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기칠십팔
《자치통감》 제262권 【당기칠십팔】 상장둔탄(上章涒滩)에서 시작하여 중광작악(重光作噩)에 이르기까지, 모두 2년이다.
봄, 정월, 선주(宣州) 장수 강유(康儒)가 목주(睦州)를 공격하니, 전류(錢鏐)가 그의 사촌 전호(錢𨱇)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막게 하였다.
2월, 경신일, 조정에서 서천절도사 왕건(王建)을 겸임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하였다.
임신일, 위무절도사 왕심지(王審知)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가봉하였다.
임오일, 이부상서 최윤(崔胤)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청해절도사(清海節度使)를 충임하게 하였다.
이극용(李克用)이 군민을 대규모로 징발하여 진양성(晉陽城)의 성호(城壕)를 수리하였는데, 아아(押牙) 유연업(劉延業)이 간하여 말하기를 "대왕의 위엄과 명성은 중국과 오랑캐를 진동시키니, 마땅히 군대를 정비하고 무력을 다스려 변경의 방비를 강화해야 할 것이요, 가까운 곳에서 성호를 수리하는 것은 위엄을 손상시키고 적의 야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그에게 사과하고 금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여름, 4월, 정난군절도사 이승경(李承慶)을 동평장사로 가봉하였다.
주전충(朱全忠)이 갈종주(葛從周)를 보내 연주(兗州), 운주(鄆州), 활주(滑州), 위주(魏州) 네 진(鎭)의 군사 총 10만 명을 거느리고 유인공(劉仁恭)을 공격하게 하였다. 5월, 경인일, 덕주(德州)를 함락시키고 자사 부공화(傅公和)를 참수하였다. 기해일, 창주(滄州)에서 유수문(劉守文)을 포위하였다. 유인공이 다시 사자를 보내 겸손한 말과 풍부한 예물로 하동(河東)에 구원을 청하니, 이극용이 주덕위(周德威)를 보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황택(黃澤)으로 출발하여 형주(邢州), 명주(洺州)를 공격함으로써 유인공을 구원하게 하였다.
옹주(邕州)에서 병변이 일어나 절도사 이철(李鐬)을 쫓아내었다. 이철이 인근 번도(藩道)에 병사를 빌려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6월, 계해일, 동천절도사 왕종적(王宗滌)을 동평장사로 가봉하였다.
사공(司空), 문하시랑(門下侍郎), 동평장사 왕탁(王抟)은 사리에 밝고 도량이 있어 당시에 현명한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황제가 항상 환관 추밀사 주도필(朱道弼), 경무수(景務修)의 전횡을 미워하였고, 최윤이 날마다 황제와 함께 환관을 제거할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환관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남아(南衙)와 북사(北司)가 더욱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각자 번진(藩鎭)과 결탁하여 서로 도움으로 삼아 다투고 견제하였다. 왕탁이 이로 인해 화란이 일어날까 걱정하여, 조용히 황제에게 아뢰기를 "군주는 마땅히 큰 절개를 밝히는 데 힘쓰고 사사로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환관 전횡의 폐단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한꺼번에 없애기 어려우니, 여러 재난이 점차 평정되기를 기다려 천천히 해소할 방도를 꾀해야 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말씀을 가볍게 누설하지 마시어 간사한 변란을 재촉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최윤이 이 말을 듣고 황제 앞에서 왕탁을 무고하여 말하기를 "왕탁은 간사하여 이미 주도필 등의 외부 내응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의심을 품었다. 최윤이 재상에서 파직되자, 그는 왕탁이 자신을 배척한 것이라고 여겨 더욱 원한을 품었다. 최윤이 서울을 떠나 광주(廣州)를 진수하게 되자, 그는 주전충에게 편지를 써서 왕탁의 말을 자세히 진술하고, 주전충으로 하여금 상표(上表)하여 논주(論奏)하게 하였다. 주전충이 상표하여 말하기를 "최윤은 보필하는 자리에서 떠날 수 없으며, 왕탁은 칙사(敕使)와 내외로 결탁하여 함께 사직을 해롭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표문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황제가 비록 내정을 알고 있었으나, 주전충의 압력에 부득이 최윤이 호남(湖南)에 도착한 후에 다시 그를 소환하였다. 정묘일, 최윤을 사공,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왕탁은 공부시랑(工部侍郎)으로 면직되었다. 주도필은 형남군(荊南軍)을 감독하게 하고, 경무수는 청주군(青州軍)을 감독하게 하였다. 무진일, 왕탁을 계주자사(溪州刺史)로 폄적하고, 기사일, 다시 애주사호(崖州司戶)로 폄적하였다. 주도필은 장기 유배되어 환주(歡州)로, 경무수는 장기 유배되어 애주(愛州)로 보내졌다. 당일, 모두 자결을 명령받았다. 왕탁은 남전역(藍田驛)에서 죽고, 주도필과 경무수는 패교역(霸橋驛)에서 죽었다. 이에 최윤이 조정의 정사를 독점하여 권세가 조정 안팎을 진동시키니, 환관들은 모두 눈을 흘기며 분개하였다.
유인공이 유주(幽州)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창주를 구원하러 가서 건녕군(干寧軍)에 진을 쳤다. 갈종주는 장존경(張存敬), 숙사경(氏叔琮)을 남겨 창주 진영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노알제(老鴉堤)에서 맞서 싸워 유인공을 크게 무찌르고 참수 3만 급을 베었으며, 유인공은 도망쳐 와교(瓦橋)로 물러나 지켰다. 가을, 7월, 이극용이 다시 도지휘사 이사소(李嗣昭)를 보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형주, 명주를 공격하여 유인공을 구원하게 하였으며, 내구(內丘)에서 변주(汴州) 군사를 격파하였다. 왕융(王鎔)이 사자를 보내 유주와 변주 사이를 중재하였는데, 마침 여러 날 비가 내려 주전충이 갈종주를 불러 군사를 돌리게 하였다.
경술일, 소의유후(昭義留後) 맹천(孟遷)을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갑인일, 서천절도사 왕건을 겸임 동천(東川), 신무군(信武軍) 양도도지휘제치사(兩道都指揮制置使) 등으로 임명하였다.
8월, 이사소가 다시 사문하(沙門河)에서 변주 군사를 격파하고 명주를 공격하였다. 을축일, 주전충이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가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이사소가 이미 명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주소종(朱紹宗)을 사로잡았다. 주전충이 갈종주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이사소를 공격하게 하였다.
선주 장수 강유가 군량이 다 떨어져 청계(清溪)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9월, 갈종주가 업현(鄴縣)에서 장수(漳水)를 건너 황룡진(黃龍鎮)에 진을 쳤다. 주전충이 직접 중군 3만 명을 거느리고 명수를 건너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사소가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 갈종주가 청산구(青山口)에 복병을 설치하고 중간에서 요격하여 이사소를 크게 무찔렀다.
