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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이십육

제 26 편

丁씨와 부씨 일족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모두가 공손하고 검소한 부희를 시기하였다. 게다가 부태후는 높은 존호를 얻어 성제의 어머니와 동등한 존귀함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부희는 공광·사단과 함께 끝까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황제는 대신들의 올바른 논의를 어기기 어려우면서도 안으로는 부태후에게 핍박을 받아 몇 년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부태후가 크게 노하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사단을 면직시켜 부희를 움직이게 하려 하였으나, 부희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주박은 공향후 부안과 결탁하여 함께 존호를 이루는 일을 도모하면서, 여러 차례 사사로이 알현하여 밀봉 주본을 올려 부희와 공광을 헐뜯었다. 정축일에 황제는 마침내 책서를 내려 부희를 면직시키고 후작 신분으로 봉지로 돌아가게 하였다.

어사대부 관직이 이미 폐지되자, 논의하는 이들 대부분은 고금의 제도가 다르다고 여겼다. 한나라는 천자의 칭호부터 아래로 좌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대와 다른데, 유독 삼공의 관직만 바꾸면 직무의 구분이 어려워져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는 데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주박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옛 관례에 따르면, 군국 수상 가운데 치적이 뛰어난 자를 중이천석으로 뽑고, 중이천석 가운데 어사대부를 선발하여 그 직을 수행하는 자가 다시 승진하여 승상이 되었습니다. 관직의 순서에 선후가 있음은 성덕을 높이고 국상을 중히 여기기 위함입니다. 지금 중이천석이 어사대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승상을 맡게 되어 권위가 지나치게 가벼우니, 이는 국정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닙니다. 신이 어리석게 생각하기에 대사공 관직은 폐지하고 다시 어사대부를 설치하여 옛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힘을 다하여 어사대부로서 백관의 모범이 되고자 합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여름 4월 무오일에 주박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또 정태후의 오빠인 양안후 정명을 대사마·위장군으로 삼아 관속을 두게 하였으니, 대사마의 관직에 덧붙이는 칭호는 옛 규례를 따랐다.

부태후가 또 직접 조서를 승상과 어사대부에게 내려 이르기를, "고무후 부희는 아랫사람에게 붙어 윗사람을 속이고 전임 대사공 사단과 마음을 같이하여 배반하고 명을 거역하며 종족을 훼손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조청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며 그를 봉지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승상 공광은 선제 때 후계자를 논의할 때부터 의견 차이로 틈이 있었고, 또 부태후의 뜻을 크게 거슬렀다. 이 때문에 부씨 일족으로서 지위에 있는 자들이 주박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함께 공광을 헐뜯고 무고하였다. 을해일에 책서를 내려 공광을 면직시키고 서인으로 낮추었다. 어사대부 주박을 승상으로 삼고 양향후에 봉하였으며, 소부 조현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그들이 전각에 올라 책명을 받으려 할 때, 큰 소리가 종이 울리는 듯하여 전각 안의 낭관과 계단 위의 시위들이 모두 들었다. 황제가 이 일로 황문시랑 촉군 사람 양웅과 이심에게 물었다. 이심이 대답하였다. "이는 《홍범》에서 이른바 고요(鼓妖)입니다. 그 본받는 바에 따르면, 군주가 총명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미혹되어 빈 이름만 가진 자가 나아가 등용되면, 형체 없는 소리가 있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전에 이르기를 '해와 달과 날짜의 가운데 때에 해당하면 정경이 그 재앙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사월의 진시와 사시에 괴이함이 나타났으니, 이는 바로 가운데 때입니다. 정경이란 곧 집정 대신을 말합니다. 마땅히 승상과 어사를 파면하여 하늘의 변고에 응해야 합니다. 비록 파면하지 않더라도 한 해를 넘기지 않아 그 사람이 스스로 그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양웅도 또한 말하기를, "고요란 듣는 것이 실상과 어긋나는 상징입니다. 주박은 강직하고 굳세며 권모가 많으니, 장수에는 알맞을지언정 승상에는 적합하지 않아, 흉악하고 급박하며 사나운 성냄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주박이 승상이 되자, 황제가 마침내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정도공황의 칭호는 다시 정도를 일컫지 말라. 공황태후를 높여 제태태후라 하고 영신궁이라 칭하며, 공황후를 제태후라 하고 중안궁이라 칭하며, 공황을 위하여 서울에 침묘를 세워 선제의 부친인 도황고의 규례에 비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네 분 태후가 각각 소부와 태복을 두니, 그 봉록은 모두 중이천석이었다. 부태후가 존호를 얻은 뒤로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져, 태황태후와 대화할 때에는 심지어 그를 가리켜 '늙은 마누라'라 불렀다. 당시 정씨와 부씨는 한두 해 사이에 갑자기 일어나 지극히 번성하여 공경과 열후가 된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황제가 그들에게 권력을 많이 주지 않은 것은 왕씨가 성제 때 그러했던 것과는 같지 않았다.

승상 주박과 어사대부 조현이 아뢰었다. "앞서 고창후 동굉이 먼저 존호를 올리자는 의논을 내놓았으나 관내후 사단에게 탄핵을 받아 서인으로 면직되었습니다. 당시 천하에 상이 났고 정사가 사단에게 맡겨졌는데, 사단은 존호를 드높이고 넓히는 큰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이 의논하여 존호를 억누르고 폄하하여 효도를 손상시켰으니, 불충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인덕과 성명으로 존호를 분명하게 정하시어, 동굉은 충효로 말미암아 다시 고창후에 봉해졌사온데, 사단의 죄악은 패역함이 드러났으니 비록 사면령을 입었더라도 마땅히 작위와 봉토를 누려서는 안 되오니, 청컨대 서인으로 면직시키소서." 상주가 허락되었다. 또 아뢰었다. "신도후 왕망은 앞서 대사마가 되었을 때 존귀한 이를 높이는 도리를 넓히지 않고 도리어 존호를 억누르고 폄하하여 효도를 손상시켰으니, 마땅히 공개 처형되었어야 합니다. 다행히 사면령을 입었으나 마땅히 작위와 봉토를 누려서는 안 되오니, 청컨대 서인으로 면직시키소서." 황제가 이르기를, "왕망은 태황태후와 친속 관계가 있으니 면직시키지 말고 봉지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평아후 왕인이 조소의의 친족을 숨겨준 일에 이르러서도 모두 봉지로 돌아가게 하였다.

