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 삼십팔
《자치통감》 제46권
【한기삼십팔】 병자년(丙子年)부터 갑신년(甲申年)까지, 모두 9년이다.
숙종 효장황제 상(上) 건초 원년(丙子, 서기 76년)
봄, 정월에 조서를 내려 연주(兖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세 주(州)에 명하여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황제가 사도 포욱(鮑昱)에게 물었다: "무슨 방법으로 가뭄을 없앨 수 있겠소?" 포욱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막 즉위하셨으니, 비록 얻고 잃은 바가 있더라도, 재이(災異)를 초래할 정도는 아닙니다. 신이 이전에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있을 때, 초왕(楚王) 모반 사건을 심리하였는데, 구금된 자가 천여 명이었으나, 모두 적절히 판결할 수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큰 옥사가 한번 일어나면 원통함을 입은 자가 절반을 넘습니다. 또한 유배된 자들은 골육이 이별하고 외로운 혼은 제사를 받지 못합니다. 마땅히 유배된 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금고(禁錮)의 법령을 폐지하여 죽은 자와 산 자가 각자 제자리를 얻게 하면, 상서로운 기운이 올 수 있습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교서랑(校書郎) 양종(楊終)이 상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요즘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36국을 개통하여, 백성들은 해마다 군역(軍役)에 종사하고 수송은 빈번히 소모되니, 근심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원망이 족히 천지를 감동시킬 만합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유의하여 살피소서." 황제가 그의 상주문을 아래로 내려 논의하게 하였는데, 제오륜(第五倫)도 양종의 의견을 찬성하였다. 모융(牟融)과 포욱이 모두 말하였다: "효자는 아버지의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에 둔병(屯兵)하는 것은 선제(先帝)께서 세우신 일이니, 크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양종이 또 상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진(秦)나라가 장성을 쌓아 노역이 무겁게 일어났으나, 호해(胡亥)가 고치지 않아 마침내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효원제(孝元帝)가 주애군(珠崖郡)을 버렸고, 광무제(光武帝)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끊었으니, 비늘 같은 작은 이익을 위해 우리의 의관(衣冠)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노문공(魯文公)이 천대(泉臺)를 헐자, 《춘추(春秋)》에서 비난하여 말하기를 '선조가 지었는데 자신이 헐어버리니, 그곳에 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그것이 백성에게 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양공(魯襄公)이 삼군(三軍)을 세웠는데, 노소공(魯昭公)이 그것을 없애자, 군자가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이라 칭송하며, 없애지 않으면 백성에게 해가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금 이오(伊吾)의 전쟁과 누란(樓蘭)의 둔병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병인일(丙寅日)에 조서를 내렸다: "이천석(二千石) 관리는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도록 힘쓰라. 사형죄가 아닌 경우는 가을까지 기다려 조사 처리하라. 유관 부서는 신중하게 인재를 선발 천거하여 온화하고 선량한 자를 등용하고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를 물리치며, 시절에 순응하고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라." 이때 영평(永平) 연간의 옛 관례를 이어받아 관리들의 정사 시행이 엄격하고 가혹함을 숭상하였고, 상서(尙書)가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대부분 치우침이 있었다. 상서인 패국(沛國) 사람 진총(陳寵)은 황제가 막 즉위하였으니 마땅히 전대의 가혹한 풍속을 고쳐야 한다고 여겨, 이에 상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선왕의 정사는 상을 주는 것이 분수를 넘지 않고, 형벌을 남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차라리 상을 분수 넘게 주더라도 형벌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옥사를 심리할 때 엄격하고 명확히 한 것은 간악한 자를 위엄으로 징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간악함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너그러움으로 도와야 합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어 모두 이 원칙을 따르시며, 여러 차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너그러움과 화목함을 크게 펴도록 하셨으나, 유관 부서가 완전히 받들어 행하지 않고 여전히 가혹함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옥사를 심리하는 자는 고문의 고통에 급급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는 무고와 속임, 놓아주고 남용하는 조문에 얽매여, 혹은 공무를 빙자하여 사익을 행하고 제멋대로 위세를 부립니다. 정사는 마치 금슬(琴瑟)을 베푸는 것과 같아, 큰 줄이 너무 팽팽하면 작은 줄이 끊어집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선왕의 도를 높이 받들고, 번잡하고 가혹한 법령을 없애며, 태형(笞刑)을 줄여 백성을 구제하고, 지극한 덕을 보전하여 널리 펼쳐 하늘의 뜻에 순응하소서." 황제가 깊이 진총의 말을 받아들여, 모든 일에 너그러움을 힘썼다.
주천태수(酒泉太守) 단팽(段彭) 등이 군사를 이끌고 유중(柳中)에서 모여, 차사(車師)를 공격하여 교하성(交河城)을 쳐서 목 3,800급을 베고, 3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북흉노가 놀라 도망치자, 차사가 다시 항복하였다. 마침 관총(關寵)이 이미 죽었으므로, 알자(謁者) 왕몽(王蒙)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다. 경공(耿恭)의 군리(軍吏) 범강(范羌)이 그때 군중에 있었는데, 굳이 청하여 경공을 맞이하러 가기를 원했다. 여러 장수들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다가, 이에 2천 병사를 범강에게 나누어 주고, 산 북쪽으로 가서 경공을 맞이하게 하였다. 한 길이 넘는 큰 눈을 만나 군사가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성중에서는 밤에 병마 소리를 듣고 적이 온 줄 알고 매우 놀랐다. 범강이 멀리서 외쳐 말하기를 "나는 범강이오. 한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교위를 맞이하러 왔소"라고 하였다. 성중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문을 열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음 날, 이에 함께 따라 돌아갔다. 적병이 그들을 추격하여 싸우며 갔다. 관병은 평소에 배고프고 지쳐 있었는데, 소륵(疏勒)에서 출발할 때 26명이었으나, 길에서 죽어가며 3월에 옥문관(玉門關)에 도착했을 때는 13명만 남았고, 의복과 신발이 해어지고 얼굴은 수척하였다.
중랑장(中郎將) 정중(鄭衆)이 경공 이하 사람들을 위해 목욕시키고 의관을 갈아입히며, 상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경공은 외로운 군대로 외로운 성을 지키며, 흉구 수만 명을 막아 수개월을 넘기고 일 년을 넘기며, 심력을 다 쏟아 산을 뚫어 물을 구하고, 노궁(弩弓)을 삶아 양식을 삼아, 전후로 적을 수백 수천 명 죽이고 상하게 하여, 마침내 충성과 용맹을 보전하고 대한(大漢)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현저한 작위를 받아 장수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경공이 낙양(洛陽)에 도착한 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조서를 내려 무기교위(戊己校尉)와 도호(都護) 관직을 모두 폐지하고 반초(班超)를 소환하였다. 반초가 떠나 돌아가려 하자, 소륵 전국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 도위(都尉) 여이(黎弇)가 말하기를 "한나라 사자가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구자(龜玆)에게 멸망당할 것이니, 실로 한나라 사자가 떠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소"라고 하고는 칼로 자살하였다. 반초가 돌아가는 길에 우전(于闐)에 이르렀는데, 왕후(王侯) 이하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며 말하기를 "한나라 사자를 의지하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으니, 실로 떠날 수 없소"라고 하며, 서로 반초의 말발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반초도 자신의 본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이에 다시 소륵으로 돌아갔다. 소륵에는 두 성이 이미 구자에게 항복하고, 위두(尉頭)와 함께 병력을 합하고 있었다. 반초가 반란자를 체포하여 참수하고, 위두를 격파하여 6백여 명을 죽이니, 소륵이 다시 안정되었다.
