이북으로 갔다. 고차(高車) 여러 부족이 모두 배반하여 사방에서 약탈하니 목축을 할 수 없게 되자, 탁발십익건은 다시 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전진 군대가 점차 물러난다는 소식을 듣고, 12월에 탁발십익건은 운중(雲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십익건은 나라의 절반을 아우 탁발고(拓跋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탁발고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탁발근(拓跋斤)이 지위를 잃고 원한을 품었다. 세자(世子) 탁발식(拓跋寔)과 그의 아우 탁발한(拓跋翰)이 일찍 죽고, 탁발식의 아들 탁발규(拓跋珪)는 아직 어렸으며, 모용비(慕容妃)의 아들 탁발염파(拓跋閼婆), 탁발수구(拓跋壽鳩), 탁발흘근(拓跋紇根), 탁발지간(拓跋地干), 탁발력진(拓跋力真), 탁발굴돌(拓跋窟咄)은 모두 성장하였으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당시 진(秦) 군대가 아직 군자진(君子津)에 있었는데, 여러 왕자들이 매일 밤 무기를 들고 경계하며 호위하였다. 탁발근이 이 기회를 틈타 십익건의 서자(庶子) 탁발식군(拓跋寔君)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모용비의 아들을 세우려 하여 먼저 당신을 죽이려 하오. 그래서 요즘 여러 왕자들이 매일 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장막을 둘러싸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오." 탁발식군이 이 말을 믿고 마침내 여러 아우들을 죽이고 십익건도 죽였다. 그날 밤, 여러 왕자들의 아내와 부족 사람들이 진군 진영으로 달려가 알렸고, 진나라 장수 이유와 장호가 군대를 이끌고 운중으로 향했다. 부중(部衆)은 흩어져 도망가고 나라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탁발규의 어머니 하씨(賀氏)가 탁발규를 데리고 하눌(賀訥)에게로 도망쳤다. 하눌은 하야간(賀野干)의 아들이다. 진왕 부견이 대나라 장사(長史) 연봉(燕鳳)을 불러 대나라에 화란이 일어난 까닭을 묻자, 연봉이 자세히 고하였다. 부견이 말하였다: "천하의 죄악은 모두 같구나." 이에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체포하여 장안(長安)으로 보내 거열형(車裂刑)에 처하였다. 부견이 탁발규를 장안으로 옮기려 하자, 연봉이 간절히 청하여 말하였다: "대왕이 막 세상을 떠나 신하들과 무리는 배반하고 흩어졌으며, 남은 손자는 어리고 통솔할 사람이 없습니다. 대나라의 다른 부족 대인인 유고인은 용감하고 지혜가 있으며, 철불부(鐵弗部)의 위진은 교활하고 변덕스러워 홀로任用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여러 부족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 두 사람이 통솔하게 하소서. 이 두 사람은 평소 깊은 원한이 있어 그 형세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의 손자가 점차 성장하면 다시 왕으로 세우소서. 이것이야말로 폐하께서 대나라를 멸망에서 구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은덕이어서, 그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침범하거나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되게 할 것이니, 이는 변방을 안정시키는 좋은 계책입니다." 부견이 그의 말을 따라 대나라 백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황하 이동 지역은 유고인에게, 황하 이서 지역은 위진에게 속하게 하고 각각 관직과 작위를 주어 무리를 통솔하게 하였다. 하씨는 탁발규를 데리고 독고부로 돌아와 남부대인 장손숭(長孫嵩), 원타(元佗) 등과 함께 유고인에게 의탁하였다. 행당공 부락이 십익건의 아들 탁발굴돌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그를 장안으로 옮겼다. 부견은 탁발굴돌을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부견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장천석은 조상의 업을 이어 백년의 공업에 힘입어 하서(河西)에서 제멋대로 호령하며 먼 구석에서 배반하고 어지럽혔다. 색두(索頭) 부족은 대대로 삭북(朔北)을 넘어 지역을 나누고, 동쪽으로 예맥(穢貊)을 손님으로 삼고 서쪽으로 오손(烏孫)과 교류하며 백만의 궁수를 보유하여 호랑이처럼 운중을 굽어보았다. 이에 두 장수를 명하여 각각 교활한 적을 토벌하게 하였더니, 전쟁이 일 년을 넘기지 않고 두 흉악한 무리를 완전히 섬멸하고 백만 명을 사로잡아 항복시켰으며, 강토를 구천 리를 개척하였다. 오제(五帝) 시대에도 복종하지 않았고 주(周)나라와 한(漢)나라가 미치지 못했던 곳이, 간역(輾譯, 통역)을 거쳐 조공하고 풍화를 느껴 직분을 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관청에서는 속히 공을 논하여 상을 주고, 장수와 병사는 모두 5년간 조세를 면제하며 작위 3급을 더하라." 이에 행당공 부락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가봉하고 등강을 병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양평국(陽平國) 상시(常侍) 모용소(慕容紹)가 은밀히 그의 형 모용해(慕容楷)에게 말하였다: "진(秦)은 그 강함에 의지하여 승리를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북쪽으로는 운중을 지키고 남쪽으로는 촉군(蜀郡)과 한중(漢中)을 지키며, 만 리 밖에서 물자를 수송하느라 길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군대는 밖에서 피폐하고 백성은 안에서 곤궁하니, 위태롭고 망할 때가 가까웠다. 관군장군(冠軍將軍) 모용수(慕容垂, 자는 숙인(叔仁))는 지혜와 모략이 탁월하여 뛰어나니 반드시 연(燕)나라의 국운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들은 다만 자신을 아껴 때를 기다릴 뿐이다!"

처음에 진(秦) 사람들이 양주를 함락시킨 후, 서쪽의 저족(氐族)과 강족(羌族)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진왕 부견이 말하였다: "그들은 종족과 부락이 뒤섞여 살아 통일되지 않으니, 중원의 큰 근심이 될 수 없다. 먼저 회유하여 타일러 조세를 거두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때 가서 토벌하라." 이에 전중장군(殿中將軍) 장순(張旬)을 보내 선유(宣諭)하고 위문하게 하고, 정중장군(庭中將軍) 위갈비(魏曷飛)가 2만 7천 기병을 이끌고 그를 따르게 하였다. 위갈비가 그들이 험지를 믿고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군대를 놓아 공격하게 하고 크게 노략질한 후 돌아왔다. 부견이 그가 명령을 어긴 것에 크게 노하여 그를 곤장 200대를 치고, 전봉독호(前鋒督護) 저안(儲安)을 목 베어 저족과 강족에게 사과하였다. 저족과 강족이 매우 기뻐하여 항복하고 공물을 바친 부락이 8만 3천여 개에 이르렀다. 옹주(雍州)의 사족(士族)으로서 전란으로 인해 하서(河西)에 흘러들어왔던 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유고인은 흩어진 무리들을 각각 초무하여 은덕과 신의가 매우 드러났으며, 탁발규를 섬김에 있어 은근하고 두루 갖추었고, 그의 부족이 흥하거나 망하는 것에 따라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항상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천하 사람들보다 높은 뜻을 가지고 있어 반드시 조상의 업을 회복하고 빛낼 것이니, 너희는 삼가 대접해야 한다." 진왕 부견이 그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광무장군(廣武將軍)을 가봉하고 기치와 의장을 내렸다.