최윤이 태보(太保), 문하시랑, 동평장사 서언약(徐彥若)의 지위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것을 꺼리어 미워하였다. 서언약도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당시 번진들은 모두 강력한 신하들에게 점령되었고, 오직 사설왕(嗣薛王) 이지유(李知柔)만이 광주(廣州)에 있었으므로, 서언약이 그를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을사일, 서언약을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청해절도사를 충임하게 하였다. 처음에 형남절도사 성예(成汭)는 예주(澧州), 낭주(朗州)가 본래 자신의 관할 구역이었으나 뇌만(雷滿)에게 점거당한 것을 이유로 여러 번 할양하여 형남에 귀속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조정이 허락하지 않자, 성예가 매우 원망하였다. 서언약이 형남을 지날 때, 성예가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이 일을 꺼냈다. 서언약이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한 지방에서 높은 지위에 계시면서 스스로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에 비기시는데, 뇌만과 같은 작은 도적조차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정을 원망하십니까?"라고 하자, 성예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병오일, 중서시랑 겸 이부상서, 동평장사 최원(崔遠)이 면직되어 본관(本官)을 지키게 하고, 형부상서 배지(裴贄)를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하였다. 배지는 배탄(裴坦)의 아우의 아들이다. 계관(桂管)을 승격시켜 정강군(靜江軍)으로 삼고, 경략사 유사정(劉士政)을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주전충이 왕융이 이극용과 왕래하며 결탁한 것을 이유로 군대를 움직여 토벌하여, 임성(臨城)을 함락시키고 호타하(滹沱河)를 건너 진주(鎭州) 남문을 공격하며 외성을 불태웠다. 주전충이 친히 원씨(元氏)에 이르자, 왕융이 두려워하여 판관 주식(周式)을 주전충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 주전충이 매우 노하여 주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 번 편지로 왕공(王公)을 경고하였는데,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지금 군대가 여기까지 왔으니 결코 용서할 이치가 없다!"라고 하였다. 주식이 말하기를 "진주는 태원(太原)과 인접하여 침략과 능욕에 시달렸고, 사방의 이웃들은 각자 보전하기에 급급하여 구원하고 위로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왕공이 그들과 연합한 것은 백성을 위한 까닭입니다. 지금 명공(明公)이 진실로 남을 위해 해를 제거할 수 있다면, 천하에 누가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어찌 진주뿐이겠습니까! 명공은 당나라의 제환공, 진문공이시니, 마땅히 예의를 숭상하여 패업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한갓 무력을 일삼는다면, 진주는 비록 작지만 성벽은 견고하고 양식은 풍족하여, 명공이 비록 10만 대군을 거느리더라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왕씨(王氏)는 병부(兵符)를 잡은 지 이미 5대에 이르렀고, 당시 사람들은 그 충효를 칭송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를 위해 죽기를 원하니, 이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전충이 웃으며 주식의 소매를 잡아 장막 안으로 청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농담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객장(客將) 개봉인(開封人) 유한(劉捍)을 보내 성 안으로 들어가 왕융을 만나게 하였고, 왕융은 그의 아들 절도부사 왕소조(王昭祚) 및 대장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고, 20만 필의 문금(文錦)으로 군사를 위문하였다. 주전충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서 딸을 왕소조에게 시집보냈다. 성덕(成德) 판관 장택(張澤)이 왕융에게 말하기를 "하동(河東)은 강적입니다. 지금 비록 주씨(朱氏)의 원조가 있으나, 이는 마치 집에 불이 났는데 먼 물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저 유주, 창주, 역주, 정주는 여전히 하동에 의탁하고 있으니, 주공(朱公)에게 승세하여 함께 항복시키도록 권하여 하북(河北) 여러 진을 하나로 합친다면, 이로써 하동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융이 다시 주식을 보내 주전충을 설득하게 하였다. 주전충이 매우 기뻐하며 장존경을 보내 위박(魏博) 군사와 함께 유인공을 공격하게 하여, 갑인일, 영주(瀛州)를 함락시켰다. 겨울, 10월, 병진일, 경주(景州)를 함락시키고 자사 유인패(劉仁霸)를 사로잡았다. 신유일, 막주(莫州)를 함락시켰다.
정강절도사 유사정은 마은이 이미 영북을 완전히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부사 진가번을 보내 전의령에 주둔시키며 방비를 갖추었다. 마은이 사자를 보내 유사정에게 화친을 청했으나, 진가번이 이를 거절했다. 마은은 장수 진언휘, 이경 등에게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유사정을 공격하게 했다. 호남 군대가 전의에 도착하자, 유사정은 또 지휘사 왕건무를 보내 진성에 주둔시켰다. 진가번이 현민의 농우를 약탈하여 군사를 위로하자, 현민들은 그를 원망하며 호남 군대를 위해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하며 말했다. “이 서남쪽에 작은 길이 있는데, 진성에서 불과 50리 거리이며, 겨우 말 한 필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진언휘는 이경에게 기병 60명과 보병 300명을 이끌고 진성을 습격하게 했다. 한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가 왕건무를 사로잡고, 새벽이 되자 돌아와서 흰 비단으로 왕건무를 묶어 진가번의 영채 아래로 보내 보여주었으나, 진가번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이경이 왕건무의 목을 베어 영채 안으로 던져 넣자, 계주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 떨었다. 이경이 이에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진가번을 사로잡고, 그의 장수와 병사 2천 명을 항복시킨 뒤 모두 죽였다. 이경은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계주로 향하니, 진성 이남의 20여 개 영채가 모두 바람 앞에 나는 먼지처럼 무너져 흩어졌다. 마침내 계주를 포위했다. 며칠 후, 유사정이 성을 나와 항복하자, 계주, 의주, 암주, 유주, 상주 등 다섯 주가 모두 호남에 귀속되었다. 마은은 이경을 계주자사로 임명하고, 얼마 후 표문을 올려 정강절도사로 추천했다.
장존경이 유인공을 공격하여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와교에서 유주로 곧장 나아가려 했으나 길이 진흙탕이어서 나아갈 수 없자,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의주와 정주를 공격했다. 신사일에는 기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양약을 죽였다.
계미일에는 보의유후 주우겸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장존경이 정주를 공격하자, 의무절도사 왕고는 후원도지병마사 왕처직에게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막게 했다. 왕처직은 성벽에 의지하여 목책을 세우고 적이 지친 후에 출격하자고 청했다. 공목관 양문이 말했다. “옛날 유주와 진주의 군사 30만 명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당시 우리 군사는 5천 명도 안 되었으나 한 번 싸워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지금 장존경의 군사는 고작 3만 명에 불과하고, 우리 군사는 옛날보다 열 배나 많으니, 어찌하여 약한 모습을 보이며 성벽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려 합니까?” 왕고가 이에 왕처직을 시켜 사하에서 싸우게 했으나, 의주와 정주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고, 남은 무리들은 왕처직을 에워싸고 달아나 돌아왔다. 갑신일에는 왕고가 성을 버리고 진양으로 도망쳤고, 군중에서는 왕처직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았다. 장존경이 진군하여 정주를 포위했다. 병신일에는 주전충이 성 아래에 이르자, 왕처직이 성벽에 올라 외쳤다. “본도는 조정을 지극한 충성으로 섬겼고, 당신께는 일찍이 범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공격하십니까?” 주전충이 말했다. “어찌하여 하동에 의탁하였는가?” 왕처직이 대답했다. “저의 형님과 진왕이 동시에 공훈을 세워 봉지가 인접해 있고, 또한 혼인 관계가 있어 화친을 왕래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뜻을 바꾸겠습니다.” 주전충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왕처직은 죄를 양문에게 돌려 일족을 멸하고, 이로써 주전충에게 사죄하며, 비단 10만 필로 군사를 위로했다. 주전충이 이에 돌아가고, 왕처직을 대신하여 표문을 올려 절도사의 정절을 요청했다. 왕처직은 왕처존의 동복 동생이다. 유인공이 그의 아들 유수광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정주를 구원하게 하여, 역수 위에 주둔시켰다. 주전충이 장존경을 시켜 그를 기습 공격하게 하여 6만여 명을 죽였다. 이로부터 하북의 여러 진들은 모두 주전충에게 복종했다.
이보다 앞서, 왕고가 하동에 급히 알리자, 이극용이 이사소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태항산을 내려와 회주를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킨 뒤, 다시 하양을 공격했다. 하양유후 후언은 그가 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낭패하여 어쩔 줄 몰랐고, 이사소는 하양의 양마성을 파괴했다. 마침 우국군 장수 염보가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여, 성호 밖에서 힘껏 싸우자, 하동 군대가 비로소 물러갔다. 염보는 운주 사람이다.
당초 최윤은 황제와 비밀히 모의하여 환관들을 모두 주살하려 했다. 송도필과 경무수가 죽은 후, 환관들은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황제는 화주에서 돌아온 후로 울적하여 즐거워하지 않았고, 항상 술을 마음껏 마셨으며, 기쁘고 화남이 일정하지 않아 좌우의 시종들은 특히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로움을 느꼈다. 이에 좌군중위 유계술, 우궁중위 왕중선, 추밀사 왕언범, 설제아 등이 은밀히 함께 모의하여 말했다. “주상은 경박하고 변덕이 많아 섬기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남사만 믿고 쓰니, 우리 같은 자들은 결국 화를 입을 것입니다. 태자를 세워 주상은 태상황으로 모시고, 기주와 화주의 군대를 불러 도움으로 삼고, 각 번진을 제압하면, 누가 감히 우리를 해치겠습니까?”
