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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13

제 13 편

현무염탄(玄黓涒滩) 해로부터 현무돈장(玄黓敦牂) 해까지, 모두 11년이다.

세종 효무 황제 하지상(下之上)

원봉 2년(임신년, 기원전 109년)

1 겨울, 10월, 황제가 행차하여 옹(雍) 땅에 들러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서는 태일신(泰一神)에게 제사하며 덕성(德星)을 맞이하였다.

2 봄, 정월, 공손경(公孫卿)이 말하였다. "동래산(東萊山)에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마치 천자를 만나고자 하는 듯하였습니다." 천자가 이에 구씨성(緱氏城)에 행차하여 공손경을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하고, 이어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대한 발자국만 보았다. 또 방사(方士)를 보내 신선과 귀신을 찾고 영지와 신령한 약초를 채취하게 하였는데, 그 수가 천 명에 이르렀다. 당시 마침 가뭄이 들었고, 천자는 이미 출행하였으나 정당한 명분이 없었기에 만리사(萬里沙)에 기도하였다. 여름, 4월, 돌아오는 길에 태산(泰山)에 제사하였다.

3 처음에 황하(黃河)가 호자(瓠子)에서 터져 나간 지 20여 년이 지나도록 다시 막지 못하여, 양(梁) 땅과 초(楚) 땅 일대의 피해가 특히 심하였다. 이 해에 황제는 급인(汲仁)과 곽창(郭昌) 두 경(卿)을 보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호자하의 제방을 막게 하였다. 천자가 태산에서 돌아와 직접 제방이 터진 현장에 이르러, 백마(白馬)와 옥폐(玉璧)를 강물에 담그고, 여러 신하와 수행 관리들에게 장군 이하 모두가 섶을 지게 하여 마침내 제방을 메웠다. 강 위에 궁전 하나를 세워 선방궁(宣防宮)이라 이름 하였다. 황하를 북쪽으로 두 갈래 물길로 나누어 흐르게 하여 하나라 우(禹) 임금 때의 옛 수로를 회복하였고, 양 땅과 초 땅 일대는 다시 안정되어 수해가 없어졌다.

4 황제는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5 처음으로 월(越) 땅의 무당에게 명하여 천지와 모든 귀신에게 제사하게 하고, 또 닭뼈로 점을 치게 하였다.

6 공손경이 말하기를, 선인(仙人)은 누각에 있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황제가 명하여 장안에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을 짓고, 감천(甘泉)에 익수관(益壽觀)과 연수관(延壽觀)을 지어, 공손경이 부절(符節)을 지니고 시설을 갖추어 신인을 기다리게 하였다. 또 통천경대(通天莖臺)를 세우고, 대 아래에 제사 도구를 두었다. 감천궁(甘泉宮)의 전전(前殿)을 다시 고쳐 짓고, 각처의 궁전과 집을 더욱 늘렸다.

7 처음에 전연(全燕) 시대에 일찍이 진번(真番)과 조선(朝鮮)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이를 위해 관리(官吏)를 두고 변새(邊塞)의 장벽을 수축하였다.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이 지역들은 요동군(遼東郡)의 외곽 변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건립된 후,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군의 기존 변새를 수리하고 패수(𬇙水)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귀속시켰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匈奴)로 도망쳤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도망쳐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추형(椎形)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변새를 빠져나가 패수를 건너 진나라 때 비어 있던 땅의 상하 성보(城堡) 사이에 살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와 연나라의 도망자들을 부리고 복속시켜 스스로 왕이 되어 왕검성(王險城)에 도읍하였다. 마침 혜제(惠帝)와 고후(高后) 시절에 이르러 천하가 막 안정되었기에,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위만과 약속하기를,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새외(塞外)의 오랑캐를 보호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추장들이 조정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이를 막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위만은 병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항복시킬 수 있었으며,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귀부(歸附)하고 복종하여 그 지역은 수천 리에 달하였다. 왕위가 손자 우거(右渠)에게 전해지자, 꾀어들인 한나라 도망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는 일찍이 조정에 입조(入朝)하여 천자를 뵌 적이 없었으며, 진국(辰國)이 상소하여 입조를 청하려 하자 그 역시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해에 한나라는 사하(涉何)를 보내 타이르게 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조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하는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가까워지자, 마부를 시켜 배웅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변새 안으로 들어간 뒤,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조선의 장수를 죽였습니다." 황제는 그 명분이 좋다고 여겨 추궁하지 않고, 사하를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임명하였다. 조선은 사하를 원망하여 군대를 일으켜 습격하여 죽였다.

8 6월, 감천궁(甘泉宮)의 방 안에서 아홉 줄기의 지초(芝草)가 자라나, 황제가 이에 사면령을 내렸다.

9 황제가 가뭄으로 근심하자, 공손경이 말하였다. "황제(黃帝) 때에 봉선(封禪)을 행하면 가뭄이 들었으니, 3년 동안 가물어 봉토(封土)를 말려야 했습니다." 황제가 이에 조서를 내렸다. "가뭄이 드니, 아마도 하늘이 봉토를 말리려는 것이겠지!"

10 가을, 문수(汶水) 옆에 명당(明堂)을 세웠다.

11 황제가 천하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대에 충당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제(齊)나라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에서 출병하게 하여 함께 조선을 토벌하게 하였다.

12 처음에 황제가 왕연우(王然于)를 보내, 남월(南越)을 격파하고 남이(南夷)를 토벌한 병위(兵威)를 이용하여 전왕(滇王)을 입조시키도록 타일렀다. 전왕은 무리 수만 명을 거느렸고, 그의 동북쪽에 인접한 노심(勞深)과 미막(靡莫)은 모두 전왕과 동성(同姓)이며 서로 의지하여 따르지 않았다. 노심과 미막은 여러 차례 한나라 사신의 관리와 병사를 침범하였다. 이에 황제는 장군 곽창(郭昌)과 중랑장(中郎將) 위광(衛廣)을 보내 파군(巴郡)과 촉군(蜀郡)의 병사를 징발하여 노심과 미막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어 군대를 이끌고 전국(滇國)에 육박하였다. 전왕은 전국을 이끌고 항복하여 관리 설치와 입조를 청하였고, 이에 한나라는 그곳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전왕에게 왕인(王印)을 내려 계속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월과 동월(東越)을 멸망시키고 서남이(西南夷)를 평정하여, 17개의 초군(初郡)을 설치하고, 현지의 옛 풍속과 습관에 따라 다스리며 조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남양(南陽)과 한중(漢中) 지역의 기존 각 군(郡)은 각각 지리적 거리에 따라 초군의 관리와 병사의 녹봉(祿俸)과 식량, 화폐와 재물, 역참(驛站)의 수레와 말, 마구(馬具) 등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초군에서는 자주 작은 반란이 일어나 관리들을 살해하였고, 한나라는 남방의 관리와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격년마다 1만 명 이상을 동원하였으며, 비용은 모두 대농(大農)에서 공급하였다. 대농은 균수법(均輸法)과 염철 전매(鹽鐵專賣)를 조절하여 조세 수입을 보충하였기에, 이러한 비용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이른 곳마다, 각 현(縣)은 힘을 다해 공급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할 뿐이었고, 감히 임의로 조세 법령을 제정하지는 못하였다.

13 이 해에 어사중승(御史中丞) 남양(南陽) 사람 두주(杜周)를 정위(廷尉)로 임명하였다. 두주는 겉모습은 너그러웠으나 마음속은 가혹하고 깊기가 뼛속까지 미쳤으며, 옥사(獄事)를 다스림은 대체로 장탕(張湯)을 본받았다. 당시 황제가 직접 명령하여 심리하는 조옥(詔獄)이 갈수록 많아져, 2천 석(石) 급 관리들이 갇히는 경우, 새 옥사와 묵은 옥사가 서로 쌓여 적어도 1백여 명에 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정위가 1년에 심리하는 옥사는 1천여 건에 이르렀으며, 각 옥사는 큰 것은 연루된 증인을 체포하는 수가 수백 명, 작은 것도 수십 명이었다. 먼 곳의 사람은 수천 리를, 가까운 곳도 수백 리를 걸어와 대질(對質)하고 심문을 받았다. 정위(廷尉)와 경성(京城) 각 관서의 조옥(詔獄)에 갇힌 죄수는 6, 7만 명에 이르렀고, 관리들이 그물을 쳐서 연루시켜 늘린 것까지 합하면 또 10여만 명이 되었다.

원봉 3년(계유년, 기원전 108년)

1 겨울, 12월,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말머리만 하였다.

