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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 사십

제 40 편

제048권

【한기사십】 현묵집서(玄黓執徐)년부터 시작하여 첨몽대황락(旃蒙大荒落)년에 끝나니, 모두 십사 년이다.

효화황제 하(下) 영원 4년(임진년, 서기 92년)

봄, 정월. 대장군 좌교위(左校尉) 경기(耿夔)를 보내어 우제건(於除鞬)에게 인수(印綬)를 주고, 중랑장(中郎將) 임상(任尚)에게 명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호위하며 이오(伊吾)에 주둔하게 하니, 남선우(南單于)의 선례에 따랐다.

당초 여강(廬江) 사람 주영(周榮)이 원안(袁安)의 부(府)에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는데, 원안이 두헌(竇憲)과 두경(竇景)을 탄핵하고 북선우(北單于)를 세우는 일을 다툰 상주문은 모두 주영이 초안을 잡았다. 두씨(竇氏)의 빈객이자 태위연(太尉掾) 서치(徐齮)가 그를 매우 미워하여 주영에게 협박하며 말했다. “그대는 원공(袁公)의 심복 모사로서 두씨를 배척하고 탄핵하니, 두씨 집안의 강한 무사와 자객이 경성(京城)에 가득하니 조심하여 방비하시오!” 주영이 말했다. “나는 강회(江淮) 지방에서 홀로 온 서생으로 행여나 조정 관리가 되었으니, 비록 두씨에게 해를 입더라도 참으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오.” 이에 처자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만약 갑자기 뜻밖의 화를 당하거든 나를 염습(殮襲)하여 입관하지 말라. 바라건대 이 보잘것없는 썩은 몸으로 조정을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삼월 계축일. 사도(司徒) 원안(袁安)이 죽었다.

윤삼월 정축일. 태상(太常) 정홍(丁鴻)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였다.

여름, 사월 병진일. 두헌(竇憲)이 경성(京城)에 돌아왔다.

육월 무술 삭일. 일식이 있었다. 정홍(丁鴻)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옛날 여씨(呂氏) 일족이 권력을 잡자 황위 계승자가 거의 바뀌었고, 애제(哀帝)·평제(平帝) 말년에는 종묘(宗廟)의 제사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과 같은 친족 관계라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덕이 없으면 그 권세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대장군 두헌(竇憲)이 비록 자신을 얽매어 감히 월권하지 않으려 한다 하더라도, 천하 원근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그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자사(刺史)와 이천석(二千石) 관료들이 막 임명되면 모두 가서 알현하고 이별을 고하며 명령을 기다려 회답을 구하고, 이미 부절과 인수를 가지고 상서성(尙書省)의 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감히 즉시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는 기간이 수십 일에 이르니, 왕실을 등지고 사사로운 집에 붙는 것입니다. 이는 군주의 위엄이 손상되고 신하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성해진 증거입니다. 인간의 도리가 아래에서 어지러워지면 그 징험이 하늘에 나타나나니, 비록 은밀한 음모가 있다 하더라도 신령이 그 실정을 비추어 보고, 재앙을 내려 경계로 삼아 임금에게 훈계하는 것입니다. 작은 폐단을 미리 막기는 쉬우나 이미 커진 폐단을 구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잘한 일을 소홀히 하여 큰 화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고, 은혜에 감싸여 가르치기를 차마 못 하고, 의리에 감싸여 끊기를 차마 못 하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장래의 거울이 됨을 깨닫습니다. 하늘은 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강하지 않으면 해와 달과 별이 빛나지 않습니다. 임금은 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강하지 않으면 모든 관리가 방자해집니다. 마땅히 이 큰 재앙의 변화를 기회로 삼아 정치를 개혁하고 허물을 바로잡아 하늘의 뜻에 순응해야 합니다.”

병진일. 열세 개의 군국(郡國)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가뭄과 메뚜기 재해가 있었다.

두헌(竇憲)의 부자와 형제들은 모두 구경(九卿)과 교위(校尉) 등의 관직을 맡아 조정에 가득 찼다. 양후(穰侯) 등첩(鄧疊), 등첩의 아우 보병교위(步兵校尉) 등뢰(鄧磊), 그들의 어머니 원(元), 두헌의 사위 사성교위(射聲校尉) 곽거(郭舉), 곽거의 아버지 장락소부(長樂少府) 곽황(郭璜)이 서로 결탁하였다. 원(元)과 곽거는 모두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고, 곽거는 두태후(竇太后)의 총애를 받아 함께 황제를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 황제가 은밀히 그들의 음모를 알았다. 이때 두헌 형제가 전권을 잡고 있어 황제는 내외의 신하들과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접촉하는 사람은 오직 환관뿐이었다. 황제는 생각하기에 조정 위아래에 두헌에게 붙지 않은 자가 없다고 여겨, 오직 중상시(中常侍) 구순령(鉤盾令) 정중(鄭衆)만이 신중하고 민첩하며 꾀가 있고 호강하고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중과 더불어 두헌을 주살할 일을 의논하였다. 두헌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참고 기다리며 실행하지 않았다. 마침 두헌이 등첩과 함께 모두 경성에 돌아왔다. 이때 청하왕(清河王) 유경(劉慶)이 특별히 후한 은우(恩遇)를 받아 항상 궁중에 들어와 숙직하였다. 황제가 장차 두헌을 주살할 계획을 실행하려 하면서 《외척전(外戚傳)》을 얻고자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찾게 하지 못하고, 유경에게 명하여 은밀히 천승왕(千乘王) 유항(劉伉)에게 가서 구하게 하고, 밤에 홀로 그것을 가져왔다. 또 유경에게 명하여 정중에게 말을 전하여 외척 주살의 옛 사례를 찾게 하였다. 경신일. 황제가 북궁(北宮)에 친히 임하여, 집금오(執金吾)와 오교위(五校尉)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궁(南宮)과 북궁을 지키게 하고, 성문을 닫고 곽황·곽거·등첩·등뢰를 체포하여 모두 옥에 가두고 처형하였다. 알자복야(謁者僕射)를 보내어 두헌의 대장군 인수(印綬)를 거두어들이고, 작위를 개봉하여 관군후(冠軍侯)로 삼고, 두독(竇篤)·두경(竇景)·두괴(竇瑰)와 함께 모두 봉국(封國)으로 가게 하였다. 황제는 태후의 연고로 두헌을 공개적으로 죽이고 싶지 않아, 그들을 위해 엄격하고 유능한 국상(國相)을 골라 감독하게 하였다. 두헌·두독·두경이 봉국에 도착하자 모두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