11월, 황제가 원중에서 사냥을 하고 이에 잔치를 베풀었다. 밤이 되어 취해 궁으로 돌아와, 손수 여러 황문과 시녀 몇 명을 죽였다. 다음 날 아침, 때는 이미 진시와 사시가 되었는데도 궁문이 열리지 않았다. 유계술이 중서성에 가서 최윤에게 말했다. “궁중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내신이니 기회를 보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 살펴보기를 청합니다.” 이에 금병 천 명을 거느리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사정을 살펴보니,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나와서 최윤에게 말했다. “주상의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혼군을 폐하고 명군을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며, 이는 국가 대계를 위한 것이니 불순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최윤은 죽음이 두려워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경인일, 유계술이 백관을 소집하고 전정에 군대를 늘어세운 뒤, 최윤 등의 연명장을 써서 태자가 감국하기를 청하는 내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주며 서명하게 했다. 최윤과 백관들은 부득이 모두 서명했다. 황제가 걸교루에 있을 때, 유계술과 왕중선이 문 밖에 장사 천 명을 매복시키고 선무진주관 정암 등 10여 명과 함께 입궁하여 대면을 청했다. 유계술과 왕중선이 막 전각에 오르자, 장사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선화문으로 돌진하여 사정전 앞에 이르렀다. 궁인을 만나자 곧 죽였다. 황제는 군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 침상에서 떨어져 일어나 도망가려 하자, 유계술과 왕중선이 그를 부축하여 앉혔다. 궁인이 달려가 황후에게 알리자, 황후가 급히 달려와 절하며 청했다. “군용이시여, 택가(황제를 부르는 칭호)를 놀라게 하지 마소서. 일이 있으면 군용과 상의하실 수 있습니다.” 유계술 등이 이에 백관들의 장을 내어 황제에게 보고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위를 싫어하시어 조정 안팎의 여러 정이 모두 태자가 감국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폐하께서는 동궁으로 가서 몸을 편히 하소서.” 황제가 말했다. “어젯밤 너희들과 술을 마시며 즐기느라 부지중에 지나쳤을 뿐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이는 신들의 소행이 아니라 모두 남사의 여러 뜻이라 막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우선 동궁에 머무르시고, 일이 조금 안정된 후에 다시 대내로 맞이하겠습니다.” 황후가 말했다. “택가께서는 속히 군용의 말을 따르소서!” 이에 전국보인을 꺼내 유계술에게 주고, 환관들은 황제와 황후를 부축하여 같은 수레에 태우고, 빈비와 시종은 겨우 10여 명만이 소양원으로 갔다. 유계술은 은장도로 땅에 그으며 황제의 잘못을 헤아려 말했다. “모 때 모 일에,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다.” 이와 같이 수십 조목에 이르렀다. 마침내 손수 원문을 잠그고, 쇳물을 녹여 부어 굳게 한 뒤, 좌군부사 이사건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포위하게 하여, 황제의 한 번 움직임마다 모두 유계술에게 보고하게 했다. 담에 구멍을 뚫어 음식을 들여보냈고, 무기나 바늘, 칼은 일체 들여보낼 수 없게 했다. 황제가 돈이나 비단을 요구해도 얻지 못했고, 종이와 붓을 청해도 주지 않았다. 당시 날씨가 심히 추웠는데, 빈비와 공주들에게는 옷과 이불이 없어 울부짖는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유계술 등은 가짜 조서를 꾸며 태자로 하여금 감국하게 하고, 태자를 맞이하여 궁중으로 들였다. 신묘일에는 가짜 조서를 꾸며 태자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고, 이름을 이진으로 고쳤다. 황제를 태상황으로, 황후를 태상황후로 존칭했다. 갑오일에는 태자가 즉위하고, 소양원을 개칭하여 문안궁으로 삼았다. 유계술은 백관들에게 작위와 품계를 더해주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두터운 상을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목왕 이의를 죽이고, 궁인, 좌우 시종, 방사, 승려, 도사로서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자들은 모두 곤장을 쳐서 죽였다. 매일 밤 사람을 죽이고, 낮에는 수레 열 대에 시체를 실어 내보냈는데, 한 수레에 가끔 한두 구의 시체만 실린 경우도 있었으며, 이로써 위세를 세우려 했다. 사천감 호수림을 죽이려 하자, 호수림이 말했다. “군용이 군부를 감금하고 갇혔으면서, 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려 합니까!” 유계술이 그의 정직한 말에 위협을 느껴 그만두었다. 유계술 등은 최윤을 죽이려 했으나, 주전충을 두려워하여 다만 그의 도지감철전운사 직무만 해임시켰다. 최윤은 은밀히 주전충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일으켜 왕위 회복을 도모하게 했다.
左僕射로 퇴직한 장준은 장수에 살면서 낙양으로 가서 장전의를 만나 왕실을 회복할 것을 권하고, 다시 각 번진에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진사 무체 사람 이우가 화주에 객居하며 한건에게 글을 올려 대략 말하기를, “제가 책을 읽을 때마다 군신 부자 사이에 풍속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그들을 저잣거리에서 죽이고 싶어 참지 못하겠습니다. 명공께서는 근관의 중진에 처하시고, 군부가 유폐되고 모욕을 당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악역을 앉아서 보면서도 왕을 위하는 일을 잊으시니, 이것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제가 은밀히 헤아려 보건대, 중앙의 보정 대신들은 뜻은 있으나 권력이 없고, 외진의 제후들은 권력은 있으나 뜻이 없습니다. 오직 명공만이 충의로 나라의 의지가 되십니다. 지난해에 폐하께서 유리 천행하실 때, 곡읍하며 맞이하시고 여러 해 동안 양식을 공급하시며 두 번이나 종묘와 조정을 회복하시니, 의기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지금까지 칭송됩니다. 지금의 형세는 더욱이 지난날과 다릅니다. 명공께서는 요충지에 처하시고 장상의 지위를 겸하셨습니다. 궁중의 변고가 일어난 지 이미 열흘이 지났는데, 만약 호령을 내려 앞장서서 도모하지 않고 망설이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산동의 제후들이 의를 내세워 연합하여 대거 서쪽으로 진격할 때, 명공께서 몸의 평안을 구하려 한들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추세입니다. 차라리 사방으로 격문을 급히 전하여 순역의 이치를 밝히고, 군위를 한 번 떨치면 원흉이 간담이 서늘해져서, 열흘 안에 두 간적의 머리가 천하에 돌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건이 비록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후하게 대우했으나, 이우는 굳이 사절하고 떠났다.
주전충이 정주 행영에 있다가 경성의 변란을 듣고, 정미일에 남쪽으로 돌아갔다. 12월, 무진일에 대량에 도착했다. 유계술이 양자 유희도를 주전충에게 보내어 당실의 사직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또 봉사관 이봉본을 보내어 태상황의 고명을 주전충에게 보여주었다. 주전충이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막료들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는 번진이 마땅히 미리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오직 천평절도부사 이진이 말하기를, “왕실에 어려움이 있으면, 이것이 패업을 이룰 자본입니다. 지금 공은 당나라의 제환공, 진문공이시오, 안위가 걸려 있습니다. 유계술은 한낱 환관에 불과한데, 감히 천자를 감금하고 폐출시켰으니, 공이 토벌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다시 제후들에게 호령하겠습니까! 게다가 유주가 즉위하면 천하의 대권이 모두 환관에게 돌아가니, 이는 태아보검의 자루를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전충이 크게 깨달아 즉시 유희도, 이봉본을 가두고, 이진을 경성에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했다. 이진이 돌아오자, 주전충이 또 친한 관리 장현휘를 경성에 보내어 최윤과 모의하게 하고, 또 정암을 대량으로 불렀다.
청해절도사 설왕 이지유가 죽었다.
이 해에 양행밀에게 겸시중을 더했다.
목주자사 진성이 죽자, 그의 아우 진순이 자칭 자사가 되었다.
