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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 육십육

제 66 편

자치통감 제250권

【당기육십육】 상장집서(867년)부터 강도대연헌(874년)까지, 모두 8년간의 기록이다.

봄 정월 을묘일에 절동 군대가 구보와 동관관 앞에서 교전하였는데, 범거식이 전사하고 유근만이 간신히 몸을 피했다. 을축일에 구보가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섬현을 함락시키고, 관청의 창고를 열어 장사를 모집하자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월주가 크게 놀랐다. 당시 양절은 오랫동안 태평하여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고, 병기와 갑옷은 썩고 무디었으며, 현존하는 병사는 3백 명이 채 안 되었고, 정도덕이 다시 신병을 모집하여 보충하였다. 군리들이 뇌물을 받고 모집한 자들은 대부분 허약한 사람들이었다. 정도덕은 자장 심군종, 부장 장공서, 망해진장 이규를 보내 새로 모집한 병사 5백 명을 거느리고 구보를 공격하게 하였다. 2월 신묘일에 섬현 서쪽에서 구보와 교전하였는데, 도적군은 세 갈래 시내의 남쪽 기슭에 복병을 두고, 북쪽 기슭에 진을 치고 시내 상류를 막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하였다. 교전 후 도적군은 거짓 패주하였고, 관군이 추격하여 시내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도적군이 막았던 둑을 터뜨리자 큰물이 밀려와 관군은 크게 패하여 세 장수는 모두 전사하고 관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이에 산과 바다의 여러 도적 및 다른 도의 불법자와 망명자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무리가 3만 명에 이르렀고, 32개 대로 나뉘었다. 그중 작은 두목 중 지모가 있는 자는 유망을 추대하였고, 용맹이 뛰어난 자는 유경과 유종간을 추대하였다. 여러 도적들은 모두 멀리서 편지와 예물을 보내 그 휘하에 귀속되기를 청하였다. 구보는 스스로 천하도지병마사라 칭하고, 연호를 나평으로 고치고, 인신을 천평이라 주조하였다. 물자와 양식을 크게 모으고, 뛰어난 장인을 초빙하여 병기와 기계를 수선 제조하니, 위세가 중원을 뒤흔들었다.

병신일에 성무헌문효황제를 정릉에 안장하고, 묘호를 선종이라 하였다.

병오일에 백민중이 조정에 들어오다가 섬돌에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쳐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다. 정도덕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급함을 알리고, 또한 인근 도에 구원을 청하였다. 절서에서는 아장 능무정이 4백 명을, 선흡에서는 아장 백종이 3백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정도덕은 처음에 그들에게 성문과 동소강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가, 얼마 후 다시 부중으로 불러들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정도덕이 그들에게 지급한 군량은 도지(度支)의 상규보다 13배나 많았으나, 선주와 윤주의 장수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겼다. 선주와 윤주의 장수들은 현지 병사들을 길잡이로 삼아 도적과 교전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장수 중 어떤 이는 병을 칭탁하고, 어떤 이는 말에서 떨어지는 척하며, 가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관직 등급을 요구하여 결국 파견하지 못하였다. 도적의 기병이 평수 동소강에 이르자, 성 안의 사대부와 백성들은 배를 준비하고 양식을 꾸려 밤새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각자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정도덕이 나약하고 겁이 많음을 알고, 무장을 골라 그를 대체할 것을 논의하였다. 하후자(夏侯孜)가 말했다. "절동은 산과 바다가 깊고 험하여 계략으로 취할 수는 있으나 힘으로 강하게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반(西班, 무관) 중에는 이 일을 논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임 안남도호 왕식(王式)은 비록 유가 자제이나 안남에서 화이(華夷)를 위복시켜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졌으니,任用할 만합니다." 여러 재상들이 모두 옳다고 여겼다. 이에 왕식을 절동관찰사로 임명하고, 정도덕을 불러들여 태자빈객으로 삼았다. 3월 신해 삭일에 왕식이 조정에 들어가 대면하여, 황제가 도적을 토벌할 계략을 물었다. 대답하였다. "신에게 군대만 주신다면 도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환관이 곁에 서 있다가 말했다. "군대를 발동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왕식이 말했다. "신이 국가의 비용을 아낀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병력이 많으면 도적이 빨리 격파되어 비용이 오히려 절약됩니다. 만약 병력이 적어 도적을 이기지 못하고 시간을 끌면 도적의 세력이 더욱 커져 강회 지역의 여러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국가의 지출은 모두 강회에 의존하는데, 만약 그 길이 막히면 위로는 구묘(九廟)로부터 아래로는 십군(十軍)에 이르기까지 공급할 곳이 없어져, 그 비용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돌려 환관을 보며 말했다. "그에게 군대를 주어야 하겠다." 이에 조서를 내려 충무, 의성, 회남 등 각 도의 군대를 발동하여 그에게 넘겨주었다. 구보는 병력을 나누어 구주와 무주를 약탈하였다. 무주압아 방질, 산장 누증, 구주십장 방경심이 병사를 거느리고 험한 곳을 지켜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또 병력을 나누어 명주를 약탈하자, 명주의 백성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도적이 만약 성에 들어오면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육장이 될 터인데, 하물며 재물이야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이에 스스로 서로 거느리고 돈을 내어 용사를 모집하고, 병기를 수리하며, 목책을 세우고, 해자를 파고, 다리를 끊어 굳게 지킬 준비를 하였다. 도적이 또 병사를 보내 태주를 약탈하여 당흥을 함락시켰다. 기사일에 구보가 친히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상우를 약탈하며 불을 질렀다. 계유일에 여요에 들어가 현승과 현위를 죽였다. 동쪽으로 자계를 함락시키고, 봉화로 들어가 영해에 도착하여 현령을 죽이고 그곳을 점거하고, 병력을 나누어 상산을 포위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장정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 늙고 약한 자들은 짓밟혀 죽었다.

