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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기

후량기오

제 5 편

【후량기五】 기원 정묘년(丁卯年) 7월부터 기묘년(己卯年) 9월까지, 총 2년여이다.

균왕 중정명 3년(정축, 서기 917년)

가을 7월 경술일, 전촉주(前蜀主) 왕건(王建)이 상홍지(桑弘志)를 서북면 제일초토사(西北面第一招討使)로, 왕종굉(王宗宏)을 동북면 제이초토사(東北面第二招討使)로 임명하였다. 기미일, 겸중서령(兼中書令) 왕종간(王宗侃)을 동북면 도초토사(東北面都招討使)로, 무신절도사(武信節度使) 유지준(劉知俊)을 서북면 도초토사(西北面都招討使)로 임명하였다.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은 이사원(李嗣源)과 염보(閻寶)의 병력이 너무 적어 거란(契丹)을 막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신미일, 다시 이존심(李存審)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증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전촉(前蜀)의 비룡사(飛龍使) 당문예(唐文扆)가 궁중에서 권력을 잡았고, 장격(張格)이 그에게 의탁하여, 사도(司徒) 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모문석(毛文錫)과 권력을 다투었다. 모문석이 딸을 좌복야(左僕射) 겸 중서시랑(中書侍郎) 동평장사(同平章事) 유전소(庾傳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하여, 추밀원(樞密院)에서 친족들을 모아 놓고 음악을 연주하였으나, 미리 상주하여 보고하지 않았다. 전촉주가 음악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기자, 당문예가 그 틈을 타 참언하여 무고하였다. 8월 경인일, 모문석을 무주사마(茂州司馬)로 강등시키고, 그의 아들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郎) 모순(毛詢)을 유주(維州)로 유배 보내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모문석의 동생 한림학사(翰林學士) 모문안(毛文晏)을 형경현위(榮經縣尉)로 강등시켰다. 유전소는 파직되어 공부상서(工部尚書)로 임명되었다.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유응적(庾凝績)을 임시로 판내추밀원사(判內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 유응적은 유전소의 같은 고조부의 종형제(從兄弟)였다.

계사일, 청해(清海)·건무(建武) 절도사 유암(劉岩)이 번우(番禺)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월(大越)이라 하고, 대사면(大赦天下)을 실시하며, 연호를 건형(乾亨)으로 고쳤다. 양(梁)나라 사자 조광예(趙光裔)를 병부상서(兵部尚書)로, 절도부사(節度副使) 양동잠(楊洞潛)을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절도판관(節度判官) 이은형(李殷衡)을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삼고, 세 사람 모두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삼묘(三廟)를 세우고, 조부 유안인(劉安仁)을 추존하여 태조문황제(太祖文皇帝)로, 부친 유겸(劉謙)을 대조성무황제(代祖聖武皇帝)로, 형 유은(劉隱)을 열종양황제(烈宗襄皇帝)로 하였다. 광주(廣州)를 흥왕부(興王府)로 고쳤다.

거란이 유주(幽州)를 포위한 지 거의 2백 일이 되어, 성 안은 위급하고 곤궁하였다. 이사원, 염보, 이존심이 보병과 기병 합계 7만 명을 이끌고 이주(易州)에서 합류하였다. 이존심이 말하기를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적군은 기병이 많고 아군은 보병이 많으니, 만약 평지에서 마주치면 적군이 1만 기병으로 아군 진영을 유린하여, 아군은 전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사원이 말하기를 「적군은 수레와 군량이 없으나, 아군은 행군할 때 반드시 식량을 짊어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 평지에서 마주치면 적군이 아군의 식량을 약탈하여, 아군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패망할 것입니다. 차라리 산 속으로 은밀히 행군하여 곧장 유주로 가서 성 안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이 낫습니다. 중도에 적군을 만나면 험준한 지형을 점거하여 그들을 막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오일, 이주에서 북쪽으로 행군하여 경자일, 대방령(大房嶺)을 넘어 산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사원이 양자 이종가(李從珂)와 함께 3천 기병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유주에서 60리 떨어진 지점에서 거란 군대와 마주쳤다. 거란군이 놀라 후퇴하자, 진군(晉軍)이 양익(兩翼)으로 그들을 뒤쫓았다. 거란군은 산 위에서 행군하고, 진군은 산골짜기 아래에서 행군하였는데, 골짜기 입구에 이를 때마다 거란군이 그들을 가로막자, 이사원 부자가 힘껏 싸워야만 나아갈 수 있었다. 산 입구에 도달했을 때, 거란군이 1만여 기병으로 앞을 막자, 장수와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이사원이 1백여 기병을 이끌고 먼저 나아가, 투구를 벗고 채찍을 휘두르며 거란어로 거란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까닭 없이 우리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진왕(晉王)이 나에게 명하여 백만 대군을 이끌고 서루(西樓)를 곧장 공격하여, 너희 종족을 섬멸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힘껏 돌진하여, 세 차례나 적진에 뚫고 들어가 한 명의 거란 추장을 참수하였다. 뒤따르던 군대가 일제히 나아가자, 거란군은 물러났고, 진군은 비로소 산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존심이 보병들에게 명하여 나무를 베어 녹각(鹿角)을 만들게 하고, 각자 한 가지씩 손에 들게 하여, 멈출 때마다 목책을 세우게 하였다. 거란 기병이 목책 주위를 돌자, 목책 안에서 만발의 쇠뇌 화살을 쏘아 그들을 맞추니, 날아가는 화살이 하늘을 가리었고, 거란의 사람과 말이 죽고 다쳐 길을 막았다. 유주에 거의 도착했을 때, 거란군이 진을 펴고 그들을 기다렸다. 이존심이 보병들에게 명하여 그들 뒤에 진을 치게 하고, 행동하지 말라고 경계한 뒤, 먼저 지친 병사들에게 땔나무를 끌고 가서 불을 붙이며 나아가게 하니,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어, 거란군이 그들의 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싸움을 걸었고, 이존심이 후진(後陣) 병사들을 재촉하여 틈을 타 공격하게 하니, 거란군이 크게 패하여, 무리를 거두어 북산(北山) 쪽으로 달아났고, 버린 수레와 장막, 갑옷과 병기, 양과 말이 산과 들에 가득하였다. 진군이 추격하여 포로로 잡고 목을 벤 자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신축일, 이사원 등이 유주에 들어가니, 주덕위(周德威)가 그들을 보고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거란이 노문진(盧文進)을 유주 유후(幽州留後)로 삼았다가, 후에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로 삼았으며, 노문진은 항상 평주(平州)에 주둔하며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晋王이 진양으로 돌아왔다.晋王은 해마다 출정하여 모든 군부 정무를 감군사 장승업에게 일임했다. 장승업은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독려하며, 돈과 곡식을 저축하고, 병기와 군마를 수집 징발하며, 조세를 징수하고 법령을 집행할 때 귀족이나 친척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에 군부城内는 질서가 안정되고 군량 보급이 부족하지 않았다.晋王은 때때로 도박이나 기생에게 상을 주기 위해 돈이 필요했지만, 장승업이 인색하게 주지 않아 돈을 얻을 수 없었다.晋王은 돈고(錢庫)에서 연회를 열고, 그의 아들 이계발이 장승업을 위해 춤추게 한 뒤, 장승업이 보배 띠와 예물로 말을 주었다.晋王은 돈더미를 가리키며 이계발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장승업에게 말했다. “화구(和哥)가 돈이 부족하니, 칠형(七兄)은 돈 한 더미를 그에게 주시오. 띠와 말은 후한 선물이 아니오.” 장승업이 말했다. “낭군(이계발)의 전두(纏頭, 상금)는 모두 저의 봉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돈은 대왕께서 병사를 기르기 위한 것이니, 감히 공물을 사사로운 선물로 쓸 수 없습니다.”晋王이 불쾌해하며 술김에 그를 모욕하는 말을 하자, 장승업이 화를 내며 말했다. “저는 다만 늙은 환관일 뿐입니다! 자손을 위해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庫)의 돈을 아끼는 것은 대왕께서 패업을 이루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왕께서 직접 가져다 쓰시면 되지, 어찌 저에게 묻겠습니까! 다만 재물이 다하고 백성이 흩어져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晋王이 크게 노하여 이소영을 돌아보며 칼을 요구했다. 장승업이 일어나晋王의 옷을 붙잡고 울며 말했다. “저는 선왕의 임종 명령을 받아, 맹세코 나라를 위해 변주 도적(후량)을 주멸하려 했습니다. 만약 고(庫) 재물을 아끼다가 대왕의 손에 죽는다면, 저는 땅속에서 선왕을 뵈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늘 바로 대왕 앞에서 죽음을 청합니다!” 엄보가 곁에서 장승업의 손을 잡아 물러나게 하려 했으나, 장승업은 힘껏 주먹을 휘둘러 엄보를 땅에 쓰러뜨리며 꾸짖었다. “엄보, 너는 주온의 당파로서 진(晉)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충성을 다해 보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첨으로 용납받으려 하느냐!” 조태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晋王을 부르자,晋王은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려 장승업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제가 술에 취해 예를 잃고 칠형(七兄)을 범했으니, 반드시 태부인에게 죄를 얻을 것입니다. 칠형께서 저를 위해 몇 잔 드셔서 제 잘못을 나누어 주십시오.”晋王이 네 잔을 연거푸 마셨으나, 장승업은 끝내 마시지 않았다.晋王이 궁으로 들어가자, 태부인이 사람을 보내 장승업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어린 아들이 특진(特進, 장승업을 높여 부른 말)을 모독했으니, 방금 이미 매질했습니다.” 다음 날, 태부인과晋王이 함께 장승업의 집으로 가서 사과했다. 얼마 후, 조서에 따라 장승업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좌위상장군·연국공(燕國公)으로 임명했다. 장승업은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평생토록 당나라 관직(감군사 등 원래 직책)만 칭했다. 장기(掌書記) 노질(盧質)은 술을 좋아하고 경박하며 오만하여, 일찍이晋王의 여러 동생들을 돼지나 개라고 부른 적이 있어晋王이 원한을 품었다. 장승업은 그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기회를 틈타 아뢰었다. “노질이 여러 번 무례하오니, 대왕을 위해 그를 죽이게 해 주십시오.”晋王이 말했다. “나는 지금 현사를 초빙하여 공업(功業)을 이루려 하는데, 칠형(七兄)이 어찌 이렇게 지나친 말을 하는가!” 장승업이 일어나 축하하며 말했다. “대왕께서 이와 같으시니, 어찌 천하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노질은 이로 인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晋王의 원비(元妃)는 위국 한부인(衛國韓夫人)이었고, 다음 비는 연국 이부인(燕國伊夫人)이었으며, 그다음은 위국 유부인(魏國劉夫人)이었다. 유부인이 가장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성안(成安) 사람으로 의술과 점술을 업으로 삼았다. 유부인이 어렸을 때,晋將 원건풍(袁建豐)이 그를 약탈하여 왕궁에 들였고, 성격이 교활하고 흉악하며 음란하고 질투가 심했다. 그가 위주(魏州)에서晋王을 따를 때, 아버지가 그가 귀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위주 궁전에 찾아와 알현을 청했다.晋王이 원건풍을 불러 확인하게 하자, 원건풍이 말했다. “당초 부인을 얻었을 때, 누런 수염의 노인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사람입니다.”晋王이 이 말을 유부인에게 전하자, 유부인은 마침 다른 부인들과 총애를 다투며 문벌의 높고 낮음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고, 자신의 가문이 미천함을 부끄러워하여 크게 노하며 말했다. “첩이 집을 떠날 때 대략 기억하는 바가 있습니다. 첩의 아버지는 불행히도 난병(亂兵) 중에 죽었고, 제가 시체를 지키며 울다가 떠났습니다. 지금 어찌 시골 늙은이가 와서 감히 이곳에 이르렀습니까!” 명령하여 궁문에서 유 노인을 매질하게 했다.