2 황제가 장군 조파노(趙破奴)를 보내 차사(車師)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파노는 7백여 명의 경기병(輕騎兵)과 함께 먼저 도착하여 누란왕(樓蘭王)을 사로잡고, 이어 차사를 격파하고, 그 병위(兵威)를 빌려 오손(烏孫)과 대완(大宛) 등의 나라들을 포위하였다. 봄, 정월, 갑신일(甲申日)에 조파노를 작야후(浞野侯)로 봉하였다. 왕회(王恢)가 조파노를 도와 누란을 공격한 공로로 왕회를 호후(浩侯)로 봉하였다. 이로부터 주천군(酒泉郡)에 설치된 정자(亭子)와 장벽이 옥문관(玉門關)까지 이르게 되었다.

3 각저희(角抵戲)와 어룡만연(魚龍曼延) 같은 잡기(雜技) 공연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4 한나라 군대가 조선 경내로 진입하자, 조선왕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준한 지형을 지켰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성에 도착했다. 우거는 성을 지키며 누선장군의 병력이 적음을 알아차리고, 곧 성을 나와 누선군을 공격했다. 누선군은 패배하여 흩어져 산 속으로 10여 일 동안 도망갔다가, 점차 흩어진 병사들을 찾아 모아 다시 집결했다. 좌장군은 패수 서안을 지키는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수의 전과가 좋지 않자, 위산을 보내 병력을 앞세워 우거를 설득하게 했다. 우거는 사자를 만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며 말했다: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나, 두 장군이 속여 죽일까 두렵습니다. 이제 신절을 보았으니 항복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태자를 보내 입조하여 사죄하고, 전마 5천 필을 바치며 군량을 증여하게 했다. 수행하는 무리는 1만여 명으로, 무기를 들고 패수를 건너려 했다.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말했다: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리를 명하여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 죽일까 의심하여, 결국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했다.

좌장군이 패수 위의 적군을 격파하고, 이에 나아가 왕험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의 북서부를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부에 주둔했다. 우거는 이에 성을 굳게 지켜,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좌장군이 거느린 연나라와 대나라 병사들은 대부분 강하고 날래며, 누선장군이 거느린 제나라 병사들은 일찍이 패망하여 욕을 당한 적이 있어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장수도 속으로 부끄러워하여, 우거를 포위할 때 자주 화친을 주장했다. 좌장군은 맹렬히 공격했고, 조선의 대신들은 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누선장군과 항복을 약속했다. 사자가 오가며 의논했으나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좌장군은 여러 번 누선장군과 함께 공격할 날짜를 약속했으나, 누선장군은 조선과의 화친을 이루려 해서 만나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기회를 엿보아 조선에 항복을 권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고 마음은 누선장군에게 기울었다. 이에 두 장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장군이 이전에 패전하여 군대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 또 조선과 사적으로 가까이 지내며 조선이 항복하지 않으니, 그가 반역을 꾀할까 의심했으나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도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전쟁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자, 제남태수 공수수를 보내 이를 바로잡고 처리하게 하며, 상황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주었다. 공수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은 일찌감치 함락되었어야 하는데,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은 것은 누선장군이 여러 번 약속한 기일에 맞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의 의심을 모두 공수수에게 털어놓으며 말했다: "지금 이 기회에 그를 잡지 않으면, 큰 화를 불러올까 두렵습니다." 공수수 또한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이에 부절로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의 군영으로 들어와 군사를 의논하게 한 뒤, 곧 좌장군에게 명하여 그의 부하로 누선장군을 체포하게 하고 그의 군대를 겸병했다. 공수수가 상황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수수를 주살했다.

좌장군이 두 군대를 합친 후, 맹렬히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의 승상 노인, 승상 한음, 니상 참, 장군 왕흡이 함께 의논하며 말했다: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장군이 지금 체포되었고, 오직 좌장군만이 군대를 통솔하며 공격이 더욱 맹렬하니, 우리가 저항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또한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음, 왕흡, 노인은 모두 도망쳐 나와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여름에 니상 참이 사람을 보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왕험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는데, 원래 우거의 대신 성기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항복한 승상 노인의 아들 최를 보내 성 안의 백성들을 깨우치게 했다. 성기를 죽였다. 이에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참을 사청후, 한음을 추저후, 왕흡을 평주후, 장(우거의 아들)을 기후, 최(노인의 아들)는 아버지가 도중에 죽고 자신이 공이 있어 열양후에 봉했다.

좌장군은 서울로 소환되어, 공을 다투고 시기하며 계책이 그릇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누선장군 또한 군대를 이끌고 열구에 도착한 후,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렸어야 했으나, 멋대로 먼저 공격하여 병사들이 사상 손실을 크게 입은 죄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했으나, 속죄하고 나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반고가 말한다: 현도군, 낙랑군은 본래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살면서, 예의로 그 백성들을 가르치고, 밭 갈고 누에 치고 베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해 여덟 가지 금령을 세웠다: 서로 죽인 자는 그때의 명가로 변상하고, 서로 다친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주인의 집 노비가 되고 여자는 여종이 되며, 스스로 몸값을 치르려는 자는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하며, 비록 죄를 면하고 서민이 되더라도 풍속은 여전히 이를 부끄럽게 여겨, 혼인할 때 그들과 혼인하기를 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곳 백성들은 끝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절을 지키고 신의를 지켜 음란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골 들판의 음식은 대나무 제기로 담아 먹었고, 도읍 사람들은 관리들을 본받아 흔히 그릇과 잔을 사용하여 먹었다. 군부가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들을 임용해 오자, 관리들은 백성들이 재물을 보관하고 닫아 두지 않는 습관을 보고, 상인들이 그곳에 가면 밤에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점차 얇아졌고, 지금은 금령을 범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 금령이 60여 조로 늘어났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러나 동이 사람들은天性이 유순하여 다른 세 방면 밖의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가 대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탄식하며,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날 뜻을 품고, 구이 지방에 살고자 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5 가을 7월, 교서우왕 유단이 죽었다.

6 무도군의 저족이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주천군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원봉 4년(갑술년, 기원전 107년)

1 겨울 10월, 황제가 옹 땅에 행차하여 오제에게 제사 지냈다. 회중도를 뚫고, 이에 북쪽으로 소관을 지났다. 독록산과 명택을 지나, 대 땅에서 돌아와 하동군에 행차했다. 봄 3월, 후토신에게 제사 지내고, 분음, 하양, 중도의 사형수 이하 죄수들을 사면했다.

2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3 흉노는 위청과 곽거병이 막북을 건넌 이후로는 다시 침범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멀리 북쪽으로 천이하여 병사와 말을 쉬게 하고 활쏘기와 사냥을 익히며, 여러 차례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어 듣기 좋은 말과 달콤한 언변으로 화친을 청하였다. 한나라는 북지 사람 왕오 등을 보내 흉노를 정탐하게 하였는데, 왕오가 흉노의 풍속을 따라 부절을 버리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선우가 그를 좋아하여 거짓으로 달콤한 말을 하며 허락하기를, 자기의 태자를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한나라는 양신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양신이 흉노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니, 선우가 말하기를, 「옛 약조에 한나라가 일찍이 옹주를 보내고, 비단과 솜, 식량을 일정한 품급으로 공급하여 화친하며, 흉노 또한 변경을 침범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르러 옛 제도를 어기고 내 태자를 인질로 삼으려 하니, 이는 희망이 크지 않다.」 하였다. 양신이 돌아오자, 한나라는 다시 왕오를 보냈고, 선우는 또 달콤한 말로 그를 달래어 한나라의 재물을 많이 얻고자 하여, 왕오를 속여 말하기를, 「내가 한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친히 만나 이야기하며 서로 형제가 되고자 한다.」 하였다. 왕오가 돌아와 한나라에 보고하니, 한나라는 장안에 선우를 위한 관저를 지었다. 흉노가 말하기를, 「한나라의 귀인이 사신으로 오지 않으면 나는 그들과 진심으로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흉노가 그들의 귀인을 한나라에 보냈는데, 병이 들어 한나라가 약을 주어 치료하려 하였으나 불행히 죽었다. 한나라는 노충국에게 이천석의 인수를 차고 가는 사신 임무를 주어, 그의 장례를 보내도록 하고 후한 장례 비용으로 수천 금의 가치를 주며 말하기를, 「이는 한나라의 귀인이다.」 하였다. 선우는 한나라가 우리 귀인 사신을 죽였다고 여기고, 이에 노충국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동안 말한 것들은 선우가 다만 왕오를 속인 것에 불과할 뿐, 실제로 한나라에 들어가거나 태자를 보낼 뜻은 전혀 없었다. 이에 흉노는 여러 차례 기병을 보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곽창을 발호장군으로 임명하고, 탁야후 조파노와 함께 삭방군 동쪽에 주둔하여 흉노를 방비하게 하였다.