갑인일(甲寅日)에 산양(山陽), 동평(東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나라에 이로운 세 가지 일을 상주하였다. 황제가 회답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요즘 관리와 백성들이 일을 아뢸 때에도 이런 말이 있었으나, 내 지혜가 얕아, 혹시 옳다고 여기면서도 그릴까 걱정되어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몰랐소. 왕의 깊은 책략을 얻고 나니 활짝 트이는 듯하오. 이 좋은 계책들을 생각하여 차례로 시행하겠소. 특별히 왕에게 오백만 전을 내리노라." 후에 황제가 원릉(原陵)과 현절릉(顯節陵)에 현읍(縣邑)을 설치하려 하자, 유창이 상주문을 올려 간언하였다: "신이 보건대 광무황제께서 친히 검소한 행실을 실천하시고, 시종의 이치를 깊이 아시어, 근실하고 간절히 장례 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효명황제께서 큰 효도로 어기지 않고 계승하여 따르셨습니다. 겸덕(謙德)의 아름다움이 이보다 더 성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어리석게 생각하건대, 원읍(園邑)의 일어남은 강한 진(秦)나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구릉조차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성곽을 쌓고 도성을 세우는 일이겠습니까! 위로는 선제의 성스러운 마음을 어기고, 아래로는 무익한 공역을 만들어 국가의 비용을 허비하고 백성을 동요시키니, 이는 상서로움을 부르고 풍년을 비는 방법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우순(虞舜)과 같은 지성(至性)을 지니시고, 선조의 깊은 생각을 추념하시나, 신 유창이 진실로 애석히 여기옵기는 두 황제의 순수한 덕의 아름다움이 무궁하게 전해지지 못할까 함입니다."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조정에 어려운 정사가 있을 때마다 역말을 보내 자문하면, 유창이 마음을 다해 대답하여 모두 채택되어 시행되었다. 가을, 8월 경인일(庚寅日)에 혜성이 천시(天市) 별자리에 나타났다.
처음에 익주서부도위(益州西部都尉) 광한(廣漢) 사람 정순(鄭純)이 정사를 청렴하게 하여 교화가 이맥(夷貊) 지역에까지 미치자, 군장들이 감동하고 흠모하여 모두 진귀한 보물을 바치고 귀부하였다. 명제(明帝)가 이를 위해 영창군(永昌郡)을 설치하고 정순을 태수로 임명하였다. 정순이 관직에 있은 지 10년 후에 죽었는데, 후임자가 이인(夷人)들을 잘安抚하지 못하였다. 9월에 애뢰왕(哀牢王) 유뢰(類牢)가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박남(博南)을 공격하였다.
부릉왕(阜陵王) 유연(劉延)이 여러 번 마음속으로 원망을 품었는데, 어떤 사람이 유연이 아들 유방(劉魴)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고 고발하였다. 황제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겨울 11월에 유연을 부릉후(阜陵侯)로 강등시키고, 식읍을 한 현(縣)으로 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북흉무 고림온우독왕(皋林溫禺犢王)이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 탁사산(涿邪山)에 거주하자, 남선우(南單于)가 변경 군현 및 오환(烏桓)과 함께 그를 격파하였다. 이 해에 남흉노가 큰 기근이 들어, 조서를 내려 구제를 공급하였다.
숙종 효장황제 상(上) 건초 2년(丁丑, 서기 77년)
봄, 3월 갑진일(甲辰日)에 이오려(伊吾盧)의 둔병을 철수하니, 흉노가 다시 군사를 보내 그 땅을 점령하였다.
영창(永昌), 월수(越巂), 익주(益州) 세 군의 군사와 곤명이(昆明夷) 노승(卤承) 등이 박남(博南)에서 애뢰왕(哀牢王) 유라(类牢)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참수하였다.
여름, 4월 무자일(戊子日)에 조서를 내려 초왕(楚王)과 회양왕(淮阳王)의 일로 유배되었던 4백여 가를 돌아오게 하였다.
황제가 여러 외삼촌들을 봉작(封爵)하려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큰 가뭄이 들자, 정사를 논하는 자들이 외척을 봉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여겼고, 유관 부서에서 구전(旧典)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태후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모두 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려는 것일 뿐이다. 옛날 왕씨(王氏) 오후(五侯)가 같은 날에 봉해졌을 때,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으나 때맞춘 비가 내렸다는 징험은 듣지 못했다. 외척이 귀하고 번성하면, 무너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선제(先帝)께서 외척을 경계하여 중추(枢机) 요직을 맡기지 않으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은 선제의 아들과 같을 수 없다’ 하셨는데, 지금 유관 부서에서 어찌하여 마씨(马氏)를 음씨(阴氏)에 비하려 하는가! 더욱이 음위위(阴卫尉)는 천하가 칭송하는 바라, 궁중의 어자가 그의 집 문에 이르면 신발을 신지 못하고 나가 맞이하였으니, 이는 거백옥(蘧伯玉)과 같은 공손함이다. 신양후(新阳侯)는 비록 강직하여 조금 도리를 잃은 데가 있으나 지모가 있어, 땅에 꿇어앉아 논의함이 한 시대에 비할 이가 없었다. 원녹정후(原鹿贞侯)는 용맹하고 성실하였다. 이 세 사람은 천하의 뛰어난 신하인데,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마씨는 음씨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나는 재주가 없어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항상 선후(先后)의 법을 손상시킬까 걱정하여 털끝만한 허물도 놓치지 않으려 밤낮으로 거듭 말하지만, 친족들은 여전히 법을 범하고, 상사(丧事)를 치르고 무덤을 수리하는 일도 제때 살피지 못하니, 이는 내 말이 효력이 없고耳目이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천하의 모후(母后)로서 거친 비단을 입고 음식은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측근 시종들은 베옷만 입고 향료나 장식품을 두지 않음은, 몸소 모범을 보여 아랫사람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나는 외척 친족들이 이를 보고 마음 아파하며 스스로를 절제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들은 다만 웃으며 말하기를 ‘태후께서 본래 검소하시다’고 할 뿐이다. 지난번에 탁룡문(濯龙门)을 지날 때, 외척 집에서 문안 오는 자들을 보니 수레는 흐르는 물처럼 이어지고 말은 노니는 용처럼 오갔으며, 노복들은 푸른 소매를 입고 깃과 소매가 희고 가지런하였다. 돌아보아 내 수레와 시종들을 보니 그들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꾸짖지 않고 다만 그들의 연간 비용을 끊었을 뿐이니, 침묵으로 그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게을러 나라를 근심하고 집을 잊을 뜻이 없다.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이가 없고, 하물며 친족에 있어서랴! 내가 어찌 위로 선제의 유지를 저버리고, 아래로 선인의 덕행을 손상시키며, 전한(西汉) 외척의 패망 화근을 되풀이하겠는가!” 하고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조서를 보고 슬프게 탄식하며 다시 청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외삼촌을 봉후(封侯)하는 것은 마치 황자가 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태후께서 진실로 겸허한 마음을 가지셨으나, 어찌 저로 하여금 홀로 세 외삼촌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게 하십니까! 더욱이 위위(卫尉)는 나이가 많고, 두 교위(校尉)는 중병을 앓고 있어, 만약 그들이 불행히 세상을 떠난다면, 저로 하여금 오래도록 뼈에 새길 듯한 한을 품게 하실 것입니다. 마땅히 길한 때를 이용하여 지체하지 마소서.” 태후가 대답하였다. “내가 거듭 생각하여 두 가지를 모두 온전하게 하고자 하였을 뿐, 어찌 다만 겸양의 명성을 얻기 위해 황제로 하여금 외척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게 하겠느냐! 옛날 두태후(窦太后)가 왕황후(王皇后)의 오라버니를 봉하려 하자, 승상 조후(条侯, 주아부)가 말하기를 ‘고조(高祖)께서 약속하시기를, 군공(军功)이 없으면 봉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지금 마씨는 국가에 공로가 없는데, 어찌 음씨, 곽씨(郭氏)와 같은 중흥 공신의 후예와 동등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 나는 항상 부귀한 집을 관찰하노니, 녹위(禄位)가 겹겹이 쌓임은 마치 열매가 다시 맺히는 나무와 같아 그 뿌리가 반드시 상한다. 또 사람들이 봉후되기를 바라는 것은 위로 제사를 받들고 아래로 의식(衣食)을 구하려는 것일 뿐이다. 지금 제사는 태관(太官)의 하사가 있고, 의식은 어부(御府)의 남는 재물이 있으니, 이것으로도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여 반드시 한 현(县)을 얻어야 하겠느냐! 내가 이미 숙고하여 매우 성숙해졌으니, 다시는 의심을 품지 말라. 가장 효도하는 행실은 부모를 편안하게 하는 데 윗됨을 삼는다. 지금 여러 차례 변괴(变异)가 닥쳐 곡식 값이 몇 배나 올랐는데,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앉으나 서나 불안해하는데, 네가 오히려 먼저 외척의 상을 경영하여 자애로운 어머니의 간절한 뜻을 어기려 하느냐! 나는 본래 강하고 급한 성질에 가슴 속에 기질(气疾)이 있으니, 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따르고, 이미 성년이 되어 성인이 되면 자신의 뜻을 행한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황제는 군주이다. 내가 복상(服丧) 3년이 끝나지 않은 까닭에, 자기 집안 일을 전결(专决)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음양이 조화되고 변경이 평안해지면, 그때 네 뜻을 시행하라. 나는 그때에는 엿을 머금고 손자와 놀며 놀면서 다시 정사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이에 그쳤다.