천하의 많은 사람들이 왕씨가 억울하다고 여겼다. 간대부 양선이 밀봉 주본을 올려 말하였다. "효성황제께서는 종묘를 깊이 염려하시어 폐하의 지극한 덕을 칭송하며 하늘의 순서를 계승하게 하셨으니, 성스러운 계책은 깊고 멀며 은덕은 지극히 두터웠습니다. 선제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어찌 폐하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동궁을 모시게 하고자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태황태후께서는 나이 칠십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근심을 겪으시며, 친속들에게 물러나 정씨와 부씨를 피하도록 명령하셨으니, 길 가는 행인들조차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거늘 하물며 폐하께서야 어떠하시겠습니까! 때로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실 때, 어찌 홀로 연릉을 마주하여 부끄럽지 않으시겠습니까!" 황제가 그 말에 깊이 감동하여, 다시 성도후 왕상의 둘째 아들 왕읍을 성도후로 봉하였다.

주박이 또 아뢰었다. "한나라의 옛 규례에 부자사를 두었는데, 품계는 낮고 상은 후하여 모두 공적에 힘쓰고 나아가기를 즐겼습니다. 앞서 자사를 폐지하고 주목으로 고쳐 봉록을 진이천석으로 하여 지위가 구경 다음이 되게 하였는데, 구경에 빈자리가 있으면 치적이 뛰어난 자로 보충하고, 그 가운데 재능이 중간인 자는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을 구할 뿐이었습니다. 공적이 날로 쇠퇴해지고 간악하고 법을 어기는 일을 금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청컨대 주목을 없애고 전과 같이 자사를 두소서."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6월 경신일에 제태후 정씨가 세상을 떠나자, 조서를 내려 그를 정도공황의 능원으로 돌려보내 장사 지내고, 진류·제음 등 인근 군국에서 5만 명을 징발하여 광을 파고 흙을 덮게 하였다.

처음에, 성제 때 제(齊) 땅 사람 감충가(甘忠可)가 《천관력(天官歷)》과 《포원태평경(包元太平經)》 12권을 위조하여, 한나라 왕실이 천지의 큰 종말을 맞이하여 마땅히 다시 천명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이로써 발해(渤海) 사람 하하량(夏賀良) 등을 가르쳤다. 중루교위(中壘校尉) 유향(劉向)이 상주하기를, 감충가가 귀신을 빙자하여 임금을 속이고 민중을 미혹시킨다고 하였다. 감충가는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고 죄를 인정했으나, 아직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하하량 등은 다시 사사로이 서로 전수하였다.

황제가 즉위한 후, 사예교위(司隸校尉) 해광(解光)과 기도위(騎都尉) 이심(李尋)이 하하량 등을 천거하였고, 그들은 모두 황문(黃門)에서 조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러 차례 소환되어 진술하기를, "한나라의 역운(曆運)이 중도에 쇠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천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제께서 천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사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오랫동안 병환에 계시고 변란이 거듭 나타나는 것은, 하늘이 이것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바입니다. 마땅히 빨리 연호를 바꾸고 칭호를 고쳐야만 수명을 연장하고 황자를 얻으며 재앙과 변고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천도를 얻고도 행하지 않으시면 재앙이 아닌 것이 없어 홍수가 일어나고 화재가 일어나 백성들을 깨끗이 씻어버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 도움이 되기를 바랐고, 마침내 하하량 등의 건의를 따라 조서를 내려 천하에 대사면을 베풀고, 건평 2년을 태초 원년(太初元年)으로 바꾸며, 칭호를 '진성유태평황제(陳聖劉太平皇帝)'라 하고, 누각(漏刻)의 하루를 120각으로 고쳤다.

가을 7월, 위성(渭城) 서북쪽 들판의 영릉정부(永陵亭部)에 처음으로 능묘를 조성하고, 군국(郡國)의 백성들을 이주시키지 않았다.

황제가 칭호를 바꾼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병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하량 등이 또다시 정사를 함부로 바꾸려 하자, 대신들이 다투어 불가하다고 여겼다. 하하량 등이 상주하기를, "대신들이 모두 천명을 알지 못하니, 승상과 어사를 파면하고 해광과 이심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말이 효험이 없다고 여겨, 8월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서를 기다리던 하하량 등이 연호를 바꾸고 칭호를 고치며 누각을 늘리면 국가를 영원히 안정시킬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짐은 도를 믿는 마음이 독실하지 못하여 잘못 그들의 말을 따라 백성을 위한 복을 구하고자 했으나, 끝내 좋은 효험이 없었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잘못이다! 6월 갑자일(甲子日)의 조서는, 사면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지한다. 하하량 등은 도를 어기고 민중을 미혹시켰으니, 간사한 정황을 철저히 추궁해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였다. 이심과 해광은 사형을 한 등급 감하여 돈황군(敦煌郡)으로 유배 보냈다.

황제는 병환 때문에, 전대에 일찍이 세웠던 여러 신사(神祠) 700여 곳을 모두 회복하여, 한 해에 제사 지내는 횟수가 3만 7000번에 달하였다.

부태후(傅太后)는 부희(傅喜)에게 원한이 맺혀, 공향후(孔鄉侯) 부언(傅晏)을 시켜 승상 주박(朱博)에게 은근히 뜻을 전하여, 주박이 상주하여 부희의 후작 작위를 빼앗도록 청하게 하였다. 주박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조현(趙玄)과 이 일을 의논하였는데, 조현이 말하기를, "일은 이미 전에 판결이 났으니, 아마도 부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주박이 말하기를, "이미 공향후께 허락했습니다. 보통 사람끼리도 서로 약속하면 오히려 죽음으로써 보답하는데, 하물며 지존(至尊)께서 부탁하심에 있어서랴! 내 오직 한 번 죽을 뿐이다!"라고 하니, 조현이 곧 동의하였다.

주박은 부희만 탄핵하는 것을 꺼려하여, 전임 대사공(大司空) 사향후(氾鄉侯) 하무(何武)도 앞서 죄과로 면직되어 봉지로 돌아간 것이 부희와 비슷하다 하여, 함께 아울러 상주하기를, "부희와 하무는 앞서 재위 시절, 모두 치적에 도움이 없었으며, 비록 이미 파면되었으나 작위와 봉토 또한 그들이 마땅히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서인(庶人)으로 만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부태후가 평소 부희를 원망해 온 것을 알았기에, 주박과 조현이 그 뜻을 받든 것이라 의심하여, 즉시 조현을 불러 상서(尚書)에게 조사하게 하나, 조현은 죄를 인정하고 굴복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좌장군(左將軍) 팽선(彭宣)과 중조(中朝) 관리들이 함께 심리하라." 하니, 팽선 등이 상주하여 탄핵하기를, "주박·조현·부언 모두가 대역부도(大逆不道)하고 불경(不敬)하니, 청컨대 그들을 정위(廷尉)의 조옥(詔獄)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조현의 사형을 세 등급 감하고, 부언의 봉지 4분의 1을 삭감하였으며, 알자(謁者)에게 부절을 주어 승상을 정위에게로 소환하니, 주박은 자살하고 봉국은 철폐되었다.

