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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이십육

제 26 편

자치통감 제210권

권제이백십 【당기이십육】 경술년(710년) 8월부터 계해년(723년)까지, 총 3년여 동안의 기록이다.

예종현진대성대흥효황제 하 경운 원년(경술, 710년)

8월, 경인일에 이중복의 저택으로 가서 조사하였다. 이중복이 갑자기 도착하자, 현관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나가 유수를 보고하였다. 여러 관료들은 모두 도망쳐 숨었고, 오직 낙주장사 최일지만이 무리를 이끌고 그를 토벌하였다. 유대시어사 이옹이 천진교에서 이중복을 만났는데, 따르는 자가 이미 수백 명이었다. 이옹은 말을 달려 둔영(屯營)에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초왕(이중복)이 선제에게 죄를 얻었는데, 지금 까닭 없이 동도(東都)에 들어왔으니, 이는 반드시 난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공을 세워 부귀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황성사(皇城使)에게 각 성문을 닫도록 알렸다. 이중복이 먼저 좌우 둔영으로 달려갔으나, 영중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에 돌아서 좌掖門으로 달려가 유수의 병력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성문이 닫힌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불을 질러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다. 불이 붙기도 전에 좌둔영의 군사들이 나와 그를 압박하자, 이중복은 곤궁해져 말을 타고 상동문(上東門)으로 달려나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었다. 다음 날, 유수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내어 수색하자, 이중복은 조거(漕渠)에 몸을 던져 익사하였다. 최일지는 최일용의 종형으로, 공으로 인해 동도유수에 임명되었다.

정음은 용모가 추하고 수염이 많았는데, 일이 실패한 후 상투를 틀고 여자 옷을 입어 수레 속에 숨었다. 붙잡힌 후 심문을 받을 때 넓적다리가 떨려 대답하지 못하였다. 장령균은 태연자약하게 정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실패한 것이 당연하다!" 두 사람 모두 동도 시장에서 참수되었다. 처음에 정음은 내준신에게 의탁하여 등용되었고, 내준신이 죽자 장역지에게 의탁하였으며, 장역지가 죽자 위씨에게 의탁하였다. 위씨가 실패하자 또 초왕 이중복에게 의탁하였고, 결국 모반으로 인해 족주(族誅)를 당하였다. 엄선사는 사형을 면하고 정주(靜州)로 유배되었다.

만기(萬騎)는 제위(諸韋)를 토벌한 공을 믿고 대부분 잔학하고 포악하여, 장안城中 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러워하였다. 조서를 내려 모두 외임관으로 임명하였다. 또 호노(戶奴)를 만기로 충당하는 것을 중지하고, 따로 비기(飛騎)를 설치하여 좌우우림군에 예속시켰다.

요원지, 송경 및 어사대부 필구가 함께 상주하였다. "선조(先朝)의 사패관(斜封官)은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황제가 이를 따랐다. 계사일에 사패관 수천 명을 파면하였다.

형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 배담이 포주자사로 폄적되었다.

소안항을 추증하여 간의대부로 삼았다.

9월, 신미일에 태자소사로 치사한 당휴경을 삭방도대총관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갑신일에 예의사 요원지와 송경이 상주하였다. "대행황제의 신주는 태묘에 부제(祔祭)해야 하오니, 청컨대 의종(義宗)의 신주를 동도로 옮겨 별도로 사당을 세우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을미일에 천후의 존호를 추복하여 대성천후로 삼았다.

정유일에 유주진수경략절도대사 설눌을 좌무위대장군 겸 유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절도사의 명칭은 설눌로부터 시작되었다.

태평공주는 태자가 젊은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얕보았다. 나중에 그의 영명하고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다른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을 골라 황제로 세워 오래도록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여러 차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태자는 장남이 아니니 마땅히 세워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기해일에 조서를 반포하여 조정 안팎에 경고하여 뜬소문을 잠재우려 하였다. 공주는 항상 태자의 하는 일을 몰래 염탐하여 미세한 일이라도 반드시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태자 곁의 사람들도 또한 공주의 눈과 귀가 되는 경우가 많아, 태자가 깊이 불안해하였다.

고태자 이중준을 추시하여 절민(節愍)이라 하였다. 태부소경 만년 사람 위주가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벌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그 행실을 살펴 시호를 정하여 포폄을 행합니다. 고태자 이중준은 이다조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갔고, 중종이 현무문에 올라 그를 피하였으며, 태자는 말 위에 앉아 군사를 독려하며 태연자약하였습니다. 그의 부하가 배반하여 이다조 등이 죽자, 태사야 비로소 도망쳤습니다. 만약 그때 숙위군이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면, 그 화를 어찌 차마 입에 담겠습니까! 다음 날 중종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봉공관에게 말하기를 '거의 다시 너희를 보지 못할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위험하였는데, 지금 성조에서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시호를 절민이라 하니, 저는 개인적으로 의혹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하의 예법으로 종묘를 지날 때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리고, 군주의 자리를 지날 때는 반드시 빨리 걸어야 합니다. 한 성제가 태자였을 때는 감히 주행로(馳道)를 가로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중준은 궁중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황제 앞에서 말을 타고 달렸으니, 무례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만약 그가 무삼사 부자를 주살한 것을 기려 칭찬한다면, 군사를 일으켜 간신을 주살하고 군부를 높이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스스로 황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니, 이는 무삼사와 더불어 난을 다툰 것이니, 또 어찌 칭찬할 만하겠습니까! 만약 그가 위씨를 폐하려 한 것을 기려 칭찬한다면, 위씨는 그때 역적의 조짐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군신의 대의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중종의 명령 없이 그를 폐하려 한 것은 아버지를 협박하여 어머니를 폐하려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한나라의 여태자(戾太子)는 강충의 참언에 곤경에 처하여 노하여 강충을 죽였고, 비록 병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군부를 포위하여 핍박하지는 않았습니다. 싸움에 패하여 죽은 후, 그의 손자가 천자가 되어서야 개장(改葬)하였고, 그래도 시호를 여(戾)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이중준이 절민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후세의 난신적자가 이를 본보기로 삼아 패역의 근원을 열까 두렵습니다. 이는 선행을 드러내고 악행을 징계하는 방법이 아니니, 그의 시호를 고치기를 청합니다. 이다조 등은 이중준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으니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지금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것을 '설원(昭雪)'이라 일컫는 것도 또한 온당치 않습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으나, 집정대신들은 조명(制命)이 이미 반포되었으니 다시 고치지 못하고, 다만 이다조 등의 증직(贈官)을 중지하였을 뿐이다.

11월, 무신 삭일에 요원지를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을유일에 효화황제를 정릉(定陵)에 안장하고 묘호를 중종이라 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위씨가 죄가 있으니 부장(祔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고영왕비 조씨를 추시하여 화사순성황후라 하고, 그 장소를 찾았으나 아는 이가 없어 신의(神衣)로 혼을 부르고 이금(夷衾)을 덮어 정릉에 부장하였다.

임자일에 시중 위안석이 태자소보로 파면되고, 좌복야 동중서문하삼품 소괴가 소부로 파면되었다.

갑인일에 배염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처음에 배주선은 영남에서 도망쳐 돌아왔다가 다시 장형 100대를 맞고 북정(北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 이르러 상업과 협객 놀이를 하며 자주 사람을 시켜 은밀히 경성의 일을 살폈다. 무후가 유배자들을 주살할 때 배주선이 미리 알고 도망쳐 호인 지역으로 달아났다. 북정도호가 추격하여 그를 붙잡아 감금하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사자가 도착했을 때 유배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나, 배주선은 회답을 기다리는 중이라 죽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후가 유배자들을 위무하는 조서를 내려 죽지 않은 자들은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배주선은 이로 인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배염의 후손을 찾으니 오직 배주선만이 살아 있었고, 첨사승(詹事丞)에 임명되었다.

임술일에 왕동교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경오일에 허문정공 소괴가 죽었다.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소정을 공부시랑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소정이 굳이 사양하였다. 황제가 이일지를 보내 뜻을 전하게 하였으나, 이일지는 줄곧 앉아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돌아와 상주하였다. "신이 보건대, 그가 슬퍼하며 몸을 상하게 하여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너무 애통해 죽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이에 그의 상기(喪期)를 마치도록 허락하였다.

