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기 육십팔
자치통감 제252권
【당기육십팔】 경인년(서기 870년)부터 병신년(서기 876년)까지, 모두 7년이다.
의종 소성공혜효황제 함통 11년(경인, 서기 870년)
봄, 정월, 갑인 초하루, 여러 신하들이 황제에게 존호를 올려 예문영무명덕지인대성광효황제라 하였다. 대사면을 내렸다.
서천의 백성들이 만적(蠻賊)이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투어 성도성(成都城)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당시 성도에는 자성(子城)만 있을 뿐 해자도 없었고, 사람마다 차지한 곳이 자리 하나 크기에 불과하여, 비가 오면 삿갓을 쓰고 동이와 항아리를 이고 몸을 가렸다. 또한 물이 부족하여 마하지(摩訶池)의 진흙탕 물을 길어 맑힌 뒤에 마셨다. 장수와 병사들은 무비(武備)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절도사 노감(盧耽)이 팽주자사 오행로(吳行魯)를 불러 대리참모로 삼고, 전 여주자사 양경복(楊慶復)과 함께 수비를 정비하고, 장교를 선발하며, 직책을 나누고, 전쟁용 목조 망루를 세우고, 포석과 목책을 준비하며, 병기를 제조하고, 경계와 순찰을 강화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천의 장수와 병사들은 대부분 허명의 직책만 있을 뿐 급료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방을 붙여 용감한 자들을 모집하여 실직(實職)을 보충해 주고, 풍족하게 양식과 상을 지급하자, 응모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양경복이 이에 경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군중의 자제들로, 나이가 젊고 용기가 있으나 평소에 스스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 지금 만적이 침입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 부귀를 얻을 때이니,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뛰놀았다. 이에 뜰에 병기를 진열해 놓고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시험하게 하여, 두 사람이 서로 겨루어 이기는 것을 보고 그들의 용기와 겁을 관찰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하고, 마침내 3천 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돌장(突將)'이라 불렀다. 오행로는 팽주 사람이다. 무오일(5일), 만족이 미주(眉州)에 도착하자, 노감은 동절도부사 왕언(王偃) 등을 보내 편지를 가지고 만족의 집권 대신 두원충(杜元忠)을 만나 화친을 약속하게 하였다. 만족이 대답하기를 "저희의 행동은 오직 각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암(路岩)과 위보골(韋保衡)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강승훈(康承訓)이 방훈(龐勛)을 정벌할 때,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고, 또 남은 무리를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으며, 또 포로와 전리품을 탐내어 제때에 전공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유일(8일), 강승훈을 촉왕부(蜀王傅)로 강등시키고 분사동도(分司東都)하게 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은주사마(恩州司馬)로 강등시켰다.
남조(南詔)가 신진(新津)으로 진군하였는데, 이곳은 정변(定邊)의 북쪽 경계였다. 노감은 동절도부사 담봉사(譚奉祀)를 보내 두원충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온 이유를 물었다. 만족은 담봉사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노감은 사자를 보내 조정에 급보를 알리고, 또 사자를 보내 만족과 화친하여 임시로 화를 늦추기를 청하였다. 조정은 사방관(知四方館事) 태복경(太僕卿) 지상(支詳)을 선유통화사(宣諭通和使)로 임명하였다. 만족은 노감이 자신들에게 공손한 것을 보고, 이 때문에 머뭇거리며 주저하였고, 성도의 수비는 이로 인해 대략 갖추어졌다. 갑자일(11일), 만족이 장거리로 북쪽으로 달려 쌍류(雙流)를 함락시켰다. 경오일(17일), 노감은 절도부사 유반(柳槃)을 보내 만족을 만나게 하였는데, 두원충이 유반에게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화친이 이루어진 뒤에 표신(驃信, 남조왕)이 군부(軍府)와 서로 만나는 예절입니다."라고 하였다. 편지 속의 예절은 왕자(王者)로 자처하며, 말이 극도로 교만하고 오만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채색 휘장을 등에 지고 성남에 이르러, 촉왕청(蜀王廳)에 펼쳐 놓고 표신이 거처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계유일(20일), 정변군(定邊軍)을 폐지하고, 다시 칠주(七州)를 서천(西川)에 편입시켰다.
이날, 만군(蠻軍)이 성도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전날, 노감은 선봉유척사(先鋒遊奕使) 왕주(王晝)를 한주(漢州)에 보내 구원병을 정탐하고 재촉하게 하였다. 당시 흥원(興元)의 6천 명 병사와 봉상(鳳翔)의 4천 명 병사가 이미 한주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두방(竇滂)이 충무(忠武) 의성(義成) 서숙(徐宿)의 4천 명 병사를 거느리고 도강(導江)에서 도망쳐 한주에 이르러 구원병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보전하고 있었다. 정축일(24일), 왕주가 흥원 자주(資州) 간주(簡州)의 3천여 명 병사를 거느리고 비교(毘橋)에 주둔하다가 만족의 선봉과 만나, 싸움에 불리하여 물러나 한주를 보전하였다. 당시 성도에서는 날마다 구원병이 오기를 바랐으나, 두방은 자신이 땅을 잃었기 때문에 서천도 잇따라 함락되어 자신의 책임을 나누기를 바랐다. 매번 구원병이 북쪽에서 도착하면, 항상 그들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만군의 수는 관군보다 수십 배나 많고, 관군은 먼 길을 와서 피로하여 쉽게 나아가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그의 말을 믿고 모두 망설이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성도의 십장(十將) 이자효(李自孝)가 은밀히 만족과 내통하여, 성 동쪽의 창고에 불을 지르려 하였으나, 성 안에서 그를 체포하여 죽였다. 며칠 후, 만족이 과연 성을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내응이 없자, 그만두었다.
2월, 계미 초하루, 만족이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모아 사방으로 성도를 공격하자, 성 위에서는 갈고리로 그것들을 잡아당겨 가까이 하고, 횃불을 던져 기름을 부어 태우니, 성을 공격하던 만병(蠻兵)이 모두 타 죽었다. 노감은 양경복과 섭좌도압아(攝左都押牙) 이양(李驤)을 시켜 각각 돌장(突將)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여, 만군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고, 저녁이 되어 그들의 공성 기구 3천여 개를 불태운 뒤 성으로 돌아왔다. 촉인(蜀人)들은 본래 겁이 많았으나, 이 돌장들은 최근에 양경복의 포상과 발탁을 받고, 또 두터운 상을 탐내어 용기가 배가되었으며, 성에 나가 싸우지 못한 자들도 모두 분개하여 싸우기를 청원하였다. 며칠 후, 적이 백성들의 울타리를 빼앗아 겹겹이 쌓고 물에 적셔 구부려서, 덮개를 만들어 사람을 그 아래 두고, 그것을 들고 성에 가까이 가서 파고들자, 화살과 돌도 맞지 않고 불도 붙일 수 없었다. 양경복은 쇠를 녹여 그 위에 부으니, 성을 공격하던 자들이 또 죽었다.
을유일(3일), 지상(支詳)이 사자를 보내 만족과 화친을 약속하였다. 정해일(5일), 만족이 군사를 거두고 화친을 청하였다. 무자일(6일), 사자를 보내 지상을 맞이하였다. 당시 양경복(顏慶復)이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상이 만족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서를 받들어 정변(定邊)에 가서 화친을 약속하였는데, 지금 운남(남조)이 도리어 성도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이전의 조서와 다릅니다. 더욱이 조정이 화친을 논의한 것은 그들이 성도를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지금 화살과 돌이 밤낮으로 번갈아 떨어지는데, 어찌 화친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만족은 화친 사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경인일(8일), 다시 성을 공격하였다. 신묘일(9일), 성 안에서 군사를 내어 그들을 공격하니, 만군이 비로소 물러났다.
