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칠
《자치통감》 제151권 【양기칠】 유목돈장(柔兆敦牂)这一年,到강유협흡(强圉协洽)
고조무황제 보통 7년(병오, 서기 526년)
봄, 정월, 신축일 초하루, 사면령을 내렸다.
임자일 12일, 북위가 여남왕 원열을 겸임 태위로 임명했다.
북위 안주의 석리(石离)、혈성(穴城)、곡염(斛盐) 세 곳 수비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락주(杜洛周)에 호응했으며, 무리는 합쳐 2만 명이었다. 두락주가 송견(松岍)에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행대(行台) 상경(常景)이 별장 최중철(崔仲哲)을 파견하여 군도관(军都关)에 주둔시키며 그들을 차단했으나, 최중철은 전사했고 원담(元谭)의 군대는 밤중에 와해되었다. 북위는 별장 이거(李琚)를 원담 대신 도독으로 임명했다. 최중철은 최병(崔秉)의 아들이다.
처음에 북위 광양왕 원심(元深)이 성양왕 원휘(元徽)의 비(妃)와 간통했다. 원휘는 상서령(尚书令)으로 있으면서 호태후의 신임을 받았다. 마침 항주 사람들이 원심을 자사(刺史)로 삼아 줄 것을 청원하자, 원휘는 원심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두락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항주에 살고 있던 오원(五原)의 항복한 무리들이 은밀히 원심을 주인으로 추대하려 했다. 원심은 매우 두려워하여 상소를 올려 낙양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북위는 좌위장군 양진(杨津)을 원심 대신 북도대도독(北道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조서를 내려 원심을 이부상서(吏部尚书)로 삼았다. 원휘는 원장수(元长寿)의 손자이다.
오원의 항복한 무리 선우수례(鲜于修礼) 등이 북진(北镇) 유민들을 이끌고 정주(定州)의 좌성(左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호를 노흥(鲁兴)으로 고치고 군대를 이끌고 주성(州城)으로 향했다. 주병(州兵)이 이를 막았으나 패배했다. 양진이 영구(灵丘)에 도착했을 때 정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 점거했다. 선우수례가 도착하자 양진은 출병하여 맞서 싸우려 했으나 장사(长史) 허피(许被)가 동의하지 않았다. 양진이 칼을 뽑아 허피를 치자 허피는 도망쳐 죽음을 면했다. 양진이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수백 명의 목을 베니 적군은 물러났고,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서가 내려져 양진을 정주자사 겸 북도행대(北道行台)로 임명했다. 북위는 양주자사 장손치(长孙稚)를 대도독 북토제군사(大都督北讨诸军事)로 임명하고 하간왕 원침(元琛)과 함께 선우수례를 토벌하게 했다.
2월, 갑술일 5일, 북벌군의 모든 부대가 경계를 풀었다.
북위 서부의 칠륵(敕勒) 곡률낙양(斛律洛阳)이 상건(桑干)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켜 비야두(费也头) 목자(牧子)와 서로 결탁했다. 3월, 갑인일 15일, 유격장군(游击将军) 이주영(尔朱荣)이 심정(深井)에서 곡률낙양을 격파하고 하서(河西)에서 비야두 목자를 격파했다.
여름, 4월, 을유일 17일, 임천정혜왕(临川靖惠王) 소굉(萧宏)이 사망했다.
북위가 사면령을 내렸다.
계사일 25일, 북위가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车骑大将军) 성양왕 원휘를 의동삼사(仪同三司)로 임명했다. 원휘는 급사황문시랑(给事黄门侍郎) 서흘(徐纥)과 함께 태후 앞에서 시중 원순(元顺)을 비방하여 원순은 외직인 호군장군(护军将军) 태상경(太常卿)으로 좌천되었다. 원순이 서유원(西游园)에서 태후에게 작별 인사를 드릴 때 서흘이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원순이 서흘을 가리키며 태후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북위의 재비(宰嚭)입니다. 북위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끝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서흘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나자 원순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겨우 칼과 붓만 다루는 하찮은 재주로 문서 작업이나 할 만한데, 어찌 문하성(门下省)을 더럽히고 우리의 인륜을 무너뜨리는가!" 그리고는 옷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태후는 침묵했다.
북위 삭주(朔州) 성민(城民) 선우아하(鲜于阿胡) 등이 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두락주가 남쪽으로 출병하여 계성(蓟城)을 약탈했다. 북위 상경이 통군(统军) 양중례(梁仲礼)를 보내 그를 격파했다. 정미일(의심됨), 도독 이거가 두락주와 계성 북쪽에서 교전하다 패배하여 전사했다. 상경이 부대를 이끌고 막았으나 두락주는 군대를 이끌고 상곡(上谷)으로 돌아갔다.
장손치가 군대를 이끌고 업(邺)에 도착했을 때 조서가 내려져 그의 대도독 직위를 해제하고 하간왕 원침으로 대체했다. 장손치가 상소하여 말했다. "이전에 신이 원침과 함께 회남(淮南)에 있을 때 원침은 패전했으나 신은 온전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맺었습니다. 지금 그의 지휘와 조정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북위 조정은 듣지 않았다. 군대가 호타하(呼沱河)에 이르렀을 때 장손치는 교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원침은 따르지 않았다. 선우수례가 오록(五鹿)에서 장손치를 요격하여 습격했으나 원침이 구원하지 않아 장손치의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장손치와 원침은 함께 죄를 받아 명적(名籍)에서 제거되었다.
5월, 정미일 9일, 북위 주(主)가 조서를 내려 장차 북벌을 할 것이라고 하여 조정 안팎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행되지 않았다.
형주자사(衡州刺史) 원략(元略)은 강남(江南)에 도착한 이후로 아침저녁으로 울며 항상 상중(丧中)에 있는 듯했다. 북위 원의(元义)가 죽은 후 호태후가 그를 소환하려 했는데, 원략이 조쌍(刁双)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는 것을 알고 조쌍을 광록대부(光禄大夫)로 부르고 강혁(江革)과 조항지(祖□恒之, 원문에 빠진 글자 있음)를 남쪽으로 돌려보내 원략과 교환하게 했다. 양무제(梁武帝)는 예를 갖추어 그를 돌려보내고 하사한 재물이 매우 풍성했다. 원략이 회수(淮水)를 건너자마자 북위는 원략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의양왕(义阳王)으로 내렸다. 사마시빈(司马始宾)을 급사중(给事中)으로, 율법광(栗法光)을 본현현령(本县县令)으로, 조창(刁昌)을 동평태수(东平太守)로, 조쌍을 서연주자사(西兖州刺史)로 임명했다. 원략이 지나간 곳마다 한 끼 식사, 한 번의 숙박에도 모두 상을 내렸다.