왕식의 임명 조서가 내려지자 절동의 인심이 비로소 약간 안정되었다. 구보가 그의 부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지 않았다. 유망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리가 있으면서도 계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지금 조정에서 왕중승(王中丞)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데, 이 사람은 지혜와 용맹이 적이 없다고 들었으니, 40일이 못 되어 반드시 도착할 것입니다. 병마사(兵馬使)께서는 마땅히 속히 군사를 거느리고 월주를 취하여 성벽에 의지하고 관청 창고를 점거한 후, 병사 5천 명을 보내 서릉을 지키고, 절강을 따라 보루를 쌓아 막으십시오. 배를 많이 징발하여 기회를 타서 곧장 나아가 절서를 취하고, 양자강을 건너 양주의 화물과 보물을 약탈하여 스스로를 채우십시오. 돌아온 후에는 석두성을 수리하여 지키면, 선흠과 강서에 반드시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 유종간을 보내 1만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가 복건을 습격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국가가 조공과 부세를 받는 지역이 모두 우리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다만 자손이 지키지 못할까 걱정될 뿐,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구보가 말했다. "그대는 취했도다, 내일 다시 의논하자!" 유망은 구보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자 분노하여 취한 척하며 나갔다. 진사 왕로(王輅)가 도적 무리 가운데 있었는데, 도적들이 그를 손님으로 대우하였다. 왕로가 구보를 설득하여 말했다. "유부사(劉副使)의 계책은 손권(孫權)이 했던 일입니다. 그분은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때를 타서 강동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중원이 무사하여 이런 공업을 이루기 쉽지 않습니다. 무리를 모아 험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고, 육지에서는 농사짓고 바다에서는 고기잡이를 하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 섬으로 도망가는 것이 만전지책입니다." 구보가 왕식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름 4월, 왕식이 군대를 이끌고 시구에 이르렀을 때, 의성군의 군용이 정제되지 않아 왕식이 그 장수를 참수하려다가 한참 만에 풀어주었다. 이로부터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서릉에 도착하자, 구보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식이 말했다. "이는 반드시 항복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다만 내 하는 짓을 엿보고 나를 교만하고 게을러지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에 사자에게 말했다. "구보가 스스로 결박하여 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을미일에 왕식이 월주에 들어가 정무를 인계받은 후, 정도덕을 위해 주연을 베풀며 말했다. "왕식이 군정을 주관하므로 술을 마실 수 없사오니, 감군께서는 여러 빈객들과 함께 취하도록 드시기 바랍니다." 밤이 되자 이어서 촛불을 켜고 말했다. "왕식이 여기 있는데, 도적이 어찌 사람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방해하겠습니까!" 병신일에 먼 교외에서 정도덕을 전송하고, 또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왔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군령을 정비하니, 군량이 부족하다고 보고하는 소리가 그쳐지고, 병을 칭탁하고 집에 누워 있던 자들이 일어나고, 먼저 승진을 요청하던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도적의 별장(別將) 홍사간과 허회능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왕식이 말했다. "그대들이 항복한 것은 옳다. 마땅히 공을 세워 스스로를 드러내어라." 그들로 하여금 무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였는데, 도적과 교전하여 공을 세우자 이에 상주하여 관직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적군의 간첩이 월주(越州)에潜入하였는데, 군리(軍吏)가 그들을 숨겨주고 음식을 제공하였다. 문무 장리(文武將吏)들은 왕왕 몰래 적군과 내통하며, 성이 함락되는 날에 죽음을 면하고 처자식을 보전하기를 바랐다. 어떤 자는 거짓으로 적군 장수를 인도하여 투항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허실을 엿보았다. 성 안의 비밀 계획과 사람을 물리친 대화까지도 적군이 모두 알 수 있었다. 왕식(王式)이 몰래 이를 알아내고, 모두 수색하여 체포한 뒤 참수하였다. 특히 강하고 교활한 장리를 엄벌하고, 문호 출입을 엄격히 하여 증표 없는 자는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야간 경계를 철저히 하자, 적군이 비로소 우리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왕식은 여러 현(縣)에 명하여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적군이 아직 진멸되지 않았고 군량이 급한데, 어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왕식이 말하기를 “이것은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관군은 기병이 부족하였는데, 왕식이 말하기를 “토번(吐蕃)과 회흘(回鶻)이 최근에 강회(江淮) 지방으로 유배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험난한 지형에 익숙하고 말 타기에 익숙하니,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부중(府中)에서 명부를 조사하여 용맹하고 건장한 자 백여 명을 얻었다. 이 포로들은 오랫동안 타향에 머물러 있었는데, 소속 관청에서 그들을 매우 박대하여 곤궁하고 굶주림이 심하였다. 왕식이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또 그들의 부모와 처자에게도 도움을 주자, 모두 울며 절하고 환호하며 죽음으로 보답하기를 원하였고, 모두 기병으로 임명하고 기장(騎將) 석종본(石宗本)에게 거느리게 하였다.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이에 따라 등록하게 하고, 또 상주하여 용릉감(龍陂監)의 말 2백 필을 얻어 마침내 기병이 충족되었다. 어떤 사람이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적군의 원근과 다소를 살피자고 청하였으나, 왕식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약한 병사를 골라 건장한 말을 타게 하고, 적은 병력을 배치하여 정찰 기병으로 삼았다. 여러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묻지 못하였다. 이에 각 영(營)의 현존 병사와 토단자제(土團子弟)를 점검하여 4천 명을 얻었고, 그들을 보내 군대를 인도하여 여러 길로 나누어 적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부(府)에는 지키는 병사가 없었으므로, 다시 토단(土團) 천 명을 등록하여 보충하였다. 이에 선흡장(宣歙將) 백종(白琮), 절서장(浙西將) 능무정(凌茂貞)에게 명하여 본부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북래장(北來將) 한종정(韓宗政) 등에게 토단을 거느리게 하여 합계 천 명으로 하고, 석종본은 기병을 거느려 선봉이 되어 상우(上虞)에서 봉화(奉化)로 나아가 상산(象山)의 포위를 풀게 하였으니, 이를 동로군(東路軍)이라 불렀다. 또 의성장(義成將) 백종건(白宗建), 충무장(忠武將) 유군초(游君楚), 회남장(淮南將) 만린(萬璘)에게 명하여 본부 군대를 거느리고 태주(台州) 당흥군(唐興軍)과 합세하게 하였으니, 이를 남로군(南路軍)이라 불렀다. 이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험하거나 평탄한 곳을 다투지 말고, 가옥을 불태우지 말며, 백성을 죽여 목을 늘리려 하지 마라! 백성들이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항복을 권유하라. 적군의 금은과 베를 노획한 것은 관청에서 묻지 않는다. 포로로 잡은 자들은 모두 월주 사람이니 놓아주어라.”라고 하였다.

계묘일(癸卯日)에, 남로군이 적군의 와주채(沃州寨)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갑진일(甲辰日)에 신창채(新昌寨)를 함락시키고, 적장 모응천(毛應天)을 격파하고 당흥(唐興)에 이르렀다.

백민중(白敏中)이 세 차례나 상표(上表)하여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우보궐(右補闕) 왕보(王譜)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지금이야말로 재상이 마음을 다해야 할 때이니, 잠시라도 자리가 비어서는 안 됩니다. 민중(敏中)이 정월부터 병으로 누워 지금까지 이미 넉 달이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다른 재상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하시지만, 일찍이 세 차례의 각(刻)을 넘기지 않으셨으니, 천하의 일을 폐하께서 어느 겨를에 그들과 토론하셨겠습니까! 바라건대 민중의 사직을 허락하시고, 덕망이 높고 중한 이를 맞이하여 찾아내어 폐하의耳目을 밝게 하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유일(己酉日)에 왕보를 양책현령(陽翟縣令)으로 좌천시켰다. 왕보는 왕규(王珪)의 6대손이다. 5월, 경술일(庚戌日) 초하루에 급사중(給事中) 정공여(鄭公輿)가 왕보를 좌천시키는 칙서를 봉환(封還)하였다. 황제가 재상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재상들은 왕보가 백민중을 침해하였다고 여겨 결국 그를 좌천시켰다.

신해일(辛亥日)에, 절동(浙東) 동로군(東路軍)이 영해(寧海)에서 적장 손마기(孫馬騎)를 격파하였다. 무오일(戊午日)에, 남로군이 당흥(唐興) 남곡(南谷)에서 적장 유황(劉暀)과 모응천(毛應天)을 크게 격파하고 모응천을 참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식은 병력이 부족하여 상주(上奏)로 다시 충무(忠武)와 의성(義成) 두 군(軍)을 징발하고, 또 소의군(昭義軍)을 징발할 것을 청하였고,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세 길의 병마가 월주(越州)에 도착하자, 왕식은 충무군 장수 장인(張茵)에게 명하여 3백 명을 거느리고 당흥(唐興)에 주둔하여 적군이 남쪽으로 나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고, 의성군 장수 고나예(高羅銳)에게 명하여 3백 명을 거느리고 태주(台州)의 지방군을 더하여 직접 영해(寧海)로 가서 적군의 소굴을 공격하게 하며, 소의군 장수 협갑기(夾跌戣)에게 명하여 4백 명을 거느리고 동로군을 증원하여 적군이 명주(明州)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 경신일(庚申日)에, 남로군이 해유진(海游鎮)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자, 적군은 용계동(甬溪洞)으로 도망쳤다. 무진일(戊辰日)에, 관군이 동구(洞口)에 주둔하자, 적군이 동굴에서 나와 교전하였으나 또 관군에게 패배하였다. 기사일(己巳日)에, 고나예가 적군의 편장(偏將) 유평천(劉平天)의 영채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부터 여러 관군이 적군과 19번 교전하여 적군이 연이어 패배하였다. 유황이 구보(裘甫)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만약 내 계책을 따라 조주(趙州)로 들어갔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륙(王輅) 등 여러 진사(進士)가 적군 가운데 있었는데, 모두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유황이 그들을 모두 죽이며 말하기를 “내 계책을 어지럽힌 자는 바로 이 푸른 벌레들이다!”라고 하였다. 고나예가 영해(寧海)를 함락시키고, 도망친 백성들을 불러 모아 7천여 명을 얻었다. 왕식이 말하기를 “적군이 곤궁하고 굶주리니 반드시 바다로 도망칠 것이다. 한번 바다에 들어가면 1년 반도 잡을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나예의 군대를 해구(海口)에 주둔시켜 그들을 막게 하였다. 또 망해진(望海鎮) 장수 운사의(雲思益)와 절서장(浙西將) 왕극용(王克容)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해변을 따라 순찰하게 하였다. 운사의 등이 영해 동쪽에서 적장 유종간(劉從簡)을 만났는데, 적군은 수군이 갑자기 올 줄 예상하지 못하여 모두 배를 버리고 산골짜기로 도망쳤고, 관군은 그들의 배 17척을 노획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왕식이 말하기를 “적군은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오직 황함령(黃罕嶺)만이 섬현(剡縣)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아쉽게도 병력을 보내 지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도 마침내 사로잡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보가 영해를 잃은 후,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진관(南陳館) 아래에 주둔하였는데, 무리는 아직 1만여 명이었다. 신미일(辛未日)에, 동로군이 상□촌(上□村)에서 적장 손마기를 격파하자, 적장 왕고(王皋)가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임신일(壬申日)에, 우습유내공봉(右拾遺內供奉) 설조(薛調)가 상언(上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부세(賦稅) 징수가 한도가 없어, 각지에 떼를 지은 도적의 절반은 도망간 민호(民戶)입니다. 진실로 반드시 섬멸해야 하지만, 또한 가엾게 여길 만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각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부세 이외에 다시는 과파(科派)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 지방 장관에게 엄중히 규찰하도록 칙령을 내리소서.”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원왕(袁王) 이신(李紳)이 사망하였다.