월왕(越王) 유암(劉岩)이 객성사(客省使) 유당(劉瑭)을 오(吳)나라에 보내어, 제위에 오른 것을 알리고, 또한 오왕(吳王) 양융연(楊隆演)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윤월 무신일(閏月戊申日), 전촉주(前蜀主)가 판내추밀원(判內樞密院) 유응적(庾凝績)을 이부상서(吏部尚書)·내추밀사(內樞密使)로 임명했다.

11월 초하루 병자일(丙子日), 동지(冬至)였다. 전촉주(前蜀主)가 원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晋王이 황하가 얼어붙어 합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병사(兵事)를 일으켰으나, 한 줄기 강 때문에 건너지 못했는데, 지금 강물이 스스로 얼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 급히 위주(魏州)로 달려갔다.

전촉주가 유지준(劉知俊)을 도초토사(都招討使)로 임명했으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오랜 공신들이라 대부분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또한 그를 시기하여 전공이 없었다. 당문엄(唐文扆)이 여러 번 그를 비방했고, 전촉주 또한 그의 재능을 꺼려하여 일찍이 측근에게 말했다. “내가 늙었으니, 유지준은 너희 같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12월 신해일(辛亥日), 유지준을 체포하여, 모반했다고 칭하고 탄시(炭市)에서 참수했다.

계축일(癸丑日), 전촉이 대사면을 하고, 다음 해 연호를 광천(光天)으로 고쳤다.

임술일(壬戌日), 장종석(張宗奭)을 천하병마부원수(天下兵馬副元帥)로 임명했다.

후량주(後梁主)가 경주(慶州) 평정의 공을 논하여, 정묘일(丁卯日), 좌룡호통군(左龍虎統軍) 하괴(賀瑰)를 선의절도사(宣義節度使)·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고, 얼마 후 다시 북면행영초토사(北面行營招討使)로 임명했다.

무진일(戊辰日),晋王이 조성(朝城)에서 사냥했다. 이날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晋王이 황하의 얼음이 이미 단단해진 것을 살피고,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점차 강을 건넜다. 후량의 3000명 갑사(甲士)가 양유성(楊劉城)을 지키고 있었고, 강을 따라 수십 리에 걸쳐 목책(柵欄)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晋王이 맹렬히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이어 양유성(楊劉城)을 공격하여, 보병을 시켜 사슴뿔(鹿角, 방어용 목책)을 베고, 갈대를 지어 해자(壕溝)를 메우게 하여 사방에서 공격하여 당일 함락시키고, 수장(守將) 안언지(安彥之)를 사로잡았다.

앞서, 조용사(租庸使)·호부상서(戶部尚書) 조암(趙岩)이 후량주(後梁主)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아직 남교(南郊)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이것이 번후(藩侯)와 다를 바 없어 사방에서 가볍게 여긴다고 합니다. 청컨대 폐하께서 서도(西都) 낙양(洛陽)으로 가서 교사(郊祀)를 거행하시고, 아울러 선릉(宣陵)에 배알(拜謁)하소서.” 경상(敬翔)이 간언했다. “유류(劉鎦)가 실패한 이후로 공사(公私)가 모두 곤핍하고 인심이 두려워 불안합니다. 지금 원구(圜丘) 대례를 거행하려면 반드시 상사를 베풀어야 하니, 이는 헛된 명예를 탐하다가 실제 폐해를 입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한 적이 황하 가까이에 있어 폐하의 거가(車駕)를 어찌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북방이 평정된 후에 근본에 보답해도 늦지 않습니다.” 후량주가 듣지 않고, 기사일(己巳日, 18일), 낙양(洛陽)으로 가서 거가(車駕)와 예복을 점검하고, 궁전을 장식하여 교사(郊祀) 날짜를 정했으나, 양유(楊劉)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에서는 요언(謠言)이 진군(晉軍)이 이미 대량(大梁)에 들어와 사수(汜水)를 지키고 있다고 퍼져, 따르는 관원들이 모두 각자 집을 걱정하며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후량주가 두려워하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내 교사를 취소하고 대량(大梁)으로 돌아갔다.

갑술일(甲戌日, 23일), 하남윤(河南尹) 장종석(張宗奭)을 서도유수(西都留守)로 임명했다.

이 해에, 민왕(閩王) 왕심지(王審知)가 그의 아들 아내도지휘사(牙內都指揮使) 왕연균(王延鈞)을 위해 월주(越主) 유암(劉岩)의 딸을 맞이했다.

균왕중(均王中) 정명(貞明) 4년(무인년, 서기 918년)

봄, 정월, 을해 초하루(乙亥朔日, 1일), 촉(蜀)에서 대사면하고, 국호를 다시 촉(蜀)으로 고쳤다.

후량 황제가 대량에 도착하자, 진군이 침략하여 약탈하며 운주와 복주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경상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국가가 여러 해 연속 군대를 잃고 강토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계시면서 폐하와 큰일을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가까이亲近하는 사람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패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선제께서 생존하실 때에는 하북의 땅을 차지하시고 호걸 장수들을 친히 부리셨지만,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적이 운주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는 오히려 유의하지 않으십니다. 신이 듣건대 이아자가 즉위한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우며 몸소 화살과 돌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적이 없었고, 최근 양류를 공격할 때에는 친히 땔나무를 지고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한 번에 북을 울려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유아하고 글을 지키며 편안히 지내시면서 하류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막게 하시고 적을 물리치길 바라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노성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별도로 기이한 계책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심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둔하고 겁이 많지만 국가의 큰 은혜를 입었사오니, 폐하께서 만약 인재가 부족하시다면 신이 변경에서 힘을 보태기를 청합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조암과 장귀패 등이 경상이 원망을 품고 있다고 말하여, 후량 황제는 결국 채택하지 않았다.