북위가 승상(丞相) 고양왕(高阳王) 원옹(元雍)을 대사마(大司马)로 임명했다. 또 광양왕 원심을 대도독으로 삼아 선우수례를 토벌하게 하고, 장무왕(章武王) 원융(元融)을 좌도독(左都督)으로, 배연(裴衍)을 우도독(右都督)으로 삼아 모두 원심의 지휘를 받게 했다.
원심이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갔다. 성양왕 원휘가 태후에게 말했다. "광양왕이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병권을 손에 쥐고 밖에 있으니, 혹시 다른 마음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이에 태후는 원융과 배연에게 은밀히 경계하도록 명령했다. 원융과 배연이 명령을 원심에게 보여주자 원심은 매우 두려워하여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태후가 사람을 보내 그 이유를 묻자 원심이 대답했다. "원휘가 저를 뼛속까지 미워합니다. 제가 먼 곳에 있을 때 원휘가 저를 모함하는 데 무슨 짓을 못 하겠습니까? 원휘가 집권한 이후로 제가 상소하여 청한 것들은 대부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원휘가 저 한 사람만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따르는 장수와 병사들도 공이 있으면 모두 배척당하고 억압받아 다른 군대와 비교할 수 없었으며, 여전히 깊이 미움과 시기를 받았습니다. 혹은 그들이 죄가 있다고 하여 가혹한 법률 조문으로 죄를 꾸며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저를 따라 출행한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저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원휘가 원수처럼 여기고,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친척처럼 대합니다. 원휘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아침저녁으로 저를 죽이려 하니 제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원휘를 외주 장관으로 임명하신다면 저에게는 안에 대한 근심이 없어져 혹시라도 적진에서 목숨을 바쳐 충성과 힘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후는 듣지 않았다.
원휘는 중서사인(中书舍人) 정엄(郑俨) 등과 서로 아첨하며 결탁하여 겉으로는 부드럽고 신중한 듯하나 속으로는 시기하고 박정하여 상벌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북위의 조정 정사는 이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무신일 10일, 북위 연주자사(燕州刺史) 최병(崔秉)이 부대를 이끌고 성을 버리고 정주로 도망쳤다.
을축일 27일, 북위가 안서장군(安西将军) 종정진손(宗正珍孙)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분주(汾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들을 토벌하게 했다.
6월, 북위에 항복했던 촉인(蜀人) 진쌍치(陈双炽)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시건왕(始建王)이라 칭했다. 북위는 대리 진서장군(代理镇西将军) 장손치를 토촉도독(讨蜀都督)으로 임명했다. 별장(别将) 하동(河东) 사람 설수의(薛修义)가 가벼운 말을 타고 진쌍치의 영채 아래로 가서 이해와 손해를 설명하자 진쌍치가 즉시 항복했다. 조서가 내려져 설수의를 용문진장(龙门镇将)으로 임명했다.
병자일 9일, 북위가 의양왕 원략을 동평왕(东平王)으로 고쳐 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군(大将军) 상서령(尚书令)으로 승진시켜 호태후의 신임을 받게 하여 성양왕 원휘와 지위가 같아졌다. 그러나 서흘과 정엄이 권력을 잡고 있어 원략도 감히 어기지 못했다.
두락주가 도독 왕조긍진(王曹纥真)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계(蓟) 남쪽을 약탈하게 했다. 가을, 7월, 병오일 9일, 행대 상경이 도독 우영(于荣) 등을 보내 속원(栗园)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왕조긍진과 그 장수 및 병사 3천여 명을 참수했다. 두락주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범양(范阳)으로 달려가자 상경과 우영 등이 다시 그를 격파했다.
북위 복야(仆射) 원찬(元纂)이 행대(行台) 신분으로 항주(恒州)를 진수했다. 선우아하(鲜于阿胡)가 삭주(朔州) 유민들을 이끌고 항주를 침범하여 무신일 11일, 평성(平城)을 함락시켰다. 원찬은 기주(冀州)로 도망쳤다.
양무제(梁武帝)는 회수(淮水)의 큰 둑(大坝) 물살이 매우 세차서 수양성(寿阳城)이 거의 잠길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시 형주자사(郢州刺史) 원수(元树) 등을 보내 북도(北道)에서 여장(黎浆)을 공격하게 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 하후단(夏侯但) 등을 보내 남도(南道)에서 수양을 공격하게 했다.
八月癸巳日,적군 수장 원홍업이 선우수례를 참수하고 북위에 투항을 청했다. 적당 갈영이 다시 원홍업을 죽이고 스스로 일어섰다.
북위 안북장군, 도독항삭토로제군사 이주영이 사주를 지나가는데, 사주자사 위경빈이 그를 꺼려 성을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이주영이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사주를 습격하고, 위경빈을 사로잡아 수용으로 돌아갔다. 그의 종숙 이주우생을 자사로 삼았으나 북위 조정이 제지하지 못했다. 처음에 하발윤과 그의 아우 하발승, 하발악이 원찬을 따라 항주에 있었는데, 평성이 함락될 때 하발윤 형제가 흩어져 하발악은 이주영에게로 달아나고 하발승은 사주로 달아났다. 이주영이 사주를 함락시키고 하발승을 얻자 크게 기뻐하며 “그대 형제를 얻었으니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 그를 별장으로 삼았으며, 군중의 큰 일을 많이 그와 의논했다.
9월 기유일(의심됨), 파양충열왕 소회가 사망했다.