태후가 일찍이 삼보(三辅) 지역에 조서를 내리기를, 무릇 마씨 친척으로 군현에 청탁하여 관리의 일을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법대로 보고하라고 하였다. 태부인(태후의 어머니)의 무덤을 조금 높이 쌓자, 태후가 이 일을 말하였고, 오라버니 위위(卫尉) 마료(马廖) 등이 즉시 줄였다. 외척 중에 겸허하고 소박하며 행실이 어진 자가 있으면 부드러운 말로 격려하고 재물과 관직을 하사하였고, 작은 허물이 있으면 먼저 엄숙한 얼굴빛을 보인 후에 꾸짖었다. 그 수레와 말의 장식이 화려하고 법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종족의 명적(名籍)을 끊고 고향으로 쫓아보냈다. 광평왕(广平王), 거록왕(巨鹿王), 낙성왕(乐成王)의 수레와 말이 소박하고 금은 장식이 없자, 황제가 태후에게 알리니, 즉시 각각 오백만 전을 하사하였다. 이에 궁중과 밖에서 모두 교화를 따르며 의복과 장식이 한결같아졌고, 각 외척 집들은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영평(永平) 연간보다 더하였다. 직실(织室)을 설치하고 탁룡원(濯龙园)에서 누에를 길렀으며, 태후가 여러 번 가서 보고 이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녀는 항상 황제와 아침저녁으로 정사를 논의하고, 또 작은 왕자들에게 《논어》 경서를 가르치며 생애 경험을 이야기하여 하루 종일 화목하고 융화되었다.
마료(马廖)는 아름다운 일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까 걱정하여 상소를 올려 덕정(德政)을 성취하도록 권면하였다. “옛날 원제(元帝)는 복관(服官)을 폐지하였고, 성제(成帝)는 빨래한 옷을 입었으며, 애제(哀帝)는 악부(乐府)를 철폐하였으나, 사치와 낭비가 그치지 않아 마침내 쇠란(衰乱)에 이른 까닭은, 백성들이 행동은 따르고 말은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개혁하고 풍속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그 근본이 있습니다. 《좌전(左传)》에 이르기를 ‘오왕(吴王)이 검객을 좋아하자 백성에게 상처가 많았고, 초왕(楚王)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하였습니다. 장안(长安) 속언(俗谚)에 이르기를 ‘성중에서 높은 쪽을 좋아하면 사방의 쪽은 한 자나 되고, 성중에서 넓은 눈썹을 좋아하면 사방의 눈썹은 반 이마까지 그리며, 성중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한 필의 베로 소매를 만든다.’ 하였습니다. 이 말들은 농담 같으나 실제를 꿰뚫습니다. 지난번에 제도를 반포한 지 오래지 않아 점차 해이해졌으니, 비록 어떤 관리가 법을 지키지 않은 탓도 있으나, 주된 까닭은 경박한 풍조가 경성(京城)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본래 소박하고 익숙한 것을 편안히 여기시어 성스럽고 타고난 성품에서 나오셨습니다. 만약 진실로 이 일을 끝까지 관철하신다면, 천하가 덕을 칭송하고 명성이 천지에熏染되어 신명(神明)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하물며 법령을 시행하는 일이겠습니까!” 태후가 깊이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처음에 안이현(安夷县) 관리가 비녀종강인(卑湳种羌人)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자, 관리가 그 남편에게 살해당하였다. 안이현장(安夷县长) 종연(宗延)이 추격하여 새외(塞外)로 나갔다. 강인 종족(种落)들이 주살당할까 두려워하여 함께 종연을 죽이고, 늑저(勒姐), 오량(吾良) 두 종의 강인과 합세하여 도적이 되었다. 이에 소당강(烧当羌)의 호수(豪酋) 미오(滇吾)의 아들 미오(迷吾)가 각 부락을 이끌고 함께 반란을 일으켜, 금성태수(金城太守) 학숭(郝崇)을 패배시켰다. 조서를 내려 무위태수(武威太守) 북지인(北地人) 부육(傅育)을 호강교위(护羌校尉)로 삼아 안이에서 임강(临羌)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였다. 미오(迷吾)가 다시 봉양종(封养种)의 호수(豪酋) 포교(布桥) 등 5만여 명과 함께 농서(陇西), 한양(汉阳)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대행거기장군(代理车骑将军) 마방(马防)과 장수교위(长水校尉) 경공(耿恭)을 보내 북군오교병(北军五校兵) 및 각 군의 사수(射士) 3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제5륜(第五伦)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나는 어리석게 생각하건대, 귀척(贵戚)은 봉후하여 부귀하게 할 수는 있으나 직임을 위임해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법으로 그들을 단속하면 은정을 해치고, 사사로이 친근히 하면 법도를 어기기 때문입니다. 듣자하니 마방(马防)이 지금 장차 서쪽으로 정벌을 간다 하옵니다. 저는 태후께서 인자하시고 폐하께서 지극한 효성이라, 갑자기 작은 잘못이라도 생기면 은애(恩爱)를 온전히 하기 어려울까 두렵나이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 마방 등의 군대가 기현(冀县)에 이르렀을 때, 포교(布桥) 등이 임조(临洮)에서 남부도위(南部都尉)를 포위하였다. 마방이 진군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찌르고 참수와 포로가 4천여 명에 이르러, 이에 임조의 포위를 풀었다.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으나, 오직 포교 등 2만여 명만이 망곡곡(望曲谷)에 주둔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12월 무인일(戊寅日)에 혜성이 자궁(紫宫)에 나타났다.
황제가 두훈(窦勋)의 딸을 귀인(贵人)으로 맞이하여 총애를 받았다. 귀인의 어머니는 동해공왕(东海恭王)의 딸 비양공주(沘阳公主)였다.
