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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칠십칠

제 77 편

자치통감 제261권 【당기칠십칠】 정사년(897년)부터 기미년(899년)까지, 모두 3년이다.

봄 정월, 갑신(초하루)에 한건이 상주하기를 "방성장 장행사 등이 목왕, 제왕, 소왕, 통왕, 팽왕, 한왕, 의왕, 진왕 여덟 사람이 나를 음모로 살해하고 황제를 하중으로 납치하려 한다고 고발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건은 여러 왕들이 군대를 장악한 것을 미워하여 장행사 등에게 그들을 고발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황제가 크게 놀라 한건을 불러 그 상황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한건은 병을 핑계로 입조하기를 거절하였다. 황제가 다시 여러 왕들에게 한건에게 가서 스스로 진술하도록 명령하자, 한건이 상표하기를 "여러 왕들이 갑자기 저의 관청에 이르러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번 일의 이치를 헤아려 보건대, 여러 왕들과 만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 왕들은 마땅히 스스로 의심을 피해야 하며,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폐하께서 만약 형제의 우애로 그들을 포용하신다면, 옛 제도에 따라 명령하여 그들이 십육택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정성을 다해 스승을 골라 시경과 서경을 가르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군대를 장악하거나 조정 일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청컨대 그 오합지졸들을 해산시켜 인린과 같은 교화를 빛내소서."라고 하였다. 한건은 황제가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거느린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행궁을 포위하고, 상주하는 글을 잇달아 올렸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날 밤, 조칙을 내려 여러 왕들이 통솔하던 군사들을 모두 해산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왕들은 십육택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으며, 그들의 갑옷과 병기는 모두 한건이 관할하여 거두어들이도록 하였다. 한건이 또 상주하기를 "폐하께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하시니, 충분히 난리를 제거할 수 있거늘, 어찌 따로 전후사군을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후함과 박함이 다른 은혜가 있더라도, 사사로움이 없고 당파가 없는 도의에 어긋납니다. 하물며 모인 자들은 모두 시장의 건달과 간사한 무리들이어서, 평상시에도 오히려 화란을 일으키려 하며, 위난을 만나면 반드시 조정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활을 당기고 칼을 잡아 황제의 수레에 바짝 붙어 있게 하는 것은, 신이 사사로이 마음이 서늘해지니, 청컨대 모두 없애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또한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에 전후사군의 이만여 명이 모두 해산되어, 천자의 친위군은 이로부터 없어졌다. 봉일도두 이균은 석문에서 호위한 공이 가장 컸는데, 한건이 또 상주하여 대운교에서 그를 참수하였다. 한건이 또 상주하기를 "현종 말년에 영왕 이린이 잠시 강남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대종 때 토번이 침입하였고, 광계 연간에 주매가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모두 종실 자제를 도와 인심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 왕들이 명을 받들어 각지에 사신으로 나간 자들은, 청컨대 모두 불러들이소서."라고 하였다. 또 상주하기를 "여러 방사들이 궁궐을 출입하며 황제의 시청을 현혹시키니, 마땅히 모두 금지하여 그들이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모두 그의 의견을 따랐다. 한건은 여러 왕들을 다른 관저에 감금한 후, 황제가 마음에 불쾌해함을 알고, 덕왕을 태자로 세우기를 상주하여 황제의 불쾌함을 풀어주려 하였다. 정해(초사흘)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덕왕 이유를 황태자로 세우고, 이름을 이욕으로 고쳤다.

방사고와 갈종주가 합세하여 운주를 공격하니, 주선은 병력이 부족하고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나와 싸우지 않고, 다만 물을 끌어 성 주위에 깊은 해자를 만들어 수비를 강화하였다. 신묘(초여드레)에 방사고 등이 수 서남쪽에 진을 치고 부교를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계사(열흘)에 그들은 몰래 해자를 파서 물을 빼냈다. 병신(열사흘)에 부교가 완성되자, 방사고는 밤에 중군을 이끌고 먼저 강을 건넜다. 주선이 이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중도로 도망치니, 갈종주가 그를 추격하였고, 시골 사람이 주선과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아 갈종주에게 바쳤다.

기해(열엿새)에 조정에서 손오의 봉상사면행영절도사 등의 직임을 면직하고, 부도통 이사의를 영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전류는 행군사마 두릉을 보내 무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안인의는 병력을 돌려 목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전충이 운주에 들어가 방사고를 천평유후로 임명하였다. 주근은 대장 강회정을 남겨 연주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하동 장수 사엄, 이승사와 함께 서주 경내로 가서 약탈하여 군량을 조달하였다. 주전충이 이 소식을 듣고 갈종주에게 군사를 이끌고 연주를 습격하게 하였다. 강회정은 운주가 이미 함락되었고 변주 군대가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2월, 무신(스무닷새)에 갈종주가 연주에 들어가 주근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주근이 돌아왔을 때는 갈 곳이 없어, 그의 무리를 이끌고 기주로 달려갔으나 기주자사 윤처빈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다시 해주로 도망쳐 그곳을 근거로 삼았으나, 변주 군대에게 핍박을 받아 사엄, 이승사와 함께 해주 백성들을 이끌고 회하를 건너 양행밀에게 투항하였다. 양행밀은 고우까지 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상표하여 주근을 무령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주전충은 주근의 아내를 거두어들이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는데, 장부인이 봉구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주전충은 주근의 아내를 얻은 일을 그녀에게 알렸다. 장부인이 주근의 아내를 만나 뵙기를 청하자, 주근의 아내가 그녀에게 절을 하였고, 장부인도 답례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연주와 운주는 사공과 동성으로 일찍이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작은 원한 때문에 서로 원수로 여겨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다가, 제 형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욕보게 하였습니다. 장차 변주가 함락되면, 저도 아마 오늘의 제 형수와 같아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전충은 이에 주근의 아내를 절로 보내 비구니가 되게 하고, 주선을 변교에서 참수하였다. 이에 운주, 제주, 조주, 체주, 연주, 기주, 밀주, 서주, 숙주, 진주, 허주, 정주, 활주, 복주가 모두 주전충의 소유가 되었다. 오직 왕사범이 치청 한 길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또한 주전충에게 귀복하였다. 이존신은 위주에 있다가 연주와 운주가 모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회남 지역은 본래 수전에 능숙하고 기마 사격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하동과 연주, 운주의 군대를 얻은 후에 군대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사엄과 이승사는 모두 하동의 용맹한 장수였는데, 이극용이 그들을 매우 아까워하여, 사자를 좁은 길로 양행밀에게 보내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양행밀은 허락하고, 또한 사자를 이극용에게 보내 다시 화친을 닦았다.

무오(닷새)에 왕건이 공주자사 화홍과 팽주자사 왕종우를 보내 군사 오만 명을 이끌고 동천을 공격하게 하고, 융주자사 왕종근을 봉상서면행영선봉사로 임명하여, 현무에서 봉상의 이계휘 등을 격파하였다. 이계휘는 본래 성이 양이었고 이름이 숭본이었으며, 이무정의 양자였다.

기미(엿새)에 천하에 사면을 내렸다.