당초 하남윤(河南尹) 장포(張酺)가 여러 차례 법으로 두경(竇景)을 징계하였는데, 두씨가 실패하자 장포가 상소하여 말하였다. “두헌 등이 총애를 받아 귀하게 되었을 때, 여러 신하들은 아첨하며 붙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모두 두헌이 선제(先帝)의 유고(遺顧)를 받아 이윤(伊尹)·여상(呂尙)의 충성을 품었다고 말하였고, 심지어 등부인(鄧夫人)을 문모(文母)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엄중한 위엄이 이미 시행되자, 또 모두 그들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여기며, 그들의 전후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그들의 본심을 헤아려 살피지 않습니다. 신이 보건대 하양후(夏陽侯) 두괴(竇瑰)는 항상 마음에 충선(忠善)을 간직하고 있으며, 예전에 신과 이야기할 때에도 항상 절개를 다할 뜻이 있었고, 빈객을 단속하고 가르쳐 일찍이 법을 범한 적이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제왕이 골육지친에게 형벌을 가할 때에는 ‘삼유(三宥)’의 도리가 있어, 지나치게 후하게 하는 것이 지나치게 박하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두괴를 위해 엄격하고 유능한 국상을 선출하려 하오니, 아마도 그가 핍박을 받아 반드시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그 정상을 참작하여 너그럽게 용서하여 후덕(厚德)을 숭상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에 감동하여, 이로 인하여 오직 두괴만이 보전되었다. 두씨 일족 및 빈객으로서 두헌의 연줄로 벼슬한 자들은 모두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초 반고(班固)의 노비가 일찍이 술에 취해 낙양령(洛陽令) 충경(種兢)을 욕한 적이 있었는데, 충경이 이에 두씨 빈객을 체포 심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반고를 체포하니, 반고가 옥중에서 죽었다. 반고가 일찍이 《한서(漢書)》를 저술하였으나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조서를 내려 반고의 누이동생이자 조수(曹壽)의 아내인 반소(班昭)에게 명하여 그 일을 이어받게 하였다.

화교(華嶠)가 논평하여 말하였다. 반고가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 편벽되거나 속임이 없고, 억양(抑揚)과 포폄(褒貶)이 없으며, 내용이 풍부하되 어지럽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체계가 있어, 그것을 읽는 자들이 마음을 집중하여 싫증내지 않으니, 진실로 명성을 이룰 만하다! 반고가 사마천(司馬遷)이 시비(是非)의 기준을 성인(聖人)과 많이 어긋난다고 비난하였으나, 자신의 의론은 항상 절의(節義)를 위해 죽은 자를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아름다운 덕을 서술하지 않았으니, 그가 인의(仁義)를 가볍게 여기고 절의를 지키는 것을 천시함이 또한 너무 심하다!

당초 두헌이 장가들 때, 천하 각 군국(郡國)이 모두 하례를 보냈다. 한중군(漢中郡)에서도 마땅히 관리(官吏)를 파견해야 했는데, 호조(戶曹) 이합(李郃)이 간하여 말하였다. “두장군(竇將軍)은 황후의 친족으로 덕과 예법을 닦지 않고 권세를 독점하며 교만하니, 망하고 재앙이 닥침을 발돋움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원컨대 일심으로 왕실을 향하여 그와 사귀지 마소서.” 태수가 굳이 파견하려 하여 이합이 말릴 수 없자, 이에 자청하여 가기를 청하니 태수가 허락하였다. 이합이 이에 길을 따라 지체하며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다가 부풍(扶風)에 이르렀을 때 두헌이 이미 핍박을 받아 봉국으로 가고 있었다. 무릇 두헌과 사귀었던 자들은 모두 연좌되어 죄를 받고 면직되었으나, 오직 한중태수만이 연루되지 않았다. 황제가 청하왕(清河王) 유경(劉慶)에게 노비와 수레와 말, 돈과 비단, 보배로운 물건을 하사하여 그의 저택에 가득 차게 하였다. 유경이 때때로 몸이 편치 않으면, 황제가 아침저녁으로 문병하고 음식과 약을 보내주며 돌보아 주는 것이 매우 두터웠다. 유경 또한 조심하고 삼가며 공손하고 효성스러워, 스스로 폐출된 사람이라고 여겨 특히 일을 두려워하고 법도를 삼가 지켜, 이로써 그의 총애와 봉록을 보전할 수 있었다.

황제가 원안(袁安)의 아들 원상(袁賞)을 낭(郎)으로, 임외(任隗)의 아들 임둔(任屯)을 보병교위(步兵校尉)로 임명하고, 정중(鄭衆)을 승진시켜 대장추(大長秋)로 삼았다. 황제가 공을 논하여 상을 주었을 때, 정중은 항상 사양하기를 많이 하고 받기를 적게 하여, 황제가 이로 인하여 그를 현명하다고 여겨 항상 그와 정치를 의논하였으니,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함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가을, 칠월 기축일. 태위(太尉) 송유(宋由)가 두씨(竇氏)의 당(黨)에 속한다는 이유로 조서를 받들어 면직되고 자살하였다.

팔월 신해일. 사공(司空) 임외(任隗)가 죽었다.

계축일, 대사농 윤목을 태위로 임명했다. 태부 등표는 노쇠하여 병이 들자 중추의 요직을 반납하였고,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며 윤목이 등표를 대신해 상서의 일을 총괄하게 했다.

겨울 10월, 기해일, 종정 유방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무릉, 영릉, 예중의 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호강교위 등훈이 죽자, 관리, 백성, 강족, 호족이 아침저녁으로 와서 곡하며 조문하는 자가 날마다 수천 명이었다. 강족과 호족 중에는 칼로 자신을 베기도 하고, 또 그들의 개, 말, 소, 양을 죽이며 말했다. "등 사군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우리도 함께 죽겠다!" 이전에 부하였던 오환의 관리와 병사들은 길에 달려나와 성곽이 텅 빌 지경이었고, 관리들이 그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듣지 않아, 상황을 교위 서언에게 보고하자 서언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는 의리를 위한 것이다!" 이에 그들을 풀어주었다. 이에 집집마다 등훈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병이 들 때마다 가서 기도하며 복을 빌었다. 촉군태수 섭상이 등훈을 대신해 호강교위가 되어, 은혜로써 모든 강족을 달래려 하여, 통역관을 보내 미당을 불러들이고 그가 대·소유곡에 돌아가 살게 했다. 미당이 돌아간 후, 조모 비결을 보내 섭상을 알현하게 하니, 섭상이 직접 새 아래까지 전송하며 그를 위해 잔치를 열고, 통역관 전사 등 다섯 명에게 명하여 그를 부락까지 호송하게 했다. 미당이 이에 배반하여, 여러 부락과 함께 전사 등을 산 채로 찢어 죽이고, 그들의 피로 맹세하며 저주하고, 다시 금성새를 침범했다. 섭상은 이 일로 죄를 얻어 파면되었다.

효화황제 영원 5년(계사년, 서기 93년)

봄 정월, 을해일, 명당에서 조종을 제사하고 영대에 올라 대사면을 실시했다.

무자일, 천승정왕 유항이 죽었다.

신묘일, 황제의 아우 유만세를 광종왕으로 봉했다.

갑인일, 태부 등표가 죽었다.

무오일, 농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4월, 임자일, 부릉상왕 유충의 형 유방을 부릉왕으로 계봉했다.