당초, 위고(韋皋)가 남조를 회유하여 토번(吐蕃)을 격파하는 데 사용하였는데, 이후 만족이 갑옷과 활과 쇠뇌가 없다고 호소하자, 위고가 장인을 보내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고, 몇 년 후 만족의 갑옷과 활과 쇠뇌는 정밀하고 날카로워졌다. 또한 동만(東蠻)의 저나시(苴那時) 물등(勿鄧) 몽충(夢沖) 세 부족이 위고를 도와 토번을 격파한 공이 있었다. 후에 변경의 관리들이 그들을 무례하게 대우하자, 동만은 당에 깊이 원한을 품고 스스로 남조에 귀부하여, 항상 남조를 따라 침입하며 그들을 위해 힘을 다하였고, 당나라 사람을 잡으면 모두 잔혹하게 죽였다.
조정은 두방(竇滂)을 강주사호(康州司戶)로 강등시키고, 양경복을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로 임명하였으며, 촉(蜀)을 구원하는 모든 군대는 양경복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계사일(11일), 양경복이 신도(新都)에 도착하자, 만족은 병력을 나누어 막으러 갔다. 갑오일(12일), 양경복과 만나자, 양경복이 만군을 크게 격파하여 2천여 명을 죽였고, 촉의 백성 수천 명이 다투어 자루 달린 큰 칼과 흰 나무 몽둥이를 들고 관군을 도우니, 함성이 들판을 진동시켰다. 을미일(13일), 만족의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다시 오자, 마침 우무위상장군(右武衛上將軍) 송위(宋威)가 충무군(忠武軍) 2천 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즉시 여러 군대와 합세하여 싸우니, 만군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5천여 명이었고, 물러나 성숙산(星宿山)을 보전하였다. 송위가 타강역(沱江驛)까지 진군하여, 성도에서 30리 떨어졌다. 만족은 그들의 신하 양정보(楊定保)를 지상에게 보내 화친을 청하자, 지상이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포위를 풀고 퇴각하라."고 하였다. 양정보가 돌아갔으나, 만족의 포위는 여전했다. 성 안에서는 구원병이 이미 온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들이 여러 번 와서 화친을 청하는 것을 보고서야 구원병이 반드시 이겼음을 알았다. 무술일(16일), 만족이 다시 화친을 청하자, 사자가 열 번 왕래하였고, 성 안에서도 모호하게 대답하였다. 만족은 구원병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성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여, 표신 이하 장수들이 몸소 화살과 돌 사이에 섰다. 경자일(18일), 관군이 성 아래에 도착하여 만족과 싸워 그들의 승천교(升遷橋)를 빼앗았고, 이날 밤 만족이 스스로 공성 기구를 불태우고 도망쳐, 새벽이 되어서야 관군이 알아차렸다.
당초 조정에서는 안경복을 성도 구원에 파견하고, 송위에게 면주와 한주에 주둔하며 후속 지원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송위는 승세를 타고 먼저 성 아래에 도착하여 만군을 격파한 공로가 가장 컸으나, 안경복이 그를 시기하였다. 송위가 병사들에게 식사를 시키며 만군을 추격하려 하였고, 성 안의 병사들도 북방 군대와 합세하여 함께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안경복이 송위에게 문서를 보내 그의 군대를 빼앗고 한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다. 만족이 쌍류에 이르렀을 때, 새천수라는 강에 막혀 다리를 놓지 못해 낭패를 겪었다. 사흘 후에 다리가 완성되어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다리를 끊은 후 떠나며 갑옷과 병기, 의복, 물건들을 길에 버렸는데, 촉인들이 매우 통분히 여겼다. 이주자사 엄사본은 흩어진 병사 수천 명을 모아 빈주를 지켰고, 만족이 빈주를 포위하였으나 이틀 만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또한 버리고 떠났다. 안경복은 비로소 촉인들에게 옹문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우고, 사슴뿔 모양의 방어 시설을 설치하며, 영채와 보초소를 나누어 설치하도록 가르쳤다. 만족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이후로는 다시 성도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서천의 아장들은 직책은 있었으나 관품이 없었는데, 남조를 격퇴한 후 네 사람이 공로로 감찰어사에 임명되었다. 당첩의 규정에 따라, 각자 당례전 삼백 민을 내야 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로 인해 괴로워하였다.
3월, 좌복야 동평장사 조확이 동평장사에 임명되어 진해절도사를 겸하였다.
여름, 4월, 병오일, 한림학사승지 병부시랑 위보형을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서주의 도적 잔당들이 여전히 마을 사이에 모여 도적떼를 이루며, 연주, 운주, 청주, 제주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조정에서 서주관찰사 하후동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을 회유하고 타이르게 하였다.
5월, 정축일, 빈주자사 오행로를 서천유후로 임명하였다.
광주의 백성들이 자사 이약옹을 쫓아내니, 이약옹은 신읍으로 도망쳤다. 좌보궐 양감 등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자사가 정도를 행하지 않아 백성들이 원통함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 호소하여 법률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할 것이지, 어찌 무리를 지어 제멋대로 쫓아내어 상하의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풍조는 결코 부추겨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엄중히 처형하여 뒷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황제가 백관들에게 서주를 처리할 적절한 방법을 의논하도록 명령하였다. 6월, 병오일, 태자소부 이초 등이 상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서주가 비록 여러 차례 화란을 일으켰으나, 반드시 집집마다 완악하고 흉악한 자들인 것은 아닙니다. 대개 통솔하는 사람이 적절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타서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 그 명칭은 낮추었으나 병력 수는 여전히 존재하며, 지군으로 삼으면 군량 공급이 부족하고, 나누어 다른 곳에 예속시키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옛 악습이 이어져 오히려 더 창궐해질 것입니다. 오직 사주만이 일찍이 공격과 수비로 인해 원한이 깊이 맺혔으니, 마땅히 변경을 두어 쌍방에 이로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서를 내려 따르고, 서주는 예전대로 관찰사를 두어 서주, 호주, 숙주 세 주를 통괄하게 하고, 사주는 단련사로 고쳐 회남도에 예속시켰다.
유주절도사 장윤신에게 겸임 시중을 더하였다.
가을, 8월, 을미일, 동창공주가 죽었다. 황상이 애통해하며 그치지 않고, 한림의관 한종소 등 20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친족 300여 명을 모두 잡아 경조부의 옥에 가두었다. 중서시랑 동평장사 유첨이 간관들을 모아 간언하게 하였으나, 간관들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자, 스스로 상주하여 말하였다: "수명의 길고 짧음은 사람의 정해진 운명입니다. 먼저 공주가 병들자, 깊이 성상의 자애를 감동시켰습니다. 한종소 등이 진료할 때에는 오직 병의 쾌유만을 구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으니,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화와 복은 바꾸기 어려워 마침내 실수가 있었으니, 그 정상을 헤아리면 또한 가엾을 만합니다. 그러나 형구로 노소 300여 명을 가두니, 뭇사람들의 의논이 끓어오르고 길 가는 사람들이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사리에 통달하고 운명을 아는 군주가, 도리어 사납고 포악하며 이치를 모른다는 비방을 받아야 합니까! 이는 대개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성낼 때 뒷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성상께서 조금이나마 생각을 돌리시어 갇힌 자들을 너그럽게 풀어주소서." 황상이 상주문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유첨이 또 경조윤 온장과 함께 황상 앞에서 극력 간언하자, 황상이 크게 노하여 그들을 꾸짖으며 내쫓았다.
위박절도사 하전호는 나이가 어리고 교만하며 포악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고, 또 장사들의 의복과 식량을 삭감하였다. 장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전호는 단기로 도망쳤으나 쫓겨나 죽임을 당하고, 무리들이 대장 한군웅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았다. 성덕절도사 왕경숭이 그를 대신하여 절도사의 정절을 청하였다. 9월, 경술일, 한군웅을 위박유후로 임명하였다.