무진일, 절동동로 관군이 남진관에서 구보 군을 크게 격파하여 수천 명의 목을 베었고, 적군이 버린 비단과 포목이 길에 가득하여 이로써 추격병을 지연시키려 하였다. □협결기 장수는 병사들에게 명령하기를 “감히 돌아보는 자가 있거든 목을 베라!” 하니 병사들 중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적군은 과연 황잠령으로 도망쳤다. 유월 갑신일, 적군이 다시 섬현으로 들어갔다. 각로 관군은 구보의 종적을 잃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의성군 장수 장인이 당흥에서 포로를 잡아 바로 고문하려 하자, 포로가 말하기를 “적군이 섬현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저를 놓아주신다면 제가 관군을 위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하였다. 장인이 그의 말을 따라 장인은 구보보다 하루 늦게 섬현에 도착하여 현성 동남쪽에 진영을 쌓았다. 월주 부중에서 구보가 섬현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또 크게 두려워하였다. 왕식이 말하기를 “적군은 와서 잡히려는 것이다!” 하고 명령하여 동, 남 양로 관군이 섬현에서 합류하도록 재촉하였다. 신묘일, 관군이 섬현을 포위하였으나 적군이 성을 지키는 것이 매우 견고하여 관군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시내 물을 끊어 적군이 물이 없어 목마르게 하자고 의논하였다. 적군이 이 계략을 알고 성을 나와 교전하였다. 사흘 동안 모두 여든세 번 싸워 적군이 패하기는 하였으나 관군도 매우 지쳤다. 적군이 항복을 청하자 여러 장수들이 나와 왕식에게 보고하였다. 왕식이 말하기를 “적군은 잠시 쉬려는 것일 뿐이니 더욱 신중히 경계해야 하며 큰 공이 거의 이루어지려 한다.” 하였다. 적군이 과연 다시 성을 나와 교전하여 또 세 번 싸웠다. 경자일 밤, 구보, 유망, 유경이 백여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하며 멀리서 관군 장수들과 이야기하다가 성에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관군이 급히 돌진하여 그들의 후퇴로를 차단하고 사로잡았다. 임인일, 구보 등이 월주로 압송되자 왕식이 유망, 유경 등 스무여 명을 요참형에 처하고 구보는 형구를 채워 서울로 압송하였다. 섬현 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미 구보를 사로잡았으므로 더 이상 방비하지 않았다. 유종간이 오백 명의 정예 병사를 이끌고 포위를 뚫고 도망치자 여러 장수들이 대란산까지 추격하였고 유종간은 험준한 지형을 지켰다. 가을 칠월 정사일,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쳐 이 산을 함락시켰다. 태주자사 이사망이 적군들이 서로 잡아 베어 죄를 씻도록 모집하여 귀순한 자가 수백 명이었고 유종간의 목을 얻어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월주로 돌아오자 왕식이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물었다. “저희들은 군대에서 자라 오랜 전장을 겪었으나 올해 좇아 장군을 따라 적군을 격파하였사오나 사사로이 알지 못하는 일이 있어 감히 묻나이다: 장군께서 막 도착하셨을 때 군량이 매우 급박하였는데 곧바로 곡식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신 것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왕식이 말하기를 “이것은 알기 쉽다. 적군이 곡식을 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유인하였으니, 내가 그들에게 곡식을 주면 그들은 도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각 현에는 수비군이 없어 적군이 이르면 창고의 곡식이 바로 그들을 도와주게 될 터이다.” 하였다. “봉화대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하니 “봉화대는 구원병을 재촉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이미 모두 출발하였고 성 안에는 이어 받을 병사가 없어 헛되이 병사와 백성들을 놀라게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할 뿐이다.” 하였다. “약한 병사들을 정찰 기병으로 삼고 적은 병력만을 준 것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하니 “그 용감한 병사들은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적을 만나면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싸울 것이다. 싸우다 죽으면 적군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이는 저희들이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하였다.

헌종의 아들 이심개를 신왕으로 봉하였다. 팔월, 구보가 서울로 압송되어 동시에서 효수되었다. 왕식을 검교우산기상시로 가봉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각각 등급에 따라 관직과 상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황상께서 항상 월지의 도적을 근심하셨는데 하후자우가 말하기를 “왕식은 재능이 남아나니 머지않아 승전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후자우가 왕식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그대는 오직 구보를 사로잡는 일에 전념하시오, 군중에 필요한 것이 크든 작든 내가 모두全力으로 공급하겠소.” 하였다. 그러므로 왕식이 상주하여 청하는 바가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큰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위왕 이관이 세상을 떠났다.

구월, 백민중이 다섯 차례 표를 올려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신해일, 백민중을 사도,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계유일, 우습유 구용인 유엽이 상언하기를 “이덕규 부자가 재상을 지내며 명성과 정적, 공업과 성과가 있었사옵니다. 귀양 간 이후로 친족들이 거의 죽어 생계가 궁핍하오니 가엾이 여기시어 한 관직을 추증하소서.” 하였다. 겨울 시월 정해일, 황제가 칙령을 내려 이덕규의 태자소보, 위국공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좌복야를 추증하였다.

을해일, 문하시랑, 동평장사 하후자우를 동평장사로 서천절도사에 충원하도록 명하였다. 호부상서, 판탁지 필심을 예부상서,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안남도호 이호가 다시 파주를 탈환하였다.

십일월 정축일, 황상이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개원하였다.

십이월 무신일, 안남 현지 만족이 남조 군사를 인도하여 합쳐 삼만여 명이 허술한 틈을 타 교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도호 이호가 감군과 함께 무주로 도망쳤다.

봄 정월,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옹관 및 인근 도로의 군사를 징발하여 안남을 구원하고 남만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월, 중서령 백민중을 중서령으로 겸직케 하여 봉상절도사에 충원하고; 좌복야, 판탁지 두종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겸임시켰다.

하루, 두 추밀사가 중서성에 이르렀고 선휘사 양공경이 이어 도착하여 오직 두종에게만 읍하며 선지를 받들게 하였고 다른 세 재상은 일어나 서헌으로 물러났다. 양공경이 사사로운 봉함 문서 하나를 꺼내 두종에게 주자 두종이 열어보니, 이는 선종이 위독할 때 환관들이 왕의 감국을 청한 상주문이었고, 말하기를 “당시 재상 중에 서명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모반죄로 논해야 합니다.” 하였다. 두종이 반복하여 오래 읽고 말하기를 “성주께서 즉위하시니 만방이 옹립하였습니다. 오늘 이 문서는 신하로서 마땅히 엿볼 것이 못 됩니다.” 하고 다시 봉하여 양공경에게 주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재상을 죄주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연영전에서 친히 성지를 내리시어 공개적으로 주살하거나 규탄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양공경이 떠난 후 두종이 다시 두 추밀사와 함께 앉아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정과 외정의 신하는 군주를 섬김이 하나의 체와 같아서 재상과 추밀사가 함께 국가 대정에 참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막 즉위하셨으니 번잡한 정무에 아직 익숙지 않으셔서 내정과 외정의 보좌에 의지해야 하며, 본래 인애를 먼저 하고 형벌과 주살을 뒤로 해야 하거늘 어찌 갑자기 재상을 죽이는 일을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주상께서 이러한 관행에 익숙해져 본성이 되신다면, 중위, 추밀사가 궁중에서 권력이 큰데 어찌 스스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두종은 육조의 은혜를 입어 소망하는 바는 군주를 보좌하여 요, 순과 같은 성군이 되게 하는 것이지 조정이 애증으로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였다. 두 추밀사가 서로 바라보며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마땅히 장군의 말씀을 상세히 주상께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장군과 같이 덕이 높은 분이 아니고서는 이를 생각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며 부끄럽고 두려워하며 물러나갔다. 다른 세 재상이 다시 돌아와 두종을 보며 완곡하게 선지의 뜻을 묻자 두종이 말하지 않았다. 세 재상이 불안하여 가문의 보전을 청하였다. 두종이 말하기를 “다른 근심은 없습니다.” 하였다. 이후 조용히 일이 없었고 더 이상 선지하는 일이 없었다. 연영전에 조회가 열렸을 때 황상의 안색이 매우 기뻤다. 이때 사대부들이 환관을 매우 미워하여 일이 조금이라도 연루되면 모두 함께 배척하였다. 건주 진사 섭경이 일찍이 선무군의 연회에 참석하여 감군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후에 진사에 급제하여 장안에서 동년과 함께 외출하여 노닐다가 길에서 그 감군을 만나 말 위에서 서로 읍하였다; 이로 인해 여론이 들끓어 섭경은 마침내 종신토록 폐기되었다. 당시 사대부와 환관이 서로 맞지 않는 정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복왕 이관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 6월 계축일, 염주방어사 왕관을 안남경략사로 임명했다. 이때 이호가 무주에서 지방 군대를 수습하여 여러 만족을 공격해 안남을 다시 탈환했다. 조정에서는 그가 성을 잃은 죄를 추궁하여 담주사호로 좌천시켰다. 이호가 처음 안남에 도착했을 때 만족 추장 두수징을 죽였는데, 그의 종족과 당여들이 이에 여러 만족을 유인하여 교지를 함락시켰다. 조정에서는 두씨의 세력이 강성함을 고려하여 무마 정책에 힘써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자 하여, 두수징의 아버지 두존성을 금오장군으로 추증하고, 다시 이호가 두수징을 죽인 죄를 추궁하여 그를 애주로 장기 유배 보냈다.