9월, 광록훈(光祿勳) 평당(平當)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겨울 10월 갑인일(甲寅日), 평당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겨울철인 까닭에 잠시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 경조윤(京兆尹) 평릉(平陵) 사람 왕희(王喜)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황제가 정씨(丁氏)와 부씨(傅氏) 일족에게 무관직을 맡기고자 하여, 이해에 좌장군 회양(淮陽) 사람 팽선을 책서(策書)로 면직시켜 관내후 자격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광록훈 정망(丁望)을 대신 좌장군으로 삼았다.

오손(烏孫)의 비원치(卑爰疐)가 흉노 서쪽 경계를 침략하고 약탈하자, 선우(單于)가 병력을 보내 그를 공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가축을 몰아 돌아갔다. 비원치가 두려워하여 아들 추록(趨逯)을 흉노에 인질로 보냈고, 선우는 이를 받아들여 상황을 한나라에 보고하였다. 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선우를 꾸짖고, 비원치의 인질을 돌려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선우는 조서를 받들어 인질을 돌려보냈다.

효애황제 중 건평 3년 (정사년, 기원전 4년)

봄 정월, 광덕이왕(廣德夷王)의 동생 광한(廣漢)을 광평왕(廣平王)으로 세웠다.

계묘일(癸卯日), 제태태후(帝太太后)가 거처하던 계궁(桂宮)의 정전(正殿)에 화재가 발생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승상 평당을 불러 작위를 봉하려 하였으나, 평당은 병이 위중하여 응소하지 못했다. 집안사람들 중 누군가 평당에게 말하기를, "억지로라도 일어나 후작의 인수를 받아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울 수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평당이 말하기를, "내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밥만 축내고 일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이미 받아 마땅하다. 만약 일어나 후작의 인수를 받고 돌아와 누워서 죽는다면, 죽어서도 남는 죄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바로 자손을 위해서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글을 올려 퇴직을 청했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다. 3월 기유일(己酉日), 평당이 세상을 떠났다.

혜성이 하고성(河鼓星) 부근에 나타났다.

여름, 4월, 정유일, 왕가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하남태수 왕숭을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왕숭은 경조윤 왕준의 아들이다. 왕가는 당시 정사가 가혹하고 독촉하며, 군국 태수와 제후국의 상이 여러 차례 교체되었기 때문에 상소를 올려 말했다. "신이 듣기에 성스러운 군주의 공적은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재를 얻기 어렵다 하니, 그렇지 아니한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업을 계승하여 제후를 삼는 것은 옛날 현인을 본받음이었으나, 그들이 완전히 현명하지 못할까 봐 천자가 그들을 위해 신하를 골라주고 명경대부를 임명하여 보좌하게 했습니다. 그 나라에 머물며 여러 대에 걸쳐 존중을 받은 뒤에야 선비와 백성들이 귀의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교화가 행해지고 다스림의 공적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군수는 옛날의 제후보다도 더 중합니다. 예전에는 정성껏 현명한 인재를 가려 뽑았으나, 현명한 인재는 얻기 어려워 발탁하여 쓸 만한 사람을 뽑다 보니 혹 죄수 중에서 기용되기도 했습니다. 옛날 위상이 일로 인해 죄를 얻었는데, 한 문제께서 풍당의 말에 감동하시어 사자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그의 죄를 사면하고 그를 운중태수로 임명하시니 흉노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한 무제께서 죄수 중에서 한안국을 발탁하여 양나라 내사로 삼으시니 종실과 골육이 그로 인해 편안해졌습니다. 장창이 경조윤으로 있을 때 죄를 지어 면직되어야 했는데, 교활한 관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장창을 침범하자 장창이 그를 체포하여 죽였습니다. 그 집안 사람이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하니, 사자가 사건을 재조사하여 장창이 관리들을 함부로 죽였다고 탄핵하였고, 황제께서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장창이 마침 사면을 만나 도망하여 열흘 남짓 숨었는데, 한 선제께서 장창을 불러 기주자사로 임명하시어 마침내 그 재능을 활용하셨습니다. 전대에 이 세 사람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주와 그릇됨이 나라에 유익할 것을 탐냈기 때문입니다. 한 문제 때에는 벼슬아치들이 자손을 길러 성인이 되도록 관직에 있으면서 관직 이름으로 성씨를 삼으니, 창씨와 고씨는 바로 창고 관리의 후손이었습니다. 그 이천석 장관들도 관직에 편안히 머물며 직무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뒤에야 상하가 서로 바라보며 구차하고 핑계 대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점차 변하여 공경 이하가 서로 독촉하고 급박해졌으며, 또 정사를 여러 번 변경하였습니다. 사례교위와 부자사가 규찰하고 탄핵함이 각박하고 세세하였으며, 숨은 허물을 들추어내니, 관리는 혹 몇 달 만에 파면되고 물러나 옛 사람을 보내고 새 사람을 맞이함이 길에서 교차했습니다. 중간 재주를 가진 자는 구차히 몸을 용납하여 온전함을 구하고, 하등 재주를 가진 자는 항상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며 사사로움을 돌아보아, 모든 방도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천석 관리들은 더욱 가볍고 천하게 여겨져 관리와 백성들이 그들을 업신여기고, 혹 그 작은 잘못을 붙잡아 보태고 꾸며 죄명을 만들어 사나리와 사례교위에게 보고하거나, 혹은 글을 올려 고발합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곧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지난날 산양군의 도망친 죄수 소령 등이 횡행했을 때, 관리와 장수들은 어려움에 임하여도 절개를 굳게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군수와 제후상의 권위가 평소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효성황제께서 이에 대해 후회하시고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길, 이천석 관리들은 고의로 방면한 것으로 인해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시고, 사자를 보내 황금을 하사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이천석에 의지하여 처리하려 함이었습니다. 이천석이 존중받고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곧 아래를 통솔하고 부릴 수 있습니다. 효선황제께서는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를 아끼시어, 장차 탄핵하는 일이 있으면 그 상주문을 궁중에 머물러 두셨다가 사면을 만나면 모두 없애버리셨습니다. 옛 관례대로 상서가 상주문을 내려보내는 일이 적었으니, 이는 곧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증거를 대조하며 심문하여 혹 옥중에서 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상주문에는 반드시 '감히 고합니다'라는 글자가 있어야만 내려보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현명한 인재를 선택하는 데 마음을 두시어, 선행을 기억하고 과오를 잊으시며, 신하들에게 관대하여 완전함을 갖추도록 책망하지 마소서. 이천석과 부자사, 삼보의 현령 중 재주와 식견이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가 있다면, 인정상 잘못과 치우침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하여 힘을 다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가장 긴요한 일이요, 나라에 이로움을 여는 것입니다. 지난날 소령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부를 파견하여 추문하게 하려 했으나 당시 대부들 중에 보낼 만한 자가 없어서, 마침내 주질현령 윤봉을 불러 간대부로 임명하여 보냈습니다. 지금 여러 대부들 중 재주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마땅히 일찍이 성취시킬 만한 인재를 길러야만 선비가 어려움에 달려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 닥친 뒤에야 창졸간에 구한다면, 이는 조정의 밝음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왕가가 이에 유생 공손광과 만창, 그리고 유능한 관리 소함과 설수 등을 추천하니, 이들은 모두 예전에 명망이 있던 이천석 관리 출신이었다. 천자가 받아들여 그들을 임용하였다.

