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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19

제 19 편

昭양(昭陽) 태연헌(太淵獻)에서 시작하여, 현익(玄黓) 탄탄(涒灘)에서 끝나니, 모두 10년이다.

중종 효선황제(中宗孝宣皇帝) 하(下)

신작(神爵) 4년(계해년, 기원전 58년)

1 봄, 2월, 봉황과 감로가 경사(京師)에 내려 모였기 때문에 천하에 대사면을 베풀었다.

2 영천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는 군(郡)에서 전후 8년을 재임하며 정사(政事)의 다스림이 갈수록 좋아졌다. 이때 봉황과 신작(神雀)이 여러 군국(郡國)에 자주 내려왔는데, 영천(潁川)에 더욱 많았다. 여름, 4월,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영천태수 황패는 조령(詔令)을 반포하여 선양하고, 백성들이 교화(敎化)를 향하여 효자(孝子)와 공경하는 형제, 정결한 부녀, 순종하는 손자가 나날이 많아졌으며, 밭 가는 자는 밭 경계를 양보하고,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며, 홀아비와 과부를 봉양하고 돌보며, 가난한 자를 부양하고 도우며, 감옥에는 8년 동안 중죄수를 가둔 적이 없으니, 그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황금 100근, 중이천석(中二千石)의 녹봉을 내리노라." 하였다. 그리고 영천의 효자와 형제를 공경하는 자, 품행과 도의가 있는 백성, 삼로(三老), 역전(力田)에게 모두 등급에 따라 작위와 비단을 내렸다. 몇 달 후, 황패를 불러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3 5월, 흉노(匈奴) 선우(單于)가 그의 아우 호류약왕(呼留若王) 승지(勝之)를 보내어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4 겨울, 10월, 11마리의 봉황이 두릉(杜陵)에 모였다.

5 하남태수(河南太守) 동군(東郡) 사람 엄연년(嚴延年)은 정사를 처리함에 음흉하고 잔혹하여, 여러 사람들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를 그는 한꺼번에 풀어주었고, 여러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자를 그는 교묘하게 죽여 버렸으니, 관리와 백성들 중 누구도 그의 마음 깊이를 헤아리는 자가 없어 모두 전전긍긍하며 금령(禁令)을 범하지 못하였다. 겨울, 그가 속현(屬縣)의 죄수들을 군부(郡府)로 전부 회심(會審)하도록 전령(傳令)하니, 피가 몇 리에 걸쳐 흘렀고, 하남군(河南郡)에서는 그를 '도백(屠伯)'이라 불렀다. 엄연년은 평소 황패의 사람됨을 경시하였는데, 이웃한 군에서 태수로 있으면서 포상(褒賞)이 도리어 자기보다 앞서자 마음속으로 불복하였다. 하남군 경내에 또 누리 재해가 발생하였는데, 부승(府丞) 의(義)가 누리 재해를 순시하러 나갔다가 돌아와 엄연년을 만났다. 엄연년이 말하기를 "이 누리 떼가 어찌 봉황의 먹이가 아니겠소?" 하였다. 의는 나이가 많고 다소 혼미하여 평소 엄연년을 두려워하였기에, 중상(中傷)을 당할까 걱정하였다. 엄연년은 본래 일찍이 의와 함께 승상사(丞相史)를 지냈는데, 실제로 그와 매우 친하고 후하여 그에게 주는 물건이 매우 후하였다. 의는 더욱 두려워하여 스스로 점을 쳐보고 사괘(死卦)를 얻자, 정신이 얼떨떨하고 우울하여 휴가를 내어 장안(長安)으로 가서, 글을 올려 엄연년의 죄 10가지를 고발하였다. 이미 상주문을 올리고는 곧바로 약을 마시고 자살하여, 자신이 속이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 일을 어사승(御史丞)에게 맡겨 조사하게 하여, 그가 말로 원망하고 조정을 비방한 몇 가지 일을 찾아내었다. 11월, 엄연년은 부도죄(不道罪)로 처형되어 저잣거리에 효시(梟示)되었다.

당초, 엄연년의 어머니가 동해군(東海郡)에서 와서 엄연년과 함께 납제(臘祭)를 지내려 하였다. 낙양(洛陽)에 이르러, 마침 사형수 처결을 목격하고 어머니가 크게 놀라, 곧바로 도정(都亭)에 머물면서 군부(郡府)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엄연년이 성 밖 도정으로 나가 어머니를 뵈려 하였으나, 어머니는 문을 닫고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엄연년이 문 밖에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오래 하자, 어머니가 비로소 그를 만나보고, 이윽고 엄연년을 꾸짖어 말하기를 "다행히 군수(郡守)의 자리에 충원되어 홀로 천리의 땅을 다스리면서, 인애(仁愛)의 교화로써 우매한 백성들을 보전하고 안정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도리어 형벌을 믿고 많은 사람을 죽여, 이것으로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 된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엄연년이 죄를 인정하고 거듭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이에 직접 어머니를 위하여 수레를 몰아 부사(府舍)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납제를 마치고, 엄연년에게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신명(神明)하여, 사람이 오직 남을 죽이기만 할 수는 없다. 내가 늙어서 장성한 아들이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간다, 너를 떠나 동쪽으로 돌아가 묘지(墓地)나 쓸고 있으련다!" 하고, 마침내 떠나 군(郡)으로 돌아가, 형제와 친족을 만나 또 그들에게 이 일을 말하였다. 1년 남짓 지나, 엄연년이 과연 패망(敗亡)하니, 동해군 사람 중 그 어머니가 현명하고 지혜롭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6 흉노 알연거제선우(握衍朐鞮單于)는 포학하고 살인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歸附)하지 않았다. 태자와 좌현왕(左賢王)이 여러 차례 참언(讒言)을 올려 좌지(左地)의 귀인(貴人)들을 모함하니, 좌지의 귀인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마침 오환(烏桓)이 흉노 동쪽 변경의 고석왕(姑夕王)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아간 인구가 꽤 많았는데, 선우가 이에 노하였다. 고석왕이 두려워하여, 곧바로 오선막(烏禪幕) 및 좌지의 귀인들과 함께 계후산(稽侯狦)을 세워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로 삼고, 좌지의 군사 4, 5만 명을 징발하여 서쪽으로 알연거제선우를 공격하여, 고차수(姑且水) 북쪽 언덕에 이르렀다. 아직 교전하기 전에, 알연거제선우의 군사가 싸움에 패하여 달아나자, 사람을 보내 그의 아우 우현왕(右賢王)에게 말하기를 "흉노가 함께 나를 공격하니, 그대는 기꺼이 군사를 내어 나를 도우려는가?" 하였다. 우현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백성을 아끼지 않고, 형제와 여러 귀인들을 살육하였다. 그대는 각자 자기 땅에서 죽을지언정, 나를 더럽히러 오지 말라!" 하였다. 알연거제선우가 한스러워하며 자살하였다. 좌대저거(左大且渠) 도륭기(都隆奇)는 우현왕에게로 도망쳤고, 그의 무리 백성은 모두 호한야선우에게 항복하였다. 호한야선우가 선우정(單于庭)으로 돌아왔다. 몇 달 후, 군대를 해산시켜 각자 원래의 지역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에 민간에 흩어져 있던 그의 형 호도오사(呼屠吾斯)를 찾아내어, 그를 세워 좌곡려왕(左谷蠡王)으로 삼고, 사람을 보내 우현(右賢)의 귀인들에게 알려, 그들로 하여금 우현왕을 죽이게 하려 하였다. 그해 겨울, 도륭기와 우현왕이 함께 일축왕(日逐王) 박서당(薄胥堂)을 세워 도기선우(屠耆單于)로 삼고, 군사 수만 명을 일으켜 동쪽으로 호한야선우를 습격하니, 호한야선우가 싸움에 패하여 달아났다. 도기선우가 돌아와, 그의 맏아들 도도오서(都塗吾西)를 좌곡려왕으로, 작은아들 고무루두(姑瞀樓頭)를 우곡려왕(右谷蠡王)으로 세우고, 머물러 선우정에 거주하게 하였다.