병진일, 유첨을 동평장사로 임명하여 형남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온장을 진주사마로 폄적하였다. 온장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죽음을 어찌 아까워하리오!" 그날 밤, 독약을 먹고 죽었다. 경신일, 칙령으로 말하였다: "만약 화가 없다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악이 가득 차면 죽어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다. 마땅히 3일 동안 잠시 성 밖에 임시로 매장하고, 은사를 기다린 후에야 귀장을 허락하여, 조정 안팎의 인심을 시원하게 하고 간사한 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라." 기사일, 우간의대부 고상, 비부랑중 지제고 양지지, 예부랑중 위당 등을 영남으로 폄적하였으니, 모두 유첨과 가깝고 친하여 위보형에게 축출된 까닭이었다. 양지지는 양여사의 아들이고, 위당은 위부의 아들이다. 위보형이 또 노암과 함께 유첨을 무고하여, 의관과 공모하여 잘못 독약을 투여했다고 말하였다. 병자일, 유첨을 강주자사로 폄적하였다. 한림학사승지 정번이 유첨의 파직 제서를 초안하며 말하였다: "몇 칸의 집에 편안히 살아도 여전히 자기의 소유가 아니며, 사방의 뇌물을 거절하니 오직 남이 알까 두려워할 뿐이다." 노암이 정번에게 말하였다: "시랑께서는 이로써 유재상을 표창하시는 것이군요!" 정번은 이로 인해 오주자사로 폄적되었다. 어사중승 손황이 유첨에게 발탁되었기 때문에 또한 정주자사로 폄적되었다. 노암은 평소 유첨과 논의가 맞지 않는 일이 많았는데, 유첨이 강주로 폄적된 후에도 마음에 차지 않아 《십도도》를 살펴보고 환주가 장안에서 만 리 떨어진 것을 알고, 다시 유첨을 환주사호로 폄적하였다.
겨울, 10월, 계묘일, 서천유후 오행로를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11월, 신해일, 병부상서 염철전운사 왕탁을 예부상서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왕탁은 왕기의 형의 아들이다.
정묘일, 서주를 다시 감화군절도로 설치하였다.
12월, 성덕절도사 왕경숭에게 동평장사를 더하고, 좌금오상장군 이국창을 진무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의종소성공혜효황제 하 함통 12년(신묘년, 서기 871년)
봄, 정월, 신유일, 문의공주를 장사 지냈다. 위씨 집안 사람들은 다투어 뜰에서 제사 지낸 재를 거두어 그 속에서 금은을 씻어내었다. 의복과 완구는 매양 120량의 수레에 실었고, 비단과 수놓은 비단, 구슬과 옥을 의장과 명기로 삼아 찬란하게 20여 리를 빛냈다. 술 100곡과 떡 음식 40낙타를 하사하여 관을 메는 역부들을 위로하였다. 황상과 곽숙비가 공주를 그치지 않고 생각하여, 악공 이가적이 《탄백년곡》을 지어 소리가 애처롭고 원망스러웠으며, 춤추는 자가 수백 명이었는데, 내고의 여러 보물을 꺼내어 그들의 머리 장식으로 삼고, 800필의 굵은 명주를 지전으로 사용하여 춤이 끝난 후에는 구슬과 옥이 땅에 흩어졌다.
위박유후 한군웅을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문하시랑 동평장사 노암과 위보형은 본래 서로 결탁하여 권세가 천하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을 다투어 점차 틈이 생기자, 위보형이 황상 앞에서 노암의 단점을 말하였다. 여름, 4월, 계묘일, 노암을 동평장사로 임명하여 서천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노암이 성을 나설 때, 길 가는 사람들이 기와와 돌을 던졌다. 대리경조윤 설능은 노암이 발탁한 사람인데, 노암이 설능에게 말하였다: "떠날 때에 번거롭게 기와와 돌로 전별해 주시오!" 설능이 천천이 홀을 들고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재상이 서울을 떠날 때 부사가 먼저 사람을 보내 방비한 예가 없습니다." 노암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설능은 분주 사람이다.
5월, 황상이 안국사에 행차하여 승 중겸과 승 철에게 침향목 강좌 두 개를 하사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두 길이었다. 만인재회를 열었다.
가을, 7월, 병부상서 노담을 동평장사로 임명하여 산남동도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병부시랑 염철전운사 유업을 예부상서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의종 소성공혜효황제 하 함통 13년(임진년, 서기 872년)
봄 정월, 유주 절도사 장윤신이 중풍에 걸려 군정을 위임하고 의원을 찾겠다고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 장간회를 유후로 삼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사자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절도사의 정절을 반납하였다. 병신일, 장윤신이 사망하였다. 장윤신이 유주를 23년 동안 진수하면서 근검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변경에 경보가 없었고 상하가 모두 안정되었다.
2월 정사일, 병부시랑 동평장사 우종을 산남동도 절도사로 삼고, 형부시랑 판호부 봉천 조은을 호부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평주자사 장공소는 평소 위망이 있어 유주 사람들의 신복을 받았다. 장윤신이 죽자 장공소가 주병을 거느리고 와서 조문하였다. 장간회가 두려워하여 3월에 도성으로 도망가니, 여러 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여름 4월, 황자 이보를 길왕으로, 이걸을 수왕으로, 이의를 목왕으로 책봉하였다.
장공소를 평로 유후로 삼았다.
5월, 국자사업 위은옥이 각문에 이르러 곽숙비의 동생 내작방사 곽경술의 은밀한 일을 고발하였다. 황상이 크게 노하여 곤장형으로 위은옥을 때려 죽이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을해일, 각문사 전헌겸이 자색 관복을 빼앗기고 교릉사로 전임되었으니, 이는 그가 위은옥의 고소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위은옥의 장인 태부소경 최원응, 처의 종형 중서사인 최항, 숙부 위군경이 모두 영남의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급사중 두휴휴는 위은옥과 친하다는 이유로 단주 사호로 좌천되었다. 최항은 최현의 아들이고, 두휴휴는 두종의 아들이다.
병자일, 산남동도 절도사 우종을 보왕부 분사동도로 좌천시켰으니, 이는 위보형이 그를 무고했기 때문이다. 신사일, 상서좌승 이당, 이부시랑 왕풍, 좌산기상시 이도, 한림학사승지 병부시랑 장양, 전 중서사인 봉언경, 좌간의대부 양숙을 좌천시켰다. 계미일, 공부상서 엄기, 급사중 이황, 급사중 장탁, 좌금오대장군 이경중, 기거사인 소주, 이독, 정언특, 이조를 좌천시켜 모두 호광과 영남 일대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우종과 관계가 깊고 친했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한의 아들이고, 소주는 소치의 아들이다. 갑신일, 전 평로절도사 우현을 양왕부 장사 분사동도로, 전 호남관찰사 우괴를 원주자사로 좌천시켰다. 우괴와 우현은 모두 우종의 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우종을 소주자사로 좌천시켰다. 우종의 아내 광덕공주는 황상의 누이로, 우종과 함께 소주로 가면서 행차할 때는 가마 문을 서로 마주보게 하고 앉을 때는 우종의 허리띠를 잡고 있어 우종이 그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공주들은 대부분 교만하고 방자했지만 오직 광덕공주만은 모든 행동이 법도를 따랐고, 우씨 종친을 대함에 존비를 가리지 않고 예절을 지켜 조정 안팎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6월, 노룡 유후 장공소를 절도사로 삼았다.
위보형이 자신의 당우 배조를 낭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좌승 이장이 방정하고 엄명함을 두려워하여 그가 취임을 허락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였다. 이장이 말하였다: "조정의 승진 임명은 마땅히 내게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가을 7월 을미일, 이장을 선흡관찰사로 삼았다. 8월,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죽자 사주장사 조의금이 군부를 대리하였다. 조의금을 귀의절도사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후 중원에 변고가 많아 조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였고, 회흘이 감주를 함락시키고 나머지 각 주로서 귀의에 예속되었던 곳들은 대부분 강과 호(胡)에게 점령당하였다.
겨울 12월, 선종의 시호를 추존하여 원성지명성무헌문예지장인신총의도대효황제로 하였다.