6월, 노경왕의 아들 부향후 민을 왕으로 세웠다.

황제가 병을 앓아 낫지 않자, 겨울, 11월, 임자일, 태황태후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감천 태전과 분음 후토사당을 회복하고, 남쪽·북쪽 교외 제사를 폐지하게 하였다. 황제 또한 직접 감천과 하동으로 갈 수 없어, 유사에게 일을 맡겨 제사 의례를 거행하게 하였다.

무염현의 위산에 흙이 스스로 솟아나 잡초를 덮었는데, 그 모양이 치도와 같았다. 또, 호산의 돌이 구르더니 똑바로 일어섰다. 동평왕 유운과 왕후 알이 몸소 그 돌이 있는 곳에 가서 제사지내고, 돌을 깎아 호산의 곧게 선 돌 모양으로 만들고, 띠풀을 묶어 함께 제사지냈다. 하내 사람 식부궁과 장안 사람 손총이 함께 모여 이 일을 고발하기로 모의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제후에 봉해질 계책이다." 하였다. 이에 중랑 곡사담과 함께 중상시 송홍을 거쳐 비상사태를 아뢰어 그들을 고발했다. 이때 황제가 병을 앓고 있어 여러 일을 싫어하던 차에, 그 일을 유사에게 내려 처리하게 하니, 왕후 알을 체포하여 하옥하고 심문하였다. 그녀가 죄를 자복하며 말하기를 "황제를 저주하고 유운이 천자가 되기를 빌었습니다. 돌이 곧게 선 것은 선제께서 흥기하신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였다. 유사가 동평왕을 주살할 것을 청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왕작을 폐하고 방릉으로 유배 보냈다. 유운은 자살하고, 왕알과 그의 외삼촌 오굉, 그리고 성제의 외삼촌 안성공후 부인의 아내 방은 모두 사형에 처해져 기시되었다. 사건이 어사대부 왕숭에게 연루되어, 그는 대사농으로 강등되었다. 손총을 남양태수로, 곡사담을 영천도위로 발탁하고, 송홍과 식부궁은 모두 광록대부 좌조 급사중이 되었다.

효애황제 중 건평 4년(무오, 기원전 3년)

봄, 정월, 크게 가물었다.

관동의 백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놀라서 달아나며, 볏짚이나 삼대 한 가닥을 가지고 서로 주고받으며 "서왕모의 산가지를 행한다"고 말했다. 길에서 만나는 자가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렀고, 혹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다니며, 혹은 밤에 문빗장을 부수거나 담을 넘어 들어가고, 혹은 수레를 타거나 말을 달려 역참을 통해 전해가며, 26개의 군국을 거쳐 장안에까지 이르렀으나 금지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또 마을과 골목, 들판에 모여 박혁 놀이판을 벌여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서왕모에게 제사지냈는데, 가을이 되어서야 그쳤다.

황제가 부태후의 사촌동생인 시중 광록대부 부상을 제후로 봉하려 하자, 상서복야 평릉 사람 정숭이 간언하여 말했다. "효성황제께서 친외삼촌 다섯 분을 제후로 봉하셨을 때, 하늘은 붉고 누렇게 변하여 대낮이 어두웠고, 해 속에 검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공향후는 황후의 아버지이고, 고무후는 삼공의 신분으로 봉해졌으니, 오히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무런 이유 없이 다시 부상을 제후로 봉하려 하시니, 제도를 무너뜨리고 어지럽혀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니, 부씨 가문의 복이 아닙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제 목숨으로 나라의 재앙을 맡겠습니다!" 정숭이 이에 조서의 문안을 받들고 일어섰다. 부태후가 크게 노하여 말했다. "어찌 천자가 도리어 한 신하에게 제압당하는 일이 있단 말이냐!"

2월, 계묘일, 황제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부상을 여창후로 봉했다.

부마도위(駙馬都尉) 시중(侍中) 운양(雲陽) 사람 동현(董賢)이 황상의 총애를 받아, 외출할 때는 함께 수레를 타고, 입궁하면 좌우에서 모셨으며, 하사받은 것이 누만금에 달하여 그 귀함과 총애가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는 항상 황상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났다. 일찍이 낮에 잠을 자다가 몸으로 황상의 소매를 눌렀는데, 황상이 일어나려 했으나 동현이 아직 깨어나지 않자, 황상은 동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소매를 끊고 일어났다. 또 조서를 내려 동현의 처가 명적(名籍)으로 전각 안에 들어와 동현의 거처에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또 동현의 누이를 불러 입궁시켜 소의(昭儀)로 봉하니, 지위가 황후 다음이었다. 소의와 동현 그리고 그의 처는 아침저녁으로 모시며 함께 황상 좌우에 있었다. 동현의 아버지 동공(董恭)을 소부(少府)로 삼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 조서를 내려 장작대장(將作大匠)에게 북궐 아래에 동현을 위해 큰 저택을 짓게 하였는데, 앞뒤로 중첩된 전각이 있고 문호가 서로 통했으며, 토목 공사는 극히 정교하고 기교를 다하였다. 무고(武庫)의 금병(禁兵)과 상방서(尚方署)의 진기한 보물들을 하사하였다. 그 선발된 정품들은 모두 동씨 집에 있었고, 황상이 쓰는 것은 오히려 그 다음 등급의 물건이었다. 나아가 동원서(東園署)의 비기(祕器), 주유(珠襦), 옥갑(玉柙)까지도 미리 동현에게 내려주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장작대장에게 명하여 동현을 위해 의릉(義陵) 곁에 분묘를 만들게 하였는데, 안으로는 편방(便房)을 만들고 강백(剛柏)으로 제주(題湊)를 하고, 밖으로는 순찰하는 도로를 닦았으며, 담장의 길이가 수 리에 달하고, 문궐(門闕)과 부사(罘罳)가 매우 장대하였다.