오나라가 우도압아 왕기를 건주행영도지휘사로 삼고, 홍·무·원·길 네 주의 군사를 이끌고 담전파를 공격하게 했다. 엄가구가 후한 이익으로 감석 일대의 물에 능숙한 장인들을 모집했기 때문에, 오병이 갑자기 건주 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야 건주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촉나라 태자 왕연이 주색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즐겼다. 촉주가 일찍이 협성을 지나다가 태자와 여러 왕들이 닭싸움과 격구를 하며 떠들썩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백전을 겪으며 기업을 세웠는데, 이 사람들이 지킬 수 있겠는가?" 이에 장격을 싫어했으나, 서현비가 궁 안에서 주도하여 결국 그를 제거하지 못했다. 신왕 왕종걸이 재주와 지략이 있어 여러 차례 시정을 진언하자, 촉주가 그를 현명하다 여겨 태자를 폐하고 그를 세울 뜻이 있었다. 2월 계해(20일), 왕종걸이 갑자기 죽자, 촉주가 매우 의심했다.

하양절도사 겸 북면행영배진사 사언장이 수만 군사를 이끌고 양류성을 공격했다. 갑자(21일), 진왕이 위주에서 경기병을 이끌고 황하 가에 이르렀다. 사언장이 영채를 쌓아 스스로를 굳게 하고 황하를 터뜨려 물이 수 리에 걸쳐 넘치게 하여 진병을 막았고, 진병이 나아갈 수 없었다. 사언장은 허주 사람이다. 안언의 흩어진 병사들이 많이 연주와 복주의 산골짜기에 모여 도적떼가 되어 두 나라의 성패를 관망하였는데, 진왕이 그들을 모집하자 많은 이들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기해(26일), 촉주가 동면초토사 왕종감을 동·서양로제군도통으로 임명했다.

3월, 오월왕 전류가 비로소 원수부를 세우고 관속을 설치했다.

여름 4월, 계묘 삭(초하루), 촉주가 아들 왕종평을 충왕으로, 왕종특을 자왕으로 봉했다.

기왕이 또 사자를 보내 촉나라에 화친을 청했다.

기유(7일), 이부시랑 소경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임명했다.

보대절도사 고만금이 죽었다. 계해(21일), 충의절도사 고만흥을 겸보대절도사로 삼아 부주와 연주를 함께 진수하게 했다.

사공 겸 문하시랑 동평장사 조광봉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기사(27일), 사공의 관직으로 치사했다. 촉주가 영평 말년부터 병을 앓아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북면행영초토사 겸 중서령 왕종필이 침착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5월에 그를 소환하여 마보도지휘사로 임명했다. 을해(3일), 대신들을 침전으로 불러 말했다: "태자는 인자하고 약하여 내가 여러 공의 청을 어기고 차례를 넘어 그를 세울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큰 업을 감당하지 못하면 별궁에 안치하고, 그를 죽이지 않길 바란다. 오직 왕씨 자제 중에서 여러 공이 선택하여 보좌하라. 서비의 형제들은 그들의 녹봉과 직위를 후하게 대우할 뿐, 절대로 병권을 잡거나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의 종족을 보전하라."

내비룡사 당문의가 오랫동안 금병을 관장하며 기밀에 참여하여 여러 대신들을 제거하려 하고, 사람을 시켜 궁문을 지키게 했다. 왕종필 등 30여 명이 매일 조당에 이르렀으나 들어가 볼 수 없었고, 당문의가 여러 차례 촉주의 명령으로 위로하고 달랬으며, 촉주가 죽기만 하면 발난하려 했다. 그의 동당 내황성사 반재영을 시켜 밖의 일을 정탐하게 했는데, 반재영이 그의 음모를 왕종필 등에게 알렸다. 왕종필 등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당문의의 죄상을 진술하고, 천책부장서기 최연창을 임시로 판육군사로 삼고 태자를 불러 궁중에서 병을 간호하게 했다. 병자(4일), 당문의를 미주자사로 강등했다. 한림학사승지 왕보혜가 당문의에게 붙은 죄로 관작이 삭탈되고 여주로 유배되었다. 반재영은 반항의 아들이다. 병신(24일), 촉주가 조서를 내려, 조정 내외의 재부, 중서성의 임명, 각 사의 형옥 안문을 전적으로 경응적에게 위임하고, 도성 및 행영의 군사 일은 선휘남원사 송광사에게 위임했다. 정유(25일), 당문의의 관작을 삭탈하고 아주로 유배했다. 신축(29일), 송광사를 내추밀사로 삼고, 겸중서령 왕종필, 왕종요, 왕종완, 왕종기와 함께 유조를 받들어 보정하게 했다. 당초, 촉주가 비록 당나라 제도에 따라 추밀사를 설치하여 전적으로 선비를 임용했으나, 당문의가 죄를 얻자 촉주는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허주 시절의 옛 친구들이어서 그들이 어린 주인을 위해 힘쓰지 않을까 염려하여 송광사로 그들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부터 환관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6월, 임인 삭(초하루), 촉주가 세상을 떠났다. 계묘(2일), 태자가 즉위했다. 서현비를 태후로, 서숙비를 태비로 높였다. 송광사로 판육군제위사로 삼았다. 을묘(14일), 당문의와 왕보혜를 죽였다. 서면초토부사 왕종욱을 시켜 진주에서 천웅절도사 당문예를 죽이고, 좌보승군사 겸 영우가사 당도숭의 관직을 파면했다.

오나라 국내외 마보도군사(馬步都軍使)이며 창화절도사(昌化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인 서지훈(徐知訓)은 교만하고 오만하며 음란하고 포악하였다. 무위절도사(威武節度使) 지부주(知撫州) 이덕성(李德誠)에게 수십 명의 집안 기생이 있었는데, 서지훈이 그것을 원하자 이덕성은 사자를 보내 사양하며 말했다. "집에 있는 모든 이들은 나이가 많거나 혹은 자녀가 있어 귀인을 모시기에 부족하오니, 마땅히 다시 젊고 아름다운 이를 찾아 드리겠소이다." 서지훈이 노하여 사자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이덕성을 죽이고, 그의 아내와 함께 빼앗으리라!" 서지훈은 오왕(吳王)을 업신여기고 모욕하여 더 이상 군신(君臣)의 예가 없었다. 일찍이 오왕과 함께 연극을 하면서, 자신은 참군(參軍)이 되고 오왕은 창골(蒼鶻)이 되게 하여 상투를 묶고 헌옷을 입고 갓을 들고 따르게 하였다. 또 일찍이 탁하(濁河)에서 배를 타고 놀 때, 오왕이 먼저 일어나자 서지훈이 새총으로 그를 쏘았다. 또 일찍이 선지사(禪智寺)에서 꽃을 감상할 때, 서지훈이 술에 취해 패역하고 오만하게 굴어 오왕이 두려워 울었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리가 떨릴 정도로 두려워하였다. 좌우 시종이 오왕을 부축하여 배에 오르게 하였는데, 서지훈이 가벼운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철퇴로 오왕의 친신 관리들을 때려죽였다. 장수와 좌료(佐僚)들은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고, 그의 아버지 서온(徐溫)도 알지 못하였다. 서지훈과 그의 동생 서지순(徐知詢)은 모두 서지고(徐知誥)에게 예의가 없었고, 오직 작은 동생 서지간(徐知諫)만이 형님처럼 그를 예우하였다. 서지훈이 일찍이 형제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 서지고가 오지 않자, 서지훈이 노하여 말했다. "밥을 빌어먹는 놈이 술을 마시기 싫다면, 칼을 맞고 싶은 것이냐?" 또 일찍이 서지고와 술을 마시면서 복병을 매복시켜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서지간이 서지고의 발을 밟자 서지고는 거짓 일어나 뒷간에 가는 척하며 도망갔다. 서지훈이 칼을 좌우 신하인 조언능(刁彦能)에게 주며 쫓아가 서지고를 죽이라 하였다. 조언능이 말을 타고 반쯤 쫓아가다가 칼을 들어 서지고에게 보여 주고는 돌아와, 미치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동평장사 제도부도통(諸道副都統) 주근(朱瑾)이 집안 기생을 보내 서지훈에게 문안을 드리게 하였는데, 서지훈이 강제로 그를 간음하려 하자 주근이 이미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서지훈은 주근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것을 싫어하여, 사주(泗州)에 정회군(靜淮軍)을 설치하고 주근을 정회절도사로 옮겨 임명하자, 주근은 더욱 그를 원망하였으나 겉으로는 서지훈을 더욱 공손하게 섬겼다. 주근에게는 사랑하는 말 한 필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장막 속에 보관하고 여름에는 사장(紗帳) 속에 보관하였다. 또 총애하는 기생 한 명이 절색이었다. 서지훈이 주근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하자, 주근이 술자리를 베풀고 직접 술잔을 들어 바치며, 그 총애하는 기생을 내보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사랑하는 말을 장수(壽禮)로 바치니 서지훈이 매우 기뻐하였다. 주근이 이에 그를 중당(中堂)으로 초대하고, 문 안에 장사를 매복시킨 후, 그의 아내 도씨(陶氏)를 내보내 절하게 하였다. 서지훈이 답례를 하자, 주근이 홀(笏)로 뒤에서 그를 쳐서 쓰러뜨리고 장사를 불러내어 그를 죽였다. 주근은 먼저 두 필의 사나운 말을 낭하(廊下)에 매어두었다가, 서지훈을 도모하려 할 때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고삐를 풀어 말을 놓게 하니, 말들이 서로 발로 차고 물어뜯으며 소리가 매우 요란하여, 밖에 있던 사람들은 듣지 못하였다. 주근이 서지훈의 머리를 들고 나오자, 서지훈의 수백 명 수행원들은 모두 사방으로 도망쳤다. 주근이 말을 타고 부중(府中)으로 달려 들어가 서지훈의 머리를 오왕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가 이미 대왕을 위해 화근을 제거하였소이다!" 오왕이 두려워하여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말했다. "외숙이 스스로 한 일이니, 나는 감히 알지 못하겠소!" 주근이 말했다. "계집 같은 자는 큰일을 이룰 수 없구나!" 서지훈의 머리를 기둥에 던지고, 칼을 빼들고 나가려 하였으나, 자성사(子城使) 적건(翟虔) 등이 이미 부문(府門)을 닫고 군사를 이끌어 그를 토벌하자, 이에 뒤로 담을 넘다가 떨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뒤쫓는 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만인을 위해 해를 제거하고, 한 사람이 화를 짊어지겠다." 하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서지고가 윤주(潤州)에서 반란 소식을 듣고 송제구(宋齊丘)의 계책을 따라 그날로 병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넜다. 주근이 이미 죽었으므로, 이에 군부(軍府)를 안정시키고 진정시켰다. 당시 서온의 아들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서온은 서지고로 하여금 서지훈을 대신하여 오나라의 조정을 주관하게 하고, 주근의 시체를 뇌당(雷塘)에 수장시키고 그의 일족을 주멸하였다. 주근이 서지훈을 죽일 때, 태녕절도사(泰寧節度使) 미지성(米志誠)이 열 명 남짓의 기병을 이끌고 주근의 소재를 알아보러 갔다가, 주근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선유사(宣諭使) 이엄(李儼)은 생활이 빈궁하여 해릉(海陵)에 기거하고 있었다. 서온이 그가 주근과 모의했다고 의심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엄가구(嚴可求)는 미지성이 명령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거짓으로 원주(袁州)에서 초군(楚軍)을 크게 패배시켰다고 꾸미고,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조정에 들어와 축하하게 한 후, 극문(戟門)에 장사를 매복시켜 미지성을 붙잡아 죽이고 그의 여러 아들들까지 함께 죽였다.

