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8
【제기8】 도위단알(屠维单阏), 1년.
봄, 정월, 무신일(戊申日), 대사면을 행하였다.
봄, 정월, 무신일(戊申日),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위주(魏主, 북위 효문제)가 토욕혼왕(吐谷渾王) 복련주(伏連籌)를 불러 조정에 들어오게 하였으나, 복련주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으며, 이내 도양(洮陽)과 이화(泥和) 두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북위 효문제가 토욕혼왕 복련주를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복련주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으며, 곧바로 도양과 이화 두 성을 쌓고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2월, 을해일(乙亥日), 위주가 평성(平城) 지역이 기후가 춥고 바람과 모래가 자주 일어나므로, 대(代) 땅 백성 중 남쪽으로 이주하려는 자는 평성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고, 그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2월, 을해일, 북위 효문제가 평성 지역이 기후가 춥고, 바람과 모래가 자주 일어나므로, 대 땅 백성 가운데 남쪽으로 이주하는 자는 평성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주가 탁발징(拓跋澄)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징은 탁발운(拓跋雲)의 손자이다.
북위 효문제가 탁발징을 이부상서로 임명하였다. 탁발징은 탁발운의 손자이다.
위주가 옛 풍속을 바꾸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지금 모든 북방 언어를 끊고, 일체 정음(正音, 중원 표준어)을 따르려 한다. 나이 30세 이상인 자는 습관이 오래되어 갑자기 고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30세 이하로서 현재 조정에 있는 자는 말소리를 옛날처럼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만약 고의로 그렇게 하는 자가 있으면, 작위를 낮추고 관직을 파면하겠다. 각자 마땅히 깊이 경계하라! 왕공경사(王公卿士)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성명(聖明)하신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마음속이 불쾌하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북위 효문제가 옛 풍속을 바꾸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지금 모든 북방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끊고, 일체 표준어를 따르게 하려 한다. 나이가 30세 이상인 자는 습관이 오래되어 혹시 갑자기 고칠 수 없을 수도 있으나, 30세 이하로서 현재 조정에 있는 자들은 말소리를 옛날처럼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만약 고의로 그렇게 하는 자가 있으면, 작위를 낮추고 관직을 파면하겠다. 각자 마땅히 깊이 경계하라! 왕공경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성명하신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마음속이 불쾌하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무술일(戊戌日), 조서를 내렸다: "북속(北俗)의 언어를 조정에서 말하지 못하게 하라. 위반하는 자는, 그 맡은 관직을 파면하라."
무술일, 효문제가 조서를 내렸다: "북방 민족의 옛 풍속 언어를 조정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 위반하는 자는, 그 맡은 관직을 파면한다."
계묘일(癸卯日), 위주가 태위(太尉) 석(石)에게 상서사(尙書事)를 기록하게 하고, 사도(司徒) 원비(元丕)를 태위로 삼았다.
계묘일, 북위 효문제가 태위 석에게 상서의 일을 맡기고, 사도 원비를 태위로 임명하였다.
위주가 평성을 행궁(行宮)으로 삼고, 목태(穆泰)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임명하고, 좌리(佐吏)와 급사중(給事中)을 두어 유대(留臺)를 관장하게 하였다.
북위 효문제가 평성을 행궁으로 삼고, 목태를 상서우복야로 임명하고, 좌리와 급사중을 두어 유대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처음에, 위주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할 때, 대북(代北)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즐겨 따르지 않았다. 태(泰)는 목숭(穆崇)의 종제(從父弟)로서, 스스로 황제에게 진술하여 평성에 머무르기를 청하였고, 황제가 허락하였다.
