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15
旃蒙协洽(을미)부터 시작하여 유목돈장(병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십이 년이다.
효소황제 상
시원 원년(을미, 기원전 팔십육 년)
1 여름, 익주 지역의 이족(夷人) 이십 사 개 성읍, 삼만여 명이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수형도위 여벽호를 보내어 관리와 백성을 모집하고, 견위군과 촉군의 신속 부대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2 가을, 칠월, 천하에 사면을 내렸다.
3 계속되는 폭우가 시월까지 이어져 위교(渭橋)가 끊어졌다.
4 한무제가 막 붕어했을 때, 조정에서는 제후왕들에게 황제의 옥새가 찍힌 조서를 내렸다. 연왕 유단은 조서를 받고도 울지 않으며 말했다. "조서의 봉함이 너무 작으니, 나는 경성에 변고가 일어난 것이 의심스럽다." 그는 총신 수서장, 손종지, 왕유 등을 장안으로 보내어, 상례 의식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은밀히 조정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조서가 내려와 유단에게 삼십만 전을 포상하고, 봉지를 만 삼천 호 더해주자, 유단은 분노하여 말했다. "내가 마땅히 황제가 되었어야 하는데, 어찌 상을 받을 까닭이 있겠는가!" 이에 종실 중산애왕의 아들 유장, 제효왕의 손자 유택 등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며, 자신이 한무제 시절에 조명을 받아 정무를 관장하고 무비를 정비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할 권한이 있었다고 거짓말했다. 낭중 성진이 유단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마땅히 얻었어야 할 제위를 잃었으니, 오직 군사를 일으켜 쟁취해야 할 뿐, 앉아서 얻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한번 군사를 일으키시면, 나라 안의 여자들조차도 팔을 휘두르며 따를 것입니다." 유단은 곧 유택과 함께 모의하여 간사한 문서를 꾸며 말했다. "지금의 황제는 한무제의 아들이 아니며, 대신들이 함께 옹립한 것이다. 천하 사람들은 마땅히 함께 토벌해야 한다!" 그리고 각 군국에 사람을 보내 유포하여 백성들을 동요시키려 했다. 유택은 임치로 돌아가 군사를 일으켜 청주자사 준불의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유단은 각 군국의 간사한 자들을 불러모으고, 구리와 철을 징수하여 갑옷과 병기를 만들었으며, 여러 차례 자신의 전차와 기병, 재관(材官) 군사들을 사열하고, 백성들을 징발하여 대규모 사냥을 하게 하여 병마를 훈련시키고 약속된 날짜를 기다렸다. 낭중 한의 등이 여러 차례 유단을 간언하자, 유단은 한의 등 십오 명을 죽였다. 마침 후후 성이 유택 등의 음모를 알고 이를 준불의에게 알렸다. 팔월, 준불의가 유택 등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천자는 대홍려승을 보내어 이 사건을 심리하게 하였고, 연왕 유단에게까지 연루되었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연왕이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므로 추궁하지 않기로 하고, 유택 등은 모두 주살되었다. 준불의는 경조윤으로 승진되었다.
준불의가 경조윤으로 재임할 때, 관리와 백성들은 그의 위엄과 신망을 두려워했다. 그가 매번 각 현을 순시하고 죄수들을 심문한 후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는 항상 준불의에게 물었다. "원통한 사건을 뒤집어 바로잡은 일이 있느냐? 살려낸 사람이 몇 명이냐?" 만약 준불의가 많은 사건을 뒤집어 바로잡았다면, 어머니는 기뻐하며 웃었고, 평소와 달랐다. 만약 바로잡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면, 어머니는 화를 내며 밥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준불의는 관직 생활을 엄격하게 하되 잔혹하지는 않았다.
5 구월, 병자일, 독경후 김일제가 세상을 떠났다.当初, 한무제가 병이 위독해졌을 때, 유조를 남겨 김일제를 독후(秺侯)에, 상관걸을 안양후(安陽侯)에, 곽광을 박륙후(博陸侯)에 봉하기로 했으니, 모두 이전에 반역한 마하라 등을 체포한 공로 때문이었다. 김일제는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작위를 받지 않으려 했고, 곽광 등도 감히 받지 않았다. 김일제의 병이 위중해지자, 곽광이 봉해 줄 것을 청하니, 김일제는 누워서 인수를 받았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김일제의 두 아들 김상, 김건은 모두 궁중에서 시중(侍中)으로 있었는데, 소제와 나이가 비슷하여 함께 기거했다. 김상은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었고, 김건은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김상이 후작을 계승하여 두 개의 인끈을 차게 되자, 소제가 곽장군에게 말했다. "김씨 형제 두 사람이니, 모두 두 개의 인끈을 차게 할 수 없겠는가?" 곽광이 대답했다. "김상은 아버지의 후작을 계승했기 때문에 두 개의 인끈을 차는 것입니다." 소제가 웃으며 말했다. "후작을 봉하는 권한이 나와 장군의 손에 있지 않은가?" 곽광이 대답했다. "선제께서 규정을 두셨으니, 오직 공로가 있어야 후작에 봉해질 수 있습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6 윤월, 조정에서는 전정위 왕평 등 다섯 사람을 보내어 부절을 들고 각 군국을 순시하며, 현량(賢良)을 천거하고, 백성들의 질고와 원통한 일, 실업자의 상황을 묻도록 했다.
7 겨울, 얼음이 얼지 않았다.
시원 이년(병신, 기원전 팔십오 년)
1 봄, 정월, 대장군 곽광을 박륙후(博陸侯)로, 좌장군 상관걸을 안양후(安陽侯)로 봉했다.
2 어떤 사람이 곽광에게 권했다. "장군께서는 여씨 일족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들은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리하여 정사를 전횡하고 권력을 독점했으나, 종실과 멀어져 그들과 함께 권력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믿지 않아 결국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현저한 지위에 계시고, 황제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마땅히 종실을 받아들이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는 것이 반대되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곽광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기용할 만한 종실 인원을 선발하여, 초원왕의 손자 유벽강과 종실 유장락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임명하고, 유벽강은 장락궁위위(長樂宮衛尉)를 겸하게 했다.
3 삼월, 사자를 보내어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빈민들을 구제하고 대여해 주었다.