진무절도사 이국창은 공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장리(고급 관리)를 멋대로 죽였다. 조정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이국창을 대동군 방어사로 전임시켰으나, 이국창은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의종 소성공혜효황제 하 함통 14년(계사년, 서기 873년)
봄 3월 계사일, 황상이 칙사를 보내 법문사에 불골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간언하는 자가 많았고, 심지어 헌종이 불골을 맞이한 지 얼마 안 되어 승하하였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황상이 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볼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 크게 불탑, 보장, 향거, 번화, 당개를 만들어 맞이할 준비를 하였는데, 모두 금, 옥, 비단, 수놓은 비단, 구슬과 비취로 장식하였다. 도성에서 법문사까지 3백 리 사이의 도로에는 수레와 말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여름 4월 임인일, 불골이 도성에 도착하자 앞에는 금군의 병장(병사와 무기)이 인도하고, 공사(공적, 사적) 음악이 땅을 울리고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촛불이 하늘을 밝혀 수십 리에 이어졌다. 의장의 성대함은 교사(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식)보다 더하였고, 원화 연간은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부유한 집들은 길가에 채루를 세우고 무차대회를 열어 서로 사치와 화려함을 다투었다. 황상이 안복문에 임하여 누각 아래로 내려와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으며, 승려와 도성에서 원화 연간의 일을 보았던 노인들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불골을 맞이하여 궁중에 들이고 3일 후에 내보내 안국숭화사에 안치하였다. 재상 이하 관리들이 서로 다투어 금과 비단을 시주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덕음을 내려 경성 안팎에 갇힌 죄수들의 형벌을 감면하였다.
5월 정해일, 서천절도사 노암에게 겸임 중서령을 더하였다.
남조가 서천을 침범하고, 또 검남을 침범하였다. 검중경략사 진모모는 병력이 너무 적어 저항하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형남으로 도망쳤다. 형남절도사 두종이 그를 가두고 조정에 상주하였다. 6월 을미일, 황제가 명하여 진모모를 참수하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그의 친족으로 연좌되어 처벌받아야 할 자들은 유관 부서에서 수색 체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진모모는 봉상 사람이다.
중서시랑 동평장사 왕탁을 동평장사로 삼아 선무절도사에 충원하였다. 당시 위보형은 황상의 총애를 믿고 권술을 농락하여 유첨과 우종이 이전에 재상 자리에 있을 때 자신에게 예의가 없었다고 여겨 그들을 무고하고 축출하였다. 왕탁은 위보형이 진사 시험에 급제할 때의 주고관이었고, 소주는 위보형과 동년 진사였는데, 이 두 사람은 평소 위보형의 인품을 천박하게 여겼고, 위보형은 그들을 모두 배척하였다.
가을 7월 무인일, 황제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좌군중위 유행심과 우군중위 한문약이 황제의 어린 아들 보왕 이엄을 후계자로 세웠다. 경진일,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이엄을 황태자로 세워 임시로 군대와 국가 정무를 대리하게 한다." 신사일, 황제가 함녕전에서 붕어하였다. 유조(유언 조서)로 위보형이 총재(대리 재상)를 대행하게 하였다. 당희종이 즉위하였다. 8월 정미일, 생모 왕귀비를 추존하여 황태후로 삼고, 유행심과 한문약을 모두 국공으로 봉하였다.
관동과 하남에 큰 수재가 발생하였다.
9월, 유관 부서에서 선황태후에게 시호를 혜안으로 올렸다.
사도, 문하시랑, 동평장사 위보형이 원가에게 그의 은밀한 일을 고발당하여 하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악공 이가급은 영남으로 유배되었다. 이가급은 일찍이 당의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일찍이 아들의 혼사를 치를 때 당의종이 은으로 된 술병 두 개를 하사하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술이 없고 속이 꽉 차 있었다. 우군중위 서문계현이 여러 번 이 일로 간언하였으나 당의종이 듣지 않았다. 이가급은 일찍이 많은 상품을 받아 관청 수레에 싣고 다녔다. 서문계현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훗날 집이 망하고 사람이 죽을 때, 이 물건들도 마땅히 관청 수레로 다시 실려 갈 것이다. 이는 상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의 발만 괴롭히는 것이다!" 이가급이 영남으로 유배될 때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는데, 과연 서문계현의 말과 같았다. 서천절도사 노암에게 겸임 시중을 더하고, 성덕절도사 왕경숭에게 중서령을 더하고, 위박절도사 한군웅, 노룡절도사 장공소, 천평절도사 고병에게 모두 동평장사를 더하였다. 한군웅은 아울러 이름을 한윤중이라 하사받았다.
겨울 10월 을미일, 좌복야 소방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위보형이 다시 애주 징매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결을 명받았고, 또 그의 동생 한림학사 병부시랑 위보의를 빈주 사호참군으로, 심복 한림학사 호부시랑 유승옹을 부주 사마로 좌천시켰다. 유승옹은 유우석의 아들이다.
계묘일,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였다.
서천절도사 노암은 성색과 유흥을 좋아하여 군부의 정사를 측근 관료인 변함과 곽주에게 위임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먼저 처단한 뒤에 보고하여 상하가 모두 두려워했다. 일찍이 대규모 사열이 있었을 때, 두 사람이 일을 의논하며 종이에 묵서로 써서 서로 보여준 뒤 불태웠다. 군중에서는 그들이 이심을 품은 것으로 의심하여 놀라고 두려워하며 불안해했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11월 무진일에 노암을 형남절도사로 전임시켰다. 변함과 곽주는 은밀히 그 이유를 알고 도망갔다.
우복야 소업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하동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12월 기해일에 불골을 법문사로 돌려보내라는 조서를 내렸다.
노암을 다시 신주자사로 강등시켰다.
희종혜성공정효황제 상지상
의종소성공혜효황제 하 건부 원년(갑오년, 서기 874년)
봄 정월 정해일에 한림학사 노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 막 즉위하셨으니 깊이 백성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국가에 백성이 있는 것은 마치 초목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아서, 가을과 겨울에 흙을 돋우고 물을 주면 봄과 여름에 무성해질 수 있습니다. 신이 사사로이 관동 지역이 작년에 가뭄이 들어, 괵주에서 바닷가까지 밀은 반만 수확하고 가을 곡식은 거의 전멸했으며 겨울 채소는 매우 적어, 가난한 백성들은 도꼬마리 열매를 갈아 가루로 삼고 느릅나무 잎을 저장해 김치로 삼았습니다. 어떤 이는 더욱 쇠약해져서 채취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이웃 고을로 흩어져 갔습니다. 지금은 곳곳이 기근이라 의지할 곳이 없어, 고향에 앉아서 구덩이에서 죽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면제된 나머지 조세는 사실상 징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와 현에서는 상공과 삼사의 비용 때문에 독촉이 매우 급하여 매번 매질을 하며, 집을 허물고 나무를 베며 아내와 자식을 팔아도 오직 경유하는 관리의 주식과 음식값만을 공급할 뿐 관청 창고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조세 이외에 다른 요역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불쌍히 여기고 묻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주와 현에 명령하여, 빚진 잔여 세금을 모두 정지시키고 누에를 치고 밀을 거둘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아울러 각지의 의창을 발급하여 신속히 진휼하게 하소서. 늦은 봄 이후에는 나물 잎과 나무 싹이 나고 이어 뽕나무 열매가 생겨 점차 먹을 것이 있게 됩니다. 이 몇 달 동안은 더욱 궁박하고 위급하니 시행을 늦출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의 말을 따랐으나, 유관 부서가 끝내 시행하지 못하여 한 장의 빈 문서에 그쳤다.
노암이 강릉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관작을 삭탈하고 담주에 영구 유배하라고 명령했다. 노암은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강릉 감옥에 갇혀 이틀 밤을 지내자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결을 명하고 그의 가산을 몰수했다. 노암이 재상이 되었을 때 비밀 상소를 올리기를 “3품 이상 관원이 사사를 명받으면 모두 사자로 하여금 후두부 세 치 되는 곳을 도려내어 바치게 하여, 그가 반드시 죽었는지 검증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자신이 이 화를 당했는데, 그가 죽은 곳은 바로 양수가 사사될 때 누웠던 침상이었다. 변함과 곽주는 체포되어 모두 사형당했다. 처음에 노암이 회남에서 최현을 보좌하여 지사가 되었을 때, 최현은 그가 훗날 반드시 귀하게 될 줄 알고 “노 십은 마침내 그 관직에 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조정에 들어와 감찰어사가 되어 장안성을 떠나지 않고 10년 만에 재상이 되었다. 그가 감찰어사로서 한림원에 들어갈 때 최현이 아직 회남에 있었는데, 듣고 말하기를 “노 십이 이미 한림원에 들어갔으니 어찌 늙어 죽겠는가?”라고 하였고, 모두 최현이 말한 대로 되었다. 태자소부 우종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산남동도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갑오일에 소성공혜효황제를 간릉에 안장하고 묘호를 의종이라 하였다.