처음에,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할 때, 대북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기꺼이 따르지 않았다. 목태는 목숭의 사촌 동생으로서, 스스로 효문제에게 진언하여 평성에 머무르기를 청하였고, 효문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목태가 평성에 이르러, 목태의 무리인 육예(陸叡)가 반역을 도모하는 것을 보고, 이에 비밀리에 상표(上表)하여 말하였다: "목태 등은 모두 간사한 계책을 품고, 겉으로는 충성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반역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제가 거느린 군사로 그들을 토벌하게 해주소서." 황제가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지금 북방 일을 걱정하고 있으니, 마땅히 중신(重臣)을 다시 보내야 하겠다." 이에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을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도독항삭이주제군사(都督恒朔二州諸軍事)로 삼고, 항주자사(恒州刺史)를 겸하게 하여 목태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목태가 평성에 도착했을 때, 목태의 무리인 육예가 반역을 도모하는 것을 보고, 이에 비밀리에 상표하여 말하였다: "목태 등은 모두 간사한 계책을 품고, 겉으로는 충성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반역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제가 거느린 군사로 그들을 토벌하게 해주소서." 황제가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지금 북방 일을 걱정하고 있으니, 마땅히 중신을 다시 보내야 하겠다." 이에 임성왕 탁발징을 진남대장군, 도독항삭이주제군사로 삼고, 항주자사를 겸하게 하여 목태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징(澄)이 도착하였으나 아직 출병하지 않았는데, 태(泰) 등이 이미 군사를 일으켰다. 징이 사자를 보내 태를 설득하며 화복(禍福)을 깨우쳐 주었으나, 태가 따르지 않았다. 징이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여, 태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고, 태와 육예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내어 참수하였다.
탁발징이 도착하였으나 아직 출병하지 않았는데, 목태 등이 이미 군사를 일으켰다. 탁발징이 사자를 보내 목태를 설득하며 화복을 깨우쳐 주었으나, 목태가 따르지 않았다. 탁발징이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여, 목태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고, 목태와 육예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내어 참수하였다.
위주가 목태 등의 모반으로 인하여, 이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북위 효문제가 목태 등의 모반으로 인하여, 이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위주가 평성의 궁실이 많이 낡았으므로, 다시 영건(營建)하려 하여, 최광(崔光)을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삼고, 안락후(安樂侯)의 작위를 내려 감독하여 짓게 하였다. 광(光)은 최호(崔浩)의 족제(族弟)이다.
북위 효문제가 평성의 궁실이 많이 낡았으므로, 다시 짓고자 하여, 최광을 진남장군으로 삼고, 안락후의 작위를 내려 감독하게 하였다. 최광은 최호의 족제이다.
여름, 4월, 신사삭일(辛巳朔日), 위주가 황문시랑(黃門侍郞) 최휴(崔休)를 보내어 태자 순(恂)에게 조서를 선포하게 하였다. 휴(休)는 최정(崔逞)의 손자이다.
여름, 4월, 신사 초하루, 북위 효문제가 황문시랑 최휴를 보내어 태자 원순(元恂)에게 조서를 선포하게 하였다. 최휴는 최정의 손자이다.
위주가 태자 순이 편찮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순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위주가 노하여, 순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북위 효문제가 태자 원순이 편찮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원순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효문제가 노하여, 원순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위주가 목태 등의 모반으로 인하여, 원비(元丕), 육예(陸叡), 이충(李沖) 등이 모두 같은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자, 비(丕) 등이 주살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황제에게 아뢰었다: "목태 등이 반역한 것은, 신하들은 실로 그 정황을 알지 못하였사오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살펴주소서."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그대들의 소행이 아님을 안다. 다만 그것으로써 후세를 경계하려는 것일 뿐이다." 마침내 원비 등을 용서하였다.
북위 효문제가 목태 등의 모반으로 인하여, 원비, 육예, 이충 등이 모두 같은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자, 원비 등이 주살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황제에게 아뢰었다: "목태 등이 반역한 것은, 신하들은 실로 그 정황을 알지 못하였사오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살펴주소서."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그대들의 소행이 아님을 안다. 다만 그것으로써 후세를 경계하려는 것일 뿐이다." 마침내 원비 등을 용서하였다.
가을, 7월, 위주가 태자 순이 유폐(幽廢)되었으므로, 이에 둘째 아들 각(恪)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북위 효문제가 태자 원순이 유폐되어 폐위되었으므로, 이에 둘째 아들 원각(元恪)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위주가 태자 순이 어리므로, 태자비(太子妃)를 세우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이충의 딸이 적합하다고 하여, 황제가 따랐다. 순이 폐위되자, 이충의 딸도 사사(賜死)되었다.
처음에, 북위 효문제가 태자 원순이 어리므로, 태자비를 세우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이충의 딸이 적합하다고 하여, 효문제가 따랐다. 원순이 폐위되자, 이충의 딸도 사사되었다.
위주가 이충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삼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하게 하였다.
북위 효문제가 이충을 상서령으로 삼고, 이부상서를 겸하게 하였다.