4 가을, 팔월,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지난해에 재해가 많았고, 금년에는 누에와 밀작물도 손상을 입었으니, 구제하고 대여해 준 종자와 식량은 다시 거두지 말며, 또한 백성들에게 금년의 전세(田租)를 납부하지 말 것을 명한다."
5 당초,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하여 깊이 추격한 지 이십여 년 동안, 흉노의 말과 가축들은 임신하여 유산하고 지칠 대로 지쳐 고통이 심했다. 흉노는 항상 한나라와 화친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호록고선우(狐鹿姑單于)에게는 이복 동생이 좌대도위(左大都尉)로 있었는데, 현명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이 쏠렸다. 선우의 어머니는 선우가 자신의 아들을 세우지 않고 좌대도위를 세울까 걱정하여,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를 죽였다. 좌대도위의 친형이 이를 원망하여, 다시는 선우의 왕정에 모이러 오지 않았다. 이 해, 선우가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여러 귀인 대신들에게 말했다. "내 아들은 어려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마땅히 내 동생 우곡리왕(右谷蠡王)을 세워야 한다." 선우가 죽자, 위율(衛律) 등이 전거연지(顓渠閼氏)와 밀모하여 선우의 죽음을 숨기고, 선우의 명령을 사칭하여 선우의 아들 좌곡리왕(左谷蠡王)을 호연제선우(壺衍鞮單于)로 세웠다. 좌현왕(左賢王)과 우곡리왕(右谷蠡王)이 원한을 품고 그들의 부중(部衆)을 이끌고 남쪽으로 한나라에 귀순하려 했으나, 스스로 도달할 수 있을지 걱정하여, 노돈왕(盧屠王)을 협박하여 함께 서쪽으로 오손(烏孫)에 투항하려 했다. 노돈왕이 선우에게 이를 고발하자, 선우가 사람을 보내 조사했으나, 우곡리왕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노돈왕에게 돌렸다. 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노돈왕이 억울하다 여겼다. 이에 두 왕은 진지를 떠나 각자 살면서, 다시는 용성(龍城)에 모여 회맹(會盟)하려 하지 않았고, 흉노는 이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원 삼년(정유, 기원전 팔십사 년)
1 봄, 이월, 서북쪽에 혜성이 나타났다.
2 겨울, 십일월, 임진 삭일, 일식이 있었다.
3 당초, 곽광과 상관걸은 서로 친근하고 우호했다. 곽광이 휴가로 나갈 때마다, 상관걸이 자주 곽광을 대신하여 궁중에 들어가 정사를 결재했다. 곽광의 딸은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겨우 다섯 살이었다. 상관안은 곽광을 통해 딸을 궁중에 들이려 했으나, 곽광은 아이가 어리다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개장공주(蓋長公主)는 은밀히 자신의 아들의 식객인 하간 사람 정외인(丁外人)을 가까이했다. 상관안은 평소 정외인과 사이가 좋아, 정외인에게 권했다. "내 딸은 용모가 단정하니, 만약 장공주를 통해 때맞추어 입궁하여 황후가 된다면, 우리 부자는 조정에서 황후라는 중요한 관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의 성패는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나라의 옛 규례에 따르면, 항상 열후(列侯)가 공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 그대는 또한 봉후(封侯)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외인이 매우 기뻐하며, 이 말을 장공주에게 알렸다. 장공주는 타당하다 여겨, 조서를 내려 상관안의 딸을 불러들여 첩여(婕妤)로 봉하고, 상관안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했다.
시원 사년(무술, 기원전 팔십삼 년)
1 봄, 삼월, 갑인일, 상관씨를 황후로 세우고, 천하에 사면을 내렸다.
2. 西南夷의 고증(姑缯)과 섭유(叶榆)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수형도위(水衡都尉) 여벽호(吕辟胡)를 파견하여 익주(益州)의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벽호가 진군을 거부하자, 만이(蛮夷)들은 이에 익주태수를 살해하고, 승세를 타서 여벽호와 교전하여 한군(汉军)이 전사하고 익사한 자가 4천여 명에 달하였다. 겨울에 대홍려(大鸿胪) 전광명(田广明)을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3. 정위(廷尉) 이종(李种)이 고의로 사죄(死罪)를 용서한 죄를 범하여, 시장에 시체를 버리는 형벌인 기시(弃市)에 처해졌다.
4. 이 해에 상관안(上官安)이 거기장군(车骑将军)이 되었다.
시원 5년(己亥, 기원전 82년)
1. 봄, 정월에 소제의 외조부 조보(赵父)를 추존하여 순성후(顺成侯)로 삼았다. 순성후에게는 군호(君姁)라는 누이가 있었는데, 그에게 2백만 전(钱)과 노비, 주택을 하사하여 그 집을 풍족하게 하였다. 여러 형제들은 각각 친소 관계에 따라 상을 받았으나, 관직을 맡은 사람은 없었다.
2. 한 남자가 누런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황성 북문(北阙)에 와서 스스로 위태자(卫太子)라고 칭하였다. 공거령(公车令)이 이를 보고하였다. 소제가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 장군(将军), 중이천석(中二千石) 등의 고관들이 함께 가서 확인하게 하였다. 장안성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는 자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우장군(右将军)이 군대를 거느리고 궐 아래에서 경계하며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승상(丞相), 어사(御史), 중이천석 등 고관들이 도착하였으나 감히 발언하는 자가 없었다. 경조윤(京兆尹) 준불의(隽不疑)가 늦게 도착하여, 수행 관리에게 명령하여 이 사람을 결박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의 진위를 아직 알 수 없으니, 우선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준불의가 말하기를 “여러분이 어찌 위태자를 걱정하십니까! 옛날 괴괴(蒯聩)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도망하자, 그의 아들 철(辄)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춘추》가 이를 옳다고 여겼습니다. 위태자는 선제(先帝)에게 죄를 지어 도망하여 살아서 즉시 죽지 않았는데, 지금 스스로 와서 자수한 것은, 이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조옥(诏狱)으로 보냈다. 천자와 대장군(大将军) 곽광(霍光)이 이 말을 듣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공경대신은 마땅히 경술(经术)에 통달하고 대의(大义)를 아는 자를 임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준불의의 명성이 조정에서 더욱 중시되었고, 재위에 있는 대신들도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정위가 이 사람의 출신을 심문하여 마침내 간사한 실정을 밝혀내었는데, 이 사람은 본래 하양(夏阳) 사람으로 성은 성(成), 이름은 방수(方遂)였으며, 호현(湖县)에 살면서 점을 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옛날에 죽은 태자의 빈객이 있었는데, 일찍이 방수에게 점을 치러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가 위태자와 매우 닮았소.”라고 하였다. 방수가 마음속으로 이 말이 이익이 될 만하다고 여겨, 이를 통해 부귀를 얻고자 하였다. 결국 망무부도(诬罔不道)의 죄를 범하여, 허리에 칼을 쳐 죽이는 요참(腰斩)에 처해졌다.