중서시랑 동평장사 조은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진해절도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화주자사 배단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괵주자사 유첨을 형부상서로 임명하였다. 유첨이 폄적될 때 어질고 어리석음을 막론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가 돌아올 때 장안 동서 시장 사람들이 돈을 모아 백희를 고용해 그를 맞이했다. 유첨이 이 소식을 듣고 날짜를 바꾸어 다른 길로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여름 5월 을미일에 배단이 죽었다. 유첨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유첨이 남쪽으로 폄적될 때 유업이 위보형과 노암에게 붙어 함께 그를 비방했다. 유첨이 돌아와 재상이 되자 유업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 가을 8월 정사 삭일에 유업이 유첨을 초청하여 염철원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유첨이 집에 돌아와 병이 들어 신미일에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유업이 그를 독살했다고 여겼다.
병부시랑 판도지 최언소를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최언소는 최군의 조카였다. 병부시랑 왕응은 왕정아의 종손으로, 그의 어머니는 최언소의 이모였다. 왕응과 최언소는 함께 과거에 응시했는데, 왕응이 먼저 합격하여 일찍이 평상복을 입고 최언소를 만나 농담으로 “그대는 명경과에 응시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했다. 최언소가 노하여 깊은 원한을 맺었다. 최언소가 재상이 되자 그의 어머니가 시비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해 버선과 신발을 많이 만들어라. 왕시랑 모자는 반드시 유배 추방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여동생과 함께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최언소가 절하며 울며 사과하기를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응은 이로 인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겨울 10월 문하시랑 동평장사 유업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회남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부시랑 정분을 병부시랑으로, 한림학사승지 호부시랑 노휴는 본관을 유지하면서 모두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11월 경인일 동짓날에 여러 신하들이 황제에게 존호를 성신총예인철효황제라고 올렸다. 연호를 바꾸었다.
위박절도사 한윤중이 죽자 군중에서 그의 아들 절도부사 한간을 유후로 세웠다.
남조가 서천을 침범하여 부교를 놓고 대도하를 건넜다. 방하도지병마사 이주자사 황경복 등이 그들이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니, 만군이 패주하여 황경복이 부교를 끊었다. 만군은 중군에 많은 깃발을 세워 앞에 드러내고, 병력을 나누어 은밀히 상류와 하류 각 20리 지점에서 밤에 부교를 놓아 다음날 아침 함께 도하하여 여러 성책을 함락시키고 협공하여 황경복을 공격했다. 황경복이 힘껏 사흘을 싸우다 거짓 패주하자, 만군이 정예병을 모두 동원해 추격했다. 황경복이 세 곳에 복병을 배치해 기다리다가 만군이 3분의 2를 지나자 복병을 일으켜 공격하여 만군을 크게 무찔러 2천여 명을 죽이고 대도하 남안까지 추격한 뒤 돌아왔다. 다시 성책을 수리하여 지켰다. 만군이 돌아가 지라곡에 이르렀을 때, 국내에서 계속 파견된 병사를 만나 신구 병력이 합쳐져 징과 북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렸다. 다시 대도하를 침범하여 당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주둔하며, 거짓으로 화친을 청하고 또 상류와 하류에서 은밀히 도하하여 황경복과 며칠 동안 싸웠다. 서천의 원군이 오지 않고 만군은 점점 많아져 황경복이 버티지 못하고 군대가 마침내 패주했다.
12월 당항과 회흘(위구르)이 천덕군을 침범했다.
감화군이 상주하기를 떼 도둑이 침략 약탈하여 주와 현이 금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황제가 운주, 곡주 등 도에 명하여 군대를 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남조가 승세를 타서 이주를 함락시키고, 공래관으로 들어가 아주를 공격했다. 대도하에서 패주한 병사들이 공주로 도망쳐 들어가자 성도가 놀라서 소란해져 백성들이 다투어 성 안으로 들어가거나 북쪽으로 다른 주와 군으로 도망갔다. 성 안에서는 수비를 크게 강화하여 해자와 성벽이 이전보다 더욱 견고하고 치밀해졌다. 표신(남조왕)이 단탁(남조 청평관)을 보내 절도사 우총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감히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입경하여 천자를 알현하고 수십 년간 참소로 이간질당하고 원통하고 억울하게 시달린 일을 면전에서 진술하려 합니다. 만약 성상의 은혜를 입어 가엾이 여기고 체휼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돌아가 상서와 영원히 좋은 이웃 나라가 되기를 맺겠습니다. 지금 귀부를 빌려 지나가려 하니 촉왕청을 빌려 수일 동안 머물렀다가 동쪽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총은 본래 나약하고 겁이 많아 허락하려 했으나, 양경복이 불가하다고 여겼다. 이에 사자를 참수하고 두 사람을 억류하여 답장을 주어 돌려보내면서, 편지 내용은 남조의 죄상을 극력 나열하며 욕설했다. 만병이 신진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우총은 만병이 다시 올까 걱정하여 미리 성 밖 민가를 불태웠는데, 집이 모두 불타자 촉 땅 백성들이 모두 그를 탓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하동, 산남서도, 동천의 병력을 징발해 증원하고, 천평절도사 고변을 서천으로 보내 만족(남조) 문제를 처리하게 하였다.
한간을 위박유후로 임명하였다.
상주자사 왕추는 군부와 주부의 재정이 공허하고 곤란해지자, 곡물을 대신하여 거두던 세금을 줄였다. 이에 백성들이 서로 앞다투어 몽둥이로 그를 구타했고, 관리 두 명을 죽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새로 자사 이고를 임명하여 부임하게 하고, 백성 이숙문 등 30명을 체포하여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처음에 회골이 여러 차례 책봉을 요청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책봉사 치종거를 그 나라로 보냈다. 마침 회골이 토욕혼과 왈말에게 패하여 도망쳐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조서로 치종거에게 옥책과 국신을 영염절도사 당홍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울로 돌아오도록 명했다.
황제는 나이가 어려 정사는 신하들에게 달려 있었고, 남아(조정 관료)와 북사(환관)가 서로 모순되고 대립했다. 의종 이후로 사치하는 풍조가 날로 심해졌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조세 징수는 더욱 급박해졌다. 관동 지역은 여러 해 동안 수해와 한해가 겹쳤으나 주와 현에서는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아 위아래가 서로 속이고 속았으며,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며 굶어 죽어도 하소연하거나 고소할 곳이 없었다. 이에 도적이 되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주와 현의 병력은 적었고, 오랜 태평시대에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지 않아 도적과 만날 때마다 관군은 대부분 패배했다. 이 해에 복주 사람 왕선지가 처음으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장원에서 일어났다.
의종 소성공혜효황제 하간부 2년(을미, 서기 875년)
봄 정월 병술일에 고변을 서천절도사로 임명했다.
신사일에 황제가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베풀었다.
고변이 검주에 도착하여 먼저 사자를 말을 달려 보내 성도 성문을 열게 했다. 어떤 사람이 간언했다. "만적이 성도에 바짝 다가왔는데, 상공께서는 아직 멀리 계십니다. 만약 만인이 멧돼지처럼 갑자기 쳐들어오면 어찌하시렵니까?" 고변이 말했다. "내가 교지에서 만병 20만 명을 무찔렀다. 만인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도망가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감히 성도를 범하겠는가! 지금 봄날씨가 따뜻해져 수십만 명이 성 안에 쌓여 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있어 더러운 기운이 엉기고 찌면 반드시 역병이 생길 것이다. 지체할 수 없다!" 사자가 성도에 도착하여 성문을 열고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게 하고, 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성에서 내려와 갑옷을 벗으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만인이 마침 아주를 공격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하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고변이 또 상주했다. "남만은 작은 추축에 불과하여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천에는 신구 병사가 이미 많으니, 소집한 장무, 부방, 하동의 병사는 한갓 병력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만 낭비할 뿐이니, 모두 돌려보내도록 명령하소서." 황제는 조서로 하동의 병사만 중지시켰다.