12월, 계미일에 황제가 두 딸 서성공주와 융창공주를 여도사로 출가시켜 천황(天皇)과 천후(天后)의 복을 빌게 하고, 또 경성 서쪽에 도관을 세우려 하였다. 간의대사 영원제가 상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조의 패역서인(悖逆庶人)은 딸을 사랑하여 사치하고 방종하게 하여 화를 불렀고, 신도(新都)와 의성(宜城)은 서출로서 겸손하고 양보하여 몸을 보전하였습니다. 또 불교와 도교 양가는 모두 청정을 근본으로 삼으니, 마땅히 크게 사원을 건축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양무제가 앞 세대에서 패망을 초래하였고, 선제가 뒷 세대에서 재앙을 만났으니, 은감(殷鑑)이 멀지 않습니다. 지금 두 공주가 도에 들어가니, 장차 그들을 위해 도관을 지을 터인데,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며 사방의 비난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또 선조가 가까이하던 그 승려들이 아직 좌우에 있으니, 마땅히 물리쳐 축출해야 합니다." 황제가 이를 보고 옳게 여겼다.

환관 여흥귀(閭興貴)가 사사로운 일을 장안령(長安令) 이조은(李朝隱)에게 청탁하자, 이조은이 그를 옥에 가두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이조은을 불러 위로하며 말했다: "그대가 경성(京城)의 현령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어 승천문(承天門)에 행차하여 백관과 각 주(州)의 조집사(朝集使)를 모아 놓고 이조은의 행적을 선포하고, 조서(制書)를 내려 말했다: "환관이 너그럽고 온화한 시대를 만나면 반드시 위세와 권력을 농락한다. 내가 전대의 사서(史書)를 읽을 때마다 이를 탄식하였다. 나의 뜻에 부합하는 자가 실로 이 사람이니, 한 계급을 더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고, 중상(中上) 고적(考績)과 비단 백 필을 하사하라."

임진일(壬辰日)에 해(奚)와 거란(契丹)이 변경을 침범하여 어양(漁陽)과 옹노(雍奴)를 노략질하고, 노룡새(盧龍塞)로 나갔다. 유주도독(幽州都督) 설눌(薛訥)이 그들을 추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구제(舊制)에, 삼품(三品) 이상 관원은 책서(冊書)로 임명하고, 오품(五品) 이상은 제서(制書)로 임명하며, 육품(六品) 이하는 칙서(勅書)로 임명하고, 모두 상서성(尚書省)에 위임하여 주(奏)하여 정하게 하였으며, 문관은 이부(吏部)에, 무관은 병부(兵部)에 속하게 하였는데, 상서(尚書)를 중전(中銓)이라 하고, 시랑(侍郎)을 동서전(東西銓)이라 하였다. 중종(中宗) 말년에 총신(寵臣)이 권력을 잡아 선거(選擧)가 문란해져 기강이 없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송경(宋璟)을 이부상서로, 이예(李乂)와 노종원(盧從愿)을 시랑으로 임명하니, 모두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아 청탁의 문이 끊어졌다. 모인 사람이 일만여 명이었는데, 세 전(銓)에 남은 자는 이천 명에 불과하여 사람들이 그 공정함에 탄복하였다. 요원지(姚元之)를 병부상서로, 육상선(陸象先)과 노회신(盧懷慎)을 시랑으로 임명하니, 무관 선발도 다스려졌다. 노종원은 노승경(盧承慶)의 동족 손자이고, 육상선은 육원방(陸元方)의 아들이다.

시어사(侍御史) 고성(蒿城) 사람 예약수(倪若水)가 상주(上奏)하여 국자좨주(國子祭酒) 축흠명(祝欽明)과 사업(司業) 곽산운(郭山惲)이 예법을 어지럽히고 제도를 바꾸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임금을 해쳤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축흠명을 강직하여 요주자사(饒州刺史)로 삼고, 곽산운을 강직하여 괄주장사(括州長史)로 삼았다.

시어사(侍御史) 양부(楊孚)가 탄핵과 규찰을 함에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으니, 권귀들이 그를 비방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응수(鷹隼)가 교활한 토끼를 쫓을 때는 반드시 빨리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도리어 토끼에게 물린다. 어사(御史)가 간사한 무리를 제재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인주(人主)가 보호하고 지켜주지 않는다면, 또한 간사한 무리에게 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양부는 수 문제(隋文帝)의 조카손자이다. 하서(河西) 절도사(節度使)·지도사(支度使)·영전사(營田使) 등을 설치하고, 양(涼)·감(甘)·숙(肅)·이(伊)·과(瓜)·사(沙)·서(西) 일곱 주를 관할하게 하며, 치소(治所)를 양주(涼州)에 두었다.

요주(姚州)의 여러 만족(蠻族)들이 이전에 토번(吐蕃)에 의탁하였는데, 대감찰어사(代理監察御史) 이지고(李知古)가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항복한 뒤에는 다시 성지를 수축하고 주현(州縣)을 설치하며 세금을 무겁게 할 것을 청하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郎) 서견(徐堅)이 불가하다고 여겼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지고가 검남(劍南)의 병사를 징발하여 성지를 수축하고, 이 기회에 그들의 호걸을 죽이고 남녀를 노비로 잡으려 하였다. 여러 만족들이 원한을 품고 분노하여, 만족 추장 방명(傍名)이 토번을 인도하여 이지고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의 시체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로부터 요주(姚州)와 섬주(巂州)의 길이 끊겨 여러 해 동안 통하지 못하였다. 안서도호(安西都護) 장현표(張玄表)가 토번의 북부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니, 토번이 비록 원한을 품었으나 화친을 끊지 않고, 이에 선주도독(鄝州都督) 양구(楊矩)에게 뇌물을 주어 하서구곡(河西九曲)의 땅을 공주(公主)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양구가 상주하여 그 땅을 그들에게 주었다.

예종(睿宗) 현진대성대흥효황제(玄真大聖大興孝皇帝) 하(下) 경운(景雲) 이년(二年) (신해년, 711년)

봄 정월 계축일(癸丑日)에 돌궐(突厥) 가한(可汗) 묵철(默啜)이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기미일(己未日)에 태복경(太僕卿) 곽원진(郭元振)과 중서시랑(中書侍郎) 장열(張說)을 함께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양왕(襄王)으로 봉하고 집주자사(集州刺史)로 삼아, 중랑장(中郎將)이 오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방비하게 하였다.

을축일(乙丑日)에 비(妃) 유씨(劉氏)를 추존하여 숙명황후(肅明皇后)로 삼고, 능(陵)을 혜릉(惠陵)이라 하였으며, 덕비(德妃) 두씨(竇氏)를 소성황후(昭成皇后)로 삼고, 능을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모두 동도(東都) 낙양성(洛陽城) 남쪽에서 혼을 불러 장사 지내고, 경사(京師)에 묘(廟)를 세워 의곤묘(儀坤廟)라 하였다. 두씨는 태자(太子)의 어머니이다.

태평공주(太平公主)가 익주장사(益州長史) 두회정(竇懷貞) 등과 결탁하여 당파를 만들어 태자를 해치려 하고, 그녀의 사위 당혁(唐晙)을 시켜 위안석(韋安石)을 그녀의 저택으로 초대하였으나, 위안석이 굳이 사양하며 가지 않았다. 황제가 일찍이 위안석을 비밀리에 불러 말했다: "듣자니 조정 상하가 태자에게 마음이 기울었다고 하니, 너는 마땅히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위안석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망국의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이는 반드시 태평공주의 간계입니다. 태자는 국가에 공이 있고, 인덕(仁德)과 지혜가 있으며,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참언(讒言)에 현혹되지 마소서." 황제가 놀라서 말했다: "내 알았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마라." 당시 태평공주가 휘장 뒤에서 엿듣고 있다가, 유언비어로 위안석을 모함하여 체포하여 심문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곽원진이 구원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태평공주가 또 일찍이 연거(輦車)를 타고 광범문(光範門) 안에서 재상(宰相)들을 초청하여, 태자를 바꾸어 세우자는 뜻을 암시하자, 여러 사람들이 크게 놀라 얼굴색이 변하였고, 송경(宋璟)이 큰 소리로 말했다: "태자는 천하에 큰 공이 있어, 진실로 종묘사직의 주인입니다. 공주께서 어찌 갑자기 이런 의논을 하십니까!"