第五륜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광무제께서 왕망의 뒤를 이어, 상당히 엄격하고 위엄 있는 방식으로 정치를 행하셨고, 후대가 이를 계승하여 마침내 풍토가 되었습니다. 군과 나라에서 천거하는 자는 대개 일을 잘 처리하는 속된 관리들일 뿐, 너그럽고 박학한 인선이 전혀 없어 폐하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진류령 유예와 관군령 사협은 모두 각박한 성품으로 가혹하고 엄격함에 힘쓰니, 관리와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그들을 통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유능하다고 여겨, 하늘의 뜻을 어기고 경전의 의리를 잃었습니다. 마땅히 유예와 사협을 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천거한 자들도 꾸짖어야 합니다. 반드시 인덕 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 정무를 맡기면, 몇 사람만으로도 풍속이 자연히 교화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사서를 읽으며 진나라가 가혹하고 급박함으로 망한 것을 알고, 또 친히 왕망도 가혹한 법으로 스스로 멸망한 것을 보았기에,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제후왕, 공주, 귀척들이 사치하고 교만하여 제도를 넘어서니, 경성에서조차 그러하니, 어찌 먼 지방에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이 있어도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으로 가르치면 사람들이 따르고, 말로 가르치면 사람들이 다툽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제5륜은 비록 천성이 강직하였지만, 항상 속된 관리들의 가혹함을 통탄하여, 의논할 때면 항상 너그럽고 관대한 도리를 따랐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3년(무인, 서기 78년)
봄, 정월 기유일에 명당에서 조종을 제사하고, 영대에 올라 대사면을 베풀었다.
마방이 포교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포교가 부락 1만여 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 마방을 소환하였다. 경공을 남겨 아직 항복하지 않은 무리들을 공격하게 하니, 목을 베고 포로로 잡은 자가 1천여 명이었으며, 뇌질, 소하 등 13종 수만 명이 모두 경공에게 항복하였다. 경공이 일찍이 말로 마방을 범한 적이 있었는데, 감영알자가 마방의 뜻을 받들어 경공이 군사를 근심하지 않는다고 상주하였다. 이에 소환되어 하옥되고 관직을 면하였다.
3월 계사일에 귀인 두씨를 황후로 세웠다.
처음에 현종 시기에 호타하와 석백하를 정비하여 도려에서 양장창까지 수로를 통해 조운을 통하게 하려 하였다. 태원의 관리와 백성들이 역역에 고통받아 여러 해 동안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황제가 낭중 등훈을 알자로 임명하여 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등훈이 측량하고 계산하여 성공하기 어려움을 알고 상세히 조정에 보고하였다. 여름, 4월 기사일에 조서를 내려 이 역역을 중지하고, 나귀 수레로 운송하게 하였다. 매년 절약된 경비가 억만 단위에 이르렀고, 역에 동원된 민공 수천 명을 구하였다. 등훈은 등우의 아들이다.
윤달에 서역 가사마 반초가 소륵, 강거, 우전, 구미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묵 석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겨울, 12월 정유일에 마방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무릉 루중만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해에 유관이 상주하여 광평왕 유선, 거록왕 유공, 낙성왕 유당을 각각 봉국으로 보낼 것을 청하였다. 황제의 성정이 후하고 인자하여 여러 왕들과 이별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모두 경성에 머물게 하였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4년(기묘, 서기 79년)
봄, 2월 경인일에 태위 모융이 사망하였다.
여름, 4월 무자일에 황자 유경을 태자로 세웠다.
기축일에 거록왕 유공을 강릉왕으로, 여남왕 유창을 양왕으로, 상산왕 유병을 회양왕으로 고쳐 봉하였다.
신묘일에 황자 유항을 천승왕으로, 유전을 평춘왕으로 봉하였다.
유관이 연이어 옛 전례에 따라 여러 외삼촌들에게 봉작을 청하였다. 황제가 천하가 풍년이고 변경에 전쟁이 없음을 여겨, 계묘일에 위위 마료를 순양후로, 거기장군 마방을 영양후로, 집금오 마광을 허후로 봉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는 오직 청사에 이름을 남기기를 사모하여, 뜻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늙었지만 여전히 탐욕을 경계하여 밤낮으로 경계하며 스스로 겸손하려 하여, 이 도리를 따라 선제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형제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함께 이 뜻을 지키게 한 것은, 눈을 감고 죽을 때에 유감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찌 늙은 뜻이 다시 따르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 죽은 뒤에 길이 한을 남기리라!" 하였다. 마료 등이 모두 사양하여 관내후만 받기를 원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마료 등이 부득이 작위를 받았으나, 상소하여 관직을 사양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5월 병진일에 마방, 마료, 마광이 모두 특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갑술일에 사도 포욱을 태위로, 남양태수 환우를 사도로 임명하였다. 6월 계축일에 황태후 마씨가 사망하였다. 황제가 어려서부터 마태후의 손에 자라나, 오직 마씨 집안만을 외가로 여겼기 때문에, 가귀인은 황후의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고, 가씨 친척들도 은총과 영광을 받지 못하였다. 마태후가 죽자, 다만 가귀인에게 왕이 사용하는 적색 수대, 안거 한 대, 영항의 궁녀 200명, 어부의 각종 비단 2만 필, 대사농이 금 1천 근과 2천만 전을 내렸을 뿐이었다.
가을, 7월 임술일에 명덕황후를 안장하였다.
교서랑 양종이 건의하기를 "선제께서 일찍이 유학자들을 널리 불러 석각에서 오경을 토론하고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천하가 평안하여 학자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으나, 다만 장구를 해석하는 자들이 경전의 전체 요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석각의 선례에 따라 영원히 후세의 법칙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겨울, 11월 임술일에 태상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장군, 대부, 박사, 낭관 및 여러 유생들은 백호관에 모여 오경의 같고 다름을 논의하라." 하였다. 오관중랑장 위응을 시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질문하게 하고, 시중 순우공이 상주하게 하였으며, 황제가 친히 주재하여 결재하여 《백호의주》를 지었다. 명유 정홍, 누망, 성봉, 환욱, 반고, 가규 및 광평왕 유선이 모두 참여하였다. 반고는 반초의 형이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5년(경진, 서기 80년)
봄, 2월 경진 삭일에 일식이 있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직언극간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형주, 예주 각 군의 군대가 루중의 만족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여름, 5월 신해일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정직한 사람을 생각하며 기다려, 몸을 기울여 특별한 견해를 기다린다. 먼저 온 자들은 각자 이미 울분을 토로하였고, 나는 대략 여러 사대부들의 뜻을 알았다. 나는 모두 그들을 곁에 두어 자문하고 채택하려 한다. 건무 연간의 조서에 또 이르기를 '요는 직무로 신하를 시험하였지, 말과 글자만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 지방 관직에 빈자리가 많으니, 모두 그들로 하여금 보임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무진일에 태부 조희가 사망하였다.