3. 여름, 6월에 상관안을 상락후(桑乐侯)로 봉하였다. 상관안은 날로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해져서, 전중(殿中)에서 상을 받을 때 빈객들에게 말하기를 “내 사위와 함께 술을 마시니, 너무 즐겁구나!”라고 하였다. 자신의 의복을 보고는 사람을 시켜 집으로 가져가게 하여, 자신의 물건을 불태우려 하였다. 그의 아들이 병으로 죽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욕하였다. 그의 어리석고 패역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4. 담이군(儋耳郡)과 진번군(真番郡)을 폐지하였다.
5. 가을에 대홍려 전광명과 군정(军正) 왕평(王平)이 익주를 공격하여, 목과 포로를 3만여 명이나 베고 사로잡았으며, 가축 5만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6. 간대부(谏大夫) 두연년(杜延年)이 국가가 무제(武帝)의 사치와 방탕, 그리고 여러 해의 전쟁 끝에 지쳐 있음을 보고, 여러 번 대장군 곽광에게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유랑하는 백성들이 아직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니, 마땅히 효문제(孝文帝) 때 시행했던 정책을 밝혀 천하에 검소하고 근검하며 너그럽고 온화함을 보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그렇다면 연사(年事)가 응당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곽광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두연년은 전 어사대부 두주(杜周)의 아들이다.
시원 6년(庚子, 기원전 81년)
봄, 2월에 소제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각 군국(郡国)에서 천거한 현량(贤良)과 문학(文学)의 선비들에게 백성들의 질고(疾苦)와 교화(教化)의 요령을 묻게 하였다. 이들 모두가 대답하기를 “염(盐), 철(铁), 주류 전매(酒类专卖)와 균수관(均输官)을 폐지하여 천하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말고, 검소함을 보여야 하며, 그런 후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이 이의를 제기하여 말하기를 “이는 국가의 대업(大业)으로서, 사방의 이적(夷狄)을 통제하고 변경을 안정시키며 재용(财用)을 풍족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폐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염철지의(盐铁之议)가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다.
당초에 소무(苏武)가 북해(北海) 변으로 이주된 후, 관청에서 공급하는 식량이 부족하여 그는 들쥐를 파고 풀씨를 모아 먹었다. 그는 한(汉)나라의 부절(符节)을 짚고 양을 치면서, 자고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지니고 다녀, 절의 깃털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소무가 한나라에 있을 때, 이릉(李陵)과 함께 모두 시중(侍中)을 지냈다. 이릉이 흉노(匈奴)에 항복한 후, 감히 소무를 방문하지 못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선우(单于)가 이릉을 북해 변으로 보내어 소무를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한 뒤, 이에 소무에게 말하기를 “선우가 내가 여경(子卿)과 평소에 교분이 두터웠음을 듣고, 그래서 나를 보내 족하(足下)를 권유하게 하였소. 선우는 성심으로 예를 갖추려 하오. 그대는 끝내 한나라로 돌아갈 수 없소. 이 황량하고 사람 없는 곳에서 괴로움을 겪으며, 그대의 신의가 어디에서 드러나겠소! 족하의 두 형님과 아우는, 앞서 모두 일로 인해 죄를 얻어 자살하였소. 내가 올 때, 태부인(太夫人)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소. 그대의 아내는 나이가 아직 젊은데, 이미 개가하였다고 들었소. 두 명의 누이와 두 명의 딸, 그리고 한 명의 아들이 있는데, 지금 또 십여 년이 지나 생사조차 알 수 없소.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어찌 오래도록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오! 내가 처음 항복했을 때는, 멍하니 미친 듯하였고, 한나라를 저버린 것을 가슴 아파하였으며, 늙은 어머니가 보궁(保宫)에 갇혀 있었소. 그대가 항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찌 나보다 더하겠소! 더구나 폐하는 나이가 많아 법령이 변덕스러워, 대신이 죄 없이 족멸(族灭)된 자가 수십 집이오. 안위(安危)를 예측할 수 없는데, 여경은 누구를 위해 이러려 하오!”라고 하였다. 소무가 말하기를 “저 소무 부자는 공로나 덕이 없음에도, 모두 폐하의 발탁과 조성으로 장군의 반열에 오르고 작위는 통후(通侯)에 봉해졌으며, 형제들이 모두 황제를 가까이 모셔, 항상 간과 뇌를 바쳐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소. 이제 목숨을 바쳐 보답할 수 있다면, 비록 도끼에 찍히고 가마솥에 삶기더라도, 저는 진실로 기쁘고 즐거울 것이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은, 아무런 유감이 없소.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릉이 소무와 며칠 동안 술을 마시고, 또 말하기를 “여경은 내 말을 한 번 들어보시오!”라고 하였다. 소무가 말하기를 “저는 스스로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하였소. 그대가 반드시 나를 항복시키려 한다면, 오늘의 즐거움을 끝내고, 내가 즉시 그대 앞에서 죽겠소!”라고 하였다. 이릉이 그가 지극히 진실함을 보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참으로 의사(义士)로다! 나 이릉과 위율(卫律)의 죄는 하늘에 닿았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소무와 작별하고 떠나갔다. 선우가 소무에게 수십 마리의 소와 양을 주었다.