원봉 5년(을해년, 기원전 106년)

1 겨울, 황제가 남쪽으로 순수하여 사냥을 하고 성당에 이르러, 구의산에서 우순을 멀리 바라보며 제사 지냈다. 잠현의 천주산에 올랐으며, 심양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직접 강에서 자라를 쏘아 잡았다. 배들이 서로 이어져 천 리에 달하였고, 종양에 정박하여 상륙한 뒤, 이에 북쪽으로 낭야군에 이르러 해변을 따라 행진하며, 지나는 곳마다 그 지역의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예를 갖추었다. 봄, 3월에 태산으로 돌아와 봉토를 더하였다. 갑자일에 처음으로 명당에서 상제에게 제사하고 고조를 배향하였으며, 이로 인해 제후왕과 열후를 알현하고 각 군과 각 봉국의 연말 계산 장부를 받았다. 여름, 4월에 천하에 대사면을 하고, 황제가 지나간 현은 그 해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였다. 돌아와 감천궁에 머물며 태치에서 천제에게 제사 지냈다.

2 장평열후 위청이 죽었다. 무덤을 만들면서 여산의 형상을 본떴다.

3 황제가 이미 흉노와 남월을 격퇴하고 물리쳐, 강토를 개척하고 변경을 확장하여, 이에 교지주와 삭방주, 그리고 기주, 유주, 병주, 연주, 서주, 청주, 양주, 형주, 예주, 익주, 양주 등 모두 열세 개의 주부를 설치하고, 모두 자사를 두었다.

4 황제는 명성이 높은 문무 신하들이 거의 다 없어져 가고 있음을 보고, 이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무릇 비범한 공업을 세우려면 반드시 비범한 인재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말은 날뛰고 차며 걷어차지만 천 리를 달릴 수 있고, 어떤 선비는 세속의 비난과 구속을 짊어지고도 공명을 세울 수 있다. 그 통제하기 어려운 말과 방탕하고 구속받지 않는 선비도 또한 그들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각 주와 각 군은 관리와 백성 중에서 재능이 뛰어나고 덕행이 탁월하여 장상이 될 수 있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을 조사하여 천거하라.」 하였다.

원봉 6년(병자년, 기원전 105년)

1 겨울, 황제가 행차하여 회중에 머물렀다.

2 봄, 수산궁을 지었다.

3 3월, 황제가 행차하여 하동군에 이르러 후토신에게 제사하고, 분음에서 참수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4 한나라는 이미 서남이와 통교하여 다섯 개의 군을 설치하고, 그 땅을 연결하여 대하에 갈 수 있도록 하려고, 해마다 열 몇 차례의 사신을 이 새로 설치한 군들에서 보냈으나, 모두 곤명에 의해 막혀 그들이 살해당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겼다. 이에 천자는 경성의 도망자들을 사면하여 군대에 편입시키고, 발호장군 곽창을 보내 그들을 이끌고 곤명을 공격하게 하여 수십만 명의 목을 베었다. 뒤에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결국 통하지 못하였다.

5 가을, 큰 가뭄과 메뚜기 떼가 일어났다.

6 오손의 사신이 한나라의 영토가 광대함을 보고 돌아가 그 나라에 보고하니, 그 나라는 이에 더욱 한나라를 중시하였다. 흉노는 오손이 한나라와 교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 하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대완, 월지 등이 모두 한나라를 섬기게 되자, 오손은 이에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한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아 형제가 되기를 원한다고 표명하였다. 천자와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허락하였다. 오손은 천 마리의 말을 보내 한나라 여자에게 폐백을 보냈다. 한나라는 강도왕 유건의 딸 세군을 공주로 삼아 오손왕에게 시집보내고, 선물은 매우 풍성하게 하였다. 오손왕 곤막은 그녀를 우부인으로 삼았다. 흉노도 여자를 보내 곤막에게 시집보내 좌부인으로 삼았다. 공주는 스스로 궁실을 지어 살고, 해마다 한두 차례씩 곤막을 만나 술자리와 연회를 베풀었다. 곤막은 나이가 많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공주는 슬퍼하고 근심하여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불쌍히 여겨, 격년마다 사신을 보내 휘장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곤막이 말하기를, 「내가 늙었다.」 하고, 그의 손자 잠취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려 하였다. 공주가 따르지 않고 상소하여 상황을 알렸다. 천자가 답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나라 풍속을 따르라. 오손과 함께 흉노를 멸망시키고자 한다.」 하였다. 잠취가 이에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곤막이 죽고, 잠취가 왕위를 이어 곤미라 불렸다.

이때, 한나라 사신들은 서쪽으로 총령을 넘어 안식에 이르렀다. 안식은 사신을 보내 큰 새알과 여헌의 요술쟁이들을 한나라에 바쳤으며, 또한 환잠, 대익, 차고사, 우미, 소협 같은 여러 작은 나라들도 모두 한나라 사신을 따라 예물을 바치고 천자를 알현하니, 천자가 매우 기뻐하였다. 서방의 사신들이 오가고, 천자는 바닷가를 순행할 때마다 외국 빈객들을 따르게 하였으며, 큰 도시나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면 그곳을 경유하여 재물과 비단을 흩어 상을 주고, 풍부한 물건으로 그들을 공급하여 한나라의 부유함을 보여주었다. 큰 각저희를 열고, 기이한 재주와 각종 괴물들을 선보이며 많은 사람들을 모아 구경시켰다. 상을 내리고, 술을 못처럼, 고기를 숲처럼 쌓아 두어, 외국 빈객들이 각지의 창고와 저장된 재물을 두루 보게 하여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고 그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대완 부근에는 포도가 많아 술을 만들 수 있었고, 목숙이 많아 천마가 즐겨 먹었다. 한나라 사신들이 그 열매를 채집해 가져오자, 천자가 그것을 이궁과 별관 옆에 심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심었다. 그러나 서역은 흉노와 가깝기 때문에 자주 흉노 사신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한나라 사신보다 더 잘 대접하였다.

7 이 해에 흉노 오위 선우가 죽고, 아들 오사려가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호칭이 「아선우」였다. 이로부터 선우는 더욱 서북쪽으로 천이하여, 왼쪽 군대는 운중군을, 오른쪽 군대는 주천군과 돈황군을 마주하게 되었다.

태초 원년(정축년, 기원전 104년)

1 겨울, 10월, 황제가 행차하여 태산에 머물렀다. 11월, 갑자 삭일, 동틀 무렵에 동지가 되어, 명당에서 상제에게 제사 지냈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 신선을 구하는 자들과 방사들을 시험해 보았으나 모두 효험이 없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사람들을 보내며, 신선을 만나기를 바랐다.

2 을유일, 백량대에 불이 났다.

3 12월, 갑오 삭일, 황제가 직접 고리산에서 선례를 행하고 후토신에게 제사한 뒤, 발해에 이르러, 봉래 같은 신산을 멀리 바라보며 제사하여 신선의 궁정에 이르기를 바랐다. 봄, 황제가 돌아왔다. 백량대 화재 때문으로, 감천궁에서 제후들을 알현하고 연말 계산 장부를 받았다. 감천에 제후들의 관저를 지었다.

월인 용지(越人勇之)가 말하였다: "월나라 풍속에 화재가 난 후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더 큰 규모로 지어서 이를 누르고 제압합니다." 이에 따라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규모가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 그 동쪽에는 봉작(鳳闕)이 있었고, 높이는 20여 장(丈)이었다. 그 서쪽에는 당중(唐中)이 있었고, 사방 수십 리의 호랑이 우리가 있었다. 그 북쪽에는 큰 연못을 파고 점대(漸臺)를 세워 높이가 20여 장이었으며, 이름을 태액지(太液池)라 하고, 연못 안에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을 두어 바다 속의 신산(神山)과 귀어(龜魚) 무리를 본뜨게 하였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 등이 있었다. 신명대(神明臺)와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높이가 50장이었고, 연도(輦道)가 서로 연결되었다.