정숭(鄭崇)이 동현이 귀하고 총애가 지나치다 하여 간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크게 죄를 얻었고, 자주 직무상의 일로 꾸중을 들었다. 그는 목에 큰 종기가 나서 사직을 청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그러지 못하였다. 상서령(尚書令) 조창(趙昌)은 아첨하고 간사하였으며 평소 정숭을 시기하였다. 그가 황상에게 소원해졌음을 알고는 곧 아뢰어 말하기를 "정숭이 종족과 왕래하며 간사한 일을 도모하는 의심이 있으니, 조사하여 다스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정숭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그대 집 문 앞이 저잣거리처럼 사람이 오가니, 무엇으로 주상을 속박하려 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정숭이 대답하기를 "신의 집 문 앞은 저잣거리와 같사오나, 신의 마음은 물과 같이 맑습니다. 원컨대 조사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노하여 정숭을 감옥에 가두었다. 사례(司隷) 손보(孫寶)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살피건대 상서령 조창이 복야(僕射) 정숭을 탄핵한 안건을, 다시 심리하고 고문하여 거의 때려죽일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나 끝내 한 마디 진술도 없었고,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그를 위해 원통해하고 있습니다. 의심컨대 조창과 정숭 사이에 미세한 혐의가 있어, 마침내 점차 무함하는 지경에 이른 듯합니다. 궁궐의 기밀을 맡은 근신이 원통하게 참소를 입어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비방을 초래함이 적지 않습니다. 신은 조창을 국문하여 여러 사람의 분노를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상주문이 올라가자, 황상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례 손보는 아랫사람에게 붙좇아 주상을 속이고, 봄철에 헐뜯고 속임수를 행하여 그 간사한 마음을 드러냈으니, 나라의 적이다. 손보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서인으로 내친다."라고 하였다. 정숭은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2월, 정묘일(丁卯日)에, 제리(諸吏)·산기(散騎)·광록훈(光祿勳) 가연(賈延)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황상이 동현을 후작(侯爵)으로 봉하려 하였으나 줄곧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하였다. 시중(侍中) 부가(傅嘉)가 황상에게 권하여, 식부궁(息夫躬)과 손총(孫寵)이 동평왕(東平王)을 고발한 원본 주장을 가져다가, 송홍(宋弘)의 이름을 삭제하고 대신 동현을 통해 보고된 것으로 고쳐서, 이것을 동현의 공로로 삼아 그를 후작으로 봉하려 하였다. 이에 먼저 동현, 식부궁, 손총 세 사람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 얼마 후, 황상이 동현 등을 정식으로 후작에 봉하려 하였으나, 마음속으로 승상(丞相) 왕가(王嘉)를 꺼려하여, 먼저 공향후(孔鄉侯) 부안(傅晏)을 시켜 조서를 가지고 가서 승상과 어사에게 보이게 하였다. 이때 왕가와 어사대부 가연이 연명으로 밀봉한 주장을 올려 말하기를 "신 등은 보건대 동현 등 세 사람이 처음 작위를 받았을 때, 뭇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모두들 동현이 귀해지자 나머지 두 사람도 함께 은혜를 입었다고 하여, 지금도 유언비어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동현 등에게 베푸신 무한한 인자한 은혜에 대해서는, 마땅히 동현 등이 당초 고발했던 주장의 원문을 공개하고, 공경(公卿)·대부(大夫)·박사(博士)·의랑(議郎)을 소집하여 널리 자문하고 고금의 사례를 참고하여 그 의로움을 밝힌 연후에 작위와 영토를 더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크게 민심을 잃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목을 빼고 의논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일을 공개적으로 의논하게 하면 반드시 마땅히 봉해져야 한다고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 채택 여부는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천하 사람들이 비록 기뻐하지 않더라도, 허물을 나누어 받는 자가 있게 되어 외롭게 폐하 한 분에게만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날 정릉후(定陵侯) 순우장(淳于長)이 처음 봉해졌을 때도 이 일에 대해 의논이 있었는데, 대사농(大司農) 곡영(谷永)은 순우장이 마땅히 봉해져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후에 여러 사람들이 허물을 곡영에게 돌렸으므로 선제(先帝)께서는 홀로 그 비난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신 왕가와 신 가연은 재주가 못나 그 자리에 맞지 않아 죽어도 오히려 죄가 남겠습니다만, 순순히 뜻을 받들면 촉망을 사지 않아 잠시 몸을 보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폐하의 두터운 은덕에 보답하고자 함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은 부득이하여 잠시 그 일을 중지시켰다.

여름, 6월, 제태태후(帝太太后)를 황태태후(皇太太后)로 높여 불렀다.

가을, 8월 신묘일(辛卯日)에, 황상이 조서를 내려 공경대신(公卿大臣)을 엄히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 초(楚)나라에 자옥득신(子玉得臣)이 있자 진문공(晉文公)이 이 때문에 자리를 편히 하지 못했고, 근래의 일로는 급암(汲黯)이 회남왕(淮南王)의 음모를 꺾었느니라. 지금 동평왕(東平王) 유운(劉雲) 등이 이토록 천자를 시해하고 반역하여 난을 일으키려는 도모를 품은 것은,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힘을 다해 보좌하고 살펴서 미연에 화를 제거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종묘의 신령에 힘입어, 시중·부마도위 동현 등이 알아차리고 보고하여 모두 법에 복종하게 하였느니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덕으로써 그 선을 밝게 드러내라' 하지 않았느냐? 이제 동현을 고안후(高安侯)로, 남양태수(南陽太守) 손총을 방양후(方陽侯)로, 좌조(左曹)·광록대부(光祿大夫) 식부궁을 의릉후(宜陵侯)로 봉하고, 우사담(右師譚)에게는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내리노라."라고 하였다. 또 부태후(傅太后)의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동생 정운(鄭惲)의 아들 정업(鄭業)을 양신후(陽信侯)로 봉하였다. 식부궁이 친근함을 얻은 후로, 여러 차례 나아가 정사를 논의하며 말할 때마다 꺼리거나 숨김이 없었고, 상소하여 공경대신들을 하나하나 헐뜯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입을 두려워하여 그를 보면 모두 눈을 흘겼다.