오봉(五鳳) 원년(갑자년, 기원전 57년)

1 봄, 정월, 황제가 감천궁(甘泉宮)에 행차하여, 태치(泰畤)에서 제사 지냈다.

2 황태자가 관례(冠禮)를 치렀다.

3 가을, 흉노 도기선우가 선현섬(先賢撣)의 형 우오건왕(右奧鞬王)과 오자도위(烏藉都尉)에게 각각 2만 기병을 거느리고 동쪽에 주둔하여 호한야선우를 방비하게 하였다. 이때 서방의 호갈왕(呼揭王)이 와서 유리당호(唯犁當戶)와 함께 모의하여, 함께 참언을 올려 우현왕을 모함하며, 우현왕이 스스로 선우가 되려 한다고 말하였다. 도기선우가 우현왕 부자를 죽였으나, 뒤에 그들이 억울함을 알고, 또 유리당호를 죽였다. 이에 호갈왕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배반하고 떠나, 스스로 서서 호갈선우(呼揭單于)가 되었다. 우오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곧 스스로 서서 차리선우(車犁單于)가 되었다. 오자도위 또한 스스로 서서 오자선우(烏藉單于)가 되었다. 무릇 다섯 선우가 되었다. 도기선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차리선우를 공격하고, 도륭기를 보내 오자를 공격하게 하였다. 오자와 차리가 모두 싸움에 패하여, 서북쪽으로 달아나, 호갈선우의 군사와 합세하니, 무릇 4만 명이었다. 오자와 호갈이 모두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함께 힘을 합쳐 차리선우를 받들어 보좌하였다. 도기선우가 이 소식을 듣고, 좌대장(左大將)과 도위(都尉)에게 4만 기병을 거느리고 동쪽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여 호한야선우를 방비하게 하고, 자신은 4만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차리선우를 공격하였다. 차리선우가 싸움에 패하여, 서북쪽으로 달아났다. 도기선우가 곧 병사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향하여 합돈(闟敦) 지역에 머물렀다.

한(漢)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들 대부분이 말하기를 "흉노가 해를 끼친 지 오래되었으니, 그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군사를 내어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어사대부(御史大夫) 소망지(蕭望之)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기록되기를, 진(晉)나라 사구(士匃)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나라에 침입하였는데, 제후(齊侯)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자, 군자는 그가 상중(喪中)에 있는 나라를 치지 않은 것을 위대하다 하고, 그 은덕이 효자(孝子)를 복종시키기에 충분하고, 도의가 제후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였습니다. 전 선우(前單于)는 교화를 사모하고 선을 향하여, 스스로 형제라 칭하며, 사자를 보내 화친(和親)을 청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기뻐하고, 이적(夷狄)들 중에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직 조약을 받들어 마치지 못하였는데, 불행히도 적신(賊臣)에게 살해되었으니, 지금 그들을 친다면, 이는 남의 혼란한 틈을 타 재앙을 기뻐하는 것이니, 그들이 반드시 달아나 멀리 숨을 것입니다. 도의로써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수고로워도 공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미약한 세력을 보조하고, 그들의 재앙과 환난을 구원해야 합니다. 사방의 이적이 이 소식을 들으면, 모두 중국(中國)의 인의(仁義)를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만약 흉노가 은덕을 입어 그 왕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신하라 칭하며 복종할 것이니, 이것이 성대한 덕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의견을 따랐다.

4 겨울, 12월, 을유일이 초하루인데, 일식(日食)이 있었다.

5. 한연수(韓延壽)가 소망지(蕭望之)를 대신하여 좌풍익(左馮翊)이 되었다. 소망지는 한연수가 동군(東郡)에 있을 때 관전(官錢) 천여만 냥을 사사로이 유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사를 보내 그를 조사하여 처벌하게 했다. 한연수는 이 말을 듣고, 즉시 관리들을 배치하여 소망지가 좌풍익에 있을 때 늬생관(廩犧官)의 관전 백여만 냥을 사사로이 유용한 일을 조사하게 했다. 소망지가 상주하기를, "신의 직책은 천하를 총괄하는 것이므로, 일을 듣고 감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한연수에게 협박을 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은 이 때문에 한연수가 이치에 어긋난다고 여기고, 각자 조사하던 일을 철저히 추궁하도록 명하였다. 소망지에게서는 끝내 사실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소망지가 동군으로 보낸 어사가 조사하여, 한연수가 기사(騎士)를 시험하던 날 사치스럽고 참람되어 제도를 어긴 사실과, 또 관부의 동기(銅器)를 가져다 월식 때를 기다려 칼과 검을 주조하여 상방령(尙方令)의 일을 모방한 사실과, 관부의 은전과 비단을 가져다 부리는 관리들에게 사사로이 빌려준 사실과, 수레와 갑옷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데 삼백만 이상을 쓴 사실을 적발해냈다. 한연수는 결국 교활부도(狡猾不道) 죄로 처형되어 그 시신을 저잣거리에 보이게 되었다. 관리와 백성 수천 명이 위성(渭城)까지 곡하며 전송하였는데,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수레바퀴를 붙잡고 서로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쳤다. 한연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오는 사람마다 술을 마시니, 그 양이 모두 한 섬 남짓이었다. 연수는 원사(掾史)를 시켜 전송 나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사례하고 이르기를, "고생하며 멀리 전송해주는 관리와 백성들 덕분에, 연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성들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봉 2년(을축, 기원전 56년)

1. 봄 정월, 황상이 감천궁(甘泉宮)에 행차하여 태치(泰畤)에서 제사 지냈다.