황제가 행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경신(이레)에 왕건이 결운도지병마사 왕종감을 응원개협도지휘사로 임명하여 군사 팔천 명을 거느리고 유주로 달려가게 하고, 결승도지병마사 왕종완을 개강방송진봉사로 임명하여 군사 칠천 명을 거느리고 노주로 달려가게 하였다. 신미(열여드레)에 왕종감이 유주를 함락시키니, 유주자사 모숭후가 항복하였다. 계유(스무날)에 왕종완이 노주를 함락시키고 노주자사 마경유를 참수하니, 협로가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봉상 장수 이계소가 재주를 구원하러 가다가, 부장을 남겨 검문을 지키게 하였는데, 서천 장수 왕종파가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을해(스무이틀)에 문하시랑 동평장사 손오가 파면되어 원래 관직을 보유하였고, 중서시랑 동평장사 주박이 파면되어 비서감이 되었다. 주박이 집정한 후에 한 말이 모두 효과가 없어, 밖에서는 여론이 시끄러웠다. 태자첨사 마도은이 천문에 통달하고 장작감 허암사가 의술이 뛰어나 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한건이 두 사람에게 죄를 꾸며 죽이고, 또 손오와 주박이 이 두 사람과 서로 결탁하였다고 하여 그들의 재상 직위를 파면시켰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양행밀을 강남제도행영도통으로 임명하여 무창절도사 두홍을 토벌하게 하였다.

장길이 소주를 함락시키고 장훈을 사로잡았다.

3월, 병자(날짜 오류)에 주전충이 상표하여 조주자사 갈종주를 태녕유후로, 주우유를 천평유후로, 방사고를 무령유후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보의절도사 왕공이 호국절도사 왕가를 공격하자, 왕가는 이극용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왕공은 주전충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선무장수 장존경과 양사후가 의씨 남쪽에서 하중 군대를 격파했다. 하동 장수 이사소가 의씨에서 섬주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장점에서 그들을 격파하여 마침내 하중의 포위를 풀었다. 양사후는 근구 사람이고, 이사소는 이극용의 동생 이극유의 양자이다.

조정은 감의군을 소무군으로 개명하고 치소를 이주에 두었으며, 전 정난절도사 소문건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여름, 4월, 조정은 동주방어사 이계당을 광국절도사로 임명했다. 이계당은 이무정의 양자이다.

조정은 우간의대부 이순을 양천선유사로 임명하여 왕건과 고언휘의 관계를 조정하게 했다.

신해일(29일), 전류는 고전무等人을 보내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해로로 가흥을 구원하게 했다. 기미일(疑誤), 가흥성 아래에 도착하여 회남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두홍이 양행밀에게 공격받자 주전충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주전충은 그의 장수 섭금을 보내 사주를 약탈하게 하고, 주우공은 황주를 공격하게 했다. 양행밀은 우흑운도지휘사 마순 등을 보내 황주를 구원하게 했다. 황주자사 구장이 주우공이 오는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물러나 무창채를 지켰다.

계해일(疑誤), 양절 장수 고전무 등이 회남의 열여덟 개 영채를 격파하고 회남 장수 위약 등 3천 명을 사로잡았다. 회남 장수 전군이 역정대에 주둔하자 양절 군대가 승세를 타고 그를 추격했다. 갑술일(疑誤), 전군이 호주에서 도망쳐 돌아왔고, 양절 군대가 추격하여 그를 격파하자 전군의 부하 1천여 명이 죽었다.

한건이 형부상서 장이 등 여러 사람을 미워하여 모두 무고 상주하여 그들을 좌천시켰다.

5월, 조정은 봉국절도사 최홍에게 동평장사를 더했다.

신사일(疑誤), 주우공이 번항에 부교를 건설하여 무창채를 공격했고, 임오일(疑誤), 이를 함락시켜 구장을 사로잡고 마침내 황주를 탈취했다. 마순 등은 모두 싸우다 패하여 도망갔다.

병술일(疑誤), 왕건은 절도부사 장림으로 하여금 성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동천을 공격했다. 화홍의 이름을 왕종적으로 고쳤다.

6월, 기유일(疑誤), 전류가 월주로 가서 진동절도사의 부절과 부월을 받았다.

이무정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왕건이 동천을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계속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갑인일(3일), 조정은 왕건을 남주자사로 좌천시켰다. 을묘일(4일), 이무정에게 서천절도사를 더하고, 담왕 이사주를 봉상절도사로 임명했다. 계해일(12일), 왕건이 자주 남채를 함락시키고 수장 이계녕을 사로잡았다. 병인일(15일), 선유사 이순이 자주에 도착했고, 기사일(18일), 장파채에서 왕건을 만나자 왕건이 깃발을 든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사들의 뜻은 바꿀 수 없습니다."

담왕이 봉상 진소로 가자 이무정은 대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봉천에서 담왕을 포위했다. 조정은 용주에 영원군을 설치하고 이극용의 대장 개우를 겸임 절도사로 임명했다.

가을, 7월, 조정은 형남절도사 성예에게 겸임 시중을 더했다.

한건이 이무정에게 편지를 보내자 이무정은 봉천의 포위를 풀었고, 담왕은 화주로 돌아갔다.

조정은 천웅절도사 이계휘를 정난절도사로 임명했다.

경술일(29일), 전류가 항주로 돌아와 고전무를 보내 소주를 탈취하게 했다. 을미일(疑誤), 송강을 함락시켰다. 무술일(疑誤), 무석을 함락시켰다. 신축일(疑誤), 상숙과 화정을 함락시켰다.

당초, 이극용이 유주를 탈취하고 표문을 올려 유인공을 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고, 수비 병력과 심복 장수 열 명을 남겨 그곳의 기무를 관장하게 했으며, 유주의 전조세는 군대에 공급하는 것 외에는 모두 진양으로 운송하게 했다. 황상이 화주로 파천하자 이극용이 유인공에게 병사를 징발하고, 또 성덕절도사 왕용과 의무절도사 왕고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과 함께 관중을 평정하고 천자를 장안으로 호송하려 했다. 유인공은 거란의 침입을 구실로 사양하며 군사를 막아야 하니 거란이 물러간 후에 명령을 받겠다고 했다. 이극용이 여러 번 재촉했고 사자가 끊이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도 유인공의 군대는 출동하지 않았다. 이극용이 편지를 보내 꾸짖자 유인공은 편지를 땅에 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며 이극용의 사자를 가두고 하동의 수비 장수들을 죽이려 하자, 그 장수들은 도망쳐서 화를 면했다. 이극용이 크게 노하여 8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인공을 공격했다.

황상이 봉천으로 가서 직접 이무정을 토벌하려 하여 재상에게 의논하게 했다. 재상이 극력 간언하자 그만두었다.