반초는 이 기회를 틈타 서역을 평정하고자 상소를 올려 병력을 요청하며 말했다: "신이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선제께서 서역을 개척하고자 하셨기에 북쪽으로 흉노를 공격하고 서쪽으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어, 선선과 우전이 곧바로 교화에 귀순하였습니다. 지금 구미, 사차, 소륵, 월지, 오손, 강거가 또 다시 귀부하기를 원하며, 함께 힘을 합쳐 구자를 격파하고 멸망시켜 한나라가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열고자 합니다. 만약 구자를 취할 수 있다면, 서역 중 복종하지 않은 자는 백에 하나뿐일 것입니다. 전대에 의논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삼십육국을 취하는 것은 흉노의 오른팔을 베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역 여러 나라들은 해가 지는 곳에서부터 교화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고, 크고 작은 모두가 기뻐하며 조공이 끊이지 않으나, 오직 언기와 구자만이 아직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전에 서른여섯 명의 속관과 함께 명을 받들어 지극히 먼 곳에 사신으로 가서, 갖은 어려움과 곤경을 겪었으며, 홀로 소륵을 지킨 지 지금까지 오 년이 되었습니다. 호인과 이적의 사정에 대해서는 신이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읍의 크기를 물으니, 모두 한나라를 의지하기를 하늘을 의지함과 같이 말합니다. 이로써 증명하건대, 총령은 뚫릴 수 있고 구자는 토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구자에서 한나라에 인질로 온 왕자 백파를 구자 왕으로 세우고, 수백 명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그를 돌려보내 여러 나라와 병력을 합친다면, 일 년 반 이내에 구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적을 써서 이적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신은 사차와 소륵의 토지가 비옥하고 광활하며 목초가 무성하여, 돈황과 선선 사이와 같지 않음을 봅니다. 군대는 중원의 물자를 소모하지 않고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묵과 온숙 두 나라의 왕은 구자가 특별히 임명한 자들인데, 그들은 동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 미워하고 괴로워하니, 이러한 형세에는 반드시 항복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나라가 항복한다면 구자는 자연히 무너질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장계를 아래에 내려 의논하고, 참고하여 시행하소서. 진실로 만 분의 일의 성공 가능성이 있다면, 신이 죽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신 반초는 지극히 미약하나 특별히 신령의 가호를 입어, 개인적으로 바라건대 아직 쓰러지지 않고 서역이 평정되는 것을 친히 목격하여, 폐하께서 만년의 술잔을 들어 종묘에 공훈을 바치고 천하에 큰 기쁨을 선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계가 올라가자, 황제는 이 일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고 의논하여 병력을 보내주고자 하였다. 평릉 사람 서간이 상소하여, 몸을 바쳐 반초를 보좌하기를 원하였다. 황제는 서간을 가사마로 임명하고, 형벌을 감면받은 죄수와 자원하여 종군한 자 천 명을 거느리고 반초에게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차는 한나라 군대가 출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구자에 항복하였고, 소륵의 도위 번진도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서간이 도착하자, 반초는 서간과 함께 번진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반초는 구자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오손의 병력이 강대하므로 그 힘을 빌려야 한다고 여겨, 이에 상소하여 말했다: "오손은 대국으로, 활을 당길 줄 아는 병사가 십만 명입니다. 그러므로 무제께서 공주를 오손 왕에게 시집보내셨고, 효선제 때에 이르러 마침내 오손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지금 사신을 보내어 초무하고 위문하여 그들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6년(신사, 서기 81년)
봄, 2월 신묘일에 낭야효왕 유경이 죽었다.
여름, 6월 병진일에 태위 포욱이 죽었다.
신미 삭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계사일에 대사농 등표를 태위로 임명하였다.
무도태수 엄범이 촉군태수로 전임되었다. 성도는 백성들의 재물이 풍성하고 성읍의 가옥이 좁았다. 옛 규정에 따라 백성들의 야간 작업을 금지하여 화재를 막았으나, 백성들은 더욱 서로 숨겼고 화재는 여전히 매일 발생하였다. 엄범은 이에 예전의 금령을 폐지하고, 다만 엄격히 물을 저장하도록 요구하였을 뿐이다. 백성들은 이것이 편리하다고 여겨 그를 칭송하여 노래하였다: "염숙도여, 오심이 늦었도다! 불을 금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편안히 일하네. 옛날에는 적삼도 없더니, 지금은 바지 다섯 벌이로다."
황제는 패왕 등이 장차 입조할 것이므로, 알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담비 갖옷과 태관의 음식, 진기한 과일을 하사하고, 또 대홍려 두고에게 부절을 주어 교외로 맞이하게 하였다. 황제는 친히 그들이 거처할 관저를 살펴보고 미리 휘장과 침상을 설치하였으며, 돈, 비단, 기물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7년(임오, 서기 82년)
봄, 정월에 패왕 유보, 제남왕 유강, 동평왕 유창, 중산왕 유언, 동해왕 유정, 낭야왕 유우가 조현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패왕, 제남왕, 동평왕, 중산왕은 조회할 때 관직명만 부르고 성명은 부르지 않으며, 전당에 올라서야 절을 하고 황제가 친히 답례하여, 그들을 존중하고 그 은총을 드러내어 전대를 넘어섰다. 매번 궁중에 들어올 때면 연거를 사용하여 맞이하고 궁문에 이르러서야 수레에서 내렸다. 황제는 그들을 위하여 일어서고 안색을 바꾸었으며, 황후는 내궁에서 친히 배알하니, 그들은 모두 고개 숙여 사양하고 불안해하였다. 3월에 대홍려가 아뢰어 여러 왕들을 봉국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하였으나, 황제는 특별히 동평왕 유창을 경성에 머물게 하였다.
당초 명덕태후는 황제를 위하여 부풍 사람 송양의 두 딸을 맞아들여 귀인으로 세웠고, 대귀인은 태자 유경을 낳았다. 양송의 동생 양정에게도 두 딸이 있어 역시 귀인으로 세워졌고, 소귀인은 황자 유조를 낳았다. 두 황후는 아들이 없어 유조를 양자로 삼았다. 송귀인은 일찍이 마태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마태후가 죽은 후 두 황후의 총애가 더욱 성해져, 그녀는 어머니 비양공주와 함께 송씨를 모해할 것을 꾀하였다. 밖으로는 형제들로 하여금 송가의 작은 허물을 찾게 하고, 안으로는 시종들로 하여금 송씨의 과실을 엿보고 살피게 하였다. 송귀인이 병이 들어 생토끼 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집사람으로 하여금 구하게 하였는데, 두 황후는 이에 그들이 무고를 행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로 인해 태자는 궁 밖으로 쫓겨나 승록관에 거처하게 되었다. 여름, 6월 갑인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황태자가 미혹하고 실도하여 안정되지 못하는 본성을 지녀, 종묘를 받들 수 없다. 대의는 친족도 버릴 수 있거늘, 하물며 강등하여 물러나는 것이랴! 지금 유경을 폐하여 청하왕으로 삼는다. 황자 유조는 황후가 양육하며 포대 속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니, 지금 유조를 황태자로 세운다." 이에 송귀인 자매를 궁 밖으로 내쫓아 병사에 안치시키고, 소황문 채륜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다. 두 귀인은 모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그들의 아버지 의랑 송양은 관직을 면하고 본군으로 돌려보내졌다. 유경은 당시 나이가 어렸으나, 또한 화를 피하려고 조심하여 말로 송씨를 언급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도리어 그를 더욱 가엾게 여겨, 황후에게 명하여 그의 의복을 태자와 동등하게 하도록 하였다. 태자 유조도 유경을 친근히 사랑하여, 들어가면 한 방에 살고 나가면 같은 수레를 탔다. 기미일에 광평왕 유선을 고쳐 서평왕으로 봉하였다.
가을, 8월, 음주례를 마친 후, 관계 관원이 또 아뢰어 동평왕 유창을 봉국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에 허락하고, 친히 조서를 써서 유창에게 내려 말했다: "골육은 하늘이 정한 관계라, 진실로 거리가 멀다고 친소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만나면 감정이 지난날보다 더 깊어진다. 생각건대 대왕이 오래도록 수고하였으니, 그대가 돌아가 쉬기를 바란다. 대홍려의 장계에 서명하려 하였으나, 차마 붓을 내리지 못하고, 돌이켜 소황문에게 넘겼다. 마음속에 연연하여 슬퍼서 말을 잇지 못하겠다." 이에 황제가 수레를 타고 친히 전송하며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였고, 또 천자의 수레와 의복, 진귀한 보물, 거마, 그리고 억 단위의 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9월 갑술일에 황제가 언사에 행차하여 동쪽으로 권현 나루를 건너 하내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이 이번 출행은 가을 곡식을 살펴보고 수확을 관찰하기 위함이며, 겸하여 군의 경계를 지나니, 모두 정예 기병으로 가볍게 행군하여 다른 치중이 없다. 함부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거나, 성곽을 멀리 떠나 관리들을 보내어 맞이하고, 기거 상황을 묻거나, 앞뒤로 출입하게 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모든 행동은 반드시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여, 오직 거친 밥과 표주박의 물을 먹지 못할까 걱정할 따름이다." 기유일에 황제가 업성으로 나아갔다. 신묘일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겨울, 10월 계축일에 황제가 장안으로 행차하여, 소하의 말손 소웅을 찬후로 봉하였다. 또 회리와 기산으로 나아갔고, 또 장평에 행차하여 지양궁에 머물렀으며, 동쪽으로 고릉에 이르렀다. 12월 정해일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동평헌왕 유창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황제는 명의와 소황문을 급히 보내 병을 간호하게 하였으며, 파견된 사신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또 역마를 설치하여 천 리 밖에서도 병세와 기거 상황을 전해 묻게 하였다.