송경이 요원지(姚元之)와 함께 비밀리에 황제에게 아뢰었다: "송왕(宋王)은 폐하의 장자(長子)이고, 빈왕(豳王)은 고종(高宗)의 장손(長孫)입니다. 태평공주가 그들 사이에서 이간질하여 태자를 불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청컨대 송왕과 빈왕을 모두 외방으로 내보내 자사(刺史)로 삼고, 기왕(岐王)과 설왕(薛王)의 좌우우림군(左右羽林軍) 직임을 파면하여 좌우위솔(左右衛率)로 삼아 태자를 모시게 하소서. 태평공주는 무유기(武攸暨)와 함께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안치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고 오직 태평(太平) 하나의 누이뿐인데, 어찌 멀리 동도에 안치할 수 있겠는가! 여러 왕들은 너희들이 처분하라." 이에 먼저 조서(制書)를 내려 말했다: "여러 왕과 부마(駙馬)는 이로부터 금병(禁兵)을 관장하지 못하며, 현재 관장하는 자는 모두 다른 관직으로 옮긴다."

얼마 후, 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말했다: "술사(術士)가 말하기를 닷새 안에 급한 병사(兵士)가 궁중에 들어올 것이라 하니, 그대들은 나를 위해 방비하라." 장열(張說)이 말했다: "이는 반드시 참소하는 소인배가 동궁(東宮)을 이간질하려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태자(太子)로 하여금 감국(監國)하게 하소서. 그러면 유언(流言)이 자연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요원지(姚元之)가 말했다: "장열이 말한 것은 국가 대계의 근본 전략입니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였다.

이월 병자삭일(丙子朔日)에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를 동주자사(同州刺史)로, 빈왕(豳王) 이수례(李守禮)를 빈주자사(豳州刺史)로,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將軍) 기왕(岐王) 이융범(李隆範)을 좌위솔(左衛率)로, 우우림대장군(右羽林大將軍) 설왕(薛王) 이융업(李隆業)을 우위솔(右衛率)로 삼고, 태평공주를 포주(蒲州)에 안치하였다.

정축일(丁丑日)에 태자에게 감국(監國)을 명하고, 육품 이하 관원의 임명과 도형(徒刑) 이하의 판결은 모두 태자가 처리하게 하였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최립(崔蒞)과 태자중윤(太子中允) 설조소(薛照素)가 황제에게 말했다: "사봉관(斜封官)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임명하신 것으로, 은명(恩命)이 이미 반포되었는데 요원지(姚元之) 등이 건의하여 한꺼번에 모두 박탈하였으니, 이는 선제의 과실을 드러내고 폐하께 원한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해내(海內)에 가득하니, 비상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태평공주도 이렇게 말하자, 황제가 옳게 여겼다. 무인일(戊寅日)에 조서를 내렸다: "모든 사봉별칙(斜封別勅)으로 임명되어 이전에 정직(停職)되었던 자들은 모두 형편을 보아 등용한다."

태평공주가 요원지와 송경의 계략을 듣고 크게 노하여, 이로써 태자를 꾸짖었다. 태자가 두려워하여 상주(上奏)하기를 요원지와 송경이 고모와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였다고 하며 극형(極刑)을 청하였다. 갑신일(甲申日)에 요원지를 신주자사(申州刺史)로, 송경을 초주자사(楚州刺史)로 강직(降職)시켰다. 병술일(丙戌日)에 송왕과 빈왕의 자사 임명도 중지되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참지기무(參知機務) 유유구(劉幽求)를 파면하여 호부상서(戶部尚書)로 삼고, 태자소보(太子少保) 위안석(韋安石)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위안석이 이일지(李日知)와 함께 요원지와 송경을 대신하여 집정(執政)하게 되었으나, 이로부터 기강이 문란해져 다시 경룡(景龍) 연간과 같이 되었다. 전우솔부개조참군(前右率府鎧曹參軍) 유택(柳澤)이 상소(上疏)하여 말했다: "사봉관(斜封官)은 모두 노비나 첩을 통해 천거된 자들인데, 어찌 효화황제(孝和皇帝)의 본의(本意)이겠습니까! 폐하께서 그들을 모두 파면하시니, 천하에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두 회수하여 선악(善惡)을 분별하지 않고, 번복하며 공격하니, 어찌하여 폐하의 정령(政令)이 이처럼 일관되지 않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태평공주가 호승(胡僧) 혜범(慧範)을 시켜 곡진히 이 사람들을 인도하게 하여, 폐하를 속이고 오도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되어 초래하는 재앙이 적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 유택은 유형(柳亨)의 손자이다.

좌우만기(左右萬騎)와 좌우우림군(左右羽林軍)을 합쳐 북문사군(北門四軍)이라 하고, 갈복순(葛福順) 등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삼월(三月)에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의 딸을 금산공주(金山公主)로 봉하고, 돌궐(突厥) 묵철(默啜)에게 시집보내기로 허락하였다.

여름, 4월 갑신일, 송왕 이성기가 사도직을 사양하자 황제가 허락하고 그를 태자빈객으로 임명했다. 위안석을 중서령으로 임명했다.

황제가 3품 이상의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짐은 본래 마음이 담박하여 황제가 되는 것을 귀하다 여기지 않네. 예전에 황사(皇嗣)가 되고 또 황태제(皇太弟)가 되었을 때도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네. 지금 태자에게 자리를 전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태자가 우서자 이경백을 보내어 굳이 사양하게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전중시어사 화봉요가 태평공주에게 아부하여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시고, 바로 천하가 의지하고 우러러보는 분이신데, 어찌 갑자기 이러실 수 있습니까!"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무자일, 조서를 내렸다. "모든 정사는 태자에게 처리하게 한다. 그중 군사, 사형 및 5품 이상 관리의 임명은 모두 먼저 태자와 상의한 후에 보고하라."

신묘일, 이일지로 하여금 시중을 대행하게 했다.

임인일, 사면령을 내렸다.

5월, 태자가 자리를 송왕 이성기에게 양보하기를 청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태평공주를 경사로 소환하기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경술일, 조서를 내렸다. "측천황후 부모의 묘는 여전히 호릉(昊陵), 순릉(順陵)이라 칭하고, 참작하여 관청을 설치하라." 이는 태평공주가 무유기(武攸暨)를 위해 청한 것이었다.

신유일, 서성공주를 금선공주로, 융창공주를 옥진공주로 고치고, 각각 그들을 위해 도관을 세웠는데, 백성의 집을 많이 강제로 점유하고 인력을 수백만 명이나 소모했다. 우산기상시 위지고, 황문시랑 이애가 간언했으나 황제가 모두 듣지 않았다.

임술일, 전중감 두회정이 어사대부 동평장사가 되었다.

승려 혜범이 태평공주의 세력을 믿고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점유하자, 어사대부 설겸광이 전중시어사 모용순과 함께 상주하여 탄핵했다. 공주가 황제에게 하소연하여 설겸광을 기주자사로 좌천시켰다.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10도를 순찰하게 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산남도(山南道)의 관할 구역이 넓다고 하여 동서 두 도로 나누었다. 또 농우도를 하서도로 나누었다. 6월 임오일, 또 천하를 나누어 변(汴), 제(齊), 연(兗), 위(魏), 기(冀), 병(并), 포(蒲), 부(鄜), 경(涇), 진(秦), 익(益), 면(綿), 수(遂), 형(荊), 기(岐), 통(通), 양(梁), 양(襄), 양(揚), 안(安), 회(淮), 월(越), 홍(洪), 담(潭) 등 24도독부를 설치하고, 각각 관할 지역의 자사 이하 관리의 선악을 규찰하게 하되, 오직 낙양 및 근기(近畿) 각 주는 도독부에 속하지 않게 했다. 태자우서자 이경백, 사인 노보(盧輔) 등이 상언했다. "도독은 생살대권을 쥐고 있어 권력과 책임이 너무 무겁습니다. 만약 사람을 잘못 쓰면 해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 어사는 품계가 낮으나 명망이 높아 때때로 순찰하면 간사한 일이 저절로 금지될 것입니다." 이후에 마침내 도독을 폐지하고 다만 10도 안찰사만 두었다.