갈영이 두락주의 무리를 병합한 후 북쪽으로 영주로 향했다. 북위 광양충무왕 원심이 교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추격했다. 신해일(15일), 갈영이 백나뢰에 도착하여 경장기병으로 장무장무왕 원융을 기습해 죽였다. 갈영이 스스로 천자라 칭하고 국호를 제(齊)로, 연호를 광안(廣安)으로 고쳤다. 원심이 원융의 패배를 듣고 군사를 멈추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중 원안이 태후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광양왕이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며 불궤를 도모합니다. 우근이라는 자가 지모와 전략이 남보다 뛰어나 그의 주요 모사인데, 전란의 때에 폐하의 충신이 아닐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깊이 옳게 여겨 조서를 내려 상서성 문 앞에 방을 붙이고 우근을 잡는 자에게 중상을 주도록 했다. 우근이 이 소식을 듣고 원심에게 말하기를 “지금 여주가 조정을 장악하고 참소하는 소인을 믿으니, 전하의 본심을 밝히지 않으면 화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묶여 조정에 나아가 유사에게 죄를 돌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장 방문 아래로 가서 스스로 우근이라 칭했다. 유사가 보고하자 태후가 불러들여 매우 노여워했다. 우근이 원심의 충성을 자세히 진술하고 군사를 멈춘 상황을 아뢰니 태후의 노여움이 풀려 그를 석방했다.
원심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정주로 향했다. 정주자사 양진도 원심을 의심하여 다른 마음을 품었다. 원심이 이 소식을 듣고 주 남쪽의 불사에 머물렀다. 이틀 후 원심이 도독 모적 등 여러 사람을 불러 팔짱을 끼고 맹세하며 위급한 때에 서로 구원하고 위로하기로 약속했다. 모적이 더욱 의심하여 양진에게 비밀리에 보고하며 원심이 불궤를 도모한다고 말했다. 양진이 모적을 보내 원심을 토벌하게 하자 원심이 도망쳤고, 모적은 고함을 지르며 원심을 쫓았다. 원심이 측근과 함께 좁은 길로 박릉 경계까지 도망쳐 갈영의 순찰 기병을 만나 갈영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원심을 보고 기뻐하는 자가 많았으나 갈영이 막 즉위하여 그를 꺼려 죽였다. 성양왕 원휘가 원심이 적군에게 투항했다고 무고하여 그의 처자를 체포했다. 원심의 부좌 송유도가 그를 위해 변론하여 석방되었다. 송유도는 송유의 현손이다.
갑신일(의심됨), 북위 행대 상경이 두락주를 격파하고 그의 무천왕 하발문흥 등을 참수하고 400명을 사로잡았다.
취덕흥이 북위 평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왕매노를 죽였다.
천수 백성 여백도는 본래 막절념생의 당이었으나 후에 현친을 점거하고 막절념생을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기지 못하고 호침에게 달아나니, 호침이 그를 대도독, 진왕으로 삼고 병마를 지원하여 막절념생을 공격하게 했다. 여백도가 여러 번 막절념생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현친을 점거한 후 호침을 배반하고 동쪽으로 북위 군대를 끌어들였다. 막절념생이 곤경에 처하여 소보인에게 투항을 청하니, 소보인이 행대좌승 최사화를 보내 진주를 점거하게 했다. 북위가 여백도를 경주자사로 삼고 평진군공에 봉했다. 대도독 원수의가 농구에 군사를 멈추고 오래도록 나아가지 않았다. 막절념생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최사화를 사로잡아 호침에게 보내고 길에서 죽였다. 오랜 후 여백도가 만척추노에게 살해되어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해지니 소보인이 제어할 수 없었다. 호침이 막절념생과 서로 결탁하여 파륙한발릉을 점차 소홀히 여기자, 파륙한발릉이 그의 신하 비율을 고평에 보내 호침을 유인하여 죽이고 만척추노가 그의 모든 무리를 병합했다.
겨울 11월 경진일(14일), 대사면을 내렸다.
정귀빈이 죽자 태자가 물과 쌀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양 무제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슬픔이 지나쳐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되니, 하물며 내가 아직 있다!”고 하니 태자가 죽을 여러 홉 마셨다. 태자의 몸은 본래 비대하여 허리둘레가 열 자(圍)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수척하여 반 이상 줄었다.
하후단 등의 군대가 북위 경내로 들어가 이르는 곳마다 함락시켰다. 신사일(15일), 북위 양주자사 이헌이 수양을 바쳐 항복하니, 선맹장군 진경지가 들어가 그 성을 점거했다. 모두 52개 성을 항복시키고 남녀 7만 5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정해일(21일), 이헌을 북위로 돌려보내고 다시 수양을 예주로 삼고 합비를 남예주로 고쳐 하후단을 예주 및 남예주 두 주의 자사로 삼았다. 수양이 오랜 전란으로 백성이 흩어져 떠돌자 하후단이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농사에 힘쓰고 부역을 절약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가 다시 충실하게 회복되었다.
두락주가 범양을 포위했다. 무술일(의심됨), 백성이 북위 유주자사 왕연년과 행대 상경을 붙잡아 두락주에게 보내고 성문을 열어 그를 맞이했다.
북위 제주 평원 백성 유수 등이 반란을 일으켜 군현을 함락시키고 여러 번 주군을 격파했다. 자사 원흠이 평원 사람 방사달을 장수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했다.
조의종이 양성에 주둔하며 신야를 위협하자 북위가 도독 위승조와 상서좌승 남도행대 신찬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조의종이 교전에 불리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신찬은 신웅의 종형이다.
북위의 도적이 날로 늘어나고 정벌이 그치지 않아 국가 재정이 바닥나 6년 치의 조세와 부역을 미리 징수해도 여전히 부족하여, 백관에게 술과 고기를 끊게 하고 또 사람마다 1전(錢)씩 세금을 징수하며 점포에도 세금을 부과하니 백성이 탄식하고 원망했다. 이부랑중 신웅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족과 중화 백성이 서로 모여 난을 일으키는 것이 어찌 다른 한이 있겠습니까! 바로 군수와 현령이 사람을 얻지 못하여 백성이 그 정령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때를 틈타 일찍이 위무해야 합니다. 다만 군현 관리의 선발이 예로부터 가벼이 여겨져 귀족 자제와 준걸 선비가 아무도 그 직임을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폐단을 개혁하여 군현을 3등급으로 나누고 청관을 선발하는 법을 정하여 재능과 명망을 모두 취하되, 겸할 수 없으면 먼저 재능을 보고 나중에 문벌을 보며 연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3년에 한 번 승강을 시행하여 직무에 잘하는 자는 경중의 명관을 보충하고, 군수와 현령을 역임하지 않은 자는 경관이 될 수 없게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면려하려 할 것이며 원통함이 풀리고 강포가 저절로 가라앉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고조 무황제 칠대통 원년(정미, 서기 527년)
봄 정월 을축일(초하루), 상서좌복야 서리를 복야로 삼았다. 신미일(7일), 양 무제가 남교에서 제사 지냈다.