위주가 관제(官制)를 개정함에 따라, 이충에게 명하여 백관의 품급(品級)을 의정(議定)하게 하였다. 충(冲)이 이에 구품(九品)의 제도를 아뢰어 정하였는데, 상중하(上中下)를 각각 세 등급으로 나누어, 모두 아홉 품(品)에 각각 상중하가 있어, 모두 스물일곱 등급이 되었다. 황제가 따랐다.
북위 효문제가 관제를 개정함에 따라, 이충에게 명하여 백관의 품급을 의정하게 하였다. 이충이 이에 구품의 제도를 아뢰어 정하였는데, 상중하를 각각 세 등급으로 나누어, 모두 아홉 품에 각각 상중하가 있어, 모두 스물일곱 등급이 되었다. 효문제가 따랐다.
위주가 왕숙(王肅)을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삼고, 창국자(昌國子)의 작위를 내려, 이충과 함께 율령(律令)을 참정(參定)하게 하였다.
북위 효문제가 왕숙을 진남장군으로 삼고, 창국자의 작위를 내려, 이충과 함께 율령을 참정하게 하였다.
위주가 낙양의 궁실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영건하려 하여, 유방(劉芳)을 태상경(太常卿)으로 삼고, 최광, 왕숙 등과 함께 의논하여 예의(禮儀)를 개정하게 하였다.
북위 효문제가 낙양의 궁실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짓고자 하여, 유방을 태상경으로 삼고, 최광, 왕숙 등과 함께 의논하여 예의를 개정하게 하였다.
봄 정월 무인일 초하루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었다. 태위 진현달이 평북장군 최혜경 등 4만 군대를 거느리고 북위를 쳐서 옹주의 여러 군을 회복하려 하였다. 계미일에 북위는 전장군 원영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게 하였다. 을유일에 북위 주가 업성에서 출발하였다. 신묘일에 황제가 남교에서 제사를 지냈다. 무술일에 북위 주가 낙양에 도착하여 이충의 집을 지나갔다. 당시 이충이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북위 주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유수 관리를 보면 이충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눈물을 흘렸다. 북위 주가 임성왕 원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서울을 떠난 이후로 옛 풍속이 조금이라도 변했는가?” 원징이 대답하였다. “성상의 교화가 날로 새롭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성에 들어갈 때 수레 위의 부인들이 아직도 관을 쓰고 작은 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날로 새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징이 대답하였다. “입는 사람이 적고 입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임성왕, 이게 무슨 말인가! 어찌 반드시 온 성 사람이 다 입어야 한단 말인가!” 원징과 유수 관리들이 모두 관을 벗고 사죄하였다. 갑진일에 북위가 사면령을 내렸다. 북위 주가 업성으로 갈 때 이표가 업성 남쪽에서 맞이하여 무릎 꿇고 절하며 사죄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너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충의 은혜를 생각하여 그만두었다.” 위로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마침 어사대령사 용문관이 고발하기를 “태자 원순이 잡혔던 날, 친필로 쓴 변명 문서가 있었는데 이표가 보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서가 표를 올려 이표를 잡아 낙양으로 압송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이표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소달구지에 흩어 실어 낙양으로 보냈는데 마침 사면령이 내려져 죄를 면할 수 있었다. 북위 태보 제군 영왕 원간이 죽었다. 2월 신해일에 북위가 함양왕 원희를 태위로 삼았다. 북위 주가 여러 해 밖에 있자 풍후가 사사로이 환관 고보살과 간통하였다. 황제가 현호에서 병이 위중해지자 풍후는 더욱 제멋대로 행동하며 꺼리는 바가 없었고, 중상시 쌍몽 등이 그녀의 심복이 되었다. 팽성공주는 송왕 유창의 며느리로 과부가 되었다. 풍후가 그녀를 자기 어머니의 동생인 북평공 풍숙에게 시집보내려고 청혼하였고 황제가 허락하였으나 공주가 싫어하였고 풍후가 강요하였다. 공주가 비밀리에 집노비와 함께 비를 무릅쓰고 현호로 가서 황제에게 고발하며 풍후가 한 짓을 자세히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의심하였으나 비밀로 하고 드러내지 않았다. 풍후가 듣고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은밀히 어머니 상씨와 함께 여무에게 빌고 저주하게 하며 말하였다. “황제의 병이 낫지 않아서 한 번이라도 문명태후처럼 어린 임금을 도와 임조칭제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후하게 갚아 주겠다.” 황제가 낙양으로 돌아와 고보살, 쌍몽 등을 잡아 심문하니 그들이 모두 자백하였다. 