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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십오

제 15 편

《자치통감》 제199권

【당기십오】 저옹돈탄(著雍涒滩) 4월부터 시작하여 알몽단알(阏蒙单阏) 9월에 끝나니, 모두 7년여이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하지하 정관 22년(무신, 서기 648년)

여름, 4월, 정사일, 우무후장군 양건방이 송외만(松外蠻)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처음에, 힐주도독 유백영이 상주하기를 "송외의 여러 만족 부락들이 잠시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그들을 토벌하여 서이(西洱)와 천축(天竺)으로 통하는 길을 열도록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양건방에게 명하여 파촉(巴蜀) 12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만족의 추장 쌍사(双舍)가 무리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양건방이 그를 격파하고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여러 만족 부락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양건방이 각각 사자를 보내 이해와 손해를 설명하자, 그들이 모두 와서 귀부하였는데, 전후하여 도착한 부락이 70개, 모두 10만 9천 3백 호였다. 양건방이 그 추장 몽화(蒙和) 등을 현령으로 임명하여 각자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니,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사자를 서이하(西洱河)에 보내니, 그곳의 추장 양성(杨盛)이 매우 놀라 배를 준비하여 도망가려 하였다. 사자가 위엄과 신의로 깨우치자 양성이 마침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곳에는 양(杨), 이(李), 조(赵), 동(董) 등 수십 개의 성씨가 있었고, 각기 한 주(州)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큰 주는 6백 호, 작은 주는 2, 3백 호였으며, 큰 추장이 없어 서로 통일되지 않았다. 언어가 비록 조금 달랐지만, 그 생계와 풍속은 대체로 중원과 같았으며, 스스로 본래 중원 사람이라고 일컬었고, 다른 점은 12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기미일, 거란의 욀주곡거(辱纥主曲据)가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귀부하였다. 그가 살던 지역에 현주(玄州)를 설치하고 곡거를 자사로 삼아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갑자일, 오호진장 고신감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고려를 공격하다가, 고려의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교전하여 격파하였다. 그날 밤, 고려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자, 고신감이 복병을 두어 다시 격파하고 돌아왔다. 처음에, 서돌궐 을비돌륙가한(乙毗咄陆可汗)이 아사나하로(阿史那贺鲁)를 섭호(叶护)로 삼아 다라사수(多逻斯水)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서주(西州) 북쪽 1천 5백 리에 있었으며, 처월(处月), 처밀(处密), 시소(始苏), 가라록(歌逻禄), 실필(失毕) 다섯 부락의 무리를 거느렸다. 을비돌륙가한이 토화라(吐火罗)로 도망가자, 을비사수가한(乙毗射匮可汗)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였고, 그의 부락은 흩어졌다. 을해일, 하로가 남은 무리 수천 장(帐)을 이끌고 당나라에 귀부하니, 태종이 조서를 내려 정주(庭州) 막하성(莫贺城)에 안치시키고 하로를 좌효위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하로가 당군이 구자(龟兹)를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으며, 수십 기의 기병을 이끌고 입조하였다. 태종이 그를 곤구도행군총관(昆丘道行军总管)으로 삼고, 성대한 연회와 상을 내린 후 보냈다.

5월, 경자일, 우위솔장사(右卫率长史) 왕현책(王玄策)이 제나부제왕(帝那伏帝王) 아라나순(阿罗那顺)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처음에, 중천축왕 시라일다(尸罗逸多)가 병력이 가장 강하여 사천축(四天竺)이 모두 그에게 신복하였다. 왕현책이 명을 받들어 천축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여러 나라들이 모두 사자를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마침 시라일다가 죽고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해지자, 그의 신하 아라나순이 스스로 왕이 되어 호병(胡兵)을 징발하여 왕현책을 공격하였다. 왕현책이 수종자 30명을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모두 사로잡혔다. 아라나순이 여러 나라의 진공품을 약탈하였다. 왕현책이 몸을 빼내어 밤에 도망쳐 토번(吐蕃) 서쪽 경계에 이르러, 편지를 보내 이웃 나라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토번이 정예병 1천 2백 명을, 니파국(泥婆国)이 7천여 기병을 보내 지원하게 하였다. 왕현책이 그의 부장 장사인(蒋师仁)과 함께 두 나라 군사를 이끌고 중천축의 소재지인 차박화라성(茶馎和罗城)으로 진군하여, 사흘 동안 연속 싸워 크게 격파하고, 참수한 자가 3천여 명,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거의 1만 명에 달하였다. 아라나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쳐 다시 남은 무리를 모아 돌아와 장사인과 싸웠으나, 다시 격파되어 사로잡혔다. 남은 무리가 그의 비(妃)와 왕자를 받들어 간타위강(干陀卫江)에서 저항하였으나, 장사인이 진군하여 공격하자 무리가 무너져 그의 비와 왕자를 사로잡고, 남녀 1만 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천축이 진동하여, 성읍과 촌락이 항복한 곳이 580여 곳에 이르렀다. 왕현책이 아라나순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조정에서 왕현책을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임명하였다.

6월, 을축일, 백별부(白别部)를 설치하여 거연주(居延州)로 삼았다.

계유일, 특진(特进) 송공(宋公) 소우(萧瑀)가 죽었다. 태상(太常)이 그의 시호를 '덕(德)'으로 의논하고, 상서성(尚书省)이 '숙(肃)'으로 의논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시호는 사람이 생전에 행한 것을 기록한 것이니, 실제에 부합해야 한다. 정폐공(贞褊公)으로 시호를 내리는 것이 가하다." 그의 아들 소예(萧锐)가 작위를 계승하고 태종의 딸 양성공주(襄城公主)와 혼인하였다. 태종이 그녀를 위해 저택을 세우려 하자, 공주가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심은 아침저녁으로 곁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다른 저택에 산다면 결함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태종이 이에 명하여 소우의 저택 안에서 영건하게 하였다.

태종이 고려가 곤궁하고 피폐해졌다고 여겨, 이듬해 30만 군사를 징발하여 단번에 섬멸할 것을 의논하였다. 어떤 이는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1년 이상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가축이나 수레로는 운반할 수 없으니, 배를 만들어 수운(水运)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수나라 말년에 오직 검남(剑南)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최근 요동 전역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곳 백성들은 부유하니 그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종이 따랐다. 가을, 7월, 우령좌우부장사(右领左右府长史) 강위(强伟)를 검남도(剑南道)에 보내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배의 길이는 100척, 너비는 그 절반이었다. 또 다른 사자를 수로를 따라 무협(巫峡)에서부터 강(江), 양(扬)을 거쳐 내주(莱州)로 달려가게 하였다.

경인일, 서돌궐 상(相) 굴리철(屈利啜)이 무리를 이끌고 구자(龟兹) 토벌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처음에, 좌무위장군(左武卫将军) 무련현공(武连县公) 무안(武安) 이군선(李君羡)이 현무문(玄武门)에서 숙직하고 있었다. 이때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여러 번 나타나자, 태사(太史)가 점쳐 말하기를 "여주(女主)가 창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간에서는 또 《비기(秘记)》가 유포되어 말하기를 "당나라 3대 이후, 여주 무왕(女主武王)이 천하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이를 싫어하였다. 마침 여러 무신(武臣)들과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 주령(酒令)을 행하며 각자 아명(小名)을 말하게 하였다. 이군선이 자신의 아명이 오낭(五娘)이라고 말하자, 태종이 매우 놀라며 웃으며 말하였다. "무슨 여자이기에 이토록 용맹하고 건장한가!" 또한 이군선의 관직과 봉읍(封邑)에 모두 '무(武)' 자가 있어 매우 꺼렸다. 후에 외직으로 화주자사(华州刺史)가 되었다. 어떤 평민 원도신(员道信)이 스스로 곡식을 끊고 불법(佛法)에 통달했다고 칭하자, 이군선이 그를 깊이 존경하고 신임하여 여러 번 그를 따라가며 사람을 물리치고 이야기하였다. 어사(御史)가 이군선이 요인(妖人)과 사귀며 불궤(不轨)를 도모한다고 아뢰었다. 임진일, 이군선이 이로 인해 사형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태종이 은밀히 태사령(太史令) 이순풍(李淳风)에게 물었다. "《비기》에 말한 바, 정말 존재하는가?" 이순풍이 대답하였다. "신이 천상을 우러러 보고 역수(历数)를 굽어 살피건대, 그 사람이 이미 폐하의 궁중에 있으며, 친척입니다. 지금부터 30년을 넘지 않아 장차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거의 당나라 자손을 다 죽일 것입니다. 이 징조가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의심스러운 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어떠한가?" 이순풍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명한 바를 사람이 어길 수 없습니다. 왕자(王者)는 죽지 않을 것이니, 헛되이 무고한 자를 많이 죽일 뿐입니다. 또 지금부터 30년 후면 그 사람은 이미 늙어, 아마도 조금 인자한 마음이 있어 해가 가벼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비록 찾아내어 죽인다 하더라도, 하늘이 혹 더 건장한 이를 낳아 그 원한과 독을 발산하게 할 것이니, 아마 폐하의 자손 중에는 남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이에 그만두었다.