임술일(壬戌日)에 진왕(晉王)이 위주(魏州)에서 양류(楊劉)로 가서 군사를 위문하고, 직접 배를 타고 황하의 수심을 측량하니, 물 깊이가 창 자루까지 차지 않았다. 진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양군(梁軍)은 싸울 의지가 없고, 오직 물세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것이니, 우리는 물을 건너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갑자일(甲子日)에 진왕이 친병(親兵)을 이끌고 먼저 건너고, 각 군이 그 뒤를 따라, 갑옷을 걷어 올리고 창을 옆에 끼고 진을 결성하여 나아갔다. 이날 수위가 낮아져 물 깊이가 겨우 무릎까지였다. 광국절도사(匡國節度使) 북면행영배진사(北面行營排陣使) 사언장(謝彦章)이 군사를 이끌고 강가에서 저항하였으나, 진군이 나아갈 수 없자 조금 후퇴하였고, 양군이 따라 추격하였다. 강 한가운데 이르러 진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다시 나아가자, 사언장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후퇴하여 언덕에 올랐다. 진군이 형세를 타고 추격하여 양군이 크게 패배하였고,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황하물이 붉게 물들었고, 사언장은 겨우 몸만 면하였다. 이날 진군은 곧 황하 연안의 네 개 영채를 함락시켰다.

촉나라의 당문의(唐文扆)가 죽은 후, 태부(太傅) 문하시랑(門下侍郎) 동평장사(同平章事) 장격(張格)이 마음속으로 불안해하였다. 어떤 이가 장격에게 병을 핑계로 명령을 기다리라고 권하였고, 예부상서(禮部尚書) 양빈(楊玢)은 자신의 세력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장격에게 말했다. "그대는 황제를 옹립한 큰 공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오일(庚午日)에 장격을 무주자사(茂州刺史)로, 양빈을 영경현위(榮經縣尉)로 강등시켰다. 이부시랑(吏部侍郎) 허적(許寂), 호부시랑(戶部侍郎) 반교(潘嶠)는 모두 장격의 당여(黨與)라는 이유로 관직이 강등되었다. 장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유주사호(維州司戶)로 강등되었고, 유응적(庾凝績)이 또 상주하여 장격을 합수진(合水鎮)으로 옮기고, 무주자사 고승영(顧承郾)에게 명하여 은밀히 장격의 사사로운 일을 수집하게 하였다. 왕종감(王宗侃)의 아내가 장격과 성이 같아 그를 보전하려 하여, 고승영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대의 아들에게 훈계하여, 남의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오. 장차 죄를 그대에게 돌릴 것이오." 고승영이 이를 따랐다. 유응적이 크게 노하여, 공무를 빙자하여 고승영에게 죄를 씌웠다.

가을, 7월, 임신 초하루(壬申朔日)에 촉주(蜀主)가 겸중서령(兼中書令) 왕종필(王宗弼)을 거록왕(巨鹿王)으로, 왕종요(王宗瑤)를 임치왕(臨淄王)으로, 왕종완(王宗綰)을 임조왕(臨洮王)으로, 왕종파(王宗播)를 임영왕(臨潁王)으로, 왕종예(王宗裔), 왕종기(王宗夔) 및 겸시중(兼侍中) 왕종암(王宗黯)을 모두 낭야군왕(琅邪郡王)으로 봉하였다. 갑술일(甲戌日)에 왕종감(王宗侃)을 낙안왕(樂安王)으로 봉하였다. 병자일(丙子日)에 병부상서(兵部尚書) 유전소(庾傳素)를 태자소보(太子少保) 겸 중서시랑(中書侍郎)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촉주가 직접 정사를 처리하지 않아, 조정 안팎의 승진과 임명은 모두 왕종필에게서 나왔다. 왕종필은 뇌물을 받고 사사로움을 많이 행하여, 위에서 아래로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송광사(宋光嗣)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아첨을 잘하여, 촉주가 총애하고 중용하였으나, 촉나라는 이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오나라 서온이 광릉에 입조하여, 장수들이 모두 주근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의심하여 대대적으로 주살하려 하였다. 서지고와 엄가구가 서지훈의 죄악과 화란을 초래한 원인을 상세히 진술하자, 서온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이에 명하여 뢰당에서 주근의 시신을 건져내어 안장하게 하고, 서지훈의 장수들 중 보좌하며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죄를 추궁하여 모두 처벌하였다. 오직 조언능만이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므로 서온이 그를 상주었다. 무술일, 서지고를 회남절도행군부사, 내외마보도군부사, 통판부사로 임명하고 겸하여 강주단련사로 삼았다. 서지간을 임명하여 윤주단련사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서온은 금릉으로 돌아가 진수하며 오나라 조정의 대강만을 총괄하고, 나머지 모든 정무는 서지고가 결단하게 하였다. 서지고는 서지훈의 행태를 완전히 바꾸어, 오왕을 지극히 공손하게 모시고, 사대부를 접대할 때는 겸허하게 하며, 부하를 통솔할 때는 관대하게 하고, 자신을 단속할 때는 검소하게 하였다. 오왕의 명령으로써 천우 13년 이전의 미납 세금을 전부 면제하고, 나머지 세금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납부하게 하였다. 현명한 이를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를 숙청하고, 청탁을 차단하였다. 이에 사인과 백성이 한결같이 마음을 기울였고, 늙은 장수와 사나운 무리라도 심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제구를 주요 모사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오나라에는 정구전이 있었고, 또 논밭 면적에 따라 돈을 징수하였는데, 돈의 가치는 높고 물건의 값은 낮아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송제구가 서지고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돈은 밭 갈고 누에 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백성들에게 돈을 내게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근본을 버리고 말업을 쫓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청컨대 정구전을 면제하고, 나머지 세금은 모두 곡식과 베·비단으로 납부하게 하되, 가는 비단 한 필의 값이 천 전인 것은 삼십 전의 세금으로 계산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조정의 연간 손실이 억 단위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송제구가 말하기를 “어찌 백성이 부유한데 나라가 가난한 경우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지고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강회 사이에 황폐했던 땅이 모두 개간되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들에 가득하여 나라가 이로 인해 부강해졌다. 서지고가 송제구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서온이 그를 싫어하여 전직, 군판관으로 임명하였다. 서지고는 자주 밤에 송제구를 수정으로 데려가 사람을 물리치고 이야기하곤 하였는데, 종종 한밤중까지 이르렀고, 때로는 높은 당에 올라 모든 병풍을 치우고 오직 큰 화로 하나만을 놓아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말없이 쇠젓가락으로 재 위에 글자를 쓰고는 즉시 국자로 문질러 없앴으므로, 그들이 모의한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었다.