가을 7월, 남만이 옹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보다 앞서 광주·계주·용주 세 도에서 함께 군사 3천 명을 징발하여 옹주를 지키게 하고 3년마다 교대하게 했다. 경략사 단문초가 이 세 도의 군복과 군량을 이용하여 현지 주민을 모병해 그들을 대체할 것을 청하자 조정이 허락했으나, 모집된 병사는 겨우 500명 정도였다. 단문초가 조정에 들어가 금오장군이 되고, 경략사 이몽이 그 결원된 군복과 군량을 탐내어 자신의 것으로 삼고, 세 도의 수비 병사를 모두 철수시켜 해산시키고, 오직 모집한 병사로만 좌강과 우강을 방어하게 하니, 원래 병력의 10분의 7~8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만인이 허점을 틈타 침입했다. 당시 이몽은 이미 죽었고, 경략사 이홍원이 진에 도착한 지 겨우 10일 만에 방어할 군대가 없어 성이 함락되자, 이홍원과 감군은 몸을 피해 만주로 달아났고, 20여 일 후에 만인이 떠난 뒤에야 돌아왔다. 이홍원은 이 일로 죄를 받아 건주사호로 좌천되었다. 단문초는 당시 전중감으로 있다가 다시 옹관경략사로 임명되어 진에 도착했을 때, 성안의 백성은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문초는 단수실의 손자이다.

두종이 아뢰었다: "남조가 교화에 귀순한 지 70년, 촉 땅에서는 전쟁이 멈추고 재앙이 없었으며, 여러 부족 만족들이 모두 순종했습니다. 지금 서천의 병력과 군량 물자가 매우 부족하니, 가볍게 그들과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여, 청평관 등에게 새 왕의 이름이 종묘의 휘를 범하였기에 책봉을 하지 못했음을 분명히 알리고, 그가 이름을 고쳐 사은하기를 기다린 뒤 다시 사신을 보내 책봉하는 것이 체면을 보존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좌사랑중 맹목을 조문제사사로 임명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는데, 마침 남조가 힐주를 침범하여 평래관을 공격하자, 맹목은 결국 가지 못했다.

겨울 10월, 어사대부 정애를 산남동도절도사로 임명했다. 11월, 동평장사를 더해 주었다.

봄 정월 경인일, 신하들이 존호를 올려 예문명성효덕황제라 하였다. 대사면을 실시했다.

중서시랑 동평장사 장신을 동평장사로 임명하여 하중절도사를 충당하게 했다.

2월, 체왕 이추가 죽었다.

남조가 다시 안남을 침범하자, 경략사 왕관이 여러 차례 급보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전 호남관찰사 채습을 그를 대신하게 하고, 또 허주·활주·서주·변주·형주·양주·담주·악주 등 여러 도의 군사 각 3만 명을 징발하여 채습에게 주어 남조를 막게 했다.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지자, 만인은 물러갔다. 옹관경략사 단문초가 옛 제도를 변경한 죄로 위위장군·분사로 강등되었다.

좌서자 채경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학하며 속임수가 많았다. 당시 재상이 그에게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여겨, 주청하여 그를 보내 영남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3월, 채경이 돌아와 황제의 뜻에 맞게 일을 아뢰자, 다시 채경을 태복경 대리로 임명하여 형양 이남 선유안무사로 충당하게 했다.

여름 4월 기해일, 칙령을 내려 양가 네 사찰에 각각 계단을 설치하고 21일 동안 승려를 도첩하게 했다. 황제가 불교를 숭상함이 지나쳐 정사를 게을리했는데, 일찍이 함태전에 단을 쌓아 내사 비구니에게 계를 주었고, 양가의 승려와 비구니가 모두 참여했다. 또 궁중에 강석을 설치하고 스스로 경문을 외우며 패다경을 손수 베껴 썼다. 또한 여러 차례 각 사찰에 행차하여 시주를 아끼지 않았다. 이부시랑 소방이 상소하여 아뢰었다: "현원황제의 도는 자애와 검소를 으뜸으로 하고, 소왕의 풍모는 인의를 머리로 삼아, 백 대에 걸쳐 모범이 되었으니 반드시 더할 수 없습니다. 불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애욕 중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을 끊고, 멸도 후의 뛰어난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니, 제왕이 우러러 사모할 바가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때때로 연영전을 열어 사보 대신들을 접견하시고, 백성의 질고를 힘써 아시며, 종묘를 정성껏 받들게 하소서. 함부로 상을 내리고 형벌을 남용하는 것은 재앙이 반드시 이를 것임을 생각하시고, 인정으로 잔악한 자를 감화시켜 살육을 제거하는 것이 얻는 복이 많음을 아소서. 강석을 그만두시고 직접 정사에 부지런히 힘쓰소서." 황제가 비록 그를 가상히 여겼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영남은 옛날에 오관으로 나뉘었는데, 광주·계주·옹주·용주·안남이 모두 영남절도사에 속했다. 채경이 상주하여 영남을 두 도의 절도로 나눌 것을 청하자, 조정이 이를 따랐다. 5월, 칙령으로 광주를 동도, 옹주를 서도로 삼고, 또 계관의 공주와 상주 두 주, 용관의 등주와 암주 두 주를 나누어 옹관에 소속시켰다.不久 이후 영남절도사 위주를 동도절도사로, 채경을 서도절도사로 임명했다.

채습이 여러 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안남에 있었는데, 채경이 그를 시기하여 그가 공을 세울까 두려워 상주했다: "남만이 멀리 도망쳐 변경에 근심이 없는데, 무부들이 공을 세우려고 함부로 수비 병사를 점거하고 군량 수송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황량하고 먼 변방의 길이 멀어 다시 조사하고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간사한 짓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비 병사를 그만두게 하고 각각 본도로 돌려보내소서." 조정이 이를 따랐다. 채습이 여러 차례 상주하여 여러 부족 만족들이 기회를 엿본 지 오래이니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수비 병사 5천 명을 남겨줄 것을 청했으나, 조정이 따르지 않았다. 채습은 만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 생각하고 교지의 병력과 군량 물자가 모두 부족하여 계책과 힘이 모두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열 가지 반드시 죽을 상황을 적어 중서성에 신고했다. 당시 재상이 채경의 말을 믿어 끝내 깨닫지 못했다.

가을 7월, 서주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온장을 쫓아냈다. 처음에 왕지흥이 서주를 얻은 후, 용맹하고 강한 군사 2천 명을 모집하여 은도·조기·문창·협마 등 칠군이라 이름 붙이고, 항상 300여 명으로 스스로를 호위하게 하여 양쪽 낭무 아래에 병기를 드러내고 앉아 있게 하며, 매달 교대하게 했다. 이후 절도사들은 대부분 문관이었는데, 이 군사들이 점차 교만해져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한 사람이 외치면 여러 사람이 모두 호응하여, 절도사는 항상 뒷문으로 도망쳐 나가곤 했다. 전임 절도사 전모는 심지어 그들과 섞여 앉아 술을 마시며 팔을 잡고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 판자를 들고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다. 위로하고 상을 내리는 비용이 하루에 수만에 이르렀고, 비와 바람과 추위와 더위에도 다시 위문했으며, 그래도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며 요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전모가 죽고 온장이 그 뒤를 이었는데, 교만한 군사들은 평소 온장의 성격이 엄격하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다. 온장은 마음을 열고 위로하고 달랬지만, 교만한 군사들은 끝내 시기하고 의심하여 상으로 내린 술과 음식도 입에 대지 않다가, 하루는 마침내 모여 떠들며 그를 쫓아냈다. 조정에서는 온장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을해일에 온장을 빈녕절도사로 임명하고, 절동관찰사 왕식을 무령절도사로 임명했다.