사공 양문소공 방현령이 서울에 머물며 지키고 있었는데, 병세가 위중해지자 태종이 그를 옥화궁으로 불러들여 가마로 대궐 안에 들여오게 하고, 어좌 곁에 이르러서야 내리게 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그를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태종은 그가 조금 나아지면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고, 병세가 더해지면 근심하고 수척해졌다. 방현령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황상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천하에 조용한 일이 없고 오직 동쪽 정벌만 그치지 않으니, 여러 신하 중에 감히 간하는 이가 없다. 내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죽어도 허물을 면치 못하리라.” 이에 상소를 올려 간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자’에 이르기를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의 공명과 위덕도 이미 만족하실 만하며, 강토를 넓히는 일도 그만두어도 됩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매번 무거운 죄인 하나를 판결하실 적에 반드시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상주하게 하시며, 소식을 드시고 음악을 멈추시니, 생명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 없는 군사들을 몰아서 칼날 아래에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시니,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만약 고려가 신하의 예절을 어겼다면 토벌하는 것이 가하고, 백성을 침략하였다면 소멸하는 것이 가하며, 장래에 중원의 근심이 될 수 있다면 제거하는 것이 가합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조항이 없는데도 쓸데없이 중원을 번거롭게 하시어, 안으로는 전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시니,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크지 않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 고려가 스스로 잘못을 고치도록 허락하시고, 바다를 건너는 배를 불사르시며, 모집한 무리를 중지시키소서. 그러면 자연히 중원과 이적이 경사롭게 의지하고, 먼 곳은 조용해지고 가까운 곳은 편안해질 것입니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땅에 묻힐 날이 가까웠사오나, 만일 이 비통한 목소리를 채택해 주신다면 죽어도 마치 살아 있는 듯하겠나이다.” 방현령의 아들 방유애는 태종의 딸 고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태종이 공주에게 말하였다. “그가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서도 오히려 나의 국가를 근심하는구나.” 태종이 친히 가서 병문안하고 손을 잡고 작별하며 슬퍼하여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계묘일에 방현령이 세상을 떠났다.

유방이 말하였다. “방현령은 태종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32년 동안이었는데, 천하에서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행적을 찾을 수 없으니 덕행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태종이 난을 평정할 때 방현령과 두여회는 공로를 말하지 않았고, 왕규와 위징은 간쟁을 잘하였으나 방현령과 두여회는 그들의 현명함을 사양하였으며, 이적과 이정은 병법을 잘하였으나 방현령과 두여회는 그들의 도리를 행하였고, 다스림이 태평에 이르러서는 선정을 군주에게 돌렸다. 당나라의 종묘에 배향된 신하가 됨이 마땅하도다!”

8월, 기유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정축일에 월주도독부와 무주, 홍주 등에 큰 배와 쌍방(雙舫) 합쳐 1천1백 척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신미일에 좌령군대장군 집실사력을 보내 금산도에서 설연타의 남은 도적을 치게 하였다.

9월, 경진일에 곤구도행군대총관 아사나사이가 처월과 처밀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그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다.

계미일에 설만철 등이 고려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설만철은 군중에서 의기로 남을 업신여기고 능멸하였는데, 배행방이 그가 원망을 품고 있다고 상주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직위가 박탈되고 상주로 유배되었다.

기축일에 신라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13개 성이 함락되었다고 상주하였다.

기해일에 황문시랑 저수량을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강위 등이 백성을 징발하여 배를 만들었는데, 그 노역이 산간 지방의 요인(獠人)에게까지 미쳐, 아주, 공주, 미주 세 주의 요인이 이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임인일에 조정에서 무주도독 장사귀와 우위장군 양건방을 보내 농서와 협중의 병력 2만여 명을 징발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촉 땅의 백성들이 배 만드는 노역에 시달려, 돈을 내어 담주 사람을 고용하여 배를 만들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자가 있었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주와 현의 관리들은 독촉이 엄중하고 급박하여, 백성들이 밭과 집을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곡식 값은 치솟고 검문관 밖은 혼란에 빠졌다.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사농소경 손지인을 역마를 타고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손지인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촉 땅의 백성들은 몸이 약하여 노역을 견디지 못합니다. 큰 배 한 척에 고용 비용이 비단 2천2백36필에 해당합니다. 산골짜기에서 이미 베어 낸 나무는 아직 끌어내지 못했는데, 또 배 만드는 고용 값을 거두고 있사오니,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어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사오니, 마땅히 위무하고 구휼하셔야 합니다.” 태종이 이에 담주에서 배를 만드는 고용 비용은 모두 관청에서 공급하도록 명령하였다.

겨울, 10월, 계축일에 황제의 거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회흘의 추장 토미도의 형의 아들 오흘(烏紇)이 그의 숙모와 간통하였다. 오흘과 구륙막하달관 구라발(俱羅勃)은 모두 돌궐 차비가한의 사위였는데, 두 사람이 함께 토미도를 죽이고 차비에게 귀부할 것을 모의하였다. 오흘이 밤에 기병 10여 명을 거느리고 토미도를 습격하여 죽였다. 연연부도호 원례신이 사람을 보내 오흘을 유인하여, 조정에 그를 한해도독으로 임명해 줄 것을 약속하니, 오흘이 가벼운 차림으로 말을 타고 원례신에게 가서 사례하였고, 원례신이 그를 체포한 뒤 목을 베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태종은 회흘 부락이 이산하고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병부상서 최돈례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구라발이 조정에 입조하자, 태종이 그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아사나사이가 처월과 처밀을 격파한 뒤, 군대를 이끌고 언기 서쪽에서 곧바로 구자의 북쪽 국경으로 향하여, 군대를 다섯 길로 나누어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언기왕 설파아나지는 성을 버리고 구자로 도망쳐 구자의 동쪽 국경을 지켰다. 사이가 군대를 보내 추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사촌동생 선나준을 언기왕으로 세워 제때에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구자는 크게 놀라서 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사이가 진군하여 적구(碛口)에 주둔하였는데, 구자 도성에서 3백 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주자사 한위에게 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선봉이 되게 하고, 효위장군 조계숙이 군대를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다갈성(多褐城)에 이르자, 구자왕 하리포실실(訶利布失畢)과 그의 국상 나리(那利), 갈렵전(羯獵顛)이 5만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다. 양쪽이 막 접전을 벌이자, 한위가 군대를 이끌고 거짓 후퇴하였고, 구자군이 모두 추격하여 30리를 쫓아가다가 조계숙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구자군이 두려워하여 물러나려 하자, 조계숙이 틈을 타 공격하여 구자군을 크게 격파하고, 당군은 80리를 추격하였다.

갑술일에 회흘 토미도의 아들 익좌랑장 파윤(婆閏)을 좌효위대장군 대후리발(大俟利發) 한해도독으로 임명하였다.

11월, 경자일에 거란 추장 굴가(窟哥)와 해(奚)족 추장 가도자(可度者)가 모두 거느린 부락을 이끌고 조정에 귀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 부락을 송막부(松漠府)로 설치하고 굴가를 도독으로 삼았다. 또 그들 중 다른 추장인 달계(達稽) 등의 부락을 췌락(峭落) 등 9개 주로 나누어 각각 그들의 욕홀주(辱紇主)를 자사로 삼았다. 해족 부락을 요악부(饒樂府)로 설치하고 가도자를 도독으로 삼았다. 또 그들 중 다른 추장인 아회(阿會) 등의 부락을 약수(弱水) 등 5개 주로 나누어 각각 그들의 욕홀주를 자사로 삼았다. 신축일에 영주에 동이교위(東夷校尉) 관직을 설치하였다.

12월, 경오일에 태자가 문덕황후를 위해 지은 대자은사(大慈恩寺)가 완공되었다.