가을, 7월 계사일, 상관소용의 작위를 추복하고 시호를 혜문이라 했다.

을묘일, 고조의 옛집에 있던 마른 감나무가 다시 살아난 일로 사면령을 내렸다.

기사일, 우어사대부 해완을 삭방대총관으로 임명했다. 해완이 삼성(三城)의 수비군을 살펴보고, 상주하여 10만 명을 감축했다.

경오일, 중서령 위안석을 좌복야 겸 태자빈객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했다. 태평공주가 위안석이 자신에게 붙지 않았기 때문에, 허명으로 그를 높여 실제로는 그의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9월 경진일, 두회정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두회정은 조정에서 물러날 때마다 반드시 태평공주의 저택으로 갔다. 당시 금선, 옥진 두 관을 짓고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간언했으나 오직 두회정만이 완공을 장려하며 직접 공사를 감독했다. 당시 사람들은 두회정이 이전에는 황후의 '아부자(阿父者)'였고, 지금은 공주의 '읍사(邑司)'라고 말했다.

겨울, 10월 갑진일, 황제가 승천문에 행차하여 위안석, 곽원진, 두회정, 이일지, 장열을 불러 조서를 선포하며 그들을 꾸짖었다. "정교에 결함이 많고, 수한(水旱)이 재해를 일으켰으며, 부고는 날로 고갈되고, 관리는 날로 늘어나고 있소. 비록 짐의 덕이 박하지만 또한 보좌하는 신하들이 재능이 없기 때문이오. 위안석은 좌복야 동도유수로, 곽원진은 이부상서로, 두회정은 좌어사대부로, 이일지는 호부상서로, 장열은 좌승으로 임명하고, 일체 정무를 파면하라." 이부상서 유유구를 시중으로, 우산기상시 위지고를 좌산기상시로, 태자첨사 최식을 중서시랑으로 삼고 모두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고, 중서시랑 육상선을 동평장사로 삼았다. 이는 모두 태평공주의 의도였다.

육상선은 청정과욕하고 언론이 고원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최식은 은밀히 태평공주를 섬겼는데, 공주가 그를 재상으로 천거하려 하자 최식이 육상선과 함께 승진시키기를 청했다. 공주가 동의하지 않자 최식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감히 받지 않겠습니다." 공주가 이에 그들을 위해 함께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최식을 임용하려 하지 않자,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청하여 비로소 허락했다.

우보궐 신체부가 상소를 올렸다. "옛날부터 도를 잃어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한 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겪는 것만 못하고,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합니다. 폐하께서 친히 보신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종 황제는 폐하의 조부이십니다. 난을 바로잡고 거짓을 쳐부수어 기초를 열고 준칙을 세웠습니다. 관직을 헛되이 주지 않았고 재물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사원을 짓지 않고도 복이 있었고, 많이 중과 비구니를 도도(度度)하지 않고도 재앙이 없었습니다. 천지가 도와주고 바람과 비가 때에 맞았으며, 곡식과 베가 풍족하고 오랑캐가 복종하였으며, 오래 재위하시어 명성이 만고에 높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본받지 않으십니까! 중종 황제는 폐하의 형이십니다. 조종의 기업을 버리고 부인의 뜻을 따랐습니다. 무능하면서 녹을 받는 자가 수천 명이었고, 공 없이 봉작을 받은 자가 백여 가(家)였습니다. 쉬지 않고 사원을 지어 재물 수백억을 허비하고, 사람을 도도(度度)하여 무수히 많았으며,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은 자가 수십만 명이었습니다. 지출은 날로 늘고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백성의 먹을 것을 빼앗아 탐욕스럽고 잔인한 자를 기르고, 만인의 옷을 벗겨 흙과 나무를 칠하였습니다. 이에 사람은 원망하고 신은 노하여 무리는 흩어지고 친한 자는 등을 돌렸으며, 수한의 재해가 동시에 일어나고 공사(公私)의 재물이 모두 바닥났습니다. 재위 기간이 길지 못하고 화가 몸에 미쳤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징계하여 고치지 않으십니까! 최근 이래로 수한이 잇따르고, 서리와 메뚜기 재해까지 더해져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는데도 진휼하고 구휼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딸을 위해 도관을 지으면서 백여만 민(緡)의 돈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부고의 저축이 얼마나 되는지, 조정 안팎의 경비가 얼마나 되는지를, 가벼이 백여만 민을 소비하여 쓸모없는 공사에 공급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위씨 일족을 주멸하셨지만, 위씨의 악정은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마 태종의 법도를 버리면서도 차마 중종의 폐정을 버리지 못하십니까! 더구나 폐하께서 태자와 함께 위씨가 권세를 잡았을 때, 밤낮으로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여러 흉적을 이를 갈며 증오하셨습니다. 이제 다행히 그들을 제거했으면서도 그들의 행위를 고치지 않으신다면, 신은 두렵건대 또 폐하를 이를 갈며 증오하는 자가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흉적을 미워하여 주멸하셨습니까! 옛날 선제(先帝)가 배역(悖逆)한 자들을 사랑하여, 종진경(宗晉卿)이 그들을 위해 집을 짓고, 조위온(趙履溫)이 그들을 위해 원림을 수리하여, 국력을 다 써버리고 인력을 다 써버렸습니다. 집이 지어져도 살 시간이 없었고, 원림이 이루어져도 놀 시간이 없었으며, 몸은 도리어 살해되었습니다. 지금 도관을 지으며 사치를 숭상하는 자는 반드시 폐하와 공주의 본의가 아닐 것이며, 종(宗), 조(趙)와 같은 무리가 따라서 권유하는 것이 있을까 두려우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백성의 수원(愁怨)이 선조 때보다 적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람마다 화와 실패가 닥칠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말하면 형벌과 살육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위월장(韋月將), 연흠융(燕欽融)과 같은 사람은 선조께서 주살하셨고, 폐하께서는 상주셨습니다. 어찌 폐하께서 직언이 나라에 이로움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도 또한 선조 때의 그런 직언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밝게 살피소서." 황제가 따르지는 않았으나 그의 간절하고 정직함을 칭찬했다.

어사중승 화봉요가 홍려경(鴻臚卿)을 대행하며 돌궐에 사신으로 가서 묵철을 권했다. "처밀(處密), 견곤(堅昆)이 가한(可汗)께서 당나라와 혼인을 맺으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 귀부할 것입니다. 가한께서는 어찌 당나라의 의관을 입어 여러 호인(胡人)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으십니까?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묵철이 허락하고, 다음 날 두건을 쓰고 자색(紫色) 두루마기를 입고 남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신하라고 칭하며, 그의 아들 양아지(楊我支)와 국상을 시켜 화봉요를 따라 입조하게 했다. 11월 무인일, 경사에 도착했다. 화봉요가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간 공로로 호부시랑으로 승진했다.

임진일, 천하 백성으로 하여금 25세에 입대하여 55세에 면역되게 명령했다.

十二月癸卯日,흥망가한가한 아사나헌을 초위십성사로 임명하였다.

황제가 천태산 도사 사마승정을 불러 음양술수를 묻자, 사마승정이 대답하였다. "도는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는 것이니, 어찌 수고롭게 마음을 써서 술수를 배우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수신은 무위로도 매우 높지만, 치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마승정이 대답하였다. "국가는 몸과 같아서 만물의 자연스러운 도리에 순응하고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집니다." 황제가 감탄하며 말하였다. "광성자의 말도 이를 넘지 못하겠구나." 사마승정이 굳이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였다.

상서좌승 노장용이 종남산을 가리키며 사마승정에게 말하였다. "이 속에 큰 이로움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천태산이어야 하겠는가!" 사마승정이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이는 벼슬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노장용은 일찍이 종남산에 은거하였다가 측천 때 좌습유로 징소되었으므로, 사마승정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현종 지도대성대명효황제 상지상

예종 현진대성대흥효황제 하 선천 원년(임자, 712년)

봄 정월 신사일, 예종이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처음으로 간의대부 가증의 건의를 채택하여 천지에 합제하였다. 가증은 가언충의 아들이다.