9월, 신유일, 광종상왕 유만세가 죽고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당초, 두헌이 우제건을 북선우로 세운 후, 그를 도와 북정으로 돌아가게 하려 했으나, 마침 두헌이 죽임을 당하여 중지되었다. 우제건이 스스로 배반하여 북쪽으로 돌아가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장병장사 왕보에게 천여 기병을 이끌고 임상과 함께 추격 토벌하게 하여, 그를 참수하고 그의 무리를 소탕했다. 경기흘이 북흉노를 격파했을 때, 선비가 이에 따라 옮겨 다니며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 흉노의 잔여 무리는 아직도 십여만 부락이 있었는데, 모두 스스로 선비라 칭했다. 선비는 이로부터 점차 강성해졌다.

겨울 10월, 신미일, 태위 윤목이 죽었다. 11월, 을축일, 태복 장보가 태위가 되었다. 장보는 상서 장민 등과 함께 상주하여 말했다. "사성교위 조포가 함부로 한나라 예법을 제정하여 성인의 도를 파괴하고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형벌을 가하여 죽여야 합니다." 상주문을 모두 다섯 번 올렸다. 황제는 장보가 학설에 얽매여 권변을 알지 못함을 알았으나, 그의 상주문을 묵혀 두었지만 한나라 예법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이 해에, 무릉군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만족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양왕 유창은 종사관 변기 등과 함께 제사를 지내 복을 빌었는데, 변기 등이 아첨하며 말했다. "신령님께서 대왕께서 마땅히 천자가 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유창이 그와 서로 응답하다가, 유관 부서에서 상주하여 그를 체포하여 조옥에 가둘 것을 청했다.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성무와 단보 두 현만 삭감했다. 유창이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깊이 책망하며 말했다. "신은 천성이 광망하고 어리석어 방비와 금지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사죄에 빠져 이치상 마땅히 공개적으로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성덕으로 법을 굽히시고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신을 위해 오점을 감수하셨습니다. 신은 이러한 사면을 다시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자신과 처자에게 맹세하여 감히 다시 법도를 어기고 출입하지 않으며, 감히 다시 어떠한 추가 지출도 하지 않고, 조세 수입이 남으면 다만 수양, 곡숙, 우, 몽, 영릉 다섯 현의 녹봉만을 청하여 받고, 나머지 식읍 네 현은 반환하겠습니다. 신 유창의 첩은 서른일곱 명이 있는데, 그중 자식이 없는 자는 본가로 돌려보내고, 스스로 근신하고 규칙을 지키는 노비 이백 명을 가려내며, 나머지 받은 호분, 관기 및 각종 장인, 고수, 창두, 노비, 병기 쇠뇌, 마구간의 말은 모두 본서에 올려 반환하겠습니다. 신 유창은 골육지친으로서 성명한 교화를 어지럽히고 청류를 더럽혔으니, 이미 목숨을 건졌으나 실로 흉악한 몸으로 다시 큰 궁에 거처하며, 큰 나라를 누리고, 관속을 두고, 기물을 간직할 면목이 없사오니,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좋은 말로 위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호강교위 관우는 통역관을 보내 여러 강족 부락을 이간질하고, 재물로 그들을 유인하여 강족 부락이 흩어졌다. 이에 병사를 내어 새 밖으로 나가 대·소유곡에서 미당을 공격하여, 팔백여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으며, 수만 곡의 밀을 거두어들였다. 이에 봉류대하를 따라 성과 보루를 쌓고, 큰 배를 만들고, 하교를 건설하여, 병사를 건너 미당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미당은 부락을 이끌고 멀리 옮겨가 사지하곡에 의탁했다.

선우 돈도하가 죽고, 선우 선의 동생 안국이 선우로 세워졌다. 안국은 처음에 좌현왕이었으나 명성이 없었다. 선우가 된 후, 선우의 적자 좌곡려왕 사자가 차례대로 좌현왕이 되었다. 사자는 평소 용맹하고 교활하며 지모가 뛰어나, 전 선우 선과 둔도하가 모두 그의 기개와 결단력을 좋아하여, 여러 번 그에게 병사를 이끌고 새 밖으로 나가 북정을 습격하게 하고, 돌아온 후에는 상을 내렸으며, 천자도 그에게 특별히 우대했다. 따라서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사자를 중히 여기고 안국에게 붙지 않아, 안국이 그를 죽이려 했다. 새로 항복한 호인들은, 처음에 새 밖에 있을 때 여러 번 사자에게 쫓기고 약탈당하여, 대부분 그를 원망했다. 안국은 이에 계책을 항복한 자들에게 맡기고 그들과 함께 모의했다. 사자가 그들의 음모를 알아채고, 따로 오원 변경에 거주하며, 용정에서 의논할 때마다 사자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도료장군 황보릉이 이를 알고, 또한 그를 보호하여 보내지 않으니, 선우는 더욱 분노를 품었다.

효화황제 영원 6년(갑오년, 서기 94년)

봄 정월, 황보릉이 파면되고, 집금오 주휘가 도료장군을 대행했다. 당시 선우와 중랑장 두숭이 사이가 좋지 않아, 두숭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두숭은 서하태수를 시켜 선우의 상주문을 가로막게 하여, 선우가 스스로 상달할 수 없게 했다. 두숭이 이에 주휘와 함께 상주하여 말했다. "남선우 안국은 옛 호인을 멀리하고 새로 항복한 자를 가까이하여, 좌현왕 사자와 좌태차거 유리 등을 죽이려 합니다. 또한 우부의 항복한 자들은, 함께 안국을 협박하여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모의하고 있사오니, 서하, 상군, 안정이 이를 위해 경계하고 방비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공경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했다. "만이는 반복이 상수라 비록 헤아리기 어렵지만, 대병이 모이면 그들이 반드시 감히 경솔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방략이 있는 사자를 선우왕정에 보내어, 두숭, 주휘 및 서하태수와 함께 마음을 합쳐 그들의 동정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다른 변고가 없다면, 두숭 등으로 하여금 안국에게 가서 그의 좌우 대신들을 만나, 그 무리 중 국경을 침범하며 횡포를 부리는 자들을 꾸짖고, 함께 죄를 논하여 참수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형편에 따라 임시로 방략을 쓰게 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형편에 따라 상을 베푸는 것도, 또한 족히 백만을 위엄으로 떨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따랐다. 이에 주휘와 두숭이 병사를 내어 그의 왕정으로 갔다. 안국이 밤에 한나라 군대가 온 것을 듣고 매우 놀라, 장막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사자를 죽이려 했다. 사자가 미리 알고, 모든 여막과 인마를 이끌고 만백성으로 들어갔다. 안국이 성 아래까지 쫓아갔으나 성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주휘가 관리들을 보내 타이르며 해명하게 했으나, 안국이 듣지 않았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이끌고 오원에 주둔했다. 두숭과 주휘가 이에 여러 군의 기병을 징발하여 매우 급하게 추격하니, 무리가 모두 매우 두려워했다. 안국의 외삼촌 골도후 희위 등이 함께 죽을까 걱정하여, 안국을 죽이고 사자를 세워 정독시후제제선우로 삼았다.

기묘일, 사도 정홍이 죽었다.

2월, 정미일, 사공 유방을 사도로, 태상 장분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여름 5월, 성양회왕 유숙이 죽고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가을 7월, 서울이 가물었다.