갑술일(10일), 북위가 사공 황보도를 사도로, 의동삼사 소보인을 사공으로 삼았다.
북위(北魏)가 정주(定州)와 상주(相州) 두 주에서 네 개의 군을 떼어 은주(殷州)를 설치하고, 북도행대(北道行台) 박릉(博陵) 사람 최개(崔楷)를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최개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은주는 지금 막 설치되어 한 자의 병기와 한 말의 식량도 없으니, 병기와 식량을 지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외정(外廷)에서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최개에게 권하기를 가족은 남겨두고 홀로 말을 타고 부임하라고 하니, 최개가 말했다. "내가 듣건대 남의 녹(祿)을 먹는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함께 근심한다고 했소. 만약 내가 홀로 간다면 장수와 병사들 중에 누가 뜻을 굳게 하겠소?" 이에 온 가족을 데리고 부임했다. 갈영(葛榮)이 주성을 압박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노약자를 줄여 피할 것을 권했고, 최개는 어린 아들과 딸 하나를 밤에 성 밖으로 내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며 말했다. "남들이 내 마음이 굳지 않아 충성을 해치고 사사로운 사랑을 온전히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명령하여 되돌아오게 했다. 적군이 이르러强弱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고, 방어할 기구도 없었다. 최개가 장수와 병사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저항하게 하니, 병사들이 다투어 싸우며 말했다. "최공이 오히려 백 명의 가족을 아끼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목숨을 아끼겠는가!" 연이어 싸움을 그치지 않아 죽은 자가 서로 쌓였으나 끝내 배반하는 마음이 없었다. 신미일(7일), 성이 함락되고 최개는 부절(符節)을 잡고 굴하지 않다가 갈영이 그를 죽이고, 이어 기주(冀州)를 포위했다.
북위 소보인(蕭寶寅)이 병사를 출정시킨 지 여러 해가 되어 장수와 병사가 피폐해졌다. 진(秦) 땅의 적군이 그를 공격하니, 소보인이 경주(涇州)에서 크게 패하여 흩어진 병사 만여 명을 거두어 소요원(逍遙園)에 주둔했다. 동진주자사(東秦州刺史) 반의연(潘義淵)이 변성(汧城)을 바치고 적군에게 항복했다. 막절념생(莫折念生)이 기주(岐州)로 진격하니, 성 안의 백성들이 자사 위난근(魏蘭根)을 잡아 그에게 호응했다. 유주자사(豳州刺史) 필조휘(畢祖暉)가 전사하고, 행대(行台) 신심(辛深)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의 군대도 패배했다. 적장 호인조(胡引祖)가 북화주(北華州)를 점거하고, 흘간기린(叱干麒麟)이 유주(豳州)를 점거하여 막절천생(莫折天生)에게 호응하니, 관중(關中)이 크게 혼란해졌다.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춤(楊椿)이 병사 칠천여 명을 모집하여 이끌고 지키며 싸웠고, 황제가 조서를 내려 양춤을 시중(侍中) 겸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로 삼고 행대(行台)를 겸하게 하여 관서(關西)의 모든 장수를 지휘하고 조율하게 했다. 북지공조(北地功曹) 모홍빈(毛鴻賓)이 적군을 이끌어 위수(渭水) 북쪽을 약탈하니, 옹주녹사참군(雍州錄事參軍) 양간(楊侃)이 병사 삼천 명을 거느리고 기습했다. 모홍빈이 두려워하여 적군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겠다고 청하며, 숙근오과인(宿勤烏過仁)을 사로잡아 압송했다. 숙근오과인은 숙근명달(宿勤明達)의 형의 아들이었다. 막절천생이 승세를 타고 옹주(雍州)를 침범하니, 소보인의 부장 양간(羊侃)이 참호 속에 숨어 활을 쏘아 막절천생을 화살에 맞아 죽게 하자, 그의 무리는 곧바로 흩어졌다. 양간은 양지(羊祉)의 아들이다.
북위 우민랑(右民郎) 양평(陽平) 사람 노사령(路思令)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군대가 출전하여 공을 세우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습니다. 적합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고, 적합한 사람을 잃으면 삼하(三河)의 땅이 싸움터가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근년의 장수들은 대부분 총애받는 권귀의 자제들로서, 음주와 말 타기를 즐기며 뜻을 얻어 만족하고, 기운이 들떠 눈썹을 치켜올리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스스로 잘 싸울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큰 적을 마주하면 근심과 두려움이 마음에 가득 차서 웅대한 도량과 날카로운 기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집니다. 이에 약한 병사는 앞세워 적을 막고, 강한 병사는 뒤에 두어 자신을 보호하며, 여기에 기계가 정밀하지 못하고 진퇴에 절도가 없어, 험한 곳을 지키는 무리와 맞서고 여러 번 싸운 적과 대적하여 그들이 패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병사들은 반드시 패할 것을 알고, 막 모였다가 먼저 도망칩니다. 장수는 적을 두려워하여 질질 끌며 나아가지 않습니다. 국가에서는 관작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여러 번 은총과 임명을 더하고, 또 상이 너무 가볍다고 의심하여 날마다 금백(金帛)을 흩뿌립니다. 국고는 비고 민재는 다하여 결국 적의 무리를 더욱 창궐하게 하고 백성을 피폐하게 만든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덕(德)은 의사(義士)를 감동시킬 수 있고, 은혜는 죽음을 무릅쓰는 자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승강(昇降)을 분명히 하고 상벌을 공정히 하며, 사졸을 가려 뽑고 기계를 수리하며, 먼저 유능한 변사(辯士)를 보내 화복(禍福)을 설명하고, 만약 그들이 뉘우치지 않으면 천리에 순응하여 반역을 토벌한다면, 이는 마치 날카로운 도끼를 갈아 조균(朝菌)을 베고, 큰 화로를 불어 터럭을 태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무자일(24일), 북위가 황보도(皇甫度)를 태위(太尉)로 임명했다.