태자가 즉위한 지 수십 일, 번진의 주표가 대부분 도착하지 않았다. 왕중선의 성품이 각박하고 밝아, 평소 좌우군에 많은 폐단이 있음을 알고, 중위가 된 후 군중의 전곡을 조사하여 숨기고 횡령하며 간사한 자를 적발해내어 혹독하게 고문하고, 급히 빚을 추징하니 장사들이 매우 불안해했다. 염주웅의군사 손덕소가 좌신책지휘사로 있었는데, 유계술 등이 황제를 폐립한 이후로 항상 분개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윤이 이 소문을 듣고 판관 석척을 보내어 그와 사귀게 했다. 손덕소가 술에 취할 때마다 반드시 울었고, 석척이 그의 성심을 알고는 은밀히 최윤의 뜻을 알리며 말하기를, “상황이 유폐된 이후 조정 내외의 대신들로부터 행오의 졸병들에 이르기까지 누가 이를 갈지 않겠습니까! 지금 반역한 자는 유계술과 왕중선 두 사람뿐이니, 공이 진실로 이 두 사람을 죽여 상황을 맞이하여 복위시키면, 부귀는 한 시대에 으뜸이 되고 충의는 천고에 전해질 것입니다. 만약 망설이면 공이 남의 손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손덕소가 사례하며 말하기를, “덕소는 다만 작은 교장일 뿐, 국가 대사를 어찌 감히 제멋대로 하겠습니까! 만약 재상의 명령이 계시다면,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석척이 이 상황을 최윤에게 알렸다. 최윤이 옷깃을 베어 손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손덕소가 또 우군청원도장 동언필, 주승회와 사귀어, 섣달 그믐날 밤에 안복문 밖에 군사를 매복시키기로 모의하고 기다렸다.
봄 정월, 을유일 첫날, 왕중선이 입조하다가 안복문에 이르렀을 때, 손덕소가 그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곧바로 말을 달려 소양원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역적은 이미 주살되었으니, 폐하께서 나오셔서 장사들을 위로하소서.”라고 하였다. 하황후가 믿지 않고 말하기를, “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그 목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손덕소가 왕중선의 목을 바치자, 당소종이 이에 황후와 함께 문을 부수고 나왔다. 최윤이 당소종을 맞이하여 장락문루에 오르게 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했다. 주승회가 유계술, 왕언범을 사로잡아 뒤이어 도착하자, 곧바로 신문하려 할 때, 두 사람은 이미 곤장에 맞아 죽었다. 설제괴는 우물에 투신자살했으나 건져내어 목을 베었다. 네 사람의 가문을 멸하고, 그 당여 20여 명을 주살했다. 환관들이 태자를 좌군에 숨기고 전국옥새를 바쳤다. 당소종이 말하기를, “이유는 나이가 어리고 약하며, 흉악한 소인에게 옹립된 것이니, 그의 죄가 아니다.”라고 하고, 명하여 동궁으로 돌려보내 덕왕으로 강등시키고, 본명 이유로 복구시켰다. 병술일에 손덕소를 동평장사로 임명하고, 정해절도사로 충원하며, 성과 이름을 하사하여 이계소라 하였다.
정해일에 최윤이 사도로 관직이 올랐으나, 최윤이 굳이 사양했다. 당소종이 최윤을 더욱 총애하고 우대했다.
기축일에 주전충이 유계술 등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암의 발을 부러뜨리고 칼을 씌워 경성으로 압송하여, 유희도, 이봉본 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모두 목을 베었으며, 이로부터 이진을 더욱 중히 여겼다.
경인일에 주승회를 영남서도절도사로 임명하고, 성과 이름을 하사하여 이계회라 하였으며, 동언필을 영원절도사로 임명하고, 성을 이씨라 하사하였으며, 두 사람 모두 동평장사를 겸하게 했다. 이계소와 함께 궁중에 머물며 숙위를 맡았고, 열흘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상으로 내린 재물이 거의 국고를 비울 정도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삼사상’이라 불렀다.
계사일에 주전충의 작위를 동평왕으로 올렸다.
병오일에 칙령을 내리기를, “근년에 재상이 연영전에서 일을 아뢸 때, 추밀사가 곁에서 모시며 다투어 그만두지 않았다. 물러난 후에는 또 황상의 뜻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칭하며 다시 고쳐, 권력을 어지럽히고 정사를 패망시켰다. 지금부터는 모두 대중년간의 구제에 따라, 재상이 일을 아뢰기를 마친 후에야 추밀사가 전하여 공무를 접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양군부사 이사건, 서언손에게 자진을 명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유계술의 당여였다.
봉상, 창의절도사 이무정이 조현했다. 이무정에게 수상서령을 더하고 시중을 겸하게 하며, 작위를 기왕으로 올렸다.
유계술, 왕중선이 죽은 후, 최윤과 육예가 상주하여 말하기를, “화란의 일어남은 모두 환관이 군대를 장악한 데에 있습니다. 청컨대 최윤으로 좌군을 관장하게 하고, 육예로 우군을 관장하게 하면, 제후들이 감히 침범 능욕하지 못하고 왕실이 존귀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소종이 이틀 동안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했다. 이무정이 듣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최윤이 아직 군권을 빼앗지 못했는데, 벌써 제후들을 멸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당소종이 이계소, 이계회, 이언필을 불러 의논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저희는 여러 대를 군중에서 지내왔는데, 서생이 군대의 주수가 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남아에 소속되면 반드시 많은 변동이 있을 것이니, 북사에 소속되는 것이 편리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소종이 이에 최윤과 육예에게 말하기를, “장사들의 뜻이 문신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니, 그대들은 고집하지 말라.”고 하고, 이에 추밀사 한전회, 봉상감군사 장언홍을 좌우군중위로 삼았다. 한전회는 또한 이전 봉상의 감군이었다. 또 퇴직한 전임 추밀사 엄준미를 불러 양군중위, 관군용처치사로 삼으려 하였다. 엄준미가 말하기를, “한 군도 감당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두 군이겠습니까!”라고 하고,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원이간, 주경용을 추밀사로 임명했다.
이무정이 작별 인사를 하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최윤은 환관들이 군대를 장악한 것이 결국 곁에 있는 화근이라고 생각하여, 외지의 병력으로 그들을 견제하려고 이무정에게 3천 명의 군사를 서울에 남겨 궁중 경비를 맡기도록 암시했고, 이무정의 양자 이계균이 이를 지휘하게 했다. 좌간의대부 만년 사람 한악이 옳지 않다고 여기자, 최윤이 말했다: "병사들이 스스로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지, 내가 억지로 머물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한악이 말했다: "애초에 왜 그들을 불러들였습니까?" 최윤이 대답하지 못했다. 한악이 말했다: "이 병사들을 남겨두면 집안과 나라가 모두 위태롭고, 남기지 않으면 집안과 나라가 모두 평안할 것입니다." 최윤이 따르지 않았다.
주전충이 이미 하북을 항복시키고, 먼저 하중을 취하여 하동을 견제하려 했다. 기해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왕가는 평범한 재주로, 태원(이극용)의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합니다. 내가 지금 장사의 허리를 자를 터이니, 여러분은 나를 위해 한 줄의 밧줄로 그를 묶어 오십시오." 경자일, 장존경을 보내 3만 병사를 이끌고 사수에서 황하를 건너 사산 길로 나아가 하중을 기습하게 하고, 주전충이 중군을 이끌며 뒤를 따랐다. 무신일, 장존경이 강주에 도착했다. 진주와 강주는 그들이 올 줄 예상하지 못해 모두 방비가 없었고, 경술일, 강주자사 도건조가 항복했다. 임자일, 진주자사 장한우가 항복했다. 주전충은 그의 장수 후언을 진주에, 하경을 강주에 지키게 하고 2만 병사를 주둔시켜 하동의 구원병 길을 막았다. 조정은 주전충이 서쪽으로 동관에 들어갈까 걱정하여 급히 조서를 내려 그들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주전충이 따르지 않았다. 왕가는 밀사를 보내 이극용에게 급보를 알렸고, 사자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나, 이극용은 변주 군대가 이미 진주와 강주를 점령하여 군대가 나아갈 수 없었다. 왕가의 아내가 이극용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딸이 조석으로 포로가 될 지경인데, 어른께서 어찌 차마 구하지 않으십니까!" 이극용이 답장하여 말했다: "지금 적병이 진주와 강주를 막고 있어, 우리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나아가면 그대와 함께 망할 것이니, 차라리 왕랑(왕가)과 함께 온 가족을 이끌고 조정에 귀순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왕가가 또 이무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천자가 갓 황위를 회복하여, 번진들이 서로 공격하지 말고 함께 왕실을 보좌하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지금 주공이 조서를 무시하고 먼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중이 망하면 동화, 빈, 기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자의 강산을 손바닥 위에 넘겨주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입니다. 공께서는 속히 관중의 여러 진의 군대를 이끌고 동관을 굳게 지켜, 하중을 구원하러 오십시오. 저는 스스로 용맹하지 않음을 알기에, 공의 서쪽 변경에서 작은 고을 하나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니, 이 땅은 공께서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관중의 안위와 국운의 장단은 공의 이번 움직임에 달려 있으니,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무정은 본래 원대한 계획이 없어, 답하지 않았다.