무자일, 예종이 산수 동쪽으로 가서 적전례를 행하였다.

기축일,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태극으로 고쳤다.

을미일, 예종이 안복문에 올라 돌궐 추장 양아지를 연회하고 금산공주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후 예종이 전위하였기 때문에 혼인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좌어사대부 두회정과 호부상서 잠의를 함께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신유일, 우어사대를 폐지하였다.

포주자사 소지충이 태평공주에게 아부하여 공주가 그를 형부상서로 천거하였다. 화주장사 장흠서는 소지충의 매부로서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재능으로 어찌 현달하지 못할까 걱정합니까! 부당하게 요구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소지충이 대답하지 않았다. 장흠서가 물러나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9대를 경상으로 지낸 대족이 하루아침에 멸족되려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프구나!" 소지충은 평소 고상한 명성이 있었는데, 일찍이 공주의 집 대문에서 나오다가 송경을 만나자 송경이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소군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소지충이 웃으며 말하였다. "송생의 말이 옳도다!" 그리고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달려갔다.

유주대도독 설눌이 유주를 20여 년 동안 진수하자 관리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았다. 그는 한 번도 국외로 출병하지 않았고 적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설눌이 연주자사 이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진이 유유색 앞에서 그를 헐뜯자 유유색이 좌우림장군 손천을 천거하여 설눌을 대체하게 하였다. 3월 정축일, 손천을 유주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설눌을 병주장사로 전임시켰다.

여름 5월, 익주 요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인일, 예종이 북쪽 교외에서 땅에 제사 지냈다.

신사일,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화로 고쳤다.

6월 정미일, 우산기상시 무유기가 죽자 정왕으로 추봉하였다.

예종이 절민태자의 난 때 잠의가 보호한 공로가 있다고 여겨, 계축일, 잠의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경신일, 유주대도독 손천이 해족 추장 이대포와 냉형에서 싸워 전군이 전멸하였다. 당시 손천은 좌효위장군 이격락, 좌위위장군 주이제를 거느리고 병사 2만과 기병 8천을 발동하여 세 군으로 나누어 해와 거란을 습격하려 하였다. 장군 오가리가 간언하였다. "길이 험난하고 날씨가 더우니, 고립된 군대로 멀리 습격하면 가서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손천이 말하였다. "설눌이 변경에 여러 해 있었으나 끝내 국가를 위해 영주를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방비가 없음을 틈타 가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에 이격락에게 기병 4천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였는데, 해족 기병 8천을 만나 이격락이 싸움에 불리하였다. 손천이 겁이 많아 구원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자 적이 틈타 공격하여 당군이 크게 패하였다. 손천이 산에 의지하여 방진을 치고 스스로 보호하자 이대포가 사람을 보내 손천에게 말하였다. "조정이 이미 우리와 화친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무슨 일로 오는가?" 손천이 말하였다. "나는 칙명을 받들어 초무하고 위로하러 왔을 뿐이다. 이격락이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너희와 싸웠으니, 내가 그를 참수하여 사과하게 하라." 이대포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의 신물은 어디에 있는가?" 손천이 군중의 모든 비단을 모아 만여 단을 얻고, 자포, 금대, 어대까지 함께 그에게 주었다. 이대포가 말하였다. "장군은 남쪽으로 돌아가시오, 서로 시끄럽게 하지 마시오." 장수와 병사들이 두려워하여 대열이 더 이상 정돈되지 않았고, 적이 추격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손천과 주이제가 적에게 사로잡혀 돌궐에 바쳐졌고, 묵철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격락과 오가리는 도망쳐 돌아왔다.

가을 7월, 혜성이 서쪽에 나타나 헌원성을 지나 태미원에 들어가 대각성에 이르렀다.

한 관상가가 동중서문하삼품 두회정에게 말하였다. "당신에게 형벌의 재앙이 있습니다." 두회정이 두려워하여 관직 해임을 청하고 안국사에 가서 노복이 되기를 원하였고, 예종이 명을 내려 그의 해임을 허락하였다. 을해일, 다시 두회정을 좌복야 겸 어사대부, 평장군국중사로 임명하였다.

태평공주가 술사를 시켜 예종에게 말하였다. "혜성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세우는 것이며, 또한 제좌성과 심전성에 모두 변화가 있으니, 황태자가 마땅히 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종이 말하였다. "유덕한 사람에게 전위하여 재앙을 피하는 것이니, 나의 결심은 이미 정해졌다!" 태평공주와 그 당여들이 모두 극력 간하여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예종이 말하였다. "중종 년간에 간사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 천상이 여러 번 변이를 나타냈다. 내가 당시 중종에게 현명한 아들을 골라 태자로 세워 재이에 대응하자고 청하였으나, 중종이 기뻐하지 않아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어찌 거기서는 권할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는 행하지 못하겠는가!" 태자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입궐하여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간청하였다. "나는 미미한 공로로 월등히 태자로 세워졌으나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폐하께서 어찌 갑자기 대위를 나에게 전하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종이 말하였다. "사직이 다시 안정될 수 있었던 것,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너의 공로이다. 지금 제좌성에 재이가 있으므로 너에게 전위하여 화를 복으로 돌리려 하니, 너에게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태자가 굳이 사양하였다. 예종이 말하였다. "너는 효자이니, 어찌 반드시 영구 앞에서 즉위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태자가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임진일, 예종이 조서를 내려 태자에게 전위하였고, 태자가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태평공주가 예종에게 비록 전위하더라도 스스로 정사를 총괄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예종이 이에 태자에게 말하였다. "네가 천하의 일이 중대하다고 여겨 내가 겸하여 관장하기를 바라는가? 처음에 순이 우에게 선양하면서도 오히려 친히 각지를 순시하였다. 내가 비록 전위하였으나 어찌 가문과 나라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군국 대사는 내가 함께 살펴 처리할 것이다."

8월 경자일, 현종이 즉위하고 예종을 태상황으로 높였다. 상황은 스스로 '짐'이라 칭하고 명령을 '고'라 하였으며, 닷새마다 태극전에서 한 번씩 조회를 받았다. 황제는 스스로 '여'라 칭하고 명령을 '제', '칙'이라 하였으며, 매일 무덕전에서 조회를 받았다. 3품 이상 관리의 임명과 중대한 형정 사무는 상황이 결정하고, 나머지는 황제가 결정하였다.

임인일, 대성천후의 존호를 성제천후로 높였다.

갑진일,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었다.

을사일, 막주 이북에 발해군을 설치하고, 항주와 정주 경내에 항양군을 설치하고, 규주와 울주 경내에 회유군을 설치하여 병사 5만을 주둔시켰다.

병오일, 비자 왕씨를 황후로 세우고, 황후의 아버지 왕인교를 태복경으로 임명하였다. 왕인교는 하규 사람이다. 무신일, 황자 허창왕 이사직을 정왕으로, 진정왕 이사겸을 업왕으로 봉하였다.

