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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 삼십이

제 32 편

【한기삼십이】 유목작액(旃蒙作噩) 해부터 시작하여 유목엄무(柔兆阉茂) 해에 끝나니, 모두 2년이다.

세조광무황제 상지상

건무원년(을유, 서기 25년)

1 봄 정월, 방망(方望)이 안릉인(安陵人) 궁림(弓林)과 함께 전 정안공(定安公) 유영(劉嬰)을 천자로 옹립하고,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임경(臨涇)에 주둔하였다.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승상 이송(李松) 등을 보내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들을 모두 참수하였다.

2 등우(鄧禹)가 기관(箕關)에 도착하여 하동군(河東郡) 도위(都尉)를 격파하고, 군대를 진격시켜 안읍(安邑)을 포위하였다.

3 적미군(赤眉軍)의 두 부대가 홍농(弘農)에서 합류하였다. 경시제가 토난장군(討難將軍) 소무(蘇茂)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으나, 소무의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적미군의 무리가 이에 대규모로 집결하여, 1만 명을 1영(營)으로 나누어 모두 30영을 만들었다. 3월, 경시제가 승상 이송을 보내 적미군과 노향(蓩鄉)에서 교전하게 하였으나, 이송 등이 크게 패하여 3만여 명이 죽었다. 적미군은 이에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호현(湖縣)까지 진격하였다.

4 촉군(蜀郡) 공조(功曹) 이웅(李熊)이 공손술(公孫述)에게 스스로 천자라 칭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여름 4월, 공손술이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성가(成家)라 하고, 연호를 용흥(龍興)으로 고쳤다. 이웅을 대사도(大司徒)로, 공손술의 동생 공손광(公孫光)을 대사마(大司馬)로, 공손회(公孫恢)를 대사공(大司空)으로 임명하였다. 월수(越巂) 사람 임귀(任貴)가 군성을 점거하고 공손술에게 항복하였다.

5 소왕(蕭王) 유수(劉秀)가 북쪽으로 원씨(元氏)에서 유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 등의 도적을 공격하여 북평(北平)까지 추격하며 연이어 격파하였다. 또한 순수(順水) 북쪽 기슭에서 교전하였는데, 유수가 승세를 타고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오히려 도적에게 패배하였다. 유수는 스스로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렸는데, 마침 돌기(突騎) 왕풍(王豐)이 말에서 내려 유수에게 자신의 말을 주어, 유수는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패배한 병사들은 흩어져 돌아와 범양(范陽)으로 물러나 지켰다. 군중에서 유수가 보이지 않자, 어떤 이는 그가 이미 전사했다고 말하여 장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한(吳漢)이 말하기를 "여러분 힘을 내시오! 소왕의 조카가 남양(南陽)에 있으니, 어찌 군주가 없을까 걱정하겠소!"라고 하였다. 무리는 두려워하였으나, 며칠 후에야 안정되었다. 도적들은 비겼지만 승리를 거두었으나, 소왕의 위명을 두려워하여 밤에 물러나 떠났다. 대군이 다시 안차(安次)까지 나아가 연이어 싸워 격파하였다. 도적들은 어양(漁陽)으로 퇴각하며 길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강노장군(强弩將軍) 진준(陳俊)이 소왕에게 말하기를 "도적들에게는 군수 물자가 없으니, 경기병을 보내 도적들 앞서 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보루를 강화하게 하여 그들의 양식을 끊으면, 싸우지 않고도 섬멸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왕이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진준에게 경기병을 이끌고 급히 도적들 앞서 가게 하여, 백성들의 보루가 견고하고 온전한 것을 보면 명하여 굳게 지키게 하고, 들판에 흩어져 있는 것은 이 틈을 타서 약탈하게 하였다. 도적들이 도착했을 때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마침내 패주하여 흩어졌다. 소왕이 진준에게 말하기를 "이 도적들을 곤경에 빠뜨린 것은 장군의 계책 덕분이오."라고 하였다.

6 풍이(馮異)가 이일(李軼)에게 편지를 보내 화복(禍福)을 설명하며 소왕에게 귀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일은 장안(長安)이 이미 위급함을 알았으나, 유백승(劉伯升)이 살해된 일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여, 답장하기를 "저 이일은 본래 소왕과 함께 먼저 한나라를 중흥시킬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낙양(洛陽)을 지키고 장군이 맹진(孟津)을 지키며, 모두 요해처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기회로, 뜻을 함께하여 덕을 같이하기를 바랍니다. 깊이 소왕께 전하여 주시어, 제가 졸렬한 지혜를 바쳐 국가를 보좌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일은 편지를 주고받은 이후로 다시는 풍이와 교전하지 않았고, 이에 풍이는 북쪽으로 천정관(天井關)을 공격하여 상당군(上黨郡)의 두 성을 함락하고, 남쪽으로는 하남(河南) 성고(成皋) 동쪽의 13개 현을 수복하였으며, 항복한 자가 10여만 명에 달했다. 무발(武勃)이 1만여 명을 이끌고 배반한 자들을 공격하자, 풍이가 사향성(士鄉城) 아래에서 그와 교전하여 무발을 크게 격파하고 참수하였다. 이일은 성문을 닫고 구원하지 않았다. 풍이는 이일의 편지가 실제로 효과가 있음을 보고 자세히 소왕에게 보고하였다. 소왕이 풍이에게 답장하여 말하기를 "계문(季文, 이일의 자)은 간사함이 많아, 남이 그 요점을 잡기 어렵다. 지금 그의 편지를 마땅히 경계해야 할 군수와 도위에게 알리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소왕이 이일의 편지를 공개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주유(朱鮪)가 이 일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이일을 암살하였고, 이로부터 낙양성 안은 인심이 흩어져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주유는 소왕이 북벌하여 하내(河內)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부장 소무(蘇茂)와 가강(賈强)에게 3만여 명을 이끌고 공현(鞏縣)의 황하를 건너 온현(溫縣)을 공격하게 하였다. 주유 자신은 수만 명을 이끌고 평음(平陰)을 공격하여 풍이를 견제하였다. 격문이 하내에 도착하자, 구순(寇恂)이 즉시 군대를 이끌고 급히 출진하며, 속한 여러 현에 영을 내려 온현으로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군관들이 모두 간하기를 "지금 낙양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오고 있어 앞뒤가 끊이지 않습니다. 모든 군대가 전부 집결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출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구순이 말하기를 "온현은 하내의 방벽입니다. 온현을 잃으면 군성이 지켜지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급히 온현으로 달려갔다. 다음 날 교전이 벌어졌는데, 풍이가 보낸 원군과 각 현의 군대가 마침 도착하였다. 구순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성루에 올라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크게 외치기를 "유공(劉公)의 군대가 도착했다!"라고 하였다. 소무의 군대가 이를 듣고 진영이 흔들렸다. 구순이 그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풍이도 황하를 건너 주유를 공격하자 주유는 달아났다. 풍이와 구순이 낙양까지 추격하여 성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낙양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성문을 낮에도 닫았다.

풍이와 구순이 격문을 전하여 전과를 보고하자, 장수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며, 이 기회에 황제의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장군 남양(南陽) 사람 마무(馬武)가 먼저 말하기를 "대왕께서 비록 겸손히 사양하시나, 종묘와 사직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황제 자리에 오르신 뒤에 정벌하는 일을 의논하셔야 합니다. 지금 어떤 자들이 적적(賊賊)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달려가 공격하게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소왕이 놀라 말하기를 "장군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죽일 놈이다!"라고 하고, 이에 군대를 이끌고 계현(薊縣)으로 돌아갔다. 또 오한을 시켜 경감(耿弇), 경단(景丹) 등 13명의 장군을 이끌고 유래 등의 도적을 추격하게 하여, 참수 1만 3천여 급을 올리고, 마침내 준미(浚靡)까지 추격한 후에야 돌아왔다. 도적들은 요서(遼西), 요동(遼東)으로 흩어져 들어갔으나, 오환(烏桓)과 맥인(貊人)의 습격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전멸하였다.

도호장군(都護將軍) 가복(賈復)이 오교군(五校軍)과 진정(真定)에서 교전하다가 중상을 크게 입었다. 소왕이 매우 놀라 말하기를 "내가 가복으로 하여금 홀로 군대를 이끌지 못하게 한 것은, 그가 경적(輕敵)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랬구나. 나의 명장을 잃었도다! 듣자니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라 하니, 만약 딸을 낳으면 내 아들이 그녀를 아내로 맞을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내 딸이 그와 혼인할 것이다. 그로 하여금 처자식을 걱정하지 않게 하리라." 하였다. 가복의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낫고, 계현에서 소왕을 따라잡아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였다.