2월, 갑인 초하루, 하동 장수 이사소가 택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을묘일, 장존경이 군대를 이끌고 진주에서 출발했다. 기미일, 하중에 도착하여 드디어 하중성을 포위했다. 왕가는 세력이 다하고 궁지에 몰려 서울로 도망치려 했으나, 인심이 흩어졌고, 마침 부교가 파손되고 얼음 덩어리가 황하를 막아 배를 띄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왕가는 그의 가족 수백 명과 함께 밤에 배를 타려 했고, 몸소 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설득했으나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장 유훈이 말했다: "지금 인심이 떠들썩한데, 만약 밤에 성을 나가 강을 건너려 하면 반드시 배를 다투어 혼란에 빠질 것이고, 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차라리 잠시 장존경에게 성의를 보이고, 천천히 갈 곳을 생각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왕가가 그를 따랐다. 임술일, 왕가가 성 모퉁이에 백기를 세우고 사자를 보내 패인을 가지고 장존경에게 항복을 청했다. 장존경이 성문을 열 것을 요구하자, 왕가가 말했다: "나는 주공과 대대로 교분과 정이 있으니, 청컨대 잠시 군사를 물려 기다려 주십시오. 주공이 오면, 내가 자연히 성을 그에게 넘기겠습니다." 장존경이 따르고, 사람을 보내 주전충에게 급히 알렸다. 을축일, 주전충이 낙양에 도착하여 듣고 매우 기뻐하며 말을 달려 그곳으로 갔다. 무진일, 우향에 도착하여 먼저 왕중영의 묘 앞에서 통곡하며 극진히 슬퍼하니, 하중의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왕가가 스스로 손을 묶고 양을 끌고 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려 하자, 주전충이 급히 사람을 보내 말리며 말했다: "태사 구부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낭군이 이렇게 하면, 내가 훗날 어떤 낯으로 구천 아래서 구부를 뵙겠습니까!" 이에 평소의 예절로 성 밖에 나와 맞이하고, 손을 잡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다. 주전충이 표를 올려 장존경을 호국군 유후로 천거하고, 왕가의 온 가족은 대량으로 옮겼다. 후에 주전충이 왕가를 입조하게 하고, 또 사람을 시켜 화주에서 그를 죽였다. 주전충이 장 부인이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하중에서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극용이 사자를 보내 후한 예물을 가지고 주전충과 화친을 청했다. 주전충이 비록 사자를 보내 답했으나, 이극용의 편지 말투가 오만함에 분노하여 결국 그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림학사 호부시랑 왕보를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이부시랑 배추를 호부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왕보는 왕정아의 종손으로, 일찍이 최윤의 막부에 있었기에, 최윤이 그를 천거했다.
고인이 된 목왕 이수를 추증하여 공태태자 시호를 내렸다.
유주절도사 유인공과 위박절도사 나소위에게 동시에 시중을 겸하게 했다.
3월, 계미 초하루, 주전충이 대량에 도착했다. 계묘일, 씨숙경 등을 보내 5만 군사를 이끌고 이극용을 치게 하니, 태항산으로 들어갔다. 위박도장 장문공이 자주 신구로 들어갔다. 갈종주가 연주와 운주의 군대를 이끌고 성덕 군대와 합세하여 토문으로 들어갔다. 명주자사 장귀후가 마령으로 들어갔다. 의무절도사 왕처직이 비호로 들어갔다. 대리 진주자사 후언이 자주, 습주, 진주, 강주의 군대를 이끌고 음지관으로 들어갔다. 씨숙경이 천정관으로 들어가 앙차까지 진군했다. 신해일, 심주자사 채훈이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하동도장 개장이 후언에게 항복하자, 후언이 즉시 그를 대리 심주자사로 임명했다. 임자일, 씨숙경이 택주를 함락시키고, 택주자사 이존장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씨숙경이 노주를 공격하자, 소의절도사 맹천이 항복했다. 하동 주둔 장수 이신건과 왕주가 1만 보병과 2천 기병을 이끌고 씨숙경에게 항복했다. 씨숙경이 진군하여 진양에 육박했다. 여름, 4월, 을묘일, 씨숙경이 석회관에서 출발하여 동와역에 진을 쳤다. 장귀후가 군대를 이끌고 요주에 도착하자, 정사일, 요주자사 장악이 항복했다. 별장 백봉회가 성덕 군대와 합세하여 정형으로 들어가, 기미일, 승천군을 함락시키고 씨숙경의 봉화와 서로 응했다.
갑술일, 당 소종이 태묘에 배알했다. 정축일,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었다. 왕애 등 17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처음에 양복공이 중위가 되어 탁도지에게 술곡 한 해의 이익을 빌려 양군을 공급하게 했고, 이후로 돌려주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최윤이 사면 문서를 초안하면서 환관을 억누르려 하여, 술 파는 사람이 스스로 술곡을 만들도록 허락하고, 다만 매달 전매 세금을 바치게 했다. 양군이 이전에 만든 술곡은 값을 낮추어 팔도록 재촉하고, 7월이 지나면 다시 팔지 못하게 했다.
동천절도사 왕종적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대신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왕건이 표를 올려 마보사 왕종유를 유후로 천거했다.
씨숙경 등이 군대를 이끌고 진양성 아래에 도착하여 여러 번 도전했으나, 성 안은 매우 두려워했다. 이극용이 성에 올라 방어하며 먹고 마시는 것도 잊었다. 당시 열흘 이상 큰비가 계속 내려 성벽이 여러 곳 무너져 훼손되어, 수시로 보수했다. 하동 장수 이사소와 이사원이 암문을 뚫고 밤에 성을 나가 변주 군영을 기습하여 여러 번 죽이고 포로를 얻었다. 이존진이 동와에서 변주 군대를 격파했다. 당시 변주 군대는 수가 많았으나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또 며칠 동안 비가 내려 병사들이 학질과 이질에 걸리자, 주전충이 마침내 군대를 소환했다. 5월, 씨숙경 등이 석회관에서 철수하고, 각 군대도 물러났다. 하동 장수 주덕위와 이사원이 5천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보다 앞서, 분주자사 이당이 온 주를 이끌고 변주 군대에 의탁하자, 이극용이 그의 장수 이존심을 보내 그를 공격하게 하여 사흘 만에 함락시키고, 이당을 잡아 목을 베었다. 씨숙경이 상당을 지날 때, 맹천이 가족을 이끌고 그를 따라 남쪽으로 옮겼다. 주전충이 정회를 보내 그를 대신하여 노주를 진수하게 했다.
주전충이 주중절도사 임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해당 지역의 관리와 백성들이 자신을 주장(主將)으로 삼기를 청한다는 뜻을 넌지시 비쳤다. 계묘일, 주전충을 선무(宣武), 선의(宣義), 천평(天平), 호국(護國) 네 진(鎭)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기유일, 진해(鎭海), 진동(鎭東) 절도사 전류(錢鏐)를 수시중(守侍中)으로 가수(加授)했다.
최윤(崔胤)이 양군(兩軍)의 술[麴] 판매를 금지시키면서, 인근 번진(藩鎭)까지도 함께 금지시켰다. 이무정(李茂貞)이 이 이익을 탐내어, 입조하여 논주(論奏)하기를 청하는 표문을 올렸고, 한전회(韓全誨)가 그가 오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이무정이 경성(京城)에 도착하자, 한전회가 그와 깊이 결탁했다. 최윤은 이에 비로소 두려워져서, 은밀히 더욱 후하게 주전충을 대우하며, 이무정과 원수가 되었다.