황상이 중황문(中黃門)을 시켜 무고(武庫)의 병기를 조발하여 앞뒤로 열 차례에 걸쳐 동현과 황상의 유모 왕아(王阿)의 집으로 보냈다. 집금오(執金吾) 무장륭(毋將隆)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무고의 병기는 천하의 공용 물품입니다. 국가의 무비(武備)와 기계는 그 수리와 제작을 모두 대사농(大司農)의 돈으로 지급합니다. 대사농의 돈은 천자의 수레라도 봉양하는 데는 쓰지 않으니, 봉양과 하사는 일체 소부(少府)에서 나갑니다. 이는 국가 근본의 저축을 말단의 지출에 쓰지 않고, 백성의 재력을 부화한 비용에 쓰지 않음으로써, 공사(公私)를 나누어 바른 도리를 보이려 함입니다. 옛날 제후나 방백(方伯)이 정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에게는 부월(斧鉞)을 내렸고, 한나라의 변방 관리로서 적을 막는 임무를 띤 자에게도 무고의 병기를 내렸으니, 이는 모두 직책을 맡은 연후에야 몽상(蒙賞)하는 바입니다. 《춘추(春秋)》의 큰 의리는 사가(私家)에서 갑옷을 소장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는 신하의 위엄을 억누르고 사사로운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동현 등은 곧 아첨하고 사사로이 총애를 받는 신하에 불과한데, 폐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미천한 첩실에게까지 상을 내리시면서, 천하의 공공 병기를 그들 사가의 문으로 나누어 보내고, 국가의 위엄 있는 무기를 취하여 그들 사사로운 집안의 비용으로 삼으시니, 백성의 재력이 농신(弄臣)에게 나뉘고 무고의 병기가 천첩(賤妾)의 집에 비치되었습니다. 설치한 것이 옳지 않으면 교만하고 참람된 마음을 더욱 자라게 할 것이니, 이는 천하에 보일 바가 아닙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삼가(三家) 사당의 그릇을 취하리오!'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무고의 병기를 거두어들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얼마 후, 부태후(傅太后)가 알자(謁者)를 시켜 싼값으로 집금오(執金吾)의 관비(官婢) 여덟 명을 사게 하였는데, 무장륭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값이 너무 싸니, 다시 값을 헤아려 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황상이 이에 조서를 내려 승상(丞相)과 어사(御史)에게 이르기를 "무장륭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미 조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도리어 상주하여 영신궁(永信宮)과 더불어 값의 귀천을 다투게 하였으니, 교화를 상하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렸다. 무장륭이 전에 나라를 안정시킬 만한 말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를 패군도위(沛郡都尉)로 좌천시킨다."라고 하였다. 당초, 성제(成帝) 말년에 무장륭이 간대부(諫大夫)로 있을 때, 일찍이 밀봉한 상주문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 제후를 뽑아 조정에 들어와 공경으로 삼은 것은 공덕을 포양하기 위함이니, 마땅히 정도왕(定陶王)을 불러 서울의 관저에 머물게 하여 천하를 진무(鎭撫)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황상이 그 말을 생각하고 그를 용서한 것이다.

간의대부 발해 사람 포선이 글을 올려 말하였다.

“신이 효성황제 때를 보건대, 외척이 대권을 장악하고 사람마다 자기 친족과 심복들을 이끌어 조정을 가득 채워 현인들이 나아갈 길을 막았으며, 천하를 더럽히고 혼란시켰고 사치는 끝이 없어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식이 거의 열 번이나 나타났고, 혜성이 네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 위태롭고 망할 징조들은 폐하께서 친히 목격하신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도리어 예전보다 더 심해졌습니까!

지금 백성들에게는 일곱 가지 유망하는 재앙이 있습니다. 음과 양이 조화롭지 못하여 수재와 한재가 드는 것이 첫째이고, 관부의 징수가 번잡하고 무거우며 경부세와 조세 징발이 끊이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탐관오리가 공물을 횡령하고 뇌물 받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호강대족이 백성들을 한없이 좀먹는 것이 넷째이며, 각박한 관리가 요역을 징발하여 농사와 잠상의 시기를 빼앗는 것이 다섯째이고, 부락에서 북소리만 울리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가 막고 쫓아야 하는 것이 여섯째이며, 도적이 약탈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일곱 가지 유망하는 재앙도 오히려 말할 수 없거늘, 또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재난이 있습니다. 가혹한 관리가 구타하여 죽이는 것이 첫째이고, 송사를 다룸이 엄혹하고 가혹한 것이 둘째이며, 억울하게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 셋째이고, 도적이 횡행하며 살육하는 것이 넷째이며, 원수가 서로 죽이고 해치는 것이 다섯째이고, 흉년이 들어 굶주려 죽는 것이 여섯째이며, 시절에 맞는 전염병이 유행하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백성들에게 일곱 가지 유망하는 재앙이 있으면서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없으니, 나라가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백성들에게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재난이 있으면서도 한 가닥 살길조차 없으니, 형벌을 놓아두고 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이 어찌 공경, 군수, 제후상들이 탐욕스럽고 잔학한 것이 풍조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은 다행히 높은 지위에 몸을 두고 두터운 녹봉을 누리면서, 어찌 백성들에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베풀고 폐하를 도와 교화를 시행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기 집안을 경영하고 빈객을 접대하며 간사한 이익만을 도모할 뿐입니다. 그들은 구차하게 용납되고 뜻을 굽혀 순응하는 것을 현능하다 여기고, 두 손 모아 침묵하며 녹봉만 헛되이 먹는 것을 지혜롭다 여기면서, 신과 같은 포선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신을 산야에서 불러 올리신 것은 참으로 신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을 터인데, 어찌 다만 신으로 하여금 좋은 음식을 먹고 높은 지위에 살며 깊은 큰 집에 거처하게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천하는 바로 황천의 천하입니다. 폐하께서는 위로는 황천의 자식이 되시고 아래로는 여민 백성의 부모가 되시어, 하늘을 대신하여 만민을 길러주시니, 백성을 대할 때에는 마땅히 한결같이 보아 《시구》라는 시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지금 빈궁한 백성들은 나물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옷은 또한 해지고 남루하여, 부자와 부부조차 서로 온전히 보존할 수 없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납니다. 폐하께서 구제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이 장차 어디에서 목숨을 붙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오직 외척과 총신 동현만을 사사로이 기르시어, 많은 상을 내리는 것이 한 번 움직이면 수만을 헤아리게 하여, 그들의 노복과 빈객이 술을 물처럼 여기고 고기를 콩잎처럼 여기게 하며, 노복과 동자들조차도 이 때문에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까? 이는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창후 부상에 이르러서는, 공로도 없이 봉작되었습니다. 관작은 폐하의 관작이 아니라 천하의 관작입니다. 폐하께서 취하신 사람이 그 직책에 합당하지 않고 봉하신 관직이 그 사람에게 맞지 않으면서,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복종하기를 바라신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방양후 손총, 의릉후 식부궁은 그 말재주가 무리를 현혹시킬 만하고 강포함이 족히 제멋대로 행할 만하여, 간인들 중의 영웅이요 세도를 미혹시킴이 가장 심한 자들이니, 마땅히 때맞춰 파면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외척의 자제로서 나이가 어려 경술에 통하지 않은 자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땅히 관직을 그만두게 하고 나아가 스승에게서 배우게 해야 합니다. 마땅히 급히 전 대사마 부희를 불러들여 외척의 일을 통솔하게 하소서. 전 대사공 하무와 사단, 전 승상 공광, 전 좌장군 팽선은 모두 박사에게서 경학을 전수받았고 관직이 모두 삼공의 반열에 올랐던 자들입니다. 공승은 사직을 맡아 각 군국이 신중하게 인재를 천거하여 뽑게 하였으니, 이들은 가히 큰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들입니다. 폐하께서 앞서 작은 불만 때문에 하무 등을 파면하시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오히려 많은 공덕 없는 자들을 용납하시면서, 어찌 하무 등은 용납하지 못하십니까?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천하 사람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아야지, 오직 자기의 독단과 쾌락만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포선의 말이 비록 날카롭고 직설적이었으나, 황제는 그가 저명한 유생이었기 때문에 용서해 주었다.