황제가 함온실에서 밤에 풍후를 불러들여 동쪽 기둥 옆에 앉히고 어탑에서 두 길 남짓 떨어지게 한 후 고보살 등으로 하여금 정황을 진술하게 하였다. 그 후 팽성왕 원협, 북해왕 원상 등을 불러들여 앉히고 말하였다. “전에는 너희 형수였으나 지금은 길가의 사람이니 그냥 들어와서 피하지 마라!” 또 말하였다. “이 늙은 여편네가 내 옆구리를 찌르려 하였다! 내가 문명태후 집안의 딸이기 때문에 폐하지 못하고 다만 빈 자리만 궁중에 두고, 마음속으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랐을 뿐이니 너희들은 내가 아직 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두 왕이 나가자 풍후에게 작별을 명하였다. 풍후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후 후궁으로 들어가 살았다. 여러 빈들이 그녀를 여전히 황후의 예로 섬겼으나 다만 태자에게 다시는 조현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을 뿐이다. 당초에 풍희는 문명태후의 오라비로서 공종의 딸 박릉장공주와 혼인하였다. 풍희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두 명은 황후가 되고 한 명은 좌소의가 되었으므로 풍씨 가문의 귀함과 총애가 여러 신하 중에서 으뜸이었고 상여가 누만에 이르렀다. 공주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풍탄과 풍수였다. 풍희는 태보가 되고 풍탄은 사도가 되고 풍수는 시중, 상서가 되었으며 서자 풍율은 황문랑이 되었다. 황문시랑 최광이 풍율과 같이 당직하면서 풍율에게 말하였다. “그대 집의 부귀가 너무 성하여 결국은 반드시 쇠퇴할 것입니다.” 풍율이 말하였다. “우리 집이 그대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그대가 무턱대고 나를 저주하는가!” 최광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물이 번성하면 반드시 쇠퇴하는 것은 천지의 상례입니다. 만약 고대의 일로 미루어 본다면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 년여가 지나 풍수가 패망하였다. 풍수의 성격이 경솔하고 잘난 체하였으며 풍탄이 여러 번 경고하였으나 그가 뉘우치지 않자 풍탄이 태후와 황제에게 보고하여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풍수가 이 때문에 풍탄을 원망하여 독약을 구해 풍탄의 측근을 시켜 독살하려 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황제가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풍탄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간청하였다. 황제도 그의 아버지가 늙었다는 이유로 풍수를 곤장 백여 대를 때리고 평성의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풍탄과 풍희가 잇달아 죽고 유황후가 얼마 안 되어 폐위되자 풍율도 배척당하여 버림받았으며 풍씨는 이에 쇠퇴하였다. 계해일에 북위가 팽성왕 원협을 사도로 삼았다. 진현달이 북위 원영과 싸워 여러 번 그를 이겼다. 마권성을 사십 일 동안 공격하여 성 안의 곡식이 떨어져 인육과 나무 껍질을 먹었다. 계유일에 북위 사람이 포위를 뚫고 도망가니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진현달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 장수와 병사들이 다투어 성 안의 비단을 빼앗아 추격하지 않았다. 진현달이 또 군주 장구흑을 보내 남향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북위 주가 임성왕 원징에게 말하였다. “진현달이 침략하니 내가 친히 출정하지 않으면 그를 제압할 수 없다.” 3월 경진일에 북위 주가 낙양에서 출발하여 우열을 유수로 삼고 우위장군 송변을 겸사서상서로 임명하여 칠병 사무를 대리하게 하여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송변은 관리 생활에 정밀하고 부지런하여 은우가 이충 다음이었다. 계미일에 북위 주가 양성에 도착하였다. 최혜경이 북위의 순양을 공격하자 순양태수 청하 사람 장열이 굳게 지켰다. 갑신일에 북위 주가 진위장군 모용평성을 보내 기병 오천 명을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다. 북위 주가 병이 난 이후로 팽성왕 원협이 항상 내궁에서 의약을 시중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본 후에 올렸으며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더러웠으며 옷을 풀지 않았다. 황제가 오래 병들어 화를 잘 내었는데 측근이 뜻을 거슬리면 움직일 때마다 참수하였다. 원협이 표정을 살피고 기회를 엿보아 바로잡고 구제한 것이 많았다. 병술일에 원협을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원협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이 병환을 시중하느라 겨를이 없는데 어찌 군대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다른 친왕을 청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의 중요한 일을 총괄하게 하시고 신은 의약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황제가 말하였다. “병환을 시중하고 군대를 다스리는 일이 모두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의 병이 이처럼 심하니 깊이 낫지 못할까 두렵다. 