연왕 이계비가 진양에서 돌아오자 한건이 상주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가까이 보좌하는 번진과 관계가 나빠진 것은 모두 여러 왕들이 군대를 장악하고 흉도들이 난을 좋아하여 천자의 수레가 편안하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近来 제가 그들의 병권을 파면할 것을 청한 것은 실로 불측의 변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왕과 담왕이 여전히 흉심을 품고 있다고 들었사오니, 원컨대 폐하께서 성명하게 결단하시고 망설이지 마시어 화란이 일어나기 전에 막으시는 것이 나라의 복입니다." 황상이 말했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며칠 동안 답변이 없었다. 한건이 이에 지추밀 유계술과 함께 가짜 성명을 내고 군사를 보내 십육택을 포위했다. 여러 왕들은 머리를 풀고 어떤 이는 담을 따라 도망가고, 어떤 이는 지붕 위로 올라가고, 어떤 이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 외쳤다. "폐하께서 저희를 구해 주소서!" 한건이 통왕, 기왕, 목왕, 제왕, 소왕, 팽왕, 한왕, 진왕, 담왕, 연왕, 단왕 등 열한 명을 석제곡으로 끌고 가 모두 죽인 후, 모반죄로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예부상서 손오를 남주사마로 좌천시켰다. 비서감 주박은 먼저 기주사마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영주사호로 좌천되었다. 주박이 재상이 되었을 때 하영이 빠르게 우간의대부로 승진했으나 이때 이르러 역시 호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종전이 길주자사 양양 사람 주비를 토벌하려 하자 주비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광릉으로 도망쳤다.

왕건이 고언휘와 쉰 번 넘게 싸웠다. 9월, 계유삭(초하루), 왕건이 자주를 포위했다. 촉주자사 주덕권이 왕건에게 말했다. "공께서 고언휘와 동천을 다투어 3년 동안 병사들은 화살과 돌에 시달리고 백성들은 수송에 곤란을 겪었습니다. 동천의 여러 도적들은 대부분 주현을 점거하고 있는데, 고언휘는 나약하고 계략이 없어 구차히 편안함을 도모하려 하여 모두 후한 이익으로 그들을 유인하여 그들의 구원에 의지했기 때문에 능히 지켜지고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사람을 보내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화리와 화복을 설명하여, 와서 귀순하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고, 귀순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력으로 위협한다면, 그들이 의지하는 바가 도리어 우리에게 이용될 것입니다." 왕건이 그의 말을 따르자 고언휘의 세력은 더욱 고립되었다. 주덕권은 허주 사람이다.

정축일(5일), 이극용이 안새군에 도착했고, 신사일(9일), 안새군을 공격했다. 유주 장수 단가급이 기병을 이끌고 오자 이극용이 마침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전봉이 말했다. "적이 왔습니다." 이극용이 취하여 말했다. "유인공이 어디 있느냐?" 대답했다. "단가급 등만 보일 뿐입니다." 이극용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단가급 같은 자들이 어찌 적이 될 만한가!" 급히 명령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 날 큰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유주 장수 양사간이 목과동에 복병을 배치했다가 하동 군대가 크게 패하여 절반 이상을 잃었다. 마침 폭풍우와 우레가 치자 유주 군대가 겨우 물러나 떠났다. 이극용이 술이 깬 후에야 패배한 것을 알고 대장 이존신 등을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술에 취해 큰일을 그르쳤으니, 너희는 어찌하여 힘껏 간하지 않았느냐!"

호주자사 이언휘가 전주를 이끌고 양행밀에게 귀부하려 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언휘는 광릉으로 도망쳤고, 도지휘사 심요가 호주를 이끌고 전류에게 귀부했다.

조정은 팽의절도사 장련을 봉상서북행영초토사로 임명하여 이무정을 토벌하게 했다.

조정은 다시 왕건을 서천절도사 겸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의무절도사 왕고에게 동평장사를 더했다. 새로 임명된 서천절도사 이무정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본래 성명인 송문통으로 복구시켰다.

주전충이 연주와 운주를 차지한 후, 병력이 더욱 강성해져 대대적으로 양행밀을 공격했다. 그는 방사고를 보내 서주, 숙주, 송주, 활주의 군사 7만 명을 이끌고 청구에 성을 쌓아 양주로 진격할 준비를 하게 하고, 갈종주를 보내 연주, 운주, 조주, 복주의 군사로 안풍에 성을 쌓아 수주로 진격할 준비를 하게 했다. 주전충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숙주에 주둔했다. 회남 지역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광국절도사 이계당이 조정이 이무정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는데, 한건이 이 기회를 이용해 그를 흔들자 이계당은 봉상으로 도망쳤다. 겨울, 10월, 조정은 한건을 진국·광국 두 군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임자(초열흘)일에 지수주 후소가 무리 2만 명을 이끌고, 을묘(열사흘)일에 지합주 왕인위가 무리 1천 명을 이끌었으며, 무오(열엿새)일에 봉상 장수 이계박이 원병 2천 명을 이끌고 모두 왕건에게 항복했다. 왕건이 자주를 공격하는 것이 더욱 급박해졌다. 경신(열여드레)일에 고언휘는 그의 종족과 양자들을 모아 함께 술을 마시며, 왕종필에게 직접 왕건에게 가서 항복하도록 했다. 술기운이 무르익었을 때, 고언휘는 그의 양자 고요에게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후 자살했다. 왕건이 자주에 들어가니, 성 안에는 아직 7만 명의 군사가 있었고, 왕건은 왕종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나누어 창주, 보주等地를 순행하게 하고, 왕종적을 동천 유후로 임명했다.

유인공이 상주하여 말했다: "이극용이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저를 치려 하므로, 제가 이미 목과연에서 그의 무리를 크게 격파했습니다. 제가 직접 통수가 되어 이극용을 토벌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유인공이 또 편지를 보내 주전충에게 알렸다. 주전충이 상주하여 유인공에게 동평장사를 더해 줄 것을 청했고, 조정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유인공이 또 사자를 보내 이극용에게 사과하며, 진퇴양난의 처지와 불안한 심경을 진술했다. 이극용의 답장에 대략 이르기를: "지금 그대가 부절을 쥐고 군대를 통제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법도를 세우면서, 선비를 등용하면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라고, 장수를 선발하면 은정에 보답하기를 기대하지만, 자신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남이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내 짐작컨대, 의심과 방비는 골육 사이에서 나오고, 틈과 의심은 장막 안에서 생겨나리니, 간장보검을 쥐고도 남에게 맡기지 못할 것이며, 맹세의 그릇을 받들고도 무슨 말로 맹세할 수 있겠는가!"

갑자(스무사흘)일에 조정은 황자 이비를 경왕, 이조를 휘왕, 이기를 기왕으로 봉했다.

조정은 팽의절도사 장련에게 동평장사를 더해 주었다.