2. 거기장군(車騎將軍) 한증(韓增)이 죽었다. 5월, 장군 허연수(許延壽)가 대사마(大司馬) 겸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이 되었다.

3. 승상 병길(丙吉)이 연로하였으나, 황상은 그를 공경히 대하였다. 소망지는 마음속으로 항상 병길을 업신여겼으므로, 황상이 이 때문에 불쾌하게 여겼다. 승상사직(丞相司直)이 상주하기를, 소망지가 승상에게 예절이 오만하였고, 또 관리를 시켜 매매를 하게 하여 사사로이 보탠 돈이 모두 십삼만전에 이르렀으므로, 체포하여 가두고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가을 8월 임오일, 조서를 내려 소망지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좌천시키고, 태자태부 황패(黃霸)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4. 흉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그의 아우 우곡려왕(右谷蠡王) 등을 보내 서쪽으로 도기선우(屠耆單于)의 주둔군을 습격하여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도기선우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몸소 기병 6만을 이끌고 호한야선우를 공격하였다. 도기선우는 병력이 패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도륭기(都隆奇)는 이에 도기의 막내아들 우곡려왕 고무루두(姑瞀樓頭)와 함께 도망하여 한나라에 귀부하였다. 차리선우(車犁單于)는 동쪽으로 호한야선우에게 투항하였다. 겨울 11월, 호한야선우의 좌대장 오력굴(烏厲屈)과 그의 아버지 호속루 오력온돈(烏厲溫敦)이 모두 흉노의 혼란을 보고, 그들의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오력굴을 신성후(新城侯)에, 오력온돈을 의양후(義陽侯)에 봉하였다. 이때 이릉(李陵)의 아들이 다시 오자도위(烏藉都尉)를 선우로 세우자, 호한야선우가 그를 붙잡아 죽이고, 마침내 다시 선우정(單于庭)에 도읍하였으나, 무리는 겨우 몇만 명뿐이었다. 도기선우의 사촌동생 휴순왕(休旬王)이 스스로 윤진선우(閏振單于)라 칭하며 서쪽 변방에 있었고, 호한야선우의 형 좌현왕(左賢王) 호도오사(呼屠吾斯) 또한 스스로 질지골도후선우(郅支骨都侯單于)라 칭하며 동쪽 변방에 있었다.

광록훈(光祿勳)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은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나, 자기의 행실과 재능을 자랑하고, 또 천성이 각박하고 모질어 남의 은밀한 사사(私事) 드러내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조정에서 원한을 많이 샀다. 그가 태복(太僕)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상서하여 대장락의 죄상을 고발하자, 대장락은 양운이 남을 시켜 고발하게 한 것으로 의심하고, 또한 상서하여 양운의 죄상을 고발하여 말하기를, "양운이 상서하여 한연수를 변호하였는데, 낭중(郎中) 구상(丘常)이 양운에게 말하기를, '듣자 하니 그대가 한풍익(韓馮翊)을 변호한다던데, 그가 살 수 있겠소?' 하니, 양운이 말하기를, '일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곧은 사람이 반드시 자기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나도 내 몸 하나 보전하지 못할 터인데, 이는 바로 사람들이 이르는 바, 쥐가 구멍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은 입에 거수(窶數)를 물었기 때문이라는 격이오.' 하였습니다. 또 그가 대장락에게 말하기를, '정월 이래로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이는 《춘추》에 실려 있는 바이고, 하후승(夏侯勝)이 말했던 바이기도 하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사건을 정위(廷尉)에게 내려 처리하게 하였다. 정위 우정국(于定國)이 상주하기를, 양운이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요망하고 흉악한 말을 퍼뜨려 대역부도(大逆不道)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황상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조서를 내려 양운과 대장락을 모두 관직을 면직시켜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오봉 3년(병인, 기원전 55년)

1. 봄 정월 계묘일, 박양정후(博陽定侯) 병길이 죽었다.

반고(班固)가 논평하기를, "옛날 이름을 정할 때에는 반드시 사물의 형상에 근거하여, 먼 것은 만물에서 취하고 가까운 것은 제 몸에서 취하였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임금을 원수(元首)라 하고 신하를 고굉(股肱)이라 하여, 그 한 몸임을 밝히고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내었다. 이 때문에 군신이 서로 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요, 자연스러운 형세이다. 근래 한나라의 승상을 살펴보건대, 고조(高祖)께서 기틀을 여실 때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으뜸이었고, 효선제(孝宣帝)께서 중흥하실 때는 병길(丙吉)과 위상(魏相)이 명성이 있었다. 당시에 관리의 출척(黜陟)에 차례가 있고, 여러 직무가 잘 다스려져 공경(公卿)이 칭직한 이가 많았으며, 천하에 예양(禮讓)의 기풍이 일어났다. 그들이 행한 일을 살펴보니, 어찌 거짓이겠는가!"라고 하였다.