서역도호 반초(班超)는 구자(龜兹)와 선선(鄯善) 등 여덟 나라 군대 총 7만여 명을 징발하여 언기(焉耆)를 토벌하고, 그 성 아래에 도착했다. 언기왕 광(廣)과 위리왕 범(汎) 등을 진목(陳睦)의 옛 성으로 유인하여 그들을 죽이고, 그 목을 서울로 보냈다. 이에 군사를 풀어 약탈하게 하여 목을 벤 자가 5천여 급, 포로가 1만 5천 명이었다. 언기의 좌후(左侯) 원맹(元孟)을 새로 언기왕으로 세웠다. 반초는 언기에 6개월 동안 머물며 그들을 위무했다. 이에 서역 50여 개국이 모두 인질을 보내 복속하였고, 해변(海濱)에 이르기까지 4만 리 밖에서도 모두 여러 번 통역을 거쳐 공물을 바쳤다.

남흉노 선우(單于) 사자(師子)가 즉위하자, 5, 6백 명의 항복한 호(胡)인들이 밤에 사자를 습격했다. 안집연(安集掾) 왕첨(王恬)이 호위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과 싸워 격파했다. 이에 항복한 호인들이 서로 놀라, 15부(部) 20여만 명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전 선우 돈독하(屯屠何)의 아들 욱제일축왕(薁鞮日逐王) 봉후(逢侯)를 협박하여 선우로 세웠다. 이어 관리와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하며, 역참(郵亭)과 장막(廬帳)을 불태우고, 수레와 군수 물자를 이끌고 삭방(朔方)으로 향하여 사막을 건너 북쪽으로 가려 했다. 9월 계축일(癸丑日), 광록훈(光祿勳) 등홍(鄧鴻)을 행거기장군(行車騎將軍) 일을 대행하게 하고,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와 대도료장군(代度遼將軍) 주휘(朱徽)와 함께 좌우우림(左右羽林), 북군오교(北軍五校) 병사와 군국적사병(郡國迹射兵), 변경병(邊兵)을 이끌게 하고, 오환교위(烏桓校尉) 임상(任尚)이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를 이끌게 하여, 합쳐 4만 명으로 토벌하게 했다. 이때 남흉노 선우와 중랑장(中郎將) 두숭(杜崇)이 목사성(牧師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봉후가 1만여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 겨울 11월, 등홍 등이 미직(美稷)에 도착하자, 봉후가 비로소 포위를 풀고 떠나 만이곡(滿夷谷)으로 향했다. 남흉노 선우가 아들을 시켜 1만 기병과 두숭이 거느린 4천 기병을 이끌게 하고, 등홍 등과 함께 대성새(大城塞)에서 봉후를 추격하여 목을 벤 자가 4천여 급이었다. 임상이 선비, 오환을 이끌고 만이곡에서 봉후를 요격하여 또 크게 격파하였으니, 전후로 목을 벤 자가 총 1만 7천여 급이었다. 봉후가 이에 무리를 이끌고 새외(塞外)로 나갔고, 한군은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사농(大司農) 진총(陳寵)을 정위(廷尉)로 임명했다. 진총의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워 여러 차례 의심스러운 옥사를 심리할 때마다 반드시 경전(經典)에 부합시키고, 반드시 너그럽게 처리하려 하여, 각박한 풍조가 이로부터 다소 줄어들었다.

황제가 상서령(尚書令) 강하(江夏) 사람 황향(黃香)을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했으나, 황향이 사양하며 말했다.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정사(政事)는 재능이 적합하지 않으니, 청컨대 머물러 한산(閑散)한 벼슬에 충당되게 하시고, 독책(督責)하는 작은 직무를 내려 주시어 궁대(宮臺) 중의 번잡한 일을 맡게 해 주소서." 황제가 이에 다시 황향을 상서령으로 유임시키고, 녹봉을 2천 석(石)으로 올려 매우 친근하게 중용했다. 황향 또한 공경하고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며, 공적인 일을 집안일처럼 근심했다.

효화황제(孝和皇帝) 하(下) 영원(永元) 7년(乙未, 서기 95년)

봄 정월, 등홍 등의 군대가 돌아왔다. 풍주는 호아영(虎牙營)을 이끌고 오원(五原)에 남아 둔전(屯田)했다. 등홍은 체류하며 전기를 놓친 죄로 옥에 갇혀 죽었다. 후에 황제가 주휘와 두숭이 호인(胡人)들의 신뢰를 잃고, 또 그들에게 상소하는 것을 금지하여 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을 알고, 모두 잡아들여 옥에 가두어 죽였다. 여름 4월 신해삭(辛亥朔)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을사일(乙巳日)에 역양(易陽)에서 땅이 갈라졌다.

9월 계묘일(癸卯日)에 서울에 지진이 났다.

낙성왕(樂成王) 유당(劉黨)이 사람을 죽인 죄로 동광(東光)과 효(鄡) 두 현을 삭감당했다.

효화황제 하 영원 8년(丙申, 서기 96년)

봄 2월, 귀인(貴人) 음씨(陰氏)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음식(陰識)의 증손녀였다.

여름 4월 계해일(癸亥日)에 낙성정왕(樂成靖王) 유당이 죽었다. 아들 애왕(哀王) 유숭(劉崇)이 즉위했으나 얼마 안 되어 죽고,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5월, 하내(河內)와 진류(陳留)에 메뚜기 떼가 발생했다.

남흉노 우온우독왕(右溫禺犢王) 오거전(烏居戰)이 반란을 일으켜 새외(塞外)로 나갔다. 가을 7월, 도료장군(度遼將軍) 방분(龐奮)과 월기교위 풍주가 추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그의 남은 무리와 각지에서 항복한 호인(胡人) 2만여 명을 안정(安定)과 북지(北地)로 이주시켰다.

동사후부왕(東師後部王) 탁제(涿鞮)가 반란을 일으켜 전왕(前王) 위필대(尉畢大)를 공격하여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9월, 서울에 메뚜기 떼가 발생했다.

겨울 10월 을축일(乙丑日)에 북해왕(北海王) 유위(劉威)가 경왕(敬王) 유의 아들이 아닌데다, 또 비방한 죄로 자살했다.

12월 신해일(辛亥日)에 진경왕(陳敬王) 유선(劉羨)이 죽었다.

정사일(丁巳日)에 남궁(南宮) 선실전(宣室殿)에 불이 났다.

호강교위(護羌校尉) 관우(貫友)가 죽자, 한양태수(漢陽太守) 사충(史充)을 그를 대신하게 했다. 사충이 부임한 후 곧 황중(湟中)의 강(羌)과 호(胡)를 징발하여 새외로 나가 미당(迷唐)을 공격했다. 미당이 맞서 싸워 사충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백 명을 죽였다. 사충은 이 때문에 소환되었고, 대군태수(代郡太守) 오지(吳祉)를 그를 대신하게 했다.

효화황제 하 영원 9년(丁酉, 서기 97년)

봄 3월 경진일(庚辰日)에 농서(隴西)에 지진이 났다.

계사일(癸巳日)에 제남안왕(濟南安王) 유강(劉康)이 죽었다.

서역장사(西域長史) 왕림(王林)이 차사후왕(車師後王)을 공격하여 죽였다.