양행밀과 주근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초주로 가서 변경 군사를 막았고, 다른 장수 장훈이 련수에서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자 양행밀은 그를 전봉으로 삼았다. 방사고가 청구에 진을 쳤는데, 어떤 사람이 "진영이 낮은 곳에 있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방사고는 듣지 않았다. 방사고는 병력이 많음을 믿고 적을 얕보아, 평소에도 자주 바둑을 두었다. 주근이 회수 상류의 물길을 막아 변경 군사에게 물을 대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방사고에게 알리자, 방사고는 그가 군심을 어지럽힌다 여겨 참수했다. 11월, 계유(초이틀)일에 주근과 회남 장수 후찬이 5천 기병을 이끌고 몰래 회수를 건너 변경 군사의 깃발을 달고 북쪽에서 곧바로 방사고의 중군으로 향했고, 장훈은 책을 넘어 그 안으로 쳐들어갔다. 변경 병사들은 급히 응전했으나 회수 물이 크게 밀려들어와 변경 군사들은 놀라고 혼란에 빠졌다. 양행밀은 대군을 이끌고 회수를 건너 주근 등과 함께 전후에서 변경 군사를 협격하여 대파시켰다. 방사고와 장수 및 병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흩어졌다. 갈종주는 수주 서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주단련사 주연수가 그를 격파하자 그는 수주로 물러나 지켰다. 방사고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 돌아갔다. 양행밀, 주근, 주연수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비수까지 이르렀다. 갈종주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회남 군사가 공격하여 갈종주의 무리는 거의 모두 죽거나 익사했고, 갈종주는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알후도지휘사 우존절은 말을 버리고 보병으로 싸웠으며, 여러 군대가 겨우 차례로 회수를 건널 수 있었다. 모두 나흘 동안 굶었고, 또 큰 눈을 만나 변경 병사들은 길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자는 1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주전충이 패배 소식을 듣고 역시 도망쳐 돌아갔다. 양행밀은 주전충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방사고와 갈종주는 나의 상대가 아니니, 그대가 직접 회수 위에서 결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양행밀은 크게 여러 장수들을 모아 회견하고, 행군부사 이승사에게 말했다: "처음에 내가 먼저 수주로 가려 했으나, 부사가 먼저 청구로 향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방사고가 패하자 갈종주가 저절로 도망쳤으니, 지금 과연 너의 예측대로 되었다." 그에게 1만 민(緡)의 돈을 상으로 주고, 표문을 올려 이승사를 겸임 진해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양행밀은 이승사와 사엄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주택과 첩실까지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기에 두 사람은 양행밀을 위해 힘을 다했고, 여러 번 공을 세웠으며, 결국 회남에서 죽었다. 양행밀은 이로 인해 장강과 회수 사이를 차지할 수 있었고, 주전충은 그와 다툴 수 없었다.

무인(초이렛날)에 조정은 숙비 하씨를 황후로 세웠다. 하황후는 동천 사람으로, 덕왕과 휘왕을 낳았다.

위무절도사 왕조의 아우 왕심지는 관찰부사로 있다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왕조가 여전히 태형을 가했으나 왕심지는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왕조가 병상에 누워 그의 아들 왕연흥, 왕연홍, 왕연풍, 왕연휴를 버리고 왕심지에게 군부의 사무를 맡기라고 명령했다. 12월, 정미(초엿새)일에 왕조가 죽었다. 왕심지는 그의 형 천주자사 왕심규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나, 왕심규는 왕심지에게 공로가 있다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왕심지는 자칭 복건 유후라 칭하고 표문을 올려 조정에 보고했다.

임술(스무하루)일에 왕건이 자주에서 돌아왔다. 무진(스무닷새)일에 성도에 도착했다. 이 해에 남조의 표신 순화가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함과 독상이 중서성에 보내는 첩문 목협이 있었으며, 연호는 중흥이었다. 조정에서 조서로 답장하려 하자, 왕건이 말했다: "남조는 작은 오랑캐에 불과하여 조서로 답할 가치가 없습니다. 신이 서남쪽에 있으니 그들이 반드시 변경을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정은 그의 말을 따랐다.

려주와 아주 사이에는 천만(淺蠻) 부락들이 있어 유왕, 학왕, 양왕이라 불렀으며, 각각 부락을 가지고 있었다. 서천에서는 해마다 그들에게 3천 필의 증백(縑帛)을 하사하여 남조의 동정을 정탐하게 했는데, 그들 또한 남조의 뇌물을 받고 성도의 허실을 염탐했다. 절도사가 부임할 때마다 세 왕은 추장들을 이끌고 관청에 가서 알현했으며, 절도사는 스스로 자신의 위엄과 덕행이 이끌어낸 것이라 여기고 표문을 올려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세 왕은 은밀히 대장들과 서로 결탁하여, 절도사가 대장들의 환심을 잃으면 그들이 여러 만족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전에는 절도사가 대부분 문관이어서 일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대장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주 임시 변통을 구했고, 남조도 그들을 이용해 여러 번 변방의 근심이 되었다. 왕건이 서천을 진압한 이후로는 그들에게 주던 옛 상여를 끊어버리고, 도압아 산행장을 참수하여 경고의 본보기로 삼았다. 공래 이남에는 초소를 두지도 않고 군사 한 명도 주둔시키지 않았으나, 만인들은 감히 침범하거나 약탈하지 못했다. 후에 왕건이 왕종파를 보내 남조를 공격하려 하자, 세 왕이 군사 기밀을 누설했기에 왕건이 그들을 불러 참수했다.

우습유 장도고가 소疏를 올려 말했다: "국가에는 다섯 가지 위험과 두 가지 화란이 있습니다. 옛날 한 문제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국가 대사에 익숙해졌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방법을 모르고 계십니다. 태종 때는 안으로는 중원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사방을 개척하여, 해외의 나라들도 모두 신하를 칭하며 귀부했습니다. 지금은 선조 때의 강역이 날로 줄어들어 거의 다 없어지려 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오나, 사사로이 폐하를 위해 마음 아파하며, 조정과 사직이 처음에는 간신에게 농락당하다가 결국에는 역적 신하에게 차지될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장도고를 시주 사호(施州司戶)로 좌천시켰다. 또 조서를 내려 장도고의 죄상을 밝히고 간관들에게 보여주었다. 장도고는 청주 사람이었다.

봄, 정월에 양절, 강서, 무창, 치청 각 번진이 각각 사자를 조정에 보내 주전충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양행밀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평로절도사 왕사범에게 동평장사를 더해 주었다.

병부상서 유숭망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동천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소신방어사 풍행습을 소신절도사로 임명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전쟁을 중지시키며, 이무정의 성명과 관작을 회복시키고, 봉상(鳳翔)을 정벌하던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임진일, 하중(河中) 절도사 왕가(王珂)가 진양(晉陽)으로 가서 직접 혼례를 맞이하러 갔고, 이극용(李克用)은 부장 이사소(李嗣昭)를 보내 하중을 진수(鎭守)하게 했다.

이무정과 한건(韓建)이 모두 이극용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가 여러 해 동안 도망다니며 머물렀으니 화해를 청하고 함께 왕실을 보좌하자고 하면서, 동시에 장인(匠人)을 보내 궁전 수리를 돕도록 청하자, 이극용이 이를 허락했다.

당초에, 왕건(王建)이 동천(東川)을 공격하자, 고언휘(顧彦暉)가 이무정에게 구원을 청했고, 이무정은 장수를 보내 병력을 출동시켜 구원했으며, 동쪽으로 황제를 핍박할 겨를이 없어 거짓으로 뉘우친 척하며 한건과 함께 천자를 보좌했다. 그런데 주전충(朱全忠)이 낙양(洛陽)에서 궁전을 영건하고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려 황제의 거가(車駕)를 맞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무정과 한건이 두려워하여 궁전 수리를 청하고 봉영하여 황제를 장안(長安)으로 돌아오게 하기를 요청했다. 조서를 내려 한건을 수궁궐사(修宮闕使)로 임명했다. 각 번진(藩鎭)들이 모두 재물과 장인·재목을 원조했다. 한건은 도장(都將) 채경사(蔡敬思)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공사가 끝나자, 2월에 한건이 직접 가서 시찰했다.