기축일(25일), 북위의 주(主)가 사방이 평정되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조정 내외를 경계하여, 장차 친히 출정하여 토벌하려 했으나, 끝내 실행하지 않았다.
초주자사(譙州刺史) 담승지(湛僧智)가 북위의 동예주(東豫州)를 포위하고, 장군 팽군(彭群)과 왕변(王辯)이 낭야(琅邪)를 포위하니, 북위가 청주(青州)와 남청주(南青州) 두 주에 명하여 낭야를 구원하게 했다. 사주자사(司州刺史) 하후기(夏侯夔)가 장무장군(壯武將軍) 배지례(裴之禮) 등을 거느리고 의양도(義陽道)에서 출병하여 북위의 평정(平靜), 목릉(穆陵), 음산(陰山) 세 관문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하후기는 하후단(夏侯亶)의 아우이고, 배지례는 배수(裴邃)의 아들이다.
북위 동청하군(東清河郡)에 산적이 떼를 지어 일어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제주장사(齊州長史) 방경백(房景伯)을 동청하태수(東清河太守)로 임명했다. 군민(郡民) 유간호(劉簡虎)가 일찍이 방경백에게 무례를 범하고 온 가족이 도망갔다. 방경백이 추격하여 사로잡고 그의 아들을 서조연(西曹掾)으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산적들을 타일러 알리게 했다. 산적들이 방경백이 옛 허물을 생각하지 않음을 보고 모두 잇따라 나와 항복했다.
방경백의 어머니 최씨(崔氏)는 경서에 통달하고 명철한 식견이 있었다. 패구(貝丘)의 한 부녀가 자식의 불효(不孝)를 열거하며 호소하자, 방경백이 이 일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듣건대 명성을 듣는 것은 얼굴을 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소. 산촌 백성들은 예의를 알지 못하니, 어찌 깊이 꾸짖을 가치가 있겠소?" 이에 그 부녀를 불러 그녀와 마주 앉아 함께 밥을 먹게 하고, 그 아들은 당 아래 서서 방경백이 음식을 올리는 것을 보게 했다. 십 일이 채 못 되어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최씨가 말했다. "이는 비록 얼굴은 부끄러워하지만 마음은 아직 그러하지 않으니, 잠시 머물러 두시오." 모두 이십여 일이 지나자, 그 아들이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하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청한 연후에야 그를 돌려보냈고, 끝내 효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방경백은 방법수(房法壽)의 동족 조카이다.
2월, 진(秦) 땅의 적군이 북위의 동관(潼關)을 점거했다.
경신일(27일), 북위 동군(東郡) 백성 조현덕(趙顯德)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배연(裴煙)을 죽이고 스스로 도독(都督)이라 칭했다.
장군 성경준(成景俊)이 북위의 팽성(彭城)을 공격하니, 북위가 전(前) 형주자사(荊州刺史) 최효분(崔孝芬)을 서주행대(徐州行台)로 임명하여 막게 했다. 이보다 앞서 최효분이 원의(元叉)의 당여로서 여동(盧同) 등과 함께 명부에서 제명되었는데, 장차 서주(徐州)로 가려 할 때 궁중에 들어가 태후(太后)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태후가 최효분에게 말했다. "나는 너와 인척(姻戚)인데, 어찌하여 네가 머리를 원의의 수레 안에 들이밀며 '이 늙은 할멈을 떠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느냐?" 최효분이 말했다. "신이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나, 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말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들었다면, 그 사람의 원의와의 친밀함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태후의 노여움이 풀리고 얼굴에 서운하고 부끄러운 기색이 나타났다. 성경준이 보(洑)를 쌓아 사수(泗水)를 막아 팽성을 침수시키려 하니, 최효분이 도독 이숙인(李叔仁) 등과 함께 그를 공격하여 성경준이 도망쳐 돌아갔다.
3월, 갑자일(1일), 북위 주가 조서를 내려 장차 서쪽을 토벌하려 하여 조정 내외를 경계했다. 마침 진 땅의 적군이 서쪽으로 달아나고 또 동관을 되찾자, 무진일(5일)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려 북쪽을 토벌하게 했다. 실제로는 모두 실행하지 않았다.
갈영이 오랫동안 신도(信都)를 포위하자, 북위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원자옹(源子邕)을 북토대도독(北討大都督)으로 삼아 구원하게 했다.
당초, 양무제(梁武帝)가 동태사(同泰寺)를 짓고, 또 대통문(大通門)을 열어 그와 마주하게 하여 그 반어(反語)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했다. 양무제가 아침저녁으로 절에 갈 때마다 모두 이 문을 출입했다. 신미일(8일), 양무제가 동태사에 가서 몸을 바쳤다(舍身). 갑술일(11일), 궁으로 돌아와 대사면(大赦)하고 연호를 고쳤다.
북위 제주(齊州) 광천(廣川) 백성 유균(劉鈞)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행대(大行臺)라 칭하고, 청하(清河) 백성 방수(房須)가 스스로 대도독(大都督)이라 칭하며 창국성(昌國城)에 주둔하며 점거했다.
여름, 4월, 북위 장수 원빈지(元斌之)가 동군(東郡)을 토벌하여 조현덕을 목 베었다.
기유일(17일), 유연(柔然)의 두병가한(頭兵可汗)이 사신을 보내 북위에 조공하고, 또 무리를 토벌해 주기를 청했다. 북위 사람들이 그들의 배반을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때마침 한여름이니 잠시 후일의 명령을 기다리라 했다.