여름 4월 정묘일(丁卯日)에 낙성왕 유당의 아들 유순(劉巡)을 낙성왕으로 봉했다.

5월, 황후의 아버지 둔기교위(屯騎校尉) 음강(陰綱)을 오방후(吳防侯)로 봉하고, 특진(特進)의 신분으로 집에 머물게 했다.

6월, 가뭄과 메뚜기 떼가 발생했다.

가을 8월, 선비(鮮卑)가 비여(肥如)를 침범했다.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참(祭參)이 싸움에 패한 죄로 옥에 갇혀 죽었다.

윤월(閏月) 신사일(辛巳日)에 황태후 두씨(竇氏)가 세상을 떠났다. 당초 양귀인(梁貴人)이 죽은 후, 궁정의 일이 은밀하여 황제가 양씨(梁氏) 소생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음공주(舞陰公主)의 아들 양호(梁扈)가 종형(從兄) 양시(梁示)를 시켜 삼부(三府)에 정기(奏記)를 올려, "한나라의 구례(舊例)로는 모친의 가문을 높였사온데, 양귀인이 황제를 낳으셨으나 존호(尊號)를 얻지 못하였사오니, 이 일을 의논하게 해 주소서"라고 청했다. 태위(太尉) 장보(張酺)가 상황을 아뢰자, 황제가 오랫동안 감동하여 슬퍼하며 말했다. "경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장보가 양귀인의 존호를 추존하고 여러 외숙(外叔)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마침 양귀인의 언니이자 남양(南陽) 번조(樊調)의 아내인 양의(梁嫕)가 상소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말했다. "저의 아버지 양송(梁竦)은 옥중에서 원통하게 죽어 시신조차 묻히지 못했고, 어머니는 나이 일흔이 넘었으며, 남동생 양당(梁棠) 등은 지극히 먼 변경에 있어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양송의 썩은 뼈를 거두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본군(本郡)으로 돌아올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황제가 양의를 불러보고서야 양귀인이 원통하게 죽은 사정을 알게 되었다. 삼공(三公)이 상주하여, "광무제(光武帝)가 여태후(呂太后)를 폄출(貶黜)한 전례에 따라 두태후의 존호를 낮추어야 하며, 선제(先帝)와 합장(合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청했고, 백관들도 상주하는 자가 많았다. 황제가 친필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두씨(竇氏)가 법도를 따르지 않았으나, 태후는 항상 스스로를 절제하였다. 짐이 그를 10년 동안 모셨으니, 대의(大義)를 깊이 생각하면, 예(禮)에 신하가 군주를 낮추는 조문은 없고, 은정(恩情)상 차마 떨어질 수 없으며, 의리상 손상시킬 수 없다. 전조(前朝)를 살펴보아도 상관태후(上官太后)는 강등되지 않았으니, 다시 논의하지 말라." 병신일(丙申日)에 장덕황후(章德皇后)를 장사지냈다.

소당강(燒當羌) 미당(迷唐)이 무리 8천 명을 이끌고 농서(隴西)를 침범하여, 새내(塞內)의 각 강인(羌人) 부락을 위협하고, 보병과 기병을 합쳐 총 3만 명을 모아 농서의 군대를 격파하고 대하현장(大夏縣長)을 죽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행정서장군(行征西將軍) 유상(劉尚)과 부장(副將) 월기교위 조세(趙世)를 보내 한병(漢兵), 강병(羌兵), 호병(胡兵) 합쳐 3만 명으로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유상은 적도(狄道)에 주둔하고, 조세는 포한(枹罕)에 주둔했다. 유상이 사마(司馬) 구우(寇盱)를 보내 각 군(郡)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사방에서 합류하게 했다. 미당이 두려워하여 노약자(老弱者)로 수를 채우고, 자신은 임조(臨洮) 이남으로 도망갔다. 유상 등이 높은 산까지 추격하여 미당을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포로로 잡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미당은 물러나 떠났고, 한병의 사상자도 매우 많아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9월 경신일(庚申日)에 사도(司徒) 유방(劉方)이 책서(策書)로 면직되고 자살했다.

갑자일(甲子日)에 양귀인(梁貴人)을 추존하여 황태후로 삼고, 시호를 공회(恭懷)라 하고, 상복(喪服)을 입었다. 겨울 10월 을유일(乙酉日)에 양태후(梁太后)와 그 언니 대귀인(大貴人)을 서릉(西陵)으로 개장(改葬)했다. 번조(樊調)를 우림좌감(羽林左監)으로 발탁했다. 황태후의 아버지 양송(梁竦)을 추봉(追封)하고 시호를 포친민후(褒親愍侯)라 하여, 사자를 보내 그의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공회황후(恭懷皇后) 능(陵) 곁에 안장했다. 양송의 처자식을 소환하여 돌아오게 했다. 양송의 아들 양당(梁棠)을 낙평후(樂平侯)로, 양당의 아우 양옹(梁雍)을 승씨후(乘氏侯)로, 양옹의 아우 양적(梁翟)을 단보후(單父侯)로 봉하고, 지위는 모두 특진(特進)으로 하고, 상으로 준 것이 수만만(數巨萬)에 달하여, 은총과 영화가 당시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양씨(梁氏)가 이로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청하왕 유경이 비로소 감히 어머니 송귀인의 무덤에 성묘하기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려 태관(太官)으로 하여금 사계절에 제사 도구를 공급하게 하였다. 유경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살아계실 때 비록 봉양하지는 못했으나, 마침내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저의 사사로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려 했으나, 스스로 공회(恭懷) 양황후(梁皇后)에 비견될까 의심되어 감히 말하지 못하고, 항상 곁에서 사람들에게 울며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후에 상소하여 말했다: “외조모 왕씨가 나이가 많아, 낙양에서 병을 치료하기를 청합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송씨 일족을 모두 경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유경의 외삼촌인 송연(宋衍), 송준(宋俊), 송개(宋蓋), 송선(宋暹) 등을 모두 낭관(郎官)으로 임명하였다.

11월 계묘일에 광록훈(光祿勳)이며 하남 사람인 여개(呂蓋)를 사도(司徒)로 임명하였다.

12월 병인일에 사공(司空) 장분(張奮)이 파직되었다. 임신일에 태복(太僕) 한릉(韓棱)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서역도호(西域都護) 정원후(定遠侯) 반초(班超)가 속관(屬官) 감영(甘英)을 보내 대진(大秦)과 조지(條支)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마침내 서해(西海)의 끝에 이르렀다. 이곳들은 모두 이전 시대에 이르지 못했던 곳으로, 모두 그 지방의 풍토와 민속을 기록하고 진기한 보물들을 전하였다. 안식(安息)의 서부 경계에 이르러 바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바다를 건너려 하자 뱃사공이 감영에게 말했다: “바닷물이 광활하여 오가는 사람이 순풍을 만나면 석 달 만에 건널 수 있고, 느린 바람을 만나면 2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3년 치의 식량을 휴대합니다. 바다 속에서는 쉽게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어, 자주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영이 이에 중지하였다.