전류(錢鏐)가 진해군(鎭海軍)의 치소(治所)를 항주(杭州)로 옮기도록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무정을 다시 봉상(鳳翔) 절도사로 임명했다.

3월, 기축일, 왕심지(王審知)를 무위유후(威武留後)로 임명했다.

주전충이 부사(副使) 만년(萬年) 사람 위진(韋震)을 보내 입조하여 일을 아뢰고, 겸하여 천평(天平) 절도사를 겸임하도록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자 위진이 극력 쟁취했다. 조정이 부득이하여 주전충을 선무(宣武)·선의(宣義)·천평(天平) 세 진(鎭)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주전충은 위진을 천평유후(天平留後)로, 전 태주자사(臺州刺史) 이진(李振)을 천평절도부사(天平節度副使)로 임명했다. 이진은 이보진(李抱真)의 증손이다.

회남(淮南)의 장수 주본(周本)이 소주(蘇州)를 구원하러 갔으나, 양절(兩浙)의 장수 고전무(顧全武)가 그를 격파했다. 회남의 장수 진배(秦裴)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곤산(昆山)을 점령하고 주둔했다.

담주자사(潭州刺史)·판호남군부사(判湖南軍府事) 마은(馬殷)을 무안유후(武安留後)로 임명했다. 당시 호남(湖南)은 7주(州)를 관할했는데, 도적 괴수 양사원(楊師遠)이 형주(衡州)를 점거하고, 당세민(唐世旻)이 영주(永州)를, 채결(蔡結)이 도주(道州)를, 진언겸(陳彦謙)이 침주(郴州)를, 노경인(魯景仁)이 연주(連州)를 점거하여, 마은이 얻은 것은 단주(潭州)와 소주(邵州)뿐이었다.

의창(義昌) 절도사 노언위(盧彦威)는 성격이 잔혹하고 포악했으며, 또 인근 도(道)를 예우하지 않았다. 그는 노룡(盧龍) 절도사 유인공(劉仁恭)과 소금 이익을 다투다가, 유인공이 아들 유수문(劉守文)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창주(滄州)를 습격하자, 노언위는 성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위주(魏州)로 도망쳤다. 나홍신(羅弘信)이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변주(汴州)로 도망쳤다. 유인공은 이에 창(滄)·경(景)·덕(德) 세 주를 빼앗고 유수문을 의창유후(義昌留後)로 삼았다. 유인공의 병력이 더욱 강성해져, 스스로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기며 하삭(河朔)을 병탄할 뜻을 품고 유수문을 위해 절도사 정절(旌節)을 청했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중사(中使)가 범양(范陽)에 도착하자, 유인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정절은 내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다만 장안에서 나오는 정종(正宗) 화물을 얻고자 할 뿐이니, 어찌 여러 차례 상표(上表)를 거절당했는가? 나를 위해 말해 다오!"라고 하니, 그의 배역(悖逆)하고 오만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주전충이 유인공과 화친하고, 위박(魏博) 군대를 합쳐 이극용을 공격했다. 여름, 4월, 정미일, 주전충이 거록성(巨鹿城) 아래에 도착하여 하동(河東) 병사 1만여 명을 격파하고, 패병을 청산구(青山口)까지 추격했다.

호국(護國) 절도사 왕가(王珂)에게 시중(侍中)을 겸임하도록 더했다.

정묘일, 주전충이 갈종주(葛從周)를 시켜 군사를 나누어 명주(洺州)를 공격하게 했다. 무진일, 명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형선익(邢善益)을 참수했다.

5월, 기사 삭일, 대사면(大赦天下)을 실시했다.

갈종주가 형주(邢州)를 공격하자, 자사 마사소(馬師素)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신미일, 자주(磁州) 자사 원봉도(袁奉滔)가 자살했다. 주전충은 갈종주를 소의유후(昭義留後)로 삼아 형(邢)·명(洺)·자(磁) 세 주를 진수하게 한 후 돌아갔다.

무정(武定) 절도사 이계밀(李繼密)을 산남서도(山南西道) 절도사로 임명했다.

조정에서 왕건이 이미 왕종적(王宗滌)을 동천유후(東川留後)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유숭망(劉崇望)을 소환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고, 여전히 왕종적을 유후로 삼았다.

호남(湖南)의 장수 요언장(姚彦章)이 마은에게 진언하여 형(衡)·영(永)·도(道)·침(郴)·연(連) 다섯 주를 공격하여 취할 것을 청하고, 이경(李瓊)을 장수로 추천했다. 마은은 이경과 진언휘(秦彦暉)를 영북칠주유읍사(嶺北七州遊奕使)로, 장도영(張圖英)·이당(李唐)을 부장으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하여 양사원을 참수하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영주로 달려가 한 달 넘게 포위하자, 당세민이 도망쳐 죽었다. 마은은 이당을 영주자사로 삼았다.

6월, 호주자사(濠州刺史) 조규(趙珝)를 충무(忠武) 절도사로 임명했다. 조규는 조조(趙犨)의 아우이다.

가을, 7월, 무정(武貞) 절도사 뇌만(雷滿)에게 동평장사(同平章事)를 더하고, 진남(鎭南) 절도사 종전(鍾傳)에게 시중(侍中)을 겸임하도록 더했다.

충의(忠義) 절도사 조광응(趙匡凝)이 주전충이 청구(淸口)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양행밀(楊行密)에게 의탁했다. 주전충은 숙주자사(宿州刺史) 울씨(尉氏) 사람 민숙경(氏叔琮)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그를 토벌하게 했다. 병신일, 당주(唐州)를 함락시키고 수주자사(隨州刺史) 조광린(趙匡璘)을 사로잡았으며, 등성(鄧城)에서 양주(襄州) 군대를 격파했다.

8월, 경술일, 화주(華州)를 흥덕부(興德府)로 고쳤다.

무오일, 변경(汴將) 강회정(康懷貞)이 등주(鄧州)를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자사 국상(國湘)을 사로잡았다. 조광응이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주전충에게 귀부(歸服)하기를 청하자, 주전충이 허락했다.

기미일, 황제의 거가(車駕)가 화주에서 출발했다. 임술일, 장안에 도착했다. 갑자일,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고쳤다.

황제가 번진(藩鎭)들 사이에 화목하기를 바라며, 태자빈객(太子賓客) 장유부(張有孚)를 하동(河東)·변주(汴州)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고, 이극용과 주전충에게 조서를 내리고, 또 재상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화해하도록 했다. 이극용은 조서를 받들고자 했으나 먼저 자존심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왕융(王鎔)에게 편지를 보내 주전충에게 전달하게 했다. 주전충이 듣지 않았다.

9월, 을해일, 한건에게 수태부(守太傅)·흥덕윤(興德尹)을 더하고, 왕융에게 중서령(中書令)을 겸임하도록 더하며, 나홍신에게 수시중(守侍中)을 더했다.

기축일, 동천유후 왕종적이 왕건에게 말하기를, 동천의 강역이 오천 리나 되어 공문 왕래가 매양 수개월이 걸리니, 수(遂)·합(合)·노(瀘)·유(渝)·창(昌) 다섯 주를 나누어 따로 한 진(鎭)을 설치하기를 청했고, 왕건이 상표하여 이를 진술했다.