육군을 안정시키고 사직을 보위할 사람이 그대 외에 누가 있겠는가! 어찌 다른 사람을 청하여 내 뜻을 어기도록 허용하겠는가!” 정유일에 북위 주가 마권에 도착하여 형주자사 광양왕 원가에게 균구를 끊어 제나라 군대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원가는 원건의 아들이다. 진현달이 군대를 이끌고 수서를 건너 응자산을 점거하고 성루를 쌓았다. 사람들의 마음은 낙담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북위와 싸워 여러 번 패배하였다. 북위 무위장군 원숭이 투구를 벗고 적진으로 돌진하자 장수와 병사들이 그를 따라 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원숭은 원징의 아우이다. 무술일 밤에 군주 최공조, 호송이 검은 베 장막으로 진현달을 싸서 여러 사람이 메고 작은 길로 분치산에서 균수구를 나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기해일에 북위가 진현달의 군용 물자를 거두어들였는데 그 액수가 억 단위였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수까지 추격한 후 돌아갔다. 좌군장군 장간이 전사하고 병사가 죽은 자가 삼만여 명이었다. 진현달이 북벌할 때 군대가 작균구로 들어갔다. 광평 사람 풍도근이 진현달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작균수는 물살이 급하여 나아가기는 쉽고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북위가 만약 험한 곳을 지킨다면 머리와 꼬리가 모두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차라리 배를 모두 참성에 버리고 육로로 걸어서 나아가며 차례로 진을 치고 북을 치며 나아가면 반드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진현달이 따르지 않았다. 풍도근이 자기 사속을 이끌고 군대를 따랐는데 진현달이 밤에 도망칠 때 군인들이 산길을 잘 몰라 풍도근이 험한 곳에 이를 때마다 말을 멈추고 그들에게 가리켜 주어 여러 사람이 그 덕분에 보전될 수 있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풍도근을 작균구 성부로 임명하였다. 진현달은 일찍이 위엄과 명성이 있었으나 이에 이르러 크게 손상을 입었다. 어사중승 범수가 상주하여 진현달의 관직을 파면할 것을 청하였고 진현달도 스스로 표를 올려 해직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진현달을 강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최혜경도 순양을 버리고 도망쳐 돌아왔다. 경자일에 북위 주가 병이 위중하여 북쪽으로 돌아가 곡당원에 이르러 사도 원협에게 말하였다. “후궁이 오래도록 부덕을 저질렀으니 내가 죽은 후에 그녀에게 자진을 명하고 황후의 예로 장사지내면 아마 풍씨 가문의 추한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말하였다. “나의 병이 점점 심해져 아마 좋아지지 못할 것이다. 비록 진현달을 이겼으나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뒤를 이을 아이가 어리고 약하니 사직이 의지할 바는 오직 그대뿐이다. 곽자맹과 제갈공명은 이성의 신분으로 고명을 받았거늘 하물며 그대는 친척이자 현인인데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원협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평민 백성도 오히려 지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하물며 신이 선제에게 몸을 의탁하고 폐하의 남은 빛에 의지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지극히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무에 참여하여 총애가 현저하여 해내에 비할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감히 받고 사양하지 않은 것은 바로 폐하의 일월과 같은 광명을 믿고 신이 은퇴할 것을 잊은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 신을 원재로 임명하여 기무의 정무를 총괄하게 하시니 위엄이 군주를 진동시켜 필히 죄를 초래할 것입니다. 옛날 주공은 대성인이었고 성왕은 지극히 밝은 군주였음에도 오히려 의심을 면치 못하였거늘 하물며 신이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폐하께서 신을 사랑하심이 도리어 시종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황제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자세히 그대의 말을 생각해 보니 그 이치가 참으로 바꾸기 어렵다.” 