건주는 험준하고 견고하여 오군이 공격했으나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고, 군중에 심한 전염병이 돌아 왕기마저 병들자, 오나라에서 진남절도사 유신을 건주행영초토사로 임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기가 죽었다. 담전파가 오월, 민, 초에 구원을 청하였다. 오월왕 전류는 통군사 전전구를 서남면행영응원사로 삼아 병사 2만을 이끌고 신주를 공격하게 하였고, 초나라 장수 장가구는 병사 1만을 이끌고 고정에 주둔하였으며, 민나라 병사는 우도에 주둔하여 그를 구원하였다. 신주의 군사는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하여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오월군이 신주성을 포위하였다. 자사 주본은 성문을 열고 문 안에 빈 장막을 치고, 속관들을 불러 누각에 올라 풍악을 울리며 술을 마시니, 화살이 빗발치듯 하였으나 그는 편안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오월군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한밤중에 포위를 풀고 떠났다. 오나라는 전 서주자사 진장을 동남면응원초토사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소주와 호주를 침략하게 하였고, 전전구는 신주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주에 주둔하였다. 진왕이 밀사를 보내 비단 편지와 함께 오나라에 병사를 내기로 약속하였으나, 오나라 사람들은 건주 전쟁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진왕이 크게 침략할 계획을 세우자, 주덕위는 유주 보병과 기병 3만을, 이존신은 창경 보병과 기병 1만을, 이사원은 형명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렸고, 왕처직은 장수를 보내 역정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인주, 승주, 운주, 울주, 신주, 무주 등 각 부락의 해, 거란, 실위, 토욕혼도 모두 병사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8월에 하동과 위박의 군대를 합쳐 위주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촉나라의 여러 친왕들은 모두 군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팽왕 왕종정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친왕이 군사를 관장하는 것은 화란의 근원입니다. 지금 군주는 어리고 신하는 강하며 참언과 이간질이 장차 일어나려 하는데, 갑옷을 수선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우리 같은 이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끝내 군사 직책을 사양하였고, 촉주가 이를 허락하자, 그는 서재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오직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태녕절도사 장만진은 경박하고 험악하며 일을 좋아하였다. 당시 총애받는 간신배들이 권력을 잡아 자주 장만진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는데, 장만진은 진나라 군대가 장차 출병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유일에 사자를 보내 진나라에 귀부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박주단련사 유심을 연주안무치치사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갑자일, 촉나라 순덕황후가 세상을 떠났다.

을축일, 촉주가 내급사 왕정소, 구양황, 이주로, 송광보, 송승온, 전노주 등을 장군 및 군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정사에 간여하며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잔학하여 촉나라의 큰 근심이 되었다. 주상이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촉주는 듣지 않았다. 구양황은 자기가 사는 곳이 좁은 것을 싫어하여, 밤에 바람을 타고 불을 질러 서쪽 이웃의 군영 수백 칸을 태워버리고, 다음 날 아침에 장인들을 불러 모아 자기 집을 넓혔으나, 촉주도 추궁하지 않았다. 송광보는 송광사의 사촌 동생이다.

진왕이 위주에서 양류로 가서 병사를 이끌고 운주와 복주를 약탈한 후 돌아와, 황하를 따라 올라가 마가나루에 주둔하였다. 하괴와 사언장이 양나라 병사를 이끌고 복주 북쪽의 행대촌에 주둔하여,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하며 싸우지 않았다. 진왕은 가까이 가서 직접 경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에 접근하여 도전하기를 좋아하여 여러 번 위험하고 곤란한 지경에 빠졌으나, 오직 이소영이 힘껏 싸우며 곁에서 호위해 주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왕 왕용과 왕처직이 모두 사자를 보내 편지를 보내며 말하기를 “백성의 목숨은 대왕에게 달려 있고, 본조의 중흥도 대왕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이처럼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왕이 웃으며 사자에게 말하기를 “천하를 평정하는 자가 어찌 백 번의 싸움을 겪지 않고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오직 장막과 방 안에 깊이 들어앉아 스스로를 편안히 하고 우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어느 날, 진왕이 장차 출영하려 하자, 도영사 이존신이 그의 말고삐를 붙잡고 울며 간언하기를 “대왕은 마땅히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를 중하게 여기소서. 저 선봉에 서서 성을 돌파하고 진지를 돌진하는 것은 장사들의 임무이니, 저 이존신 같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지, 대왕의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이에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왔다. 후일, 이존신이 없는 틈을 타서 그는 채찍질하며 급히 출영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남의 놀이를 방해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진왕이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양나라 군영에 도착하자, 사언장이 제방 아래에 정예병 5천을 매복시켰다. 진왕이 10여 기병과 함께 제방 위에 올랐는데, 복병이 일어나 공격하여 진왕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였다. 진왕이 그 안에서 힘껏 싸우고, 뒤따르던 기병이 밖에서 공격하여 간신히 포위를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마침 이존신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양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진왕은 이때서야 이존신의 말이 충성심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오나라 유신이 그의 장수 장선 등을 시켜 밤에 병사 3천을 이끌고 고정으로 가서 초나라 장수 장가구를 기습하여 격파하였다. 또 양전 등을 시켜 병사를 이끌고 오월과 민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하자, 두 나라는 초나라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매산만이 소주를 침범하였으나, 초나라 장수 번수가 물리쳤다.

9월 임오일, 촉나라 내추밀사 송광사가 판육군의 직책을 겸중서령 왕종필에게 양보하였고, 촉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오나라 유신이 밤낮으로 맹렬히 건주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 담전파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인질과 재물을 받은 후 군사를 철수시켰다. 서온이 크게 노하여 유신의 사자를 장형에 처하였다. 유신의 아들 유영언이 친병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서온이 유영언에게 병사 3천을 주며 말하기를 “네 아버지는 상류의 지세를 점하고도 적의 열 배 병력을 거느리고서 한 성읍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반이다! 너는 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네 아버지와 함께 모반하여라!”라고 하였다. 또 승주아내지휘사 주경여를 그와 함께 보내며 말하기를 “담전파의 수비병은 모두 농부들로서 굶주리고 곤궁한 지 1년이 넘었고, 그들의 처자식은 성 밖에 있다. 중중 포위가 이미 풀리자 그들은 서로 축하하며 흩어져 갈 것이다. 대군이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모두 도망칠 것이니, 담전파가 지키는 것은 빈 성에 불과하다. 가서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겨울, 11월 임신일, 촉나라는 신무성문효덕명혜황제를 영릉에 안장하고, 묘호를 고조로 하였다.

월왕 유암은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을 실시하며, 국호를 한으로 고쳤다.

유신은 서온의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여 건주를 공격하였다. 선봉 부대가 도착하자마자 건주 군대는 완전히 패주하였고, 담전파는 우도로 도망쳤으나 추격을 받아 붙잡혔다. 오나라는 담전파를 우위위장군으로 임명하고, 겸하여 백승절도사를 맡겼다.

이보다 앞서, 오월왕 전류는 자주 건주를 경유하여 입조하고 공물을 바쳤으나, 이때에 이르러 길이 끊기자 비로소 해로를 통해 등주와 내주를 거쳐 대량에 도착하였다.

처음에 오나라의 서온은 자신의 권력은 막중한데 지위는 낮다고 여겨, 오왕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지금 대왕과 여러 장수들은 모두 절도사이나, 도통이라는 명호가 있을 뿐 서로 통솔하고 제약하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오나라를 세워 제왕이 되어 다스리소서." 오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엄가구는 여러 번 서온에게 차남 서지순이 서지고를 대신하여 오나라 정무를 주관하도록 권유하였고, 서지고는 낙지상과 모의하여 엄가구를 외직으로 초주자사로 좌천시켰다. 엄가구는 임명을 받고 금릉에 도착하여 서온을 알현하고 그에게 권하였다: "우리는 당나라의 정삭을 준행하며 항상 당나라를 부흥시킬 것을 구실로 삼았습니다. 지금 주씨와 이씨가 서로 다투고 있어, 주씨는 날로 쇠약해지고 이씨는 날로 강성해집니다. 만약 이씨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우리가 북쪽을 향해 그에게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먼저 오나라를 세워 민심을 유지하는 것이 낫습니다." 서온은 매우 기뻐하며 다시 엄가구를 유임시켜 총무에 참여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예제를 초안하게 하였다. 서지고는 엄가구가 떠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딸을 엄가구의 아들 엄서에게 시집보냈다.