2. 2월 임진일, 황패가 승상이 되었다. 황패의 재능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뛰어났으나, 승상이 되어서는 그 공명이 군현(郡縣)을 다스릴 때보다 못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 장창(張敞)의 집에서 기르던 작(鶡雀)이 승상부에 날아와 모여들자, 황패는 이를 신령스러운 참새라 여겨 의논하여 상주하려 하였다. 장창이 황패에게 상주하기를, "신이 그윽이 보건대, 승상께서 중이천석(中二千石)과 박사(博士)를 청하여 함께 군국(郡國)에서 올라온 상계(上計)의 장사(長史)와 승(丞)에게, 백성을 위해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며 큰 교화를 이루는 일에 대해 조목별로 대답하도록 묻고 계셨습니다. 밭 가는 자가 밭두둑을 사양하고, 남녀가 길을 달리하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효자와 정부(貞婦)를 천거한 자를 한 부류로 하여 먼저 전각에 오르게 하고, 천거하기는 했으나 그 숫자를 모르는 자를 그 다음으로 하며, 조목으로 교화를 베푸는 법을 정하지 않은 자를 맨 뒤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승상께 사례할 때,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승상께서 그러시기를 바랐습니다. 장사와 승이 대답할 때, 신의 집 작(鶡雀)이 승상부 지붕 위에 날아와 앉았는데, 승상 이하 수백 명이 보았습니다. 변방의 관리들은 대부분 이 작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다 알지 못하는 척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이 일을 의논하여 상주하시려 하며 말하기를, '내가 상계 장사와 승에게 교화를 일으키는 조목에 대해 물었더니, 황천(皇天)께서 신령스러운 참새를 내려 보답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뒤에 이것이 신의 집에서 온 것임을 아시고서야 그만두셨습니다. 군국의 관리들은 은밀히 승상을 비웃으며 인후하고 지략은 있으나 기이한 일을 믿는 데가 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승상을 헐뜯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여러 신하들이 이를 분명히 알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장사와 승이 승상의 뜻을 두려워하여, 돌아간 후 법령을 버리고 각자 사사로운 교화를 행하여, 다투어 덧붙여 나간다면, 순박함을 깎아내어 경박함을 부추기고, 함께 거짓된 행실을 행하여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며, 흔들리고 게을러져 심하면 요망스러운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가령 서울에서 먼저 밭두둑 사양하기와 길을 달리하기, 길 떨어진 것 줍지 않기를 행하더라도, 실제로 청렴과 탐욕, 정절과 음란의 행실에 아무런 이로움이 없으면서, 한갓 거짓으로써 천하를 인도하는 것이니, 본디 옳지 않습니다. 제후(諸侯)가 먼저 행한다면 거짓된 명성이 서울에까지 전해질 것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한나라가 폐정을 이은 뒤에 법도를 변통하여 법령을 제정하여 선을 권하고 간악함을 금하였으니, 조리가 상세하고 갖추어져 있어, 다시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귀한 신하로 하여금 장사와 승에게 명확히 타일러, 돌아가 이천석(二千石)에게 알리게 하여, 삼로(三老)·효제(孝悌)·역전(力田)·효렴(孝廉)·염리(廉吏)를 천거할 때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도록 힘쓰고, 군중의 일은 모두 법령을 법도로 삼아, 감히 함부로 조목으로 교화를 세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감히 거짓을 꾸며 명예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처벌을 받게 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명백히 보여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장창의 말을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상계리(上計吏)를 불러 시중(侍中)을 시켜 면전에서 타일러 장창의 뜻대로 시행하게 하니, 황패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另外,乐陵侯 사고는 외척의 신분으로 시중을 맡아 지위가 귀중하고 중요했는데, 황패는 사고를 태위로 추천할 수 있다고 여겼다. 천자는 상서를 불러 황패를 꾸짖으며 물었다. “태위의 관직은 이미 폐지된 지 오래되었다. 교화를 선양하고 은밀한 사정을 통달케 하여 감옥에 억울한 사건이 없고, 향읍에 도둑이 없게 하는 것이 그대의 직분이다. 장수와 재상의 관직은 내가 임명하는 것이다. 시중・낙릉후 사고는 조정의 근신이자 내가 직접 친애하는 사람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직권을 넘어 그를 추천하였는가?” 상서령이 승상의 답변을 받자, 황패는 관을 벗고 사죄하였으며, 며칠 뒤에야 일이 결정되었다. 이로부터 황패는 감히 다시 요청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을 논할 때면 황패를 으뜸으로 삼았다.

3. 3월, 황상이 하동을 순행하여 후토에 제사 지냈다. 천하의 구전을 줄이고, 사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4. 4월, 신유일에 서하태수 두연년을 어사대부로 임명하였다.

5. 서하와 북지에 속국을 설치하여 투항한 흉노인들을 안치하였다.

6. 광릉여왕 유서가 무녀 이여수를 보내 황상을 저주하여 천자가 되기를 도모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그가 무녀와 궁녀 20여 명에게 독약을 먹여 입을 막았다. 공경들이 유서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오봉 4년(정묘, 기원전 54년)

1. 봄, 유서가 자살하였다.

2. 흉노 선우가 칭신하며 동생 우곡려왕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시중들게 하였다. 변경에 적구가 없었으므로 변방 수비 병사를 10분의 2만큼 줄였다.

3. 대사농중승 경수창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연이어 풍년이 들어 곡가가 낮고, 농민이 얻는 이익이 매우 적습니다. 옛 규례에 해마다 관동에서 조운으로 400만 곡의 곡식을 실어 경사를 공급하고, 병사 6만 명을 썼습니다. 마땅히 삼보・홍농・하동・상당・태원군의 곡식을 구매하면 경사를 공급하기에 충분하여, 관동 조운 병사의 절반이 넘는 수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황상이 그의 계책을 따랐다. 경수창이 또 아뢰었다. “변방의 군에서는 모두 곡식 창고를 짓도록 명하여, 곡가가 낮을 때 값을 올려 사들여 농민에게 이롭게 하고, 곡가가 비쌀 때 값을 낮춰 팔게 하니, 이름하여 상평창이라 합니다.”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황상이 이에 조서를 내려 경수창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4. 여름 4월, 신축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5. 양운은 작위를 잃은 뒤에 집에 한가히 거처하며 재산을 늘려 재물로 스스로 즐겼다. 그의 벗 안정태수 서하 사람 손회종이 양운에게 편지를 보내 충고하며 말하였다. “대신이 폐출되어 물러났으면 마땅히 문을 닫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가련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마땅히 재산을 늘려 빈객과 사귀며 명성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양운은 재상의 아들로 재능이 있고, 젊어서 조정에서 현달하였는데, 일시에 애매모호한 말로 폐출되자 마음속으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손회종에게 답신하여 말하였다. “내 사사로이 생각건대, 나의 허물은 이미 컸고 행실은 이미 훼손되었기에, 농부가 되어 한평생을 마치려 하였소. 그러므로 몸소 처자를 이끌고 밭 갈고 누에 치느라 힘썼는데, 뜻밖에도 이로 인해 비웃음과 비난을 받게 될 줄이야! 사람의 인정으로 금할 수 없는 것은 성인도 또한 금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군주와 아버지는 지존하고 지친한 이지만, 그들을 위해 상을 치르는 것도 또한 마치는 때가 있소. 내가 죄를 얻은 지 이미 3년이 지났소. 농사짓는 집은 노동이 괴로워, 명절과 복날이면 양고기를 삶고 양 새끼를 구우며, 한 말 술을 마시며 스스로 위로하오. 술에 취해 귀가 뜨거워지면 하늘을 우러러 질그릇 장구를 두드리며 오오 노래 부르니, 그 시에 이르기를, ‘남산에서 밭 갈매, 거칠어 다스리지 못하네. 한 이랑 콩을 심었더니, 떨어진 것은 콩대구나. 인생은 즐거움을 행할 뿐이니, 부귀를 기다린들 때가 언제리오?’ 하였소. 이는 참으로 방종하여 절도가 없으니, 이것이 불가함을 알지 못한 것이오.”