황제가 보왕이었을 때 소마방사 전령자가 총애를 받았는데, 즉위한 후에 그로 하여금 추밀을 관장하게 하고 마침내 중위로 승진시켰다. 황제는 당시 14세로 오직 놀이와 즐거움에만 전념하여 정사는 일체 전령자에게 맡기고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전령자는 책을 좀 읽었고 기교와 권모술수에 능하여 권력을 잡고 뇌물을 받았으며, 관리 임명이나 비의와 자의를 하사하는 일도 황제에게 아뢰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항상 직접 두 접시의 과일과 음식을 준비하여 황제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한참 동안 느긋하게 있다가 물러났다. 황제는 내원의 소년들과 가까이 지내며 놀았고, 악공과 기녀에게 상을 주는 비용이 매번 수만에 달하여 부고의 저축이 바닥났다. 전령자는 황제에게 권하여 양시(두 시장) 상인들의 진귀한 보물과 재화를 조사하여 모두 내고(황실 창고)로 보내게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조윤에게 넘겨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 재상 이하의 관리들은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고변이 성도에 도착한 다음 날,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발동하여 남조를 추격하여 대도하에 이르러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그 추장 수십 명을 사로잡아 성도로 보내 목을 베었다. 공래관과 대도하의 여러 성채를 수리하고, 또 융주의 마호진에 성을 쌓아 평이군이라 이름 지었으며, 또 목천원에 성을 쌓았는데, 모두 만인이 촉 땅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였다. 각각 수천 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수비하게 했다. 이로부터 만인이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고변이 황경부를 불러 대도하에서의 패배를 책망하고 요참형에 처했다. 고변이 또 상주하여 자신이 관할하는 본관 병력과 천평, 소의, 의성 등 군대 합계 6만 명을 직접 이끌고 남조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황제는 조서로 허락하지 않았다. 먼저, 남조의 독상이 여러 차례 중서성에 문서를 보내어 말이 원망에 가득 찼으나, 중서성은 답변하지 않았다. 호가가 상주했다. "이렇게 하면 만인은 더욱 교만해져서 당나라가 할 말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땅히 그들이 십 대 동안 은혜를 입은 사실을 열거하여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서성에서 문서를 보내면 지위가 대등하다는 혐의가 있으니, 청컨대 고변과 영남서도절도사 신당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조서 내용을 베껴 문서 형식으로 남조에 답하게 하소서." 황제가 따랐다.
3월에 위박유후 한간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지난해에 감화군이 병사를 징발하여 영무로 가서 추방(가을철 방어)하게 했는데, 마침 남조가 서천을 침범하자 황제가 칙명으로 구원하러 가게 했다. 군대가 아직 성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병이 물러가자,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봉상에 이르렀을 때, 영무로 가기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서주로 돌아가려 했다. 내양 왕욱본과 도장 유봉이 선동한 수괴 호웅 등 8명을 수색 체포하여 목을 베니, 무리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처음에 남조가 성도를 포위했을 때, 양경복은 후한 지위와 급료로 돌격장수를 모집하여 막게 했고, 성도는 이로 인해 보전될 수 있었다. 고변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모두 임명장을 바치게 하고, 또 촉 땅이 여러 차례 만적에게 시달려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그들의 급료를 중단하니, 돌격장수들은 모두 분개하고 원망했다. 고변은 요술을 좋아하여, 매번 만인을 추격할 때면 밤에 깃발을 걸고 대열을 세운 후,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과 사람을 그린 종이를 태우고 작은 콩을 뿌리며 말했다. "촉 병사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으니, 지금 현녀의 신병을 보내 앞서 싸우게 한다." 군중의 장사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또 관내의 관리 중 아전 출신인 자를 모두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민간에서는 모두 족전(100문짜리 돈)을 사용하도록 명령하고, 100문이 안 되는 돈을 사용하는 자는 모두 체포하여 뇌물죄로 탄핵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사형에 처했다. 형벌이 가혹하여 촉 사람들이 매우 불만을 품었다. 여름 4월에 돌격장수들이 난을 일으켜 큰 소리로 지르며 부청으로 쳐들어갔다. 고변은 도망쳐 뒷간에 숨었고, 돌격장수들이 그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천평도장 장걸이 휘하 수백 명을 이끌고 갑옷을 입고 부중으로 들어와 돌격장수들을 공격했다. 돌격장수들은 아문 앞의 의장용 병기를 빼앗고, 병기가 없으면 몽둥이를 휘두르고 주먹을 휘둘러 분노에 차서 힘껏 싸웠으나, 천평군이 감당하지 못하고 진영으로 도망쳤다. 돌격장수들이 그들을 쫓았으나, 영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감군이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러 직위 명호와 급료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지 오랜 후에야 돌격장수들이 비로소 진영으로 돌아갔다. 천평군이 다시 문을 열고 나와 추격하는 기세를 보였다. 성 북쪽에 이르렀을 때 마침 격구장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역부 수백 명이 있었다. 천평군이 그들의 목을 모두 베어 부청으로 돌아와 "난을 일으킨 자들을 이미 주살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변이 나와 그들을 만나 후하게 금과 비단으로 상을 내렸다. 다음 날, 방을 붙여 돌격장수들에게 사과하고, 그들의 직위 명호와 의복 급료를 모두 돌려주었다. 이로부터 매일 자신을 따라온 여러 도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번갈아 부중에서 숙직하게 하여 무장을 철저히 하고 호위하게 했다.
성덕절도사 왕경숭을 겸임 시중으로 임명했다.
절서 낭산진압사 왕야 등 69명은 전공이 있었으나, 절도사 조은이 그들에게 직위 명호는 주었지만 의복과 급료는 주지 않았다. 왕야 등이 호소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창고를 약탈하고 병기를 빼앗아 난을 일으켰다. 길을 따라 당원을 모아 거의 만 명에 이르렀고, 소주와 상주를 함락시키고 배를 타고 왕래하며 강을 따라 바다로 나가, 두절(양절) 지역을 두루 약탈하고 남으로 복건에 이르러 큰 화근이 되었다.
5월에 태부 분사 영구호를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봉상절도사를 충원하게 했다.
사공 동평장사 소방이 죽었다.
6월에 어사대위 이위를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辛未일, 고변은 몰래 돌장(突将)의 명단을 작성하고, 사람을 보내 밤에 습격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그들의 집을 포위하고 담을 허물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노인, 어린이, 임산부, 병자를 모두 쫓아내어 죽였다. 갓난아이 중에는 계단에 던져지거나 기둥에 부딪혀 죽은 자가 있었고, 피는 시내를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는 하늘에 진동하였다. 죽은 자는 수천 명이었고, 밤에는 수레에 시체를 싣고 강에 던졌다. 한 부인이 형장에 임하여 손가락으로 고변을 가리키며 크게 꾸짖었다. “고변! 너는 까닭 없이 공로 있는 장수의 직책과 명호, 의복과 양식을 빼앗아 무리의 분노를 일으켰다.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속임수를 써서 무고한 만 명 가까이를 죽였으니, 천지귀신이 어찌 너를 이토록 용납하겠는가! 나는 반드시 상제(上帝)에게 너를 고소하여, 훗날 너의 온 집안이 오늘의 나처럼 도륙당하고, 원통하고 모욕당함이 오늘의 나와 같으며, 놀라고 두려워 근심함이 오늘의 나와 같게 하리라!” 말을 마치고 하늘에 절하고 분개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오랜 후에 돌장 중에 변방 근무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는데, 고변은 또 그들의 온 족속을 주멸하려 하였다. 옛부터 따라온 측근 관료 왕은(王殷)이 간하여 말하였다. “재상께서 도교를信奉하시니, 마땅히 살생을 싫어하고 생명을 아껴야 합니다. 이들은 밖에 있다가 처음에 공모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또 그들을 죽인다면,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고변이 이에 그쳤다.