후에 이릉이 다시 북해 변에 와서, 무제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소무에게 알렸다. 소무가 남쪽을 향해 울부짖으며 피를 토하고, 아침저녁으로 애도하며 몇 달 동안 계속하였다. 호연제(壶衍鞮) 선우가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연지(阏氏)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국내가 분열되고 흩어져, 항상 한나라가 군대를 보내 습격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위율이 선우를 위해 계책을 세워, 한나라와 화친(和亲)을 맺자고 하였다. 한나라 사신이 흉노에 이르러, 소무 등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흉노는 소무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후에 한나라 사신이 다시 흉노에 이르렀을 때, 상혜(常惠)가 은밀히 한나라 사신을 만나, 사신에게 선우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쳤다.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기러기 한 마리를 얻었는데, 발에 비단 편지가 매여 있었고, 그 편지에 소무 등이 어떤 큰 늪에 있다고 하였소.” 사신이 매우 기뻐하여, 상혜의 말대로 선우를 꾸짖었다. 선우가 좌우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크게 놀라, 한나라 사신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소무 등이 참으로 아직 살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무와 마홍(马宏) 등을 돌려보냈다. 마홍이라는 사람은, 이전에 부광록대부(副光禄大夫) 왕충(王忠)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갈 때, 흉노에게 가로막혔다. 왕충은 전사하고, 마홍은 생포되었으나, 또한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흉노가 이 두 사람을 돌려보내어, 선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에 이릉이 술자리를 베풀어 소무를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족하가 한나라로 돌아가, 흉노에서 이름을 날리고, 한실에서 공업(功业)이 빛나니, 비록 고대 사책에 기록되고 단청(丹青)에 그려진 인물들일지라도, 어찌 여경에 비할 수 있겠소! 나 이릉은 비록 어리석고 나약하나, 만약 한나라가 내 죄를 용서하고, 내 늙은 어머니를 보전해 주어, 내가 큰 치욕 속에 쌓아둔 뜻을 분발할 수 있게 하였다면, 아마도 조귀(曹刿)가 가(柯) 땅 회맹에서 했던 것처럼 공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바이오. 그러나 한나라는 우리 집안을 모두 잡아 죽여, 세상에 더없는 치욕을 만들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소! 그만두시오, 다만 여경에게 내 마음을 알게 할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릉이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고, 이에 소무와 작별하였다.
흉노의 선우(單于)는 소무(蘇武)의 수행 관료들을 소집하였는데, 이전에 이미 항복하거나 죽은 자들을 제외하고, 소무를 따라 돌아온 자는 총 아홉 명에 불과했다. 수도에 도착한 후, 소제(昭帝)는 조서를 내려 소무로 하여금 태뢰(太牢)의 예를 써서 무제(武帝)의 능묘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를 전속국(典屬國)에 임명하였으며, 봉록은 중이천석(中二千石)으로 하고, 돈 이백만 전(錢), 공전(公田) 두 경(頃), 주택 한 곳을 하사하였다. 소무가 흉노에 억류된 지 총 십구 년이었는데, 처음 사신으로 갈 때는 장년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어졌다. 곽광(霍光), 상관걸(上官桀)과 이릉(李陵)은 평소에 친교가 있었으므로, 이릉의 옛 친구인 농서(隴西) 사람 임립정(任立政) 등 세 사람을 함께 흉노에 보내 이릉을 항복시키려 하였다. 이릉이 말하기를, "돌아가기는 쉽지만, 대장부가 다시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면서, 마침내 흉노에서 죽었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칠월에 주류 전매 관원을 폐지하였는데, 이는 현량(賢良)과 문학(文學)之士들의 의견을 채택한 것이다. 무제 말년에 천하의 재정이 텅 비고 고갈되어 호구가 반으로 줄어들자, 곽광은 당시 정무의 요체를 알고 부역과 조세를 줄이고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며 생업을 기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흉노와 화친을 맺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점차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절의 기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소제가 조서를 내려, 구가정후(鉤町侯) 무파(毋波)가 그 부족의 군장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반역자를 공격한 공로가 있으므로, 그를 구가왕(鉤町王)으로 세웠다. 전광명(田廣明)에게는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
원봉(元鳳) 원년(신축, 기원전 80년)
봄에 무도군(武都郡)의 저인(氐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집금오(執金吾) 마적건(馬適建), 용액후(龍額侯) 한증(韓增), 대홍려(大鴻臚) 전광명을 보내 삼보(三輔)와 태상(太常)의 형벌을 받은 자들, 즉 모두 면형된 자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유월에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가을, 칠월 을해(乙亥)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는데, 개기일식이었다.
팔월에 연호를 바꾸었다.
상관걸 부자는 이미 존귀해져 장공주(長公主)에게 은혜가 깊었으므로, 정(丁) 외인(外人)을 위해 작위를 청하여 후(侯)에 봉해 달라고 하였으나, 곽광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정 외인을 위해 광록대부(光禄大夫)의 관직을 청하여 그가 황제의 부름을 받을 수 있게 하려 하였으나, 곽광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장공주가 이로 인해 매우 곽광을 원망하였고, 상관걸과 상관안(上官安)도 여러 번 정 외인을 위해 관직과 작위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자 또한 부끄럽게 여겼다. 또 상관걸의 처의 아버지가 총애하는 충국(充國)이라는 자가 태의감(太醫監)이 되어 함부로 전중(殿中)에 들어갔다가 하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개주(蓋主, 장공주)가 충국을 위하여 말 스무 필을 바쳐 속죄하게 하여 겨우 감형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이에 상관걸과 상관안 부자는 깊이 곽광을 미워하고, 더욱 개주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선제(先帝, 무제) 때부터 상관걸은 이미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라 곽광보다 지위가 높았는데, 부자가 모두 장군이 되고 황후는 상관안의 딸이었으며, 곽광은 다만 그 외조부일 뿐인데 도리어 조정 일을 전단하므로, 이로 인해 곽광과 권력을 다투게 되었다. 연왕(燕王) 유단(劉旦)은 스스로 황제의 형이면서도 세자로 세워지지 못한 것을 늘 마음에 품고 원망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桑弘羊)이 주류 전매와 염철 전매를 창시하여 국가에 이익을 가져왔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자제들을 위해 관직을 구하려 하였으나, 또한 곽광을 원망하였다. 이에 개주,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이 모두 유단과 은밀히 결탁하였다.