고전무가 소주를 공격하자, 성 안의 수비군과 구원군의 양식이 모두 떨어졌다. 갑신일, 회남이 임명한 소주자사 대몽(臺蒙)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구원군도 달아났다. 고전무가 소주를 함락시키고, 주본(周本) 등을 추격하여 망정(望亭)에서 격파했다. 오직 진배만이 곤산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자, 고전무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진배가 여러 차례 출전하여, 병약한 자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긴 창을 쥐게 하고, 강건한 자들에게 활을 당기고 쇠뇌를 걸게 하여, 고전무가 매번 이에 후퇴했다. 고전무가 격서(檄書)를 보내 진배에게 항복을 권했다. 고전무가 일찍이 중이었던 적이 있는데, 진배가 편지를 봉해 귀순을 표시하자, 고전무가 크게 기뻐하며 장수들을 모아 편지를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한 권의 불경(佛經)이 들어 있었다. 고전무가 매우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진배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겨를을 내어 나를 희롱하는구나!"라고 하고, 병력을 늘려 성을 공격하고 물을 끌어 성에 대니, 성벽이 무너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배가 마침내 항복했다. 전류가 천인석(千人席)을 베풀어 그를 기다렸는데, 그가 나오자, 파리하고 약한 병사가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전류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토록 외롭고 약한데, 어찌 감히 오래도록 항거하였는가!"라고 하자, 진배가 대답하기를 "저 진배는 의리상 양공(楊公)을 저버릴 수 없어, 지금 힘이 다하여 항복한 것이지, 진심으로 귀순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전류가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 고전무도 전류에게 그를 사면하도록 권하여, 전류가 따랐다. 당시 사람들이 고전무를 장자(長者)라고 칭송했다.

위박(魏博) 절도사 나홍신이 세상을 떠나자, 군중(軍中)에서 그 아들 절도부사(節度副使) 나소위(羅紹威)를 추대하여 유후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변장(汴將) 주우공(朱友恭)이 병사를 이끌고 강·회(江淮) 지역에서 돌아오다가 안주(安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사 무유(武瑜)가 은밀히 회남(淮南)과 결탁하여 변군(汴軍)을 탈취하려 도모한다고 고발했다. 겨울, 10월, 기해일, 주우공이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이극용이 부장 이사소·주덕위(周德威)를 시켜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청산(靑山)에서 출발하여, 산동(山東) 세 주를 회복하려 했다. 임인일, 형주를 공격하자 갈종주가 출전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이사소 등이 병사를 이끌고 청산으로 퇴각하자, 갈종주가 추격하여 그 퇴로를 막으려 했다. 보병이 스스로 흩어져 이사소가 제어할 수 없었다. 마침 횡충도장(橫衝都將) 이사원(李嗣源)이 거느린 부대가 도착하여 이사소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만약 물러간다면, 형세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시험 삼아 당신을 위해 그를 공격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사소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제가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사원이 이에 안장을 풀고 화살촉을 갈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진을 펴고 좌우로 지휘하니, 형주 군대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사원이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 힘껏 공격하고, 이사소가 그 뒤를 따르자, 갈종주가 마침내 퇴각했다. 주덕위는 마읍(馬邑) 사람이다.

계묘일, 무위유후 왕심지를 절도사로 임명했다.

나소위를 위박유후 사무를 주관하도록 임명했다.

정사일, 동천유후 왕종적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우국(佑國) 절도사 장전의(張全義)에게 시중을 겸임하도록 더했다.

王珙이 변군(汴軍)을 거느리고 하중(河中)을 침범하자, 왕가(王珂)가 이극용(李克用)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이극용이 이사소(李嗣昭)를 보내 구원하게 하니, 호벽(胡壁)에서 변군을 격파하고 변군은 도망쳤다.

전임 상주자사(常州刺史) 왕축(王柷)은 성품이 강직하고 곧았으며 명성이 있었다. 조정에서 그를 부르자, 당시 사람들은 그가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섬주(陝州)를 지나가는데 왕공(王珙)이 지극히 후하게 접대하며 자질(子姪)의 예로 뵙기를 청했으나, 왕축이 굳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공이 노하여, 전송하는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고 그의 집안사람들까지 모두 황하(黃河)에 던져 넣고 그 재물과 행장을 약탈한 뒤, 배가 전복된 사고로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감히 추궁하지 못했다.

윤월(閏月), 전류(錢鏐)가 부장 조규(曹圭)를 소주제치사(蘇州制置使)로 임명하고, 왕구(王球)를 보내 무주(婺州)를 공격하게 했다.

11월 갑인일(甲寅日), 황자 이진(李禛)을 아왕(雅王)으로, 이상(李祥)을 경왕(瓊王)으로 봉했다.

위박유후(魏博留後) 나소위(羅紹威)를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했다.

구주자사(衢州刺史) 진급(陳岌)이 양행밀(楊行密)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자, 전류가 고전무(顧全武)를 보내 토벌하게 했다.

주전충(朱全忠)이 봉국절도사(奉國節度使) 최홍(崔洪)이 양행밀과 결탁한 까닭에, 부장 장존경(張存敬)을 보내 그를 공격하게 했다. 최홍이 두려워하여 아우 도지휘사(都指揮使) 최현(崔賢)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청하며 말하기를, "장수와 병사들이 완악하고 흉포하여 제대로 통제할 수 없사오니, 2천 명을 보내어 전하의 휘하에서 종군하게 해 주소서."라고 했다. 주전충이 허락하고 장존경을 불러들였다. 장존경은 조주(曹州) 사람이다.

12월,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설지근(薛志勤)이 죽었다.

이극용이 왕행유(王行瑜)를 평정했을 때, 이한지(李罕之)가 이극용에게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의 자리를 청했다. 이극용이 말하기를, "왕행유는 공을 믿고 군주를 협박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가 토벌하여 죽인 것이다. 지난번 적을 격파했을 때, 내가 먼저 소문건(蘇文建)을 진(鎭)에 부임시키도록 주청을 올렸다. 지금 막 천청(天聽)에 이르렀는데 곧바로 변심하면, 조정 안팎의 의논이 반드시 우리가 왕행유처럼 행동한다고 시끄럽게 떠들 것이다. 나와 그대는 형제와도 같아서 본래 아까울 것이 없으나, 진소(鎭所)로 돌아간 뒤에 그대를 위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하겠다." 이한지가 불쾌히 물러나 사사로이 개우(蓋寓)에게 말하기를, "내 이한지는 하양(河陽)을 잃은 이후로 그대의 보호에 의지한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다. 최근 노쇠하여 군영 생활에 싫증이 났으니, 만약 우리 왕과 태부(太傅)께서 가엾이 여겨 작은 진(鎭) 하나를 내려주셔서 몇 년 사이에 병사를 쉬고 병을 다스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늙어 죽게 해 주신다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우가 대신 말해 주었으나 이극용이 응답하지 않았다. 번진(藩鎭)에 자리가 빌 때마다 의논할 적에 이한지를 거론하지 않으니, 이한지가 매우 울적해 했다. 개우가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을까 걱정하여 여러 번 말해 주었으나, 이극용이 말하기를, "내가 이한지에게 어찌 한 진(鎭)을 아끼겠는가? 다만 이한지는 매와 같아서, 배고프면 나를 위해 쓰이고 배부르면 날아가 버린다."라고 했다. 설지근이 죽자, 열흘 동안 주인이 없었다. 이한지가 제멋대로 택주(澤州)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틈타 노주(潞州)로 들어가 그 성을 점거하고 이극용에게 보고하기를, "설철산(薛鐵山)이 죽고 주민들이 주인이 없어 불한당들이 난동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한지가 제멋대로 주관하여 진정시키고 안무(安撫)하였사오니, 대왕께서 재결해 주소서."라고 했다. 이극용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 그를 꾸짖었다. 이한지가 이에 아들 이호(李顥)를 보내 주전충에게 항복하고, 하동(河東) 장수 마감(馬溉) 등과 심주자사(沁州刺史) 부요(傅瑤)를 체포하여 변주(汴州)로 보냈다. 이극용이 이사소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니, 이사소가 먼저 택주를 함락시키고 이한지의 가족을 체포하여 진양(晉陽)으로 보냈다.