왕선지(王仙芝)와 그의 동당 상군장(尚君長)이 복주(濮州)와 조주(曹州)를 함락시키고,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천평절도사(天平節度使) 설숭(薛崇)이 군사를 내어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왕선지에게 패배하였다. 원구(冤句) 사람 황소(黃巢)도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왕선지에게 호응하였다. 황소는 젊었을 때 왕선지와 함께 모두 사사로이 소금을 팔아 생계를 삼았는데, 황소는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협의(俠義)를 좋아하며, 서적과 전기를 대강 섭렵하였으나 여러 번 진사 시험에 낙방하고, 마침내 도적이 되었다. 왕선지와 함께 주와 현을 공략하며 산동(山東) 일대를 휩쓸자,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자들이 앞다투어 그들에게 귀부하였다. 몇 달 사이에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장공소(張公素)는 성격이 포악하고 잔혹하여 군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대장 이무훈(李茂勳)은 본래 회흘(回鶻) 아부사(阿布思) 부족 사람으로, 회흘이 패망한 후 장중무(張仲武)에게 항복하였다. 장중무가 그를 보내 변경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여러 번 공을 세워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납항군사(納降軍使) 진공언(陳貢言)은 유주(幽州)의 자산 장수로 군사들의 신임과 복종을 받았는데, 이무훈이 은밀히 진공언을 살해하고, 진공언이라고 속여 군사를 이끌고 계주(薊州)를 공격하였다. 장공소가 성을 나가 맞서 싸우다 패하여 도성으로 도망갔다. 이무훈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 무리들은 비로소 그가 진공언이 아님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이 그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세웠다. 조정에서는 이에 이무훈을 유후(留後)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가 하늘을 가리고, 지나가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경조윤(京兆尹) 양지지(楊知至)가 아뢰었다. “메뚜기가 경기(京畿) 지역으로 들어왔으나 곡식을 먹지 않고 모두 가시나무를 안고 죽었습니다.” 재상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8월, 이무훈이 노룡절도사에 임명되었다.
9월, 좌보궐(左補闕) 동우(董禹)가 황제에게 사냥과 유람, 나귀 타기와 격구를 삼갈 것을 간언하자, 황제가 그에게 금은과 비단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 이간(李侃)이 상주하여 그의 의부(義父)인 화청궁사(華清宮使) 도아(道雅)에게 추증 관직을 청원하였다. 동우가 상소하여 이 일을 논하면서, 언사가 환관들을 침범하였다. 추밀사(樞密使) 양복공(楊復恭) 등이 잇달아 황제에게 하소연하니, 겨울 10월, 동우는 이로 인해 체주사마(郴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양복공은 양흠의(楊欽義)의 양손자이다.
소의군(昭義軍)에 반란이 일어나 대장 유광(劉廣)이 절도사 고식(高湜)을 축출하고 스스로 유후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 조상(曹翔)을 소의절도사로 임명하였다.
회흘이 나천(羅川)으로 돌아와, 11월에 사신 동라유록(同羅楡祿)을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니, 조정에서는 구제용 비단 1만 필을 하사하였다.
도적이 점차 번져나가 열 개 이상의 주를 약탈하고 회남(淮南)까지 퍼져, 많은 무리는 천여 명, 적은 무리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회남(淮南), 충무(忠武), 선무(宣武), 의성(義成), 천평(天平) 다섯 군의 절도사와 감군(監軍)에게 신속히 토벌 포획 및 초유(招諭) 회유(懷柔)할 것을 명령하였다. 12월, 왕선지가 기주(沂州)를 침범하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송위(宋威)가 표문을 올려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별도로 사직(使職)을 설치하여, 본도(本道) 군대를 거느리고 각지에서 적을 토벌하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송위를 제도행영초초초초적사(諸道行營招討草賊使)로 임명하고, 금군(禁軍) 3천 명과 갑옷 기병 5백 명을 지급하였다. 이어 조서를 내려 하남 각 군진(軍鎭)에서 파견한 토적도두(討賊都頭)들은 모두 송위의 지휘와 조종을 따르게 하였다.
의종소성공혜효황제(懿宗昭聖恭惠孝皇帝) 하 건부(乾符) 3년(병신, 서기 876년)
봄 정월, 천평군이 상주하여 장사 장안(張晏) 등을 파견하여 기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돌아올 때 의교(義橋)에 이르러 북쪽 변경에 또 도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머물러 방어하게 하였다. 장안 등이 따르지 않고 떠들썩하게 고함을 지르며 운주(鄆州)로 달려갔다. 도장(都將) 장사태(張思泰)와 이승우(李承祐)가 말을 타고 성을 나와 소매를 찢어 그들과 맹세하고, 봉록으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위로하고 타일러서야 안정되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본군(本軍)에서 선유(宣諭)하고 안무(安撫)하여 일체를 추궁하지 말도록 하였다.
2월, 황제는 칙서를 내려 복건(福建), 강서(江西), 호남(湖南) 각 도의 관찰사와 자사(刺史)에게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명령하였다. 또 전국 각 촌락에서 각각 활과 화살, 칼과 창, 북과 판자를 설치하여 도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운해절도사(兗海節度使)의 군호(軍號)를 태녕군(泰寧軍)으로 하사하였다.
3월, 노룡절도사 이무훈이 상주하여 그의 아들 유주좌사마(幽州左司馬) 이가장(李可掌)으로 유후 사무를 맡게 하고, 자신은 은퇴하기를 청원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이무훈을 좌복야(左僕射)의 관직으로 은퇴시키고, 이가거(李可舉)를 노룡유후(盧龍留後)로 임명하였다.
문하시랑(門下侍郎), 동평장사(同平章事) 최언소(崔彦昭)가 파면되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좌복야 왕탁(王鐸)을 문하시랑 겸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남조(南詔)가 사신을 고변에게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동시에 변경 침범을 멈추지 않았다. 고변이 그들의 사신을 참수하였다. 남만(南蠻)이 교지(交趾)를 함락시켰을 때, 안남경략판관(安南經略判官) 두양(杜驤)의 아내 이요(李瑤)를 포로로 잡았다. 이요는 황실의 먼 친척이었다. 남만이 이요를 돌려보내며, 고변에게 목협문서(木夾文書)를 전하며 스스로 ‘독상첩서천절도사(督爽牒西川節度使)’라 칭하고, 말이 지극히 오만하였다. 고변은 이요를 도성으로 보냈다. 갑진일, 고변은 또 남조에 문서를 보내 그들이 역대 황제의 은덕을 저버리고 잔혹하게 변경을 침범하며 해치고 속인 죄와, 안남과 대도하(大渡河)에서 패배한 일을 열거하며 그들을 욕보였다.
원주자사(原州刺史) 사회조(史懷操)가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여름 4월,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를 축출하였다.
황제가 선무(宣武), 감화(感化) 절도사와 사주(泗州) 방어사에게 밀조(密詔)를 내려, 정예 병사 수백 명을 뽑아 관할 구역 내에서 순찰하고, 수송선단을 보호하며, 5일마다 한 번씩 상공(上供)하는 돈과 쌀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상주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5월, 소왕(昭王) 이윤(李汭)이 사망하였다.
노룡유후 이가거를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6월, 무왕(撫王) 이굉(李紘)이 사망하였다.
웅주(雄州)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아올라, 주성(州城)과 공사(公私) 가옥이 모두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가을 7월, 전 암주자사(巖州刺史) 고걸(高傑)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삼고, 충임연해수군도지병마사(充任沿海水軍都知兵馬使)로 삼아 왕영(王郢)을 토벌하게 하였다.
악왕(鄂王) 이윤(李潤)이 사망하였다.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한간(韓簡)에게 동평장사(同平章事)의 관직을 더하였다.