전 서천절도사 동평장사 하후자를 좌복야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충무군과 의성군 두 군대가 왕식을 따라 구보를 토벌했던 병사들이 아직 저장(浙東)에 머물러 있었는데, 조정에서 왕식에게 그들을 이끌고 서주(徐州)로 가도록 명령하자, 교만한 병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했다. 8월, 왕식이 대팽관(大彭館)에 도착하자 그제야 나와 맞이하며 알현했다. 왕식이 정사를 처리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두 진(鎭)의 장수와 병사들을 연회로 대접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미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쥐어 준 뒤, 교만한 병사들을 포위하라고 명령하여 모두 죽였는데, 은도(銀刀) 도장(都將) 소택(邵澤) 등 수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 갑자일(甲子日)에 조칙을 내려, 서주가 이전에 치청도(淄青道)에 속해 있다가 이회(李洧)가 스스로 귀부하여 비로소 서해사(徐海使)의 관청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장건봉(張建封)이 위명으로 총애와 신임을 받자 특별히 호주(濠州)와 사주(泗州) 두 주를 더 관할하게 했다. 당시 원래는 치청과 광채(光蔡)를 제압하고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도적의 화근이 사라진 이후로 무녕(武寧) 한 도가 전적으로 혼란의 근원이 되었다. 이제 서주를 단련사(團練使)로 삼아 연해(兗海) 절도에 소속시키고, 또 호주는 회남도(淮南道)로 돌려보내며, 숙주(宿州)에 숙서도단련관찰사(宿泗都團練觀察使)를 설치한다. 장수와 병사 2천 명을 남겨 서주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연주와 숙주에 나누어 소속시킨다. 그리고 왕식을 무녕절도사(武寧節度使) 겸 서주·사주·호주·숙주 제치사(制置使)로 임명한다. 왕식에게 감군(監軍) 양현질(楊玄質)과 함께 장수와 병사들을 각 도로 분배하는 일을 마친 후, 충무와 의성 두 군대를 이끌어 변주(汴州)와 활주(滑州)로 가서 각각 본도(本道)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직접 경사(京師)로 가도록 위임한다. 은도 등의 군대에 숨어 도망간 장수와 병사들은 한 달 안에 자수하는 것을 허락하며, 일체 묻지 않는다.

영남서도(嶺南西道) 절도사 채경(蔡京)이 정사를 가혹하고 잔혹하게 하여, 포락(炮烙)의 형벌을 설치하자, 온 영토가 그를 원망하여, 결국 옹주(邕州) 군사들에게 쫓겨나 등주(藤州)로 도망갔다. 그는 가짜 조칙과 공토사(攻討使)의 인장을 만들어, 향정(鄉丁)과 인근 토병(土兵)을 모아 옹주로 들어가려 했다. 무리가 오합지졸 같아 한 번 싸우자 곧 패주하여, 계주(桂州)에 의탁하려 갔으나, 계주 사람들은 그가 영남을 분열시킨 것을 원망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채경은 몸 둘 곳이 없었다. 조칙을 내려 그를 애주(崖州) 사호(司戶)로 폄적했으나, 그는 부임하려 하지 않고 돌아와, 영릉(零陵)에 이르렀을 때 조칙이 내려 자살을 명했다. 계관(桂管) 관찰사 정우(鄭愚)를 영남서도 절도사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병신일(丙申日) 초하루, 황자 이이(李佾)를 위왕(魏王)으로, 이정(李侹)을 양왕(凉王)으로, 이길(李佶)을 촉왕(蜀王)으로 세웠다.

11월, 순종(順宗)의 아들 이집(李緝)을 기왕(蕲王)으로, 헌종(憲宗)의 아들 이분(李憤)을 영왕(榮王)으로 세웠다.

남조(南詔)가 여러 부족 만(蠻) 5만 명을 이끌고 안남(安南)을 침범하자, 도호(都護) 채습(蔡襲)이 급보를 알렸다. 조칙을 내려 형남(荊南)·호남(湖南) 두 도의 병사 2천 명과 계관(桂管) 의정자제(義征子弟) 3천 명을 징발하여 옹주(邕州)로 가서 정우(鄭愚)의 절도(節度)를 받게 했다.

영남동도(嶺南東道) 절도사 위주(韋宙)가 상주했다: "만구(蠻寇)가 반드시 옹주(邕州)로 향할 것이니, 먼저 보호하지 않으면, 갑자기 원정을 떠나려 하다가 만인이 뒤에서 허를 찔러 군량 수송로를 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채습(蔡襲)으로 하여금 해문(海門)에 주둔하게 하고, 정우(鄭愚)가 병력을 나누어 방어하고 대비하게 했다. 12월, 채습이 다시 병력 증원을 청하자, 조칙으로 산남동도(山南東道)에서 노수(弩手) 1천 명을 징발하여 보내게 했다. 당시 남조가 이미 교지(交趾)를 포위했고, 채습은 성을 돌며 굳게 지켰으나, 구원병이 도착하지 못했다.

익왕(翼王) 이탄(李彈)이 사망했다.

이 해에, 왈말(嗢末)이 처음으로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왈말은 토번(吐蕃)의 노비 칭호이다. 토번이 군대를 발동할 때마다 부잣집에서는 대개 노비를 따르게 했는데, 한 집에 십여 명씩 있는 경우가 많아, 토번의 부족 무리가 많았다. 논열열(論恐熱)이 난을 일으켰을 때, 노비들은 대개 주인이 없어져, 서로 규합하여 부족이 되어, 감주(甘州)·숙주(肅州)·과주(瓜州)·사주(沙州)·하주(河州)·위주(渭州)·민주(岷州)·곽주(廓州)·첩주(叠州)·탕주(宕州)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토번이 쇠약해지자 오히려 그들에게 의탁했다.

봄, 정월. 경오일(庚午日), 황상이 원구(圓丘)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大赦天下)을 시행했다.

이 날, 남조가 교지(交趾)를 함락시켰다. 채습(蔡襲)의 측근들은 모두 전사했고, 그는 걸어서 힘껏 싸우다가 몸에 열 개의 화살을 맞고, 감군(監軍)의 배로 가려 했으나 배는 이미 떠나 있었고, 결국 바다에 빠져 죽었다. 막료(幕僚) 번작(樊綽)이 그의 관인(官印)을 가지고 강을 건넜다. 형남·강서·악악(鄂岳)·양주(襄州)의 장수와 병사 4백여 명은 성 동쪽 물가로 도망쳤고, 형남 우후(荊南虞候) 원유덕(元惟德) 등이 무리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배가 없으니, 물에 들어가면 죽을 것이고, 차라리 성으로 돌아가 만인과 싸워, 한 사람이 두 명의 만인을 바꾸는 것도 이익이다." 이에 성으로 돌아가 동라문(東羅門)으로 들어갔다. 만인은 방비하지 않고 있었다; 원유덕 등이 군사를 풀어 만인 2천여 명을 죽였다. 밤이 되자, 만장(蠻將) 양사진(楊思縉)이 비로소 자성(子城)에서 나와 구원하자, 원유덕 등은 모두 전사했다. 남조가 두 번 교지를 함락시켜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거의 15만 명에 달했다. 군사 2만 명을 남겨 양사진으로 하여금 교지성을 점거하게 했다. 계동(溪洞)의 이료(夷獠)는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두 그들에게 항복했다. 조칙을 내려 각 도(道)에서 안남(安南)으로 달려간 군대를 모두 소환하여 각각 영남동도와 영남서도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

황상이 유람과 연회를 절제하지 않자, 좌습유(左拾遺) 유태(劉蛻)가 상소했다: "지금 서량(西涼)에서 성을 수축하고 있고, 응대와 접촉이 아직 공격과 수비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남만(南蠻)이 침략하여, 전쟁이 모두 길 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흘 한 달 사이에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근심과 연민을 드러내어 멀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신다면, 무엇으로 그들에게 목숨을 바쳐 힘쓰도록 요구하시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락과 유람을 절제하시어, 먼 지방 사람들이 안정된 뒤에 다시 유락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황상이 듣지 않았다.

2월, 갑오일(甲午日) 초하루, 황상이 차례로 열여섯 능(陵)을 참배했다.

천웅군(天雄軍)을 진주(秦州)에 설치하고, 성주(成州)·하주(河州)·위주(渭州) 세 주를 그 아래에 속하게 했다. 전(前)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 왕안실(王晏實)을 천웅군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했다.

3월, 귀의절도사(歸義節度使) 장의조(張義潮)가 상주하여, 자신이 번(蕃)·한(漢)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양주(凉州)를 공략했다고 말했다.