유단은 손종지(孫縱之) 등을 보내 전후로 열여섯 차례나 많은 금은보화와 준마를 가지고 가서 개주, 상관걸, 상홍양 등에게 뇌물로 바치게 하였다. 상관걸 등은 또 사람을 시켜 연왕을 사칭하여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는데, 내용은 이러하였다. "곽광이 출외하여 낭관(郎官)과 우림군(羽林軍)을 사열할 때, 길에서 통행을 금지하고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며, 태관(太官)이 미리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또 인용하여 말하기를, "소무가 사신으로 흉노에 이십 년 동안 항복하지 않았는데도 비로소 전속국에 임명되었고, 대장군의 장사(長史) 양창(楊敞)은 공로가 없으면서도 수속도위(搜粟都尉)가 되었으며, 또 함부로 대장군부의 교위(校尉)를 증원하였습니다. 곽광이 권력을 전단하고 방자하여 심상치 않은 변고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유단은 감히 부절(符璽)을 돌려드리고 입궐하여 숙직하며 경비를 서면서 간신의 변고를 살피고자 합니다." 이들은 곽광이 출궁하여 휴가를 낸 날을 기다려 상소문을 올렸는데, 상관걸은 궁중에서 관청에 넘겨 처리하려 하였고, 상홍양은 마땅히 다른 대신들과 함께 곽광을 압박하여 물러나게 하려 하였다. 상소문이 올라갔으나 소제는 비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곽광이 이 일을 듣고 화실(畫室)에 머물며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소제가 묻기를, "대장군이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좌장군 상관걸이 대답하기를, "연왕이 그의 죄를 고발하였기 때문에 감히 조정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였다. 소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대장군을 불러 들이라." 하였다. 곽광이 들어와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소제가 말하기를, "장군은 관을 쓰시오. 나는 이 상소문이 거짓임을 아오. 장군에게는 죄가 없소." 하였다. 곽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였다. 소제가 말하기를, "장군이 광명정(廣明亭)에 가서 낭관을 사열한 것은 최근의 일이오. 교위를 임명한 이후로 아직 열흘이 되지 않았는데, 연왕이 어떻게 알겠소! 또 장군이 만약 난을 일으키려 한다면 교위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오." 하였다. 당시 소제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는데, 상서(尚書)와 좌우 관원들이 모두 놀랐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린 자는 과연 도망쳐 버렸는데, 추격하여 매우 급히 잡으려 하였다. 상관걸 등이 두려워하여 소제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니 추궁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소제가 듣지 않았다. 후에 상관걸의 동당 중에 어떤 이가 곽광을 비방하자, 소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대장군은 충신이며, 선제께서 나를 보필하라고 부탁하신 분이니, 감히 다시 그를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다스리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상관걸 등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덕유(李德裕)가 논평하였다: 군주의 덕행은 지극히 명찰(明察)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명찰하면 간사한 것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으므로, 온갖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를 가릴 수 없습니다. 한 소제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주 성왕(周成王)은 이 점에 있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한 고조(高祖), 문제(文帝), 경제(景帝)도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성왕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를 듣고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초췌하게 동쪽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한 고조는 진평(陳平)이 위(魏)나라를 떠나 초(楚)나라를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 그 심복 대신을 버리려 하였습니다. 한 문제는 계포(季布)가 주색에 빠져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소문에 미혹되어 그를 파면하고 군수 자리로 돌려보냈으며, 또 가의(賈誼)가 권력을 농단하여 혼란을 일으킨다고 의심하여 다시 현사를 소원하게 하였습니다. 경제는 조조(晁錯)를 죽이면 병화를 풀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삼공(三公)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참언하는 말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소제가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尚)과 같은 보좌를 얻었다면, 성왕과 강왕(康王)의 성세도 족히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상관걸 등이 모의하기를, 장공주로 하여금 술자리를 베풀어 곽광을 청하고, 복병을 매복하여 그를 죽인 다음, 이 기회에 소제를 폐위시키고 연왕을 맞이하여 천자로 세우려 하였다. 유단은 역참을 설치하여 서신을 왕래하며 서로 통보하고, 상관걸을 왕으로 세우기로 약속하였으며, 밖으로는 각 군현의 호걸 수천 명과도 연락하였다. 유단이 이 일을 상국(相國) 평(平)에게 알리자, 평이 말하기를, "왕께서 이전에 유택(劉澤)과 함께 모의하다가 일이 성사되지 못하고 발각된 것은, 유택이 평소에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능멸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건대, 좌장군(상관걸)은 평소에 경솔하고, 거기장군(상관안)은 젊고 교만하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이 유택과 같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고, 또 성공한 후에 도리어 왕을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유단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 한 남자가 궁문 앞에 와서 스스로 전 태자라고 칭하였는데, 장안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달려가 구경하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대장군이 두려워하여 병사를 내어 진을 세웠으나, 이는 다만 자신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황제의 장자로서 천하 사람들이 믿는 바이니, 어찌 배반을 당할까 걱정하겠느냐!" 하고, 후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개주가 회답하여 오직 대장군과 우장군 왕망(王莽)만을 걱정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장군은 이미 죽었고, 승상은 또 병들었으니, 다행히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며, 조만간 나를 부르게 될 것이다." 하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모두 행장을 준비하게 하였다.
상관걸은 또 연왕 유단을 속여 불러들여 그를 죽이고, 황제를 폐위시킨 뒤 자신이 황제가 될 계획을 세웠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러면 황후는 어찌 하오?"라고 하자, 상관걸이 말했다: "사슴을 쫓는 개가 어찌 토끼를 돌볼 격이 있겠소! 게다가 황후의 지위가 존귀하지만, 한번 황제의 마음이 변하면 비록 평민이 되고자 해도 불가능할 것이오. 이는 백 대에 한 번 오기 어려운 때이오!" 마침 개장공주의 집사 관리의 아버지인 전답세관 연창이 그들의 음모를 알고 대사농 양창에게 보고했다. 양창은 평소 신중하고 일을 두려워하여 감히 알리지 못하고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그 사실을 간대부 두연년에게 알렸고, 두연년이 조정에 아뢰었다. 9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승상에게 명하여 중이천석 관리들을 거느리고 손종지와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정외인 등을 추포하고 그들의 종족까지 모두 주살하게 했으며, 개장공주는 자살했다. 연왕 유단이 소식을 듣고 승상 평을 불러 말했다: "일이 발각되었으니 군사를 일으켜야 하겠소?" 평이 말했다: "좌장군이 이미 죽었고 백성들도 모두 알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연왕은 근심하고 분개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군신과 비빈, 부인들과 작별했다. 마침 천자가 조서를 내려 유단을 책망하자, 유단은 인끈으로 목을 매 자살했고, 후궁과 부인 중 유단을 따라 자살한 자가 20여 명이었다. 천자가 은혜를 베풀어 연왕의 태자 유건을 서인으로 면해주고 유단에게 시호를 날왕이라 내렸다. 황후는 나이가 어려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곽광의 외손녀였으므로 폐위되지 않았다.