구자왕 포실필은 전투에서 패한 후, 수도로 도주하여 굳게 지켰다. 아사나사이는 군대를 이끌고 가까이 진격하자, 포실필은 경기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사이가 구자 수도를 함락시키고, 안서도호 곽효각을 주둔시키도록 파견했다. 사주자사 소해정과 상련봉어 설만비는 정예 기병을 이끌고 포실필을 추격하여 6백 리를 쫓았다. 포실필은 궁지에 몰려 발환성을 의지하여 지켰다. 사이가 진군하여 40일 동안 공격했다. 윤12월 정축일에 발환성을 함락시키고 포실필과 갈렵전을 사로잡았다. 나리는 몸을 빼내 도망쳐, 은밀히 서돌궐 군대와 본국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곽효각을 기습했다. 곽효각은 성 밖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구자인들이 습격할 것이라고 알렸으나, 곽효각은 개의치 않았다. 나리가 갑자기 도착하자, 곽효각은 휘하 1천여 명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나리의 부하들은 이미 성 위에 올라와 있었다. 성 안에서 항복한 호인들이 그들과 내응하여 함께 곽효각을 공격했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곽효각은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성 밖으로 나가려다 서문에서 전사했다. 성 안은 크게 혼란해졌고, 창부랑중 최의초는 2백 명을 모집하여 군수 물자를 보호하며, 구자인들과 성 안에서 싸웠다. 조계숙과 한위도 성 밖에 진을 치고 성의 서북쪽 모퉁이에서 공격했다. 나리는 밤이 되어서야 물러났고, 당군은 3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성 안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후 10여 일이 지나, 나리는 다시 산북 구자인 1만여 명을 이끌고 수도로 향했다. 조계숙이 맞서 싸워 구자군을 크게 무찌르고 8천 명의 목을 베었다. 나리는 단기로 도망쳤으나, 구자인들이 그를 붙잡아 당군 영문으로 보냈다.

아사나사이는 잇달아 구자의 다섯 큰 성을 함락시키고, 좌위랑장 권지보를 각 성에 보내 화복과 이익을 설명하니, 각 성은 잇달아 항복을 청원하여 총 7백여 성을 얻고,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사이는 이에 지역 원로들을 소집하여 조정의 위엄과 은덕을 선양하고, 죄인을 토벌하는 뜻을 알린 후, 구자왕의 동생 섭호를 왕으로 세우니 구자인들이 매우 기뻐했다. 서역 여러 나라가 놀라서, 서돌궐, 우전, 안국이 다투어 낙타, 말, 군량을 선물했다. 사이는 비석에 공적을 새기고 군대를 이끌고 귀환했다.

무인일, 곤구도행군총관·좌효위장군 아사나하로를 니복사발라섭호로 임명하고, 북과 깃발을 하사하여 아직 귀순하지 않은 서돌궐 부족을 초무하고 토벌하도록 했다.

계미일, 신라 국상 김춘추와 그의 아들 김문왕이 입조하여 알현했다. 김춘추는 진덕의 동생이다. 태종이 김춘추를 특진으로, 김문왕을 좌무위장군으로 임명했다. 김춘추가 복장과 예의를 중원 제도를 따르도록 청원하자, 궁정 내고에서 겨울 옷을 꺼내 그들에게 하사했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하지하 정관 23년(기유년, 서기 649년)

봄, 정월 신해일, 구자왕 포실필과 그의 국상 나리 등이 압송되어 수도에 도착하자, 태종이 그들을 꾸짖은 후 석방하고, 포실필을 좌무위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서남의 도막기 등 만족이 귀부하여, 조정은 그 지역에 방, 망, 남, 구 4주를 설치하고, 낭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태종은 돌궐 거비가한이 입조하여 알현하지 않자, 우효위랑장 고간을 보내 회흘, 복골 등 부족의 군대를 징발하여 그를 기습하게 했다. 군대가 거비 영내에 들어가자, 각 부족이 잇달아 와서 항복했다. 발실밀 토둔 비라사가 항복하자, 조정은 그의 땅에 신려주를 설치했다.

2월 병술일, 요지도독부를 설치하고 안서도호부에 예속시켰다. 무자일, 좌위장군 아사나하로를 요지도독으로 임명했다.

3월 병진일, 풍주도독부를 설치하고, 연연도호 이소립이 도독을 겸임하게 했다.

지난 겨울에 가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신유일, 태종은 병든 몸을 이끌고 현도문 밖에 나와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했다. 정묘일, 칙령으로 태자가 금액문에서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

여름, 4월 을해일, 태종이 취미궁으로 갔다.

태종이 태자에게 말했다. "이적은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지만, 너는 그에게 은혜가 없어, 아마 그가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두렵다. 내가 지금 그를 좌천시키니, 만약 그가 즉시 임지로 떠나면, 내가 죽은 후에 너는 그를 복야로 임명하고 가까이하며 신임하라. 만약 그가 망설이고 주저하면, 그를 죽여야 한다." 5월 무오일, 동중서문하삼품 이적을 첩주도독으로 임명했다. 이적은 조서를 받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신유일, 개부의동삼사·위경무공 이정이 사망했다.

태종의 설사병이 더욱 심해져, 태자는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때로는 여러 날 동안 밥을 먹지 않아 머리카락이 희어지기도 했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효성스럽고 인애하니, 내가 죽어 무슨 한이 있겠는가!" 정묘일, 병세가 위급해져 태종이 장손무기를 불러 함풍전으로 들어오게 했다. 태종이 누워서 손을 뻗어 무기의 뺨을 어루만지자, 무기는 울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태종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무기를 나가게 했다. 기사일, 다시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침전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후사를 모두 너희에게 맡긴다. 태자는 인애하고 효성스러우니, 너희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잘 보좌하고 가르쳐라!" 또 태자에게 말했다. "무기와 수량이 있으니,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마라!" 또 저수량에게 말했다. "무기는 나에게 지극한 충성을 다했고, 내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그의 힘 덕분이 크다. 내가 죽은 후에 참언으로 너희를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라." 이에 저수량에게 유조를 초안하게 했다. 잠시 후, 태종이 승하했다.

태자는 장손무기의 목을 껴안고 통곡하며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무기는 눈물을 닦으며 태자에게 여러 사무를 처리하여 조정 안팎을 안정시키도록 청했다. 태자는 계속 울기만 할 뿐이었다. 무기가 말했다. "폐하께서 종묘사직을 전하께 맡기셨으니, 어찌 평민처럼 울기만 하시렵니까!" 이에 발상을 비밀로 했다. 경오일, 무기 등이 태자에게 먼저 수도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비기, 정병 및 옛 장수들이 모두 따랐다. 신미일, 태자가 경성에 들어갔다. 선제의 영구는 시종들이 평소와 같이 호위하며 태자 뒤를 따라 도착하여 양의전에 안치되었다. 태자좌서자 우지녕을 시중으로, 소첨사 장행성을 겸 시중으로, 검교형부상서·우서자·겸 이부시랑 고계보를 겸 중서령으로 임명했다. 임신일, 태극전에서 발상하고 유조를 낭독했으며, 태자가 즉위했다. 군국 대사는 중단할 수 없었고, 평소의 사소한 일은 유관 부서에 위임했다. 도독과 자사인 여러 왕들은 모두 달려와 곡하게 했으나, 복왕 이태는 곡하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요동의 전쟁 및 각종 토목 공사를 중단했다. 조정에 벼슬하거나 조공하러 온 사방의 이민족 수백 명이 부고를 듣고 모두 통곡하며, 머리를 깎고, 얼굴을 긋고, 귀를 자르며, 피가 땅에 흩뿌려졌다.

6월 갑술삭일, 고종이 즉위하고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했다.

정축일, 첩주도독 이적을 특진·검교낙주자사·낙양궁유수로 임명했다.

이보다 앞서, 태종의 이름(세민)은, 명하여 천하 사람들이 연이어 쓰지 않으면 피휘하지 않아도 되게 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관명 중 선제의 휘를 범하는 것을 고치기 시작했다.

계미일, 장손무기를 태위로 임명하고, 검교중서령을 겸하며 상서와 문하 양성을 관장하게 했다. 무기가 상서성 관장을 굳이 사양하자, 고종이 허락하고, 여전히 태위 신분으로 동중서문하삼품을 하게 했다.

계사일, 이적을 개부의동삼사·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했다.

아사나사이가 구자를 격파했을 때, 행군장사 설만비가 군사 위세를 이용하여 우전왕 복사신을 권유해 입조하게 하자고 청했고, 사이가 따랐다. 가을, 7월 기유일, 복사신이 설만비를 따라 입조했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가 선제의 영구를 뵙도록 했다.

8월 계유일, 밤에 지진이 발생하여 진주 지역이 특히 심해, 5천여 명이 압사했다.

경인일, 문황제를 소릉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아사나사이와 첩필하력이 몸을 바쳐 순장하기를 청했으나, 황제가 사람을 보내 선제의 유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태종에게 사로잡혀 귀순한 이민족 군장들인 힐리 등 14인은 모두 돌을 깎아 형상을 만들고 이름을 새겨 북사마문 안에 세웠다.