유유색을 우복야,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고, 위지고를 시중으로, 최식을 검교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당초, 하내 사람 왕곡은 왕동교의 밀모에 가담하였다가 도망쳐 강도에서 글을 베껴 쓰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현종이 태자였을 때, 왕곡은 장안으로 돌아와 제기주부로 선발되어 태자에게 나아가 사례 인사를 드렸다. 왕곡이 뜰에 이르러 일부러 느릿느릿 걸으며 눈을 높이 뜨자, 환관이 말하였다. “전하께서 휘장 안에 계십니다.” 왕곡이 말하였다. “무엇을 전하라고 합니까? 지금은 오직 태평공주만 있을 뿐입니다!” 태자가 즉시 그를 불러들여 함께 이야기하였다. 왕곡이 말하였다. “위서인(위 황후)은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저질렀으나 인심이 따르지 않아 그를 주살하는 것은 쉬웠습니다. 태평공주는 무후의 딸로 흉악하고 교활함이 비할 데 없으며, 대신들 중 많은 이가 그녀에게 이용되고 있으니, 저는 사사로이 이것을 근심합니다.” 태자가 그를 끌어 같은 자리에 앉히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폐하의 친형제는 오직 태평공주뿐이니, 그녀의 일을 말하면 폐하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말하지 않으면 화가 날로 깊어지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왕곡이 말하였다. “천자의 효도는 평민과 다릅니다. 마땅히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개주(蓋主)는 한 소제의 누이로 어려서부터 길러졌으나, 죄가 있음에도 주살되었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어찌 작은 절조에 구애되겠습니까!” 태자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어떤 기술이 있어 나와 함께 사귈 수 있겠는가?” 왕곡이 말하였다. “단약을 날려 만들고 익살과 조롱을 잘합니다.” 태자가 이에 그를 참부사사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주청하여 매일 함께 지내며 점차 태자중사인으로 승진시켰고, 즉위한 후에는 중서시랑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재상들은 대부분 태평공주의 당여였다. 유유구와 우우림장군 장위가 모의하여 우림병으로 그들을 주살하려 하였다. 장위가 밀히 현종에게 아뢰었다. “두회정, 최식, 잠의는 모두 공주를 통해 벼슬에 올랐으며, 밤낮으로 불궤를 도모합니다. 만약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일단 사변이 발생하면 상황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속히 그들을 주살하소서. 제가 이미 유유구와 계획을 정하였으니, 오직 폐하의 명령만을 기다립니다.” 현종이 매우 옳게 여겼다. 장위가 밀모를 시어사 등광빈에게 누설하자, 현종이 크게 두려워하여 급히 상황을 열거하여 상주하였다. 병진일(19일), 유유구가 옥에 갇혔다. 관련 관청이 상주하였다. “유유구 등은 골육을 이간질하니 죄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현종이 유유구를 위해 변호하며 큰 공이 있으니 죽일 수 없다고 하였다. 계해일(26일), 유유구를 봉주로 유배 보내고, 장위를 봉주로, 등광빈을 수주로 유배 보냈다.

당초, 최식이 양주자사로 있을 때 밀히 초왕 이중복과 서신을 왕래하였고, 이중복이 그에게 금대를 선물하였다. 이중복이 실패한 후, 최식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했으나 장열과 유유구가 구원하고 보호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얼마 후, 최식이 태평공주에게 의탁하여 공주와 함께 장열의 정사를 파면할 것을 모의하고, 좌승으로 분사동도(분사하여 동도에 거주)하게 하였다. 유유구가 봉주로 유배되자, 최식은 광주도독 주이정에게 암시하여 그로 하여금 유유구를 죽이게 하였다. 계주도독 경성 사람 왕전이 이 음모를 알고 유유구를 붙잡아 보내지 않았다. 주이정이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 요구했으나 왕전이 응하지 않자, 주이정이 상황을 상주하였다. 최식이 여러 차례 왕전을 압박하여 유유구를 보내도록 하였다. 유유구가 왕전에게 말하였다. “공이 집정을 거역하며 유배된 사람을 보호하시니, 형세가 반드시 온전하지 못할 것이며, 단지 공만 헛되이 연루시킬 뿐입니다.” 끝내 광주로 가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전이 말하였다. “공이 저지른 죄는 벗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공으로 인해 죄를 얻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마침내 지체시키며 보내지 않았다. 유유구가 이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9월, 정묘일(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신묘일(25일), 황자 이사승을 섭왕으로 봉하였다. 이사승의 어머니 양씨는 양사달의 증손녀였다. 왕후가 아들이 없어 그를 양육하였다.

겨울, 10월, 경자일(4일), 현종이 태묘에 알현하고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계묘일(7일), 현종이 신풍으로 가서 여산 기슭에서 사냥하였다.

신유일(25일), 사타금산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타는 처월의 다른 종족으로 성은 주야씨였다.

11월, 을유일(20일), 해와 거란이 2만 기병으로 어양을 침범하였다. 유주도독 송경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자, 적이 크게 노략질하고 떠났다.

상황이 교지를 내려 황제로 하여금 변경을 순시하게 하되, 서쪽은 하·농에서 시작하여 동쪽은 연·계까지 이르게 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키게 하였다. 갑오일(29일), 유주도독 송경을 좌군대총관으로, 병주장사 설눌을 중군대총관으로, 삭방대총관·병부상서 곽원진을 우군대총관으로 임명하였다.

12월, 형부상서 이일지가 치사를 청하였다.

이일지는 재임 기간 동안 매질을 사용하지 않고도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형부에 영사 한 명이 칙명을 받고도 사흘이 지나도록 실행하는 것을 잊었다. 이일지가 노하여 곤장을 찾아 관리들을 모은 뒤 그를 때리려 하였다. 잠시 후, 다시 말하였다. “내가 너를 때리면, 천하 사람들이 반드시 ‘네가 이일지를 노하게 할 수 있어 이일지의 곤장을 맞았다.’고 말할 것이니,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어 처자식도 너를 버릴 것이다.” 이에 그를 놓아주었다. 관리들이 모두 감동하고 기뻐하여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고, 간혹 지체나 실수가 있으면 모두가 함께 그를 비난하였다.

예종현진대성대흥효황제 하 개원 원년(계축, 서기 713년)

봄, 정월 을해일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위사는 이제부터 스물다섯 살에 입대하여 쉰 살에 퇴역하고, 우림비기는 모두 위사 중에서 선발하여 보충한다." 이부상서 소지충을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황제의 변방 순행 일정이 변경되어, 이미 모집된 병사들은 각기 해산하여 돌려보내고 8월에 다시 집결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2월 경자일 밤, 궁문을 열고 등불을 밝히며 전년도의 대규모 음주 모임을 보충하여 거행하고, 크게 가무와 잡기를 모았다. 태상황과 황제가 친히 문루에 임하여 구경하였고, 때로는 밤낮으로 이어져 총 한 달 넘게 지속되었다. 좌습유 화음 사람 엄정지가 상소하여 간언하였다: "음주는 백성의 편의에顺应하여 모두 돈을 모아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은 만민의 힘을 소모하여 여러 잡기의 비용을 경영하니, 이는 성덕을 빛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에 중지되었다.

처음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별종 대조영이 영주로 이주하였다.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인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모아 동쪽으로 도망쳐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은 후, 무후는 장군 이楷固를 보내 그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楷固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이고, 군사를 이끌고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압박하였다. 대조영이 맞서 싸워 이楷固는 크게 패하여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대조영은 이에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동모산을 점거하고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여 고려인과 말갈인이 점차 그에게 귀부하였고, 지역은 사방 2천 리, 인구는 십여만 명, 전투 가능한 병사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스스로 진왕이라 칭하고 돌궐에 의탁하였다. 당시 해와 거란 모두 반란을 일으켜 길이 막혀 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다. 중종이 즉위한 후,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 가서 위로하고 회유하자, 대조영은 아들을 보내 입조하여 시중들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으로 임명하고, 그가 통솔하는 지역을 홀한주로 설치하여 대조영이 도독을 겸하게 하였다.

경신일에 황제가 엄정지의 충성과 정직함을 백관에게 포고하고 그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3월 신사일에 황후가 친히 친잠례를 행하였다.

진릉위 양상여가 상소하여 시정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 양제는 강함을 믿고 시정을 걱정하지 않아, 조칙과 교지를 자주 내렸으나 명성과 실제가 서로 어긋나고, 말은 요순과 같으나 행실은 걸주와 같아, 온 천하를 한 번에 버렸습니다." 또 이르기를: "수나라는 욕망을 따르다가 망하고 태종은 욕망을 억제하여 번성하였으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자세히 선택하소서!" 또 이르기를: "임금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를 좋아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싫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은 항상 소원해지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항상 가까워져, 나라가 망하고 몸이 위태로워지도록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실로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은 대부분 뜻을 거스르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대부분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거스름이 쌓이면 미움이 생기고 따름이 쌓이면 사랑이 생기니, 이것이 친함과 소원함이 나뉘는 까닭입니다. 명철한 임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스름을 좋아하여 충성과 현명함을 거두어들이고, 따름을 싫어하여 간사하고 아첨함을 제거한다면, 태종의 태평한 공업이 어찌 멀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법은 간결하여 금지하기를 귀히 여기고, 형벌은 가벼워서 반드시 시행되기를 귀히 여깁니다. 폐하께서 지금 지극한 덕을 높이 받들고 널리 새 정사를 펴시니, 청컨대 번잡하고 세밀한 조문을 완전히 없애고 작은 허물을 추궁하지 마소서. 작은 허물을 추궁하지 않으면 번잡하고 가혹함이 없고, 큰 죄를 빠뜨리지 않으면 간사함을 막을 수 있어, 법을 간결하게 하여 범하기 어렵게 하고 너그럽게 하여制约할 수 있게 하면 좋겠습니다." 황제가 보고 매우 좋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대명궁 수리가 완공되지 않았는데, 여름 5월 경인일에 황제가 농사일이 바쁘므로 수리를 중단하고 농한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6월 병진일에 병부상서 곽원진을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였다.