우국(佑國) 절도사 장전의(張全義)를 겸중서령(兼中書令)으로 임명했다.
6월, 계해일, 주전충이 하중(河中)으로 갔다.
당 소종(唐昭宗)이 황위를 회복했을 때, 중서사인(中書舍人) 영호환(令狐渙)과 급사중(給事中) 한악(韓偓)이 모두 모의에 참여했으므로, 발탁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고, 여러 차례 불러 대답하게 하며 기밀 사무를 자문했다. 영호환은 영호도(令狐綯)의 아들이다. 당시 당 소종은 군국 대사를 모두 최윤에게 위임하고, 최윤이 일을 아뢸 때마다 소종은 조용히 그와 의논했으며, 때로는 촛불을 켤 때까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환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고,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최윤에게 묻고 나서야 시행했다. 최윤의 뜻은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것이었는데, 한악이 여러 차례 간언하며 말했다. "일은 지나침을 금하기 마련입니다. 이들도 전혀 없을 수는 없으며,恐其黨이 급박해지면 다른 변고를 낼까 염려됩니다." 최윤이 듣지 않았다. 정묘일, 당 소종이 한악을 단독으로 불러 묻기를, "환관 중에 악한 자가 숲처럼 많은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동궁(東宮, 응당 동내(東內) 즉 궁정을 가리킴)의 난 때에, 환관 중에 누가 함께 악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처리는 정월 초하루(황제가 막 복위했을 때를 가리킴)에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시기를 놓쳤습니다." 소종이 말했다. "그때, 그대는 어찌하여 최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신이 폐하의 조서를 보았사온데, '유계술(劉季述) 등 네 집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일체 묻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인군(人君)에게 있어 신의보다 중요한 것은 없사오니, 이미 이 조서를 내리셨다면 마땅히 지키셔야 합니다. 만약 다시 한 사람을 죽인다면, 사람마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제거된 자가 이미 적지 않으니, 이것이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까닭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양심이 없는 자 몇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의 죄를 명백히 공표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신 후, 나머지 사람들을 위로하며 타일러 말씀하시기를, '짐이 너희들에게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이제부터는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충실하고 성실한 자를 선택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으소서. 그 무리 중에 선행이 있으면 상을 주고, 죄과가 있으면 벌을 주면, 이와 같이 하면 모두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궁중과 궁 밖에 그 수가 만으로 헤아려지는데, 어찌 모두 주살할 수 있겠습니까! 제왕의 통치之道는 마땅히 중후함으로 안정시키고, 공평함으로 통제해야 하며, 지엽적이고 교묘한 일에 있어서는 이쪽에서 기심(機心)이 일어나면 저쪽에서도 기심이 응할 것이니, 결국 큰 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실타래를 다스리려다 오히려 그것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조정의 권력은 여러 번진(藩鎭)에 흩어져 있습니다. 만약 먼저 이 권력을 거둘 수 있다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소종이 그의 말이 매우 옳다고 여기며 말했다. "이 일은 마침내 그대에게 맡기겠다."
이극용(李克用)이 그의 장수 이사소(李嗣昭), 주덕위(周德威)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음지관(陰地關)에서 출발하여 습주(隰州)를 공격하니, 습주자사 당례(唐禮)가 항복했다. 이어 자주(慈州)를 공격하니, 자주자사 장괴(張瑰)가 항복했다.
윤월(閏月), 하양(河陽) 절도사 정회(丁會)를 소의(昭義) 절도사로, 맹천(孟遷)을 하양 절도사로 임명했으니, 이는 주전충의 청을 따른 것이다.
도사(道士) 두종법(杜從法)이 요술로 창주(昌州), 보주(普州), 합주(合州) 세 주의 백성을 미혹하여 난을 일으키자, 왕건(王建)이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왕종감(王宗黯)을 보내 3만 군사를 이끌고 동천(東川), 무신(武信)의 군대를 합세하여 토벌하게 했다. 왕종감은 곧 왕길간(王吉諫)이다.
최윤이 당 소종에게 청하여 환관을 모두 주살하고, 오직 궁녀만으로 궁중 각 기관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려 했다. 환관들이 이 소문을 듣고, 한전회 등이 눈물을 흘리며 소종에게 애걸하니, 소종이 이에 최윤에게 명령했다. "일이 있거든 밀봉하여 상주(上奏)하고, 구두로 아뢰지 말라." 환관들이 글자를 아는 미녀 몇 명을 구하여 궁중에 들여보내고, 은밀히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정탐하게 하여, 최윤의 밀모(密謀)를 완전히 알아냈으나, 소종은 깨닫지 못했다. 한전회 등이 매우 두려워하여, 연회나 모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이별을 고하고, 밤낮으로 최윤을 제거할 방법을 꾀했다. 최윤이 당시 삼사사(三司使)를 겸하고 있었는데, 한전회 등이 금군(禁軍)을 교사하여 소종에게 대고 시끄럽게 떠들며 최윤이 동복(冬服)을 깎아 먹었다고 고발하게 했다. 소종이 어쩔 수 없이 최윤의 염철사(鹽鐵使) 직임을 해임했다. 당시 주전충과 이무정이 각각 천자를 협박하여 제후에게 명령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주전충은 소종이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가기를 원했고, 이무정은 소종이 봉상(鳳翔)으로 가기를 원했다. 최윤은 음모가 누설되어 일이 급박해짐을 알고, 주전충에게 편지를 써서, 밀조(密詔)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주전충에게 군사를 이끌고 천자의 거가(車駕)를 맞이하라고 명령하고, 또 말했다. "지난번 황제께서 복위하신 것은 모두 당신의 좋은 계책이었으나, 봉상(이무정)이 먼저 입조하여 공을 가로챘습니다. 지금 만약 속히 오지 않으시면 반드시 죄인이 될 것이니, 어찌 공만 빼앗기고 또한 토벌을 당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주전충이 편지를 얻고, 가을 7월 갑인일, 급히 대량(大梁)으로 돌아가 군사를 동원했다.
서천(西川) 용대진(龍台鎭) 사자(使子) 왕종간(王宗侃) 등이 두종법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8월 갑신일, 당 소종이 한악에게 물었다. "육예(陸扆)가 짐의 황위 회복을 기뻐하지 않고, 정월 초하루에 옷을 갈아입고 조그만 말을 타고 계하문(啓夏門) 밖으로 나갔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황위 회복의 계책은 오직 신과 최윤 등 몇 사람만이 알았을 뿐, 육예는 알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궁중에 변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인정이 어찌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옷을 갈아입고 피한 것이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그가 재상으로서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없음을 꾸짖으시는 것은 가하오나, 그가 황제의 복위를 기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참언(讒言)에서 나온 것이니, 폐하께서 밝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소종이 이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한전회 등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무력으로 소종을 협박하려 획책하고, 이에 이계소(李繼昭), 이계회(李繼誨), 이언필(李彦弼), 이계균(李繼筠)과 깊이 결탁했으나, 오직 이계소만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하루는 소종이 한악에게 물었다. "밖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다만 환관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공신(功臣)들과 이계균 등과 결탁하여 장차 불안을 초래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 사실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소종이 말했다. "이는 거짓이 아니다. 요즘 이계회, 이언필 등이 하는 말이 점점 강퍅해져서 참기 어렵다. 영호환이 짐으로 하여금 최윤과 한전회 등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면, 그들은 더욱 흉악하고 패역해질 것입니다." 소종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악이 대답했다. "오직 몇 사람의 죄를 공개하고, 속히 그들을 귀양 보내거나 쫓아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락하시면, 아마도 평온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체 묻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폐하의 마음속에 여전히 무슨 생각이 있음을 알게 되어 더욱 불안해져서, 일이 끝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소종이 말했다. "좋다!" 얼마 후, 환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당여(黨與)와 원조(援助)가 이미 형성되었다고 여겨, 점차 칙령과 지시를 준수하지 않았다; 소종이 때로 그들을 감군(監軍)으로 보내거나, 어떤 때는 능(陵)을 지키는 일로 폄적(貶謫)시켰으나, 그들은 모두 실행하려 하지 않았고, 소종도 그들을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양행밀(楊行密)에게, 전류가 도적에게 살해되었다고 보고했다. 양행밀이 보군도지휘사(步軍都指揮使) 이신복(李神福)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항주(杭州)를 취하게 하니, 양절(兩浙)의 장수 고전무(顧全武) 등이 여덟 개의 영채(營寨)를 베풀어 저항했다.