이에 손수 조서를 써서 태자에게 주며 말하였다. “네 숙부 원협은 맑은 풍채와 후한 상여가 백운과 같이 높고 영화를 싫어하고 관작을 버리기를 송죽 같은 마음으로 하였다. 내가 어릴 적부터 그와 친밀하여 헤어짐을 참지 못하겠다. 내가 죽은 후에 원협이 관직을 사양하여 그의 겸퇴하는 본성을 실현하도록 허락하라.” 시중, 호군장군 북해왕 원상을 사공으로, 진남장군 왕숙을 상서령으로, 진남대장군 광양왕 원가를 좌복야로, 상서 송변을 이부상서로 임명하고 시중, 태위 원희, 상서우복야 원징 등 여섯 사람과 함께 보정하게 하였다. 여름 4월 병오일 초하루에 북위 곡당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여러 동생들을 우애하여 시종 틈이 없었다. 일찍이 한가롭게 함양왕 원희 등에게 말하였다. “내 후의 자손이 만약 불초한 아들을 만나거든 너희들이 보고 도울 수 있으면 돕고 도울 수 없으면 대신하여 남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라.” 친근하고 현능한 이를 믿고 선을 따르기를 흐르는 물과 같이 하였으며 모든 정무에 부지런하고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항상 말하였다. “군주는 마음을 공평하게 하고 물건을 대할 때 미덥게 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이 두 가지를能做到 있다면 호와 월의 사람도 형제처럼 만들 수 있다.” 법을 쓰는 것이 비록 엄격하여 대신에게 조금도 용납함이 없었으나 사람이 작은 허물이 있으면 항상 많이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일찍이 음식 속에서 벌레를 발견하고 또 좌우가 진상한 국이 잘못하여 황제의 손을 다치게 하였으나 모두 웃으며 사면하였다. 천지오교, 종묘이분의 제사에 일찍이 친히 행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외출하여 유람하고 군사를 쓸 때 유관 부서가 길을 닦을 것을 상주하면 황제는 항상 말하였다. “대충 다리만 닦아 수레와 말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풀을 베고 땅을 평평하게 할 것은 없다.” 회남에서 군대를 행진할 때 국내에 있는 것과 같이 하여 병사가 보리를 짓밟고 손상시키는 것을 금지하였고 가끔 민가의 나무를 베어 군용에 공급하면 모두 비단을 남겨 보상하였다. 궁실은 부득이하지 않으면 수리하지 않았고 옷은 낡고 헤지면 빨아서 다시 입었으며 안장과 재갈은 쇠와 나무만 사용하였다. 어렸을 때 힘이 세고 활쏘기를 잘하여 손가락으로 양의 뼈를 튕겨 부술 수 있었고 새와 짐승을 쏘면 맞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열다섯 살이 되자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항상 사관에게 말하였다. “시사는 곧게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군주는 위복이 자신에게 있어 그를 제어할 사람이 없다. 만약 사책이 다시 그의 악행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가 무슨 두려움과 꺼림이 있겠는가!” 팽성왕 원협이 임성왕 원징과 모의하여 진현달이 떠난 지 멀지 않아 그가 황제의 죽음을 알고 반격하여 핍박할까 두려워하여 발상을 비밀로 하고 시체를 누운 수레 속에 넣고 두 왕과 측근 몇 사람만이 알았다. 원협이 출입하는 기색이 평상시와 같았고 진상하는 식사, 약 보내기, 외부 상주 처리하기를 모두 평소처럼 하였다. 며칠 후에 완성에 도착하여 밤에 누운 수레를 군부 대청으로 들어 올려 관을 넣어 염습한 후에 다시 관을 누운 수레 속에 넣었으며 안팎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서사인 장유를 보내 조서를 받들고 태자를 부르게 하고 비밀리에 유수 우열에게 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렸다. 우열이 행류 사무를 처리하는 데 거동을 변하지 않았다. 태자가 노양에 도착하여 영구를 만나자 비로소 발상하였다. 정사일에 태자가 즉위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팽성왕 원협이 무릎을 꿇고 몇 장의 유조를 올렸다. 동궁 관속들이 많이 원협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비밀리에 그를 방비하였으나 원협이 미덥게 대하고 예를 다하여 마침내 틈이 없었다. 함양왕 원희가 노양에 도착하여 성 밖에 머물며 변화를 관찰하였다. 오랜 후에야 성에 들어가 원협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이번 행동이 비록 수고로웠으나 참으로 위험하기도 하였다.” 원협이 말하였다. “형님은 나이가 많고 식견이 높아서 평탄과 험함을 아시기에 그러하지만 언화인 나는 뱀을 쥐고 호랑이를 탄 듯하여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원희가 말하였다. “그대는 내가 늦게 온 것을 한하는 것일 뿐이다.” 원협 등이 고조의 유조에 따라 풍후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북해왕 원상이 장추경 백정을 보내 약을 들여보내자 풍후가 뛰어다니며 소리치며 마시지 않고 말하였다. “황제께서 어찌 이런 뜻이 있겠는가, 이는 너희 왕들이 나를 죽이려는 것일 뿐이다!” 백정이 그녀를 붙잡아 억지로 시키니 마시고 죽었다. 