중산(中山)에 도착하자, 장수들이 다시 황제의 존호를 올렸으나, 소왕은 또 따르지 않았다. 남평극(南平棘)에 이르자, 장수들이 또 굳게 청하였으나, 소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수들이 물러나려 할 때, 경순(耿純)이 나아가 말하기를 "천하의 사대부들은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오가는 가운데에서 대왕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본래 용의 비늘에 붙고 봉황의 날개에 의지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때를 끌며 무리의 뜻을 거스르고, 정식으로 존호를 정하지 않으시니, 신은 아마 사대부들이 희망이 끊기고 계책이 다하여, 떠나 돌아갈 마음을 품고 더 이상 오래도록 스스로 고생하지 않으려 할까 두렵습니다.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순의 말이 매우 간절하고 깊었기에, 소왕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생각해 보겠소."라고 하였다.

호현(鄗縣)에 도착하여, 풍이를 호현으로 불러 사방의 동정을 물었다. 풍이가 말하기를 "경시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며, 종묘의 근심은 대왕께 있습니다. 마땅히 무리의 청을 따르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유생(儒生) 강화(强華)가 관중(關中)에서 《적부부(赤伏符)》를 받들고 와서 소왕을 알현하며 말하기를 "유수(劉秀)가 군사를 일으켜 불도(不道)를 잡고, 사방의 이민족이 구름처럼 모여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사칠지제(四七之際)에 화(火)가 주(主)가 된다."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에 다시 상주하여 청하였다. 6월 기미일(己未日), 소왕이 호현의 남쪽 교외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연호를 고치고,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7 등우가 안읍을 포위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경시제의 대장군 번참이 수만 명을 이끌고 태양도를 건너 등우를 공격하려 했다. 등우는 해현 남쪽에서 맞아 싸워 번참을 참살했다. 왕광, 성단, 유균이 병력을 합쳐 십여만 명이 되어 다시 함께 등우를 공격했고, 등우의 군대는 불리해졌다. 이튿날 계해일, 왕광 등이 육갑궁일이라 출병하지 않자, 등우는 틈을 타 군대를 다시 정비할 수 있었다. 갑자일, 왕광이 전군을 출동시켜 등우를 공격했다. 등우는 군중에 명령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하고, 적군이 진영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야 장수들에게 명령을 전하여 북을 울리며 진격하게 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했다. 왕광 등은 모두 도망쳤고, 등우는 추격하여 유균과 하동태수 양보를 참수했다. 이에 하동을 평정했으며, 왕광 등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장앙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적미군이 조만간 도착할 터이니, 우리가 멸망당할 날이 머지않았다. 차라리 장안을 약탈하고 동쪽으로 남양으로 돌아가자. 일이 잘 안 되면 호수나 늪 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입궁하여 경시제에게 권유했으나, 경시제가 노하여 허락하지 않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경시제는 왕광, 진목, 성단, 조맹을 신풍에 주둔시키고, 이송을 호현에 주둔시켜 적미군을 막게 했다. 장앙, 요잠, 호은, 신도건이 외효와 함께 모의하여, 입추일에 치르는 추로 제사 때 함께 경시제를 협박하여 이전에 정한 계획을 완성하려 했다. 경시제가 이 사실을 알고 병을 핑계로 출궁하지 않고, 장앙 등을 불러들여 모두 죽이려 했으나, 외효만이 병을 핑계로 입궁하지 않고 빈객 왕준, 주종 등과 함께 병사로 스스로를 방어했다. 경시제가 망설이는 사이, 장앙, 요잠, 호은이 변고를 의심하여 갑자기 뛰쳐나갔다. 오직 신도건만이 남아 있었는데, 경시제가 그를 참수하고, 집금오 등엽에게 병사를 이끌고 외효의 관저를 포위하게 했다. 장앙, 요잠, 호은이 병사를 이끌고 궁문을 불태우고 궁중으로 쳐들어가 싸웠고, 경시제는 크게 패했다. 외효도 포위를 뚫고 나와 천수로 도망쳤다. 이튿날 아침, 경시제는 동쪽으로 신풍으로 달아나 조맹에게 의탁했다. 경시제는 또 왕광, 진목, 성단이 장앙 등과 함께 모의했다고 의심하여, 함께 불러들였다. 진목과 성단이 먼저 도착하자 즉시 참수되었다. 왕광이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장앙 등과 합류했다.

8 적미군이 화음으로 나아갔는데, 군중에 제나라 출신의 무당이 있어, 자주 북을 치고 춤추며 성양경왕 유장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당이 헛소리를 하여 말하기를 "경왕이 크게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천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도적이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무당을 비웃는 자가 있으면 병에 걸렸고, 군중이 놀라고 동요했다. 방망의 동생 방양이 번숭 등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장군께서 백만 대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제왕의 도성을 공격하면서도 칭호가 없어 '군적'이라 불리니, 오래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유씨 종실을 세워 대의를 붙잡고 토벌을 행하여, 이로써 명령을 내리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번숭 등이 옳게 여겼고, 무당의 말은 더욱 심해졌다. 앞으로 정현에 이르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장안이 가까워졌는데 귀신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유씨 종실을 찾아 함께 받들어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전에 적미군이 식현을 지나치면서, 옛 식후 유맹의 아들 유공, 유무, 유분자 세 사람을 약탈하여 군중에 데리고 다녔다. 유공은 어릴 적부터 《상서》를 배웠고, 후에 번숭을 따라 낙양에서 경시제에게 항복하여 다시 식후에 봉해졌고 시중이 되어 장안에 머물렀다. 유무와 유분자는 군중에 남아 우교졸사 유협경의 관할에 속하여 소를 치게 되었다. 번숭 등이 황제를 세우려 할 때, 군중에서 성양경왕 유장의 후손을 찾았는데, 일흔 명 남짓을 찾았고, 오직 유무, 유분자와 옛 서안후 유효만이 혈통이 가장 가까웠다. 번숭 등이 말하기를 "듣건대 옛날 천자가 군사를 통솔할 때 '상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라 하고, 이에 나무쪽에 부신을 써서 '상장군'이라 하였다. 또 빈 나무쪽 두 개를 대나무 상자에 넣고 정현 북쪽에 단장을 쌓아 성양경왕에게 제사 지내고, 여러 삼로와 종사들이 모두 와서 대회에 참석하게 했다. 유분자 등 세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 나이 순서대로 나무쪽을 뽑게 하였는데, 유분자가 나이가 가장 어려 마지막으로 뽑아 부신을 얻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신하라고 칭하며 절을 올렸다. 유분자는 당시 열다섯 살로, 머리는 풀어헤치고 맨발에 헌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이 새파래져 땀을 흘리며 여러 사람이 절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울 것 같았다. 유무가 그에게 말하기를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자, 유분자는 곧 부신을 깨물어 던져 버렸다. 서선을 승상으로, 번숭을 어사대부로, 봉안을 좌대사마로, 사록을 우대사마로 임명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열경과 장군을 맡겼다. 유분자는 비록 황제로 세워졌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유협경을 알현하러 갔고, 때로는 나가서 목동들과 놀고 싶어 하기도 했다. 유협경이 노하여 그를 제지했고, 번숭 등도 더 이상 그를 찾아보지 않았다.

가을 7월 신미일,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등우를 대사도로 임명하고 찬후에 봉하여 식읍 만 호를 내렸다. 등우는 당시 스물네 살이었다. 또 대사공을 선임하는 일을 의논했는데, 광무제가 《적부부》에 '왕량이 주위를 맡아 현무가 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정축일에 야왕현령 왕량을 대사공으로 임명했다. 또 참언에 따라 평적장군 손함을 대사마 대행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임오일, 오한을 대사마로 임명했다.

당초 경시제가 낭야 사람 복잠을 평원태수로 임명했다. 당시 천하에 병란이 일어났으나, 오직 복잠만이 평온을 유지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문하독이 복잠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을 꾀했으나, 복잠이 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신뢰하고 따랐으며, 평원군 전역이 복잠 덕분에 보전될 수 있었다. 광무제가 복잠을 불러 상서로 삼고, 옛 전장법도를 제정하는 일을 맡겼다. 또 등우가 서쪽으로 정벌을 떠났으므로, 복잠을 사직으로 임명하여 대사무를 대행하게 했다. 광무제가 매번 출정할 때마다 자주 복잠을 남겨 진수하게 했다.

등우가 분음에서 황하를 건너 하양으로 들어갔다. 경시제의 좌보도위 공승섭이 부중 십만 명을 이끌고 좌풍익의 군대와 함께 아현에서 등우를 저지했으나, 등우가 다시 격파하여 쫓아냈다.