유위진은 지위가 유고인 아래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 노하여 진나라의 오원태수(五原太守)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유고인이 유위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음산 서북쪽 천여 리까지 추격하여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또 서쪽으로 고적부(庫狄部)를 공격하여 그 부락을 옮겨 상간천(桑干川)에 안치하였다. 오랜 후, 부견이 유위진을 서선우(西單于)로 삼아 하서의 여러 부족을 감독하고 통솔하게 하여 대래성(代來城)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 해에 걸복사번(乞伏司繁)이 죽고, 그의 아들 걸복국인(乞伏國仁)이 뒤를 이었다.

열종(烈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상지중(上之中) 태원(太元) 2년(정축, 377년)

봄에, 고구려, 신라, 서남이가 모두 사신을 전진에 보내 조공을 바쳤다. 전조의 장작공조(將作功曹)였던 웅막(熊邈)이 여러 차례 전진의 왕 부견(苻堅)에게 석씨(石氏)의 궁전과 기물, 완호(玩好)의 성대함을 말하자, 부견은 웅막을 장작장사(將作長史)로 임명하고 상방승(尚方丞)을 겸하게 하여, 대규모로 선박과 병기를 수선하고 금은으로 장식하게 하여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었다. 모용농(慕容農)이 몰래 모용수(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왕맹(王猛)이 죽은 후로 진(秦)나라의 법령 제도가 날로 쇠퇴하고 해이해졌는데, 지금 또 사치를 더하니 재앙이 장차 이르려 하며, 도참(圖讖)의 말이 곧 응험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영웅호걸과 사귀고 포섭하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셔야 하니,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수가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환활(桓豁)이 상소를 올려 연주자사(兖州刺史) 주서(朱序)를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임명하여 양양(襄陽)을 진수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가을, 7월, 정미일(丁未日)에 상서복야(尚書僕射) 사안(謝安)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였으나, 사안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다시 시중(侍中)과 양(揚)·예(豫)·서(徐)·연(兖)·청(青) 5주(州) 제군사(諸軍事)를 더해 주었다.

병진일(丙辰日)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형주자사(荊州刺史) 환활이 죽었다. 겨울, 10월, 신축일(辛丑日)에 환충(桓沖)을 도독강(都督江)·형(荊)·양(梁)·익(益)·영(寧)·교(交)·광(廣) 7주제군사(七州諸軍事) 겸 형주자사로 임명하고, 환충의 아들 환사(桓嗣)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임명하였다. 또 오병상서(五兵尚書) 왕온(王蘊)을 도독강남제군사(都督江南諸軍事)로 삼고 가절(假節)을 주며 서주자사(徐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정서사마(征西司馬) 겸 남군상(南郡相) 사현(謝玄)을 연주자사로 임명하고 광릉상(廣陵相)을 겸하게 하며 감강북제군사(監江北諸軍事)로 삼았다. 환충은 전진 사람들이 강성해지자 강남으로 옮겨 지키려고 생각하여, 상소를 올려 강릉(江陵)에서 상명(上明)으로 진을 옮기고, 관군장군(冠軍將軍) 유파(劉波)에게 강릉을 지키게 하며 자의참군(咨議參軍) 양량(楊亮)에게 강하(江夏)를 지키게 할 것을 청하였다. 왕온이 서주자사의 직책을 굳게 사양하자, 사안이 말하기를 “그대는 황후의 아버지라는 현저한 지위에 있으면서, 마땅히 가볍게 자신을 낮추어 조정의 은우(恩遇)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온이 임명을 받아들였다.

당초, 중서랑(中書郎) 극초(郗超)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의 아버지 극음(郗愔)의 직위와 대우가 사안 위에 있어야 하는데, 사안이 조정에 들어와 기요(機要)를 장악한 반면 극음은 한가하게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자, 항상 말과 얼굴빛에 분한과 울적함을 드러내며 사씨(謝氏)와 틈이 생겼다. 이때 조정이 진(秦)나라 군대의 침범을 걱정하여 조서를 내려 북방을 진수하고 방어할 만한 문무의 좋은 장수를 구하자, 사안이 조카 사현을 조서에 응하게 하였다. 극초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안의 지혜가 능히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 자기 친척을 천거하였고, 사현의 재능이 충분히 그 천거한 바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극초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사현과 함께 환공(桓公)의 부중(府中)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인재를 쓰는 것을 보니 비록 작은 일이라도 적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를 안다.”라고 하였다. 사현이 용맹한 병사를 모집하여 팽성(彭城) 사람 유뢰지(劉牢之) 등 몇 사람을 얻었다. 유뢰지를 참군(參軍)으로 임명하고, 항상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싸우면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당시에 ‘북부병(北府兵)’이라 불리며 적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임인일(壬寅日)에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散騎常侍) 왕표지(王彪之)가 죽었다. 당초, 사안이 궁전을 증축하고 수리하려 하자, 왕표지가 말하기를 “중흥(中興) 초기에 동부(東府)를 궁전으로 삼았는데 매우 간략하고 누추하였습니다. 소준(蘇峻)의 난 때 성제(成帝)가 난대도좌(蘭臺都坐)에 거처하였는데 거의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이에 별도로 신궁(新宮)을 지었습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에 비하면 비록 간략하나, 강을 건너온 초기에 비하면 사치한 편입니다. 지금 적구(敵寇)가 바로 강성한데 어찌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수고롭고 시끄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안이 말하기를 “궁실이 파손되고 누추하면 후인들이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표지가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중임을 맡은 자는 마땅히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정사를 맑고 화목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인데, 어찌 궁실을 짓는 것을 능사로 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안이 그의 의견을 바꾸지 못하였으므로, 왕표지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

12월, 임해태수(臨海太守) 극초가 죽었다. 당초, 극초가 환씨(桓氏)와 당을 맺었으나, 아버지 극음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을 알았기에 알리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한 상자의 편지를 꺼내 문생(門生)에게 주며 말하기를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니, 내가 죽은 뒤에 아버지께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여 음식과 잠을 줄이시거든 이 상자를 보여 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불태워라.”라고 하였다. 얼마 후 극음이 과연 슬퍼하고 애석해 하여 병이 났는데, 문생이 상자를 올리니 그 안에는 모두 환온(桓溫)과 왕래하며 은밀히 모의한 편지들이었다. 극음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놈이 죽은 것이 이미 너무 늦었다!”라고 하고는 다시는 울지 않았다.