北魏 소보인(萧宝寅)이 전쟁에서 패한 후, 해당 관청에서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형을 면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춤(杨椿)이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다시 소보인을 도독옹경등사주제군사(都督雍泾等四州诸军事)·정서장군(征西将军)·옹주자사(雍州刺史)·개부의동삼사(开府仪同三司)·서토대도독(西讨大都督)으로 임명하고, 관(关) 서쪽 지역은 모두 그의 지휘와 조정을 받도록 하였다. 양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들 양욱(杨昱)이 낙양(洛阳)으로 가려 하자, 양춤이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의 옹주자사는 소보인보다 나은 자가 없지만, 그의 주요 보좌 관원은 조정에서 심복 중신을 파견해야 하거늘, 어찌 그가 마음대로 임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성조(圣朝)의 백 가지 계책 중 하나의 실수이다. 더구나 소보인은 자사(刺史)를 영예로 여기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그가 이 주(州)를 얻었을 때 기쁨이 지나치게 컸고, 상벌과 조치가 상규(常规)를 따르지 않으니,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네가 지금 경성(京城)으로 가거든, 이 뜻을 두 성상(圣上)께 아뢰고 재보(宰辅)에게도 알려, 따로 장사(长史)·사마(司马)·방성도독(防城都督)을 파견하게 하라. 관중(关中)을 안정시키려면 바로 이 세 사람이 필요하다. 만약 파견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근심이 될 것이다." 양욱이 면전에서 북위주(北魏主)와 태후(太后)에게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병인일(丙寅日, 초사흗날), 성경준(成景俊)이 북위의 임동(临潼)과 죽읍(竹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동궁직각(东宫直阁) 남흠(兰钦)이 북위의 소성(萧城)과 궐고(厥固)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흠이 북위 장수 조룡아(曹龙牙)를 참수하였다.
6월, 북위 도독 이숙인(李叔仁)이 유균(刘钧)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가을 7월, 북위 진군(陈郡) 백성 유획(刘获)과 정변(郑辩)이 서화(西华)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치고, 담승지(湛僧智)와 함께 모의하였다. 북위는 행동예주자사(行东豫州刺史) 초국인(谯国人) 조세표(曹世表)를 동남도행대(东南道行台)로 삼아 토벌하게 하고, 원자공(源子恭)이 조세표를 대신하여 동예주자사(东豫州刺史)가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적이 강하고 관군이 약하며, 모두 패잔병이라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성을 지키며 스스로 방어하려 하였다. 조세표가 등창으로 고통을 겪다가 부축을 받고 나와, 통군(统军) 시운보(是云宝)를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담승지가 감히 깊이 들어와 약탈하는 것은 유획과 정변이 주민 중 명망 있는 자로서 그의 내응이 되기 때문이다. 듣건대 유획이 군사를 이끌고 담승지를 맞이하려 하여 여기서 80리 떨어져 있다. 지금 그들의 허를 찌르면 한 번 싸움으로 깨뜨릴 수 있고, 유획이 깨지면 담승지는 자연히 도망갈 것이다." 이에 병마를 선발하여 시운보에게 주고, 저녁에 성을 나가 새벽에 도착하여 유획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남은 무리를 끝까지 추격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담승지가 이 소식을 듣고 도망쳤다. 정변은 원자공과 인척 관계로 원자공에게 숨었으나, 조세표가 장리(将吏)를 모아 원자공을 면전에서 꾸짖고, 정변을 체포하여 죽였다.
북위 상주자사(相州刺史) 낙안왕(乐安王) 원감(元鉴)이 북도도독(北道都督) 배연(裴衍)과 함께 신도(信都)를 구원하였다. 원감이 북위의 다난(多难)을 기회로 삼아 은밀히 다른 마음을 품고, 업성(邺城)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갈영(葛荣)에게 항복하였다.
기축일(己丑日, 27일), 북위가 대사면(大赦)을 내렸다.
처음에 시어사(侍御史) 요동인(辽东人) 고도목(高道穆)이 명을 받들어 상주(相州)에 사신으로 갔는데, 전임 자사 이세철(李世哲)이 사치하고 방탕하며 법도를 따르지 않자, 고도목이 그를 조사하였다. 이세철의 동생 이신궤(李神轨)가 권력을 잡고 있었고, 고도목의 형 고겸지(高谦之)의 가노(家奴)가 양민(良民)으로 복귀해 줄 것을 상소하자, 이신궤가 고겸지를 체포하여 정위(廷尉)에 가두었다. 사면령이 내려지려 하자, 이신궤가 태후에게 먼저 고겸지를 사사(赐死)하도록 청하였고, 조정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불쌍히 여겼다.
팽군(彭群)과 왕변(王辩)이 낭야(琅邪)를 포위하였는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북위 청주자사(青州刺史) 팽성왕(彭城王) 원소(元劭)가 사마 녹도(鹿悆)를, 남청주자사(南青州刺史) 호평(胡平)이 장사 유인지(刘仁之)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팽군과 왕변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팽군은 전사하였다. 원소는 원협(元勰)의 아들이다.
8월, 북위가 도독 원자옹(源子邕)·이신궤·배연을 보내 업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원자옹이 탕음(汤阴)에 이르렀을 때, 낙안왕 원감이 그의 아우 원빈지(元斌之)를 시켜 밤에 원자옹의 진영을 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원자옹이 승세를 타고 진군하여 업성을 포위하고, 정미일(丁未日, 16일)에 함락시켜 원감을 참수하고, 그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고 성을 탁발씨(拓跋氏)로 고쳤다. 북위는 이어 원자옹과 배연을 보내 갈영을 토벌하게 하였다.
9월, 진주(秦州) 성민(城民) 두찬(杜粲)이 막절념생(莫折念生)의 일가를 몰살하고, 두찬이 스스로 주사(州事)를 대행하였다. 남진주(南秦州) 성민 신침(辛琛)도 스스로 주사를 대행하고, 사자를 소보인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북위는 다시 소보인을 상서령(尚书令)으로 삼고, 그의 원래 작위를 돌려주었다.