종실 유무가 경현과 밀현 사이에서 부중을 모아 스스로 염신장군이라 칭하고, 영천과 여남을 함락시켜 부중이 십여만 명에 달했다. 광무제가 표기대장군 경단, 건위대장군 감엄, 강노장군 진준을 보내 그를 공격하게 했다. 유무가 와서 항복하니, 중산왕에 봉해졌다.

기해일, 광무제가 회현에 도착하여 감엄과 진준을 오사진에 주둔시켜 형양 이동 지역을 방비하게 하고, 오한에게 건위대장군 주호 등 열한 명의 장군을 이끌고 낙양에서 주유를 포위하게 했다. 8월, 광무제가 하양으로 나아갔다.

이송이 호현에서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경시제를 따라 조맹과 함께 장안에서 왕광과 장앙을 공격했다. 한 달 넘게 싸움을 계속하여 왕광 등이 패하여 도망치자, 경시제는 장신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적미군이 고릉에 도착하자, 왕광과 장앙 등이 가서 맞아 항복했고, 이에 함께 병력을 합쳐 동도문을 공격했다. 이송이 출전했으나 적미군이 이송을 생포했다. 이송의 동생 이황이 성문교위가 되어 성문을 열고 적미군을 성 안으로 들였다. 9월,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왔다. 경시제는 단기로 도망쳐 주성문을 통해 나갔다. 식후 유공은 적미군이 자기 동생을 황제로 세웠기 때문에 스스로 조옥에 투옥했다. 경시제가 패하여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옥에서 나와 정도왕 유지에게 갔다. 유지가 그를 위해 형구를 풀어주고 함께 경시제를 따라 위수 가에 이르렀다. 우보도위 엄본은 경시제를 잃으면 적미군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경시제를 고릉으로 데려가고, 엄본이 병사를 이끌고 숙위했으나, 사실은 그를 포위한 것이었다. 경시제의 장상들은 모두 적미군에게 항복했고, 오직 승상 조경만이 항복하지 않고 칼을 들고 싸우다 죽었다.

신미일,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경시제를 회양왕으로 봉하고, 관리와 백성 중에 감히 그를 죽이는 자는 역모죄와 같게 하며, 그를 관청에 데려오는 자는 열후에 봉한다고 하였다.

당초, 완현 사람 탁무(卓茂)는 너그럽고 후하며 인자하고 사랑이 많았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담박하게 도를 즐기며, 질박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맑음과 탁함 사이에 있었다.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사람들과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향의 오랜 친구들도, 비록 품행과 재능이 탁무와 달랐을지라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애제(哀帝)·평제(平帝) 연간에 그는 밀현(密縣) 현령이 되어 백성을 자식처럼 여겼고, 선한 사람을 천거하여 가르쳤으며, 입에서 나쁜 말이 없었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가까이하고 사랑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부하의 정장(亭長)이 자기가 보낸 쌀과 고기를 받았다고 고발하자, 탁무가 말했다. “정장이 네게 요구한 것이냐, 아니면 네가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가 받은 것이냐, 혹은 네가 평소에 인정으로 보낸 것이냐?” 그 사람이 말했다. “제가 스스로 보낸 것입니다.” 탁무가 말했다. “네가 보냈고 그가 받았는데, 어찌하여 고발하는 것이냐?” 그 사람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현명한 임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관리로 하여금 백성에게 요구하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 저는 관리를 두려워하여 물건을 보냈고, 관리가 이미 받았기 때문에 와서 고발한 것입니다.” 탁무가 말했다. “너는 간사한 백성이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어지럽지 않고 금수와 다른 것은, 인의(仁義)와 예(禮)가 있어 서로 존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어찌 이를 닦고자 하지 않으며, 어찌 높이 날아 멀리 가서 인간 세상에 있지 않을 수 있겠느냐! 관리가 본래 위세를 빌려 억지로 요구하지 말아야 할 따름이다. 정장은 평소 좋은 관리였으며, 명절에 물건을 보내는 것은 예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법이 어찌하여 금하는 것입니까?” 탁무가 웃으며 말했다. “법이 설정한 것은 큰 법이고, 예가 순응하는 것은 인정이다. 지금 내가 예로써 너를 가르치니, 너는 반드시 원망이 없을 것이다. 법으로 너를 징계한다면, 너는 어찌 손발을 어디에 둘 바를 알겠느냐! 한 집 안에서도 작은 것은 죄를 논하고 큰 것은 사형에 처할 수 있다. 너는 잠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아라.” 당초 탁무가 현에 부임했을 때, 폐지하고 세우는 일이 있어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고, 이웃 성에서 들은 사람들은 그를 무능하다 여겼다. 하남군(河南郡)이 그에게 대리 현령을 두었다. 탁무는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정사를 처리했다. 몇 년 뒤 교화가 크게 행해져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게 되었다. 경부승(京部丞)으로 승진하여 떠날 때, 밀현의 노인과 아이들은 모두 목 놓아 울며 따라와 전송했다. 왕망(王莽)이 섭정할 무렵, 탁무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한 후, 먼저 탁무를 찾았는데, 당시 탁무는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었다. 갑신일(甲申日)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름이 천하에 빛나는 사람은 마땅히 천하의 후한 상을 받아야 한다. 지금 탁무를 태부(太傅)로 임명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한다.”

신 사마광(司馬光)이 말한다: 공자(孔子)께서 “선한 사람을 들어 쓰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면, 백성들이 서로 면려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순(舜)이 고요(皐陶)를 들어 쓰고, 탕(湯)이 이윤(伊尹)을 들어 쓰니, 어질지 못한 사람들이 멀어진 것은 덕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초기, 여러 영웅들이 서로 다투며 쫓고 천하는 가마솥이 끓는 듯 혼란스러웠으며, 그 사이에 적을 무찌르고 성을 함락시키는 자, 권모와 변설로 교묘히 꾸미는 자들이 세상에 중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광무제는 오직 충성스럽고 후한 신하를 선택하고, 법을 잘 지키는 착한 관리에게 표창을 내려, 민간에서 그들을 발탁하여 여러 공경(公卿)의 윗자리에 두었다. 이는 그가 옛것을 회복하고 오래도록 나라를 누린 까닭이니, 대저 그가 무엇이 먼저 할 일인지 알고 근본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낙양(洛陽)을 수개월 포위했으나, 주흠(朱鮪)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광무제가 정위(廷尉) 잠팽(岑彭)이 일찍이 주흠의 교위(校尉)를 지냈으므로, 그를 보내어 주흠을 설득하게 했다. 주흠이 성 위에 있고 잠팽이 성 아래에서 그에게 성패와 이해를 설명했다. 주흠이 말했다. “대사도(大司徒) 유연(劉縯)이 해를 입었을 때, 내가 그 계획에 참여했고, 또 경시제(更始帝)에게 소왕(蕭王)을 북벌(北伐) 보내지 말도록 간언했으니, 내가 스스로 죄가 깊고 무거움을 알고 있어 감히 항복하지 못하겠소!” 잠팽이 돌아와 자세히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가 말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원한을 기억하지 않는다. 주흠이 지금 항복한다면 관직과 작위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하물며 형벌을 논하겠느냐! 황하(黃河)의 물이 여기 증인이니, 내가 말을 어기지 않겠다!” 잠팽이 다시 가서 주흠에게 알리자, 주흠이 성 위에서 밧줄을 내리며 말했다. “만약 과연 믿을 만하다면,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오시오.” 잠팽이 빨리 나아가 밧줄을 잡고 성에 오르려 하자, 주흠이 그에게 진실한 뜻이 있음을 보고 마침내 항복하기로 약속했다. 신묘일(辛卯日)에 주흠이 손을 등 뒤로 묶고 잠팽과 함께 하양(河陽)에 이르렀다. 광무제가 그의 결박을 풀어 주고 불러 보았으며, 또 잠팽에게 명하여 밤에 주흠을 성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이튿날 아침, 주흠이 소무(蘇茂) 등과 함께 모든 부하를 이끌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광무제가 주흠을 평적장군(平狄將軍)으로 임명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했다. 후에 소부(少府)를 지냈고, 작위가 여러 대에 걸쳐 전해졌다.

광무제가 시어사(侍御史) 하내(河內) 사람 두시(杜詩)를 보내어 낙양(洛陽)을 안무하게 했다. 장군 소광(蕭廣)이 병사들을 방자하게 놀아나게 하자, 두시가 경고하고 타일렀으나 고쳐지지 않으므로, 마침내 소광을 쳐 죽였다. 두시가 돌아와 상황을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가 그를 불러 보고 계극(棨戟)을 하사하고, 그리하여 발탁하여 임용했다.

겨울 10월 계축일(癸丑日)에 광무제가 낙양에 들어가 남궁(南宮)에 거처하고, 이에 도읍을 정했다.