영구가 낙양성 남쪽에 도착하자 함양왕 원희 등은 풍후가 실제로 죽은 것을 알고 서로 보며 말하였다. “만약 유조가 없었더라도 우리 형제가 마땅히 그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을 것이다. 어찌 행실이 문란한 부녀자로 하여금 천하를 제재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죽이게 할 수 있겠는가!” 시호를 유황후라 하였다. 5월 계해일에 무위대장군 시안왕 소요광에게 개부의동삼사를 더하였다. 병신일에 북위가 효문제를 장릉에 안장하고 묘호를 고조라 하였다. 북위 세종이 팽성왕 원협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원협이 여러 번 유지를 진술하며 평소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청하자 황제가 그를 대하여 슬피 울었다. 원협이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원협을 사지절, 시중, 도독기정등칠주제군사,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정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원협이 여전히 굳게 사양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자 부임하였다. 북위 임성왕 원징이 왕숙이 객지에 온 사람인데도 지위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것을 불평하였다. 마침 제나라 항복자 엄숙무가 왕숙이 강남으로 도망갈 것을 모의하였다고 고발하자 원징이 왕숙을 사로잡아 표를 올려 모반이라고 하였으나 조사해 보니 실증이 없었다. 함양왕 원희 등이 상주하여 원징이 재보를 사로잡았다 하여 관직을 파면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얼마 안 되어 옹주자사로 임명되었다. 6월 무진일에 북위가 추존하여 황모 고씨를 문소황후로 삼아 고조에게 배향하고 구묘를 증수하여 이름을 종녕릉이라 하였다. 추증하여 황후의 아버지 고양의 작위를 발해공으로 하고 시호를 경이라 하여 그의 적손 고맹으로 하여금 작위를 잇게 하였다. 황후의 오라비 고조를 평원공으로, 고조의 아우 고현을 징성공으로 봉하였는데 세 사람이 같은 날에 수봉되었다. 북위 주가 일찍이 여러 외숙들을 알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의관을 내려 주고 인견하니 그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으며 며칠 사이에 부귀가 현달하였다. 가을 8월 무신일에 북위가 고조의 유조에 따라 삼부인 이하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황제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다만 놀고 장난치는 데 정도가 없었으며 성질이 무겁고 둔하며 말이 적었다. 즉위한 후에 조정 사대부와 사귀지 않고 전문 환관과 측근의 도도, 응칙 등을 친신하였다. 이때 양주자사 시안왕 소요광, 상서령 서효사, 우복야 강조, 우장군 소탄지, 시중 강사, 위위 유훤이 번갈아 내성에 입직하며 날을 나누어 조칙을 열람하고 처리하였다. 옹주자사 소연이 듣고 외종부 녹사참군 범양 사람 장홍책에게 말하였다. “한 나라에 세 공이 있어도 오히려 견딜 수 없는데 하물며 여섯 귀인이 조정에 함께 있으니 세력이 서로 도모하려 할 것이며 화란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화를 피하고 복을 구하는 데 이 주보다 나은 곳이 없으나 다만 여러 동생들이 서울에 있어 혹시 세란을 만날까 두렵다. 마땅히 다시 익주와 함께 모의하여야 한다.” 이에 비밀히 장홍책과 함께 무비를 정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래고 용맹한 무사 수만 명을 모집하고 대량의 대나무와 나무를 베어서 단계에 가라앉히고 띠풀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나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중병참군 동평 사람 여승진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도 사사로이 수백 장의 노를 준비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승진이 우림감이었는데 서효사가 그를 자기 부중으로 이끌고자 하였으나 여승진이 서효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청하여 소연을 따랐다. 이때 소연의 형 소의가 익주자사에서 면직되어 돌아와 여전히 영주 사무를 대리하고 있었는데 소연이 장홍책을 보내 소의를 설득하며 말하였다. “지금 여섯 귀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칙서를 쓰고 권리를 다투고 이익을 겨루며 눈을 흘기고 성내니 이치상 반드시 서로 도모하여 없애려 할 것입니다. 주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좋은 명성이 없었고 소인을 친근히 하며 경솔하고 잔인하니 어찌 정사를 여러 대신에게 맡기고 스스로 빈 자리에 앉아 주낙만 하겠습니까!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오래 쌓이면 반드시 크게 주륙을 행할 것입니다. 시안왕은 조왕 사마륜을 본받으려 하여 형적이 이미 드러났으나 그의 성질이 의심이 많고 그릇이 좁아 다만 화단이 될 뿐입니다. 