7 경오일에 우부풍 왕흔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8 겨울 10월에 두연년을 건평후에, 연창을 의성후에, 전 승상정사 임궁이 상관걸을 잡은 공으로 익양후에, 승상소사 왕산수가 상관안을 속여 승상부로 유인한 공으로 상리후에 봉했다. 오랜 후에 문학관 제음 사람 위상이 대책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 연왕이 무도하여 한의가 나서서 극력 간언하다가 연왕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한의는 비간과 같은 친척 관계가 없었으면서도 비간의 절개를 실천하였으니, 마땅히 그의 아들을 드러내어 상을 주어 천하에 신하의 도리를 밝혀야 합니다." 하여 한의의 아들 한연수를 간대부로 발탁하였다.
9 대장군 곽광은 조정에 구신이 없음을 이유로, 광록훈 장안세가 선제 때부터 상서령으로 지행이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므로, 그를 우장군 겸 광록훈으로 삼아 자신의 부관으로 삼기를 청하여 윤허받았다. 장안세는 전 어사대부 장탕의 아들이다. 곽광은 또 두연년이 충절이 있음을 들어 그를 태복, 우조, 급사중으로 발탁했다. 곽광은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였으나 두연년은 항상 관대함으로써 그를 보좌했다. 관리와 백성이 나라에 이로운 일을 상소하면 항상 두연년에게 내려 의논하여 처리한 뒤에 아뢰었다. 상소에서 시험 삼아 벼슬을 시킬 만하다고 하면 현령으로 임명하고, 혹은 승상과 어사가 임명하여 시험 삼아 쓰게 한 뒤 1년이 지나 그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으며, 혹은 법에 따라 그 죄를 물었다.
10 이 해에 흉노가 좌우부의 2만 기병을 징발하여 4대로 나누어 동시에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한나라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여 9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으며, 우두왕을 생포했다. 한나라에는 손실이 없었다. 흉노는 우두왕이 한나라에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한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습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서북쪽 멀리로 옮겨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수초를 따라 목축하지 못했으며, 백성을 징발하여 우두에 주둔시켰다.
원봉 2년(임인년, 기원전 79년)
1 여름 4월에 황상이 건장궁에서 미앙궁으로 옮겼다.
2 6월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3 이 해에 흉노가 다시 9천 기병을 보내 항복성을 주둔시키며 한나라를 방비하고, 북쪽 우오수 위에 다리를 놓아 군사가 강을 건널 수 있게 하여 도망할 준비를 했다. 흉노는 한나라와 화친하고자 하면서도 한나라가 허락하지 않을까 두려워 먼저 제의하지 않고 항상 측근을 시켜 한나라 사신에게 암시하게 했다. 그러나 침략과 약탈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한나라 사신을 대우하는 것을 더욱 후하게 하여 이로써 점차 화친을 이루고자 했다. 한나라도 포용하는 책략을 취했다.
원봉 3년(계묘년, 기원전 78년)
1 봄 정월에 태산에서 큰 돌이 저절로 섰고, 상림원에 있던 마른 버드나무가 쓰러졌다가 다시 저절로 서서 자랐으며, 벌레가 나뭇잎을 먹어서 생긴 무늬가 글자를 이루어 '공손병기립'이라고 했다. 부절령 노나라 사람 수홍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큰 돌이 저절로 서고 마른 버드나무가 다시 선 것은 마땅히 평민이 천자가 될 조짐입니다. 마른 나무가 다시 자라난 것은 혹시 이미 폐출된 공손씨 집안이 다시 흥할 것입니까? 한나라는 요임금의 후손으로 천하를 전할 명운이 있으니, 마땅히 현인을 찾아 선양하고 스스로 물러나 백 리의 땅을 봉지로 받아 천명에 순응해야 합니다." 수홍은 요사한 말을 퍼뜨려 백성을 현혹시킨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2 흉노 선우가 이오왕을 시켜 한나라 변경을 정탐하게 하여 주천과 장액의 병력이 더욱 약해졌다고 말하고, 병력을 내어 시험 삼아 공격하여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한나라는 먼저 항복한 자를 얻어 그들의 계획을 듣고, 천자가 조서를 내려 변경에 경계와 방비를 하게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현왕과 이오왕이 4천 기병을 거느리고 3대로 나누어 일륵, 옥란, 번화로 들어갔다. 장액태수와 속국도위가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도망친 자는 겨우 수백 명이었다. 속국의 의거왕이 이오왕을 활로 쏘아 죽여 황금 200근과 말 200필을 상으로 받고 이어 이오왕에 봉해졌다. 이후로 흉노는 감히 다시 장액에 침입하지 못했다.