적미군(赤眉軍)이 글을 내려 말하기를 “유성공(劉聖公)이 항복하면 장사왕(長沙王)으로 봉하겠다. 20일이 넘으면 다시 받지 않겠다.”라고 했다. 경시제(更始帝)가 유공(劉恭)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자, 적미군이 장수 사록(謝祿)을 보내어 그를 맞이하게 했다. 경시제가 사록을 따라, 상체를 드러내고 유분자(劉盆子)에게 새끼(璽綬)를 바쳤다. 적미군이 경시제를 뜰에 앉히고 죽이려 하자, 유공과 사록이 그를 위해 간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마침내 경시제를 끌어내었다. 유공이 쫓아가며 외쳤다. “내가 진실로 이미 힘을 다했으니, 청컨대 먼저 죽게 해 주시오!”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니, 번숭(樊崇) 등이 급히 함께 나아가 말렸다. 이에 경시제를 사면하여 외위후(畏威侯)로 봉했다. 유공이 또 거듭 간청하여 마침내 장사왕으로 봉해졌다. 경시제는 항상 사록에게 의지하여 살았고, 유공도 그를 보호했다.

유분자가 장락궁(長樂宮)에 살았는데, 삼보(三輔)의 군현과 영장(營長)들이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 병사들이 이 공물을 약탈했고, 또 여러 차례 폭력적으로 관리와 백성을 약탈했으므로, 이에 각지에서 다시 굳게 지켰다.

백성들이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할지 몰라, 등우(鄧禹)가 승세를 타고 홀로 진군하면서 군대의 기율이 엄정하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바람을 바라보며 서로 부축하고 짐을 등에 지고 군대를 맞이했으며, 항복하는 자가 날마다 수천 명에 이르러, 부대의 수가 백만이라 일컬어졌다. 등우가 이르는 곳마다 곧 수레를 멈추고 부절(符節)을 짚고 그들을 위로하니, 늙은이와 어린이, 앞머리가 드리운 아이와 머리가 센 노인이 그의 수레 아래에 가득 차서,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에 등우의 명성이 관서(關西)에 떨쳤다.

여러 장수와 지방 호걸들이 모두 등우에게 권하여 곧바로 장안(長安)을 공격하게 했으나, 등우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쪽의 인원은 비록 많으나 싸울 수 있는 자는 적고, 앞에는 의지할 비축이 없으며, 뒤에도 군량을 수송해 올 물자가 없다. 적미군이 막 장안을 점령하여 재물과 곡식이 충분하고 병기의 날이 예리하여, 감당할 수 없다. 저 도적들은 무리 지어 모여 있을 뿐, 오래 갈 계책이 없어, 재물과 곡식이 비록 많아도 변고가 많으니, 어찌 오래 지킬 수 있겠는가! 상군(上郡), 북지(北地), 안정(安定) 세 군(郡)은 땅이 넓고 인구가 드물며, 곡식이 풍부하고 가축이 많으니, 내가 잠시 북도(北道)에서 군대를 쉬게 하고, 그 지방의 곡식으로 병사를 먹여 그들의 허점을 관찰한다면, 이렇게 한 후에야 그들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순읍(栒邑)에 이르렀는데, 이르는 곳마다 여러 영채와 성군(城郡)과 현읍(縣邑)이 모두 성문을 열고 귀부했다.

18. 황제가 잠팽을 보내어 형주(荊州)의 여러 도적을 공격하게 하여, 주현(犨縣)과 섭현(葉縣) 등 십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19. 11월 갑오일(甲午日)에 황제가 회현(懷縣)에 행차했다.

20. 양왕(梁王) 유영(劉永)이 수양(睢陽)에서 황제라 일컬었다.

21. 12월 병술일(丙戌日)에 황제가 낙양으로 돌아왔다.

22. 삼보(三輔) 지역의 백성들이 적미군의 포악함에 시달려, 모두 경시제 유현(劉玄)을 가엾게 여겨 그를 구해 내고자 했다. 장앙(張卬) 등이 이 일을 깊이 걱정하여, 사록(謝祿)을 시켜 경시제를 목 졸라 죽였다. 유공(劉恭)이 밤에 가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등우(鄧禹)로 하여금 그를 패릉(霸陵)에 장사 지내게 했다. 중랑장(中郎將) 완현(宛縣) 사람 조희(趙熹)가 무관(武關)을 나가려다 길에서 경시제의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알몸에 맨발로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조희가 자기의 모든 재물과 식량을 내어 그들에게 주고, 그들을 호송하며 나아갔다. 완왕(宛王) 유사(劉賜)가 이 일을 듣고 그들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23. 외후가 천수로 돌아와 다시 그의 부중을 모으고 옛 기업을 부흥하며 스스로 서주 상장군이라 칭했다. 삼보 지역에서 전란을 피한 사대부들이 대부분 외후에게 귀부하자, 외후는 몸을 낮추어 그들을 접대하며 포의지교를 맺었다. 그는 평릉 사람 범준을 스승이자 벗으로 받들고, 전 양주자사 하내 사람 정흥을 제주로, 무릉 사람 신도강과 두림을 치서로, 마원을 수덕장군으로, 양광, 왕준, 주종, 그리고 평양 사람 행순, 아양 사람 왕첩, 장릉 사람 왕원을 대장군으로, 안릉 사람 반표 무리를 빈객으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외후의 명성은 서주를 진동시키고 산동 지역까지 전해졌다.

마원은 젊었을 때 집안 살림이 넉넉지 않아 형 마황을 떠나 변방 군으로 가서 농사와 목축을 하려 했다. 마황이 말했다. “너는 큰 인재이니 늦게 성취해야 한다. 좋은 장인은 다듬지 않은 목재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너는 우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라.” 이에 마원은 북지로 가서 농사와 목축을 했다. 그는 항상 빈객들에게 말했다.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곤궁할 때 더욱 굳세어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 후에 그는 수천 마리의 가축과 수만 곡의 곡식을 소유하게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하며 말했다. “재산을 늘리는 것은 그것으로 구제하고 베푸는 데 귀중함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곧 수전노일 뿐이다!” 이내 재산을 모두 친척과 옛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외후가 현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외후는 그를 매우 존중하며 함께 계책을 결정하고 도모했다. 반표는 반치의 아들이다.

24. 처음에 평릉 사람 두융은 여러 대에 걸쳐 하서에서 벼슬하며 그곳의 풍토와 인정을 잘 알았다. 그는 경시제의 우대사마 조맹과 친하게 지내며 은밀히 형제들에게 말했다. “천하의 안위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 하서 지역은 부유하고 황하를 험준한 지형으로 삼고 있으며, 장액속국에는 정예 기병이 만 명이나 있어, 만약 긴급한 일이 생기면 황하 나루를 봉쇄하여 스스로 지키기에 충분하니, 이는 자손을 보존할 곳이다!” 이에 조맹을 통해 하서로 가기를 청했다. 조맹이 경시제에게 두융을 추천하여, 그를 장액속국 도위로 임명했다. 두융이 부임한 후 호걸들을 위로하며 사귀고, 강족과 호족을 어루만져 회유하여 그들의 환심을 크게 얻었다. 이때 주천태수 안정 사람 양통, 금성태수 고균, 장액도위 무릉 사람 사포, 주천도위 축증, 돈황도위 신융은 모두 주군의 뛰어난 인재였는데, 두융은 그들과 모두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경시제가 실패하자, 두융은 양통 등과 함께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는 혼란하여 누구에게로 돌아갈지 모른다. 하서 지역은 강과 호 사이에 외로이 떨어져 있어, 만약 마음을 합쳐 협력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고, 권력이 같고 힘이 비슷하면 서로 통솔할 수도 없다. 마땅히 한 사람을 추대하여 대장군으로 삼고, 함께 오군을 보전하며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자.” 의논이 결정된 후, 각자 또 사양했다.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모두 함께 양통을 추대했다. 양통이 굳게 사양하자, 이에 두융을 추대하여 하서 오군 대장군의 임무를 대행하게 했다. 무위태수 마기와 장액태수 임중은 모두 고립되어 당여가 없었으므로, 이에 함께 글을 써서 그들에게 알리니, 두 사람은 인수와 인끈을 풀고 떠났다. 이에 양통을 무위태수로, 사포를 장액태수로, 축증을 주천태수로, 신융을 돈황태수로 임명했다. 두융은 속국에 거주하며 여전히 도위의 직무를 겸했다. 종사를 설치하여 오군을 감찰하게 했다. 하서 지역의 민풍은 질박했고, 두융 등의 정령도 너그럽고 온화하여 위아래가 서로 친밀하며 안정되고 풍요로웠다. 그들은 병마를 정비하고, 전투와 활쏘기를 익히며, 봉화 경보 제도를 명확히 했다. 강과 호가 변경을 침범하면 두융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각 군과 서로 구원하여, 모두 부절을 맞춘 듯이 매번 적을 물리쳤다. 이후 강과 호는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순종하고 친히 귀부했으며, 내지 군현에서 기근을 피해 유랑하던 백성들도 그들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25. 왕망의 시대에 천하 사람들은 한나라의 은덕을 그리워했다. 안정 삼수 사람 노방이 좌곡에 살면서 거짓으로 자신이 한무제의 증손자 유문백이라고 칭하며 말했다. “증조모는 흉노 혼야왕의 누이이다.” 항상 이러한 말로 안정 일대에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시켰다. 왕망 말년에 그는 삼수속국의 강과 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경시제가 장안에 도착한 후, 노방을 불러 기도위로 삼고 안정 이서 지역을 진압하고 안무하게 했다. 경시제가 실패한 후, 삼수 지역의 호걸들이 함께 노방을 상장군, 서평왕으로 옹립하고, 사자를 보내 서강과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선우는 생각했다. “한나라는 중간에 끊어졌고, 유씨가 와서 귀부하니, 나도 마땅히 처음에 호한야선우를 도왔던 것처럼 그를 도와 그로 하여금 나를 받들고 섬기게 해야 한다.” 이에 구림왕을 보내 수천 기병을 이끌고 노방 형제를 맞이하여 흉노로 들여보내고, 노방을 한제로 세우고, 그의 동생 노정을 중랑장으로 임명하여 호족 기병을 이끌고 돌아와 안정으로 들어가게 했다.