또한, 양운 형의 아들 안평후 양담이 양운에게 말하였다. “후보의 죄는 가볍고 또 공이 있으니, 장차 다시 등용되실 것입니다.” 양운이 말하였다. “공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소! 황상을 위해 힘을 다할 만한 이가 못 됩니다.” 양담이 말하였다. “황상께서 실로 그러하십니다. 개사례, 한풍익은 모두 힘을 다한 관리였으나, 모두 일로 인해 주살당하였습니다.”

마침 일식의 재앙이 있자, 추마외좌 성이 상서하여 “양운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일식의 재앙은 이 사람이 불러들인 것입니다.”라고 고발하였다. 상주문이 정위에게 내려져 조사하여, 양운이 손회종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하였고, 황제가 보고 미워하였다. 정위는 양운을 대역무도로 판결하여 요참에 처하였다. 처자는 주천군으로 유배 보냈다. 양담은 연좌되어 면직되어 서인이 되었다. 재위에 있는 자들로 양운과 교분이 두터웠던 미앙위위 위현성과 손회종 등은 모두 관직을 면직당하였다.

신 사마광이 말한다. “효선제의 영명함과 위상·병길이 승상이 되고 우정국이 정위가 되었음에도, 조광한·객관요·한연수·양운의 죽음은 모두 뭇사람의 마음을 탄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선정에 누를 끼침이 심하도다! 《주관》의 사구법에는 의현·의능의 규정이 있었다. 조광한·한연수가 백성을 다스림 같은 것을 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객관요·양운의 강직함을 현명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있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죄가 사형에는 부족함에 있어서랴! 양웅은 한연수가 소망지에게 고한 것은 신하된 자가 스스로 취한 허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한연수로 하여금 상관의 뜻을 거스르게 한 것은 소망지가 그를 격노시킨 것이다. 황상이 살피지 못하여, 한연수가 홀로 그 허물을 짊어졌으니, 또한 심하지 아니한가!”

6. 흉노 윤진 선우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질지 선우를 공격하였다. 질지 선우가 그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군대를 병합하였다. 이에 호한야 선우를 공격하였다. 호한야 선우가 패하여 달아나니, 질지 선우가 선우정에 도읍하였다.

감로 원년(무진, 기원전 53년)

1. 봄 정월, 황상이 감천으로 행차하여 태전에 제사 지냈다.

2. 양운이 주살될 때, 공경이 상주하기를, 경조윤 장창은 양운의 붕우로서 마땅히 관직에 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황상이 장창의 재능을 아껴, 특별히 그 상주문을 보류하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장창이 속관 서순을 보내 사건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서순이 사사로이 집으로 돌아가 말하기를, “겨우 닷새 동안의 경조윤일 뿐인데, 다시 무슨 사건을 조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장창이 서순의 말을 듣고, 즉시 아전을 보내 서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밤낮으로 심문하여, 끝내 그를 처형하였다. 서순이 처형되기 전에, 장창이 주부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서순에게 고하게 하였다. “닷새 동안의 경조윤이 과연 어떠하냐? 겨울이 이미 거의 다 지나갔으니, 목숨을 연장하고 싶으냐?” 이에 서순을 저잣거리에서 기시에 처하였다. 마침 입춘을 맞아, 조정에서 원옥을 순찰하는 사자를 내보냈는데, 서순의 집안사람들이 수레에 시체를 싣고 장창의 조서를 덧붙여, 사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사자가 상주하여 장창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고 하였다. 황상이 장창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려 하여, 먼저 그 전에 양운의 일로 탄핵된 상주문을 내려보내 면직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장창이 대궐 문에 이르러 인수를 바치고, 곧바로 대궐 문 밑을 빠져나가 도망하였다. 몇 달 뒤, 경사(서울) 관리와 백성들이 해이해져 경보의 북소리가 여러 번 울렸고, 기주 지역에 또 큰 도둑이 나타나자, 천자가 장창의 공적을 생각하고 사자를 그 집으로 보내 불렀다. 장창이 몸에 중한 탄핵을 받은 상황이었으므로, 사자가 도착했을 때 처자식들은 모두 울며 두려워하였으나, 장창만 홀로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도망쳐 서민이 되었으니, 군리가 마땅히 와서 체포해야 하는데, 지금 사자가 왔으니, 이는 천자가 나를 등용하려는 것이다.” 이에 옷을 정비하고 사자를 따라 출발하였다. 공거부에 이르러 상서하여 말하였다. “신이 앞서 다행히 구경의 반열에 끼어, 경조윤 자리에서 대죄하였는데, 속리 서순을 살해하여 죄를 얻었습니다. 서순은 본래 신이 항상 후대하던 아전으로, 여러 차례 은혜를 입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신이 탄핵을 받아 면직될 것이라는 이유로, 그가 문서를 받들어 일을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에 누워 신을 ‘닷새 동안의 경조윤’이라 하였습니다. 은의를 저버리고 풍속을 해치려는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사사로이 서순이 행동이 바르지 않다고 여겨, 법을 어겨 그를 죽였습니다. 신 장창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사건을 심리함에 고의로 바르지 않게 하였으니, 비록 법에 복종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천자가 장창을 불러 기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장창이 부임하자, 도둑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은 해당 부분의 한국어 번역입니다.

3

황태자는 성격이 온유하고 인자하며 유학을 좋아했는데, 황상이 중용하는 이들이 대부분 문법에 밝은 관리들이어서 형벌로 신하들을 단속하는 것을 보고, 일찍이 연회에서 모실 때 조용히 나아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형벌을 사용하심이 지나치게 엄중하니, 응당 유생을 등용하셔야 합니다." 황상이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한나라 왕실에는 본래 제도가 있어, 원래 왕도와 패도를 함께 사용한다. 어찌 순수하게 덕교만 베풀고 주나라의 정치를 채택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저속한 선비들은 시의(時宜)에 통달하지 못하고 옛날만 찬양하고 지금을 비난하기 좋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명분과 실제에 미혹되어 무엇을 지켜야 할지 모르게 하니, 어찌 등용할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 집안의 천하를 어지럽힐 자는 바로 태자로구나!"