정유일, 예부상서 허경종이 상주하여 홍농부군의 사당은 철거해야 하며, 신주를 서협실에 보관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9월 을묘일, 이적을 좌복야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돌궐 여러 부를 나누어 사리(舍利) 등 다섯 주(州)를 설치하여 운중도독부(雲中都督府)에 예속시키고, 소농(蘇農) 등 여섯 주를 정양도독부(定襄都督府)에 예속시켰다.

을해일, 황제가 대리경(大理卿) 당림(唐臨)에게 갇힌 죄수 수를 묻자, 당림이 대답했다: "현재 갇힌 죄수는 50여 명이며, 그중 오직 두 명만이 사형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기뻐했다. 황제가 일찍이 갇힌 죄수를 직접 심문했는데, 전임 대리경이 판결한 죄수들은 대부분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유독 당림이 판결한 죄수들은 소리가 없었다. 황제가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죄수들이 말했다: "당 대인(唐大人)이 판결한 것은 본래 억울함이 없습니다." 황제가 한참 탄식하며 말했다: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이와 같지 않아야 하겠는가!"

황제가 토번(吐蕃) 찬보(贊普) 농찬(弄贊)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고 서해군왕(西海郡王)으로 봉했다. 찬보가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천자가 막 즉위했으니, 신하 중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여 없애야 합니다."

12월,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잠왕(濮王) 이태(李泰)에게 부서를 열고 속관을 두게 하며, 수레와 의복, 진귀한 음식을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도록 했다.

고종천황대성대홍효황제(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상지상(上之上)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大廣孝皇帝) 하지하(下之下) 영휘(永徽) 원년(경술, 서기 650년)

봄 정월, 신축 삭일, 연호를 바꾸었다.

병오일, 비 왕씨(王氏)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왕사정(王思政)의 손녀이다. 황후의 아버지 왕인우(王仁祐)를 특진(特進) 위국공(魏國公)으로 삼았다.

기미일, 장항성(張行成)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신유일, 황제가 조집사(朝集使)를 불러 말했다: "짐이 막 즉위했으니, 정사 중에 백성에게 불편한 것은 모두 진술해야 하며, 다 말하지 못한 것은 다시 봉하여 상주하라." 이로부터 매일 열 명의 자사(刺史)를 불러 내각(內閣)에 들게 하여, 백성의 질고와 그들의 정치 상황을 물었다.

낙양 사람 이홍태(李弘泰)가 장손무기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자, 황제가 즉시 그를 목 베라고 명령했다. 무기와 저수량(褚遂良)이 마음을 합쳐 조정을 보좌했고, 황제도 그 두 사람을 존경하고 예우하며 공손히 그들의 의견을 따랐으므로, 영휘 연간의 정사는 백성이 풍족하고 편안하여 정관(貞觀) 연간의 유풍이 있었다.

태종의 딸 형산공주(衡山公主)는 마땅히 장손씨(長孫氏)에게 시집가야 했는데, 해당 관원이 복상 기간이 공무로 인해 제외되었다고 여겨 올 가을에 혼례를 올리려 했다. 우지녕(于志寧)이 상소하여 말했다: "한문제(漢文帝)가 제정한 제도는 본래 천하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주가 입은 상복은 본래 참최(斬衰)인데, 비록 복상 기간이 관례대로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감정도 관례대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삼년상을 마친 뒤에 혼례를 올리소서." 황제가 따랐다.

2월 신묘일, 황자 이효(李孝)를 허왕(許王), 이상금(李上金)을 기왕(杞王), 이소절(李素節)을 옹왕(雍王)으로 세웠다.

여름 5월 임술일, 토번 찬보 농찬이 죽었다. 그의 적자는 일찍 죽었으므로, 그의 손자를 찬보로 세웠다. 찬보가 어리고 약하여 정사는 모두 국상(國相) 록동찬(祿東贊)이 결단했다. 록동찬은 성품이 명철하고 엄숙하며 중후했고, 용병에 법도가 있었으며, 토번이 강성해져 위세로 저(氐)와 강(羌)을 복종시킨 것은 모두 그의 모략이었다.

6월, 고간(高侃)이 돌궐을 공격하여 아흘산(阿息山)에 이르렀다. 거비가한(車鼻可汗)이 여러 부의 군대를 소집했으나 오지 않자, 수백 기병을 이끌고 도망쳤다. 고간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금산(金山)까지 추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돌아오니, 그의 부중은 모두 항복했다.

당초,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가 구자왕(龜茲王) 포실비(布失畢)를 사로잡고 그의 동생을 왕으로 세웠다. 당군이 돌아간 뒤, 구자의 추장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다투며 서로 공격했다. 가을 8월 임오일, 조서를 내려 다시 포실비를 구자왕으로 삼고 그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그 부중을 위무하게 했다.

9월 경자일, 고간이 거비가한을 경사(京師)로 압송하자, 석방하여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고, 나머지 부중을 울독군산(郁督軍山)에 안치하고, 낭산도독부(狼山都督府)를 설치하여 통솔하게 했다. 고간을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돌궐이 모두 경내의 신하가 되어, 각각 선우(單于)와 한해(瀚海) 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다. 선우도호부는 낭산, 운중, 상간(桑干) 세 도독부와 소농 등 14주를 관할하고, 한해도호부는 한해, 금휘(金徽), 신려(新黎) 등 일곱 도독부와 선악(仙萼) 등 여덟 주를 관할하며, 각각 그 추장을 도독과 자사로 임명했다.

계해일, 황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비를 만나, 간의대부(諫議大夫) 창락인(昌樂人) 곡나율(谷那律)에게 물었다: "기름옷은 어떻게 해야 새지 않겠는가?" 곡나율이 대답했다: "기와로 만든다면 반드시 새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기뻐하여, 이 때문에 사냥을 중단했다.

이적(李勣)이 굳이 직책을 해임해 줄 것을 청원했다. 겨울 10월 무진일, 이적의 좌복야(左僕射) 직책을 해임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삼았다.

기미일, 감찰어사(監察御史) 양무인(陽武人) 위사겸(韋思謙)이 탄핵하여 상주하기를, 중서령(中書令) 저수량이 중서성(中書省) 번역관의 토지를 헐값으로 샀다고 했다. 대리소경(大理少卿) 장예책(張睿冊)이 평가액에 따르면 죄가 없다고 여겼다. 위사겸이 상주하여 말했다: "평가의 설치는 국가의 필요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며, 신하 간의 거래에 어찌 평가액으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장예책이 법문을 가지고 놀며 아랫사람에 영합하여 임금을 속였으니, 죄는 마땅히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날, 저수량을 동주자사(同州刺史)로 강등시키고, 장예책을 순주자사(循州刺史)로 강등시켰다. 위사겸의 이름은 인약(仁約)이며 자(字)로 행세했다.

12월 경오일, 자주도독(梓州都督) 사만세(謝萬歲)와 검주도독(兗州都督) 사법흥(謝法興)이 검주도독(黔州都督) 이맹상(李孟嘗)과 함께 염주(琰州)에서 반란한 요인(獠人)을 토벌했다. 사만세와 사법흥이 요인의 소굴에 들어가 회유하고 위로하다가 요인에게 살해당했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하지하 영휘 2년(신해, 서기 651년)

봄 정월 을사일, 황문시랑(黃門侍郎) 우문절(宇文節)과 중서시랑(中書侍郎) 유석(柳奭)을 모두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았다. 유석은 유형(柳亨) 형의 아들이며, 왕황후의 외삼촌이다.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요지도독(瑤池都督)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흩어진 부중을 모아 장막이 점차 늘어났다. 태종의 죽음을 듣고 서주(西州)와 정주(庭州)를 습격하여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정주자사(庭州刺史) 낙홍의(駱弘義)가 그 음모를 알고 표문을 올려 일을 알렸다. 황제가 통사사인(通事舍人) 교보명(橋寶明)을 급히 보내 위무하게 했다. 교보명이 하로를 설득하여, 그의 큰아들 질운(咥運)을 입조시켜 시위(侍衛)로 삼게 하고, 질운을 우효위중랑장(右驍衛中郎將)에 임명했다가 얼마 후 다시 돌려보냈다. 질운이 이에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부중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가게 하여, 을비섭읍가한(乙毘射匱可汗)을 격파하고 그 부중을 병합했다. 쌍하(雙河)와 천천(千泉)에 아장(牙帳)을 세우고 스스로 사발라가한(沙鉢羅可汗)이라 칭하니, 돌륙오촬(咄陸五啜)과 노실필오후근(努失畢五俟斤)이 모두 그에게 귀부했고, 정병 수십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을비돌륙가한(乙毘咄陸可汗)과 병력을 합쳐, 처월(處月), 처밀(處密) 및 서역 여러 나라가 대부분 그에게 의탁했다. 질운을 막하돕엽호(莫賀咄葉護)로 삼았다.