초주자사(谯州刺史) 담승지가 광릉(广陵)에서 북위 동예주자사 원경화(元庆和)를 포위하였고, 북위 장군 원현백(元显伯)이 그를 구원하러 왔으며, 사주자사(司州刺史) 하후기(夏侯夔)가 무양(武阳)에서 군사를 이끌고 담승지를 도왔다. 겨울 10월, 하후기가 성 아래에 도착하자, 원경화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하후기가 공로를 담승지에게 양보하자, 담승지가 말하였다: "원경화는 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지 나에게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가면 반드시 그의 뜻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거느린 것은 모집한 오합지졸로 군법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장군은 평소 군율이 엄격하여 반드시 침략과 폭행이 없을 것이니, 항복을 받고 귀순자를 위무하는 데 매우 적합합니다." 하후기가 이에 성에 올라 북위의 깃발을 뽑고 양(梁)나라의 깃발을 세웠다. 원경화가 병사를 정돈하여 성을 나왔고, 관리는 편안히 지내며 남녀 4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신하 사마광(司马光)은 말한다: 담승지는 군자(君子)라 할 만하다! 오랜 공격과 수고를 잊고 공을 새로 온 장수에게 양보하며, 자신의 단점을 알고 남의 장점을 가리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취하지 않아 국가의 큰일을 이루었으니, 충성스럽고 사사로움이 없어 군자라 할 만하다!
원현백이 밤에 도망치자, 여러 군대가 추격하여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자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담승지를 겸 동예주자사로 삼아 광릉을 지키게 하였다. 하후기가 군사를 이끌고 안양(安阳)에 주둔하며, 별장을 보내 초성(楚城)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이로부터 의양북도(义阳北道)는 북위와 단절되었다.
영군(领军) 조중종(曹仲宗)과 동궁직각 진경지(陈庆之)가 북위의 와양(涡阳)을 공격하였고, 황제가 조서를 내려 심양태수(寻阳太守) 위방(韦放)이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게 하였다. 북위 산기상시(散骑常侍) 비목(费穆)이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이르렀는데, 위방의 진영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부하가 200여 명뿐이었다. 위방이 투구를 벗고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앉아 지휘하자, 병사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니, 북위 군대가 물러났다. 위방은 위예(韦睿)의 아들이다.
북위가 다시 장군 원소(元昭) 등을 보내 5만 군사를 이끌고 와양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전군이 타간(驼涧)에 이르러 와양에서 40리 떨어졌다. 진경지가 맞서 싸우려 하자, 위방은 북위의 전봉(前锋)이 반드시 경예(轻锐)일 것이니 공격하지 말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진경지가 말하였다: "북위 군대는 멀리서 와서 피곤하고, 우리와 거리가 멀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집결하지 않았을 때 틈을 타서 그들의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의심이 있다면, 저 진경지가 홀로 나가 공격하겠습니다." 이에 200기(骑)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여 격파하니, 북위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진경지가 이에 돌아와 여러 장수와 함께 진영을 이어 나아가 와양성에 등을 지고 북위 군대와 대치하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수백 번 싸우며 장병들이 지쳤다. 북위인들이 군대 뒤에 진영을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중종 등은 앞뒤로 적을 맞을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돌려 돌아가기를 의논하였다. 진경지가 절월(节钺)을 잡고 군문(军门)에 서서 말하였다: "우리가 함께 이곳에 이르러 일 년을 겪으며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싸울 뜻이 없고 오직 물러나려 하니, 이 어찌 공명을 세우려 함이겠습니까? 이는 무리를 모아 약탈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군대를 사지(死地)에 두어야 비로소 살아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반드시 적이 모두 모인 뒤에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정말로 군사를 돌리려 한다면, 나에게 별도로 밀칙(密敕)이 있으니, 오늘 위반하는 자는 마땅히 칙령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조중종 등이 이에 그쳤다.
북위인들이 13개의 성을 쌓아 양(梁)군을 제어하려 하였다. 진경지가 밤에 함매(衔枚)하여 출격해 그중 4개의 성을 함락시키자, 와양성주 왕위(王纬)가 항복을 청하였다. 위방이 30여 명의 항복자를 뽑아 각각 북위의 여러 진영에 알리게 하고, 진경지가 포로와 참수한 머리를 진열하고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며 뒤따르니, 북위의 아홉 성이 모두 무너졌다. 추격하여 포로와 사살이 거의 전멸하여 시체가 와수(涡水)를 막았고, 항복한 성 안의 남녀 3만여 명을 얻었다.
소보인이 경주(泾州)에서 패배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낙양으로 돌아가 죄를 청하라고 권했고, 또 어떤 사람은 관중(关中)에 남아 공을 세우며 힘을 쓰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행대도령사(行台都令史) 하간인(河间人) 풍경(冯景)이 말하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 죄가 더 큽니다." 소보인이 따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출병한 지 여러 해로 비용이 무수히 들었는데, 한 번 패배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위 조정도 그를 의심하였다.
중위(中尉) 역도원(郦道元)은 평소 엄격하고 위엄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주목(司州牧) 여남왕(汝南王) 원열(元悦)의 총신 구념(丘念)이 권술을 농락하고 방탕하게 굴자, 역도원이 구념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원열이 호태후(胡太后)에게 청하여 태후가 구념을 사면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역도원은 그를 죽이고 이 일로 원열을 탄핵했다.
당시 소보인(萧宝寅)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이미 드러나자, 원열이 이에 역도원을 관서대사(关右大使)로 임명할 것을 주청했다. 소보인이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여겨 매우 두려워했고, 장안의 경박한 젊은이들이 또 그에게 병사를 일으키도록 권했다. 소보인이 이 일로 하동(河东) 사람 유해(柳楷)에게 묻자, 유해가 말했다. “대왕은 제명제(齐明帝)의 아들이십니다. 천하의 마음이 귀의하고 있으니, 지금 일을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인망에 부합합니다. 더구나 민요에 ‘난(鸾)이 열 아들을 낳았는데 아홉 알은 깨지고, 하나의 알만 깨지지 않아 관중(关中)이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어지러움은 곧 다스려짐이니, 대왕이 마땅히 관중을 다스려야 할 터인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역도원이 음반역(阴盘驿)에 도착하자, 소보인은 그의 부장 곽자휴(郭子恢)를 보내 공격하여 죽이고, 시신을 수습하여 묻은 뒤, 표문을 올려 백적(白贼)에게 살해되었다고 보고했다. 또 스스로를 변호하는 표문을 올려 양춘(杨椿) 부자에게 모함당했다고 주장했다.