3 연왕과 개장공주의 반란 때, 상홍양의 아들 상천이 도망쳐 아버지의 옛 하리였던 후사오의 집에 머물렀는데, 후에 상천이 붙잡혀 주살되었다. 때마침 사면령이 내려지자 후사오가 스스로 자수했다. 정위 왕평과 소부 서인이 함께 모반 사건을 심리하여 모두 '상천은 아버지가 모반한 데 연좌된 것이니, 후사오가 그를 숨긴 것은 모반자를 숨긴 것이 아니라 종범을 숨긴 것'이라 하여 사면령에 따라 후사오의 죄를 면제해 주었다. 후에 시어사가 심리하여 확인하기를 '상천은 경술을 통달하고 아버지가 모반함을 알면서도 간언하여 막지 않았으니 모반자 본인과 다름이 없다. 후사오는 본래 3백 석 관리로서 먼저 상천을 숨겼으니 평민이 종범을 숨긴 것과 같게 볼 수 없으며, 후사오는 사면될 수 없다.' 하여 다시 심리할 것을 청하고, 정위와 소부가 모반자들을 놓아주었다고 탄핵했다. 소부 서인은 승상 차천추의 사위였으므로, 차천추가 여러 번 후사오를 위해 변호했다. 그는 대장군 곽광이 듣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중이천석 관리와 박사들을 공거문에 모아 후사오의 죄를 논의하게 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대장군의 뜻을 알고 모두 후사오를 대역무도로 판결했다. 다음 날 차천추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밀봉하여 보고했다. 곽광은 이에 차천추가 중이천석 이하 관리들을 함부로 소집하고 안팎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 정위 왕평과 소부 서인을 옥에 가두었다. 조정 상하에서는 모두 승상이 연루될까 두려워했다. 태복 두연년이 곽광에게 상주기를 올려 말하기를 "관리가 죄인을 놓아준 것에는 상법이 있습니다. 지금 다시 후사오를 대역무도라고 비난하는 것은 법률상 너무 무거울 듯합니다. 게다가 승상은 본래 주견이 없고 남에게 잘 보이기를 좋아하니, 이는 그의 평소 품행입니다. 중이천석 관리들을 함부로 소집한 것은 확실히 잘못입니다. 제가 어리석게 생각하건대 승상은 전조의 노신으로 선제께 중용되었고 큰 허물이 없으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즘 백성들이 형벌이 너무 무겁고 관리가 법을 가혹하게 쓴다는 논의가 많습니다. 지금 승상이 의논한 것도 또 옥사에 관한 일인데, 이 때문에 승상이 연루된다면 아마도 뭇사람의 마음에 맞지 않아 군신이 시끄럽고 백성이 사사로이 논의하며 유언비어가 사방으로 퍼질 것입니다. 저는 사사로이 장군이 천하에서 이 좋은 명성을 잃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곽광은 정위와 소부가 법을 농락하고 경중을 제멋대로 하였다 하여 결국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여름 4월에 서인은 자살하고 왕평은 좌풍익 가승호와 함께 모두 요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승상에게는 연루되지 않아 마침내 승상은 무사하였다. 두연년이 의논을 공평하게 하고 조정을 조화시킨 것이 모두 이러한 부류의 일이었다.
겨울, 요동의 오환(烏桓)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초, 묵돌(冒頓) 선우(單于)가 동호(東胡)를 격파하자, 동호의 남은 무리들은 흩어져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을 지키며 두 부족이 되어 대대로 흉노(匈奴)에 신복하였다. 무제(武帝)가 군대를 내어 흉노의 좌부(左部)를 격파하고, 이에 오환을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 새외(塞外)로 이주시켜 한(漢)나라를 위해 흉노의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를 두어 그들을 감독하고 통솔하게 하여 흉노와 교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무리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흉노의 기병 3천여 명이 오원(五原)으로 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해 갔다. 후에 수만 명의 기병이 남하하여 변경을 따라 사냥하고, 새외(塞外)의 정돈(亭燉)을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을 약탈해 갔다. 이때 한나라 변경 군현의 봉화(烽火) 정찰이 매우 엄격하여, 흉노의 침입 약탈이 거의 이익을 얻지 못하자,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한나라는 또 흉노에게서 항복한 사람을 얻었는데, 그 말이 오환이 일찍이 전 선우(先單于)의 무덤을 파헤쳤기에 흉노가 그들을 원망하여, 바로 2만 기병을 징발하여 오환을 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곽광(霍光)이 군대를 내어 그들을 요격 공격하려 하여, 이 일을 호군도위(護軍都尉) 조충국(趙充國)에게 묻자, 조충국은 생각하기를 "오환이 최근에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지금 흉노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한나라에 이롭습니다. 더구나 흉노가 침략을 거의 하지 않아 북변이 다행히도 조용한데,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을 우리가 군대를 내어 요격하면, 도리어 구려(寇患)를 불러들이고 사단을 일으키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곽광이 또 중랑장(中郎將) 범명우(范明友)에게 묻자, 범명우가 공격할 만하다고 하여, 이에 범명우를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2만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가게 하였다. 흉노가 한나라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군대를 철수하였다. 당초, 곽광이 범명우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군대가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만약 흉노보다 뒤처지면 형세를 따라 오환을 공격하라." 하였다. 오환은 당시 막 흉노 군대의 공격을 받은 터라, 범명우가 흉노보다 뒤늦게 도착하였으나, 오환이 피폐해진 틈을 타 그들을 공격하여 참수한 것이 6천여 급(級)이었고, 오환왕 세 명의 목을 얻었다. 흉노는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다시는 군대를 낼 수 없었다.
원봉(元鳳) 4년(갑진, 기원전 77년)
1 봄, 정월, 정해일, 황제가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2 갑술일, 부민정후(富民定侯) 전천추(田千秋)가 죽었다. 당시 정사는 모두 대장군 곽광에게서 결단되었고, 전천추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심스럽고 후덕하게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3 여름, 5월, 정축일, 효문묘(孝文廟)의 정전(正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황상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소복(素服)을 입고, 중이천석(中二千石) 관원들에게 명하여 오교(五校)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리하게 하였는데, 6일 만에 완성되었다. 태상(太常)과 묘령(廟令), 승(丞), 낭(郎), 이(吏) 등이 모두 대불경(大不敬)의 죄로 탄핵을 받았다. 마침 대사면이 있었으나, 태상 요양후(轑陽侯) 덕(德)은 면직되어 서민이 되었다.
4 6월,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였다.
5 당초, 우미(杅冞)가 태자 내단(賴丹)을 구자(龜茲)에 인질로 보냈다.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공격하고 돌아올 때, 내단을 데리고 경성(京城)으로 왔다. 곽광이 상홍양(桑弘羊)의 이전 건의를 받아들여 내단을 교위(校尉)로 임명하고 군대를 거느려 윤대(輪臺)에서 둔전(屯田)하게 하였다. 구자의 귀인(貴人) 고익(姑翼)이 구자왕에게 말하기를 "내단은 본래 우리 속국(屬國)의 신하인데, 지금 한나라의 인수(印綬)를 차고 와서 우리나라에 가까이 접근하여 둔전하니,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구자왕이 마침내 내단을 죽이고, 이내 글을 올려 한나라에 사죄하였다.