남만(南蠻)이 좌강(左江)과 우강(右江)을 침략하여, 점차 옹주(邕州)에 가까워졌다. 정우(鄭愚)가 두려워하여, 자신은 문신(文臣)이라 장수의 지략이 없다고 칭하며, 무신(武臣)을 쓰기를 청했다. 조정에서 의무절도사(義武節度使) 강승훈(康承訓)을 경성(京城)으로 불러들여, 그를 보내 정우를 대신하게 하려 했고, 조칙을 내려 그로 하여금 군장(軍將) 몇 명과 수백 명의 병졸을 골라 자신을 따르게 했다.

중서시랑(中書侍郎)·동평장사(同平章事) 필선(畢𫍯)이 동료들이 대부분 사사로움을 좇아 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병을 칭탁하여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름, 4월, 재상 직에서 면직되고 병부상서(兵部尚書)가 되었다.

경술일(庚戌日), 한 무리의 도적이 서주(徐州)에 들어와 관리들을 죽였다. 자사(刺史) 조경(曹慶)이 토벌하여 평정했다.

강승훈(康承訓)이 경성에 도착하여, 영남서도(嶺南西道) 절도사로 임명되고, 형(荊)·양(襄)·홍(洪)·악(鄂) 네 도의 병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그와 함께 가게 했다.

5월, 무진일(戊辰日),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병부시랑(兵部侍郎) 양수(楊收)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했다. 양수는 양발(楊發)의 아우로, 좌군중위(左軍中尉) 양현가(楊玄價)와 동성(同姓)임을 내세워 서로 결탁했기 때문에 재상이 될 수 있었다.

을해일(乙亥日), 용관(容管)을 폐지하여 영남서도(嶺南西道)에 속하게 하고, 군량 공급을 위하여, 또 공주(龔州)와 상주(象州) 두 주를 계관(桂管)에 속하게 했다.

무자일(戊子日), 문하시랑(門下侍郎)·동평장사(同平章事) 두심권(杜審權)을 동평장사로 삼아 진해(鎮海) 절도사로 충임(充任)하게 했다.

6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폐지하고, 해문진(海門鎮)에 행교주(行交州)를 설치했다; 우감문장군(右監門將軍) 송융(宋戎)을 행교주자사(行交州刺史)로 임명하고, 강승훈(康承訓)에게 안남 및 제군행영(諸軍行營)을 겸임하게 했다.

윤달, 문하시랑·동평장사 두종(杜悰)을 동평장사로 삼아 봉상(鳳翔) 절도사로 충임하게 하고, 병부시랑·판도지(判度支) 하남(河南) 사람 조확(曹確)을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가을, 7월, 신묘일(辛卯日)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다시 행교주(行交州)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송융(宋戎)을 경략사(經略使)로 임명했다; 산동(山東) 병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그곳을 지키게 했다. 당시 각 도(道)에서 안남을 구원하러 온 군대가 영남(嶺南)에 주둔하고 있었고, 강서(江西)·호남(湖南)에서 군량을 운반하는 배들은 모두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영거(澪渠)와 이수(漓水)로 들어가야 했기에, 수고와 소모가 심하고 길이 막혀, 각 군대는 식량이 부족했다. 윤주(潤州) 사람 진반석(陳磻石)이 상언하여, 천곡(千斛)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만들어 복건(福建)에서 쌀을 싣고 바다를 건너면 한 달 안에 광주(廣州)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자, 조정에서 그의 말을 따라 군량이 이에 충족되었다. 그러나 유관 부서(有關部門)에서 화고(和雇)라는 명목으로 상인의 배를 빼앗아, 그들의 화물을 언덕에 버리게 하고, 배가 바다에 나가 때로 풍랑을 만나 침몰하면, 유관 부서에서 강리(綱吏)와 선부(船夫)를 가두어 잃어버린 쌀을 배상하게 하여, 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

8월, 영남동도(嶺南東道) 절도사 위주(韋宙)가 상주하여, 남만(南蠻)이 반드시 옹주(邕州)를 공격할 것이니, 병력을 나누어 용주(容州)와 등주(藤州)에 주둔시키기를 청했다.

기왕(夔王) 이자(李滋)가 사망했다.

敕命으로 閤門使 吳德應 등을 館驛使로 임명하였다. 御史臺와 諫官이 상언하기를: "舊例에 따라 御史가 驛站을 순찰하였는데, 갑자기 內臣으로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그들에게 고하기를 敕命이 이미 나갔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左拾遺 劉蛻가 상언하기를: "옛날 楚子가 陳國을 縣으로 삼았다가, 申叔의 한 마디 말을 듣고 다시 陳國을 회복시켰고, 太宗이 士卒을 징발하여 乾元殿을 건축하려다가 張玄素의 간언을 듣고 그날 즉시 중지하였습니다. 예로부터 明君이 숭상하는 것은 간언을 듣기를 물 흐르듯 하는 것인데, 어찌 이미 시행한 것을 고치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敕命은 陛下께서 내리셨으니 또한 陛下께서 고치시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황제가 듣지 않았다.

黠戛斯가 그의 신하 合伊難支를 보내어 表文을 올려 經籍을 청하고, 또 해마다 사자를 보내 驛馬를 타고 曆法을 청하며, 또 回鶻을 토벌하여 安西 이래의 지역이 모두 唐나라에 귀부하게 하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甲戌日에 長安尉 集賢校理 令狐滈을 左拾遺로 임명하였다. 乙亥日에 左拾遺 劉蛻가 상언하기를: "令狐滈은 집안의 자제 규범을 전적으로 무너뜨리고, 平民의 신분으로 公卿宰相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起居郎 張云이 말하기를: "令狐滈의 아버지 令狐綯가 李涿을 安南都護로 임명하여 南蠻이 지금까지 화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令狐滈이 賂物을 받아 아버지로 하여금 惡名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11월, 丁酉日에 張云이 또 상언하기를: "令狐滈의 아버지 令狐綯가 집권할 때 사람들이 그를 ‘白衣宰相’이라 불렀습니다." 令狐滈도 表文을 올려 물러나 회피하기를 청하자, 이에 그를 詹事府司直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辛巳日에 宿泗觀察使를 폐지하고, 다시 徐州를 觀察府로 삼아 濠州와 泗州를 그 아래에 속하게 하였다.

12월에 南詔가 西川을 침범하였다.

昭義節度使 沈詢의 노비 歸秦이 沈詢의 侍婢와 간통하자, 沈詢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乙酉日에 歸秦이 牙將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켜 節度使의 府第를 공격하여 沈詢을 죽였다.

봄, 정월에 京兆尹 李𧏖을 昭義節度使로 임명하고, 歸秦의 심장과 간을 적출하여 沈詢에게 제사 지냈다.

淮南節度使 令狐綯가 그의 아들 令狐滈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 張云을 興元少尹으로, 劉蛻를 華陰令으로 강등시키고, 赦書에 이르기를: "그들의 耿直하고 忠貞한 마음을 가상히 여기나, 輕率하고 疏忽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丙午日에 西川이 上奏하여, 南詔가 巂州를 침범하자 刺史 喻士珍이 그들을 격파하여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詔命을 내려 右神策兵 5천 명과 各道 兵士를 징발하여 가서 戍守하게 하였다. 忠武大將 顏慶復이 新安과 遏戎 두 城을修筑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그의 건의를 따랐다.

容管經略使 張茵에게 交州事務를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海門鎮의 兵士를 2만 5천 명으로 증원하고, 張茵에게 安南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2월, 己巳日에 刑部尙書 鹽鐵轉運使 李福을 同平章事로 삼아 西川節度使를 충임하게 하였다.

甲申日에 前任 西川節度使 蕭鄴을 山南西道觀察使로 강등시켰다.

3월, 丁酉日에 彗星이 婁宿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3尺이었다. 己亥日에 司天監이 上奏하기를: "《星經》에 따르면 이 별은 이름이 含譽이며, 祥瑞之星입니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였다. 朝廷內外에 알리고 史册에 편입할 것을 청하자, 조정에서 그의 건의를 따랐다.

康承訓이 邕州에 도착하자 南蠻의 침략이 더욱 창궐하여, 詔命을 내려 許·滑·青·汴·兗·鄆·宣·潤 八道의 兵士를 징발하여 그에게 지휘하게 하였다. 康承訓이 偵察兵을 두지 않자, 南詔가 각 蠻族을 이끌고 약 6만 명으로 邕州를 침범하여, 邊境에 들어오려 할 때에야 康承訓이 비로소 六道兵士 1만 명을 보내어 막게 하였는데, 獠人을 嚮導로 삼았으나 그들에게 속았다. 敵이 이르렀을 때 방비를 하지 않아 五道兵士 8천 명이 모두 전멸하고, 오직 天平軍만이 하루 늦게 도착하여 화를 면하였다. 康承訓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節度副使 李行素가 무리를 이끌고 壕溝와 柵欄을 수리하였는데, 막 완성되었을 때 蠻軍이 이미 포위하였다. 4일 동안 포위하고 蠻軍이 攻城器具를 제조하여 거의 완성하려 하자, 衆將이 밤에 敵陣을 나누어 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康承訓이 허락하지 않았다. 天平軍의 한 小校가 거듭 간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小校가 勇士 300명을 이끌고 밤에 繩을 타고 城 아래로 내려가서 흩어져 蠻軍의 營寨를 불태우고 首級 5백여 급을 베었다. 蠻軍이 매우 놀라 하루를 건너뛰고 포위를 풀고 떠났다. 康承訓이 이에 諸軍 수천 명을 보내어 추격하였으나, 斬獲한 자는 3백 명이 채 안 되었고, 모두 脅迫된 溪獠人이었다. 康承訓이 捷報를 上奏하여 蠻賊을 크게 격파하였다고 하니, 朝廷內外가 모두 慶賀하였다.