숙종 효장황제 상 건초 8년(계미, 서기 83년)
봄, 정월 임진일에 동평왕 유창이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중부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동평왕이 건무 연간 이래로 올린 주장을 봉하여 올리고, 함께 모아 열람하라" 하고, 대홍려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서 상례를 감독하게 하고, 사성 소후와 여러 나라 왕, 공주들에게 모두 장례에 참여하라고 명령하였다.
여름, 6월에 북흉노 삼목루지 부족의 대인 계류사 등이 3만여 명을 이끌고 오원새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항복하였다.
겨울, 12월 갑오일에 황제가 행차하여 진류, 양국, 회양, 영양에 이르렀다. 무신일에 궁으로 돌아왔다.
태자 유조가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양씨 집안은 은밀히 서로 축하하였다. 두씨 집안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두 황후는 외가의 명성을 독차지하려 하여 양귀인 자매를 시기하고 꺼렸으며, 여러 차례 황제 앞에서 그들의 나쁜 말을 하여 점차 황제로 하여금 그들을 소원히 여기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해에 두씨 집안 사람들이 익명의 편지를 써서 악역한 죄명으로 양송을 모함하였고, 양송은 결국 옥중에서 죽었으며, 가족은 구진으로 유배되었고, 양귀인 자매도 근심으로 죽었다. 공술 내용이 양송의 아내 무음공주에게까지 연루되어 함께 연좌되어 신성으로 유배되었다.
순후후 마료는 사람 됨됨이가 신중하고 독실하며 본분을 지켰으나, 성격이 너그럽고 느려 자제들을 가르치고 단속하지 못하여, 그의 자제들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하였다. 교서랑 양종이 마료에게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며 말하기를 "각하는 지위가 높고 중요하여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황문랑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혈기가 한창 왕성하여 장군처럼 겸손하고 사양하는 풍모도 없으면서, 오히려 경박하고 교활하며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들과 사귀고, 그들을 내버려두고 가르치지 않아, 눈으로 보면서도 제멋대로 굴기를 버릇하게 하는 것을 보니,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마료는 듣지 않았다. 마방과 마광 형제의 재산은 억만에 달하였고, 크게 저택과 누대를 지어 거리가 가득 찼으며, 문하의 식객은 항상 수백 명에 이르렀다. 마방은 또 말과 가축을 많이 방목하여 강족과 호족에게 세금을 징수하였다. 황제(장제)는 이에 불쾌하게 여겨 여러 차례 꾸짖고 경계하며 금지하고 방비하는 조치를 매우 철저히 하였다. 이로부터 그들의 세력은 점차 줄어들고 빈객도 쇠퇴하였다. 마료의 아들 마예가 보병교위가 되어 상소하여 불평하고 비방하였다. 이에 주관 관리가 함께 마방, 마광 형제가 사치하여 분수를 넘고 성스러운 교화를 해쳤다고 탄핵하여, 결국 모두 면직시키고 그들의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가 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외숙들이 한 집안 모두 봉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사계절 능묘 제사에 도와서 앞서 나가는 이가 없으니, 짐이 매우 슬프다. 허후에게 명하여 전사에서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게 하고, 주관 관리는 다시 탄핵 등을 청하지 말라. 이로써 짐이 외숙을 생각하는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마광이 마방보다 조금 더 신중하고 치밀하였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그를 머물게 하고, 후에 다시 특진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마예는 마료를 따라 봉국으로 돌아갔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다. 후에 또 조서가 있어 마료를 경사로 돌아오게 하였다.
마씨 일가가 죄를 얻은 후, 두씨 일가는 더욱 존귀하고 현달하게 되었다. 황후의 오빠 두헌은 시중, 호분중랑장이 되었고, 아우 두독은 황문시랑이 되어 모두 궁중에서 모시며 상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빈객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사공 제오륜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호분중랑장 두헌은 황후의 친척으로 궁중 금군을 관장하며 궁중을 출입하고, 나이가 아직 젊으나 뜻이 아름답고 겸손하며 사양하고 선을 즐겨하니, 이는 진실로 그가 현사를 좋아하고 붕우와 사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황척의 문하를 출입하는 자들은 대부분 결점이 있거나 금고된 자들이어서, 특히 검소함을 지키고 빈곤에 편안한 절개를 지키는 자가 드뭅니다. 선비 중에 뜻이 없는 자들은 서로 거래하고 매매하여 구름처럼 그 문하에 모여드니, 교만하고 방자함이 바로 여기서 생겨납니다. 삼보 지역에서 의논하는 자들이 심지어 말하기를 '황척 때문에 폐기되고 금고되었으니, 또한 황척을 통해서 죄명을 씻어야 하니, 마치 취기를 풀려면 술을 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 사특하고 간사하며 권세에 아부하는 무리들은 진실로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원하옵건대, 폐하와 황후께서 두헌 등에게 엄히 경계하여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게 하시고, 함부로 사대부와 사귀지 말게 하시며, 환난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미리 방비하고, 형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여, 두헌으로 하여금 영원히 복록을 보전하게 하시고, 군신 사이에 서로 화목하여 터럭 하나만한 틈도 없게 하시는 것이, 신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두헌은 궁중의 세력을 믿고, 제후왕과 공주로부터 음씨, 마씨 등 여러 집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꺼리는 이가 없지 않았다. 두헌은 낮은 값으로 강제로 급수공주의 전원을 빼앗으려 하였고, 공주는 그의 위세에 겁을 먹어 감히 따지지 못하였다. 후에 황제가 궁을 나서다가 이 전원을 지나게 되어, 그것을 가리키며 두헌에게 물었으나, 두헌은 더듬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후에 일이 발각되어 황제가 매우 노하여 두헌을 불러 엄히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전에 공주의 전원을 강제로 빼앗은 일을 깊이 반성해 보아라, 그게 조고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 오래도록 생각하니 참으로 놀랍고 두렵다. 옛날 영평 연간에는 항상 음당, 음박, 등첩 세 사람을 시켜 서로 감찰하고 규찰하게 하였으므로, 여러 호족과 귀척들이 감히 법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존귀한 공주조차 네가 강제로 빼앗으려 하였으니, 하물며 작은 백성들이야 어떠하겠느냐! 국가가 너 두헌을 버리는 것은, 마치 외로운 새 한 마리나 썩은 쥐 한 마리를 버리는 것과 같을 뿐이다!" 두헌이 매우 두려워하였고, 황후가 이를 위하여 화려한 옷을 벗고 사죄하며 깊이 용서를 빌었고, 오랜 후에야 황제의 노여움이 가라앉아 그로 하여금 전원을 공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비록 그를 처벌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중임을 맡기지도 않았다.
신 사마광이 말한다: 신하의 죄악 중에 속임수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그러므로 명철한 군주는 이를 몹시 싫어한다. 한 장제가 두헌이 조고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은 매우 옳은 말이다. 그러나 끝내 두헌을 처벌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간신이 무엇으로 징계를 받겠는가! 군주가 신하에게 있어, 환난은 그 간사함을 알지 못하는 데 있고, 만약 알았다 해도 그들을 용서한다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이 간사한 일을 저질렀는데 군주가 모르면, 그들에게 오히려 두려워하는 바가 있다. 이미 알면서도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그들은 군주가 두려워할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침내 방자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알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나쁜 것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군주가 깊이 경계해야 할 바이다.