26. 황상은 관중 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등우가 오랫동안 군대를 진격시키지 않자, 그에게 편지를 보내 꾸짖으며 말했다. “사도는 요와 같고, 도망친 도적은 걸과 같다. 장안의 관리와 백성들은 불안해하며 의지하고 귀부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때를 맞추어 진군하여 토벌하고, 서경을 진압하고 안무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붙들어야 한다.” 등우는 여전히 이전의 의견을 고집하며, 돌아서서 상군 여러 현을 공격하고, 또 병력을 징발하고 곡식을 운송하여 대요로 돌아왔다. 적노장군 풍음과 거기장군 종흠이 순읍을 지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권력을 다투며 서로 공격하여, 풍음이 마침내 종흠을 죽이고 되돌아와 등우를 공격했다. 등우가 사자를 보내 조정에 보고했다. 황제가 사자에게 물었다. “풍음이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자가 대답했다. “호군 황방입니다.” 황제는 풍음과 황방이 오래 화목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서로 저촉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등우에게 답하며 말했다. “풍음을 잡을 사람은 반드시 황방일 것이다.” 이어 상서 종광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그들을 초유하게 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황방이 과연 풍음을 붙잡아 그의 부중을 이끌고 와서 죄를 청했다. 경시제의 옛 장수 왕광, 호은, 성단 등이 모두 종광에게 와서 항복했고, 종광은 그들과 함께 동쪽으로 돌아갔다. 안읍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도중에 도망치려 하자, 종광은 그들을 모두 참수했다.

풍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천수를 공격했다. 외후가 맞서 싸워 고평에서 그를 격파하고 그의 모든 군수 물자를 노획했다. 이에 등우가 황상의 뜻을 받들어 사자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외후를 서주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양주와 삭방의 일을 전권으로 처리하게 했다.

27. 납일 날, 적미군이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며 크게 모였는데, 술자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여러 신하들이 서로 다투며 소란을 피웠다. 병사들이 이에 각자 궁궐 담을 넘고,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술과 고기를 약탈하며 서로 죽이고 상하게 했다. 위위 제갈치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수백 명을 격살하자 비로소 안정되었다. 유분자는 매우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울었고, 시종 관리들은 모두 그를 가엾게 여겼다.

28. 황상은 종정 유연을 보내 천정관을 공격하게 하고, 전읍과 열 번 넘게 교전했으나 유연은 나아가지 못했다. 경시제가 실패한 후, 전읍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황상은 즉시 그를 상당태수로 임명했다. 황상은 또 간의대부 저백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포영을 불렀다. 포영은 경시제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의심하며 따르지 않고, 저백을 구금한 후 사자를 급히 장안으로 보내 탐문하여 허실을 살폈다.

29. 처음에 황상이 완에서 경시제를 따를 때, 신야 음씨의 딸 음려화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 해에 사자를 보내 음려화와 황상의 누이 호양공주, 아우 영평공주를 함께 낙양으로 맞이하고, 음려화를 귀인으로 봉했다. 경시제의 서평왕 이통은 먼저 영평공주와 혼인했는데, 황상이 이통을 불러 위위로 삼았다.

30 당초, 경시제(更始帝)는 왕굉(王闳)을 낭야태수(琅邪太守)로 임명했으나, 장보(张步)가 군성을 점거하며 그를 저지했다. 왕굉이 항복을 권유하여 감유(赣榆) 등 여섯 개 현을 얻었고, 병력을 모아 장보와 교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장보는 유영(刘永)의 관호를 받은 후, 극현(剧县)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장수들을 보내 태산(泰山), 동래(东莱), 성양(城阳), 교동(胶东), 북해(北海), 제남(济南), 제군(齐郡)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왕굉은 힘이 미치지 못하여 장보에게 가서 그를 만났다. 장보는 대규모 군대를 진열하고 그를 접견하며 노하여 말했다. "나 장보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네가 이전에 어찌 그리 맹렬히 나를 공격했느냐!" 왕굉이 검을 짚으며 말했다. "태수인 나는 조정의 명령을 받들었을 뿐인데, 그대 문공(文公)은 병력을 거느리고 저항했다. 내 왕굉이 공격한 것은 도적이니, 어찌 맹렬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장보가 일어나 무릎 꿇고 사죄하며, 그와 함께 연회를 열고 상빈(上宾)으로 대접하여 왕굉으로 하여금 군중의 일을 관장하게 했다.

건무 2년(丙戌年, 서기 26년)

1 봄, 정월 갑자삭일(甲子朔日)에 일식이 있었다.

2 유공(刘恭)은 적미군(赤眉军)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고, 은밀히 아우 유분자(刘盆子)에게 인새와 수대를 돌려주고 사양하는 말을 익히게 했다. 정월 초하루 대회 때에 이르러 유공이 먼저 말했다. "여러분이 함께 내 아우를 황제로 세웠으니, 은덕이 참으로 깊습니다! 그러나 즉위한 지 거의 일 년이 되었음에도 혼란은 날로 심해져, 실로 일을 이루기에 부족하며, 죽어도 무익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물러나 평민이 되어, 다시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를 구하소서. 여러분께서 밝히 살피소서!" 번숭(樊崇) 등이 사죄하며 말했다. "이는 모두 우리 번숭 등의 죄입니다." 유공이 또 간절히 청하니, 어떤 이가 말했다. "이것이 어찌 식후(式侯)께서 관여할 일이겠습니까?" 유공이 두려워하며 일어나 떠났다. 유분자가 이에 평상에서 내려와 인새와 수대를 풀며 머리를 조아려 말했다. "지금 황제를 세웠으나 여전히 도적처럼 일을 행하니, 사방에서 원망하며 더 이상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는 모두 세워서는 안 될 사람을 세운 까닭입니다. 청컨대 물러나 현성(贤圣)에게 길을 양보하겠습니다! 만약 반드시 나를 죽여 책임을 면하려 한다면, 내가 죽어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에 울며 흐느꼈다. 번숭 등 회합한 수백 명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자리를 떠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들 무상하여 폐하를 저버렸사오니, 청컨대 지금부터 감히 다시 방탕하지 않겠나이다!" 이에 함께 유분자를 안아 일으키고 그에게 인새와 수대를 매어 주니, 유분자는 울부짖으며 부르짖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흩어져 나간 후, 각자 영채를 닫고 스스로 지켰다. 삼보(三辅) 지역이 안정되어, 천자가 총명하다고 칭송하며 백성들이 다투어 장안(长安)으로 돌아오니, 시장과 거리가 거의 가득 찼다. 이십여 일 후에 다시 밖으로 나가 예전처럼 크게 약탈했다.