여름, 4월에 兵部侍郎 判戶部 蕭寘를 同平章事로 삼았다. 蕭寘는 蕭復의 손자이다.

康承訓을 檢校右僕射로 加封하고, 蠻軍을 격파한 공을 賞賜하였다. 그 나머지 功勞를 奏聞하여 賞賜를 받은 자들은 모두 康承訓의 子弟와 親信이었고, 營을 불태운 將校는 한 級도 승진하지 못하여, 이로 인해 軍中에 怨恨과 憤怒가 가득 차서 소문이 길에 퍼졌다.

5월에 敕命: "徐州의 風土는 雄勁하고 甲士는 精良하며 强壯하여, 근래 節度使를 폐지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逃匿하니, 마땅히 徐泗團練使로 하여금 軍士 3천 명을 招募 選拔하여 邕州에 가서 防戍하게 하고, 嶺外의 일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그들을 輪換하여 돌아오게 하라."

가을, 7월에 西川이 上奏하기를 兩林鬼主가 南詔蠻軍을 요격하여 격파하고, 斬獲이 많았다고 하였다. 保塞城使 杜守連이 南詔에 服從하지 않고 部衆을 이끌고 黎州에 가서 降伏하였다.

嶺南東道節度使 韋宙가 康承訓의 所行을 완전히 알고 書信으로 宰相에게 알렸다. 康承訓도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여러 번 表文을 올려 病을 이유로 辭職을 청하자, 이에 康承訓을 右武衛大將軍 分司東都로 임명하고, 容管經略使 張茵을 嶺南西道節度使로 삼고, 또 容管 四州를 나누어 따로 經略使를 두었다. 당시 南詔가 邕州가 空虛하고 枯竭함을 알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으나, 張茵이 오래도록 감히 나아가 安南을 공취하지 못하였다. 夏侯孜가 驍衛將軍 高駢을 천거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자, 이에 高駢을 安南都護 本管經略招討使로 임명하고, 張茵이 거느리던 兵士를 모두 그에게 주었다. 高駢은 高崇文의 손자로, 代代로 禁軍에서 職任을 맡았다. 高駢은 書를 많이 읽었고 古今을 이야기하기 좋아하여, 兩軍의 宦官들이 대부분 그를 칭송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右神策都虞候에 이르렀다. 党項이 叛亂할 때 禁兵 1만 명을 이끌고 長武에 戍守하여 여러 번 戰功을 세워 秦州防禦使로 승진하였고, 또 戰功을 세웠으므로 安南의 일을 그에게 위임한 것이다.

겨울, 11월에 門下侍郎 同平章事 夏侯孜를 同平章事로 삼아 河東節度使를 충임하게 하였다.

壬寅日에 翰林學士承旨 兵部侍郎 路岩을 同平章事로 삼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봄, 정월, 丁巳日에 비로소 懿安皇后를 憲宗의 廟室에 配享하였다. 당시 王皞가 다시 禮院檢討官이 되어 前의 建議를 다시 申明하자, 조정에서 마침내 그의 건의를 따랐다.

各道에서 閹割된 兒童을 進獻하였는데, 閩中 地域이 가장 많았으므로 宦官은 대부분 閩人이었다. 福建觀察使 杜宣猷가 寒食節 때마다 官吏를 보내어 각각 그들의 先祖에게 祭祀를 지내게 하자, 宦官들이 그를 感激하여 庚申日에 杜宣猷를 宣歙觀察使로 임명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敕使墓戶’라 불렀다.

3월에 中書侍郎 同平章事 蕭寘가 죽었다.

여름, 4월에 前任 東川節度使 高璩를 兵部侍郎 同平章事로 삼았다. 高璩는 高元裕의 아들이다.

楊收가 建議하기를, "蠻寇가 여러 해 동안 平定되지 못하여 兩河 士兵이 嶺南에서 戍守하다 瘴氣와 霧露로 죽은 자가 10분의 6, 7에 이르니, 청컨대 江西에 糧食을 積存하고 强弩手 3만 명을 招募하여 嶺南에 接應하게 하면 道路가 近便하고, 또 節度使를 두어 그 權力을 加重하게 하소서." 하니, 皇帝가 그의 建議를 따랐다. 5월, 辛丑日에 洪州에 鎮南軍을 두었다.

巂州刺史 喻士珍이 貪慾하고 狡猾하여 兩林蠻을 掠奪하여 黃金과 交換하였다. 南詔가 다시 巂州를 侵犯하자, 兩林蠻이 城門을 열어 南詔軍을 接納하고, 南詔가 모든 戍守士兵을 殺戮하고 喻士珍은 南詔에 投降하였다.

壬寅日에 桂管觀察使 嚴譔을 鎮南節度使로 삼았다. 嚴譔은 嚴震의 姪孫이다.

6월에 高璩가 죽었다.

御史大夫 徐商을 兵部侍郎 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황자 이간을 영왕으로, 이엄을 보왕으로 봉했다.

고변은 해문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도 진군하지 않았다. 감군 이유주는 고변을 싫어하여 제거하려 했고, 여러 차례 고변에게 진군을 재촉했다. 고변은 5천 명을 이끌고 먼저 강을 건너면서 이유주에게 병력을 보내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고변이 출발한 후, 이유주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한 명의 병사도 보내 지원하지 않았다. 9월, 고변이 남정에 도착했을 때, 봉주의 만족 무리가 거의 5만 명에 달해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고변이 기습을 감행하여 만군을 대파하고, 그들이 수확한 벼를 노획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자일, 태황태후 정씨가 세상을 떠났다.

봄 2월,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북정회골 고준이 서주, 북정, 윤대, 청진 등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상주했다.

론열가는 곽주에 우거하며 인근 부족들을 규합하여 변경에 소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부족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원수가 되어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원수들이 선주의 탁발회광에게 그를 고발했고, 탁발회광이 군대를 이끌고 쳐서 그를 격파했다.

3월 무인일, 하동절도사 유동을 서천절도사로 임명했다. 당초, 남조가 쳉주를 포위하자 동만 낭계부가 힘을 다해 남조를 도와 마침내 쳉주성을 함락시켰다. 비롱부는 남조가 그들의 부형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충무진의 수비병을 인도해 낭계부를 습격하여 섬멸했다. 이 때문에 남조는 당나라를 원망했다. 남조가 청평관 동성 등을 성도로 보내자, 절도사 이복이 성대한 의장과 호위병을 정렬하여 그들을 접견했다. 구례에 따르면 남조 사신이 절도사를 알현할 때 뜰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야 했는데, 동성 등이 말했다. “표신이 이미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였으니, 우리가 절도사를 알현할 때는 대등한 예를 행해야 합니다.” 쌍방이 말을 주고받으며 아침부터 정오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분노하여, 이복이 명령하여 그들을 붙잡아 때리고 형장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다. 유동이 부임한 후에야 그들을 석방하고, 상주하여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동성 등을 수도로 불러들여 별전에서 접견하고, 후하게 상을 내리고 위로한 후 돌려보냈다.

성덕절도사 왕소의는 진수한 지 10년 동안 정무를 너그럽고 간략하게 처리하여 군민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다. 그가 병들자 형 왕소정의 아들 도지병마사 왕경숭을 불러 말했다. “나의 형이 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군정 대권을 나에게 맡겼다. 네가 이제 장성하였으니, 나는 다시 군정 대권을 너에게 돌려주겠다. 너는 힘써 다스려 위로는 조정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이웃 번진과 화목하게 지내며, 네 형의 기업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너의 공이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윤달, 토번이 빈녕을 침범했으나, 절도사 설홍종이 막아 격퇴했다.

여름 4월 신사일, 전 서천절도사 이복을 기왕부로 좌천시켰다.

5월, 효명황후를 경릉 옆에 안장하고, 신주를 별묘에 부제했다.

6월, 위박절도사 하홍경이 세상을 떠나자, 군중에서 그의 아들 좌사마 하전고를 유후로 세웠다.