열종효무황제(烈宗孝武皇帝) 상지중(上之中) 태원(太元) 3년(무인, 서기 378년)

봄, 2월, 을사일(乙巳日)에 새 궁전을 짓기 시작하여 황제가 회계왕(會稽王)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진의 천왕 부견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 수상서령(守尚書令) 장락공(長樂公) 부비(苻丕), 무위장군(武衛將軍) 구장(苟萇), 상서(尚書) 모용위(慕容暐)를 보내 보병과 기병 7만 명을 거느리고 양양을 침범하게 하고, 형주자사 양안(楊安)에게는 번성(樊城)과 등현(鄧縣)의 무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며, 정로장군(征虜將軍) 시평(始平) 사람 석월(石越)에게는 정예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노양관(魯陽關)으로 나가게 하고, 경조윤(京兆尹) 모용수, 양무장군(揚武將軍) 요장(姚萇)에게는 무리 5만 명을 거느리고 남향(南鄉)으로 나가게 하며, 영군장군(領軍將軍) 구지(苟池), 우장군(右將軍) 모당(毛當), 강노장군(强弩將軍) 왕현(王顯)에게는 무리 4만 명을 거느리고 무당(武當)으로 나가게 하여, 함께 양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전진 군대가 면수(沔水) 북쪽 기슭에 이르렀는데, 양주자사 주서는 전진이 배가 없다고 생각하여 방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석월이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자 주서가 놀라고 당황하여 중성(中城)을 굳게 지켰다. 석월이 외성(外城)을 함락시키고 배 100여 척을 노획하여 나머지 군대를 건너게 하였다. 장락공 부비가 모든 장수를 독려하여 중성을 공격하였다. 주서의 어머니 한씨(韓氏)가 전진 군대가 장차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직접 성벽에 올라 살펴보다가 서북쪽 모퉁이가 견고하지 않다고 여겨, 100여 명의 비자(婢子)와 성중의 성년 여자들을 거느리고 성 안에 비스듬한 성 하나를 쌓았다. 전진 군대가 도착했을 때 서북쪽 모퉁이가 과연 무너졌으나, 무리들이 새 성으로 옮겨 지켰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그것을 부인성(夫人城)이라 불렀다. 환충은 상명에 있으면서 7만 명의 무리를 거느렸으나, 전진 군대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부비가 급히 양양을 공격하려 하자, 구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는 적보다 열 배나 많고, 양식은 산처럼 쌓여 있으니, 다만 점차 한수와 면수 일대의 백성을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으로 옮기고, 그들의 수송로를 막고 원병을 끊으면 마치 그물 속의 새와 같아서 잡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어찌 많은 장수와 병사를 죽이며 급히 성공을 바라십니까?”라고 하였다. 부비가 그의 말을 따랐다. 모용수가 남양(南陽)을 함락시키고 태수 정예(鄭裔)를 사로잡아, 부비와 양양에서 합류하였다.

가을, 7월, 새 궁전이 완성되었다. 신사일(辛巳日)에 황제가 그 안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전진의 연주자사 팽초(彭超)가 팽성(彭城)의 패군태수(沛郡太守) 대록(戴逯)을 공격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원컨대 다시 중장(重將)을 보내 회남(淮南)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정남장군(征南將軍)과 서로 바둑의 ‘패(劫)’처럼 협공하여 동시에 동서(東西)에서 진군하면 단양(丹楊)을 평정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왕 부견이 그의 건의를 따라 도독동토제군사(都督東討諸軍事)로 임명하고, 후장군(後將軍) 구난(俱難), 우금장군(右禁將軍) 모성(毛盛), 낙주자사(洛州刺史) 소보(邵保)에게 보병과 기병 7만 명을 거느리고 회음(淮陰)과 우이(盱眙)를 침범하게 하였다. 팽초는 팽월(彭越)의 아우이고, 소보는 소강(邵羌)의 종제(從弟)이다. 8월, 팽초가 팽성을 공격하자, 조정에서 우장군(右將軍) 모호생(毛虎生)에게 명하여 무리 5만 명을 거느리고 고서(姑孰)를 진수하며 전진 군대를 막게 하였다. 전진의 양주자사 위종(韋鍾)이 서성(西城)에서 위흥태수(魏興太守) 길집(吉挹)을 포위하였다.

9월, 진왕 부견이 여러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비서감(秘書監) 주염(朱肜)을 정령관(正令官)으로 삼아 명령하기를 사람마다 크게 취하는 것을 한도로 삼게 하였다. 비서시랑(秘書侍郎) 조정(趙整)이 《주덕지가(酒德之歌)》를 지어 말하기를 “땅에는 주천(酒泉)이 벌여 있고, 하늘에는 주지(酒池)가 드리워져 있으며, 강태(康逵, 두강(杜康))가 정묘한 식견을 가지고 있고, 의적(儀狄)이 선견지명이 있었네. 주왕(紂王)이 은(殷)나라를 잃고, 하걸(夏桀)이 하(夏)나라를 기울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앞 세대에 위망(危亡)이 있으면, 뒤 세대가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하네.”라고 하였다. 부견이 매우 기뻐하며 조정에게 명하여 써서 술 마시는 계율로 삼게 하고, 이로부터 여러 신하를 연회할 때는 다만 예에 따라 술을 마실 뿐이었다.

전진의 양주자사(涼州刺史) 양희(梁熙)가 사자를 서역(西域)에 보내어 전진의 위엄과 덕을 선양하였다. 겨울, 10월, 대완(大宛)이 한혈마(汗血馬)를 바쳤다. 진왕 부견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제(文帝)의 사람 됨됨을 사모하였거늘, 천리마를 어찌 쓰겠는가!”라고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지마지시(止馬之詩)》를 짓게 하고 한혈마를 돌려보냈다.

파서(巴西) 사람 조보(趙寶)가 양주(梁州)에서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진(晉)나라의 서만교위(西蠻校尉) 겸 파군태수(巴郡太守)라 칭하였다.

전진(前秦)의 예주자사(豫州刺史) 북해공(北海公) 부중(苻重)이 낙양(洛陽)을 지키며 모반을 도모하였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말하였다: "장사(長史) 여광(呂光)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니, 반드시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여광에게 명하여 부중을 체포하여 수레에 가두어 장안(長安)으로 압송하게 하고, 그를 사면하여 공작(公爵)의 신분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부중은 부락(苻洛)의 형이었다.

12월, 전진의 어사중승(御史中丞) 이유(李柔)가 탄핵하며 아뢰었다: "장락공(長樂公) 부비(苻丕) 등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작은 성 하나를 포위하였으나, 날마다 만금(萬金)을 허비하면서도 오래도록 효과가 없으니, 청컨대 그들을 체포하여 정위(廷尉)에 넘기소서." 진왕 부견이 말하였다: "부비 등이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성과가 없었으니, 진실로 폄적(貶謫)하고 주살(誅殺)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군대가 이미 시일을 지체하였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특별히 그들을 용서하고,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명하노라." 황문시랑(黃門侍郎) 위화(韋華)를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엄중히 부비 등을 꾸짖고, 부비에게 칼 한 자루를 내리며 말하였다: "내년 봄에 만약 승리하지 못한다면,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니, 다시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지 말라!"

주앙(周颺)이 전진에 있다가, 은밀히 환충(桓沖)에게 편지를 보내 전진의 음모를 알렸다. 또 한중(漢中)으로 도망쳤으나, 전진 사람들이 그를 잡았으나 용서하였다.

열종효무황제(烈宗孝武皇帝) 상지중(上之中) 태원(太元) 4년(기묘, 서기 379년)

봄, 정월(正月) 신유일(辛酉日)에 대사면(大赦)을 내렸다.