진왕은 곧바로 대량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양군이 앞을 막고 견고하게 성벽을 지키며 백여 일 동안 나와 싸우지 않았다. 12월 경자 삭일, 진왕이 진군하여 양군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처음에 북면행영초토사 하괴는 보병을 잘 다루었고, 배진사 사언장은 기병을 잘 다루었는데, 하괴는 그가 자신과 명성이 같음을 시기하였다. 하루는 하괴가 사언장과 함께 들에서 군대를 훈련시키다가, 하괴가 한 높은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 목책을 설치할 수 있겠소." 이때에 이르러 진군이 바로 그곳에 목책을 설치하자, 하괴는 사언장이 진군과 은밀히 내통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하괴는 여러 번 교전하려 하며 사언장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온 나라 군대를 우리 두 사람에게 맡기셨으니, 국가 사직이 우리에게 달려 있소. 지금 강적이 압박해 오는데도 우리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고 교전하지 않는 것이 옳겠소!" 사언장이 말하였다: "강적이 핍박해 오니 속전속결이 유리합니다. 지금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으며 나루터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감히 깊이 들어오겠습니까! 만약 가볍게 싸움을 걸었다가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 납니다." 하괴는 더욱 그를 의심하여, 은밀히 황제에게 참언을 올리고, 행영마보도우우후 조주자사 주규와 모의하여, 군사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복병을 매복시켜 사언장과 복주자사 맹심징, 별장 후온욕을 죽이고, 모반으로 보고하였다. 맹심징과 후온욕은 또한 기장 중에서 뛰어난 자들이었다. 정미일, 주규를 광국유후로 임명하고, 계축일에는 다시 평로절도사 겸 행영마보부지휘사로 삼아 그를 포상하였다.

진왕은 사언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들의 장수와 부장이 서로 죽였으니,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괴는 잔혹하고 포악하여 군심을 잃었으니, 내가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도성을 직접 공격한다면, 그들이 어찌 성벽만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않겠는가! 다행히 그들과 싸우게 된다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다." 진왕은 직접 만 기병을 이끌고 대량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주덕위가 말하였다: "양나라 사람들이 상장을 죽였지만 그 군대는 아직 온전합니다. 가벼이 행군하여 전리품을 취하려는 것은 이익을 보기 어렵습니다." 진왕이 따르지 않았다. 무오일, 군중의 노약자들은 모두 위주로 돌아가도록 명하고, 군사를 일으켜 변주로 향하였다. 경신일, 진영을 허물고 진군하니, 군대는 십만이라 칭하였다.

신유일, 촉나라는 다음 해 연호를 건덕으로 고쳤다.

하괴는 진왕이 이미 서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진영을 버리고 그 뒤를 따랐다. 진왕은 위박의 평민 삼만 명을 징발하여 종군하게 하여 진영과 목책을 세우는 노역을 공급하게 하였고, 이르는 곳마다 진영과 목책이 곧바로 세워졌다. 임술일, 호류패에 도착하였다. 계해일 아침, 정찰병이 양군이 뒤에서 따라왔다고 보고하였다. 주덕위가 말하였다: "적군은 밤낮으로 달려와서 진영을 둘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영과 목책은 이미 견고하고, 방어와 비축도 넉넉합니다. 이미 적진 깊숙이 들어왔으니, 행동은 만전을 기해야 하며, 가벼이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은 대량과 매우 가까워서 양병들은 각자 고향을 그리워하며, 마음속에 분개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지략으로 그들을 제압하지 않는다면, 뜻대로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군대를 움직이지 마시고, 제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교란시켜 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그들의 진영은 완성되지 못하고, 취사용 땔감도 준비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피로해진 틈을 타서 한 번에 섬멸할 수 있습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예전에 황하 가에서 적군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는데, 지금 적군이 왔는데도 싸우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어찌 이렇게 겁이 많으냐!" 돌아보며 이존신에게 말하였다: "수레와 보급품을 먼저 출발시키라. 내가 너를 위해 후미를 맡아 적군을 격파하고 나서 떠나겠다!" 곧바로 친위군을 이끌고 먼저 돌격하였다. 주덕위는 어쩔 수 없이 유주병을 이끌고 그를 따르며, 그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어 묻힐 곳이 없게 되었다." 하괴가 진을 펴고 도착하니, 진영이 수십 리에 걸쳐 뻗어 있었다. 진왕은 은창도를 이끌고 적진에 돌진하여, 돌격하고 휩쓸며 참살하여 십여 리를 오갔다. 행영좌향마군도지휘사 정주방어사 왕언장의 군대가 먼저 패하여 서쪽으로 복양으로 도망쳤다. 진군의 수레와 보급품은 진영 서쪽에 있었는데, 양군의 깃발을 보고 놀라 흩어져 유주군의 진영으로 돌진하였고, 유주군도 혼란에 빠져 서로 짓밟았다. 주덕위는 통제할 수 없었고, 부자 모두 전사하였다. 위박절도부사 왕전도 수레와 보급품을 따라가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진군은 더 이상 대열을 갖추지 못했다. 양군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진왕은 높은 언덕을 점거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정오가 되자 군대가 다시 진용을 갖추었다. 호류패 가운데 흙산이 있었는데, 하괴가 군대를 이끌고 그것을 점거하였다. 진왕이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이 산을 얻는 자가 승리할 것이니, 나와 함께 그것을 빼앗자." 곧바로 기병을 이끌고 먼저 산에 올랐고, 이종가와 은창대장 왕건급이 보병을 이끌고 뒤따르니, 양병들은 모두 패하여 산에서 내려왔고, 마침내 이 산을 탈취하였다.

때는 저물녘, 하귀가 산 서쪽에 진을 펼치자 진나라 병사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각 부대가 모두 집결하지 않았으니 병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싸우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천평절도사이자 동남면초토사인 염보가 말하였다: "왕언장의 기병은 이미 복양으로 들어갔고, 산 아래에는 보병만 있습니다. 저물녘이 되어 모두 귀가할 마음을 품고 있으니, 우리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리쳐 그들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적진 깊이 들어오셨고, 측면 군대가 패하였습니다. 만약 또 후퇴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추격당할 것입니다. 아직 집결하지 못한 여러 부대는 양군이 다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승부를 결정짓고 적을 헤아리는 일은 오직 형세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형세를 이미 장악했다면 결단은 망설임에 있지 않습니다. 대왕의 성패는 이 한 전투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힘을 다해 이기지 못한다면, 비록 남은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하삭은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소의절도사 이사소가 말하였다: "적군은 진영이 없고, 해가 저물어 집에 가고자 하니, 정예 기병으로 그들을 괴롭혀 저녁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물러날 때 추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가면, 그들이 돌아가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왕건기가 갑옷을 입고 창을 가로로 잡고 나아가며 말하였다: "적군의 대장은 이미 도망쳤고, 대왕의 기병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지친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마른 나무와 썩은 풀을 꺾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대왕께서는 그저 산에 오르셔서 제가 대왕을 위해 적군을 격파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진왕이 놀라며 말하였다: "그대들이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거의 큰일을 그르칠 뻔했다." 이사소와 왕건기가 기병을 이끌고 큰 소리로 외치며 적진으로 돌진하자, 각 부대가 그 뒤를 따랐고 양군은 크게 패하였다. 원성현령 오경과 귀향현령 호장이 각각 일만 명의 백성을 이끌고 산 아래에서 섶과 풀을 끌며 먼지를 일으키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위세를 도왔다. 양군은 서로 짓밟았고 버려진 갑옷이 산처럼 쌓였으며 죽은 자가 거의 삼만 명에 달했다. 호장은 호증의 증손자이다. 이 날, 양군의 병사 손실은 각각 삼분의 이에 달하여 다시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진왕이 진영으로 돌아와 주덕위 부자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피 울며 말하였다: "나의 좋은 장수를 잃었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주덕위의 아들 유주중군병마사 주광보를 난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이사원과 이종가는 서로 헤어졌는데, 진군이 혼란에 빠져 패배한 것을 보고 진왕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진왕은 이미 북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이사원은 얼음을 밟고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상주로 가려고 하였다. 이 날, 이종가는 진왕을 따라 토산을 점령하였고, 밤에 싸워 모두 공을 세웠다. 갑자일, 진왕이 복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사원은 진군이 승리한 것을 알고 다시 복양으로 와서 진왕을 뵈었는데, 진왕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네가 내가 죽은 줄 알았느냐? 황하를 건너 어디로 간 것이냐!" 이사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진왕은 이종가가 공이 있었으므로 다만 큰 술잔을 내려 벌주로 삼았으나, 이로부터 이사원을 대하는 것이 차츰 박대해졌다.