신 사마광이 말한다. 왕도와 패도는 그 이치가 다르지 않다. 옛날 하·상·주 삼대가 융성할 때에는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왔으니, 이를 왕도라 일컬었다. 천자가 쇠약하여 제후들을 다스리지 못하자, 제후 중에 동맹국을 거느리고 함께 불복하는 자를 토벌하여 왕실을 높인 자가 있었으니, 이를 패도라 일컬었다. 그들이 정사를 시행함에 있어 모두 인의를 근본으로 삼고,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등용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며, 포학함을 금지하고 화란을 제거했다. 단지 명분과 지위에 높고 낮음이 있고, 은덕과 혜택에 깊고 얕음이 있으며, 공적과 사업에 크고 작음이 있고, 정령에 너그럽고 엄격함이 있을 뿐이다. 마치 흑백이나 감고의 차이처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가 삼대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은 군주가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선왕의 도가 후세에 다시 시행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유자에게는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다. 저 저속한 선비들은 참으로 그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지만, 어찌 진정한 유자를 구하여 등용하지 않았는가? 후직, 설, 고도, 백익, 이윤, 주공, 공자는 모두 대유이다. 가령 한나라가 그들을 얻어 등용할 수 있었다면, 그 공업이 어찌 여기에서 그쳤겠는가! 효선제가 태자가 유약하고 불안정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우리 한나라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말한 것은 괜찮지만, 왕도는 시행할 수 없고 유자는 등용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자손에게 가르침을 보이고 후세에 법을 전할 도리가 아닐 듯하다.

4

회양헌왕은 법률을 좋아하고,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재간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 장첩여가 특히 총애를 받았다. 황상은 이로 인해 태자를 멀리하고 회양헌왕을 사랑하여, 여러 차례 헌왕을 탄식하며 말했다. "참으로 내 아들이로다!" 항상 헌왕을 태자로 세울 뜻이 있었으나, 태자가 미천할 때 태어났고 황상이 젊어서 허씨에게 의지했으며, 즉위한 후에 허황후가 또 살해되었기 때문에 차마 그리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황상은 위현성을 회양중위로 삼았는데, 위현성이 일찍이 작위를 형에게 양보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헌왕을 감화시키고 깨우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태자의 지위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5

흉노 호한야 선우가 전쟁에 패했을 때, 좌이질자왕이 호한야를 위해 계책을 세워, 한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입조하여 시중들며 한나라에 도움을 청해야만 이에 흉노가 안정될 수 있다고 권했다. 호한야가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했다. "안 됩니다. 흉노의 풍속은 본래 기개와 힘을 숭상하고 남에게 복무하는 것을 경시하며, 말을 타고 싸우는 것으로 나라의 일을 삼으니, 그래서 온갖 오랑캐들 사이에서 위엄과 명성을 가졌습니다. 싸우다 죽는 것은 장사의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형제가 나라를 다투니, 형이 아니면 아우에게 돌아갈 것이며, 비록 싸우다 죽더라도 오히려 위엄과 명성은 있어, 자손들이 오래도록 여러 나라를 통솔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비록 강대하나 오히려 흉노를 병합할 수 없습니다. 어찌 선조의 제도를 어지럽히고 한나라에 신하를 칭하여, 선대 선우로 하여금 비천한 욕을 당하게 하고 여러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게 합니까! 비록 이로써 편안해진다 한들, 다시 무엇으로 온갖 오랑캐를 통솔하겠습니까!" 좌이질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강하고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바야흐로 강성하여 오손과 성곽 여러 나라들이 모두 신하와 첩이 되었습니다. 저제후 선우 이래로 흉노는 날로 약해져 보복할 수 없었으니, 비록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나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나라를 섬기면 편안히 살 수 있고, 섬기지 않으면 위태로워 망할 터인데, 어떤 계책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여러 대인들이 서로 논란하기를 오래 하였으나, 호한야가 그 계책을 따라 부락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변방 요새에 가까이 가서, 아들 우현왕 수루거당을 입조하여 시중들게 하였다. 질지 선우 또한 아들 우대장 구우리수를 입조하여 시중들게 하였다.

6

2월, 정사일, 낙성경후 허연수가 죽었다.

7

여름, 4월, 신풍에 황룡이 나타났다.

8

병신일, 태상황묘에 화재가 발생했다. 갑진일, 효문묘에 화재가 발생했다. 황상은 5일 동안 소복을 입었다.

9

오손의 광왕이 또 초공주 해우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이름을 치미라 하였다. 광왕은 공주와 불화하고, 또 포악하고 흉악하여 민심을 잃었다. 한나라가 위사마 위화의와 부후 임창을 오손에 파견했다. 공주가 말했다. "광왕은 오손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으니, 주살하기 쉽습니다." 이에 주연을 베풀고 무사에게 검을 빼앗아 찌르게 하려고 꾀하였다. 검이 빗나가 내려찍어져 광왕이 부상을 입고, 말에 올라 달아났다. 그의 아들 세심수가 병사를 모아 위화의와 임창 및 공주를 적곡성에서 포위하였다. 몇 달이 지나, 도호 정길이 여러 나라의 군대를 징발하여 구원하니, 이에 포위를 풀고 떠났다. 한나라가 중랑장 장준을 보내어 의약을 가지고 가서 광왕을 치료하고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에 위화의와 임창을 붙잡아 칼을 씌우고, 울리에서 함거에 실어 장안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당초, 비왕 옹귀미의 호인 아내가 낳은 아들 오취도는, 광왕이 부상을 입었을 때 놀라서 여러 흡후들과 함께 떠나 북산 속에 살면서, 외가인 흉노 병사가 올 것이라고 떠벌렸으므로 무리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후에 마침내 광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곤미가 되었다. 이해, 한나라가 파강장군 신무현에게 병사 1만 5천을 이끌고 돈황에 이르러, 수로를 통하게 하고 곡식을 쌓아 두고서, 그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당초, 초공주의 시비 풍료는 사서를 쓸 수 있었고 사무에 익숙하여, 일찍이 한나라의 부절을 지니고 공주의 사자로서 성곽 여러 나라를 다니니, 모두 그녀를 공경하고 신뢰하여 풍부인이라 불렀는데, 오손 우대장의 아내였다. 우대장은 오취도와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도호 정길이 풍부인을 시켜 오취도를 설득하여 말하게 했다. 한나라 군대가 바야흐로 출병할 것이니 반드시 멸망할 것이므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고. 오취도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바라건대 작은 봉호를 주어 몸을 편안히 하게 해주십시오!" 황제가 풍부인을 불러들여 친히 형편을 물었다. 알자 축차와 기문 감연수를 부사로 삼아 풍부인을 보내며 호송하게 했다. 풍부인이 비단 수레를 타고 한나라의 부절을 지니고 가서, 오취도에게 조칙을 내려 장라후이 있는 적곡성에 이르게 하여, 원귀미를 대곤미로 삼고, 오취도를 소곤미로 삼아 모두 인수를 하사하였다. 파강장군은 요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돌아왔다. 후에 오취도가 여러 흡후들의 무리를 다 돌려주지 않자, 한나라가 다시 장라후를 보내어 세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곡에 주둔하게 하여, 그 틈에 그들을 위해 인민과 지경을 나누어 주니, 대곤미는 6만여 호, 소곤미는 4만여 호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모두 소곤미에게 붙었다.