전진의 장락공 부비 등이 조서를 받고 두려워 떨며, 이에 여러 군대에 명하여 합심하여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진왕 부견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양양을 공격하려 하여, 조서를 내려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에게 관동(關東) 여섯 주(州)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춘(壽春)에서 합류하게 하고, 양희(梁熙)는 서하(河西)의 군대를 거느리고 후속 부대로 삼게 하였다. 양평공 부융이 간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강남(江南)을 취하려 하시니, 본래 마땅히 널리 모의하고 깊이 생각하여, 경솔히 행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단지 양양만을 취하려 하신다면, 어찌 친히 수고로이 거동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한 성(城)을 치는 일은 일찍이 없었으니, 이른바 수후(隨侯)의 보주(寶珠)로 천 길 높이의 참새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양희도 간하며 말하였다: "진(晉)나라 군주의 포학함은 손호(孫皓)만 못하며, 강산은 험하고 견고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강남을 평정하려 하신다면, 다만 장수들에게 각각 명하여 관동의 군대를 거느리고 남으로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임하게 하고, 양주(梁州)와 익주(益州)의 군대를 출동시켜 동으로 파(巴)와 삼협(三峽)으로 나가게 하면 될 터이니, 어찌 반드시 친히 수레와 말을 수고롭게 하여 먼 길을 저습지(沮澤之地)로 가시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공손술(公孫述)을 주살하고,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손호를 사로잡았을 때, 두 황제가 친히 육군(六軍)을 통솔하고, 친히 북을 치며, 화살과 돌을 무릅썼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부견이 이에 그만두었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관군장군(冠軍將軍) 남군상(南郡相) 유파(劉波)에게 무리 8천 명을 거느리고 양양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유파는 전진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주서(朱序)가 여러 번 싸워 전진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전진의 군대가 조금 물러나자 주서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 2월, 양양의 독호(督護) 이백호(李伯護)가 몰래 그의 아들을 보내 전진에 항복을 청하며 내응(內應)이 되겠다고 하였다. 장락공 부비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양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무오일(戊午日)에 양양을 함락시키고 주서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진왕 부견은 주서가 절개를 지켰다고 여겨 그를 도지상서(度支尚書)로 임명하고, 이백호는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였다.

전진의 장군 모용월(慕容越)이 순양(順陽)을 함락시키고, 태수(太守) 초국인(譙國人) 정목(丁穆)을 사로잡았다. 부견이 그에게 관직을 주려 하였으나, 정목은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부견이 중루장군(中壘將軍) 양성(梁成)을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고, 군대 1만 명을 배속하여 양양을 지키게 하고, 그 지역의 유능하고 명망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여 예를 갖추어 등용하였다.

환충이 양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하여 인수(印綬)와 부절(符節)을 반납하며 직무 해임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유파를 파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관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전진은 전장군(前將軍) 장호(張蚝)를 병주자사(并州刺史)로 삼았다.

예주자사(兗州刺史) 사현(謝玄)이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팽성(彭城)을 구원하려 하여 사구(泗口)에 주둔하였다. 그는 밀사를 보내 대우(戴逯)에게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곡장(部曲將) 전굉(田泓)이 잠수하여 몰래 팽성으로 가겠다고 청하자, 사현이 그를 보냈다. 전굉이 전진 사람들에게 잡혔고, 전진 사람들은 후한 예물로 그를 매수하여 남군(南軍)이 이미 패했다고 말하게 하였다. 전굉은 거짓으로 승낙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안에 알렸다: "남군이 곧 도착할 터인데, 내가 홀로 와서 알리려다가 적에게 붙잡혔소. 그대들은 힘을 내시오!" 전진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팽초(彭超)가 중장(輜重)을 유성(留城)에 두었는데, 사현이 후군장군(後軍將軍) 동해인(東海人) 하겸(何謙)을 유성으로 보내겠다고 소문을 냈다. 팽초가 이 소식을 듣고 팽성의 포위를 풀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중장을 지켰다. 대우가 팽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겸을 따라 사현에게 투항하였고, 이에 팽초가 팽성을 점거하고, 예주치중(兗州治中) 서포(徐褒)를 남겨 지키게 한 뒤, 남하하여 우이(盱眙)를 공격하였다. 구현(俱難)이 회음(淮陰)을 함락시키고 소보(邵保)를 남겨 수비하게 하였다.

3월 임술일(壬戌日)에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변방에 근심이 많고, 농사는 흉년이 들었으니, 공봉(供奉)하는 어용(御用) 물품은 마땅히 검소하고 절약해야 하며, 구친(九親)의 공급과 여러 관료의 녹봉은 잠시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모든 각종 부역(賦役)과 비용은, 군국(軍國)의 큰일이 아니면 모두 정지하거나 줄여야 한다."

계미일(癸未日)에 우장군(右將軍) 모호생(毛虎生)을 보내 무리 3만 명을 거느리고 파중(巴中)을 공격하여 위흥(魏興)을 구원하게 하였다. 전봉도호(前鋒督護) 조복(趙福) 등이 파서(巴西)에 이르렀으나 전진의 장수 장소(張紹) 등에게 패하여 7천여 명을 잃었다. 모호생은 물러나 파동(巴東)에 주둔하였다. 촉인(蜀人) 이오(李烏)가 무리 2만 명을 모아 성도(成都)를 포위하며 모호생에 호응하였으나, 진왕 부견이 파로장군(破虜將軍) 여광(呂光)을 보내 격파하고 그들을 소멸시켰다. 여름, 4월 무신일(戊申日)에 위종(韋鍾)이 위흥을 함락시키니, 길읍(吉挹)이 칼을 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좌우 사람들이 그의 칼을 빼앗았다. 마침 전진 사람들이 이르러 그를 사로잡았고, 길읍은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진왕 부견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주맹위(周孟威, 주앙)는 앞에서 굴하지 않았고, 정언원(丁彥遠, 정목)은 뒤에서 몸을 깨끗이 했으며, 길조충(吉祖冲, 길읍)은 입을 다물고 죽었으니, 진(晉)나라에 어찌 이렇게 충신이 많은가!" 길읍의 참군(參軍) 사영(史穎)이 도망쳐 돌아와, 길읍이 임종 전에 쓴 친필 서신을 얻었고,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그를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추증하였다.

전진의 모당(毛當)과 왕현(王顯)이 무리 2만 명을 거느리고 양양에서 동진하여 구현, 팽초와 합류하여 회남(淮南)을 공격하였다. 5월 을축일(乙丑日)에 구현과 팽초가 우이를 함락시키고 고밀내사(高密內史) 모조지(毛璪之)를 사로잡았다. 전진의 군대 6만 명이 삼아(三阿)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 전락(田洛)을 포위하였는데, 광릉(廣陵)까지의 거리가 백 리였다. 조정이 크게 놀라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설치하고,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을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도중(涂中)에 주둔하게 하였다. 사석은 사안(謝安)의 동생이다.

우위장군(右衛將軍) 모안지(毛安之) 등이 무리 4만 명을 거느리고 당읍(堂邑)에 주둔하였다. 전진의 모당과 모성(毛盛)이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당읍을 습격하자, 모안지 등은 놀라 패주하였다. 예주자사 사현이 광릉에서 출병하여 삼아를 구원하였다. 병자일(丙子日)에 구현과 팽초가 패하여 우이로 퇴각하였다. 6월 무자일(戊子日)에 사현이 전락과 함께 무리 5만 명을 거느리고 우이를 공격하자, 구현과 팽초가 또 패하여 회음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사현이 하겸 등을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조수를 타고 올라가, 밤에 회수 다리(淮橋)를 불태웠다. 소보가 전사하고, 구현과 팽초는 회북(淮北)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사현이 하겸, 대우, 전락과 함께 추격하여 군천(君川)에서 교전하여 다시 크게 격파하니, 구현과 팽초는 북쪽으로 도망쳐 간신히 몸만 건졌다. 사현이 광릉으로 돌아오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그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서주자사(徐州刺史)를 겸임하게 하였다.