처음에 거란주의 아우 살랄아발은 북대왕이라 불리며 그의 나라에서 모반을 도모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거란주가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너는 나와 손발과 같거늘, 네가 이런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너를 죽인다면 나와 너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마침내 그를 1년 동안 가둔 후에 풀어주었다. 살랄아발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진나라로 투항하였고, 진왕은 그를 후하게 대우하며 양자로 삼고 자사로 임명하였다. 호류 전투 때, 그의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진군이 덕승도에 도착하자, 왕언장의 패잔병 중 대량으로 도망친 자들이 있어 말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겨서 곧 도착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군 중에 먼저 대량에 도착하여 숙소를 묻는 자가 있었고, 경성은 극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황제는 시민들을 몰아 성을 지키게 하고 또 낙양으로 도망가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그만두었다. 패잔병이 도착한 자는 천 명도 채 되지 않았고, 부상당하여 흩어진 자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한 달여가 지나서야 겨우 군대를 꾸릴 수 있었다.

균왕중정명 5년(기묘년, 919년)

봄 정월, 신사일, 촉주가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였다.

진나라 장수 이존심이 덕승 남북 양안에 황하를 따라 두 개의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진왕은 이존심으로 주덕위를 대신하여 내외번한마보총관으로 삼았다. 진왕은 위주로 돌아와 이사소를 보내 유주군부 사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남한주 유암이 월국부인 마씨를 황후로 세웠는데, 마씨는 마은의 딸이다.

삼월, 병술일, 전촉 북로행영도초초무덕절도사 왕종파 등이 산관에서 기나라를 공격하여 위수를 건너 기나라 장수 맹철산을 격파하였다. 큰비를 만나 군사를 거두었고, 군사를 나누어 흥원과 봉주, 위무성을 지키게 하였다. 무자일, 천웅절도사동평장사 왕종욱이 농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전촉주는 사치하고 방탕하며 절제가 없었고, 매일 태후와 태비와 함께 귀한 신하 집에서 놀고 잔치하며, 또 가까운 군현의 명산을 유람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으며, 쓴 돈을 헤아릴 수 없었다. 궁정교방사 엄욱이 강제로 선비와 백성의 딸을 빼앗아 궁중에 들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궁중에 들어가지 않게 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연이어 승진하여 봉주자사에 이르렀다. 태후와 태비가 각각 명령을 내려 자사, 현령, 녹사참군 등의 관직을 팔았는데, 매번 한 관직이 결원이 되면 여러 사람이 서로 예물을 보내 뇌물을 주었고, 뇌물을 많이 준 사람이 그 관직을 얻었다.

진왕이 스스로 노룡절도사를 겸임하고, 중문사 이소홍을 임명하여 군부 사무를 관장하게 하여 이사소를 대신하였다. 이소홍은 환관으로 본래 성은 마씨였고 진왕이 성명을 하사하였으며, 난주 사무를 관장하는 맹지상과 함께 하동, 위박 중문사가 되었다. 맹지상이 또 교련사 안문 사람 곽숭도를 천거하여 번거로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하였고, 진왕이 그를 중문부사로 임명하였다. 곽숭도는 소탈하고 호방하며 지모가 있고, 일을 만나면 과감히 결단하였으며, 진왕의 총애와 대우가 날로 중대해졌다. 이보다 앞서 중문사 오규와 장건후가 잇달아 죄를 얻었고, 이소홍이 유주로 조정 발령난 후, 맹지상은 화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였고, 진왕은 이에 맹지상을 하동마보도우후로 임명하였으며, 이로부터 곽숭도가 전적으로 기밀 대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후당 조정이 조서를 내려 오월왕 전류에게 대거 회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전류는 절도부사 전관주를 제군도지휘사로 임명하고, 전함 오백 척을 이끌고 동주에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오나라는 서주자사 팽언장과 부장 진분을 보내어 저항하였다.

오나라 서온이 장리와 번진을 이끌고 오왕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오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 사월, 무술삭일, 오왕이 오나라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무의로 고쳤다. 종묘 사직을 세우고 문무 백관을 설치하였으며, 궁전과 예기 문물은 모두 천자의 예를 사용하였다. 금덕으로 토덕을 계승하고 납일은 축일을 사용하였다. 무충왕의 시호를 효무왕으로 고치고 묘호를 태조로 하였으며, 위왕을 경왕으로 하고 어머니를 태비로 높였다. 서온을 대승상, 도독중외제군사, 제도도통, 진해, 영국절도사, 수태위 겸 중서령, 동해군왕으로 임명하고, 서지고를 좌복야, 참정사 겸 지내외제군사로 임명하고 여전히 강주단련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양부좌사마 왕령모를 내추밀사로, 영전부사 엄가구를 문하시랑으로, 염철판관 낙지상을 중서시랑으로, 전중서사인 노택을 이부상서 겸 태상경으로, 장기은 문한학사로, 관역순관 유공을 지제고로, 전가부원외랑 양초를 급사중으로 임명하였다. 노택은 예천 사람이고, 양초는 양경지의 손자이다.

전전관(錢傳瓘)이 팽언장(彭彦章)과 조우하였다. 전전관은 모든 배에 재(灰)와 콩, 모래를 싣도록 명령하고, 을사일(乙巳日)에 낭산강(狼山江)에서 교전하였다. 오(吳)나라의 배는 순풍을 타고 전진했으나, 전전관은 자신의 배를 이끌고 피하다가, 오나라 배가 지나간 뒤에 뒤따라갔다. 오나라 배가 방향을 돌려 맞서 싸우자, 전전관은 바람을 따라 재를 뿌리게 하여 오나라 사람들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였다. 배의 현(舷)이 서로 가까워지자, 전전관은 자기 배에는 모래를 뿌리고 오나라 배에는 콩을 뿌리라고 명령하였는데, 콩이 전투 중의 피에 젖어 오나라 사람들이 밟으면 모두 미끄러져 넘어졌다. 전전관은 이 틈을 타서 오나라 배에 불을 질러 크게 패배시켰다. 팽언장은 싸움에 매우 용맹하여 병사가 다 떨어지자 목재로 계속 싸웠으며,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었으나 진분(陳汾)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구원하지 않았다. 팽언장은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자살하였다. 전전관은 오나라 부장(副將) 70명을 사로잡고, 참수한 수급이 1천여 급(級)이었으며, 전함 4백 척을 불태웠다. 오나라 사람들은 진분을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 절반을 팽언장의 집에 하사하고 그의 처자식을 종신토록 부양하게 하였다.

하규(賀瑰)가 덕승남성(德勝南城)을 공격하며 여러 길로 동시에 진격하고, 죽색(竹索)으로 10여 척의 몽충전함(蒙衝戰艦)을 연결하여 쇠가죽을 덮고, 망혈(望穴)과 전격(戰格)을 성벽처럼 만들어 강을 가로질러 진(晉)나라의 원군을 차단하여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진왕(晉王)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가 북안(北岸)에 진을 쳤으나 나아갈 수 없었다. 수영을 잘하는 마파룡(馬破龍)을 남성으로 들여보내 수장(守將) 시연상(氏延賞)을 만나게 하니, 시연상이 화살과 돌이 거의 떨어졌으며 성이 함락되려 한다고 말했다. 진왕은 군문(軍門)에 금은 재물을 쌓아 놓고 몽충전함을 격파할 자를 모집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방법을 찾지 못했다. 친군장(親軍將) 이건급(李建及)이 말하기를 "하규가 전 병력을 동원한 것은 이 한 번의 작전으로 승리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다면, 그들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일, 저 이건급이 죽음으로 결단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3백 명의 효절감사지사(效節敢死之士)를 선발하여 갑옷을 입고 도끼를 쥐게 하고, 그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나아갔다. 몽충전함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날아드는 화살이 빗발 같았다. 이건급은 도끼를 든 자들에게 몽충전함 사이로 들어가 죽색을 끊게 하고, 또 목옹(木罌)에 땔나무와 기름을 실어 불을 붙여 상류에 띄워 보낸 뒤, 큰 배에 정예병을 싣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하게 하였다. 몽충전함의 죽색이 끊어져 물살을 따라 흘러내리자, 양(梁)나라 병사가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고, 진나라 병사는 마침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규는 포위를 풀고 도망쳤고, 진나라 군대는 추격하여 복주(濮州)에 이르러서야 돌아갔다. 하규는 퇴각하여 행대촌(行臺村)에 주둔하였다.

전촉주(前蜀主)가 천책부(天策府)의 여러 장수들에게 함부로 주둔지를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5월 정묘삭일(丁卯朔日)에 좌산기군사(左散旗軍使) 왕승악(王承諤), 왕승훈(王承勳), 왕승회(王承會)가 명령을 위반하였으나, 전촉주는 모두 용서하였다. 이로부터 금령(禁令)이 다시 시행되지 않았다.