3 도자도(刁子都)가 그의 부곡(部曲)에게 살해당하고, 남은 당여들이 여러 도적들과 함께 단향(檀乡)에서 모여 단향적(檀乡贼)이라 칭하며 위군(魏郡)과 청하(清河)를 침략했다. 위군의 대리(大吏) 이웅(李熊)의 아우 이륙(李陆)이 성을 배반하고 단향적을 맞이하려 모의하자, 어떤 이가 이를 위군태수 영천 요기(铫期)에게 보고했다. 요기가 이웅을 불러 묻자, 이웅이 머리를 조아려 죄를 인정하며 늙은 어머니와 함께 죽기를 원했다. 요기가 말했다. "관리가 도적보다 즐겁지 않다면, 돌아가 늙은 어미와 함께 이륙에게로 가거라!" 이에 관리(吏)를 보내 그를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웅이 나가서 이륙을 찾아 업성(邺城) 서문으로 데려갔다. 이륙은 부끄럽고 감격하여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요기에게 사죄했다. 요기가 탄식하며 예를 갖추어 그를 장사지내고, 이웅의 원래 직위를 회복시켰다. 이에 군중에서 그의 위엄과 신뢰에 복종했다.

황제가 오한(吴汉)을 보내 왕량(王梁) 등 아홉 장수와 함께 업성 동쪽 장수(漳水)에서 단향적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십여만 명이 모두 항복했다. 또 왕량을 대장군 두무(杜茂)와 함께 보내 위군, 청하, 동군(东郡)을 위무하게 하여 각처의 영채와 보루를 모두 평정하니, 세 군이 청정해지고 변경의 길이 통하게 되었다.

4 경진일(庚辰日)에 모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봉하고, 양후(梁侯) 등우(邓禹)와 광평후(广平侯) 오한은 모두 네 개 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박사(博士) 정공(丁恭)이 논의하여 말했다. "옛날에 제후를 봉함에 백 리를 넘지 않게 한 것은, 강한 줄기를 강하게 하고 약한 가지를 약하게 하여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네 개 현을 봉하는 것은 법제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옛날에 망한 나라는 모두 무도함 때문이었지, 공신의 봉지가 많아 망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음향후(阴乡侯) 음식(阴识)은 귀인의 형으로, 군공 때문에 봉토를 더해야 했으나, 음식이 머리를 조아려 사양하며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는데, 장수들 중 공로가 있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후궁의 친척으로 덧붙여 봉작과 식읍을 더하면, 천하 사람들에게 공평함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는 친척이 상을 받으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로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황제가 그를 따랐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각자 원하는 바를 말하게 하니, 모두 좋은 현을 차지하려 했다. 오직 하남태수 영천 정침(丁𬘭)만이 본향에 봉해지기를 청했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묻자, 정침이 말했다. "정침은 재주가 박하고 공로가 적으니, 향정(乡亭)에 봉해져도 후한 대우입니다!" 황제가 그의 뜻을 따라 신안향후(新安乡侯)로 봉했다. 황제가 낭중(郎中) 위군 풍근(冯勤)을 보내 제후 봉작 업무를 주관하게 했다. 풍근이 공로의 크고 작음과 경중, 토지의 원근, 지세의 비옥과 척박을 헤아려 서로 넘지 않게 하니, 마음에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제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상서(尚书)의 모든 일을 그에게 총괄 기록하게 했다. 구례(旧例)에는 상서랑(尚书郎)이 영사(令史)가 근속 연한에 따라 보임되었으나, 황제가 처음으로 효렴(孝廉)을 상서랑으로 임용했다.

5 임진일(壬辰日)에 낙양(洛阳)에 고묘(高庙)를 세우고, 사계절에 고조(高祖), 태종(太宗), 세종(世宗)을 합제(合祭)했다.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坛)을 세우고, 성 남쪽에 교제장(郊祭场)을 세웠다.

6 장안성(长安城)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적미군이 보물을 수습하여 싣고 크게 방화하여 궁실과 시장 거리를 불태우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며 약탈하니, 장안성에는 더 이상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니, 부중이 백만이라 칭하며 남산(南山)에서 성읍을 돌며 약탈하다가 안정(安定), 북지(北地)로 들어갔다. 등우가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장안에 이르러 곤명지(昆明池)에 주둔하고, 고묘에 배알하고 제사 지내며 열한 분의 신주를 수습하여 낙양으로 보냈다. 이에 능원을 순시하고 관리와 병사를 두어 봉사하고 수호하게 했다.

7 진정왕(真定王) 유양(刘杨)이 참기(谶记)를 만들어 말했다. "적구(赤九) 이후에, 영양(瘿杨)이 주가 된다." 유양은 목에 혹이 있어, 이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키려 했으며, 면만적(绵曼贼)과 결탁했다. 황제가 기도위(骑都尉) 진부(陈副), 유격장군(游击将军) 등융(邓隆)을 보내 소환했으나, 유양이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가 또 전장군(前将军) 경순(耿纯)을 보내 절을 가지고 유주(幽州), 기주(冀州)를 순시하게 하며 지나는 곳마다 왕과 후를 위문하고, 비밀리에 유양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경순이 진정에 이르러 역참에 머물며 유양을 초청하여 만났다. 경순은 진정 종실의 외손이므로, 유양이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또한 부중이 강성함을 스스로 믿었으며, 경순의 신정(神情)이 조용하여 관속들을 데리고 갔다. 유양의 형제가 함께 경병을 데리고 문 밖에 있었다. 유양이 들어와 경순을 보니, 경순이 예를 다해 공손히 접대하며, 이에 그의 형제들을 모두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곧 누각을 닫고 모두 주살한 후,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진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유양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주살된 것을 가엾게 여겨, 그의 아들을 진정왕으로 봉했다.

8 2월 기유일(己酉日)에 황제의 수레가 수무(修武)에 도착했다.

9 포영(鲍永)과 풍연(冯衍)이 경시제가 이미 죽었음을 확실히 알고 이에 발상(发丧)하고, 저백(储大伯) 등을 풀어 주며 인수를 봉하여 올리고, 모든 군대를 해산시키고 폭건(幅巾)을 쓰고 하내(河内)로 갔다. 황제가 포영을 보고 물었다. "네 부중은 어디에 있느냐?" 포영이 자리를 떠나 머리를 조아려 말했다. "신이 경시제를 섬기면서 그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사오니, 실로 부끄러워 그 부중으로 부귀를 구하려 하지 않았기에, 모두 해산시켰나이다." 황제가 말했다. "네 말이 크도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얼마 후 포영은 공을 세워 임용되었으나, 풍연은 폐기되었다. 포영이 풍연에게 말했다. "옛날 고조(高祖)는 계포(季布)의 죄를 용서하고, 정고(丁固)의 공을 주살했습니다. 지금 명군을 만났으니, 또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풍연이 말했다. "어떤 이가 이웃의 아내를 희롱했는데, 나이 많은 자는 그를 꾸짖고, 젊은 자는 그에게 응답했습니다. 후에 그 남편이 죽자, 그는 나이 많은 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어떤 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너를 꾸짖은 자가 아니냐?' 그가 말했습니다. '남의 집에 있을 때는 그가 나에게 응답하기를 바랐고, 내 집에 있을 때는 그가 꾸짖기를 바란다!' 하늘의 명은 알기 어렵고, 사람의 도는 지키기 쉬우니, 도의를 지키는 신하가 어찌 죽음을 근심하겠습니까!"

10 대사공(大司空) 왕량이 여러 차례 조칙을 어기자, 황제가 노하여 상서(尚书) 종광(宗广)을 보내 절을 가지고 군중에서 왕량을 참수하게 했다. 종광이 그를 수레에 묶어 경사(京师)로 보냈다. 도착한 후에 사면하고 중랑장(中郎将)으로 임명하여 북쪽으로 기관(箕关)을 지키게 했다.

11 임자일(壬子日)에 태중대부(太中大夫) 경조(京兆) 송홍(宋弘)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임명하였다. 송홍이 패국(沛國) 환담(桓譚)을 추천하여 의랑(議郎)과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다. 황제가 환담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여 그의 번잡한 음조를 좋아하였다. 송홍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환담이 궁중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단정한 조복을 입고 부(府)에 앉아 관리에게 그를 부르게 하였다. 환담이 도착하자 자리를 주지 않고 꾸짖으며 말하였다. “스스로 고칠 수 있느냐, 아니면 내가 법으로 너를 고발하게 하겠느냐?” 환담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후에 대신들을 모은 자리에서 황제가 환담에게 거문고를 타라고 명하였다. 환담이 송홍을 보고는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 황제가 이상히 여겨 묻자, 송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관을 벗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신이 환담을 추천한 것은 그가 충정(忠正)으로 주상을 인도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정이 정나라 음악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황제가 얼굴색을 바꾸며 그에게 사과하였다.

호양공주(湖陽公主)가 최근에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가 그녀와 함께 조정 대신들을 논의하며 은밀히 그녀의 뜻을 살폈다. 공주가 말하였다. “송공(宋公)의 위엄 있는 용모와 덕행과 도량은 여러 신하 중에 비할 이가 없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바로 그 일을 도모하려 하오.” 후에 송홍이 인견(引見)되자, 황제가 공주를 병풍 뒤에 앉게 하고 송홍에게 말하였다. “속담에 ‘귀해지면 벗을 바꾸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니, 이것이 사람의 떳떳한 정입니까?” 송홍이 말하였다. “신은 듣건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지기는 잊지 말아야 하고, 지게미와 겨를 먹던 아내는 내쫓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돌아보며 공주에게 말하였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소.”