감로 2년(기사년, 기원전 52년)

1

봄, 정월, 황자 유효를 정도왕으로 세웠다.

2

조서를 내려 천하에 대사면하고, 백성들의 산부세를 30전 감면하였다.

3

주애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름, 4월, 호군도위 장록을 보내어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4

두연년이 노환으로 면직되었다. 5월, 기축일, 정위 우정국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5

가을, 9월, 황자 유우를 동평왕으로 세웠다.

6

겨울, 12월, 황상이 배양궁, 속옥관에 행차하였다.

7

이 해, 영평장무후 조충국이 죽었다. 이보다 앞서, 조충국이 늙었다는 이유로 퇴직을 청하니, 편안한 수레와 네 필의 말, 황금을 하사하고 파직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사방 오랑캐에 대한 큰 의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를 참여시켜 군사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물었다.

8. 흉노 호한야 선우가 오원새에 도착하여 귀순을 표하고, 나라의 보물을 바치고자 하여 감로 3년 정월에 조현하겠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유관 부서에서 의례를 의논하게 하였다. 승상과 어사가 말하기를, "성왕의 제도는 먼저 경사(京師)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화하(華夏)를, 먼저 화하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이적(夷狄)을 대우합니다. 흉노 선우가 조하하는 예의는 제후왕과 같게 하고, 위차는 그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태부 소망지는 "선우는 한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지 않으므로 적국(敵國)이라 칭하니, 마땅히 신하로 칭하지 않는 예로 대우하여 그 위차를 제후왕 위에 두어야 합니다. 외이(外夷)가 머리를 조아려 번신(藩臣)을 칭하는데, 중원이 겸양하여 신속(臣屬)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포섭하는 의리이며 겸손하고 통달한 복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융적(戎狄)은 황복(荒服)이다'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와서 귀복하는 것이 홀은홀현(忽隱忽現)하여 일정한 규칙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흉노의 후손이 끝내 새처럼 날아가고 쥐처럼 숨는 일이 있어 조현과 진공을 빠뜨리더라도 반신(叛臣)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만세의 장원한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흉노 선우가 북쪽 번속이라 칭하며 정월에 조현한다. 짐은 덕행이 얕고 적어 널리 덮을 수 없다. 마땅히 빈객의 예로 대우하여 선우의 위차를 제후왕 위에 있게 하고, 알현할 때에는 신하를 칭하되 성명은 알리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순열이 논평하기를: 《춘추》의 대의는, 왕자에게는 경외(境外)의 땅이 없어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융적의 땅은 도로가 멀고 인적이 끊어져 있어서, 역법과 정령이 미치지 못하고 예악과 교화가 베풀어지지 않으니, 이는 그들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저(氐)와 강(羌)으로부터 감히 와서 천자를 알현하지 않는 자가 없도다" 하였으니, 따라서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군주는 반드시 왕실에 공품을 바쳐야 합니다. 만약 직공(職貢)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견책과 호령이 가해지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적국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지가 신하로 칭하지 않는 예로 대우하여 그들을 왕공의 위에 두고자 한 것은, 법도를 뛰어넘고 질서를 어지럽혀 천리의 상도를 파괴하고 예제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권의지계(權宜之計)로 삼는다면, 그렇다면 또 별도의 논의가 될 것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거기도위 한창을 파견하여 선우를 맞이하게 하고, 지나가는 7개 군에서 2천 기병을 징발하여 도로에 열을 지어 늘어서게 하였다.

감로 3년(경오, 기원전 51년)

봄 정월, 황제가 감천궁으로 가서 태전에 제사지냈다.

흉노 호한야 선우가 와서 조현하였는데, 찬례할 때 번신이라 칭하고 이름은 칭하지 않았다. 그에게 관대(冠帶), 의상(衣裳), 황금 인수(印綬), 녹색 수대, 옥으로 장식한 검, 패도(佩刀), 활 하나, 화살 네 개, 계극(棨戟) 열 개, 편안한 수레 한 대, 말안장과 고삐 한 벌, 말 열다섯 필, 황금 스무 근, 돈 스무만 전, 의복과 이불 일흔일곱 벌, 비단과 수놓은 비단, 무늬 있는 비단, 잡다한 비단 팔천 필, 명주솜 육천 근을 하사하였다. 의례가 끝난 후, 사자를 보내 선우를 인도하여 먼저 장평(長平)에서 숙박하게 하였다. 황제는 감천궁에서 지양궁(池陽宮)으로 가서 숙박하였다. 황제가 장평판(長平坂)에 오르자, 조서를 내려 선우는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선우의 좌우 당호(當戶)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열을 지어 관례할 수 있었으며, 이에 더하여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 왕, 후 수만 명이 모두 위교(渭橋) 아래에서 맞이하여 길 좌우에 도열하였다. 황제가 위교에 오르자, 뭇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선우는 장안의 관저로 갔다. 건장궁(建章宮)에서 연회를 베풀고 선우를 관대하며 하사하고, 진기한 보물들을 구경하게 하였다. 2월, 선우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선우가 스스로 청하기를, "바라건대 광록새(光祿塞) 아래 막남(漠南)에 머물면서, 급한 상황이 있으면 한나라의 수항성(受降城)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에서 장락위위(長樂衛尉) 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과 거기도위 한창(韓昌)에게 기병 1만 6천 명을 이끌게 하고, 또 변경 군현의 병사와 마필 수천을 징발하여 선우를 삭방군(朔方郡)의 계록새(雞鹿塞) 밖으로 전송하였다. 조서를 내려 동충 등에게 남아서 선우를 보위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주벌하는 것을 돕게 하고, 또 변경 군현의 곡미와 건량(乾糧)을 전후로 3만 4천 곡(斛)을 운반하여 그들의 식량을 공급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오손(烏孫) 서쪽에서 안식(安息)에 이르기까지 흉노와 가까운 여러 나라들이 모두 흉노를 두려워하고 한나라를 가벼이 여겼는데,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조현한 이후로는 모두 한나라를 높이 받들었다.

황제는 융적(戎狄)이 귀순하여 신복한 것을 계기로 보좌한 대신들의 공적을 생각하여, 이에 기린각(麒麟閣)에 그들의 형상을 그리고 그들의 용모를 그리며 관작과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오직 곽광(霍光)만은 이름을 쓰지 않고 다만 "대사마 대장군 박륙후(博陸侯) 성 곽씨(霍氏)"라고만 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안세(張安世),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丙吉), 두연년(杜延年),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蕭望之), 소무(蘇武)였다. 모두 열한 사람으로, 공적과 덕행이 있어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를 표창하여 중흥의 보좌 신하임을 밝히 드러내어, 방숙(方叔), 소호(召虎), 중산보(仲山甫)와 나란히 하였다.