4 대중대부(大中大夫) 공손경(公孫卿), 호수(壺遂),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 등이 아뢰었다: "역법(曆法)과 기년(紀年)이 이미 문란해져 폐기되었으니, 마땅히 정삭(正朔)을 고쳐 정해야 합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예관(兒寬)과 박사(博士) 사(賜) 등과 함께 논의하게 하였고, 모두 하정(夏正)을 써야 한다고 여겼다. 여름, 5월에 조서를 내려 공손경, 호수, 사마천 등이 함께 한나라의 《태초력(太初曆)》을 만들게 하고, 정월을 일년의 첫 달로 삼고, 색깔은 황색을 숭상하며, 숫자는 오(五)를 쓰고, 관명(官名)을 정하며, 음률(音律)을 조화롭게 하고, 종묘와 백관의 예의(禮儀)를 제정하여 전장(典章)과 상법(常法)으로 삼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5 흉노(匈奴)의 아선우(兒單于)가 살육과 정벌을 좋아하자, 나라 안이 편안하지 않았고, 또 천재(天災)가 있어 가축이 많이 죽었다. 좌대위(左大都尉)가 몰래 사람을 보내 한나라에 고하며 말했다: "제가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려 합니다. 한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만약 군사를 보내 저를 맞이하여 주신다면 즉시 행동에 옮기겠습니다." 황제가 이에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를 보내 새외(塞外)에 수항성(受降城)을 쌓아 그를 응접하게 하였다.

6 가을, 8월에 황제가 행차하여 안정군(安定郡)에 머물렀다.

7 한나라가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던 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대완(大宛)에 좋은 말이 있는데, 이사성(貳師城)에 숨겨두고 한나라 사신에게 주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장사(壯士) 차령(車令) 등을 보내 천금(千金)의 황금과 금마(金馬)를 가지고 가서 말을 바꾸기를 청하게 하였다. 대완왕이 그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나라는 우리와 매우 멀고, 염수(鹽水)에서는 여러 번 패망이 있었으며, 그 북쪽으로 가면 호구(胡寇)가 있고, 남쪽으로 가면 수초(水草)가 부족하며, 또 길을 따라 성읍(城邑)이 없어 양식이 부족한 자가 많습니다. 한나라 사신 수백 명이 한 번에 오지만, 항상 양식이 부족하여 죽는 자가 절반을 넘으니, 이렇게 어찌 대군(大軍)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성의 말은 대완의 보마(寶馬)입니다." 이에 한나라 사신에게 주지 않았다. 한나라 사신이 노하여 거친 말을 하고 금마를 깨뜨리고 떠났다. 대완의 귀족들이 노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사신이 우리를 너무 얕보았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 한나라 사신을 떠나보내면서, 그 동쪽의 욱성왕(郁成王)에게 명령하여 요격하여 공격하게 하여 한나라 사신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천자가 크게 노하였다. 일찍이 대완에 사신으로 갔던 요정한(姚定漢) 등이 말하기를: "대완의 병력은 약하니, 진실로 한나라 군사가 3천 명을 넘지 않고 강노(強弩)로 그들을 쏘면 모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일찍이 탁야후(浞野侯)가 7백 기병을 이끌고 누란왕(樓蘭王)을 사로잡은 것을 보고, 요정한 등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총희(寵姬) 이씨(李氏)의 친족을 후(侯)로 봉하고자 하여, 이부인(李夫人)의 오빠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고, 속국(屬國)의 6천 기병과 군국(郡國)의 불량 소년(不良少年) 수만 명을 징발하여 가서 대완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사성(貳師城)에 이르러 좋은 말을 빼앗을 것을 기대하여, 이에 호를 이사장군이라 하였다. 조시성(趙始成)은 군정(軍正)이 되고, 원호후(原浩侯) 왕회(王恢)는 향도(嚮導)가 되고, 이타(李哆)는 교위(校尉)가 되어 군무(軍務)를 관장하였다.

신(臣) 사마광(司馬光)이 말한다: 무제(武帝)가 총희 이씨의 친족을 후로 봉하고자 하여 이광리에게 군사를 주어 대완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그의 뜻은 공(功)이 없으면 후에 봉할 수 없다고 여겨 고제(高帝)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 한 것이다. 군사(軍事)는 국가의 큰 일이며,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생사(生死)가 여기에 달려 있다. 만약 어질고 어리석은 자를 가리지 않고 병권(兵權)을 주고, 요행히 작은 공을 얻어 이로써 명분을 삼아 사사로이 총애하는 자를 편애한다면, 공이 없이 후에 봉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무제가 나라를 봉하는 일에 대해서는 식견이 있었으나, 장수를 임명하는 일에 대해서는 식견이 없었으니, 그가 선제(先帝)의 약속을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신은 잘못이라고 여긴다.

8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가 간사하고 이로운 일을 범한 죄로 마땅히 멸족(滅族)되어야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의 두 동생과 두 집안의 친가(親家)도 각각 다른 죄로 인해 멸족되었다. 광록훈(光祿勳) 서자위(徐自為)가 말하기를: "슬프도다! 옛날에 삼족(三族)의 형벌이 있었는데, 왕온서의 죄는 오히려 오족(五族)을 동시에 멸하게 하였구나!"라고 하였다.

9 관동(關東) 지역에 메뚜기가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돈황(敦煌)까지 날아갔다.

태초(太初) 2년(무인, 기원전 103년)

1 봄, 정월 무신일(戊申日)에 목구후(牧丘恬侯) 석경(石慶)이 세상을 떠났다.

2 윤월(閏月) 정축일(丁丑日)에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를 승상(丞相)으로 삼고 갈역후(葛繹侯)에 봉하였다. 당시 조정에는 일이 많아 대신(大臣)들을 감독하고 책망하였는데, 공손홍(公孫弘) 이후로 승상이 잇달아 죄에 걸려 죽었다. 석경은 비록 신중하여 좋은 죽음을 맞았으나, 여러 번 질책을 받았다. 공손하가 불려가 승상이 되었을 때, 인수(印綬)를 받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가 이에 일어나 떠나가자, 공손하는 어쩔 수 없이 절하고 받았다.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이로부터 위태로워졌다!"라고 하였다.

3 3월에 황제가 하동(河東)으로 순행하여 후토(后土)에 제사 지냈다.

4 여름, 5월에 관리와 백성의 말을 등록하여 전차(戰車)와 기마(騎馬)를 보충하였다.

5 가을에 메뚜기가 재앙을 일으켰다.

6 이사장군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염수를 지난 후, 길가의 작은 나라들이 각자 성을 지키며 방어하고 양식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함락시킬 수 있으면 양식을 얻었고, 함락시키지 못하면 며칠 만에 떠났다. 욱성(郁成)에 도착했을 때, 도착한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고 모두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욱성을 공격하자, 욱성군이 한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켜 사상자가 많았다. 이사장군이 이타, 조시성 등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욱성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함락시키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그들의 왕도(王都)에 이르러서야!"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돈황에 도착했을 때, 병사는 10분의 1이나 2분의 1에 불과했다. 사자를 보내 상소하기를: "길이 멀고 양식이 부족하며, 병사들은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굶주림을 두려워하며, 병력이 너무 적어 대완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잠시 군사를 물리고, 많은 군대를 보낸 후에 다시 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옥문관(玉門關)에서 막으며 말하기를: "군사 중에 감히 입관(入關)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목을 베라!"라고 하였다. 이사장군이 두려워하여 이에 돈황에 머물렀다.

7 황제는 또 수항성이 흉노에서 너무 멀다고 여겨, 준계장군(浚稽將軍) 조파노(趙破奴)에게 2만여 기병을 이끌고 삭방(朔方) 서북쪽에서 새외(塞外)로 2천여 리를 나가게 하여, 준계산(浚稽山)에 도착한 후 돌아오기를 기대하였다. 탁야후가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좌대위가 일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선우가 그를 죽이고, 좌방병(左方兵)을 보내 탁야후를 공격하게 하였다. 탁야후가 행군하면서 포로를 잡아 수천 명을 얻었고, 돌아올 때 수항성까지 4백 리 남짓 떨어진 곳에서 흉노의 8만 기병이 그들을 포위하였다. 탁야후가 밤에 스스로 나가 물을 찾다가 흉노가 은밀히 그를 사로잡았고, 이에 그의 군대를 급히 공격하였다. 군중의 관리들이 주장(主將)을 잃고 주살(誅殺)될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돌아가자고 권하지 않아 군대가 마침내 흉노에서 전멸하였다.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여 이에 기병을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변경을 침략한 후 떠났다.

8 겨울, 12월에 예관이 세상을 떠났다.