흉노 선우가 글을 올려, 5년에 조현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당시 황제께서 병환 중이셨는데,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흉노가 상류에서 오는 것은, 사람을 누르는 뜻이 있습니다. 황룡·경녕 연간 이래로, 선우가 중국에 조현하러 올 때마다 반드시 큰 변고가 있었습니다.” 황제께서 이 때문에 난처해하시며 공경들에게 물으시니, 그들 또한 국가의 재정만 헛되이 소모할 뿐이니 잠시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선우의 사자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였으나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때, 황문랑(黃門郎) 양웅(揚雄)이 글을 올려 간언하였습니다. “신이 듣기에 《육경(六經)》의 다스림은 어지러워지기 전에 미리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병가(兵家)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은미하지만, 그러나 대사의 근본이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선우가 글을 올려 조현을 청하였는데,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물리친다면, 신이 어리석게 생각하기에 한(漢)나라와 흉노가 이로부터 틈이 생길 것입니다. 흉노는 본래 오제(五帝)도 신하로 삼지 못하고 삼왕(三王)도 제압하지 못한 자들이니, 그들로 하여금 틈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감히 먼 옛날 일을 인용하지 않고, 청컨대 진(秦)나라 이래의 일로써 밝혀 보겠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강성함과 몽염(蒙恬)의 위세로도 오히려 감히 서하(西河)를 엿보지 못하고, 이에 장성을 쌓아 경계를 나누었습니다. 마침 한나라 초기 흥기할 때, 고제(高帝)의 위엄과 신령함으로도 30만 군대가 평성(平城)에서 곤욕을 치렀는데, 당시 기이한 계책을 가진 선비와 지략 있는 신하들이 매우 많았으나, 그들이 끝내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또한 고황후(高皇后) 때에는 흉노가 패역하고 오만하였으나, 대신이 임시변통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낸 뒤에야 포위를 풀 수 있었습니다. 효문제(孝文帝) 때에 이르러서는 흉노가 북쪽 변방을 침범하고 약탈하여, 정탐 기병이 옹현(雍縣) 감천궁(甘泉宮)까지 이르러 경사(京師)가 크게 놀랐습니다. 세 장군을 내보내 세류(細柳), 극문(棘門), 패상(霸上)에 주둔시켜 방비하게 하고서야, 몇 달 만에 철수하였습니다. 효무제(孝武帝)께서 즉위하시어 마읍(馬邑)의 계책을 세워 흉노를 꾀어내려 하셨으나, 재물만 허비하고 군사만 수고로웠을 뿐, 한 명의 적도 보지 못했으니, 하물며 선우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겠습니까! 그 후로 국가의 큰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만세의 계책을 크게 헤아리시어, 드디어 수십만의 군대를 크게 일으켜 위청(衛青)과 곽거병(霍去病)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전후 십여 년에 걸쳐 마침내 서하(西河)를 건너고 사막을 넘어 전안산(窴顏山)을 무찌르고 왕정(王庭)을 습격하였으며, 그들의 지역을 끝까지 쫓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고연산(姑衍山)에서 땅에 제사하였으며, 한해(瀚海)에 이르러 이름난 왕과 귀인 백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로부터 흉노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더욱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신하를 칭하기는 기꺼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대(前代)에 어찌 끝없는 비용을 기울이고 죄 없는 사람들을 부려 낭망산(狼望山) 북쪽에서 한때의 쾌락을 도모하기를 즐겨했겠습니까? 한 번 수고롭지 않으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없고, 잠시 비용을 쓰지 않으면 장구히 안녕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굶주린 호랑이의 입을 꺾기 위해 백만의 군대를 견디어 내고, 노산(盧山)의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 부고(府庫)의 재물을 퍼내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본시(本始) 초년에 이르러, 흉노가 반역할 마음을 품고 오손(烏孫)을 겁박하여 공주(公主)를 침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다섯 장군을 내보내 15만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당시에는 포획한 바가 거의 없었으나, 오직 위엄과 무용을 떨쳐 한나라 군대가 우레와 바람과 같음을 밝혔을 뿐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오히려 두 장군을 주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북적(北狄)이 복종하지 않으면 중국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없습니다.