언기왕(焉耆王) 파가리(婆伽利)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표문을 올려 옛 왕 돌기지(突騎支)를 다시 세워 줄 것을 청원했다. 여름 4월, 조서를 내려 돌기지를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가봉하고 그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금주자사(金州刺史)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하여, 거상(居喪) 기간 중에도 사냥하고 노는 것이 절도가 없었고, 여러 번 밤에 성문을 열어 백성을 소란하게 했으며, 때로는 탄환을 쏘아 사람을 맞히기도 하고, 사람을 눈 속에 묻어 웃음을 삼기도 했다. 황제가 편지를 내려 엄중히 꾸짖으며 말했다: "즐거움을 찾는 방법도 또한 여러 길이 있을 터인데, 진영공(晉靈公)이라는 음란한 군주를 어찌 본받을 가치가 있겠는가! 짐이 왕은 지극한 친척이므로 왕에게 법을 적용할 수 없어, 지금 왕에게 상고(上考)를 평정하여 왕으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기게 한다."

이원영과 장왕(蔣王) 이운(李惲) 모두 재물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황제가 일찍이 여러 왕에게 각각 비단 500단(段)을 하사했는데, 오직 이 두 왕에게만 주지 않고 칙령을 내려 말했다: "등숙(滕叔)과 장형(蔣兄)은 스스로 경영하고 계책을 세울 수 있으니, 재물을 하사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삼베 두 수레를 주어 돈꿰미로 쓰게 하라." 두 왕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가을 7월, 서돌궐 사발라가한이 정주를 침범하여 금령성(金嶺城)과 포류현(蒲類縣)을 함락시키고 수천 명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조서를 내려 좌무후대장군(左武候大將軍) 양건방(梁建方)과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걸필하력(契苾何力)을 궁월도행군총관(弓月道行軍總管)으로,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고덕일(高德逸)과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설고오인(薛孤吳仁)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 진(秦), 성(成), 기(岐), 옹(雍) 네 주의 부병(府兵) 3만 명과 회흘(回紇) 5만 기병을 징발하여 그를 토벌하게 했다.

계사일, 조서를 내려 여러 예관(禮官)과 학사(學士)로 하여금 명당(明堂)의 제도를 의논하게 하고, 고조(高祖)를 오제(五帝)에 배향(配享)하고, 태종을 오인제(五人帝)에 배향하게 했다.

8월 기사일, 우지녕을 좌복야, 장항성을 우복야, 고계보(高季輔)를 시중으로 삼았다. 우지녕과 장항성은 여전히 동중서문하삼품을 겸하게 했다.

己묘년에 낭주(郎州) 백수만(白水蛮)이 반란을 일으켜 마주(麻州)를 침범하자, 좌령군장군(左领军将军) 조효조(赵孝祖) 등을 보내 군대를 발동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9월 계사일에 옥화궁(玉华宫)을 폐지하고 불사(佛寺)로 삼았다. 무술일에 구성궁(九成宫)을 만년궁(万年宫)으로 고쳐 명명하였다.

경술일에 좌무후인가(左武候引驾) 노문조(卢文操)가 담을 넘어 좌장고(左藏库)의 재물을 훔쳤다. 황제는 인가(引驾)의 직책이 규찰과 탄핵에 있는데, 자신이 도둑이 되었다 하여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간의대부(谏议大夫) 소균(萧钧)이 간하여 말하기를, “노문조의 상황이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사오나 법에 따르면 사형에 처할 죄는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노문조의 사형을 면제해 주고, 돌아보며 시신(侍臣)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간의대부이다!”라고 하였다. 윤달에 장손무기(长孙无忌) 등이 그들이 산정(删定)한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올리니, 갑술일에 조서를 내려 전국에 반포하였다.

황제가 재상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각처 관청에서 일을 처리함에 여전히 서로 정을 보아 대부분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장손무기가 대답하기를, “이것을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나 사사로운 정을 두어 법을 굽히는 것은 실로 감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조금 인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폐하께서도 면하지 못하실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무기는 황제의 외숙으로서 조정을 보좌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것은 황제가 칭찬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겨울 11월 신유일에 황제가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계유일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 경관(京官)과 외주(外州)에서 응올(鹰隼)과 견마(犬马)를 진상하는 자는 죄를 다스리라.”라고 하였다.

무인일에 특랑강(特浪羌) 추장 동실봉구(董悉奉求)와 벽혜강(辟惠羌) 추장 복첨막(卜簷莫)이 각자 자기 부락 1만여 호를 거느리고 무주(茂州)에 와서 귀부하였다.

두주(窦州)와 의주(义州)의 만족(蛮族) 추장 이보성(李宝诚)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계주도독(桂州都督) 유백영(刘伯英)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낭주도총관(郎州道总管) 조효조가 백수만을 토벌하니, 만족 추장 독마포(秃磨蒲)와 검미우(俭弥于)가 부중을 거느리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저항하였으나, 조효조가 그들을 모두 쳐 죽였다. 마침 큰 눈이 내려 만인들이 굶주리고 추워 거의 다 죽었다. 조효조가 상주하기를, “정관(贞观) 연간에 곤주(昆州) 오만(乌蛮)을 정벌할 때 비로소 청령(青蛉)과 농동(弄栋)을 개척하여 주현(州县)을 설치하였습니다. 농동 서쪽에 소발롱(小勃弄)과 대발롱(大勃弄) 두 개의 천(川)이 있어, 자주 농동을 선동하고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그 발롱 이서는 황과(黄瓜), 섭유(叶榆), 서이하(西洱河)와 연결되어 인구가 많고 부유하며, 촉천(蜀川)보다도 많습니다. 큰 추장은 없고 원한을 맺기를 좋아합니다. 지금 백수만을 격파한 군사의 위세를 이용하여 형세를 따라 사방을 정벌하고,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12월 임자일에 처월부(处月部)의 주야고주(朱邪孤注)가 초위사(招慰使) 단도혜(单道惠)를 죽이고 돌궐(突厥) 하로(贺鲁)와 서로 결탁하였다.

이 해에 백제(百济)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자, 황제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신라(新罗)와 고려(高丽)와 서로 공격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군대를 발동시켜 너희를 정벌하리라.”라고 하였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圣大广孝皇帝) 하지하(下之下) 영휘(永徽) 3년(임자년, 서기 652년)

봄 정월 기미 초하루에 토곡혼(吐谷浑), 신라, 고려, 백제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계해일에 양건방(梁建方), 설필하력(契苾何力) 등이 뢰산(牢山)에서 처월부의 주야고주를 크게 격파하였다. 고주가 밤을 틈타 도망치자, 양건방이 부총관(副总管) 고덕일(高德逸)을 보내 경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5백여 리를 행군한 끝에 고주를 생포하고 9천 명의 목을 베었다. 군대가 돌아온 후, 어사(御史)가 양건방이 군사력이 충분히 추토할 만함에도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고 탄핵하였고, 고덕일이 명령을 받들어 말을 구매하면서 스스로 좋은 말을 골랐다고 하였다. 황제는 양건방 등에게 공로가 있다 하여 추궁하지 않았다. 대리경(大理卿) 이도유(李道裕)가 상주하기를, “고덕일이 취한 말의 근육과 뼈, 힘이 보통과 다르니, 청컨대 궁중의 마구간에 들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시신에게 말하기를, “이도유는 법관인데, 말을 진상하는 것은 그의 본분이 아니다. 이는 내 마음을 헤아려 망령되게 추측한 것이다. 어찌 내가 하는 일이 신하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반성하고 있으므로 다시 이도유를 폄출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기사일에 동주자사(同州刺史) 저수량(褚遂良)을 이부상서(吏部尚书), 동중서문하삼품(同中书门下三品)으로 임명하였다.

병자일에 태묘(太庙)에 제사 지내는 예를 행하였고, 정해일에 신농(先农)에게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직접 적전(籍田)을 갈았다.

2월 갑인일에 황제가 안복문(安福门) 누각에 올라 백희(百戏)를 구경하였다. 을묘일에 황제가 시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누각에 오른 것은 백성들의 풍속이 사치한가 검소한가를 살펴보려 한 것이지, 음악을 즐기려 한 것이 아니다. 내가 듣건대 호인(胡人)들이 격구(击鞠) 놀이를 잘한다고 하여 일찍이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어제 막 누각에 올랐더니, 한 무리의 호인들이 격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것을 특히 좋아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제왕의 하는 바를 어찌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그 공을 불살라 버렸으니, 호인들이 헤아리고 추측하는 마음을 끊고자 함이요, 또한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함이다.”라고 하였다.