태초 3년(기묘, 기원전 102년)

1 봄, 정월에 교동태수(膠東太守) 연광(延廣)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2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하여 해변에 이르러 신선(神仙) 무리를 살폈으나 모두 효험이 없자, 사관(祠官)에게 동태산(東泰山)에 제사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여름, 4월에 돌아와 태산(泰山)에서 봉토(封土)를 수리하고, 석려(石閭)에서 선(禪) 제사를 지냈다.

3 흉노의 아선우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어리자, 흉노가 그의 숙부 우현왕(右賢王) 후리호(呴犁湖)를 선우로 세웠다.

4 황제가 광록훈 서자위를 보내 오원새(五原塞)를 나가 수백 리, 먼 것은 천여 리까지 가서 성(城), 장(障), 열정(列亭)을 쌓게 하고, 서북쪽으로 노구(廬朐)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유격장군(游擊將軍) 한설(韓說)과 장평후(長平侯) 위항(衛伉)을 보내 그 곁에 주둔하게 하고, 강노도위(強弩都尉) 노박덕(路博德)을 보내 거연택(居延澤) 위에 성을 쌓게 하였다. 가을에 흉노가 크게 정양(定襄)과 운중(雲中)을 침입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여러 명의 이천석(二千石) 관리들을 격파한 후 떠나면서 길을 따라 광록훈 서자위가 쌓은 성, 열정, 장을 파괴하였다. 또 우현왕을 보내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을 침입하여 수천 명을 약탈하였다. 마침 군정(軍正) 임문(任文)이 공격하여 구원하자, 약탈당한 사람들을 모두 되찾은 후 떠났다.

5 이 해에 수양후(睢陽侯) 장창(張昌)이 태상(太常)으로 재직할 때 제사(祭祀)에 예(禮)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봉국(封國)이 폐지되었다.

당초, 고조가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봉한 자가 모두 백사십삼 명이었다. 당시는 전란 직후여서, 큰 성과 이름난 도시의 백성들은 유랑하여 흩어졌고, 호구를 조사할 수 있는 자는 겨우 십분의 이삼에 불과했다. 큰 제후는 만 호를 넘지 않았고, 작은 제후는 오륙백 호였다. 봉작(封爵)의 맹세 글에는 이르기를, "비록 황하가 옷끈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 없어져도,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여 자손에게 전해지리라." 하였다. 단서(丹書)로 신약을 밝히고, 백마(白馬)를 잡은 맹세로 그 뜻을 무겁게 하였다. 고후(高后) 때에 이르러, 모든 열후의 차례를 정리하여 종묘(宗廟)에 보관하고, 부본(副本)은 유사(有司)에게 두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사오 대 사이에 유민(流民)이 이미 돌아왔고 호구도 증가하여, 열후(列侯)의 큰 자는 삼사만 호에 이르렀고, 작은 나라도 스스로 갑절로 늘어났으며, 재물 또한 그러하였다. 자손들은 교만하고 방탕하여, 법률과 금령을 범하는 일이 많아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작위에 있는 후작은 오직 넷이었고, 법망도 조금 엄격해졌다.

6. 한나라가 이미 작야후(浞野侯)의 군대를 잃었으므로, 공경들 중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대완(大宛)에 대한 정벌을 중지하고, 전력으로 흉노(匈奴)를 공격하기를 바랐다. 천자(天子)는 이미 군대를 내어 대완을 토벌하였는데, 대완은 작은 나라임에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대하(大夏) 등이 점차 한나라를 가볍게 여길 것이며, 대완의 좋은 말은 끊어져 오지 않을 것이고, 오손(烏孫)과 윤대(輪台)도 한나라 사신을 쉽게 곤란하게 하여, 외국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므로, 이에 대완 토벌이 특히 불편하다고 말한 등광(鄧光) 무리를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죄수들을 사면하고, 불량 소년과 변경 기병을 징발하여, 일 년여 만에 돈황(敦煌)에서 출발한 자가 육만 명이었고, 스스로 식량을 가지고 따라간 자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소는 십만 마리, 말은 삼만 필, 나귀와 낙타는 수만 필이었으며, 식량과 병기, 활과 쇠뇌는 매우 풍족하게 준비되었다. 천하가 소란해져, 이리저리 대완 토벌의 오십여 교위(校尉)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였다. 대완 성에는 우물이 없어, 성 밖의 하천에서 물을 길었으므로, 이에 수공(水工)을 보내 성 아래의 물길을 바꾸게 하고, 땅을 비워 지하도를 파서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수자리 가는 갑졸(甲卒) 십팔만 명을 주천(酒泉)과 장액(張掖) 이북에 증발하여, 거연(居延)과 휴도(休屠)에 둔병(屯兵)을 설치하여 주천을 보호하게 하고, 천하의 죄 있는 관리, 도망한 자, 그리고 서서(贅婿), 상인, 과거에 시적(市籍)이 있던 자, 부모와 조부모가 시적이 있던 자 등 일곱 부류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군대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건량(乾糧)을 운반하여 이사장군(貳師將軍)에게 공급하게 하고, 수레와 인력을 나르는 일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말을 아는 두 사람을 집마교위(執馬校尉)와 구마교위(驅馬校尉)로 임명하여, 대완을 함락시킨 후 좋은 말을 가려 뽑을 준비를 하였다.

이에 이사장군이 나중에 다시 출발하였는데, 군대가 많아서 지나는 곳마다 작은 나라들이 맞이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식량을 내어 군대에 공급하였다. 윤대(輪台)에 도착하니, 윤대가 항복하지 않았다. 수일 동안 공격하여, 윤대를 도륙(屠戮)하였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평안히 나아가 대완성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한 군사는 삼만 명이었다. 대완군이 맞서 싸웠으나, 한군이 화살로 쏘아 그들을 패배시키니, 대완군은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성을 지키며 방어하였다. 이사장군이 울성성(郁成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머물면 대완이 더욱 변괴와 속임수를 일으킬까 걱정하여, 먼저 대완에 도착하여 그들의 수원(水源)을 끊고 물길을 바꾸었다. 그러자 대완은 본래 이미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성을 포위하고 사십여 일 동안 공격하였다. 대완의 귀족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왕 무과(毋寡)가 좋은 말을 감추고 한나라 사신을 죽였으니, 지금 만약 왕을 죽이고 좋은 말을 내준다면, 한군이 응당 포위를 풀 것이다. 만약 풀지 않는다면, 다시 힘껏 싸우다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 대완의 귀족들이 모두 옳다고 여겨, 함께 왕을 죽였다. 그들의 외성(外城)이 함락되어, 대완의 용장(勇將) 전마(煎靡)를 사로잡았다. 대완인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왕 무과의 머리를 들고 사람을 보내 이사장군을 만나 약속하여 말하기를, "한군이 우리를 공격하지 마시오. 우리는 좋은 말을 모두 내어 그대들이 마음대로 고르게 하고, 한군에게 식량도 공급하겠소. 만약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좋은 말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며, 강거(康居)의 구원병이 또 올 터이니, 도착하면 우리는 성 안에 있고 강거는 성 밖에 있어, 한군과 싸울 것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어찌 하겠소?" 하였다. 당시 강거의 정찰병은 한군이 아직도 강성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장군은 대완 성 안에 최근에 한인(漢人)이 들어와 있어 우물을 파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성 안의 식량도 아직 많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하기를 "우리가 온 것은 원흉(元凶) 무과를 주살하려 한 것인데, 무과의 머리가 이미 보내졌다. 만약 이렇게 하고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로 하여금 굳게 지키게 할 것이며, 강거는 한군이 지칠 때를 기다려 대완을 구원하러 올 것이니, 반드시 한군을 패배시킬 것이다." 하여, 마침내 대완의 약속을 허락하였다. 대완이 이에 그들의 말을 내어, 한군이 스스로 고르게 하고, 많은 식량을 내어 한군에게 공급하였다. 한군은 좋은 말 수십 필을 가려 뽑고, 중등 이하의 수말과 암말 삼천여 필을 취하였으며, 대완의 귀족 중 이전에 한나라에 우호적이었던 이름이 매채(昧蔡)인 자를 세워 대완왕으로 삼고, 그들과 화약(和約)을 맺은 후 군대를 철수하였다.

당초, 이사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돈황(敦煌) 서쪽에서 출발하여, 여러 길의 군대로 나누어 각각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를 따라갔다. 교위(校尉) 왕신생(王申生)이 천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로 울성성(郁成城)에 도착하였는데, 울성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들을 섬멸하였고, 오직 몇 사람만이 도망쳐 이사장군에게로 왔다. 이사장군이 수속도위(搜粟都尉) 상관걸(上官桀)에게 명하여 울성성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울성왕은 강거(康居)로 도망쳤고, 상관걸이 강거까지 추격하였다. 강거왕은 한군이 이미 대완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울성왕을 상관걸에게 넘겨주었고, 상관걸은 네 명의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울성왕을 결박하여 지키게 하고, 이사장군에게 압송하게 하였다. 상규(上邽) 기사 조제(趙弟)는 울성왕이 도망칠까 걱정하여,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고, 그 후에 이사장군을 따라잡았다.