원강(元康)·신작(神爵) 연간에 이르러서는 교화가 신명과 같아지고 큰 은혜가 널리 퍼졌으나, 흉노는 내부가 혼란하여 다섯 선우가 서로 다투어 서려 하였는데, 일축왕(日逐王)과 호한사 선우(呼韓邪單于)가 나라를 들어 귀순하여 엎드려 신하를 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포섭하였을 뿐, 계책을 오로지하여 제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조현하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오려 하지 않는 자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외국 사람들은 본성이 흉포하고, 체구가 우람하고 건장하며, 힘을 믿고 기세를 타서, 선한 도리로 감화시키기는 어렵고 악한 행동으로 방종해지기는 쉬우니, 그들이 강성할 때는 굴복시키기 어렵고, 화친할 때는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복하기 전에는 군대를 수고롭게 멀리 보내고, 국가의 재정을 기울이고, 시체가 엎어지고 피가 흐르며, 견고한 성을 깨뜨리고 적을 쳐부수는 것이 이와 같이 어려웠고; 이미 항복한 뒤에는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왕래하며 증여하고, 위엄과 의례를 갖추어 응대하는 것이 이와 같이 철저했습니다. 일찍이 대완(大宛)의 성을 함락시키고, 오환(烏桓)의 보루를 짓밟았으며, 고증(姑繒)의 장벽을 빼앗고, 탕저(蕩姐)의 목장을 쓸어버렸으며, 조선(朝鮮)의 깃발을 베어 넘기고, 양월(兩越)의 군기를 뽑아 버렸습니다. 가까운 것은 열흘이나 한 달의 싸움을 넘지 않았고, 먼 것은 두 계절의 수고를 넘지 않았으며, 본래 이미 그들의 정원을 갈아엎고 그들의 마을을 쓸어버려 군현(郡縣)을 설치한 것이 구름이 흩어지고 자리가 말리듯 하여, 뒤에 남은 재앙이 없었습니다. 오직 북적만은 그렇지 않아, 실로 중국의 강적이어서, 삼변(三邊)이 이에 비하면 모두 미치지 못합니다. 전대에 그들을 매우 중하게 여겼으니,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선우가 대의(大義)에 귀의하여 정성스럽고 진실된 마음을 품고서, 자기의 왕정(王庭)을 떠나와 알현하려 하니, 이는 상세(上世)가 남긴 계책이며, 신령께서 바라시는 바입니다. 국가가 비록 재물을 소모하더라도, 이는 부득이한 일입니다. 어찌 ‘사람을 누르러 온다’는 말로 거절하고, 기약 없는 약속으로 멀리하여, 지난날의 은덕을 없애고 장래의 틈을 열려 하십니까? 만일 의심하여 틈을 만들면, 그들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하여, 앞서의 말을 저버리고 지난날의 말을 빌미 삼아, 원한을 한나라에 돌리고 이로 인해 스스로 관계를 끊어, 끝내 귀순할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면, 위엄을 베풀어도 행해지지 않고, 설득해도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밝은 자는 형체 없는 것을 보고, 총명한 자는 소리 없는 것을 들으니, 진실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으면, 병기를 쓰지 않고도 근심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서, 한 번 틈이 생긴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안에서 마음을 수고롭히고, 말 잘하는 선비가 밖에서 달려가더라도, 틈이 없을 때만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서역(西域)을 도모하고, 차사(車師)를 제압하고, 성곽도호(城郭都護)와 36국을 설치하여, 해마다 수만을 헤아리는 비용을 쓴 것은, 어찌 강거(康居)와 오손이 백룡퇴(白龍堆)를 넘어 서쪽 변경을 침범할 수 있어서였겠습니까?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 년의 수고를, 한 번에 잃어버리면서, 열을 쓰면서 하나를 아끼는 것이니, 신은 사사로이 국가를 위해 불안하게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어지럽기 전, 싸우기 전의 때에 조금 유의하시어, 변경에서 싹트는 우환을 억제하소서!”

글을 올리니, 천자께서 깨달으시어 흉노 사자를 불러들이고, 다시 선우에게 답하는 조서를 고쳐 허락해 주었습니다. 양웅에게 비단 50필과 황금 10근을 하사하셨습니다. 선우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때 마침 병이 들어, 다시 사자를 보내어 명년에 조현하기를 청하였고, 황제께서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동현이 현달하고 총애를 받음이 날로 융성해지자, 정씨와 부씨가 그의 총애를 시기하였고, 공향후 부안과 식부궁이 모의하여 보정의 자리에 오르기를 구하였다. 마침 선우가 병으로 입조하지 않자, 식부궁이 상주하여 이르기를, “선우는 응당 11월에 입새해야 하였으나, 후에 병을 핑계로 삼았으니 다른 변고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손의 두 곤미는 나약하고 작으며, 비원치는 강성하여 동쪽으로 선우와 결탁하고 아들을 보내 시중들게 하니, 아마도 그들이 세력을 합쳐 오손을 병탄할까 두렵습니다. 오손이 병탄되면 곧 흉노는 강성해지고 서역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항복한 호인을 시켜 비원치의 사자로 가장하여 글을 올리게 하고, 천자의 위엄을 빌려 선우에게 신복하는 시자를 돌려보내라고 고한 뒤 그 주장을 하달하여, 흉노의 사자로 하여금 듣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상등의 용병 계책은 적의 계략을 꺾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외교를 꺾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서가 올려지자, 황상이 식부궁을 불러들이고 공경과 장군들을 불러 대의를 열었다. 좌장군 공손록은 이르기를, “중국은 항상 위엄과 신의로 이적을 회유하고 편안하게 하였는데, 식부궁이 속임수로 역모를 꾸며 불충한 계책을 바치려 하니, 허락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흉노는 선제의 은덕에 의지하여 변방의 요새를 지키며 번국을 칭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우가 질병으로 조하를 받들 수 없어 사자를 보내 직접 진술하였으니, 신자의 예를 잃지 않았습니다. 신 공손록은 몸을 보전하며 평생 흉노가 변경의 근심이 되는 것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식부궁이 공손록을 반박하여 이르기를, “신은 국가를 위해 생각하여,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도모하고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일을 미리 꾀하여 만세를 위한 계책을 세우려 합니다. 그런데 공손록은 자신의 천구마 같은 나이로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보증하려 합니다. 신과 공손록은 의견이 다르니, 같은 날에 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이르기를, “좋다!”라 하고, 이에 군신들을 물러가게 하고 홀로 식부궁과 의논하였다.

식부궁이 이 틈을 타서 건의하기를, “재이가 누차 나타났으니, 아마도 반드시 비상한 변고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대장군을 파견하여 변경의 군대를 순시하고 무비를 정비하게 하며, 한 군수를 참수하여 위엄을 세워 사방의 이적을 진압하고, 이로써 변이를 물리쳐 대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옳게 여기고 이 일로 승상 왕가에게 물으니, 왕가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백성을 움직이려면 행동으로 해야지 말로 해서는 안 되고, 하늘에 응답하려면 실제로 해야지 문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래의 백성도 오히려 속일 수 없거늘, 하물며 하늘의 신명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변이를 드러냄은 인군을 경계하고 깨우쳐 주려는 것이니, 그로 하여금 깨달아 정도로 돌아가 정성을 다하고 선을 행하게 하면 민심이 기뻐 복종하고 천의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 잘하는 선비가 한쪽 끝만을 보고, 때로는 망령되이 사사로운 뜻으로 성상과 역법에 부회하여, 공허하게 흉노, 오손, 서강의 환난을 날조하여 창과 방패를 동원하고 권변의 계책을 세우려 하니, 이는 천도를 따르는 방법이 아닙니다. 군수나 국상이 죄가 있으면 수레를 달려 조정으로 나아와 팔짱을 끼고 죽음을 받들며 두려워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데, 말을 잘하는 자가 편안한 국면을 흔들어 위태롭게 하려 함은, 말재주가 빠르고 듣기 좋으나 실로 따를 수 없습니다. 정사를 논하는 자들의 폐단은 아첨과 영합, 모나고 험악함, 말재주와 지나친 각박함에 있습니다. 옛날 진목공이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군대를 패배시키고서,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꾸짖으며 일을 그르친 신하를 미워하고 노성한 신하의 말을 생각하였기에 그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옛날의 경계와 훈계를 살피시어 거듭 참고하시고, 먼저 들은 말을 주된 것으로 삼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황상이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