12 황제가 왕랑(王郎)을 토벌할 때, 팽총(彭寵)이 돌격 기병(突騎)을 내어 군대를 도왔고, 군량을 앞뒤로 끊임없이 수송하였다. 황제가 동마(銅馬) 군대를 추격하여 계성(薊城)에 이르렀을 때, 팽총이 그 공로를 스스로 믿고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황제가 그를 대우함이 그의 뜻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을 품었다. 황제가 즉위한 후, 오한(吳漢)과 왕량(王梁)은 모두 팽총이 보낸 자들로서 나란히 삼공(三公)에 올랐는데, 오직 팽총만이 봉해지지 않자 더욱 울적하게 뜻을 얻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러하다면 내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폐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인가!”

이때 북방의 주군(州郡)이 파괴되고 흩어졌으나 어양(漁陽)은 오히려 온전하였고, 옛 철관(鐵官)이 있어 팽총이 그것으로 곡물을 무역하고 진귀한 보물을 축적하여 더욱 부강해졌다. 유주목(幽州牧) 주부(朱浮)는 젊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정사를 정돈하고 선비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주(州)의 명망 높은 노인들과 왕망(王莽) 때의 옛 이천석(二千石)들을 불러들여 모두 막부(幕府)에 배치하고, 여러 번 각 군(郡)의 창고 곡식을 징발하여 그들의 처자(妻子)를 부양하게 하였다. 팽총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군대가 일어나고 있으니, 관속(官屬)을 많이 두어 군자(軍資)를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주부의 성품은 교만하고 조급하며 자부심이 강했고, 팽총도 흉악하고 강포하여 원망과 의심이 점차 쌓였다. 주부가 여러 번 그를 무고하고 해치려 하여, 은밀히 팽총이 병사와 곡식을 많이 모아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상주하였다. 황제가 항상 그 내용을 누설하여 팽총이 알게 함으로써 위협하고 두렵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서(詔書)로 팽총을 부르자, 팽총이 상소하여 주부와 함께 부름을 받기를 원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팽총이 더욱 스스로 의심하였다. 그의 아내는 본래 강직하여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굳이 부름을 받지 말라고 권하며 말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 사방에서 각자 스스로 웅거하고 있습니다. 어양은 큰 군(郡)으로 병마(兵馬)가 가장 정예한데, 어찌 남의 무고를 당했다고 이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팽총이 또 친한 관리들과 의논하였으나 모두 주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그를 가도록 권하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팽총의 사촌 동생인 자후란경(子后蘭卿)을 보내 그를 깨우치게 하였다. 팽총이 자후란경을 머물게 하고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고, 장수들을 임명하고 스스로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계성에서 주부를 공격하였다. 또 경황(耿況)과 모두 큰 공로가 있으나 은상(恩賞)이 모두 적었으므로, 여러 번 사자를 보내 경황을 초빙하여 꾀었다. 경황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자를 죽였다.

13 연잠(延岑)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남정(南鄭)을 포위하였다.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가 병사가 패하여 도망쳤다. 연잠이 마침내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무도(武都)로 나아갔다. 그 결과 경시제(更始帝)의 주공후(柱功侯) 이보(李寶)에게 패하여 연잠이 천수(天水)로 도망쳤다. 공손술(公孫述)이 장수 후단(侯丹)을 보내 남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유가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만 명을 얻고 이보를 승상(丞相)으로 삼아 무도에서 남쪽으로 후단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하지(河池)와 하변(下辨)으로 군사를 돌렸다가 또 연잠과 계속 싸웠다. 연잠이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가 산관(散關)에 이르러 진창(陳倉)에 도착하였다. 유가가 추격하여 그를 격파하였다. 공손술이 또 장수 임만(任滿)을 보내 낭중(閬中)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 강주(江州)에 이르고 동쪽으로 한관(扞關)을 차지하여 마침내 익주(益州) 지역을 완전히 소유하였다.

14 신묘일(辛卯日)에 황제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15 3월 을미일(乙未日, 교감기(校改記)에 따라 을미(乙未)로 고침)에 대사면(大赦)을 시행하였다.

16 경시제의 여러 대장 중에서 남쪽에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가 많았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사를 의논하고, 격문(檄文)으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언성(郾城)이 가장 강하고, 완성(宛城)이 그 다음이니, 누가 마땅히 이들을 공격해야 하는가?” 가복(賈復)이 즉시 대답하였다. “제가 언성을 공격하겠나이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였다. “집금오(執金吾)가 언성을 공격한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대사마(大司馬)는 마땅히 완성을 공격해야 하오.” 이에 가복을 보내 언성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윤준(尹尊)이 항복하였다. 또 동쪽으로 경시제의 회양태수(淮陽太守) 폭사(暴汜)를 공격하니 폭사가 항복하였다.

17 여름, 4월에 호야대장군(虎牙大將軍) 개연(蓋延)이 부마도위(駙馬都尉) 마무(馬武) 등 네 장수를 거느리고 유영(劉永)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마침내 유영을 수양(睢陽)에서 포위하였다. 옛 경시제의 장수 소무(蘇茂)가 반란하여 회양태수 반건(潘蹇)을 죽이고 광락(廣樂)을 점거하고 유영에게 신하라고 일컬었다. 유영이 소무를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회양왕(淮陽王)으로 봉하였다.

18 오한(吳漢)이 완성을 공격하자, 완왕(宛王) 유사(劉賜)가 경시제의 처자(妻子)를 데리고 낙양에 와서 항복하였다. 황제가 유사를 신후(慎侯)로 봉하였다. 황제의 숙부 유량(劉良), 족부(族父) 유흠(劉歙), 족형(族兄) 유지(劉祉)가 모두 장안(長安)에서 왔다. 갑오일(甲午日)에 유량을 광양왕(廣陽王)으로, 유지를 성양왕(城陽王)으로 봉하였다. 또 형 유연(劉縯)의 아들 유장(劉章)을 태원왕(太原王)으로, 유흥(劉興)을 노왕(魯王)으로 봉하였다. 경시제의 세 아들 유구(劉求), 유흠(劉歆), 유리(劉鯉)를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19 등왕(鄧王) 왕상(王常)이 항복하자, 황제가 그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왕정위(王廷尉)를 보니 더 이상 남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소!” 그를 좌조(左曹)로 임명하고 산상후(山桑侯)로 봉하였다.

20 5월 경진일(庚辰日)에 족부 유흠을 사수왕(泗水王)으로 봉하였다.

21 황제가 음귀인(陰貴人)의 성품이 한결같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그를 황후(皇后)로 세우고자 하였다. 음귀인이 곽귀인(郭貴人)이 아들이 있으므로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무술일(戊戌日)에 귀인 곽씨를 황후로 세우고, 그 아들 유강(劉彊)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22 병오일(丙午日)에 사수왕의 아들 유종(劉終)을 치천왕(淄川王)으로 봉하였다.

23 가을에 가복(賈復)이 남쪽으로 소릉(召陵)과 신식(新息)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가복의 부장(部將)이 후에 영천(潁川)에서 사람을 죽이자, 영천태수 구순(寇恂)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당시 제도가 창설 초기여서 군영(軍營) 사람들이 법을 범하면 대부분 서로 용서해 주었는데, 구순이 저자에서 그를 처형하였다. 가복이 이것을 치욕으로 여겨 돌아오는 길에 영천을 지나면서 측근에게 말하였다. “나와 구순이 나란히 장수(將帥)인데 그에게 해를 입었으니, 지금 구순을 보면 반드시 손수 칼로 그를 죽이리라!” 구순이 그의 계획을 알고 그와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구순의 생질(甥姪)인 곡숭(谷崇)이 말하였다. “저는 장수이니 칼을 차고 곁에서 모실 수 있습니다. 갑자기 변고가 있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구순이 말하였다. “아니다. 옛날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서도 염파(廉頗)에게 굴복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다.” 이에 각 현(縣)에 명하여 성대한 공급 기구를 준비하고 술을 저장하게 하여, 집금오의 군대가 주경(州境)에 들어오면 사람마다 두 사람 분의 음식을 얻도록 하였다. 구순이 성 밖으로 나가 길에서 맞이하다가 또 병을 칭하고 돌아왔다. 가복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 하였으나 관병(官兵)이 모두 취하여 지나쳐 갔다. 구순이 곡숭을 보내 그 상황을 보고하게 하자, 황제가 이에 구순을 불렀다. 구순이 도착하여 인견(引見)되었다. 그때 가복이 이미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 피하려 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두 호랑이가 어찌 사사로이 싸울 수 있겠소! 오늘 내가 너희를 위해 화해시키리라.” 이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매우 기뻐하고, 함께 수레를 타고 나가 벗이 되어 맹세하고 헤어졌다.