태초(太初) 4년(경진, 기원전 101년)

1. 봄, 이사장군 이광리가 서울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이사장군이 지나간 작은 나라들은 대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자제들을 시켜 한군을 따라 조공(朝貢)하며 천자를 알현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인질로 삼게 하였다. 군대가 돌아올 때, 천여 필의 말을 가져왔다. 나중에 출병할 때, 군대에는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고, 전사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으나, 장수와 관리들이 재물을 탐하여 병사들을 아끼지 않고, 침탈하고 깎아내어, 따라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 천자는 이것이 만리 원정(萬里遠征)이었기 때문에, 그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이에 조서를 내려 이광리를 해서후(海西侯)로 봉하고, 조제를 신치후(新畤侯)로 봉하며, 상관걸을 소부(少府)로 임명하고, 군중의 관리 중 세 사람이 구경(九卿)이 되었으며, 백여 명이 제후상(諸侯相), 군수(郡守), 이천석(二千石) 관직이 되었고, 천여 명이 천석(千石) 이하의 관직이 되었다. 스스로 원하여 출정한 자들은, 얻은 관직이 그들의 기대를 넘어섰고, 죄를 지어 출정하게 된 자들은, 모두 그들의 노역(勞役)을 면제해 주고, 병사들에게 각각 사만 전(四萬錢)을 상으로 내렸다.

흉노(匈奴)는 이사장군이 대완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요격하려 하였으나, 이사장군의 병력이 강성하여 감히 막지 못하고, 이에 기병을 보내 누란국(樓蘭國)을 통해 한나라 사신 중 뒤에 지나는 자들을 틈타 요격하여, 한나라와 서역(西域)의 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당시 한나라 군정(軍正) 임문(任文)이 병사를 이끌고 옥문관(玉門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포로를 잡아 그 상황을 알고 보고하였다. 천자가 조서를 내려 임문이 편리한 길로 병사를 이끌고 누란왕을 체포하여, 압송하여 조정에서 신문하게 하였다. 누란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양쪽에 붙지 않으면 스스로 보존할 수 없습니다." 천자가 그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여겨, 그를 놓아 나라로 돌려보내고, 또한 그로 하여금 흉노의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흉노는 이로부터 다시는 누란을 가까이하고 믿지 않았다.

대완이 함락된 이후로, 서역 여러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한나라가 서역에 파견하는 사신들은 더욱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돈황(敦煌) 서쪽에서 염택(鹽澤)에 이르기까지, 길 따라 정(亭)과 장(障)을 세웠으며, 윤대(輪台)와 여리(渠犁)에는 수백 명의 둔전(屯田) 병사가 있었고, 사자(使者)와 교위(校尉)를 두어 통솔하고 감독하게 하여, 외국에 나가는 사신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게 하였다.

일 년여가 지난 후, 대완의 귀족들은 매채(昧蔡)가 아첨을 잘하여 우리나라가 도륙을 당하게 하였다고 여겨, 이에 함께 매채를 죽이고, 무과(毋寡)의 동생 선봉(蟬封)을 세워 대완왕으로 삼고, 그의 아들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한나라는 이에 사신을 보내 재물을 주어 상을 내리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선봉은 한나라와 약속하여, 해마다 천마(天馬) 두 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2. 가을, 명광궁(明光宮)을 세웠다.

3. 겨울, 황상(皇上)이 회중궁(回中宮)으로 순행(巡幸)하였다.

4 흉노의 후리호 선우가去世하자, 흉노는 그의 동생인 좌대도위 저제후를 세워 선우로 삼았다. 천자는 대완 정벌의 위세를 이용해 흉노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여, 조서를 내렸다: "고황제는 나에게 평성에서 포위된 근심을 남겼고, 고후 때에는 선우의 서신이 지극히 패역했다.當初 제양공이 구세 선조를 위해 복수하자, 《춘추》가 이를 크게 칭송했다." 저제후 선우가 막 즉위하여 한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하며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일 뿐이니, 어찌 감히 한 천자와 비교하겠는가! 한 천자는 나의 어른이다." 그리고는 한나라에 투항하지 않았던 사자 노충국 등을 모두 돌려보내고,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한 원년(신사, 기원전 100년)

1 봄, 정월에 황상이 감천궁에 행차하여 태치에서 제사를 지냈다. 3월에 하동군에 행차하여 후토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2 황상이 흉노 선우의 선의를 칭찬하여, 중랑장 소무를 보내 한나라에 억류된 흉노 사자를 돌려보내고, 아울러 선우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그의 호의에 보답하게 했다. 소무는 부중랑장 장승과 임시 임명된 관리 상혜 등과 함께 갔다. 흉노에 도착하여 선물을 선우에게 내놓았다. 선우는 더욱 오만해져, 한나라가 기대했던 바와 달랐다.

마침 고왕과 장수인 우상, 그리고 위율이 이끄는 흉노에 투항한 자들이 은밀히 모의하여 선우의 모친인 연지를 납치해 한나라에 귀부하려 했다. 위율의 아버지는 본래 장수 지역의 호인이었으며, 위율은 협률도위 이연년과 관계가 좋아 이연년이 그를 흉노에 사자로 추천했다.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연년 일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 흉노에 투항했다. 선우가 그를 좋아하여 국사를 논의하고 정령왕으로 봉했다. 우상은 한나라에 있을 때 항상 부사 장승과 친밀하여, 은밀히 장승을 방문해 말했다: "한 천자가 위율을 매우 원망한다고 들었소. 내가 한나라를 위해 활과 쇠뇌를 숨겨 그를 쏘아 죽일 수 있소. 나의 어머니와 동생이 한나라에 있으니, 상을 받길 바라오." 장승이 이를 승낙하고 그에게 재물을 주었다. 한 달여 후, 선우가 사냥을 나가고 연지와 자제들만 왕정에 남았을 때, 우상 등 70여 명이 거사하려 했으나, 그중 한 명이 밤에 도망쳐 고발했다. 선우의 자제들이 병사를 보내 그들과 싸워 고왕 등은 모두 전사하고 우상은 생포되었다.

선우가 위율을 시켜 이 일을 심문하게 했다. 장승이 이 소식을 듣고, 앞서 우상과 한 말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소무에게 알렸다. 소무가 말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에게도 미칠 것이오. 모욕을 당한 후에 죽는 것은 더욱 나라를 저버리는 일이오." 자살하려 하자 장승과 상혜가 함께 말렸다. 우상이 과연 장승을 지목했다. 선우가 크게 노하여 귀족들을 소집해 의논하여 한나라 사자를 죽이려 했다. 좌이질자(左伊秩訾)가 말했다: "만약 선우를 해치려 했다면, 무슨 더 중한 형벌이 있겠소? 그들을 모두 항복시키는 것이 마땅하오." 선우가 위율을 시켜 소무를 불러 심문했다. 소무가 상혜 등에게 말했다: "절개를 굽히고 명예를 더럽히면서, 살아 있다 해도 무슨 낯으로 한나라에 돌아가겠소!" 비수를 빼어 자신을 찔렀다. 위율이 크게 놀라 직접 소무를 붙잡고 급히 의사를 불러, 땅에 구덩이를 파고 약한 불을 피운 뒤 소무를 엎드려 놓고 등을 밟아 어혈을 빼냈다. 소무가 숨이 끊어졌다가 반나절 만에 다시 호흡을 되찾았다. 상혜 등이 울며 수레에 태워 영장으로 옮겼다. 선우가 소무의 절개를 칭송하여,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문안하게 하고 장승은 가두었다.