태평공주는 태상황의 세력을 믿고 권력을 전횡하며 황제와 갈등이 있었다. 재상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그녀의 문하에서 나왔다. 문무 대신의 절반이 그녀에게 의탁하였다. 그녀는 두회정, 잠의, 소지충, 최식 및 태자소보 설직, 옹주장사 신흥왕 이진, 좌우림대장군 상원개, 지우림우장군사 이자, 좌금오장군 이흠, 중서사인 이유, 우산기상시 가복, 홍려경 당현 및 승려 혜범 등과 함께 황제를 폐위할 것을 모의하고, 또 궁인 원씨와 함께 적근분에 독을 넣어 황제에게 바칠 것을 모의하였다. 이진은 이덕량의 손자였다. 상원개와 이자는 여러 차례 공주부에 왕래하며 서로 결탁하여 모의하였다.

왕거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일이 급박하오니, 신속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승 장열이 동도에서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칼 한 자루를 보내며 결단을 내리라는 뜻을 전하였다. 형주장사 최일용이 입조하여 일을 아뢰면서 황제에게 말하였다: "태평공주가 역모를 도모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옛날 동궁에 계셨을 때는 신하로서 그녀를 토벌하려면 지모와 무력을 써야 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단지 하나의 조서만 내리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간사한 무리가 뜻을 얻는다면 후회해도 어찌 미치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참으로 그대 말과 같소. 다만 태상황을 놀라게 할까 걱정될 뿐이오." 최일용이 말하였다: "천자의 효도는 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만약 간사한 무리가 뜻을 얻는다면 사직이 폐허가 될 터인데, 효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먼저 북군을 안정시킨 후에 반역 당을 체포하소서. 그러면 태상황을 놀라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옳게 여겼다. 최일용을 이부시랑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위지고가 태평공주가 이달 4일에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녀는 상원개와 이자에게 우림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무덕전으로 쳐들어가게 하고, 두회정, 소지충, 잠의 등이 남아에서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기로 하였다. 황제는 이에 기왕 이범, 설왕 이업, 곽원진 및 용무장군 왕모충, 전중소감 강교, 태복소경 이영문, 상승봉어 왕수일, 내급사 고력사, 과의 이수덕 등과 함께 그들을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강교는 강모의 증손이요, 이영문은 이정의 동생 이객사의 손자요, 왕수일은 왕인교의 아들이요, 고력사는 반주 사람이었다.

갑자일에 황제가 이에 왕모충을 보내 한가한 마구간의 말과 병사 삼백여 명을 취하게 하고, 함께 모의한 십여 명과 함께 무덕전에서 건화문으로 들어가 상원개와 이자를 불러들여 먼저 그들을 죽이고, 내객성에서 가복과 이유를 체포하여 끌어내고, 조당에서 소지충과 잠의를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두회정은 수로로 도망쳐 들어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시체에 형벌을 가하고 성을 독으로 고쳤다. 태상황이 변고를 듣고 승천문루에 올랐다. 곽원진이 아뢰기를, 황제께서 이전에 봉칙하여 두회정 등을 주살한 것이지 다른 일은 없다고 하였다. 황제가 곧 누각에 이르렀고, 태상황이 이에 조서를 내려 두회정 등의 죄상을 공포하고, 이에 대사면을 하였으나 오직 역적의 친족과 당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설직은 만년옥에서 사사되었다.

을축일에 태상황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이제부터 군국 정령과 형벌은 일체 황제가 처리하라. 짐은 장차 청정무위로 마음을 기르며 평소의 소원을 이루리라." 이날 백복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평공주는 산사로 도망쳐 사흘 만에 나와 집에서 사사되었다. 공주의 여러 아들과 당여 중 처형된 자가 수십 명이었다. 설숭간은 여러 번 그의 어머니를 간언하다가 매를 맞았던 일로 특별히 사형을 면하고 이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관작은 그대로였다. 공주의 집을 적몰하니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진기한 물건이 황실의 창고에 버금갔다. 목장의 양과 말, 전원, 대출 이자가 몇 해가 지나도 다 거두어들이지 못할 정도였다. 혜범의 가산도 수십만 민이었다. 신흥왕 이진의 성을 려로 고쳤다.

처음에 황제가 두회정 등을 주살할 계획을 세울 때 최식을 불러 심복으로 삼고자 하였다. 최식의 동생 최제가 최식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만약 물으시거든 숨기는 것이 없도록 하시오." 최식이 듣지 않았다. 두회정 등이 죽임을 당한 후, 최식과 우승 노장용이 모두 사사로이 태평공주를 섬긴 죄로, 최식은 두주로 유배되고 노장용은 농주로 유배되었다. 신흥왕 이진이 형을 받을 때 탄식하며 말하였다: "본래 이 일을 꾀한 사람은 최식인데, 지금 내가 죽고 최식이 살아 있으니,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마침 관련 관청에서 궁인 원씨를 심문하자, 원씨가 최식이 독을 바치는 일에 함께 모의했다고牵连하여, 이에 최식을 형주에서 죽게 하였다. 설직의 아들 설백양은 공주와 혼인한 일로 사형을 면하고 영남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 자살하였다.

처음에 태평공주가 그 당여와 함께 황제를 폐위할 것을 모의할 때, 두회정, 소지충, 잠의, 최식은 모두可行하다고 여겼으나, 오직 육상선만이 불가하다고 여겼다. 공주가 말하였다: "장자를 폐하고 어린이를 세우는 것은 이미 순리가 아니며, 또 그가 덕을 잃었으니 어찌 폐하지 않겠는가?" 육상선이 말하였다: "이미 공으로 세워졌으니 마땅히 죄로 인하여 폐하여야 합니다. 지금 실제로 죄가 없는데, 상선이 끝내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공주가 화가 나서 떠났다. 황제가 두회정 등을 주살한 후, 육상선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세한송백이라, 참으로 그러하도다!" 당시 공주의 지엽적인 당여를 철저히 추궁하여 연좌될 사람이 많았는데, 육상선이 은밀히 그들을 위해 변론하고 구하여保全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관 중에 평소 공주에게 잘 대우받았거나 공주에게 미움을 받은 자들은 혹은 폄적되거나 혹은 승진하여 일 년이 다 되어도 처리가 끝나지 않았다.

정묘일에 황제가 승천문루에 올라 대사면을 하였다.

기사일에 공신 곽원진 등에게 관작과 부제, 금백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고력사를 우감문장군으로 임명하고 내시성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처음에 태종이 제도를 정할 때, 내시성은 삼품관을 두지 않았고, 환관은 황의를 입고 녹봉을 받으며 다만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할 뿐이었다. 천후가 비록 여주였으나 환관도 권력을 잡지 못하였다. 중종 시기에는 총애를 받는 사람이 많아 환관 중 칠품 이상이 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비색 관복을 입은 자는 아직 드물었다. 황제가 번왕부에 있을 때 고력사가 마음을 다하여 시중들었고, 태자가 된 후에는 그를 내급사로 임명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지충과 잠의를 주살한 공로로 그에게 상을 내렸다. 이후 환관이 점차 증가하여 삼천여 명에 이르렀고, 삼품 장군에 임명되는 자가 점차 많아져 비색, 자색 관복을 입은 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 환관 세력의 번성함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신일에 익주장사 필구 등 여섯 사람을 보내 십도를 순행하며 시찰하게 하였다. 을해일에 좌승 장열을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경진일에 중서시랑 동평장사 육상선을 면직하고 익주장사 검남안찰사로 삼았다. 8월 계사일에 유주로 유배 보내진 유구를 좌복야 평장군국대사로 임명하였다.