24 8월에 황제가 친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교(五校)를 정벌하였다. 병진일(丙辰日)에 내황(內黃)에 도착하여 의양(羛陽)에서 오교를 크게 격파하고 그 무리 5만 명을 항복시켰다.

25. 황제는 유격장군 등륭을 보내 주부를 도와 팽총을 토벌하게 했다. 등륭의 군대는 노수 남쪽 기슭에 주둔하고, 주부의 군대는 옹노에 주둔하며, 관리들을 보내 상황을 보고했다. 황제가 문서를 읽고 노하여 사자에게 말했다: “군영이 백 리나 떨어져 있는데, 이런 형세로 어떻게 서로 응원할 수 있겠는가! 네가 돌아갈 때쯤이면 북쪽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과연 팽총은 경장 부대로 등륭의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주부는 거리가 멀어 끝내 구원할 수 없었다.

26. 개연이 수양을 몇 달 동안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유영은 우현으로 도망쳤으나, 우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어머니와 처자를 죽였다. 유영은 부하 수십 명과 함께 초현으로 도주했다. 소무, 교강, 주건이 군사 3만여 명을 모아 유영을 구원했다. 개연이 패현 서쪽에서 그들과 교전하여 크게 격파했다. 유영, 교강, 주건은 도망쳐 호릉을 지켰고, 소무는 광락으로 도망쳤다. 개연은 이에 패, 초, 임회 지역을 평정했다. 황제는 태중대부 복륭에게 부절을 주어 청주와 서주로 사신으로 보내 각 군국을 초유하게 했다. 청주와 서주 지역의 여러 도적들은 유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며 항복을 청했다. 장보는 그의 속관 손욱을 시켜 복륭을 따라 조정에 이르러 상소를 올리고 복어를 진상했다. 복륭은 복잠의 아들이다.

27. 독향 사람 동흔이 완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 유전을 사로잡았다. 양화장군 견담이 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동흔은 독향으로 도망쳤다.

28. 오한이 남양의 여러 현을 순행하며 곳곳에서 침략과 포학한 행위를 저질렀다. 파로장군 등봉이 휴가를 얻어 신야로 돌아왔다가 오한이 자기 고향을 약탈한 것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오한의 군대를 격파한 후, 욱양에 주둔하며 여러 도적들과 연합했다.

29. 9월 임술일, 황제가 내황에서 돌아왔다.

30. 섬현의 도적 소황이 홍농을 함락시키자, 황제는 경단을 보내 토벌하게 했다. 마침 경단이 사망하자, 정로장군 제준이 홍농, 백화, 만중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했다.

31. 적미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농지로 올라가려 하자, 외효는 장군 양광을 보내 맞아 싸워 격파했고, 또 오씨와 경양 사이에서 추격하여 격파했다. 적미가 양성, 번수 일대에 이르렀을 때 큰 눈을 만나 골짜기가 모두 메워졌고, 병사들은 대부분 얼어 죽었다. 이에 다시 돌아와 여러 능묘를 발굴하여 그 속의 보물과 재화를 빼앗았다. 옥갑으로 염습한 경우 시신은 대부분 살아있는 듯했는데, 도적들은 여후의 시신을 능욕했다. 등우가 군사를 보내 울이에서 그들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그들에게 패했다. 등우는 이에 출병하여 운양에 이르렀다. 적미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갔다. 연잠은 두릉에 주둔하고 있었고, 적미의 장수 봉안이 그를 공격했다. 등우는 봉안의 정병이 밖에 나가 있다고 여겨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기습했다. 마침 사록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등우의 군대는 패주했다. 연잠이 봉안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죽은 자가 십여만 명에 달했다. 요광이 적미 18만 명을 이끌고 한중왕 유가를 공격했다. 유가가 곡구에서 그들과 교전하여 크게 격파하고 유가는 손수 요광을 죽인 뒤, 운양으로 가서 식량을 조달했다. 유가 처의 오빠인 신야 사람 내흡은 황제의 고모 아들이었다. 황제는 등우에게 유가를 초유하라 명했고, 유가는 내흡을 통해 등우에게 가서 항복했다. 이보가 거만하고 예의가 없자 등우가 그를 죽였다.

32. 겨울, 11월, 정위 잠팽을 징남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황제는 성대한 집회에서 왕상을 가리키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강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어 한실을 도왔고, 그 뜻은 금석처럼 굳건하니, 참으로 충신이다!” 그날, 왕상을 한충장군으로 임명하고, 그를 잠팽과 함께 건의대장군 주호 등 일곱 장군을 이끌고 등봉과 동흔을 토벌하게 했다. 잠팽 등은 먼저 독향을 공격했고, 등봉이 그들을 구원했다. 주호의 군대가 패하여 주호는 등봉에게 사로잡혔다.

33. 동마, 청독, 유래 등의 잔여 도적들이 함께 손등을 천자로 옹립했다. 손등의 장수 낙현이 손등을 죽이고 그 부중 5만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34. 등우는 풍음의 반란 이후 위명이 점차 손상되었고, 또 식량이 부족하여 전투에서 여러 번 불리했으며, 귀부하는 자들은 날로 흩어졌다. 적미와 연잠이 삼보 지역에서 포학하게 횡행하자, 군현의 호족들이 각자 병력을 보유하여 등우가 평정할 수 없었다. 황제는 이에 편장군 풍이를 대신 보내 그들을 토벌하게 하고, 황제가 직접 수레를 호남까지 호송하며 풍이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삼보 지역은 왕망과 갱시의 화란을 겪은 데다 적미와 연잠의 잔학함까지 더해져 백성들은 물과 불 속에 빠져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장군이 이제 명을 받들어 여러 무법자들을 토벌하되, 항복하는 영보에 대해서는 그 우두머리들을 경사로 압송하고, 그 평민들은 해산시켜 농사에 종사하게 하며, 그들의 영채와 보루를 허물어 다시는 모여들지 못하게 하라. 정벌이 반드시 토지를 빼앗고 성을 학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관건은 난을 평정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여러 장수들이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노략질을 좋아한다. 너는 본래 관병을 잘 통솔하니, 스스로 정돈하고 단속하여 군현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풍이가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위신과 신의를 선포하자, 여러 도적들이 대부분 항복했다.

신하 사마광이 말한다: 옛날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의 덕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도를 펴고 끊임없이 생각하니, 우리가 가는 것은 오직 안정을 구함이라.” 하였으니, 이는 왕자의 군대의 뜻이 위덕을 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광무제가 관중을 취하는 방법을 쓴 것을 보면, 바로 이 이치를 운용한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35. 또 조서를 내려 등우를 불러들이면서 말했다: “결코 궁지에 몰린 적과 싸움을 다투지 말라! 적미는 식량이 없어 자연히 동쪽으로 올 것이다. 우리는 배부른 군대로 굶주린 적을 기다리고, 편안한 군대로 지친 적을 기다리니, 지팡이를 꺾어서라도 그들을 때릴 수 있으니, 여러 장수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다. 다시 함부로 진군하지 말라!”

황제는 복륭을 광록대부로 임명하고, 다시 그를 장보에게 사신으로 보내 장보를 동래태수로 임명하고, 새로 임명된 청주목, 태수, 도위와 함께 동쪽으로 가게 했다. 조서는 복륭이 스스로 현령, 현장 및 그 이하 관원을 임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36. 12월 무오일, 조서를 내려 말했다: 종실 열후 중 왕망에게 작위가 끊긴 자들은 모두 원래의 봉국을 회복하라.

37. 삼보 지역에 심한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현상이 발생했고, 성곽은 텅 비었으며, 백골이 들판을 덮었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흔히 모여 영보를 세우고 각자 청야수성을 했다. 적미는 노략질할 것을 얻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는데, 부중은 아직 20여만 명이었으나 길을 따라 계속 도망쳐 흩어졌다. 황제는 파간장군 후진 등을 신안에 주둔시키고, 건위대장군 경염 등을 의양에 주둔시켜 그들의 귀로를 차단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적이 동쪽으로 도망치면 의양의 군대를 이끌고 신안과 합세하고, 적이 남쪽으로 도망치면 신안의 군대를 이끌고 의양과 합세하라.” 풍이가 화음에서 적미와 만나 서로 60여 일 동안 대치하며 수십 차례 교전하여 그들의 장졸 5천여 명을 항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