양행밀이 성급(成及) 등을 양절(兩浙)으로 돌려보내며 위약(魏約) 등과 바꾸기를 청하자, 전류가 허락했다.

소주자사(韶州刺史) 증관(曾兗)이 군사를 일으켜 광주(廣州)를 공격하니, 주장(州將) 왕률(王鐐)이 전함을 거느리고 응원했다. 청해행군사마(清海行軍司馬) 유은(劉隱)이 한 번 싸워 그들을 격파했다. 소주 장수 유동(劉潼)이 다시 진(浈)과 함(涵) 두 곳을 점거하자, 유은이 토벌하여 죽였다.

봄, 정월 정미일(丁未日), 중서시랑 겸 이부상서 동평장사(中書侍郎兼吏部尙書同平章事) 최윤(崔胤)이 재상 직위에서 파면되어 본직만 유지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육예(陸扆)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했다.

주전충이 표문을 올려 이한지를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고, 또 표문을 올려 대행하동유후(代行河陽留後) 정회(丁會), 무녕유후(武寧留後) 왕경요(王敬蕘), 팽의유후(彰義留後) 장가(張珂)를 모두 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양행밀과 주근(朱瑾)이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주(徐州)를 공격하며 여량(呂梁)에 주둔하자, 주전충이 기병장수 장귀후(張歸厚)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유인공(劉仁恭)이 유주(幽州)와 창주(滄州) 등 12개 주의 군사 10만 명을 징발하여 하북(河北) 지방을 병합하려 했다. 패주(貝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의 1만여 호를 모두 학살하고 시체를 청수하(清水河)에 던져 넣었다. 이로부터 각 성들은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유인공이 위주(魏州)를 공격하여 성 북쪽에 진을 쳤다.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가 주전충에게 구원을 청했다.

주전충이 최현(崔賢)을 채주(蔡州)로 돌려보내 그곳의 군사 2천 명을 징발하여 대량(大梁)으로 가게 했다. 2월, 채주 장수 최경사(崔景思) 등이 최현을 죽이고 최홍을 협박하여 모든 군사와 백성을 몰아 회수(淮水)를 건너 양행밀에게 투항하게 했다. 군사와 백성들이 점차 도망쳐 돌아와 광릉(廣陵)에 도착한 자는 2천 명에 미치지 못했다. 주전충이 허주자사(許州刺史) 주우우(朱友裕)에게 채주를 진수(鎭守)하게 했다. 주전충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주를 구원하러 가니, 양행밀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변군(汴軍)이 하비(下邳)에서 그들을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주전충이 휘주(輝州)까지 행군했을 때, 회남군(淮南軍)이 이미 물러난 것을 듣고 돌아갔다.

3월, 주전충이 그의 장수 이사안(李思安)과 장존경(張存敬)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위박(魏博)을 구원하게 하여 내황(內黃)에 주둔했다. 계묘일(癸卯日), 주전충이 중군(中軍)을 이끌고 활주(滑州)에 주둔했다. 유인공이 그의 아들 유수문(劉守文)에게 말하기를, "너의 용맹은 이사안보다 열 배는 뛰어나니, 마땅히 먼저 이 졸개들을 사로잡은 뒤에 나소위를 잡아라!" 하고, 이에 유수문과 그의 매부 단가급(單可及)에게 5만 정병을 주어 내황에서 이사안을 공격하게 했다. 정미일(丁未日), 이사안이 그의 장수 원상선(袁象先)을 시켜 청수(清水) 서쪽에 복병을 매복시키고, 이사안이 번양(繁陽)에서 맞서 싸우다가 거짓 패주하자 유수문이 추격했다. 내황 북쪽에 이르러 이사안이 군사를 정비하여 되돌아 싸우고 복병이 공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했다. 유주군(幽州軍)이 대패하여 단가급이 참수되고 3만 명이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유수문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단가급은 유주(幽州)의 맹장으로 '단무적(單無敵)'이라 불렸는데, 연군(燕軍)이 그를 잃은 후 사기가 떨어졌다. 이사안은 진류(陳留) 사람이다.

이때 갈종주(葛從周)가 형주(邢州)에서 8백 정예 기병을 이끌고 이미 위주(魏州)에 들어와 있었다. 무신일(戊申日), 유인공이 상수관(上水關)과 관도문(館陶門)을 공격했다. 갈종주가 선의아장(宣義牙將) 하덕륜(賀德倫)과 함께 성을 나와 맞서 싸우며, 문을 지키는 자에게 돌아보며 말하기를, "앞에 강적이 있으니 돌아볼 수 없다." 하고는 성문을 닫게 했다. 갈종주 등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유인공이 다시 크게 패하여 그의 장수 설돌궐(薛突厥)과 왕회랑(王郐郎)을 사로잡았다. 다음 날, 변주(汴州)와 위주(魏州) 군사가 승세를 타고 합세하여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의 여덟 개 영채를 격파하니, 유인공 부자가 영채를 불사르고 도망쳤다. 변주와 위주 군사가 장거리 추격하여 임청(臨清)에 이르렀고, 유인공의 부대를 영제거(永濟渠)로 몰아넣어 죽고 익사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주(鎭州) 군사도 출병하여 동쪽 경계에서 요격하니, 위주(魏州)에서 창주(滄州)까지 오백 리 사이에 시체가 서로 포개졌다. 유인공은 이로부터 기세가 꺾여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주전충은 더욱 교만해졌다. 하덕륜은 하서(河西) 호인(胡人)이다. 유인공이 위주를 공격했을 때, 나소위는 사자를 보내 하동(河東)과 화친하고 구원을 청했다. 임오일(壬午日), 이극용이 이사소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했다. 마침 유인공이 이미 변군(汴軍)에게 패배했고, 나소위가 다시 하동과 단절하자 이사소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갈종주가 유주군을 격파한 기세를 타고 토문(土門)으로부터 하동을 공격하여 승천군(承天軍)을 함락시켰다. 편장(偏將) 씨숙종(氏叔琮)이 마령(馬嶺)으로부터 들어와 요주(遼州)의 낙평(樂平)을 함락시키고 유차(榆次)로 진군했다. 이극용이 내아군부(內牙軍副) 주덕위(周德威)를 보내 맞서 싸우게 했다.