봉황이 신채(新蔡)에 모여들었다.

3월 기사일, 건성안후(建成安侯) 황패(黃霸)가 사망하였다. 5월 갑오일,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이 되어 서평후(西平侯)에 봉해졌다. 태복(太僕) 패군(沛郡) 사람 진만년(陳萬年)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조서를 내려 여러 유생들에게 오경(五經)의 같고 다른 점을 강론하게 하고, 소망지 등이 그들의 의견을 평의하여 상주하자 황제가 직접 결재하였다. 이에 양구(梁丘)의 《역경》, 대소 하후(夏侯)의 《상서》, 《곡량춘추(穀梁春秋)》를 박사로 세웠다.

오손의 대곤미(大昆彌) 원귀미(元貴靡)와 치이미(鴟靡)가 모두 병들어 죽었다. 공주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제가 나이가 많아 고향 땅을 그리워하니, 바라건대 뼈를 한나라 땅에 묻히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를 가엾게 여겨 맞아들였다. 겨울, 그가 경사(京師)에 도착하자 공주의 예로 대우하였다.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원귀미의 아들 성미(星靡)가 대곤미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렸다. 풍부인(馮夫人)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제가 오손에 사신으로 가서 성미를 안무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에서 그녀를 파견하였다. 도호(都護) 한선(韓宣)이 상주하여, 오손의 대리(大吏), 대록(大祿), 대감(大監)에게 모두 금인자수(金印紫綬)를 하사하여 높여 대곤미를 보좌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이후 단회종(段會宗)이 도호가 되어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오손을 안정시켰다. 성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자속미(雌栗靡)가 뒤를 이었다.

황태자가 총애하는 사마양제(司馬良娣)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하여 태자에게 말하기를, "제가 죽는 것은 천명이 아니라, 여러 첩(妾)과 양인(良人)들이 번갈아 저주하여 죽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그 말이 진실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죽자, 태자는 슬퍼하고 분노하여 병이 나고 정신이 혼미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에 황후에게 명하여 후궁 가운데 태자를 즐겁게 모실 만한 가인자(家人子)를 찾게 하였는데, 원성(元城) 사람 왕정군(王政君)을 찾아 태자궁으로 보냈다. 왕정군은 원래 수의어사(繡衣御史) 왕하(王賀)의 손녀로, 병전(丙殿)에서 소견되었다. 한 번 잠자리를 모시자 임신을 하였다. 이 해에 갑관(甲館) 화당(畫堂)에서 성제(成帝)를 낳았으니, 세적(世嫡) 황손이 되었다. 황제가 그를 사랑하여 친히 이름을 오(驁)라 짓고 자를 대손(大孫)이라 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감로 4년(신미, 기원전 50년)

여름, 광천왕(廣川王) 유해양(劉海陽)이 금수 같은 행위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죄로 폐위되어 방릉(房陵)으로 유배되었다.

겨울 10월 정묘일, 미앙궁(未央宮) 선실각(宣室閣)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해, 정도왕(定陶王) 유효(劉囂)를 초왕(楚王)으로 옮겨 봉하였다.

흉노 호한야(呼韓邪)와 질지(郅支) 두 선우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헌례하였는데, 한나라에서는 호한야의 사신을 대우함에 더욱 후하게 하였다.

황룡 원년(임신, 기원전 49년)

봄 정월, 황제가 감천궁으로 가서 태전에 제사지냈다.

흉노 호한야 선우가 와서 조현하였다; 2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당초에 질지 선우는 호한야가 병력이 약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기에 다시는 스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곧 부중(部衆)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우지(右地)를 공격하여 평정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기 선우(屠耆單于)의 작은 아우가 본래 호한야를 모셨다가 역시 우지로 달아나, 두 형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수천 명을 얻고, 스스로 일리목 선우(伊利目單于)라 세웠다; 길에서 질지와 만나 교전하였는데, 질지가 그를 죽이고 그 병력 5만여 명을 병합하였다. 질지는 한나라가 군대와 식량을 내어 호한야를 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우지에 머물러 거주하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흉노를 평정할 수 없다고 헤아리고, 마침내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 오손(烏孫)과 가까이하여 그와 연합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소곤미(小昆彌) 오취도(烏就屠)를 만나게 하였다. 오취도는 그의 사자를 죽이고 8천 기병을 보내 질지를 맞이하게 하였다. 질지는 그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병력을 이끌고 오손을 맞아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오갈(烏揭), 견곤(堅昆), 정령(丁令)을 공격하여, 이 세 나라를 아울러 병합하였다. 여러 차례 병력을 보내 오손을 공격하여, 항상 승리하였다. 견곤은 동쪽으로 선우정(單于庭)과 7천 리, 남쪽으로 차사(車師)와 5천 리 떨어져 있었는데, 질지가 그곳에 머물러 도읍을 세웠다.

3월, 혜성이 왕량(王良)과 각도(閣道) 별자리 사이에 나타나 자미궁(紫微宮)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병석에 누워 후사를 부탁할 대신을 가리며, 외척인 시중(侍中) 낙성후(樂陵侯) 사고(史高), 태자태부(太子太傅) 소망지(蕭望之), 소부(少傅) 주감(周堪)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사고를 대사마(大司馬)·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소망지를 전장군(前將軍)·광록훈(光祿勳)으로, 주감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모두 유조(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보좌하고 상서(尚書)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겨울 12월 갑술일(甲戌日)에 황제가 미앙궁(未央宮)에서 붕어하였다.

반고(班固)는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효선황제(孝宣皇帝)의 정치는 상벌이 분명하고 명실(名實)을 종합하여 살폈다. 정사·문학·법리(法理) 방면의 인재들이 모두 그 재능에 정통하였으며, 기교와 공장(工匠)·기계에 이르러서는 원제(元帝)·성제(成帝) 연간에도 그에 미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로써 관리들이 직무에 걸맞고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누렸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침 흉노의 내란을 맞아 멸망의 도리를 밀어붙이고 생존의 이치를 굳건히 하여, 명성과 위엄이 북방을 떨치자 선우(單于)가 도의를 사모하여 머리 조아리며 번신(藩臣)이라 칭하였다. 공업은 조종(祖宗)을 빛내고 은택은 후세에 흘러, 중흥(中興)이라 이를 만하며 덕행이 은 고종(殷高宗)과 주 선왕(周宣王)에 견줄 만하다.

계사일(癸巳日)에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고묘(高廟)를 배알하고, 황태후를 높여 태황태후(太皇太后)로, 황후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