9월 계축일, 당 소종은 급히 한악을 불러 말했다. "듣자니 주전충이 와서 군주 곁의 간신들을 제거하려 한다 하니, 이는 지극한 충성의 표현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로 하여금 이무정과 공을 나누게 해야 한다. 만약 두 주사(主帅)가 서로 다투게 되면 일이 위태로워진다.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최윤에게 전하여, 급히 말을 달려 두 진(镇)에 서신을 보내 서로 연합하여 도모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좋겠다."
무신일, 당 소종이 다시 한악에게 말했다. "이계회, 이언필 등의 무리가 더욱 교만하고 횡포해졌다. 며칠 전 이계균과 함께 입궁하여, 전 동쪽에서 아이들을 시켜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한악이 대답했다. "신은 반드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이 일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당초 그들이 정월 초하루에 공을 세웠을 때, 마땅히 관작과 전택, 금은 포백으로 사례해야 했지, 그들이 마음대로 궁궐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는 것이 없어, 여러 차례 입궁하여 대주(对奏)를 청하고, 혹은 조정 일을 함부로 논하며, 혹은 월권하여 사람을 천거하기도 하여,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한을 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오직 이익만을 알 뿐, 환관들에게 후한 이익으로 고용되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윤이 본래 위병(卫兵)을 남겨둔 것은 환관을 제어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환관과 위병이 한패가 되었으니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변경(汴州)의 군대가 만약 도착하면, 반드시 기주(岐州)의 군대와 궁문 앞에서 싸우게 될 것이니, 신은 은밀히 두렵고 서늘함을 느낍니다." 당 소종은 그저 근심하고 낙담할 뿐이었다.
겨울 10월 무술일, 주전충이 대거 병력을 발동하여 대량(大梁)에서 출발했다.
이신복과 고전무가 오래도록 대치하였다. 이신복은 항주(杭州)의 포로를 잡아, 그가 자기 침실을 드나들게 하였다. 이신복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항주 군대는 아직 강성하니, 우리 군은 잠시 밤에 철수해야 하겠다." 항주 포로가 도망쳐 돌아가 고전무에게 알렸다. 이신복은 추격하지 말라 명하고, 저물녘에 약한 병사들을 먼저 보내고, 이신복이 직접 후미를 막으며, 행영도위 여사조를 청산(青山) 아래에 매복시켰다. 고전무는 평소 이신복을 얕보고 있었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추격했다. 이신복과 여사조가 전후에서 협공하여 고전무를 크게 격파하고, 오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고전무를 생포했다. 전류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울며 말했다. "나의 좋은 장수를 잃었구나!" 이신복이 임안(临安)을 공격하자, 양절(两浙)의 장수 진앙이 삼천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한전회가 주전충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정유일, 이계회, 이언필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당 소종을 협박하여 봉상(凤翔)으로 가자고 청하게 하였다. 궁궐의 모든 문은 병력을 증원하여 지키고, 사람과 문서의 출입은 수색과 심문이 매우 엄격했다. 당 소종은 사람을 보내 비밀리에 최윤에게 어찰(御札)을 내렸는데, 말이 모두 매우 슬펐으며,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짐은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 형세상 반드시 서쪽으로 가야 하니, 그대들은 다만 동쪽으로 가거라. 서글프고 서글프도다!" 무술일, 당 소종은 조국부인을 보내 나와서 한악에게 말하게 했다. "아침부터 이언필 등이 무례하기가 지극하여, 그대를 불러 대답하려 하였으나 형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황상과 황후는 다만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실 뿐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한림학사는 다시는 입궁하여 대주할 수 없게 되었다. 계묘일, 한전회 등이 당 소종으로 하여금 전(殿)에 올라 백관을 소집하게 하고, 그를 협박하여 정월 병오일에 반포한 칙서를 폐기하고, 함통(咸通) 이래의 근례(近例)를 모두 회복하게 하였다. 이날, 연영전(延英殿)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한전회 등이 바로 곁에서 배석하며 함께 조정 일을 논의하였다. 정미일, 신책도지휘사 이계균이 부하 병사를 보내 내고(内库)의 진귀한 보물과 화물, 장막, 의장 기물을 약탈하게 하였고, 한전회는 사람을 보내 비밀리에 여러 왕과 궁녀들을 먼저 봉상으로 호송하였다. 무신일, 주전충이 하중(河中)에 도착하여, 표문을 올려 황제의 수레가 동도 낙양으로 가기를 청하니, 경성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선비와 백성들은 도망쳐 산골짜기로 숨었다. 이날, 백관들은 모두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고, 궁문 앞은 고요하여 사람이 없었다.
11월 기유 삭일, 이계균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문 앞에서 계엄하여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각 군이 크게 약탈을 자행하였다. 선비와 백성들이 종이나 베로 만든 짧은 옷을 입은 자들이 거리에 가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건(韩建)은 막료 사마섭(司马邺)을 시켜 광국(匡国) 유후(留后)를 대행하게 하였다. 주전충이 사진(四镇)의 군사 7만 명을 이끌고 동주(同州)로 직행하자, 사마섭이 맞이하여 항복했다.
한전회 등은 이계소(李继昭)가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자, 그와의 연락을 끊고 그가 당 소종을 뵙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최윤의 집은 개화방(开化坊)에 있었는데, 이계소가 그의 부하 60여 명과 관동(关东) 각 도(道)의 경성 주둔 군사를 함께 거느려 최윤을 지켰다. 난을 피하려는 백관과 선비,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로 나아가 의탁하였다. 경술일, 당 소종이 봉공관 장손소(张绍孙)를 보내 백관을 소집하였으나, 최윤 등은 모두 표문을 올려 사양하며 오지 않았다. 임자일, 한전회 등이 전 앞에 군대를 배치하고 당 소종에게 말했다. "주전충이 대군을 이끌고 경사에 육박하여, 천자를 낙양으로 협박해 가서 선양(禅让)을 도모하려 합니다. 신 등은 폐하를 모시고 봉상으로 가서 군대를 모아 그를 막기를 청합니다." 당 소종이 허락하지 않고, 보검을 손에 쥐고 걸기루(乞巧楼)에 올랐다. 한전회 등이 당 소종을 협박하여 누각에서 내려오게 하자, 당 소종이 비로소 수춘전(寿春殿)으로 갔는데, 이언필이 이미 어원(御院)에 불을 질렀다. 이날은 동지(冬至)였는데, 당 소종이 홀로 사정전(思政殿)에 앉아, 한쪽 다리를 들고 다른 한쪽 발은 난간에 딛고 있었으며, 뜰에는 신하가 없고 곁에는 시종도 없었다. 잠시 후, 부득이 황후, 비빈, 여러 왕 등 100여 명과 함께 말에 올랐는데,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궁문을 나와 궁중을 돌아보니 불길이 이미 매우 성했다. 그날 밤, 호현(鄠县)에서 숙박했다.
주전충이 사마섭을 보내 화주(华州)로 들어가 한건에게 말했다. "그대가 일찍이 잘못을 알고 스스로 귀순하지 않아, 또 우리 군대를 성 아래에서 잠시 머물게 하였구나." 이날, 주전충이 고시(故市)에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위수(渭水)를 건너자, 한건이 절도부사 이거천(李巨川)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은 3만 냥을 군자금으로 바쳤다. 주전충은 이에 서남쪽으로 적수(赤水)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계축일, 이무정이 전가애(田家硙)에서 황제의 수레를 맞이하였고, 당 소종이 말에서 내려 위문하고 접대하였다. 갑인일, 수레가 주지(盩厔)에 도착하였고; 을묘일, 하루를 머물렀다.