씨숙종에게 맹장 진장(陳章)이 있었는데, '진야차(陳夜叉)'라 불리며 선봉이 되어 씨숙종에게 청하기를, "하동(河東)이 의지하는 것은 주양오(周楊五)이니, 제가 그를 사로잡아 주시면 한 주(州)의 상을 청하겠나이다."라고 했다. 이극용이 이 소식을 듣고 주덕위에게 경계시키니, 주덕위가 말하기를, "그는 헛된 말을 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동와(洞渦)에서 교전하여, 주덕위가 편복(便服)으로 갈아입고 나가 도전하며 그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진야차를 보거든 도망쳐라." 했다. 진장이 과연 쫓아오자, 주덕위가 철과(鐵撾)를 휘둘러 그를 말 아래로 떨어뜨려 산 채로 잡아 바쳤다. 이어 씨숙종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3천 명의 목을 베었다. 씨숙종이 영채를 버리고 도망치자 주덕위가 추격하여 석회관(石會關) 밖으로 나가 또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뒤에 주덕위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정사일(丁巳日), 주전충이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 정회(丁會)를 보내 택주(澤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무주자사(婺州刺史) 왕단(王檀)이 양절(兩浙) 군사에게 포위되어 선흡관찰사(宣歙觀察使) 전군(田頵)에게 구원을 청했다. 여름, 4월, 전군이 행영도지휘사(行營都指揮使) 강유(康儒)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五月甲午일,수주(遂州)에 무신군(武信軍)을 설치하고,수주·합주(合州) 등 다섯 주를 그 관할에 속하게 하였다.

이극용(李克用)이 번한마보도지휘사(蕃漢馬步都指揮使) 이군경(李君慶)을 보내 이한지(李罕之)를 공격하게 하였고,기해일(己亥日)에 노주(潞州)를 포위하였다。주전충(朱全忠)이 군대를 출병시켜 하양(河陽)에 주둔하였고,신축일(辛丑日)에 그의 장수 장존경(張存敬)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며,임인일(壬寅日)에 또 정회(丁會)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 지원하게 하였다。하동(河東) 군대를 크게 격파하니,이군경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이극용이 이군경과 그의 부장 이심(伊審)·이홍습(李弘襲)을 주살하고,이사소(李嗣昭)를 번한마보도지휘사로 임명하여 그를 대신해 노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경술일(庚戌日)에 강유(康儒) 등이 용구(龍丘)에서 양절(兩浙) 군대를 격파하고 그 장수 왕구(王球)를 사로잡아,마침내 무주(婺州)를 함락시켰다。

6월 을축일(乙丑日)에 이한지가 병세가 위급해졌다。정묘일(丁卯日)에 주전충이 표문을 올려 이한지를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로,정회를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로 임명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그의 장수 장귀패(張歸霸)를 보내 형주(邢州)를 진수하게 하고,갈종주(葛從周)를 보내 정회를 대신해 노주를 진수하게 하였다。

서천(西川) 대장 왕종길(王宗佶)을 무신절도사(武信節度使)로 임명하였다。왕종길은 본래 성이 감(甘)씨였고,홍주(洪州) 사람이었다。

정축일(丁丑日)에 이한지가 회주(懷州)에서 사망하였다。

보의절도사(保義節度使) 왕기(王珙)는 성품이 시기하고 잔혹하여,처자식과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항상 몸을 보전하기 어려워했다。이때에 이르러 군중에서 반란이 일어나 부하에게 살해당했고,사람들은 모두 장수 이번(李璠)을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가을,7월에 주전충의 해주(海州) 수비 장수 진해빈(陳海賓)이 양행밀(楊行密)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회해유이사(淮海游奕使) 장훈(張訓)이 진해빈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여겨,연수방어사(漣水防遏使) 여강(廬江) 사람 왕관(王綰)과 함께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곧장 해주로 가서 마침내 그 성을 점거하였다。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 성예(成汭)를 겸중서령(兼中書令)으로 더욱 높여 임명하였다。

마은(馬殷)이 그의 장수 이당(李唐)을 보내 도주(道州)를 공격하자,채결(蔡結)이 여러 만(蠻)족을 모아 험한 곳에 복병을 두고 공격하여 이당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이당이 말하기를 “만족이 의지하는 것은 다만 산림(山林)일 뿐이다。만약 평지에서 싸운다면,어찌 나를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이에 명령하여 바람을 따라 산림을 불태우니,불빛이 하늘과 땅을 비추었고,여러 만족이 놀라 도망쳐,마침내 도주를 함락시키고 채결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주전충이 노주에서 갈종주를 소환하고 하덕륜(賀德倫)을 보내 그곳을 진수하게 하였다。8월 병인일(丙寅日)에 이사소가 군대를 이끌고 노주 성 아래에 도착하여,병력을 나누어 택주(澤州)를 공격하였다。기사일(己巳日)에 변경(汴州) 장수 유기(劉玘)가 택주를 버리고 도망가니,하동 군대가 진격하여 천정관(天井關)을 점령하였다。이효장(李孝璋)을 택주자사(澤州刺史)로 임명하였다。하덕륜이 성문을 닫고 나와 싸우지 않자,이사소가 날마다 정예 기병으로 성 주변을 돌며 풀을 베고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을 잡아가고,성 가까이 30리 이내의 곡식을 모두 베어들였다。을유일(乙酉日)에 하덕륜 등이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쳐 호관(壺關)으로 향했는데,하동 장수 이존신(李存審)이 복병을 두어 요격하여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갈종주가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으나,하덕륜 등이 이미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9월 계묘일(癸卯日)에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이무정(李茂貞)을 봉상·팽의절도사(鳳翔·彰義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이극용이 표문을 올려 분주자사(汾州刺史) 맹천(孟遷)을 소의유후(昭義留後)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치청절도사(淄青節度使) 왕사범(王师范)이 기주(沂州)·밀주(密州)의 내부 반란으로 인해 양행밀에게 구원병을 청하였다。겨울,10월에 양행밀이 해주자사(海州刺史) 대몽(台蒙)과 부사 왕관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원조하게 하여,밀주를 점령하고 왕사범에게 돌려주었다。기주를 공격하려 하여 먼저 정탐꾼을 보냈는데,돌아와 보고하기를 “성 안에는 깃발과 북을 거두어 감췄습니다。”라고 하였다。왕관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방비가 있는 것이고,게다가 구원병이 가까이 있으니,공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밀주는 이미 함락되었는데,기주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왕관이 막을 수 없어,마침내 숲 속에 복병을 두고 기다렸다。여러 장수들이 기주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구원병이 도착하자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였다。주(州)의 병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추격하자,왕관이 복병을 발동시켜 그들을 격파하였다。

11월에 섬주(陝州) 도장(都將) 주간(朱簡)이 이번을 죽이고 스스로 유후라 칭하며 주전충에게 의탁하고,이름을 주우겸(朱友謙)으로 고쳐 주전충의 자식 항렬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충의절도사(忠義節度使) 조광응(趙匡凝)을 겸중서령으로 더욱 높여 임명하였다。

마은이 그의 장수 이경(李瓊)을 보내 치주(郴州)를 공격하여 진언겸(陳彦謙)을 사로잡아 참수하고;연주(連州)를 공격하자 노경자(魯景仁)가 자살하여,호남(湖南)이 모두 평정되었다。

12월에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羅紹威)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더욱 높여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