효화황제(孝和皇帝) 하(下) 영원(永元) 10년(무술, 서기 98년)

여름, 5월에 경성에 큰물이 났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사공 한릉이 세상을 떠났다. 8월 병자일에 태상(太常)이며 태산 사람인 소감(巢堪)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에 다섯 주(州)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였다.

행정서장군(行征西將軍) 유상(劉尚)과 월기교위(越騎校尉) 조세(趙世)가 겁쟁이로 죄를 받아 감옥에 갇히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알자(謁者) 왕신(王信)이 유상의 군대를 이어받아 포한(枹罕)에 주둔하고, 알자 경담(耿譚)이 조세의 군영을 이어받아 백석(白石)에 주둔하였다. 경담이 현상금을 걸자, 여러 부족이 많이 와서 귀순하였고, 미당(迷唐)이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왕신과 경담이 항복을 받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2월에 미당 등이 부족을 이끌고 경성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무인일에 양절왕(梁節王) 유창(劉暢)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거기후(居巢侯) 유반(劉般)이 죽자, 아들 유개(劉愷)가 작위를 이어야 했으나, 유개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다고 칭하며 아우 유헌(劉憲)에게 작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오랫동안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 유관 부서에서 상주하여 유개의 봉국(封國)을 끊을 것을 청하였다. 숙종(肅宗)이 그의 의로운 행실을 칭찬하여 특별히 우대하고 너그럽게 대해 주었으나, 유개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난 후, 유관 부서에서 다시 상주하자, 시중(侍中) 가규(賈逵)가 상소하여 말했다: “공자께서 ‘예로 사양하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관 부서에서는 그의 선행을 베푸는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적인 법률로 그를 구속하니, 아마도 겸양의 풍토를 장려하고 포용하고 후한 교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서를 내렸다: “왕법(王法)은 선행을 숭상하고 남의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주는 것이니, 유헌이 작위를 이어받도록 허락한다. 이는 상황에 따른 임시 처리이니, 이후로는 이를 본보기로 삼지 말라.” 이에 유개를 불러 낭관으로 임명하였다.

남단우(南單于) 사자(師子)가 세상을 떠나고, 단우의 장남인 단(檀)이 즉위하여 만시시축저단우(萬氏尸逐鞮單于)가 되었다.

효화황제 하 영원 11년(기해, 서기 99년)

여름, 4월 병인일에 대사면을 하였다.

황제가 조회 때를 틈타 여러 유생들을 불러들여, 중대부(中大夫) 노비(魯丕)로 하여금 시중 가규, 상서령(尚書令) 황향(黃香) 등과 함께 여러 문제에 대해 서로 논쟁하게 하였다. 황제가 노비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고 여겨, 조회가 끝난 후 특별히 그에게 의관을 하사하였다. 노비가 이에 상소하여 말했다: “듣건대 경서를 강론하는 사람은 선사(先師)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자신의 견해가 아니므로 서로 사양할 수 없습니다. 서로 사양하면 이치가 밝혀지지 않으니, 이는 규구(規矩)와 저울추·저울대가 기울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근거를 밝혀야 하고, 강론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의리를 확립해야 하며, 부화하고 쓸데없는 말은 앞에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도술이 더욱 드러납니다. 말이 다른 사람은 각자 사승(師承)한 학설을 설명하게 하고, 그 이치를 널리 고찰하게 하되, 나무하고 풀 베는 사람이 말 때문에 죄를 얻거나, 변경 지역의 사람이 홀로 빠뜨려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효화황제 하 영원 12년(경자, 서기 100년)

여름, 4월 무진일에 자귀산(秭歸山)이 산사태를 일으켰다.

가을, 7월 신해 삭일에 일식이 발생하였다.

9월 무오일에 태위(太尉) 장포(張酺)가 파직되었다. 병인일에 대사농(大司農) 장우(張禹)를 태위로 임명하였다.

소당강(燒當羌)의 추장 미당(迷唐)이 이미 입조하였다. 그 나머지 무리는 2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곤궁하여 설 자리가 없어 금성(金城)에 들어가 살았다. 황제가 미당에게 명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대·소유곡(大、小榆谷)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미당은 한나라가 하교(河橋)를 수리하여 군대의 왕래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옛 땅에 다시 거주할 수 없다고 여기고, 무리가 굶주렸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멀리 가려 하지 않았다. 호강교위(護羌校尉) 오지(吳祉) 등이 미당에게 금과 비단을 많이 하사하여 양식을 사고 가축을 사게 하였다. 그가 출새(出塞)하도록 재촉하자, 무리는 더욱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해에 미당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황중(湟中)의 여러 호인(胡人)들을 협박하여 약탈하고 떠나갔다. 왕신, 경담, 오지 모두 죄를 받고 소환되었다.

효화황제 하 영원 13년(신축, 서기 101년)

가을, 8월 기해일에 북궁(北宮) 성찬문각(盛饌門閣)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미당이 다시 사지하곡(賜支河曲)으로 돌아와, 군사를 이끌고 변새(邊塞)로 압박해 왔다. 호강교위 주위(周鮪)와 금성태수 후패(侯霸) 및 각 군의 군대, 속국강병(屬國羌兵), 호병(胡兵) 등 3만 명을 이끌고 출새하여 윤천(允川)에 이르렀다. 후패가 미당을 격파하자, 무리가 와해되어 항복한 자가 6천여 명에 이르렀고, 각각 한양(漢陽), 안정(安定), 농서(隴西)로 이주시켰다. 미당은 이로부터 쇠약해져 멀리 사지하수(賜支河首)로 도망쳐 발강(發羌)에 의지하여 살았다. 오랜 후에 병들어 죽었고, 그의 아들이 와서 항복하였으나 무리는 수십 호에 미치지 못했다.

형주(荊州)에 수재가 발생하였다.

겨울, 11월 병진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유주(幽州), 병주(并州), 양주(涼州)의 호구가 전반적으로 적고, 변경의 요역이 무거우며, 수양하는 양리(良吏)의 승진 길이 좁다. 이적(夷狄)을 접대하고 위무하는 것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변경의 각 군(郡)에서 인구가 10만 이상인 곳은 해마다 효렴(孝廉) 한 명을 천거하고, 10만이 차지 않는 곳은 2년에 한 명, 5만 이하인 곳은 3년에 한 명을 천거하라.” 선비(鮮卑)가 우북평(右北平)을 침범하고, 이어서 어양(漁陽)으로 들어갔으나, 어양태수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무진일에 사도 여개가 늙고 병들어 은퇴하였다.

무만인(巫蠻人) 허성(許聖)이 군현에서 부세를 고르게 징수하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묘일에 남군(南郡)을 침범하였다.