3월 신사일에 우문절(宇文节)을 시중(侍中)으로, 유시(柳奭)를 중서령(中书令)으로 임명하고, 병부시랑(兵部侍郎) 삼원인(三原人) 한원(韩瑗)을 권황문시랑(权黄门侍郎),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조효조가 서남만(西南蛮)을 크게 격파하여 소발롱 추장 몰성(殁盛)을 참수하고, 대발롱 추장 양승전(杨承颠)을 생포하였다. 나머지 만족 무리들은 모두 험한 곳에 모여 지키는데, 큰 무리는 수만 명, 작은 무리는 수천 명이었으나, 조효조가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키니, 서남만이 이에 평정되었다.

갑오일에 예주자사(澧州刺史) 팽사왕(彭思王) 이원칙(李元则)이 세상을 떠났다.

6월 무신일에 병부상서(兵部尚书) 최돈례(崔敦礼) 등을 보내 병주(并州)와 분주(汾州)의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무주(茂州)로 가게 하였다. 설연타(薛延陀)의 남은 무리들을 황하를 건너게 하여 기련주(祁连州)를 설치하여 그들을 안치하였다.

가을 7월 정사일에 진왕(陈王) 이충(李忠)을 황태자로 세우고, 대사면을 행하였다. 왕황후(王皇后)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유시가 황후를 위해 계책을 세워, 이충의 어머니 유씨(刘氏)가 미천하게 태어났음을 이유로 황후에게 이충을 태자로 세우기를 권하며,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하기를 바랐다. 밖으로는 장손무기 등에게 암시하여 그들이 황제에게 청하게 하였다. 황제가 따랐다. 을축일에 우지녕(于志宁)을 겸임 태자소사(太子少师)로, 장행성(张行成)을 겸임 소부(少傅)로, 고계보(高季辅)를 겸임 소보(少保)로 삼았다.

정축일에 황제가 호부상서(户部尚书) 고이행(高履行)에게 묻기를, “지난해에 호구가 얼마나 늘었는가?”라고 하였다. 고이행이 상주하기를, “지난해에 늘어난 호구는 모두 15만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수(隋)나라와 현재의 현존 호구를 묻자, 고이행이 상주하기를, “수나라 개황(开皇) 연간에는 호구가 870만이었고, 지금의 호구는 380만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이행은 고사렴(高士廉)의 아들이었다.

9월에 권중서시랑(权中书侍郎) 내제(来济)를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경인일에 홍화장공주(弘化长公主)가 토곡혼에서 와서 알현하였다.

계사일에 복공왕(濮恭王) 이태(李泰)가 균주(均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산기상시(散骑常侍) 방유애(房遗爱)가 태종 황제의 딸 고양공주(高阳公主)와 혼인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방현령(房玄龄)이 세상을 떠난 후, 공주가 방유애를 부추겨 형 방유직(房遗直)과 가산을 나누게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리어 방유직을 무고하였다. 방유직이 스스로 호소하자, 태종 황제가 공주를 엄중히 꾸짖었고, 이로부터 총애가 줄어들어 공주가 울적해하였다. 마침 어사(御史)가 도적을 탄핵하다가 승려 변기(辩机)의 보침(宝枕)을 수색하여 얻었는데, 공주가 하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주가 변기와 사통하여 보낸 예물이 수만에 이르렀고, 또 별도로 두 여자를 방유애를 시중들게 하였다. 태종 황제가 크게 노하여 변기를 허리에서 잘라 죽이고, 열 명 남짓의 노비를 죽였다. 공주가 더욱 원망하여, 태종 황제가 승하하였을 때 슬픈 기색이 없었다. 황제가 즉위한 후, 공주가 또 방유애와 방유직으로 하여금 서로 고소하게 하였고, 방유애가 이로 인해 죄를 얻어 방주자사(房州刺史)로 외임되었고, 방유직은 습주자사(隰州刺史)가 되었다. 또 승려 지욱(智勖) 등 여러 사람이 사사로이 공주를 모셨으며, 공주는 액정령(掖庭令) 진현운(陈玄运)을 시켜 궁중의 길흉 징조를 엿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부마도위 설만철이 일로 인해 관직에서 제명되어 영주자사로 유배되었다가, 입조한 후 방유애와 가까워져 방유애에게 원망하는 말을 하며 말했다: "지금 비록 발에 병이 있으나, 만약 경성에 앉아 있다면 그 쥐새끼들도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방유애와 비밀리에 모의하기를: "만약 국가에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사도형왕 이원경을 주인으로 세워야 한다." 이원경의 딸이 방유애의 아우 방유칙에게 시집갔으므로, 이로 인해 방유애와 내왕이 있었다. 이원경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손에 해와 달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부마도위 시령무는 시소의 아들로, 파릉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위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주가 병들었다 핑계하고 경성에 머물며 의원을 구하여, 이에 방유애와 비밀리에 결탁하였다. 고양공주는 방유직을 폄출시키고 그의 봉작을 빼앗으려 도모하여, 사람을 시켜 방유직이 자신에게 무례했다고 무고하였다. 방유직 또한 방유애와 공주의 죄행을 발각하여 말하기를: "죄악이 가득 차면, 아마도 우리 가문에 화를 끼칠 것입니다." 황제는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이 옥사를 심문하게 하였고, 더욱이 방유애와 공주가 모반한 증거를 얻었다.

사공, 안주도독 오왕 이각의 어머니는 수양제의 딸이었다. 이각은 문무 재능이 있어 태종 황제가 항상 그가 자신을 닮았다 여겨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장손무기가 굳이 반대하여 그만두었으므로, 이각과 장손무기는 서로 증오하게 되었다. 이각의 명망은 일찍이 높아 사람들의 마음이 향하는 바였기에, 장손무기가 매우 꺼려하여, 이 기회를 빌려 이각을 제거하여 뭇사람의 기대를 끊으려 하였다. 방유애가 이 상황을 알고, 이에 이각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말하여, 흘간승기처럼 죽음을 면하려 바랐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하지하 영휘 4년 (계축년, 서기 653년)

봄 2월 갑신일, 조서를 내려 방유애, 설만철, 시령무를 모두 참수하고, 이원경, 이각, 고양공주, 파릉공주는 모두 자결을 명하였다. 황제가 슬프게 시신에게 말하기를: "형왕은 나의 숙부이고, 오왕은 나의 형이니, 그들을 살려주려 하는데, 괜찮겠는가?" 병부상서 최돈례가 불가하다 여겨, 이에 그들을 죽였다. 설만철이 형을 받을 때 큰 소리로 말하기를: "설만철은 훌륭한 사내이니, 남겨두어 국가를 위해 죽기로 힘쓰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방유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구나!" 오왕 이각이 죽을 임하여 욕하며 말하기를: "장손무기가 권세를 농간하며 선량한 이를 해쳤으니, 만약 종묘 사직에 신령이 있다면, 머지않아 그를 멸족시키리라!"

을유일, 시중 겸 태자첨사 우문절, 특진태상경 강하왕 이도종, 좌효위대장군 부마도위 집실사력이 모두 방유애와 교류한 죄로 영남에 유배되었다. 우문절은 방유애와 친근하고 우호적이었으며, 방유애가 옥에 갇히자 우문절이 그를 매우 편들었다. 강하왕 이도종은 평소 장손무기, 저수량과 불화하여 모두 죄를 입었다. 무자일, 이각의 동모제 촉왕 이음은 서인으로 폐하여 파주에 안치하고, 방유직은 춘주동릉위로 강등되었으며, 설만철의 아우 설만비는 교주로 유배되었고, 방현령의 태묘 배향 자격을 취소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이적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당초, 임읍왕 범두리가 죽자, 아들 진룡이 즉위하였으나, 대신 가독이 그를 죽이고 범씨를 모두 멸족시켰다. 가독이 스스로 왕이 되니,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이에 범두리의 사위 바라문을 왕으로 세웠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범씨를 그리워하여, 다시 바라문을 폐하고 범두리의 딸을 왕으로 세웠다. 딸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자, 제갈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범두리 고모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범두리에게 죽임을 당하여 남쪽으로 진랍으로 도망갔으며, 대신 가륜옹정이 사자를 보내 그를 맞이하여 세우고, 여왕을 그에게 아내로 주니, 뭇사람이 이후에야 안정되었다. 여름 4월 무자일, 사자를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가을 9월 임술일, 우복야 북평정공 장행성이 세상을 떠났다. 갑술일, 저수량을 우복야로 임명하고, 동중서문하삼품은 예전과 같이 하되, 여전히 관리 선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경자일, 황제가 여산온천으로 행차하였다; 을사일, 궁중으로 돌아왔다.