누란왕(樓蘭王)이 죽자, 흉노가 먼저 이 소식을 듣고 흉노에 인질로 있던 누란 왕자 안귀(安歸)를 돌려보내니, 안귀가 왕이 될 수 있었다. 한나라는 사자를 보내 새 왕에게 조서를 내려 입조하여 알현하라고 명하였으나, 누란왕은 사양하며 오지 않았다. 누란국은 가장 동쪽 변경에 있어 한나라에 가까웠고, 백룡퇴(白龍堆) 사막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수초가 부족했으며, 항상 한나라 사자의 안내자가 되어 물을 지고 양식을 메고 오가는 한나라 사자를 영접하고 배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여러 번 한나라 관리와 병사들에게 침탈을 당하여 징계를 받은 탓에 한나라와 왕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후에 또 흉노의 이간질을 받아 여러 번 한나라 사자를 가로막아 살해하였다. 누란왕의 동생 위타기(尉屠耆)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이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였다. 준마감(駿馬監) 북지(北地) 사람 부개자(傅介子)가 대완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가 가는 김에 누란과 구자를 꾸짖게 하였다. 부개자가 누란과 구자에 이르러 그들의 왕을 꾸짖자, 두 나라 왕이 모두 잘못을 인정하고 복종하였다. 부개자가 대완에서 돌아와 구자에 이르렀을 때, 마침 흉노 사자가 오손(烏孫)에서 돌아와 구자에 머물고 있었다. 부개자가 그 휘하의 이사(吏士)들을 거느리고 함께 흉노 사자를 죽였다. 돌아와 조정에 이 일을 보고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부개자를 중랑(中郎)으로 임명하고, 승진시켜 평락감(平樂監)으로 삼았다.
부개자가 대장군 곽광에게 말하기를 "누란과 구자가 여러 번 반복 무상하니, 만약 주살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징계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구자를 지날 때, 구자왕은 사람됨이 가까이하기 쉽고 따르기 쉬워 손을 쓰기 쉽습니다. 제가 가서 그를 시해하여 여러 나라에 위엄을 보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장군이 말하기를 "구자는 길이 멀고, 먼저 누란에서 시험해 보라." 하였다. 이에 황제에게 아뢰고 그를 보냈다. 부개자와 병사들은 모두 금폐(金幣)를 가지고 가서, 조서를 받들어 외국에 상을 내린다고 떠들고 다니며 누란에 이르렀다. 누란왕이 부개자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자, 부개자는 일행을 이끌고 떠나는 척 하다가 누란의 서쪽 경계에 이르러, 통역관으로 하여금 누란왕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한나라 사자가 황금과 비단을 가지고 길을 따라 여러 나라에 상을 내립니다. 대왕이 와서 받지 않으시면, 저는 서쪽 나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내 황금과 재물을 꺼내 통역관에게 보였다. 통역관이 돌아가 누란왕에게 보고하자, 누란왕이 한나라의 재물을 탐내어 와서 한나라 사자를 만났다. 부개자가 그와 함께 앉아 술을 마시며 재물을 내어 보이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취하였다. 부개자가 누란왕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저에게 은밀히 대왕께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누란왕이 일어나 부개자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가 단둘이 이야기하는데, 두 장사(壯士)가 뒤에서 그를 찔렀다. 칼날이 엇갈려 가슴에 꽂히자, 그 자리에서 죽었다. 누란의 귀족과 시종들은 모두 사방으로 도망쳤다. 부개자가 누란왕이 한나라를 저버린 죄가 있다고 선언하며 "천자가 나를 보내 누란왕을 주살하게 하셨다. 마땅히 이전에 한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누란왕의 동생 위타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 한나라 대군이 곧 도착할 터이니, 너희들은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개자가 이내 누란왕 안귀의 목을 베어 역참의 말을 이용해 신속히 장안(長安)으로 보내어, 그 목을 궁성 북문의 성루 아래에 걸어두었다.
이에 위타기를 누란왕으로 세우고, 누란국을 선선국(鄯善國)으로 고쳐 이름을 바꾸고, 그를 위해 인장을 새겼다. 궁녀를 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고, 수레와 말과 군수 물자를 갖추어 주었다. 승상(丞相)이 백관을 거느리고 횡문(橫門) 밖까지 전송하며, 길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를 보냈다. 누란왕이 스스로 천자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신이 한나라에 오래 머물렀고, 지금 돌아가면 세력이 약하지만 전임 왕에게 아들이 있어, 아마 그들에게 살해될까 두렵습니다. 신의 나라에 이순성(伊循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땅이 기름집니다. 바라옵건대 한나라에서 장수 한 명을 보내어 그곳에서 둔전하며 곡식을 비축하게 하여, 신이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할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사마(司馬) 한 명과 이사(吏士) 40명을 보내 이순에서 둔전하게 하여 그곳을 진압하고 달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을사일, 범명우를 평릉후(平陵侯)로, 부개자를 의양후(義陽侯)로 봉하였다.
신 사마광(司馬光)은 말한다: 제왕이 융적(戎狄)을 대함에 있어 배반하면 토벌하고, 순종하면 풀어주었다. 지금 누란왕이 이미 죄를 인정했는데도 형세를 따라 그를 죽였으니, 이후에 다시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회유의 수단으로 불러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그가 죄가 있어 토벌한다고 여겼다면, 마땅히 군대를 진열하고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했어야 했다. 지금 사자를 보내 금폐로 유인한 뒤 그를 죽였으니, 이후에 명을 받들어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어찌 믿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대단한 한나라의 강함을 가지고 오랑캐에게 도적 같은 계략을 썼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는가! 논하는 사람 중에 어떤 이는 부개자를 칭송하여 이것을 기이한 공적으로 여기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봉 5년(을사, 기원전 76년)
1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2 가을, 상군(象郡)을 폐지하고, 각각 울림군(鬱林郡)과 장가군(牂柯郡)에 나누어 귀속시켰다.
3 겨울, 11월, 큰 우레와 비가 내렸다.
4 12월, 경술일, 의춘경후(宜春敬侯) 왕흔(王訴)이 죽었다.
원봉 6년(병오, 기원전 75년)
1 봄, 정월, 각 군(郡)과 국(國)의 죄수들을 모집하여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菟郡)의 성을 쌓게 하였다.
2 여름,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였다.
3 오환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자, 도료장군 범명우를 보내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4 겨울, 11월, 을축일, 양창(楊敞)을 승상으로, 소부(少府) 하내(河內) 사람 채의(蔡義)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