진왕 부견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가을, 7월, 수레에 가두어 팽초를 징소하여 정위에 넘겼고, 팽초는 자살하였다. 구현은 작위를 빼앗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모당을 서주자사로 삼아 팽성을 지키게 하고, 모성을 예주자사로 삼아 호륙(胡陸)을 지키게 하였으며, 왕현을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아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였다.

사안(謝安)이 재상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 사람들이 여러 번 침입하고 변경의 군대는 싸움에 패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였다. 사안은 항상 평화롭고 고요한 태도로 국면을 안정시켰다. 그는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오직 큰 강령만을 잡고, 세세한 일들은 따지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사안을 왕도(王導)에 비유하였으나, 문아(文雅)함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한다고 여겼다.

8월 정해일(丁亥日)에 좌장군(左將軍) 왕온(王蘊)을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임명하였다가, 얼마 후에 단양윤(丹楊尹)으로 전임시켰다. 왕온은 자신이 황실의 인척임을 이유로 조정에 있기를 원하지 않아, 간절히 외직을 청하였다. 이에 다시 도독절강동오군제군사(都督浙江東五郡諸軍事)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임명하였다.

이 해에 전진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열종효무황제 상지중 태원 5년(경진, 서기 380년)

봄, 정월, 전진왕 부견이 다시 북해공 부중을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으로 삼아 계성(薊城)을 지키게 하였다.

2월, 위성(渭城)에 교무당(教武堂)을 세우고, 태학생(太學生) 중 음양(陰陽)과 병법(兵法)에 통달한 자들에게 장수들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였다. 비서감(秘書監) 주시(朱肜)가 간언하였다: “폐하께서 동서로 정벌하시어 적수가 없으셨고, 천하의 땅을 이미 십분팔(十分八)을 얻으셨습니다. 비록 강남(江南)이 아직 복종하지 않았으나, 또한 걸고 넘어질 만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마땅히 점차 군사를 쉬게 하고 문덕(文德)과 교화(敎化)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학사를 세워 사람들에게 전쟁 기술을 가르친다면, 이는 아마도 태평성세(太平盛世)에 점차 이르게 하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백전노장(百戰老將)이니, 어찌 그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도리어 서생(書生)의 가르침을 받게 하십니까? 이는 그들의 지기(志氣)를 강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실제로 이익이 없고 도리어 명예에 손상이 있을 뿐이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생각해 보소서!” 부견(苻堅)이 이에 중지하였다.

전진(前秦)의 정북장군(征北將軍) 유주자사(幽州刺史) 행당공(行唐公) 부락(苻洛)은 용맹하고 힘이 세어, 앉아서 달리는 소를 제압할 수 있었고, 활을 쏘면 쟁기 귀를 꿰뚫었다. 그는 자신이 대국(代國)을 멸망시킨 공로가 있다고 여겨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이에 원한을 품었다. 3월, 전진왕 부견이 부락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익녕서남이제군사(都督益寧西南夷諸軍事)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익주목(益州牧)으로 임명하고, 이궐(伊闕)에서 양양(襄陽)으로 가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였다. 부락이 속관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황실의 지친(至親)이지만 조정에 들어가 장상(將相)이 되지 못하고, 항상 변경 지역에 버림받았다. 지금 또 나를 서부 변경에 내보내면서 경사(京師)를 지나지 못하게 하니, 이 가운데 반드시 음모가 있어 양성(梁成)이 나를 한수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주치중(幽州治中) 평규(平規)가 말하였다: “역성(逆性)으로 천하를 쟁취하고, 순민(順民)으로 천하를 지키는 것은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이 한 일이며, 화를 복으로 바꾸는 것은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한 일입니다. 주상께서 비록 혼암(昏闇)하고 포학(暴虐)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병사를 지치게 하여 백성들이 쉬고자 하는 자가 열 집 중 아홉 집입니다. 만약 명공(明公)께서 신기(神旗)를 세우신다면, 천하 사람들은 반드시 구름처럼 따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연(燕) 땅 전체를 차지하여, 땅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고, 북쪽으로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를 통할하며,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와 연락하여, 활을 당길 수 있는 병사가 오십만 명에 부족하지 않으니, 어찌하여 수족(束手)하고 잡혀가서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당하겠습니까!” 부락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계획을 막는 자는 참수한다!” 이에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대도독(大都督) 진왕(秦王)이라 칭하였다. 평규를 유주자사로, 현도태수(玄菟太守) 길정(吉貞)을 좌장사(左長史)로, 요동태수(遼東太守) 조찬(趙贊)을 좌사마(左司馬)로, 창려태수(昌黎太守) 왕온(王蘊)을 우사마(右司馬)로, 요서태수(遼西太守) 왕림(王琳), 북평태수(北平太守) 황보걸(皇甫杰), 목관도위(牧官都尉) 위부(魏敷) 등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삼았다. 각각 사자를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新羅), 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 보내 군대를 징발하고, 병사 3만 명을 보내 북해공(北海公) 부중(苻重)이 계성(蓟城)을 지키는 것을 도왔다. 여러 나라가 모두 말하였다: “우리는 천자의 번속(藩屬)이니, 행당공(行唐公)을 따라 반란할 수 없습니다.” 부락이 두려워하여 행동을 멈추려 하였으나,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왕만(王縵), 왕림(王琳), 황보걸(皇甫杰), 위부(魏敷)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를 고발하려 하였다. 부락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 길정과 조찬이 말하였다: “지금 여러 나라가 따르지 않아 일이 원래 계획과 어긋났습니다. 명공께서 익주(益州)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사자를 보내 표문을 올려 머물기를 청하소서. 주상께서도 따르지 않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평규가 말하였다: “지금 일이 이미 명백히 드러났는데, 어찌 중간에 멈출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조서를 받았다고 칭하고, 유주(幽州)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상산(常山)으로 가면,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이 반드시 교외로 나와 영접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잡아 그를 사로잡고, 진격하여 기주(冀州)를 점거하고, 관동(關東)의 군대를 통솔하여 관중(關中)을 도모하면, 천하를 지휘하여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락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여름, 4월, 부락이 7만 명을 이끌고 화룡(和龍)에서 출발하였다.

전진왕 부견이 대신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하였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여광(呂光)이 말하였다: “행당공이 지친(至親)의 신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천하가 함께 분노하는 일입니다. 원컨대 저에게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빌려주시면, 그를 잡는 것은 물건을 집어 올리듯 쉬울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부중(苻重)과 부락(苻洛) 형제가 동북 일각을 점거하고, 군사와 물자가 모두 풍부하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여광이 말하였다: “그들의 부중은 흉위(凶威)에 핍박받아 잠시 모인 오합지중(烏合之衆)일 뿐입니다. 만약 대군으로 압박하면 그들은 반드시 와해될 것이니, 걱정할 가치가 없습니다.” 부견이 이에 사자를 보내 부락을 꾸짖고 화룡으로 돌아가게 하며, 유주를 영원히 그의 봉지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부락이 사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 동해왕(東海王) 부견에게 말하라. 유주는 지방이 좁아 만승(萬乘)의 군주를 용납할 수 없으니, 나는 반드시 진(秦) 땅에서 왕이 되어 고조(高祖)의 기업을 계승할 것이다. 만약 그가 동관(潼關)까지 와서 나의 가마를 영접한다면, 나는 그를 상공(上公)으로 봉하고, 작위는 그의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부견이 크게 노하여, 좌장군(左將軍) 무도인(武都人) 두충(竇沖)과 여광(呂光)을 보내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이끌고 부락을 토벌하게 하고, 우장군(右將軍) 도귀(都貴)는 역마를 타고 업성(鄴城)으로 가서 기주병(冀州兵) 3만 명을 이끌고 선봉으로 삼았다.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북해공(北海公) 부중(苻重)이 계성(蓟城)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부락과 합류하여 중산(中山)에 주둔하니, 모두 10만 명이었다. 5월, 두충(竇沖) 등이 부락과 중산에서 교전하여 부락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부락이 생포되어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다. 북해공 부중은 계성으로 도망갔고, 여광이 추격하여 그를 죽였다. 둔기교위(屯騎校尉) 석월(石越)이 내래(東萊)에서 1만 기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화룡을 습격하여 평규를 죽이고, 유주가 모두 평정되었다. 부견이 부락을 사면하여 죽이지 않고, 양주(涼州)의 서해군(西海郡)으로 유배 보냈다.