하비 사람 주우가 낙양령이 되었다. 부임한 후, 먼저 그 지역의 대성(큰 성씨)의 이름을 물었다. 속리들이 고을의 호강들을 열거하여 대답하였다. 주우가 큰 소리로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본래 마씨, 두씨 같은 황척들을 물었는데, 어찌 이 푸성귀 장수들을 알겠느냐!" 하였다. 이에 속리들이 그의 의향과 기세를 헤아려, 다투어 격렬하고 엄격하게 대우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고, 황척들은 모두 불안해하였으며, 경사의 질서는 엄숙하고 청명하여졌다. 두독이 밤에 지간정(止奸亭)에 이르렀는데, 정장(亭長) 곽연이 칼을 빼어 두독을 가리키며 마음대로 욕설을 퍼부었다. 두독이 이 일을 표문으로 아뢰었고, 조서를 내려 사례교위와 하남윤을 불러 상서에게 가서 힐문하게 하고, 검극사(劍戟士)를 보내어 주우를 체포하여 정위의 조옥(詔獄)에 보냈다. 며칠 후에 다시 사면하여 석방하였다.
황제가 반초를 장사장사(將兵長史)로 임명하고, 서간을 군사마(軍司馬)로 삼았으며, 별도로 위후(衛侯) 이읍을 보내 오손 사신을 호송하게 하였다. 이읍이 우전(于窴)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구자가 소륵을 공격하고 있어,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서역의 공업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반초를 극력 비방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껴안고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고 외국에서 즐겁게 지내며, 국내를 돌볼 마음이 없습니다." 반초가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증삼(曾參)이 아니지만, 세 번이나 참소(讒言)가 잇따라 나를 중상하니, 아마도 당대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그의 아내를 내쳤다. 황제는 반초의 충성을 알고 이읍을 엄히 꾸짖으며 말했다. "설령 반초가 사랑하는 아내를 껴안고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하더라도, 돌아가고자 하는 일천여 명의 병사들이 어찌 모두 반초와 마음을 같이할 수 있겠는가!" 이읍에게 명하여 반초에게 가서 절도와 조절을 받게 하고, 조서를 내려 말했다. "만약 이읍이 밖에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를 남겨 너희와 함께 일을 처리하게 하라." 반초는 즉시 이읍을 보내 오손의 시자(侍子)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가게 하였다. 서간이 반초에게 말했다. "이읍이 먼저 친히 그대를 비방하여 서역의 일을 무너뜨리려 했는데, 지금 어찌 조서의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붙잡아 두고, 다른 관리를 보내 시자를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반초가 말했다. "이것이 어찌 그렇게 천박한 말인가! 바로 이읍이 나를 비방했기 때문에 지금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반성해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어찌 남의 논평을 근심하겠는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은 충신이 할 일이 아니다."
황제가 시중(侍中) 회계 사람 정홍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하였다. 옛날부터 교지(交趾)의 일곱 군(郡)에서 진상하는 운송 물자가 모두 동야(東冶)를 거쳐 바다를 건너왔는데, 풍랑이 험악하고 어려워 익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정홍이 상주하여 영릉(零陵)과 계양(桂陽)의 교도(嶠道)를 개통하도록 하였고, 이로부터 길이 평탄하고 통창하게 되어 마침내 상례(常例)가 되었다. 재임 2년 동안 절약한 비용이 억만(億萬)으로 헤아려졌다. 마침 천하가 가물고 변경에 경보가 있으며 백성의 식량이 부족한데도 국고의 저축은 풍부하였다. 정홍이 또 상주하여 진상을 줄이고 요역(徭役) 비용을 덜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하였고, 황제가 이를 따랐다.
숙종 효장황제 상 원화(元和) 원년(갑신, 서기 84년)
봄, 윤정월(閏正月) 신축일에 제음도왕(濟陰悼王) 유장(劉長)이 죽었다.
여름, 4월 기묘일에 동평국(東平國)을 나누어 동평헌왕(東平獻王)의 아들 유상(劉尚)을 임성왕(任城王)으로 봉하였다.
6월 신유일에 패헌왕(沛獻王) 유보(劉輔)가 죽었다.
정사를 진술하는 자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각 군국(郡國)에서 인재를 천거할 때 대부분 공적의 차례를 따르지 않으므로 관원들의 직무가 더욱 게을러지고 정무도 점차 황폐해지며, 잘못은 주(州)와 군(郡)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공경과 조신(朝臣)들이 의논하게 하였다. 대홍려(大鴻臚) 위표(韋彪)가 의견을 올려 말했다. "국가는 현명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요무(要務)로 삼고, 현명한 인재는 효행(孝行)을 으뜸으로 삼으니, 따라서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집에서 구해야 합니다. 사람의 재능과 품행은 드물게 겸비할 수 있으므로, 맹공작(孟公綽)은 조씨(趙氏)와 위씨(魏氏)의 가신(家臣)이 되기에는 넉넉하지만, 등(滕)나라와 설(薛)나라의 대부(大夫)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사람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너그러움에 가깝고, 잘 단련(羅織罪名)하는 관리(官吏)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박함에 가깝습니다. 선비는 재능과 품행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단순히 문벌과 자격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요체는 이천석(二千石, 군수)을 선발하는 데 있습니다. 이천석이 현명하면 천거하는 인재가 모두 적합한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위표가 또 상서하여 말했다. "천하의 중추(中樞)와 관건(關鍵)은 상서(尚書)에 있으며, 상서의 선발을 어떻게 중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래에 많은 사람이 낭관(郎官)에서 월등히 승진하여 이 자리에 오르는데, 그들은 비록 법령 조문에 통달하고 응대(應對)에 능숙하지만, 그 작은 일을 잘 살피는 작은 지혜는 대부분 큰 재능이 없습니다. 마땅히 색부(嗇夫, 상림색부)가 민첩하게 응대하여 문제(文帝)의 총애를 받은 일을 거울삼고, 강후(絳侯, 주발)가 말이 없고 둔하지만 큰 공적이 있었던 예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황제가 모두 그의 의견을 채택하였다. 위표는 위현(韋賢)의 현손(玄孫)이다.
가을, 7월 정미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율령(律令)에서는 '죄인을 고문할 때는 몽둥이, 채찍, 세우기만을 쓸 수 있다'고 하고, 또 《영병(令丙)》에는 곤봉의 길고 짧음에 구체적인 수치가 있다고 한다. 지난날 큰 옥사(獄事)가 발생한 이래로 고문하는 자들이 대부분 잔혹하여, 찬(鑽), 조(鑿), 첨(鑯), 찬(鑚)과 같은 형구(刑具)가 참혹하고 고통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두렵다. 마땅히 가을과 겨울에 송사를 심리하고 명백히 금령(禁令)을 제정해야 한다."
8월 갑자일에 태위(太尉) 등표(鄧彪)가 면직되고, 대사농(大司農) 정홍을 태위로 임명하였다.
계유일에 조서를 내려 연호를 고쳤다.
정유일에 황제의 거가(車駕)가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였다.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지나는 길에 있는 군현(郡縣)은 비축과 공급을 마련하지 말라. 사공(司空)에게 명하여 친히 도부(徒役)를 거느리고 다리를 지탱하게 하라. 만약 사자를 보내 맞이하고 거동(起居) 상황을 탐문하는 자가 있으면, 이천석(二千石) 관리는 이로 인해 죄를 받을 것이다."