소무의 상처가 차차 나으매, 선우가 사자를 보내 소무를 타일러 항복시키려 했고, 마침 우상을 심문할 때 이 기회를 이용해 소무를 항복시키려 했다. 칼로 우상을 참수한 후, 위율이 말했다: "한나라 사자 장승이 선우의 측근을 죽이려 했으니,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선우가 항복하는 자를 모집하여 죄를 면해 주기로 했다." 칼을 들어 장승을 찌르려 하자 장승이 항복을 청했다. 위율이 소무에게 말했다: "부사에게 죄가 있으면 정사도 연좌되어야 하오." 소무가 말했다: "나는 본래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의 친척도 아니니, 무슨 이유로 연좌되겠소!" 위율이 다시 칼을 들어 소무에게 겨누었으나 소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위율이 말했다: "소군, 나 위율은 이전에 한나라를 저버리고 흉노에 귀순하여, 다행히 큰 은혜를 입어 왕호를 받고 수만의 부중과 산과 들을 가득 채운 가축을 누리고 있소! 소군이 오늘 항복하면 내일도 이렇게 될 것이오. 헛되이 몸으로 풀밭을 적셔 봐야 누가 알겠소!" 소무가 대답하지 않았다. 위율이 말했다: "네가 나를 통해 항복하면, 나는 너와 형제를 맺겠다. 오늘 내 계책을 따르지 않으면, 후에 다시 나를 보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소!" 소무가 위율을 꾸짖어 말했다: "네가 신하로서 은의와 의리를 돌보지 않고, 주인을 배반하고 친족을 버려 오랑캐 땅에서 투항한 포로가 되었으니, 내가 왜 너를 보겠느냐! 더구나 선우가 너를 믿어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게 했는데, 너는 공평하게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두 나라 군주를 다투게 하여 화패를 구경하려 한다. 남월이 한나라 사자를 죽여 멸망당해 아홉 군이 되었고, 대완왕이 한나라 사자를 죽여 목이 궁문 북쪽에 걸렸으며, 조선이 한나라 사자를 죽여 즉시 멸망당했다. 오직 흉누만이 아직 그러지 않았다. 너는 내가 항복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게 하려 하니, 흉누의 재앙이 나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위율이 소무가 끝내 협박에 굴하지 않을 것을 알고 선우에게 보고하자, 선우는 더욱 그를 항복시키려 했다.于是 소무를 큰 땅굴에 가두고 음식을 끊었다. 하늘에 큰 눈이 내리자 소무는 누워 눈을 씹고 털과 함께 삼켜 며칠 동안 죽지 않았다. 흉노인들은 그를 신으로 여겨, 북해(바이칼 호) 변 인적 없는 곳으로 옮겨 숫양을 기르게 하며 말했다: "숫양이 젖을 내야 돌아갈 수 있다." 그의 속관 상혜 등은 각각 격리하여 다른 곳에 배치했다.

3 하늘에 흰 털이 떨어졌다.

4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5 5월에 대사면을 내렸다.

6 유배된 사람들을 징발하여 오원을 지키게 했다.

7 작야후 조파노가 흉노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8 이 해에 제남태수 왕경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천한 2년(임오, 기원전 99년)

1 봄에 황상이 동해군에 행차했다. 돌아오는 길에 회중궁에 행차했다.

2 여름, 5월에 이사장군 이광리를 보내 3만 기병을 이끌고 주천에서 출발해 천산에서 우현왕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의 흉노를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후 돌아왔다. 흉노가 대규모로 이사장군을 포위하여 한나라 군사가 며칠 동안 식량이 떨어져 사상자가 많았다. 가사마 농서 사람 조충국이 1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포위를 돌파해 적진을 함락시키자, 이사장군이 병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 포위를 풀 수 있었다. 한나라 군사는 10분의 6~7이 죽었고, 조충국은 몸에 20여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이사장군이 상황을 보고하자, 조서를 내려 조충국을 황상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여 친히 접견하고 그의 상처를 살펴본 후 감탄하며 칭찬하고 중랑으로 임명했다.

한나라는 또 인우장군 공손오를 보내 서하에서 출발해 강노도위 노박덕과 탁도산에서 합류하게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당초 이광의 손자 이릉은 시중으로 있으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무제는 그가 이광의 풍모가 있다고 여겨 기도위로 임명하고, 단양과 초 땅의 오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주천과 장액 일대에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후 이광리가 흉노를 공격할 때, 무제는 이릉에게 조서를 내려 이광리의 군수 물자를 관리하게 하려 했다. 이릉은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청하기를 “제가 거느리는 변경 수비 병사들은 모두 형초 지방의 용사와 기재, 검객들로, 힘은 범을 잡을 만하고 활은 백발백중이오니, 원하옵건대 저 혼자 한 부대를 이끌고 난우산 남쪽으로 나아가 선우의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이 오로지 이광리의 군대만 공격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무제가 말하길 “너는 남의 부하가 되기를 싫어하는구나! 내가 징발한 군사는 많으나 너에게 줄 기병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릉이 대답하길 “기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치고자, 오천 보병을 이끌고 선우의 왕정으로 곧장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제는 그의 기개를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노백덕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중간에서 이릉의 군대를 맞이하게 하였다. 노백덕 또한 이릉의 후원자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며 상주하기를 “지금은 가을이라 흉노의 말이 살이 쪄 싸울 수 없사오니, 이릉을 봄까지 머물게 하여 함께 출병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이 후회하며 출병하기 싫어하여 노백덕을 시켜 상소를 올리게 한 것이라 의심하고, 곧 조서를 내려 노백덕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서하로 가서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또 이릉에게 조서를 내려 9월에 출발하여 차로장에서 출새해 동준계산 남쪽 용늪수 일대까지 가서 주변을 정찰하며 적정을 살피고, 별다른 소득이 없으면 돌아와 수항성에서 병사들을 쉬게 하였다. 이에 이릉은 그의 오천 보병을 이끌고 거연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30일을 행군해 준계산에 이르러 주둔하며, 그 길에 지나온 산천의 지형을 그림으로 그리고 부하 기병 진보락을 보내 조정에 보고하게 하였다. 진보락이 불려가 보고하길 이릉이 병사를 잘 다스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목숨을 바칠 뜻이 있다고 하니, 무제는 매우 기뻐하며 진보락을 낭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릉이 준계산에 이르렀을 때, 선우의 군대와 만났는데 흉노 기병이 약 3만 명이나 되어 이릉의 군대를 포위했다. 이릉의 군대는 두 산 사이에 주둔하며 수레로 진영을 삼았다. 이릉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 진을 펴니, 앞줄 병사는 창과 방패를 잡고 뒷줄 병사는 활과 쇠뇌를 들었다. 흉노인들은 한나라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곧장 진영으로 돌진했다. 이릉이 군대를 이끌어 맞서 싸우며 천 개의 쇠뇌를 일제히 쏘자, 흉노 병사들은 시위 소리에 맞아 쓰러졌다. 흉노 군대는 물러나 산 위로 올라갔고, 한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선우가 크게 놀라, 좌우 팔만여 기병을 불러 모아 이릉을 공격했다. 이릉은 싸우며 물러나 남쪽으로 며칠 동안 행군하여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연속으로 싸우는 동안 병사들은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으며, 세 군데 다친 자는 수레에 실리고, 두 군데 다친 자는 수레를 몰며, 한 군데 다친 자는 여전히 무기를 들고 싸워 또 삼천여 명의 적을 죽였다. 이릉은 병사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나아가 옛 용성 길을 따라 4, 5일을 가서 큰 늪지대의 갈대밭에 이르렀는데, 흉노 군대가 바람을 타고 불을 질렀다. 이릉도 군중에 명하여 불을 질러 스스로를 구하게 했다. 남쪽으로 산 아래까지 내려가니, 선우가 남산 위에 있으면서 그의 아들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이릉을 공격하게 했다. 이릉의 군대는 숲 사이에서 걸어서 싸우며 또 수천 명을 죽이고 연속으로 쇠뇌를 쏘아 선우를 맞추니, 선우가 산 아래로 도망쳤다. 이날 포로를 잡았는데, 포로가 말하길 “선우가 말하기를 ‘이는 한나라의 정예병이니, 그들을 공격해 이길 수 없고, 그들이 밤낮으로 우리를 인도해 변경 가까이 가게 하니, 어찌 복병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당호와 군장들이 모두 ‘선우께서 친히 수만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 수천 명을 공격하면서도 그들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이후로는 변경 신하들을 부릴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한나라로 하여금 흉노를 더욱 얕보게 할 것입니다. 다시 골짜기 사이에서 힘껏 싸우면, 아직 사오십 리가 남아 있고, 평지에 이르러서도 깨뜨리지 못하면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이릉의 군대는 형세가 더욱 위급해져, 흉노 기병이 많아 하루에도 수십 차례 싸웠으며, 또 이천여 명의 흉노 병사를 죽였다. 흉노 군대는 형세가 불리해져 물러나려 하다가, 마침 이릉의 군후 관감이 교위에게 모욕을 당해 도망쳐 흉노에 항복하며 자세히 보고하기를 “이릉의 군대는 후원이 없고 화살도 거의 다 떨어졌으며, 장군의 휘하와 교尉 성안후 한연년이 각각 8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황색과 백색의 깃발을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마땅히 정예 기병을 보내 활을 쏘아 죽이면, 곧 깨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우가 관감을 얻고 매우 기뻐하며, 기병을 보내 힘을 합쳐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크게 외치길 “이릉, 한연년은 속히 항복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길을 끊고 맹렬히 이릉을 공격했다. 이릉의 군대는 골짜기에 있었고, 흉노 군대는 산 위에 있어 사방에서 쏘아대니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한나라 군대는 남쪽으로 행군하여 아직 제공산에 이르지 못했는데, 하루 만에 오십만 개의 화살이 모두 떨어져 수레를 버렸다. 병사는 아직 삼천여 명이 남았으나, 수레의 바퀴살을 잘라 손에 쥐고 무기로 삼았고, 군리들은 단도를 잡았다. 산기슭에 이르러 좁은 골짜기로 들어가니, 선우가 그들의 뒷길을 끊고 산세를 따라 돌을 던지니 병사들의 사상자가 많아 나아갈 수 없었다. 해질녘 후, 이릉은 평상복을 입고 홀로 막사를 나와 좌우를 제지하며 말하길 “나를 따르지 마라, 대장부가 홀로 가서 선우를 사로잡으리라!” 하였다. 한참 후, 이릉이 돌아와 탄식하며 말하길 “싸움에 졌으니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모든 깃발을 베고 보물과 함께 땅에 묻었다. 이릉이 탄식하며 말하길 “만약 다시 수십 개의 화살만 얻는다면, 도망칠 수 있을 터인데. 지금은 다시 싸울 무기가 없으니, 날이 밝으면 앉아서 결박당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은 각자 새와 짐승처럼 흩어져 도망쳐, 혹시라도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할 수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병사들에게 각자 이승의 마른 식량과 얼음 한 조각을 지니게 하고, 차로장에서 모여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한밤중에 북을 쳐 병사를 모으려 했으나 북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릉과 한연년이 함께 말에 올랐고, 따르는 장사는 십여 명이었으며, 흉노 기병 수천 명이 그들을 추격했는데, 한연년이 전사했다. 이릉이 말하길 “나는 얼굴이 없어 폐하를 뵈올 수 없다!” 하고는 항복했다. 병사들은 흩어져 도망쳐 변경에 도착한 자가 4백여 명이었다.