효화황제 하 영원 14년(임인, 서기 102년)

봄, 안정군(安定郡)에 투항한 강인(羌人) 소하(燒何) 부락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군병이 격파하고 소멸시켰다. 당시 서해(西海) 및 대·소유곡 일대에는 더 이상 강인의 침략이 없었다. 우미상(隃麋相) 조봉(曹鳳)이 상소하여 말했다: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서강(西羌)이 법을 어긴 자는 항상 소당(燒當) 부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대·소유곡에 살고 있어 토지가 비옥하고, 서해의 어업과 염업의 이익이 있으며, 큰 강을 의지하여 험고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내(塞內)의 여러 부락에 가까이 있어, 악을 행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웠으므로, 능히 강성해져 항상 여러 부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의 권모와 용맹에 의지하여 강인과 호인을 초빙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이 쇠약하고 곤궁하며, 동지와 도움은 붕괴되어 도망쳐 살며 멀리 발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기회를 틈타 서해군현(西海郡縣)을 다시 세우고, 양유(兩榆) 지역을 계획하여 공고히 하며,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강인과 호인의 교류 통로를 막고 막으며, 광망하고 간사한 자들의 엿보는 욕망을 끊고 막아야 합니다. 동시에 곡식을 심어 변경을 부유하게 하고, 수운(水運)의 노역을 줄이면, 국가는 서쪽의 근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옛 서해군을 수리하고, 금성서부도위(金城西部都尉)를 옮겨 지키게 하였으며, 조봉을 금성서부도위로 임명하여 용기(龍耆)에 주둔하게 하였다. 후에 둔전을 더욱 확장하여 하천을 따라 둔전 구역을 늘려 총 34부(部)에 이르렀다. 이 사업이 거의 성공하려 할 때, 마침 영초(永初) 연간에 여러 강인이 반란을 일으켜 중단되었다.

3월 무진일에 황제가 벽옹(辟雍)에 친림하여 향사례(鄉射禮)를 행하고, 대사면을 하였다.

夏季 4월, 사자를 보내 형주 군대 1만여 명을 거느리게 하여 길을 나누어 무희(巫蠻) 허성(許聖) 등을 토벌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허성 등이 항복을 청하자 모두 강하(江夏)로 이주시켜 안치하였다.

음황후(陰皇后)는 매우 질투하여 총애가 점차 줄어들자 마음속으로 여러 번 원한을 품었다. 황후의 외조모 등주(鄧朱)가 궁중을 출입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황후가 등주와 함께 무고(巫蠱) 요술을 행한다고 고발하였다. 황제는 중상시(中常侍) 장신(張愼)과 상서(尚書) 진포(陳褒)를 보내 이 사건을 심리하게 하였고, 그들은 대역무도(大逆不道)한 죄를 지었다고 탄핵하였다. 등주의 두 아들 등봉(鄧奉), 등의(鄧毅)와 황후의 동생 음보(陰輔)는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6월 신묘일, 황후는 죄로 인해 폐위되어 동궁(桐宮)으로 옮겨졌고, 근심하다가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 특진(特進) 음강(陰綱)은 자살하였고, 황후의 동생 음질(陰軼), 음창(陰敞)과 등주의 가족은 일남군(日南郡) 비경현(比景縣)으로 유배되었다.

가을 7월 임자일, 상산상왕(常山殤王) 유측(劉側)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그의 형 방자후(防子侯) 유장(劉章)을 상산왕(常山王)으로 세웠다.

세 주(州)에 큰 수재가 발생하였다.

반초(班超)는 오래도록 머나먼 이역에 있어 나이가 많아 고향을 그리워하며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감히 주천군(酒泉郡)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살아서 옥문관(玉門關)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삼가 제 아들 반용(班勇)을 안식국(安息國)이 바치는 공물을 따라 변새(邊塞)에 들어가게 하오니, 제가 살아 있는 동안 반용이 중원(中原)을 직접 보게 하소서." 조정에서는 오랫동안 답하지 않았다. 반초의 누이인 조대가(曹大家)가 상소하였다. "오랑캐의 본성은 늙은 이를 업신여기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초는 조석으로 땅에 묻힐 처지인데도 오래도록 그를 대신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간사한 자의 근원을 열고 반역하고 어지럽히려는 마음을 싹트게 할까 두렵습니다. 조정의 경대부(卿大夫)들은 모두 눈앞의 이익만 보고 길게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난이 일어나면 반초의 기력이 뜻대로 되지 않아 위로는 국가가 누대에 걸쳐 쌓은 공업을 해치고 아래로는 충신이 힘을 다해 바친 공을 버리게 될 것이니 참으로 애통합니다! 그러므로 반초는 만 리 밖에서 귀순의 정성을 표하며 스스로 곤궁하고 급박함을 진술하고, 목을 길게 빼고 우러러 기다린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살피고 유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은밀히 듣건대 옛날에는 15세에 병역을 받고 60세에 병역을 반납하여 쉴 때도 있었고, 다시 직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반초를 위하여 애처롭게 청하오니, 원하건대 반초가 남은 여생을 보내고 한 번 살아서 돌아와 다시 조정의 궁궐을 뵙게 하여, 국가로 하여금 원정의 근심이 없게 하고 서역(西域)으로 하여금 갑작스런 화가 없게 하며, 반초로 하여금 주문왕(周文王)이 해골을 묻어 준 은덕과 전자방(田子方)이 늙은이를 가엾이 여긴 혜택을 오래도록 입게 하소서."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반초를 소환하였다. 8월, 반초가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사성교위(射聲校尉)에 임명되었고, 9월에 죽었다. 반초가 소환될 때 무기교위(戊己校尉) 임상(任尙)이 도호(都護)를 대행하였다. 임상이 반초에게 말하였다. "군후(君侯)께서 외역(外域)에서 30여 년을 지내셨고, 제가 소인이 뒤를 이었으니 책임은 무겁고 생각은 얕습니다.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반초가 말하였다. "저는 늙고 지혜가 쇠했습니다. 공께서 여러 번 높은 자리를 지내셨으니 어찌 제가 감히 비교하겠습니까! 만약 부득이하다면, 원하건대 어리석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새외(塞外)의 관리와 병사들은 본래 효자나 순손이 아니며, 모두 죄로 인해 변경 수비로 보내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랑캐는 새나 짐승 같은 마음을 품어 가르쳐 기르기 어렵고 쉽게 무너집니다. 지금 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조급하며, 물이 너무 맑으면 큰 고기가 없고, 정치가 너무 밝으면 아랫사람의 화목을 얻지 못합니다. 마땅히 너그럽고 간결하게 하여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오직 큰 강령만을 잡으면 될 것입니다." 반초가 떠난 후, 임상은 은밀히 자기 친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반군(班君)이 기이한 계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한 말은 평범한 논의에 불과할 뿐이다." 임상은 나중에 결국 변경의 평화를 잃었으니, 반초의 말과 같았다.