병진일에 돌궐 가한 묵철이 그의 아들 양아지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다. 정사일에 촉왕의 딸 남화현주를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였을 때, 동중서문하삼품 이교가 위후에게 밀표를 올려 상왕의 여러 아들들을 외지에安置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즉위한 후, 궁중에서 이 밀표를 얻어 시신에게 보여주었다. 이교는 당시 특진으로 퇴직해 있었는데, 어떤 이가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다. 장열이 말하였다: "이교가 비록 역순을 알지 못하였으나, 당시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은 충성이었습니다." 황제가 동의하였다. 9월 임술일에 이교의 아들 솔경령 이창을 건주자사로 임명하고, 이교가 이창을 따라 부임하게 하였다.

경오일에 유구를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였다.

병술일에 우어사대를 다시 설치하여 각 주를 감찰하게 하고, 각 도의 안찰사를 폐지하였다.

겨울 10월 신묘일에 황제가 경기 각 현의 현령을引見하여 흉년으로 인해 백성을 체휼하고 보살피라는 뜻을 경계하였다.

기해일에 황제가 신풍에 행행하였다. 계묘일에 여산 아래에서 무술을 강습하여 병사 이십만을 징발하고, 깃발이 오십여 리에 연이었다. 군용이 정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부상서 곽원진을 군기 아래에 처하여 죽이려 하였다. 유구와 장열이 말 앞에 꿇어앉아 간언하였다: "원진은 사직에 큰 공이 있사오니 죽일 수 없습니다." 이에 신주로 유배 보냈다. 급사중 지례의사 당소를 군례를 엄숙하게 제정하지 않은 죄로 목 베었다. 황제는 처음에 위엄을 세우려 하였으나 당소를 죽일 뜻은 없었다. 금오위장군 이막이 급히 칙명을宣布하여 그를 죽였다. 황제는 곧 이막의 관직을 파면하고 종신토록 등용하지 않았다. 당시 두 대신이 죄를 얻자 각군은 대부분 두려워하여 정신을 잃었으나, 오직 좌군절도 설눌과 삭방도대총관 해완 두 군대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가 경기를 보내 그들을 불렀으나 모두 그들의 진영에 들어갈 수 없었다. 황제가 깊이 감탄하며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갑진일에 위천에서 사냥을 하였다. 황제가 동주자사 요원지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장열이 그를 시기하여 어사대부 조언소에게 탄핵하게 하였으나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전중감 강교에게 황제에게 말하게 하였다: "폐하께서 항상 하동총관을 선발하려 하시나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하셨는데, 신이 지금 찾았습니다." 황제가 누구냐고 묻자, 강교가 말하였다: "요원지는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진실로 적합한 사람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는 장열의 주모임이 틀림없다. 네가 어찌 감히 면전에서 속이느냐? 죄가 마땅히 사형이다!" 강교가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자, 황제가 즉시 궁중 사자를 보내 요원지를 행궁으로 부르게 하였다. 도착하였을 때 황제가 사냥 중이었으나 그를 불러들여 즉시 병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하였다.

요원지는 정사를 처리함에 정명하고 민첩하여, 세 번 재상을 지내면서 모두 병부상서를 겸하였고, 변경의 둔수와 정찰, 병사와 말의 비축과 기계를 묵묵히 기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막 즉위하여 뜻을 힘쓰고 다스리려 하여, 매사에 요원지에게 물었다. 요원지가 응대하기를 흐르는 물과 같이 하여, 동료들은 다만 응낙할 뿐이었으므로, 황제가 그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요원지가 청하기를, 권귀와 총신을 억제하고, 작록을 아끼며, 간쟁을 받아들이고, 공물을 거절하며, 여러 신하와 친근하게 지내지 말 것을 청하니, 황제가 모두 받아들였다.

을사일에 황제의 거가가 경사로 돌아왔다.

요원지가 일찍이 상주하여 낭리의 서열에 따라 승진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고개를 들어 전정을 바라보았다. 요원지가 거듭 진술하였으나 끝내 응답이 없었다. 요원지가 두려워하여 빨리 물러나왔다. 퇴조 후, 고력사가 간언하였다: "폐하께서 막 만기를 총괄하시는데, 재상이 일을 아뢰면 마땅히 면전에서 가부를 표시하셔야지, 어찌 일체 심사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여러 정무를 요원지에게 위임하였으니, 큰일은 마땅히 아뢰어 함께 의논하여야 한다. 낭리와 같은 작은 벼슬을 일일이 짐에게 번거롭게 해야 하겠느냐?" 마침 고력사가 성중에 나아가 조서를 전할 일이 있어 황제의 말을 요원지에게 알리자, 요원지가 비로소 기뻐하였다. 들은 사람들이 황제가 군주의 체통을 아는 것을 탄복하였다.

좌습유 곡강 사람 장구령이 요원지가 중망을 지니고 황제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그에게 글을 올려 아첨하고 조급한 자를 멀리하고 순박하고 두터운 자를 등용할 것을 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사람을 등용함은 마땅히 재능에 따라야 하니, 이는 정치의 대체이며, 현명한 이와 함께 다스리는 것이 이 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재능을 쓸 때,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실수한 까닭은 감정에 따라 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기를: "군후께서 재상의 중책에 몸담아 인사권을 쥐신 이후로, 그 식견이 얕고 근본이 박약한 무리들이 이미 목을 길게 빼고 발돋움하여 와서, 친척에 아첨하여 명예를 구하고, 빈객에 아부하여 포용됨을 구하고 있사오니, 그 가운데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마는, 잃은 바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에 있습니다." 요원지가 그를 칭찬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신흥왕 이진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의 속료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갔으나, 오직 사공 이摠만이 걸어서 따라다니며 관청에서의 예절을 잃지 않고, 또 그의 시체를 대고 울었다. 요원지가 듣고 말하였다: "이는 난포와 같은 부류로다." 요원지가 재상이 되자, 이摠을 발탁하여 상서랑으로 삼았다.

기유일에 형부상서 조언소를 삭방도대총관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을축일에 유구가 시중을 겸하였다.

신사일에 여러 신하들이 상표하여 존호를 가하여 개원신무황제라 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무자일에 책명을 받았다.

중서시랑 왕거가 황제의 친근하고 후한 대우를 받아 여러 신하 중에 미치는 자가 없었다. 진견할 때마다 모시고 이야기하며 밤이 되어야 나왔다. 때로 휴가를 내어도 왕왕 궁중 사자를 보내 그를 불렀다. 어떤 이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왕거는 권모와 궤변을 잘하는 종횡의 재주를 가졌사오니, 그와 함께 난을 평정할 수는 있으나, 그와 함께 태평을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황제가 이로 인하여 점차 그를 소원하게 하였다. 이달에 왕거에게 어사대부를 겸하게 하고, 북쪽 변방의 여러 군을 순시하게 하였다.

12월 경인일에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고쳤다. 상서좌복야와 우복야를 좌우승상으로 고쳤다.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문하성을 황문성으로, 시중을 감으로 고쳤다. 옹주를 경조부로, 낙주를 하남부로, 장사를 윤으로, 사마를 소윤으로 고쳤다.

갑오일에 토번이 그 대신을 보내와 화의를 청하였다.

임인일에 요원지에게 자미령을 겸하게 하였다. 요원지가 개원의 존호를 피하여 본명 요숭으로 되돌렸다.

황제가 명령하였다: "도독, 자사, 도호가 장차 부임하려 할 때는 모두 인견하여 면전에서 하직을 마친 후, 측문으로 가서 지시를 기다리라."

요숭이 재상이 된 후, 자미령 장열이 두려워하여 사사로이 기왕의 부중에 가서 뜻을 전하였다. 다른 날, 요숭이 편전에서 대응할 때 걸음이 약간 절뚝거렸다. 황제가 물었다: "발에 병이 있는가?" 대답하였다: "신에게는 복심의 병이 있을 뿐, 발병이 아닙니다." 황제가 무슨 까닭인지 묻자, 대답하였다: "기왕은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아우이옵고, 장열은 보좌하는 대신이온데, 가만히 수레를 타고 기왕의 집에 드나드오니, 그에게 잘못 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계축일에 장열을 상주자사로 강등시켰다. 우복야 동중서문하삼품 유구도 면직되어 태자소보가 되었다. 갑인일에 황문시랑 노회신을 동자미황문평장사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