신(臣) 사마광(司馬光)은 말한다: 공로가 있어도 상주지 않고, 죄과가 있어도 벌하지 않는다면, 요(堯)와 순(舜)이라도 천하를 다스릴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전진왕 부견은 반란을 일으킨 자를 잡을 때마다 용서해 주었으니, 이로 인해 그의 신하들은 난을 일삼는 것에 익숙해져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며, 힘이 다해 잡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화란(禍亂)이 어찌 그치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위엄이 사사로움을 이기면 반드시 성공하고, 사사로움이 위엄을 이기면 반드시 공이 없다.”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놓아주지 말아, 그들의 끝없는 악행을 경계하라. 약탈하고 포학한 사람을 막아,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지금 부견이 이러한 원칙을 어겼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조정(朝廷)은 전진 군대의 퇴각이 사안(謝安)과 환충(桓沖)의 공로라고 여겨, 사안을 위장군(衛將軍)으로 임명하고, 환충과 함께 모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받들게 하였다.

6월 갑자일(甲子日), 대사면을 행하였다.

정묘일(丁卯日),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를 사도(司徒)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진왕 부견이 양평공 부융을 시중(侍中) 중서감(中書監)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尚書事)로 부르고,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대리상서령(代理尚書令) 장락공(長樂公) 부비(苻丕)를 도독관동제군사(都督關東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하였다. 부견이 여러 지파의 저족(氐族)이 번성하고 많음을 이유로, 가을, 7월에 삼원(三原), 구종(九嵕), 무도(武都), 건(汧), 옹(雍)의 저족 15만 호를 나누어, 여러 종실 친척들로 하여금 각각 거느리게 하여 각지의 방진(方鎮)에 흩어 살게 하니, 마치 고대의 제후(諸侯)와 같았다. 장락공 부비가 저족 3천 호를 거느리고, 구지저족(仇池氐族) 추장 사성교위(射聲校尉) 양응(楊膺)을 정동좌사마(征東左司馬)로, 구종저족 추장 장수교위(長水校尉) 제오(齊午)를 우사마(右司馬)로 삼아, 각각 1천5백 호를 거느리게 하여 장락공의 세대 경대부(世代卿大夫)로 삼았다. 장락국 낭중령(長樂國郎中令) 약양인(略陽人) 환창(垣敞)을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시강(侍講) 부풍인(扶風人) 위건(韋干)을 참군사(參軍事)로, 신소(申紹)를 별가(別駕)로 삼았다. 양응은 부비의 비자의 형이고, 제오는 양응 처의 아버지였다. 8월, 유주를 나누어 평주(平州)를 설치하고, 석월을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삼아 용성(龍城)을 진수하게 하였다. 중서령(中書令) 양당(梁讜)을 유주자사로 삼아 계성(蓟城)을 진수하게 하였다. 무군장군(撫軍將軍) 모흥(毛興)을 도독하진이주제군사(都督河秦二州諸軍事) 하주자사(河州刺史)로 삼아 부한(枹罕)을 진수하게 하였다. 장수교위(長水校尉) 왕등(王騰)을 병주자사(并州刺史)로 삼아 진양(晉陽)을 진수하게 하였다. 하주와 병주에 각각 저족 3천 호를 배치하였다. 모흥과 왕등은 모두 부씨(苻氏)의 인척으로, 저족 중에서 명망이 높은 자들이었다. 평원공(平原公) 부휘(苻暉)를 도독예락형남연동예양육주제군사(都督豫洛荊南兗東豫揚六州諸軍事)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아 낙양(洛陽)을 진수하게 하였다. 낙주자사(洛州刺史)의 치소를 풍양(豐陽)으로 옮겼다. 거록공(巨鹿公) 부예(苻睿)를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아 포판(蒲阪)을 진수하게 하였다. 각각 저족 3천2백 호를 배치하였다.

부견이 부비를 패상까지 전송하자, 여러 저족(氐族) 사람들은 그들의 부형과 작별하며 모두 크게 통곡하였고, 그 슬픔이 길 가는 사람까지 감동시켰다. 조정이 연회에 시중드는 기회를 이용해 거문고를 잡고 노래하였다: "아득지, 아득지, 때까치의 외삼촌은 구수로다, 꼬리는 길고 날개는 짧아 날지 못하네. 멀리 저족을 옮기고 선비를 남겼으니, 한번 위급한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알리랴!" 부견은 웃었을 뿐 채택하지 않았다.

9월 계미일, 왕후 왕씨가 세상을 떠났다.

겨울, 10월, 구진태수 이손이 교주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진 왕 부견이 좌금장군 양벽을 진주자사로, 상서 조천을 낙주자사로, 남파교위 강우를 영주자사로 임명하였다.

11월 을유일, 정왕후(왕씨)를 융평릉에 안장하였다.

12월, 전진이 좌장군 도귀를 형주자사로 삼아 팽성을 진수하게 하였다.

동예주를 설치하고 모당을 자사로 삼아 허창을 진수하게 하였다.

이 해, 전진 왕 부견이 고밀태수 모조지 등 2백여 명을 동진으로 돌려보냈다.

열종 효무황제 상지중 태원6년(신사, 서기 381년)

봄, 정월, 효무제가 처음으로 불법을信奉하여 궁전 안에 정사를 짓고 여러 승려들을 불러 살게 하였다. 상서좌승 왕아가 표문을 올려 간언하였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았다. 왕아는 왕숙의 증손이다.

정유일, 상서 사석을 복야로 임명하였다.

2월, 동이와 서역의 62개 나라가 전진에 조공을 바쳤다.

여름, 6월 경자 삭일, 일식이 발생하였다.

가을, 7월 갑오일, 교지태수 두원이 이손을 참수하자 교주가 평정되었다.

겨울, 10월, 전 무릉왕 사마희가 신안에서 세상을 떠나, 신녕군왕으로 추봉되고 그의 아들 사마준이 작위를 계승하도록 명령되었다.