소탄지는 시기하고 각박하며 남을 억누르고 서효사는 남의 끌려다니고 강조는 결단이 없고 유훤은 혼미하고 나약합니다. 한 번 화란이 발발하면 안팎이 토붕와해할 터이니 우리 형제는 다행히 외번을 진수하고 있으니 마땅히 스스로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의심하고 방비하는 마음이 아직 생기지 않은 때를 타서 마땅히 여러 동생들을 다 불러들여야 하니 장차 몸을 빼내려 해도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영주는 형, 양을 제압하고 옹주는 병마가 정예하고 강하니 천하가 평안하면 진심으로 본조를 위해 힘쓰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면 족히 바로잡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만전지책입니다. 만약 일찍 계획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장홍책이 또 직접 소의를 설득하며 말하였다. “그대 형제의 영웅과 무용으로 천하에 적이 없고 영, 옹 두 주를 점거하고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혼란한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우니 이는 제환공, 진문공의 공업입니다. 소인에게 속아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마소서. 옹주 쪽은 이미 생각이 익었으니 잘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소의가 따르지 않았다. 소연이 이에 그의 아우 표기외병참군 소위와 서중랑외병참군 소담을 양양으로 맞아들였다. 당초에 고종이 비록 여러 공경에게 고명을 하였으나 대부분 강조 형제에게 심복을 의탁하였다. 두 강이 번갈아 전내에서 당직하며 한 가지 움직임마다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황제가 점차 제 마음대로 하려 하자 서효사는 막지 못하였고 소탄지는 때때로 다른 의견이 있었으나 강조는 견제를 매우 엄격히 하여 황제가 깊이 원망하였다. 황제 측근의 회계 사람 여진진, 오흥 사람 매충아 등이 황제에게 위임되었는데 강조가 항상 그들을 억누르자 여진진 등이 절치부심하였다. 서효사가 강조에게 말하였다. “주상이 조금 다른 의견이 있으니 어찌 완전히 그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강조가 말하였다. “다만 일을 나에게 맡기면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황제의 실덕 행위가 날로 뚜렷해지자 강조가 황제를 폐하고 강하왕 소보현을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유훤이 일찍이 소보현의 영주행사가 되어 일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을 바치자 소보현이 보고 싶어 하였는데 유훤이 말하였다. “말이 무엇을 볼 것이 있겠는가!” 소보현의 비(妃)가 새끼돼지를 삶으려 하여 장수에게 청하니 유훤이 말하였다. “아침에 이미 거위를 삶았으니 번거롭게 다시 그럴 필요가 없다.” 소보현이 원망하며 말하였다. “외숙은 조금도 위양지정이 없다.” 유훤이 이 때문에 소보현을 시기하여 강조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고 더욱 건안왕 소보인을 세우려 하였다. 강조가 비밀히 시안왕 소요광과 모의하니 소요광이 스스로 나이가 많아 자기가 황위를 빼앗고자 하여 은미한 뜻으로 강조를 감동시켰다. 강조의 아우 강사도 소주가 보전하기 어렵다고 여겨 강조에게 소요광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강조의 마음이 머뭇거리며 소탄지에게 물었다. 소탄지가 때마침 어머니 상중이었으나 기복되어 영군장군이 되었는데 강조에게 말하였다. “명제가 즉위할 때 이미 차례에 맞지 않았으므로 천하가 지금까지도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다시 이렇게 한다면 네 주가 와해될까 두려우니 감히 말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이에 집에 가서 상을 마쳤다. 강조와 강사가 비밀히 이부랑 사조에게 말하였다. “강하왕이 젊어서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한다면 어찌 다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시안왕이 나이가 많아 대통을 이으면 인망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로써 부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소요광이 또 심복 단양승 남양 사람 유복을 보내 비밀히 강조에게 뜻을 전하며 그를 동지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강조가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소요광이 사조로 하여금 위위 사무를 겸하게 하자 사조가 두려워하여 강조의 모의를 태자우위솔 좌흥성에게 알렸으나 좌흥성이 발각하지 못하였다. 사조가 또 유훤을 권하며 말하였다. “시안왕이 한번 남면하여 제위에 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