9월 신축일에 황제가 장릉(章陵)에 도착하였다. 10월 기미일에 계속 나아가 강릉(江陵)에 도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완현(宛縣)에 이르렀다. 전(前) 임회태수(臨淮太守) 완현 사람 주휘(朱暉)를 불러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임명하였다. 주휘가 임회에 있을 때 좋은 정치를 하여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노래하였다. "강직하고 정직하며 스스로 행하니, 남양(南陽)의 주계(朱季)여, 관리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도다." 당시 그는 법을 어겨 면직되어 집에서 한가히 지내고 있었으므로, 황제가 불러 임용한 것이다. 11월 기축일에 황제의 거가가 황궁으로 돌아왔다. 상서(尚書) 장림(張林)이 상서하여 말했다. "국가의 일상 경비가 부족하니, 마땅히 관청이 직접 소금을 굽고, 또 한무제 때의 균수법(均輸法)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휘가 굳이 불가하다고 말했다. "균수법은 상인과 매매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소금 이익이 관청에 돌아가면 하층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원망할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명철한 군주가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닙니다." 황제가 이에 노하여 상서들을 엄히 꾸짖었고, 주휘 등이 모두 스스로 옥에 들어갔다. 사흘 후에 조서를 내려 그들을 사면하여 옥에서 나오게 하고 말했다. "국가는 다른 의견을 듣기를 좋아하니, 노인(주휘를 가리킴)에게 허물이 없다. 조서가 지나쳤을 뿐이니, 어찌 스스로 옥에 들어갔는가!" 주휘가 이에 병이 중하다는 핑계로 다시는 서명하고 의논하지 않으려 하였다. 상서령(尚書令) 이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주휘에게 말했다. "지금 마침 꾸짖음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병을 핑계하는가, 이 화가 적지 않다!" 주휘가 말했다. "내 나이 팔십에 은혜를 입어 기밀 부서에 몸담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 보답해야 한다. 만약 마음으로는 불가함을 알면서도 뜻을 따르고 소리 내어 동조한다면,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지금 내 귀는 들리지 않고 눈은 보이지 않으니, 몸을 굽혀 사죄의 명을 기다리겠다." 이에 입을 닫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상서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함께 상주하여 주휘를 탄핵하였다.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이 일을 그대로 두었다. 며칠 후에 조서를 내려 직근(直勤)하는 낭관(郎官)으로 하여금 주휘의 기거(起居) 상황을 묻게 하고, 태의(太醫)가 그의 병을 보살피고 태관(太官)이 음식을 내렸으며, 주휘가 이에 일어나 사은(謝恩)하였다. 또 십만 전(錢), 백 필(匹)의 베, 열 벌의 옷을 하사하였다.
노나라의 공기(孔僖)와 탁군(涿郡)의 최□(崔□)가 함께 태학(太學)에서 유학하며 서로 논의하기를, “효무황제(孝武皇帝, 한무제)가 처음 천자가 되었을 때 성현의 도를 숭상하고 믿었으며, 5, 6년 사이에 정치적 성과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능가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스로 방종하여 이전의 선한 정치를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이웃 방의 학생 양욱(梁郁)이 이를 고발하여 “최□와 공기가 선제(先帝)를 비방하고 당시 조정의 정치를 풍자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 일은 해당 관청에 넘겨졌다. 최□는 관리에게 가서 심문을 받았다. 공기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글을 써서 아뢰었다.
“무릇 비방(誹謗)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그러한 일이 없는데 근거 없이 허위로 무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효무황제와 같은 경우, 그의 정치의 선악은 한나라 역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해와 달처럼 분명하니, 이는 역사 기록에 기재된 사실을 직접 진술한 것일 뿐, 근거 없이 비방한 것이 아닙니다. 제왕으로서 선한 일을 하든 악한 일을 하든 천하에 아는 사람이 없지 않으며, 이러한 일들은 모두 원인이 있어 초래된 것이므로,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정치와 교화에는 허물이 없고 은덕만 더해졌으니, 이는 천하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며, 저희들이 무엇을 근거로 풍자하겠습니까! 만약 저희가 비난한 것이 진실로 옳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고, 만약 말이 부당하더라도 또한 관용을 베풀어야 할 터인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근본 이치를 궁구하지 않으시고 깊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지 않으신 채, 다만 사사로운 원한에 따라 쾌락을 위해 잠시 마음을 방탕하게 하신다면, 저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죽더라도 죽음일 뿐이지만, 천하 사람들은 반드시 견해를 바꾸어 이 일로 폐하의 마음을 엿보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 이후로 잘못된 일을 보더라도 결국 다시 감히 말하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제환공(齊桓公)이 친히 자기 선군(先君)의 허물을 드러내어 관중(管仲)을 깨우친 뒤에야 여러 신하들이 충심을 다할 수 있었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십 대 이전의 무제(武帝)를 위하여 멀리 있는 실사를 숨기고자 하시니, 어찌 제환공과 같지 않습니까! 신은 두렵건대 유사(有司)가 급박하게 죄명을 꾸며 신으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죽어 스스로 진술하지 못하게 하여, 후세에 논평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폐하를 비교하게 할 것이며, 어찌 자손으로 하여금 뒤에 가서 추후 보충하여 덮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궁궐 앞에 엎드려 중벌을 기다립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황제가 즉시 조서를 내려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공기를 난대영사(蘭臺令史)로 임명하였다.
12월 임자일(壬子日)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이전에 요사하고 악한 일로 인하여 삼족(三族)의 친척이 금고(禁錮)된 자들은 모두 금고를 면제하되, 다만 궁중에서 숙위(宿衛)하는 직임을 맡을 수 없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여강(廬江)의 모의(毛義)와 동평(東平)의 정균(鄭均)이 모두 행실과 도의로 고을에서 명성이 드러났다. 남양(南陽)의 장봉(張奉)이 모의의 명성을 흠모하여 그를 방문하였는데, 막 자리에 앉았을 때 관청의 문서가 마침 도착하여 모의를 안양현령(安陽縣令)으로 대행 임명하였다. 모의가 문서를 받들어 안으로 들어오며 기쁜 빛이 얼굴에 드러나자, 장봉은 마음속으로 그를 천하게 여기고 작별하여 떠났다. 후에 모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정에서 그를 벼슬에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장봉이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진 자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전날 기뻐한 것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굽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균의 형이 현의 관리였는데 자주 뇌물을 받았다. 정균이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자, 몸을 빼내어 고용살이를 하였고, 1년여가 지난 후에 돈과 비단을 얻어 돌아와 형에게 주며 말하기를, “재물은 다 쓰면 다시 얻을 수 있으나, 관리로서 탐오로 죄를 얻으면 몸이 영원히 버림받습니다.”라고 하였다. 형이 그의 말에 감동하여 마침내 청렴한 관리가 되었다. 정균은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가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모의와 정균을 포상하고 총애하였으며, 각각 곡식 1천 석(斛)을 하사하고, 매년 8월에는 지방 장리(長吏)가 그들의 거처를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양과 술을 더 하사하게 하였다.
무위태수(武威太守) 맹운(孟雲)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북흉노(北匈奴)가 다시 관리와 백성들과의 무역을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북흉노의 대차거(大且渠) 이막자왕(伊莫訾王) 등이 소와 말 1만여 두를 몰고 와서 한나라와 거래하였는데, 남선우(南單于)가 경기병을 보내 상군(上郡)에서 출격하여 그들을 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얻고 돌아갔다.
황제가 또 대리사마(代理司馬) 화공(和恭) 등을 보내 병사 800명을 이끌고 반초(班超)에게 가게 하였으며, 반초가 이에 소륵(疏勒)과 우전(于闐)의 군대를 징발하여 사차(莎車)를 공격하였다. 사차가 재물로 소륵왕 충(忠)을 유인하자, 충이 마침내 반역하여 사차에 붙어 서쪽으로 오지성(烏即城)을 점거하였다. 반초가 곧 소륵부승(疏勒府丞) 성대(成大)를 새로 소륵왕으로 세우고, 반역하지 않은 모든 자들을 징발하여 충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강거왕(康居王)을 설득하여 충을 붙잡아 그의 나라로 보내게 하니, 오지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