11월 기해일, 전 회계내사 도음을 사공으로 임명하였으나, 도음은 굳이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秦)나라 형주자사 도귀가 그의 사마 염진과 중병참군 오중을 보내 2만 병력을 이끌고 경릉을 침범하였다. 환충이 남평태수 환석건과 위군참군 환석민 등을 보내 수륙 2만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다. 환석민은 환석건의 아우이다. 12월 갑진일, 환석건이 염진과 오중을 기습하여 크게 격파하자, 염진과 오중은 퇴각하여 관성을 지켰다. 환석건이 관성을 공격하여 계해일 함락시키고 염진과 오중을 사로잡았으며, 7천 명의 목을 베고 1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환충의 아들 환겸을 의양후로 봉하고, 환석건에게 하동태수를 겸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해, 강동(江東)에 심각한 기근이 들었다.

열종 효무황제 상지중 태원7년(임오년, 서기 382년)

봄, 3월, 진(秦)나라 대사농 동해공 부양, 원외산기시랑 왕피, 상서랑 주양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어 정위에 넘겨졌다. 부양은 부법의 아들이고, 왕피는 왕맹의 아들이다. 진왕 부견이 그들에게 모반한 상황을 묻자, 부양이 말하였다: "저의 아버지 애공이 죄로 처형되었기에, 제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한 것뿐입니다." 부견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애공의 죽음은 내게 달린 일이 아니니, 네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왕피가 말하였다: "저의 아버지 승상께는 창업을 보좌한 공훈이 있음에도, 제가 가난하고 천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기에, 단지 부귀를 도모하려 한 것뿐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승상이 임종할 때 너를 부탁하며, 소 열 마리를 밭 갈 자본으로 삼게 하였고, 일찍이 너를 위해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만 한 이가 없다는 말이, 참으로 지혜롭도다!" 주양이 말하였다: "주양은 대대로 진(晉)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살아서는 진나라 사람이요, 죽어서는 진나라 귀신일 뿐, 무슨 물음이 있겠습니까!" 이에 앞서 주양이 여러 차례 모반을 꾀하자, 부견의 측근들이 모두 그를 죽이기를 청하였다. 부견이 말하였다: "주양은 강렬한 선비로, 그 뜻이 이토록 굳으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 그를 죽이는 것은 오히려 그의 명성을 이루어 주는 것일 뿐이다!" 이에 모두 사면하고 주살하지 않고, 부양은 양주의 고창군으로 유배 보내고, 왕피와 주양은 삭방의 북쪽으로 유배 보냈다. 주양은 삭방에서 죽었다. 부양은 용기와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선선(鄯善)으로 옮겨졌다. 건원 말년에 이르러 진(秦)나라가 크게 혼란해지자, 부양이 선선의 재상을 협박하여 동쪽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선선 왕이 그를 죽였다.

진왕 부견이 업성(鄴城)의 동로(銅駝), 동마(銅馬), 비렴(飛廉), 옹중(翁仲)을 장안으로 옮겼다.

여름, 4월, 부견이 부풍태수 왕영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왕영은 왕피의 형이다. 왕피는 흉악하고 덕이 없었으나, 왕영은 청렴하게 수양하고 학문을 좋아하였기에 부견이 그를 등용하였다. 양평공 부융을 사도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부융이 굳이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견이 마침 진(晉)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부융을 정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였다.

5월, 유주에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방원(方圓) 천 리에 퍼졌다. 진왕 부견이 산기상시 팽성인 유란을 보내 유주, 기주, 청주, 병주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메뚜기를 잡게 하였다.

가을, 8월, 계묘일,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진왕 부견이 간의대부 배원략을 파서, 촉(蜀)의 파서(巴西), 장동(樟潼) 두 군의 태수로 임명하고, 비밀리에 수군을 준비하게 하였다.

9월, 거사전부왕 미질(彌窴)과 선선왕 휴밀타(休密馱)가 진(秦)나라에 조회하여, 서역에서 복종하지 않는 나라들을 정벌할 때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원하고, 한(漢)나라의 제도에 따라 도호를 설치하여 통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진왕 부견이 효기장군 여광(呂光)을 사지절, 도독서역정벌제군사로 삼고, 능강장군 강비, 경거장군 팽황, 장군 두진, 강성 등과 함께 10만 대군과 5천 철기(鐵騎)를 거느려 서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양평공 부융이 간언하였다: "서역은 황량하고 멀어, 그 백성을 얻어도 부릴 수 없고, 그 땅을 얻어도 경작할 수 없습니다. 한무제가 그들을 정벌한 것은 얻은 것이 손해를 보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 리 밖으로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한(漢)나라의 잘못된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은, 제가 은밀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부견이 듣지 않았다.

환충이 양위장군 주작을 보내 양양(襄陽)에서 진(秦)나라 형주자사 도귀를 공격하여, 면수(沔水) 이북의 둔전(屯田)을 불태우고 짓밟으며 6백여 호를 약탈하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진왕 부견이 태극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며 말하였다: "내가 대업을 계승한 지 거의 30년이 되었고,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 한 구석만이 아직 왕도(王道)의 교화를 입지 못하였다. 지금 대략 내 병력을 계산하면 97만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친히 그들을 거느리고 토벌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비서감 주융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중원의 사인(士人)과 백성들을 돌려보내 그들의 고향을 회복하게 하신 후, 수레를 돌려 동쪽으로 순시하며 태산에서 성공을 고하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부견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것이 나의 뜻이다." 상서좌복야 권익이 말하였다: "옛날 상주(商紂)가 포악하고 무도하였으나 세 명의 어진 이(仁人)가 아직 조정에 있었기에, 주무왕(周武王)이 오히려 그로 인해 물러났습니다. 지금 진(晉)나라는 미약하나 큰 죄악이 없습니다. 사안(謝安)과 환충(桓冲)은 모두 강남(江南)의 걸출한 인물로, 군신이 화목하고 내외가 마음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로는, 아직 도모할 수 없습니다." 부견이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여러분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태자좌위솔 석월이 말하였다: "지금 세성(歲星)과 진성(鎮星)이 두성(斗宿)에 머물고 있어, 복덕(福德)이 오(吳) 땅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을 정벌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장강의 험함을 차지하고 있고,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쓰이고 있으니, 아직 정벌할 수 없을 듯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옛날 주무왕이 상(商)나라를 정벌할 때, 세성과 점괘를 어겼다. 천도(天道)는 깊고 아득하여 알기 쉽지 않다. 부차(夫差)와 손호(孫皓)는 모두 강호(江湖)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결국 멸망을 면하지 못했다. 지금 내 병력으로 말채찍을 장강에 던지면 족히 그 물줄기를 끊을 수 있으니, 또 어떤 험함이 의지할 만하겠는가!" 석월이 대답하였다: "그 세 나라의 군주들은 모두 음란하고 포악하며 무도하였기에, 적국이 그들을 취하기가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보다 쉬웠습니다. 지금 진(晉)나라는 비록 덕이 없으나 큰 죄는 없으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잠시 군사를 멈추고 양곡을 비축하시어 그들에게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소서."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각자 이해 관계를 진술하였으나, 오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부견이 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길가에서 집을 짓는 것이라, 언제 끝날지 정해지지 않는다. 나는 마땅히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결정할 따름이다."