소보인의 행대낭중(行台郎中) 무공(武功) 사람 소잠(苏湛)이 병으로 집에 누워 있었는데, 소보인이 소잠의 표제(表弟)인 개부속(开府属) 천수(天水) 사람 강검(姜俭)을 시켜 소잠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며 말했다. “원략(元略)이 소연(萧衍)의 뜻을 받들어 나를 제거하려 한다. 역도원이 온 것은 일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반드시 스스로를 위해 도모해야 하며, 더 이상 위(魏)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죽고 사는 것과 영욕을 그대와 함께 나누겠다.” 소잠이 이 말을 듣고 목 놓아 울었다. 강검이 급히 그를 말리며 말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소잠이 말했다. “내 온 집안 백 명이 이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터인데, 어찌 울지 않겠는가!” 수십 번 울고 나서 천천히 강검에게 말했다. “나를 대신하여 제왕(齐王)에게 전해 주시오. 대왕은 본래 곤란한 새가 남에게 의탁한 것과 같았으나, 조정에 의지하여 날개를 얻었고 영광과 총애가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나라에 어려움이 많음을 당하여 충성을 다해 은덕에 보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의 어려움을 틈타 길에서 듣는 무지한 자의 말을 믿고, 지치고 쇠약한 군사로 관중을 지키며 왕위를 엿보려 하오. 지금 위나라의 덕은 비록 쇠미해졌으나 하늘의 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더구나 대왕의 은의가 아직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의 실패만 보일 뿐 성공은 보이지 않소. 나 소잠은 온 집안 백 명 때문에 대왕으로 하여금 멸족당하게 할 수 없소.” 소보인이 또 사람을 시켜 그에게 말했다. “내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니, 미리 그대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대가 내 계획을 망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소잠이 말했다. “무릇 큰일을 도모하려면 마땅히 천하의 기이한 인재를 얻어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장안의 투전꾼들하고만 꾀하고 있으니, 이것이 성공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내 아마 가시덤불이 반드시 재각(斋阁)에 자랄까 두렵소. 원컨대 늙은 뼈 한 조각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오. 아마 병들어 죽어서야 선인(先人)을 뵐 수 있을 것이오.” 소보인이 평소 소잠을 중히 여겼고, 또한 그가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을 알았으므로, 그가 무공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갑인일(甲寅日, 의심됨), 소보인이 스스로 제(齐)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융서(隆绪)로 고치고, 그 관할하는 무리를 사면하며, 백관을 설치했다. 도독장사(都督长史) 모하(毛遐)는 모홍빈(毛鸿宾)의 형으로, 모홍빈과 함께 저인(氐人)과 강인(羌人)을 이끌고 마지책(马祗栅)에서 일어나 소보인을 막았다. 소보인이 대장군 노조천(卢祖迁)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게 했으나, 모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보인이 마침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며 즉위 의례를 거행하다가 끝나기도 전에 패전 소식을 듣고 안색이 변하여, 진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돌아갔다. 강검을 상서좌승(尚书左丞)으로 임명하고 심복으로 삼았다. 문안(文安) 사람 주혜달(周惠达)이 소보인의 사자로서 낙양(洛阳)에 있다가, 관련 관청에서 그를 체포하려 하자 주혜달은 장안(长安)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소보인이 주혜달을 광록훈(光禄勋)으로 임명했다.
단양왕(丹阳王) 소찬(萧赞)이 소보인의 반란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도망쳐 백록산(白鹿山)으로 가다가 하교(河桥)에 이르러 사람에게 붙잡혔다. 북위주(北魏主)는 그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알고 석방하여 위로했다. 행대랑(行台郎) 봉위백(封伟伯) 등이 관중의 호걸들과 함께 일어나 소보인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다.
북위가 상서복야(尚书仆射) 장손치(长孙稚)를 행대(行台)로 삼아 소보인을 토벌하게 했다.
정평(正平) 백성 설봉현(薛凤贤)이 반란을 일으키고, 같은 족속 설수의(薛修义) 또한 하동(河东)에서 무리를 모아 각각 염지(盐池)를 점거하고 포판(蒲坂)을 포위하니, 동서로 서로 연결되어 소보인에게 호응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도독(都督) 종정진손(宗正珍孙)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11월 정묘일(丁卯日, 7일), 호군(护军) 소연조(萧渊藻)를 북토도독(北讨都督)으로 삼고, 와양(涡阳)을 지키게 했다. 무진일(戊辰日, 8일), 와양에 서주(西徐州)를 설치했다.
갈영(葛荣)이 북위의 신도(信都)를 포위하여 봄부터 겨울까지 이르렀다. 기주자사(冀州刺史) 원부(元孚)가 장수와 병사를 격려하며 밤낮으로 막아 싸웠으나, 양식 저장이 이미 다 떨어지고 밖에서는 구원이 없었다. 기축일(己丑日, 29일), 성이 함락되었다. 갈영이 원부를 사로잡고, 백성들을 성 밖으로 몰아내니 얼어 죽은 자가 열에 여섯이나 일곱이었다. 원부의 형 원우(元祐)는 방성도독(防城都督)이었다. 갈영이 장수들을 크게 모아 그들의 생사를 논의했다. 원부 형제가 각자 허물을 돌리며 서로 대신 죽기를 다투었고, 도독 반소(潘绍) 등 수백 명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형을 청하여 사군(使君)을 살려주기를 빌었다. 갈영이 말했다. “이들은 모두 위나라의 충신 의사이다.” 이에 함께 갇혔던 오백 명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북위가 원자옹(源子邕)을 기주자사로 삼고, 군사를 이끌고 갈영을 토벌하게 했다. 배연(裴衍)이 상표(上表)하여 함께 가기를 청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했다. 원자옹이 아뢰었다. “배연이 가면 신은 머물기를 청하고, 신이 가면 배연이 머물기를 청합니다. 만약 억지로 함께 가게 한다면 패배는 아침저녁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무신일(戊申日, 의심됨), 양평(阳平) 북동쪽의 장수곡(漳水曲)에 이르렀을 때, 갈영이 10만 무리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원자옹과 배연이 모두 싸우다 죽었다.
상주(相州)의 관리와 백성들은 기주가 이미 함락되고 원자옹 등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마다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상주자사 항농(恒农) 사람 이신(李神)은 뜻과 기개가 평소와 같았으며,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크고 작은 자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하게 했다. 갈영이 정예 병력을 다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진주(秦州) 백성 낙초(骆超)가 두찬(杜粲)을 죽이고 북위에 투항하기를 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