왕경숭을 성덕유후로 임명했다.

남조 추룡이 선선절도사 양집사를 보내 안남절도사 단추천이 교지(交趾)를 지키는 것을 돕게 하고, 범니사를 안남도통, 조노미를 사야도통으로 임명했다. 감진칙사 위중재가 7천 명을 이끌고 봉주에 도착하자, 고변이 이에 힘입어 군대를 증원하고 남조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격파했다. 승전 소식이 해문에 전해졌으나 이유주가 모두 가로채서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황제가 이상히 여겨 이유주에게 묻자, 이유주는 고변이 봉주에 주둔하며 적을 게을리하여 진군하지 않는다고 상주했다. 황제가 노하여 우무위장군 왕안권을 고변 대신 안남을 진수하게 하고, 고변을 소환하여 중벌에 처하려 했다. 왕안권은 왕지흥의 조카였다. 이 달, 고변이 교지에서 남조 만군을 크게 격파하여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많았고, 마침내 교지성을 포위했다.

가을 7월, 하전고를 위박유후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갑신일, 문하시랑 동평장사 양수를 선흠관찰사로 임명했다. 양수는 성품이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했으며, 문리와 노복들이 그를 의지하여 간사한 일을 저지르고 이익을 취하는 자가 많았다. 양현가 형제가 방진의 뇌물을 받고 여러 차례 청탁했으나, 양수가 완전히 따르지 않았다. 양현가가 노하여 양수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여겨 그를 조정에서 내쫓은 것이다.

탁발회광이 5백 기병을 이끌고 곽주에 들어가 론열가를 생포하여 먼저 그의 발을 자르고, 그 죄를 낱낱이 꼽은 후 죽이고, 그 목을 수도로 보냈다. 그의 무리는 동쪽으로 진주로 도망쳤으나, 상연심이 가로막아 격파하고, 모두 상주하여 그들을 영남으로 옮기기를 청했다. 토번은 이로부터 쇠퇴하여 멸망했고, 걸리호 군신은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고변이 교지를 포위한 지 10여 일, 만군은 매우 곤궁하고 피폐하여 성이 함락되려는 찰나, 마침 왕안권의 공문을 받았다. 그 공문에는 이미 이유주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해문에서 출발했다고 적혀 있었다. 고변은 이에 군무를 위중재에게 맡기고, 부하 백여 명과 함께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위중재는 소사 왕혜찬을, 고변은 소교 증곤을 보내 교지의 승전을 조정에 보고하게 했다. 그들이 바다에 이르러 동쪽에서 오는 깃발을 바라보고, 유선에게 물으니 새로 부임한 경략사와 감군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의논했다. “이유주가 반드시 주표를 가로채고 우리를 억류할 것이다.” 이에 섬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이유주가 지나간 후 급히 수도로 달려갔다. 황제가 주표를 받고 매우 기뻐하여 즉시 고변을 검교공부상서로 가봉하고 다시 안남을 진수하게 했다. 고변은 해문에 도착한 후에야 돌아갔다.

왕안권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모든 일을 이유주의 명령에 따라 행했고, 이유주는 흉악하고 탐욕스러워 장수들이 그를 위해 쓰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교지의 포위망을 풀었고, 만군이 도망간 자가 절반이 넘었다. 고변이 도착한 후 다시 장수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교지성을 함락시키고, 단추천과 남조의 안내자가 된 토만 주도고를 죽였으며, 참수 3만여 급을 베었고, 남조 군대는 도망쳤다. 고변은 다시 남조에 붙은 두 토만 부족을 격파하고 그 추장을 주살했으며, 부중을 거느리고 귀부한 토만이 1만 7천 명이었다.

11월 임자일, 대사면을 베풀었다. 조서를 내려 안남, 옹주, 서천 각 군이 각자 경계를 지키고 다시는 남조를 공격하지 말게 했다. 유동에게 위임하여 남조에 알려 만약 옛 화호를 다시 닦는다면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고 하게 했다. 안남에 정해군을 설치하고 고변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탁이 여러 만족을 침략한 이래로 안남의 화근이 된 지 거의 10년이었는데, 이때에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고변이 안남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고, 가옥 40여만 칸을 지었다.

12월, 협갹사가 장군 을지련기를 보내 조정에 입공하고, 상주하여 안마를 보내 책립사를 맞이하게 하고, 또 해년의 역일을 내려주기를 청했다.

성덕유후 왕경숭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황제는 음악과 연회, 유락을 좋아하여 전전에 공봉하는 악공이 항상 5백 명에 가까웠고, 매월 연회를 설치하는 것이 열 번 이상 적지 않았으며, 산해진미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음악을 듣고 잡희를 보며 피곤함을 몰랐으며, 상으로 내리는 것이 문득 천 민(千緡)이 상례였다. 곡강, 곤명지, 패수, 산수, 남궁, 북원, 소응, 함양 등, 가고자 하면 즉시 갔으며, 공급과 설치를 기다리지 않았고, 유관 부서에서는 항상 음악, 음식, 장막을 준비해 두었으며, 여러 왕들은 즉시 말에 올라 시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번 출행할 때마다 내외 각 관청에서 시종하는 자가 10여만 명에 달했고,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다.

봄 정월, 위박유후 하전고를 절도사로 임명했다.

2월,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입조하자, 우신무통군으로 임명하고, 그의 족질 장유심에게 귀의군을 지키게 했다.

안남에서 옹주, 광주에 이르는 해로에는 암초가 많아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잦았다. 정해절도사 고변이 장인을 모집하여 암초를 깎아내니, 조운이 이로 인해 소통되었다.

사천 변경 부근의 육성만은 항상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여, 도적이 없으면 귀순을 칭하고, 도적이 있으면 반드시 선봉이 되었다. 오직 비롱부만이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여러 만족과 원수가 되었으므로, 조정에서 그들에게 이씨 성을 내리고 자사로 임명했다. 절도사 유동이 장수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도와 육성만을 토벌하여 그들의 부락을 불태우고, 참수 5천여 급을 베었다.

악공(樂工) 이가급(李可及)이 새로운 곡을 잘 지었다. 3월, 황제가 이가급을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으로 임명했다. 조확(曹確)이 간언하며 말했다. “태종(太宗)께서 문무 관원 6백여 명을 정하시고, 방현령(房玄齡)에게 ‘내가 이 관위로 천하의 현사를 기다리노니, 공상잡류(工商雜流)에게는 관직을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대화(大和) 연간에 문종(文宗)이 악공 위지치(尉遲璋)를 왕부솔(王府率)로 임명하려 하자, 습유(拾遺) 두순직(竇洵直)이 간언하여 광주장사(光州長史)로 고쳐 임명하였습니다. 청컨대 두 조정의 구례에 따라, 따로 이가급에게 관직을 주소서.” 황제가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황제의 몸이 편치 않아 여러 신하들이 알현하기 어려웠다.

5월 병진(丙辰)일, 천하의 옥에 갇힌 죄수를 심리하여, 탐장(貪贓)으로 법에 용서받지 못할 자가 아니면 모두 차례로 한 등급씩 형벌을 낮추었다.

가을 7월 임인(壬寅)일, 기왕(蘄王) 이집(李緝)이 죽었다.

회주(懷州) 백성이 가뭄을 호소하자, 자사(刺史) 유인규(劉仁規)가 방을 붙여 호소를 금지하였다. 백성이 분노하여 서로 반란을 일으켜 유인규를 쫓아내니, 유인규는 촌사(村舍)로 도망쳐 숨었다. 백성이 주아(州衙)로 들어가 그의 집 재물을 약탈하고 누각에 올라 북을 치며, 오랜 후에야 안정되었다.

갑자(甲子)일,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제도염철전운등사(諸道鹽鐵轉運等使) 부마도위(駙馬都尉) 우종(于琮)을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했다.

선흡관찰사(宣歙觀察使) 양수(楊收)가 화악묘(華岳廟)를 지나다가 의복을 시주하고 무당에게 기도하게 하였다. 현령(縣令)이 이를 무고하여 양수의 죄라고 고발하였다. 우습유(右拾遺) 위보형(韋保衡)이 또 상소하여, 양수가 이전에 재상으로 있을 때 엄선(嚴譔)을 강서절도사(江西節度使)로 임명하면서 백만 전(錢)을 받았고, 또 조선무(造船務)를 설치하였으며, 어떤 이가 그가 재물을 횡령하고 은닉했다고 고소하였다고 말하였다. 8월 경인(庚寅)일, 양수를 단주사마(端州司馬)로 강등시켰다.

9월, 황제의 병이 나았다.

겨울 12월, 신왕(信王) 이해(李心丐)가 죽었다.

영남동도절도사(嶺南東道節度使) 위주(韋宙)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가봉(加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