송위가 기주 성 아래에서 왕선지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왕선지는 도망갔다. 송위가 상주하여 왕선지가 이미 죽었다고 하니, 각도 군대를 해산시키고 자신은 청주(青州)로 돌아갔다. 백관들이 모두 입조하여 축하하였다. 사흘이 지나 주와 현에서 상주하기를 왕선지가 아직 살아서, 약탈과 노략질이 예전과 같다고 하였다. 당시 군대가 막 쉬고 있었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발동시키니, 병사들은 모두 분개하고 불만에 차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8월, 왕선지가 양적(陽翟)과 협성(郟城)을 함락시키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충무절도사 최안잠(崔安潛)에게 군사를 내어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최안잠은 최신유(崔慎由)의 아우이다. 또 소의절도사 조상에게 보병과 기병 5천 명과 의성군(義成軍)을 거느리고 동도(東都)의 궁전을 지키게 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증원욕(曾元裕)을 초토부사(招討副使)로 삼아 동도를 지키게 하였다. 또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이복(李福)에게 보병과 기병 2천 명을 뽑아 여주(汝州)와 등주(鄧州)의 교통 요로를 지키게 하였다. 왕선지가 군사를 진격시켜 여주에 가까이 오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빈녕절도사 이간(李侃)과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영호도(令狐綯)에게 보병 1천 명과 기병 5백 명을 뽑아 섬주(陝州)와 동관(潼關)을 지키게 하였다.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경숭(王景崇)에게 겸임 중서령(中書令)을 더하였다.
9월 을해 삭일, 일식이 있었다.
병자일, 왕선지가 여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왕렵을 포로로 잡았다. 왕렵은 왕탁의 종형제였다. 동도 낙양이 크게 진동하여 선비와 백성들이 가족을 이끌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 을유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선지와 상군장의 죄를 사면하고 관직을 주어 그들을 초유하려고 했다. 왕선지가 양무를 함락시키고 정주를 공격하자, 소의감군판관 뇌은부가 중모에 주둔하며 왕선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쫓아냈다. 겨울, 10월, 왕선지가 남쪽으로 당주와 등주를 공격했다.
서천절도사 고변은 성도 라성을 축조하고, 승려 경선에게 계획과 측량을 맡겨 주위 25리로 하고, 모든 현의 현령들을 징발하여 민부를 모아 노역을 분배했으며, 관리가 백 전 이상의 뇌물을 받으면 모두 사형에 처했다. 촉 땅의 토질은 성기고 나빠 벽돌로 성을 쌓았고, 성 주위 10리 안에서 흙을 취하되 언덕을 모두 평평하게 파고, 구덩이를 파서 농사를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노역하는 사람들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교체했으며, 무리는 이러한 공평함을 좋아하여 채찍이나 매질 없이 공사가 완료되었다. 8월 계축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 무자일에 완공되었다. 공사가 시작될 무렵, 고변은 남조가 침략을 위협한다고 말하지만 감히 실제로 오지는 않을 것이나, 노역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놀라서 혼란에 빠질까 걱정하여, 상주하여 경선을 보내 가탁하여 유람하며 남조에 들어가, 표신을 설득하여 귀속시키고 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며, 이 기회에 양국의 예의를 논의하게 했으나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고변은 또 변경을 순시한다고 칭하며, 아침저녁으로 봉화 신호를 전달하여 대도하에 이르렀으나, 실제로는 가지 않았고, 남만은 이 때문에 두려워했다. 이때부터 성이 완성될 때까지 변경에는 전쟁 경보가 없었다. 이에 앞서 서천의 장수와 관리들이 남조에 들어가면 표신은 앉아서 그들의 절을 받았으나, 고변은 남조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므로 경선을 보내니, 표신이 과연 그의 대신들을 이끌고 맞이하여 절하며 그의 말을 듣고 따랐다.
왕선지가 영주와 복주를 공격하여 이 두 주를 함락시켰다.
왕적이 온주자사 노실을 통해 항복을 청원했고, 노실이 여러 번 그를 위해 상주하여 논의했으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적이 조정으로 오도록 명했다. 왕적은 군사를 거느리며 지체하며 반년 동안 오지 않고, 굳이 망해진 진수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조정이 허락하지 않고 왕적을 우솔부솔로 임명하고, 좌신책군에 명령하여 그에게 중요한 직책을 보충하게 했으며, 그가 이전에 빼앗은 재물은 모두 돌려주도록 명했다.
12월, 왕선지가 신주, 광주, 여주, 수주, 서주, 통주 등 여러 주를 공격했다. 회남절도사 유업이 상주하여 병력 증원을 요청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감화절도사 설능이 정예병 수천 명을 선발하여 그를 돕도록 명했다. 정분은 자신의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상소하여 말했다: "기주에서 첩보가 보고된 이후로 왕선지는 더욱 창궐하여 5,6개 주를 도륙하고 함락시켜 수천 리 땅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송위는 늙고 병들었으며, 함부로 상주한 이후로 각 도가 더욱 그를 따르지 않고, 지금 그는 박주에 머물며 전혀 공격 토벌할 뜻이 없습니다. 증원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기주와 황주에 주둔하며 오로지 물러서려고만 합니다. 만약 도적이 양주를 함락시키면 강남도 다시는 국가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최안잠의 위망은 뭇사람을 능가하고, 장자면은 용맹하고 준수한 훌륭한 장수이며, 궁원사 이성은 서평왕 이성의 손자로 엄숙하고 용감합니다. 청컨대 최안잠을 행영도통으로, 이성을 초토사로 삼아 송위를 대신하고, 장자면을 부사로 삼아 증원각을 대신하게 하소서." 황제가 그의 건의 중 일부를 채택했다.
청주와 창주의 군사들이 안남을 수비하고 돌아오다가 계주에 이르러 관찰사 이찬을 축출했다. 이찬은 이종민의 아들이었다. 조정이 우간의대부 장우막을 계주관찰사로 임명했다. 계관감군 이유주는 교만하고 횡포했으며, 이찬은 그에게 아첨하며 점차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계관에는 군사 800명이 있었고, 방어사가 겨우 100명을 지휘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감군의 관할에 속했다. 이유주는 또 주장을 축출하는 음모에 가담하여, 강제로 관찰사와 방어사의 관인을 빼앗고, 멋대로 지주를 대리 임명하며, 소주가 조정에 바칠 돈을 빼앗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장우막이 이 모든 일을 함께 조사하게 했다. 장우막은 장철의 아들이었다.
초토부사 겸 도감 양복광이 상주하여 상군장의 아우 상양이 사아산을 점거하고, 관군이 후퇴하여 등주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양복광은 양현가의 양자였다.
왕선지가 기주를 공격하자, 기주자사 배악은 왕탁이 과거 시험을 주관할 때 급제한 진사였다. 왕렵이 적군 중에 있어, 왕선지를 대신하여 편지를 써서 배악을 설득했다. 배악은 왕선지와 약속하여, 군사를 거두고 교전하지 않으며, 그를 대신하여 조정에 관직을 청하겠다고 약속했다. 왕렵도 왕선지에게 약속대로 따르도록 설득했다. 배악이 이에 성문을 열고 왕선지와 황소 등 30여 명을 성 안으로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많은 재물을 진열하여 그들에게 선물로 주며, 표를 올려 상황을 진술했다. 여러 재상들은 대부분 말했다: "선제(당의종)가 방훈을 사면하지 않았으며, 1년 후 결국 그를 죽였습니다. 지금 왕선지는 단지 작은 도적에 불과하여 방훈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의 죄를 사면하고 관직을 주는 것은 간사한 자들을 도울 뿐입니다." 왕탁이 굳이 요청하여 조정이 비로소 허락했다. 이에 왕선지를 좌신책군압아 겸 감찰어사로 임명하고, 환관을 보내 임명장을 기주에 가져다 주게 했다. 왕선지가 관직을 얻어 매우 기뻐했고, 왕렵과 배악도 모두 축하하러 왔다. 아직 물러나기 전에 황소가 관직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크게 노하여 말했다: "당초 우리가 함께 큰 맹세를 세워 천하를 종횡무진하자고 했는데, 지금 너 혼자 관직을 받아 좌신책군으로 달려간다면, 이 5천여 명의 부중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에 왕선지를 때려 그의 머리를 다치게 했고, 부중도 시끄럽게 떠들었다. 왕선지가 뭇사람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결국 임명을 받지 않았다. 기주를 크게 약탈하여, 성 안의 사람들은 절반이 쫓겨나고 절반이 살해되었으며, 집을 불태웠다. 배악은 악주로 도망쳤고, 조정 사자는 양주로 도망쳤으며, 왕렵은 도적군에 붙잡혔다. 도적군이 이에 군사를 나누어, 3천여 명이 왕선지와 상군장을 따르고, 2천여 명이 황소를 따르며, 각각 길을 나누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