당초, 목주 여자 진석정이 요망한 말로 백성을 미혹하여, 매부 장숙윤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문가황제라 칭하며 장숙윤을 복야로 임명하였다. 갑자야, 장숙윤이 부하를 이끌고 동려를 공격하여 현성을 함락시켰다. 진석진이 종을 치고 향을 피우며 병사 이천을 이끌고 목주와 우잠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흡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종이 조서를 내려 양주자사 방인옥에게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게 하였다. 진석정이 당신 동문동보에게 사천 명을 이끌고 무주를 침범하게 하니, 무주자사 최의현이 병사를 일으켜 저항하였다. 민간에 진석정이 신령의 보호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아, 그 군대를 범하면 반드시 멸족한다 하여, 병사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사공참군 최현적이 말하기를: "병사를 일으켜 이치에 의지한다 하여도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요사한 술법과 간사한 것을 믿고서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최의현이 최현적을 전봉으로 삼고, 자신은 주병을 이끌고 뒤따라 하회수에 이르러 적군을 만나 서로 교전하였다. 좌우에서 방패로 최의현을 가리려 하자, 최의현이 말하기를: "자사가 화살을 피한다면, 누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명하여 방패를 치우게 하였다. 이에 병사들이 마음을 합쳐 힘껏 싸워, 적도가 크게 패하여 수천 급의 목을 베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항복하여 귀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관군이 목주 경내에 이르자, 항복한 자가 만에 이르렀다. 11월 경술일, 방인옥의 군대가 합포하여 진석정, 장숙윤을 사로잡아 그들을 참수하고, 나머지 당은 모두 평정되었다. 최의현은 공으로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계축일, 병부상서 최돈례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12월 경자일, 시중 조헌공 고계보가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서돌궐 을비돌육가한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힐필달도호가 진주엽호라 칭하며, 비로소 사발라가한과 틈이 생겨, 오노실비와 함께 사발라를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천여 급을 베었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하지하 영휘 5년 (갑인, 서기 654년)

봄 정월 임술일, 강족 추장 동취가 조정에 귀부하여, 그 땅에 검주를 설치하였다.

3월 무오일, 고종이 만년궁으로 행차하였다.

경신일, 무덕공신 굴돌통 등 13명에게 관직을 추증하였다.

당초, 왕황후는 아들이 없었고, 소숙비가 총애를 받아 왕황후가 그를 시기하였다. 고종이 아직 태자였을 때, 입궁하여 태종을 모시다가 재인 무씨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태종이 승하하자, 무씨가 무리와 함께 감업사에 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태종 기일을 만나, 고종이 감업사에 가서 향을 피우다가 무씨를 보고, 무씨가 울자 고종도 눈물을 흘렸다. 왕황후가 이 소식을 듣고, 은밀히 무씨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고, 고종에게 권하여 후궁으로 들이게 하여, 이로써 소숙비의 총애를 이간질하려 하였다. 무씨는 기교하고 총명하며, 권모술수가 많아, 처음 입궁했을 때는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굽혀 왕황후를 섬겼다. 왕황후가 그를 사랑하여, 여러 번 고종 앞에서 그 미덕을 칭찬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무씨가 크게 총애를 받아 소의로 임명되니, 왕황후와 소숙비의 총애가 모두 줄어들었고, 두 사람이 다시 함께 무소의를 비방하였으나, 고종이 모두 듣지 않았다. 무소의가 아버지에게 추증을 청하려 하였으나 명분이 없어, 이에 공신을 포상하고 상준다는 핑계로 굴돌통 등에게 두루 증직을 내리면서, 무사확도 그 가운데 끼게 하였다.

을축일, 고종이 봉천탕으로 행차하였다; 기사일, 만년궁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대식이 병사를 일으켜 파사를 공격하여 파사왕 이사후를 죽이니, 이사후의 아들 비로사는 토화라로 도망하였다. 대식병이 물러난 후, 토화라가 병사를 내어 비로사를 파사왕으로 세우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윤월 병자일, 처월부에 금만주를 설치하였다.

정축야, 큰 비가 내려 산골 물이 갑자기 불어나 현무문으로 들어와, 숙위하는 병사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다. 우령군낭장 설인귀가 말하기를: "어찌 숙위하는 병사가, 천자에게 급난이 있을 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이 있겠는가!" 이에 성문 가로대에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쳐 궁내에 경고하였다. 고종이 급히 나와 높은 곳에 올랐는데, 얼마 안 되어 홍수가 침전으로 들어와, 홍수가 위사와 기린현 거민을 익사시켜, 죽은 자가 3천여 명이었다.

임진일, 신라 여왕 김진덕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이 조서를 내려 그 아우 김춘추를 신라왕으로 세웠다.

6월 병오일, 항주에 큰물이 나서 호타하가 범람하여 5천 3백 가구가 익사하였다.

중서령 유솔이 왕황후의 총애가 줄어들자 마음이 불안하여 정사 직무 해임을 청하였다; 계해일, 이부상서로 파면되었다.

가을 9월 정유일, 고종의 거가가 경사로 돌아왔다.

戊戌年,고종이 오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말했다: "이전에 선제 곁에 있을 때, 오품 이상 관료들이 정사를 논의하며, 어떤 이는 의장 아래에서 직접 진술하고, 어떤 이는 퇴조 후에 밀봉한 상주문을 올려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소. 어찌 오늘날 유독 일이 없겠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어찌 말이 없는 것이오?"

겨울 10월, 옹주(雍州)에서 4만 1천 명을 고용하여 장안 외성을 쌓게 하였는데, 30일 만에 완공되었다. 계축일, 옹주 참군(參軍) 설경선(薛景宣)이 밀봉한 상주문을 올려 이르기를: "한(漢) 혜제(惠帝)가 장안성을 쌓자 얼마 안 가 붕어하였습니다. 지금 또 이 성을 쌓으니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지녕(于志寧) 등은 설경선의 말이 패역(悖逆)에 관련되었다고 여겨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이 이르기를: "경선이 비록 광망하나, 밀봉 상주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죄를 준다면,恐 언로가 끊어질 것이오."라 하고는 드디어 사면하였다.

고려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고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곡고(李窟哥)가 병사를 이끌고 막아 신성(新城)에서 고려를 크게 패배시켰다.

이 해에 큰 풍년이 들어 낙주(洛州)의 좁쌀 한 말에 두 돈 반, 멥쌀 한 말에 열한 돈이었다.

왕황후와 소숙비(蕭淑妃)가 무소의(武昭儀)와 서로 비방하고 고발하였다. 고종이 왕황후와 소숙비의 말은 믿지 않고 오직 무소의의 말만 믿었다. 왕황후는 스스로 몸을 낮추어 고종의 측근을 섬기지 않았고, 그 어머니 위국부인(魏國夫人) 유씨(柳氏)와 외삼촌 중서령(中書令) 유식(柳奭)이 입궁하여 육궁(六宮)을 알현할 때도 예법에 맞지 않게 행동하였다. 무소의는 왕황후가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주시하여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 사귀었고, 얻은 상여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왕황후와 소숙비의 일거수일투족을 무소의가 반드시 알게 되었고, 모두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왕황후의 총애는 비록 줄었으나, 고종에게 아직 그를 폐할 뜻은 없었다. 마침 무소의가 딸을 낳았는데, 왕황후가 그를 사랑하여 어루만지다가 나간 후, 무소의가 은밀히 딸을 목 졸라 죽이고 이불로 덮어 두었다. 고종이 도착하자 무소의는 거짓으로 기뻐하며 웃고 이불을 열어 아이를 보니 이미 죽어 있었고, 즉시 놀라 울부짖었다. 좌우에게 묻자, 좌우가 모두 말하기를: "황후께서 방금 여기에 다녀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라고 하였다. 무소의는 이 기회를 타서 울며 왕황후의 죄과를 하소연하였다. 왕황후는 스스로 변명할 수 없었고, 고종은 이로부터 황후를 폐할 뜻을 품게 되었다. 또 대신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이에 무소의와 함께 태위(太尉)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집에 행차하여 흠뻑 즐기며 술을 마시고, 석상에서 장손무기의 총희(寵姬)가 낳은 세 아들을 모두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임명하고, 또 금은보화와 비단 명주를 실은 수레 열 대를 장손무기에게 하사하였다. 고종이 이 기회에 조용히 왕황후에게 아들이 없음을 들어 장손무기를 암시하였으나, 장손무기는 다른 말로 대답하고 끝내 뜻을 따르지 않자, 고종과 무소의는 모두 불쾌하게 연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무소의는 또 그 어머니 양씨(楊氏)를 장손무기의 집으로 보내 여러 차례 청탁하게 하였으나, 장손무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예부상서(禮部尚書) 허경종(許敬宗)도 여러 번 장손무기를 설득하였으나, 장손무기는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 하지하(下之下) 영휘(永徽) 6년(을묘, 655년)

봄 정월 임신 초하루, 고종이 소릉(昭陵)에 배알하였다. 갑술일, 궁으로 돌아왔다.