초(楚)나라 사람들이 형남(荊南)을 공격하자, 고계창(高季昌)이 오(吳)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오나라는 진남절도사(鎮南節度使) 유신(劉信) 등에게 홍(洪), 길(吉), 무(撫), 신(信) 주의 보병을 이끌고 유양(瀏陽)에서 담주(潭州)로 직행하게 하고, 무창절도사(武昌節度使) 이간(李簡) 등에게 수군을 이끌고 복주(復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 등이 담주 동쪽 경계에 이르자, 초나라 군대는 형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간 등은 복주에 들어가 복주지주(復州知州) 포당(鮑唐)을 사로잡았다.

6월, 오나라 사람들이 사산(沙山)에서 오월(吳越) 군대를 격파하였다.

가을 7월,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가 전전관(錢傳瓘)을 보내 3만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의 상주(常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서온(徐溫)은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이를 막았으며, 우웅통군(右雄武統軍) 진장(陳璋)은 수군을 이끌고 해문(海門)에서 오월군의 후방으로 돌아갔다. 임신일(壬申日)에 무석(無錫)에서 교전하였다. 마침 서온이 열병(熱病)에 걸려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자, 오월군이 중군(中軍)을 공격하여 날아드는 화살이 빗발 같았다. 진해절도판관(鎮海節度判官) 진언겸(陳彦謙)이 중군의 기고(旗鼓)를 왼쪽으로 옮기고, 서온을 닮은 사람을 찾아 갑옷과 투구를 입히고 호령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하니, 서온은 이로 인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조금 뒤 병이 차도가 있자, 나가서 싸웠다. 당시 오랜 가뭄으로 들풀이 누렇게 말랐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자 오월군이 혼란에 빠져 크게 패배하였다. 오월의 장수 하봉(何逢)과 오건(吳建)을 죽이고 참수한 수급이 1만 급이었다. 전전관은 도망쳤고, 오군은 산 남쪽까지 추격하여 다시 그를 격파하였다. 진장이 향만(香彎)에서 오월군을 격파하였다. 서온은 반역한 장수 진소(陳紹)를 생포하는 자에게 상금 1백만 관(貫)을 걸었고, 지휘사(指揮使) 최언장(崔彦章)이 그를 잡았다. 진소는 용맹하고 지혜가 많았기에, 서온은 다시 그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당초, 금의지역(錦衣之役) 때 오나라 마군지휘사(馬軍指揮使) 조균(曹筠)이 반역하여 오월로 도망갔는데, 서온은 그의 처자를 용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밀사를 보내 조균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뜻대로 되지 않아 떠난 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자식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번 전투에 이르러 조균이 다시 오나라로 돌아왔다. 서온은 스스로 예전에 조균의 건의를 따르지 않은 세 가지 일을 말하면서도 그의 왕래와 배반의 죄를 묻지 않고, 그의 밭과 집을 돌려주고 군직을 회복시켜 주었으나, 조균은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서지고(徐知誥)가 2천 보병을 이끌고 오월군의 깃발과 갑옷, 병기로 바꿔 입고 패잔병 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습격하여 소주(蘇州)를 함락시키겠다고 청하였다. 서온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은 참으로 좋다. 그러나 나는 휴전을 구하려 하여, 그대의 말대로 할 겨를이 없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오월이 의지하는 것은 배입니다. 지금 큰 가뭄으로 수로가 마르니, 이는 하늘이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때입니다. 마땅히 보병과 기병의 우세를 다하여 한 번에 그들을 섬멸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서온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하가 전란으로 분열된 지 이미 오래고, 백성의 고통이 심히 중하다. 전공(錢公) 또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만약 해마다 전쟁을 벌여 화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근심이 될 것이다. 지금 싸움에 이겨 그들을 두렵게 하고, 군대를 거두어 그들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하여, 두 지역의 백성들이 각자 편안히 살게 하고 군신(君臣)이 고침(高枕)하여 근심이 없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을 죽여 무엇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오월왕 전류가 하봉(何逢)의 전마(戰馬)를 보고 슬퍼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장사(將士)들의 마음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총애하는 첩 정씨(鄭氏)의 아버지가 법을 범하여 사형에 처해질 때, 좌우에서 그를 위해 간청하였으나, 전류가 말하기를 "어찌 한 여자 때문에 나의 법을 어지럽히겠는가."라고 하며 정씨를 내쫓고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다. 전류는 어려서부터 군중(軍中)에 있어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몹시 피곤하면 둥근 목침(木枕)에 기대었으며, 혹은 큰 방울(鈴鐺)을 베고 자다가 잠이 깊어지면 기울어져 깨어났는데, 이를 '경침(警枕)'이라 불렀다. 침실 안에 분반(粉盤)을 두고, 기억할 것이 있으면 반(盤)에 기록하였으며,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혹 깊이 잠들었을 때 밖에서 일을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시녀(侍女)로 하여금 종이를 흔들게 하면 잠이 깨어났다. 혹 누각(樓閣) 밖에서 동환(銅丸)을 튕겨 야경을 도는 사람을 깨우기도 하였다. 일찍이 미복(微服)으로 출입하여 밤에 북성문(北城門)을 두드렸으나, 수문관(守門官)이 열어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대왕이 오시더라도 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른 성문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북문 관리(北門官吏)를 불러 후하게 상을 주었다.

병술일(丙戌日)에 오왕(吳王)이 그의 아우 양몽(楊蒙)을 여강군공(廬江郡公)으로, 양부(楊溥)를 단양군공(丹楊郡公)으로, 양심(楊潯)을 신안군공(新安郡公)으로, 양철(楊澈)을 파양군공(鄱陽郡公)으로, 아들 양계명(楊繼明)을 여릉군공(廬陵郡公)으로 봉하였다.

진왕(晉王)이 진양(晉陽)으로 돌아와 순관(巡官) 풍도(馮道)를 장서기(掌書記)로 임명하였다. 중문사(中門使) 곽숭도(郭崇韜)가 배석하여 식사하는 장수들이 너무 많아 그 수를 줄이기를 청하였다. 진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음을 무릅쓰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단 말인가? 군중(軍中)에 명하여 따로 하북(河北)의 주장(主將)을 선택하게 하고, 나는 스스로 태원(太原)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즉시 풍도를 불러서 문서를 초안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풍도가 붓을 쥐고 망설이며 쓰지 않으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마땅히 하남(河南)을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곽숭도의 청이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대왕께서 따르지 않으시면 그만이지, 어찌 이로 인해 원근(遠近)을 놀라게 하고 적국(敵國)으로 하여금 대왕과 신하가 화목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하여 위엄을 높이는 방도가 되지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마침 곽숭도가 들어와 사죄하자, 진왕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당(唐)나라가 고려(高麗)를 멸망시킬 때, 천우(天祐) 초년에 고려 석굴사(石窟寺)의 승궁의(僧躬乂)가 무리를 모아 개주(開州)를 점거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대봉국(大封國)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량위(佐良尉) 김립기(金立奇)를 오나라에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八月, 을미일(초하루), 선의절도사 하괴가 사망했다. 조정은 개봉윤 왕찬을 북면행영초토사로 임명했다. 왕찬은 오만 군대를 이끌고 여양에서 황하를 건너 섬주와 위주를 기습 공격하다가 돈구에 이르러 진군을 만나자 곧 철수했다. 왕찬은 군대를 엄격히 다스려 명령이 행해지고 금지가 지켜졌으며, 진군의 상류 십팔 리에 있는 양촌에서 황하를 끼고 진영을 쌓고 낙양에서 대나무와 목재를 운반하여 부교를 세우고 활주에서 군량을 연달아 수송했다. 진나라 번한마보총관 겸 진무절도사 이존진도 덕승에 부교를 세웠는데, 어떤 사람이 말했다: "부교를 세우려면 죽삭, 철우, 석둔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으니 어떻게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존진이 듣지 않고 갈대로 엮은 새끼로 큰 배를 묶고 흙산 위의 큰 나무에 매달아 한 달 만에 완성하니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탄복했다.

오나라 서온은 사신을 보내 오왕의 서신을 가지고 무적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오월에 돌려보냈다. 오월왕 전류도 사신을 보내 오나라에 화해를 청했다. 이로부터 오나라는 전쟁을 멈추고 백성들을 쉬게 하여 삼십여 개 주의 백성들이 이십여 년 동안 편안히 살았다. 오왕과 서온은 여러 차례 오월왕 전류에게 편지를 보내 전류가 자신의 봉국 안에서 왕을 칭할 것을 권했지만 전류는 따르지 않았다.

구월, 병인일, 후당 황제는 유암의 관작을 삭탈하고 오월왕 전류에게 그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전류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오나라의 여강공 양몽은 재능과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주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오히려 남에게 차지당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서온이 이 말을 듣고 그를 미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