주전충이 영구(零口) 서쪽에 도착하여, 수레가 이미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요좌(僚佐)와 의논한 후, 다시 군사를 이끌고 적수로 돌아갔다. 퇴직한 좌복야 장준(张濬)이 주전충에게 권했다. "한건은 이무정의 동당입니다. 먼저 그를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주전충은 한건이 표문을 올려 천자가 이미 봉상으로 갔다고 말한 것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화주성에 육박했다. 한건이 단기로 맞이하여 알현하자, 주전충이 그를 꾸짖었다. 한건이 대답했다. "한건은 눈이 멀어 글자를 알지 못하여, 모든 표장(表章)과 서신 격문(檄文)은 이거천이 썼습니다." 주전충은 이거천이 자주 한건을 위해 계책을 꾸몄다고 하여, 군문(军门)에서 그를 참수하였다. 한건에게 말했다. "그대는 허주(许州) 사람이니,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금의환향할 수 있도다." 정사일, 한건을 충무절도사(忠武节度使)로 임명하고 치소를 진주(陈州)로 삼아, 병사를 보내 부임지로 호송하게 하였다. 전임 상주자사 이존권(李存权)을 화주자사 대행으로 삼고, 충무절도사 조순(赵珝)을 광국절도사로 전임시켰다. 황제의 수레가 화주에 있을 때, 상인들이 운집하였고, 한건은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2년 동안 900만 관(缗)의 돈을 얻었다. 이때에 이르러, 주전충이 이 돈을 모두 빼앗았다.
이때, 경성에는 천자가 없고, 행재(行在)에는 재상이 없었다. 최윤이 태자태사 노악(卢渥) 등 200여 명으로 하여금 연명하여 상소하게 하여, 주전충에게 서쪽으로 가서 황제의 수레를 맞이할 것을 청하고, 또 왕부(王溥)를 적수로 보내 주전충을 만나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주전충이 회답했다. "전진하면 군주를 협박한다는 비방이 두렵고, 후퇴하면 국가에 부끄러운 마음을 품게 되나,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오일, 주전충이 적수에서 출발했다.
신유일, 병부시랑 노광계(卢光启)를 시켜 중서성(中书省)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수레가 기산(岐山)에 3일간 머물렀고, 임술일, 봉상(凤翔)에 도착하였다.
주전충이 장안에 도착하자, 재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장락파에서 열을 지어 맞이했다. 다음 날 출발할 때는 임고역에서 열을 지어 작별 인사를 했다. 주전충이 이계소의 공을 포상하여, 처음에는 그를 대리하여 광국 유후(匡國留后)를 맡게 하고, 다시 그를 남겨 양가제치사(兩街制置使)로 삼아 포상이 매우 후했다. 이계소는 자신의 병사 8천 명을 모두 바쳤다. 주전충이 판관 이택과 배주를 보내 조정에 들어가 주청하게 하며 말했다: "밀조(密詔)와 최윤의 서신을 받들어,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입조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한전해 등은 가짜 조서를 꾸며 답했다: "짐이 여기 와서 재난을 피한 것이지, 환관들에게 협박당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밀조는 모두 최윤이 조작한 것이니, 너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 자신의 영토를 지켜야 한다." 이무정이 그의 장수 부도소를 무공에 주둔시켜 주전충을 막게 했으나, 계해일, 주전충의 장수 강회정이 그를 격파했다.
정묘일, 노광계를 우간의대부로 임명하여 기무(機務)에 참여하게 했다.
무진일, 주전충이 봉상에 도착하여 성 동쪽에 진을 쳤다. 이무정이 성 위에 올라 그에게 말했다: "천자가 이곳에 와서 재난을 피한 것이지, 신하가 무례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그대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입니다." 주전충이 답했다: "한전해가 천자를 협박하여 옮겼기에, 내가 지금 와서 죄를 묻고 천자를 맞이하여 환궁시키려 합니다. 기왕(岐王)께서 만약 이 일에 가담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번거롭게 설명을 청하시겠습니까!" 당 소종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주전충으로 하여금 본진으로 돌아가게 하니, 주전충이 이에 표문을 올려 하직을 고했다. 신미일, 군사를 돌려 북쪽으로 빈주를 향했다.
갑술일, 조서를 내려 수사공 겸 문하시랑 동평장사 최윤을 공부상서로 폄적(貶謫)하고, 호부시랑 동평장사 배추를 재상에서 면직하고 원래 관직을 유지하게 했다.
을해일, 주전충이 빈주를 공격했다. 정축일, 정난절도사 이계휘가 항복을 청하고, 본래 성명인 양숭본으로 복귀했다. 주전충이 그의 처자를 하중에 인질로 잡고, 양숭본에게 여전히 빈주를 진수하게 했다. 주전충이 서쪽으로 동관에 들어갔을 때, 한전해와 이무정이 조서를 사용하여 하동의 군사를 징발하라고 명하고, 이무정은 또한 이극용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극용이 이사소에게 5천 기병을 이끌고 금주에서 진주로 직행하게 하여, 평양 북쪽에서 변경 군사와 교전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을해일, 주전충이 빈주를 출발했다. 무인일, 삼원에 주둔했다. 12월, 계미일, 최윤이 삼원에 이르러 주전충을 만나 천자의 거가(車駕)를 맞이할 것을 재촉했다. 을축일(여기 날짜에 오류가 있는 듯), 주전충이 주우녕을 보내 주지(盩厔)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무술일, 주전충이 직접 가서 독전하여 주지가 항복하자, 주전충이 명하여 성을 학살했다. 주전충이 최윤에게 명하여 백관과 경성 거민들을 모두 화주로 이주하게 했다. 조서를 내려 배지(裴贄)를 대명궁유수(大明宮留守)로 충원했다.
청해절도사 서언약이 죽자, 유표(遺表)로 행군사마 유은을 대리 유후(留後)로 천거했다.
이신복은 전류가 반드시 죽지 않았음을 알고, 또 임안성은 견고하여 오래 공격해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여겨 퇴각하려 했으나, 전류에게 차단당할까 두려워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전류 선조의 무덤을 지키게 하고 땔나무를 베거나 가축을 놓아먹이는 것을 금지했으며, 또 고전무로 하여금 집안 편지를 전하게 했다. 전류가 사자를 보내 사례했다. 이신복이 중요한 길목에 깃발을 많이 세우고 가짜 진영을 설치하자, 전류는 회남 군대가 대거 쳐들어온 것으로 여겨 화해를 청했다. 이신복이 그의 위로와 선물을 받고 물러났다.
주전충이 동관에 들어갔을 때, 융소절도사 풍행습이 부사 노숭거를 보내 주전충의 명을 따랐다. 한전해가 20여 명의 중사(中使)를 보내 길을 나누어 강회(江淮)의 군사를 징발하여 금주에 주둔시켜 주전충을 위협하게 했으나, 풍행습이 이 중사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조서와 칙명을 거두어 주전충에게 보냈다. 한전해가 또 중사를 왕건에게 보내 병사를 징발했고, 주전충도 사자를 보내 왕건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왕건은 겉으로는 주전충과 화친을 표하고 이무정의 죄를 열거했으나, 은밀히는 이무정에게 굳게 지키라고 권하며 구원을 약속했다. 무신절도사 왕종길과 전동천절도사 왕종제 등을 호가지휘사(扈駕指揮使)로 임명하고 5만 군사를 이끌게 하여, 표면적으로는 천자의 거가를 맞이한다고 하면서, 실은 이무정의 산남(山南) 여러 주를 습격하게 했다.
강서절도사 종전이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자사 위전훼를 포위했는데, 하늘의 불이 무주성을 태워 사민들이 놀라 소란을 피웠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성을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종전이 말했다: "남의 위급함을 틈타는 것은 인의(仁義)로운 행동이 아니다." 이에 기도하며 말했다: "만약 이것이 위전훼의 죄라면, 백성들을 해치지 마소서." 불이 곧 꺼졌다. 위전훼가 이 소식을 듣고 죄를 인정하며 명령을 따르고, 자기 딸을 종전의 아들 종광시에게 시집보냈다. 종전은 젊었을 때 사냥을 하다가 취해 호랑이를 만나, 호랑이와 싸워 호랑이가 그의 어깨를 물었으나 종전도 호랑이의 허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호랑이를 죽여서야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귀하게 된 후 그는 이것을 후회하며,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선비가 세상에 처함에 있어 귀중한 것은 지모(智謀)에 있으니, 나처럼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을 본받지 말라."
무정절도사 뇌만이 죽자, 그의 아들 뇌언위가 스스로 유후(留后)를 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