기축일, 사주도행군총관(巂州道行軍總管) 조계숙(曹繼叔)이 사산(斜山)에서 호총(胡叢)·현양(顯養)·거로(車魯) 등 만족(蠻族)을 격파하고 열 개가 넘는 성을 점령하였다.

경인일, 황자 이홍(李弘)을 대왕(代王)으로, 이현(李賢)을 노왕(潞王)으로 봉하였다.

고려가 백제 및 말갈과 병력을 합쳐 신라 북부 변경을 침범하여 서른세 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을축일,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郎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병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임오일, 정명진 등이 요수(遼水)를 건너자, 고려가 그 병력이 적음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맞서 싸웠다. 정명진 등이 힘껏 공격하여 고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외성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계미일,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정도절(程知節)을 총산도행군대총관(葱山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여 서돌궐 사발라가한(沙鉢羅可汗)을 토벌하게 하였다.

임진일, 한원(韓瑗)을 시중(侍中)으로, 내제(來濟)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하였다.

6월, 무소의가 왕황후와 그 어머니 위국부인 유씨가 무술(巫術)로 저주를 행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고종이 조서를 내려 왕황후의 어머니 유씨의 입궁을 금지하였다. 가을 7월 무인일, 이부상서(吏部尚書) 유식을 수주자사(遂州刺史)로 폄적(貶謫)하였다. 유식이 부풍(扶風)에 이르렀을 때, 기주장사(岐州長史) 우승소(于承素)가 상관의 뜻에 아첨하여 유식이 궁중의 이야기를 누설하였다고 상주하자, 다시 영주자사(榮州刺史)로 폄적되었다.

당나라가 수나라 제도를 이어받아 후궁에 귀비(貴妃)·숙비(淑妃)·덕비(德妃)·현비(賢妃)를 두었고, 모두 일품(一品)으로 간주하였다. 고종이 특별히 진비(宸妃)를 설치하여 무소의를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으나, 한원과 내제가 간하여 전례가 없다고 하자, 그만두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요양(饒陽) 사람 이의부(李義府)가 장손무기에게 미움을 받아 벽주사마(壁州司馬)로 강등되었다. 칙명이 아직 문하성(門下省)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이의부가 은밀히 이를 알고 중서사인 유주(幽州) 사람 왕덕검(王德儉)에게 계책을 묻자, 왕덕검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시나 망설여 결정하지 못하시는 까닭은, 단지 재상과 대신들이 이의를 가질까 염려하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대가 만약 그를 황후로 세우기를 청하는 계책을 올리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의부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당일에 왕덕검을 대신하여 야간 당직을 서면서 문을 두드려 표문을 올려, 왕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세워 백성들의 마음에 부응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이 크게 기뻐하여 그를 불러들여 이야기하고, 진주 한 말을 하사하며 원래 관직에 유임시켰다. 무소의도 또 은밀히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격려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파격적으로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위위경(衛尉卿) 허경종, 어사대부(御史大夫) 최의현(崔義玄), 중승(中丞) 원공유(袁公瑜)가 모두 은밀히 무소의에게 충성을 표하였다. 을유일, 시중 최돈례(崔敦禮)를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8월, 상약봉어(尚藥奉御) 장효장(蔣孝璋)이 특별히 원외관(員外官)으로 설치되었으나, 여전히 정원(正員)과 같게 하였다. 원외관이 정원과 같아진 것은 장효장에서 시작되었다.

장안령(長安令) 배행검(裴行儉)이 장차 무소의를 황후로 세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국가의 화근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 여겨 장손무기와 저수량(褚遂良)과 함께 은밀히 논의하였다. 원공유가 이를 듣고 무소의의 어머니 양씨에게 알리자, 배행검이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서주도독부장사(西州都督府長史)로 폄적되었다. 배행검은 배인기(裴仁基)의 아들이었다.

9월 무진일, 허경종을 예부상서로 임명하였다.

어느 날, 태종이 퇴조한 후 장손무기, 이적(李勣), 우지녕, 저수량을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저수량이 말하기를: "오늘의 소환은 아마도 황후를 세우는 일 때문일 것입니다. 폐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고,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태위께서는 폐하의 친외숙이시고, 사공(司空)께서는 공신이시니, 폐하로 하여금 외숙과 공신을 죽이는 명성을 얻게 할 수 없습니다. 신 저수량은 평민 출신으로 공로가 없이 지금의 지위에 이르렀고, 또 선제의 유명(遺命)을 받았으니, 목숨을 걸고 간쟁하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선제를 뵈오리이까!"라고 하였다. 이적은 병을 핑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장손무기 등이 내전에 이르자, 태종이 장손무기를 보며 말하기를: "황후에게 아들이 없고 무소의에게 아들이 있소, 지금 내가 소의를 황후로 세우려 하니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저수량이 대답하기를: "황후께서는 명문 출신으로 선제께서 폐하를 위해 맞이하신 분입니다. 선제께서 임종하실 때, 폐하의 손을 잡고 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좋은 아들과 좋은 며느리를 이제 그대에게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폐하께서도 들으신 바 있어 아직 귀에 생생합니다. 황후께서 무슨 허물이 있다고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쉽사리 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폐하를 따르지 못하여 위로는 선제의 유명을 어기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不高兴하여 그만두었다. 이튿날 또 이 일을 꺼내자, 저수량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꼭 황후를 바꾸시려거든, 신이 삼가 천하 명문의 딸을 신중히 고르기를 청하오니, 어찌 반드시 무씨(武氏)라야 하겠습니까! 무씨는 일찍이 선제를 모셨으니, 이는 뭇사람이 다 아는 바이며, 천하의耳目을 어찌 가릴 수 있겠습니까? 만대 이후에 사람들이 폐하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소서! 신이 지금 폐하를 거역하오니,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홀(笏)을 섬돌 위에 놓고, 두건을 풀어 이마를 땅에 찧으며 피를 흘리며 말하기를: "폐하께 홀을 돌려드리오니, 청컨대 제가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그를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무소의가 휘장 안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이 늙은 것을 때려죽이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저수량은 선제의 임종 유명을 받았으니, 비록 죄가 있어도 형벌을 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지녕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한원은 상주할 기회를 틈타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언하였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튿날 다시 나아가 간언하며 슬퍼함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자, 태종은 명하여 그를 내보내게 하였다. 한원이 또 상소하여 간언하였다.

"보통 남녀라도 오히려 서로 선택하려 하거늘, 하물며 천자이겠습니까?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서 모범이 되며, 선과 악이 모두 이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교모가 황제를 보필하고, 달기가 은나라를 전복시켰으며, 《시경》에 이르기를 '혁혁한 종주를 포사가 멸망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역사를 읽을 때마다 항상 탄식하였거늘, 어찌 오늘날 성명한 조정을 더럽히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일을 법도에 맞지 않게 행하면 후세 자손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시어 후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마소서. 만약 신의 죽음이 나라에 유익하다면, 신을 저자거리에서 토막 내는 것조차 신의 본분입니다. 옛날 오왕이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고소대가 사슴이 노니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은 천하 사람들이 실망하여 가시덤불이 궁궐에 자라고 종묘에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게 될 날이 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내제가 표문을 올려 간언하였다.

"임금이 황후를 세움은 위로 천지의 법도를 본받는 것이니, 반드시 예교 있는 명문 출신으로 고요하고 어질며 정숙한 여자를 선택해야만 사해의 기대에 부합하고 신명의 뜻을 순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문왕이 배를 만들어 태사를 맞이하여 드디어 《관저》의 교화가 일어나고 백성들이 복을 입었으며, 한성제는 방탕하여 계집종을 황후로 세워 황통을 끊고 사직을 무너뜨렸습니다. 주나라의 흥함은 이와 같고 한나라의 화는 저와 같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자세히 살피소서."

태종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일 어느 날, 이적이 입조하여 뵙자, 태종이 그에게 물었다.

"짐이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는데, 저수량이 굳이 불가하다고 여기네. 저수량이 이미 고명대신이니,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는가?"

이적이 대답하였다.

"이는 폐하 집안의 일이온데, 어찌 밖의 사람에게 묻겠습니까?"

태종이 이에 결심을 굳혔다. 허경종이 조정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밭 가는 늙은이가 곡식 열 섬을 더 거두었다 해도 오히려 아내를 바꾸려 하거늘, 하물며 천자가 황후 하나 세우려는 일을 어찌 남이 상관하여 함부로 다른 의견을 내는가?"라고 하였다. 무소의가 측근을 시켜 이 말을 태종에게 알렸다. 경오일에 저수량을 담주도독으로 강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