군신들이 모두 나갔으나, 양평공 부융만을 남겨두고 그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큰일을 결정하는 것은, 한두 명의 대신에 지나지 않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의견이 분분하여,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니, 나는 마땅히 그대와 함께 결정해야 하겠네." 부융이 대답했다: "지금 진나라를 정벌하는 데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천도가 순조롭지 않은 것이 첫째이고, 진나라에 틈이 없는 것이 둘째이며, 우리가 여러 번 싸워 병사들이 피폐하고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셋째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진나라를 정벌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모두 충신이오니, 폐하께서 그들의 말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부견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대마저 그러하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에게는 강한 병사 백만이 있고, 물자와 병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내가 비록 현명한 군주는 아니지만, 어둡고 무능한 것도 아니다. 여러 번 승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장차 망할 나라를 공격하는데, 무엇을 걱정하여 공략하지 못하겠는가? 어찌 이 남은 도적들을 남겨두어,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국가의 근심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부융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지금 크게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만전의 성과를 거둘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선비, 강, 갈 등의 족속들을 총애하고 길러 그들이 수도 주변에 가득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리의 깊은 원수입니다. 태자가 홀로 수만 명의 약한 병사를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고 있는데, 저는 심복 요충지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고가 일어나 후회해도 소용없을까 두렵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완고하여 실로 채택할 만하지 못하지만, 왕경략은 한 시대의 영웅으로, 폐하께서 항상 그를 제갈무후에 비유하셨는데, 어찌 그가 임종할 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부견이 듣지 않았다. 이에 조정 대신들이 간언하는 자가 많았으나, 부견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쌍방의 강약 형세를 비교하면, 마치 맹렬한 바람이 낙엽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은데, 조정 안팎에서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니, 이것이 진실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태자 부홍이 말했다: "지금 세성이 오 지역의 분야에 있고, 진나라 군주에게 죄가 없는데, 만약 대거 출병하여 이기지 못한다면, 밖으로는 위명이 손상되고, 안으로는 재력이 소진될 것이니, 이것이 여러 신하들이 의심하는 까닭입니다!" 부견이 말했다: "옛날 내가 연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세성을 범하고도 이겼으니, 천도는 본래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여섯 나라의 군주들이 모두 폭虐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관군장군 경조윤 모용수가 부견에게 말했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병합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병합되는 것은 사리와 형세의 자연스러움으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신령스럽고 무용하심으로 하늘의 명에 순응하시고, 위명이 해외에 떨치시며, 용맹한 군대가 백만이고, 한신, 백기와 같은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한데, 작은 강남이 홀로 군명을 어기니, 어찌 그들을 남겨 두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계책을 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스스로 성심을 결단하시면 충분하니, 어찌 널리 조정 여러 사람들에게 물으십니까! 진나라 무제가 오나라를 평정할 때, 의지한 것은 오직 장화와 두예 두세 명의 대신뿐이었습니다. 만약 조정 여러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면, 어찌 천하를 통일하는 공업이 있었겠습니까!" 부견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와 함께 천하를 평정할 자는 오직 그대뿐이로다." 하고 비단 오백 필을 하사했다.

부견이 강동을 취하기로 결심하여, 잠도 들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양평공 부융이 간언했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무력을 남용한 자는 망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본래 융적이니, 정통의 역수는 아마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강동은 비록 미약하여 겨우 존재할 뿐이지만, 그들은 중화의 정통이니, 하늘의 뜻이 반드시 그들을 끊지 않을 것입니다." 부견이 말했다: "제왕이 천명을 받는 역수에 어찌 고정된 것이 있겠는가! 다만 덕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유선이 어찌 한나라의 후예가 아니었는가? 결국 위나라에 멸망당했다. 네가 나만 못한 까닭은 바로 이 변통을 알지 못하는 병통에 있는 것이다!"

부견은 평소 승려 석도안을 신뢰하고 공경했으므로, 군신들이 석도안으로 하여금 기회를 타서 말하게 했다. 11월, 부견이 석도안과 함께 같은 수레를 타고 동원을 유람하며 말했다: "내가 장차 그대와 함께 남쪽으로 오월 지방을 유람하고, 장강에 배를 띄우며, 동해에 임하니,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석도안이 말했다: "폐하께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며, 중원에 계셔서 사방을 제어하시니, 자연히 요순의 흥성함에 비길 만한데, 어찌 바람을 맞고 비를 무릅쓰며 먼 곳을 경략하십니까! 게다가 동남 지역은 지세가 낮고 습하며, 장기가 발생하기 쉬워, 우순이 남순했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대우가 동쪽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찌 거동을 수고롭게 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부견이 말했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그들을 위해 군주를 세워, 그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두려워하여, 그 한쪽 백성들로 하여금 홀로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겠는가! 만약 반드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이는 옛날의 제왕들도 모두 정벌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석도안이 말했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폐하께서는 낙양에 머무르시고, 먼저 사자를 보내 서신을 전하며, 여러 장수들이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될 것이니, 친히 장강과 회하를 건널 필요는 없습니다." 부견이 듣지 않았다.

부견이 총애하는 장부인이 간언했다: "신이 듣건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모두 자연의 이치를 따르며 행하므로, 성공하지 못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황제가 소와 말을 부린 것은 그 본성을 따른 것이고, 대우가 아홉 큰 강을 소통시키고 아홉 호수의 제방을 쌓은 것은 지세를 따른 것이며, 후직이 백곡을 심은 것은 시절을 따른 것이고, 상탕과 주무왕이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라 걸왕과 상나라 주왕을 친 것은 백성의 마음을 따른 것입니다. 모두 따름이 있으면 성공하고, 따름이 없으면 실패합니다. 지금 조정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진나라를 토벌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폐하께서 홀로 결의하시니, 신은 폐하께서 무엇을 따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耳目은 우리 백성의耳目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하늘도 오히려 백성을 따라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군왕이 출병할 때는 반드시 위로 천상을 관찰하고, 아래로 백성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백성의 마음이 이미 순조롭지 않은데, 청컨대 천상으로 그것을 증명하소서. 속담에 이르기를: '닭이 밤에 울면 출병에不利하고, 개가 무리 지어 울면 궁실이 비게 될 것이며, 병기가 스스로 흔들리고 말이 놀라면 군대가 패하여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을 겨울 이래로 많은 닭이 밤에 울고, 무리 지은 개들이 슬프게 울며, 마구간의 말이 여러 번 놀라고, 무기고의 병기가 스스로 흔들리며 소리를 내니, 이는 모두 출병의 상서로운 조짐이 아닙니다." 부견이 말했다: "군대를 움직이는 일은 여자가 간여할 바가 아니다!"

부견의 작은 아들 중산공 부심이 가장 총애를 받았는데, 또한 간언했다: "신이 듣건대, 국가의 흥망은 어진 자의 임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양평공 부융은 국가의 모주인데, 폐하께서 그를 거역하시고, 진나라에는 사안과 환충이 있는데, 폐하께서 그들을 토벌하려 하시니, 신은私下로 의혹스럽습니다." 부견이 말했다: "천하의 큰일을 어린아이가 어찌 알겠는가!"

전진의 유란이 황충을 토벌했으나, 가을과 겨울 두 철을 지나도록 없애지 못했다. 12월, 유관 부서에서 주청하여 유란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기려 했다. 전진왕 부견이 말했다: "재해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의 정치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니, 유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해에 전진은 대풍작을 이루어, 상등전은 한 묘당 수확이 칠십 석이고, 하등전은 한 묘당 수확이 삼십 석이었다. 황충은 유주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고, 기장과 콩류를 먹지 않아, 상등전은 한 묘당 수확이 백 석이고, 하등전은 한 묘당 수확이 오십 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