이릉이 패배한 곳은 변경에서 백여 리 떨어져 있었고, 변경에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무제는 이릉이 전사하기를 바랐으나, 후에 이릉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진보락을 꾸짖자, 진보락은 자살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릉을 탓했고, 무제는 이 일로 태사령 사마천에게 물었다. 사마천은 힘껏 이릉을 변호하며 말하길 “이릉은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선비와 사귐에 신의가 있으며, 항상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어려움을 위해 몸을 바치려 하니, 이는 그가 평소에 쌓아온 덕행으로, 국사의 풍모가 있습니다. 지금 일이 한 번 불행해지자, 자신과 처자식만을 온전히 하는 신하들이 그를 따라 그의 단점을 꾸며대니,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더구나 이릉은 5천이 채 안 되는 보병을 이끌고 깊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 수만 적군을 억누르며, 흉노 군대는 죽은 자를 구하고 다친 자를 돌볼 겨를도 없이, 활을 당길 수 있는 모든 자를 징발하여 함께 그들을 포위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릉은 천 리를 돌아다니며 싸우고 화살이 떨어져 궁지에 몰렸으나, 병사들은 빈 활을 당기고 흰 칼날을 맞서며 북쪽을 향해 다투어 적과 함께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병사들의 이와 같은 죽음을 무릅쓴 충성을 얻었으니, 비록 고대의 명장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비록 패전에 빠졌으나, 그가 무찌른 적군의 위세는 또한 천하에 드러내기에 충분합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마땅한 기회를 얻어 한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에서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는 사마천이 거짓으로 속여 이광리를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변명하려 한다고 여겨, 사마천에게 거세형을 내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무제는 이릉에게 구원군이 없었음을 후회하며 말하길 “이릉이 출새할 때, 내가 강노도위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군대를 맞이하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리 조서를 내리는 바람에, 늙은 장수로 하여금 간사한 마음을 품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사자를 보내 이릉의 군대에서 도망쳐 나온 병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무제(武帝)는 법제(法制)를 사용하여 신하들을 통제하고, 혹독한 관리(酷吏)를 높이고 중용하기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군(郡)과 국(國)의 이천석(二千石) 관원들이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 대부분 잔혹하고 포악해졌으며, 관리와 백성들은 더욱 법령을 가볍게 여기고 범법하였다. 동방(東方)의 도적들은 점점 더 많아져, 큰 무리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성읍을 공격하여 관청의 병기고를 빼앗고, 사형수들을 석방시키며, 군태수(郡太守)와 도위(都尉)를 결박하여 능욕하고, 이천석 관원들을 살해하였다. 작은 무리들은 수백 명 단위로 고을과 마을을 약탈하였으니, 그 수를 셀 수 없을 지경이었고, 도로가 이로 인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제는 처음에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승상장사(丞相長史)를 보내 이를 규찰하게 하였으나 금지할 수 없었다. 이에 광록대부(光祿大夫) 범곤(范昆)과 전 구경(九卿) 장덕(張德) 등에게 수의(繡衣)를 입히고, 부절(符節)과 호부(虎符)를 지니게 하여 군대를 발동시켜 포위 섬멸하게 하였다. 큰 무리의 목을 베는 것은 때로 일만여 명에 달했으며, 도적과 결탁하여 음식을 제공하고 연좌(連坐)되어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들을 법에 따라 주살하였는데, 각 군에서 심한 경우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우두머리들을 대략 잡을 수 있었지만, 흩어졌다가 도망쳐 다시 모여 산천의 험함을 믿고 의지하는 도적들은 왕왕 무리를 이루었고, 관청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심명률(沈命法)》을 제정하여 규정하기를 “도적이 일어났는데 이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한 후에 체포한 수가 규정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이천석 관원 이하에서부터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주관하는 관원은 모두 사형에 처한다.”라고 하였다. 그 후, 하급 관리들은 사형을 당할까 두려워 비록 도적이 있어도 감히 보고하지 못했으며, 잡히지 않을까 염려하여 고과(考課)에 불합격해 상급 관청에까지 누를 끼칠까 두려워했고, 상급 관청에서도 그들에게 보고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도적은 더욱 많아졌으며, 위아래로 서로 숨기고, 공문서를 사용하여 법망을 피해갔다.

이때 폭승지(暴勝之)가 직지사자(直指使者)가 되어 주살한 이천석 이하 관원이 특히 많았으며, 위세가 주군(州郡)을 진동시켰다. 그가 발해군(勃海郡)에 이르러, 군 사람인 준불의(雋不疑)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서 만나보았다. 준불의는 용모가 장엄하고 의관이 매우 위엄 있어, 폭승지는 신을 질질 끌며 일어나 맞이하였고, 당(堂)에 들어와 자리 잡은 후, 준불의가 자리(席)를 누르며 말했다. “저는 해변에 은거하며 오래도록 폭공자(暴公子)의 위대한 명성을 들었사오나, 이제야 다행히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저 관직에 있는 사람은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너무 부드러우면 폐기되니, 위엄을 베푼 뒤에 은혜를 베풀어야, 이로써 공훈을 세우고 이름을 후세에 떨치며 영원히 녹봉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폭승지는 그의 경계를 깊이 받아들였다. 이윽고 조정으로 돌아온 후 그를 추천하였고, 무제가 불러보고 준불의를 청주자사(青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제남(濟南) 사람 왕하(王賀) 또한 수의어사(繡衣御史)가 되어 위군(魏郡)의 많은 도적들을 추격하였으나, 그가 너그럽게 놓아준 경우가 많았고, 사명을 받들어 직무에 부적합하다 하여 면관(免官)되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 천 명을 살리면 그 자손이 봉해진다 하니, 내가 살린 사람은 만여 명이니, 후손이 아마도 번성할 것이다!”

이 해에, 무제는 항복한 흉노 장수 개왕(介王) 성면(成娩)을 개릉후(開陵侯)로 삼아 누란국(樓蘭國) 군대를 거느리고 차사(車師)를 공격하게 하였다. 흉노는 우현왕(右賢王)이 수만 기병을 거느리고 차사를 구원하게 하였고, 한군(漢軍)은 싸움에 불리하여 물러나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