처음에 태부(太傅) 등우(鄧禹)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백만 대군을 거느렸으나 일찍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후손에 반드시 일어날 자가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 호강교위(護羌校尉) 등훈(鄧訓)에게 딸 등수(鄧綏)가 있었는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책 읽고 전기(傳記)를 익히기를 좋아하여, 항상 낮에는 부녀의 도를 닦고 밤에는 경전을 읽어 가족들이 그녀를 '제생(諸生)'이라 불렀다. 숙부 등해(鄧陔)가 말하였다. "일찍이 천 명을 살린 사람의 자손은 봉작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등훈이 알자(謁者)로 있을 때 명을 받들어 석구하(石臼河)를 수리하여 해마다 수천 명을 구했으니, 천도(天道)는 믿을 만하여 가문이 반드시 복을 입을 것입니다." 등수는 후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공손하고 삼가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이 법도가 있었다. 음황후를 섬기고 동료들을 접대하며 위로할 때는 항상 자신을 억제하고 남보다 낮추었으며, 궁인과 노예에게까지도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황제가 매우 칭찬하였다. 그녀가 일찍이 병에 걸렸을 때, 황제가 특별히 그녀의 어머니와 형제가 궁중에 들어와 의약을 돌보게 하고 기한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등귀인이 사양하였다. "궁중 금지(禁地)는 지극히 중요하온데, 외척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내궁에 있게 하면 위로는 폐하께 사사로운 총애를 베푼다는 비난을 받게 하고 아래로는 천하게 여기는 저에게 만족할 줄 모른다는 비방을 얻게 되어, 위아래로 모두 해로우니 실로 원하지 않사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자주 궁중에 들어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데, 귀인은 도리어 근심하는가?" 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후궁들은 다투어 몸을 치장하였으나 오직 등귀인만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그녀의 옷이 음황후와 같은 색이 있으면 곧바로 갈아입었고, 함께 알현할 때는 감히 정좌하거나 나란히 서지 않았으며, 걸을 때는 허리를 굽히고 몸을 숙여 겸손을 나타냈고, 황제가 무슨 질문을 할 때마다 자주 머뭇거리며 물러난 후에야 대답하여 감히 황후 앞이나 뒤에서 말하지 않았다. 음황후는 몸집이 작고 키가 작았으며, 행동거지가 자주 실수가 있어 좌우의 시종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으나, 오직 등귀인만은 신색이 슬펐고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황후를 위해 숨기기를 마치 자신의 허물인 듯이 하였다. 황제는 등귀인이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억울함을 참는 것을 알고 감탄하였다. "덕을 닦는 수고로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후에 음황후의 총애가 줄어들자, 등귀인은 부름을 받을 때마다 항상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당시 황제가 여러 번 황자를 잃었는데, 등귀인은 후계자가 넓지 않음을 근심하여 여러 번 재인(才人)을 들여 황제의 마음에 맞추었다. 음황후는 등귀인의 덕행과 명예가 날로 성해짐을 보고 깊이 시기하였다. 황제가 일찍이 병석에 누워 매우 위독하였는데, 음황후가 은밀히 말하였다. "내가 한 번 뜻을 얻으면 결코 등씨(鄧氏)를 다시 살려 두지 않겠다!" 등귀인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정성을 다해 황후를 섬겼으나 끝내 보호받지 못하였구나. 지금 나는 마땅히 황제를 따라 죽어, 위로는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운데로는 종족의 재앙을 풀며, 아래로는 음씨(陰氏)로 하여금 '인체(人彘)'의 비난을 받지 않게 하리라." 곧 독약을 마시려 하였으나, 궁인 조옥(趙玉)이 굳이 막으며 거짓으로 말하였다. "마침 사자가 와서 황상의 병이 이미 나았다고 합니다." 등귀인이 그제야 그만두었다. 이튿날 황제가 과연 나았다. 음황후가 폐위되자 등귀인은 구원을 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등귀인을 황후로 세우려 하였으나, 등귀인은 더욱 병이 중하다고 칭하며 스스로 깊이 격리하였다. 겨울 10월 신묘일, 조서를 내려 귀인 등씨를 황후로 세웠다. 등황후는 사양하고 겸손하였으나 부득이하여 즉위하였다. 각 군국(郡國)에서 바치는 공물을 일체 금지하고, 해마다 오직 종이와 먹만을 공급하게 하였다. 황제가 등씨 가문에 관작을 내릴 때마다 등황후는 항상 애처롭게 사양하고 겸손하였으므로, 그녀의 오빠 등치(鄧騭)는 황제 재위 기간에 시종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을 넘지 못하였다.

정유일, 사공(司空) 조감(巢堪)이 파면되었다.

11월 계묘일, 대사농(大司農) 패국인(沛國人) 서방(徐防)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서방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한(漢)나라가 박사(博士) 14가(家)를 세우고 갑을과(甲乙科)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권면하고 장려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태학(太學)에서 박사 제자를 시험할 때 모두 자기 견해로 해석하고 가법(家法)을 닦지 않으며, 은밀히 서로 포용하고 숨겨 간사한 길을 열었습니다. 매번 책시(策試)가 있으면 항상 쟁론과 소송이 일어나 의논이 어지럽고 서로 긍정하고 부정하였습니다. 공자(孔子)께서 '전술(傳述)하고 창작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또한 '내가 아직 사기(史記)에서 빠진 글을 볼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장구(章句)를 따르지 않고 함부로 천착(穿鑿)하고 부회(附會)하여, 스승의 학설을 따르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기고 함부로 해석하는 것을 이치에 맞는 것으로 여겨, 도술(道術)을 가볍게 여기고 모욕하여 점차 풍조를 이루니, 실로 조서가 절실히 선발하려는 본의가 아닙니다. 박약한 풍조를 고쳐 두터움으로 나아가는 것은 삼대(三代)의 떳떳한 도리이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정밀히 연구하고 근본에 힘쓰는 것은 유학(儒學)이 우선하는 바입니다. 신은 박사와 갑을과의 책시는 마땅히 각 집의 장구에 따라 50개의 난제(難題)를 내어 시험하여, 해석이 많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인용이 분명한 자를 높은 논의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선사(先師)를 따르지 않고 의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은 모두 그르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이 해에, 처음으로 대장추 정중을 조도향후로 봉하였다.

효화황제 영원 15년(계묘, 서기 103년)

여름, 4월, 갑자 그믐날, 일식이 발생하였다. 당시 황제가 숙종의 전례를 따라 형제들을 모두 경성에 머물게 하였는데, 유관 부서에서 일식은 음기가 너무 성한 탓이라며 제후왕들을 봉국으로 보낼 것을 상주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갑자일의 재앙은 오로지 나 한 사람의 책임이다. 제후들은 나이가 어려 일찍이 부모의 양육을 떠나, 약관의 나이에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 항상 《蓼莪》와 《凱風》의 슬픔을 지니고 있다. 망설이는 은정이 나라의 법전에 맞지 않음을 알지만, 잠시 더 머물게 하라.”

가을, 9월, 임인일, 황제가 남쪽으로 순행하였고, 청하왕, 제북왕, 하간왕 세 번왕이 함께 따랐다.

네 개의 주에 수재가 발생하였다.

겨울, 10월, 무신일, 황제가 장릉에 행차하였고, 무오일, 다시 운몽에 행차하였다. 당시 태부 장우가 유수하였는데, 황제가 장릉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한 먼 곳으로의 유람은 옳지 않다 여겨 역참을 통해 급히上书하여 간언하였다. 황제가 조서로 답하여 말하였다. “제사와 능 참배가 이미 끝났으니 마땅히 남쪽으로 가서 큰 강에 제사 지내려 하였는데, 마침 그대의 상소를 받고 한수 가에 이르러 수레를 돌려 돌아왔다.” 11월, 갑신일, 궁으로 돌아왔다.

영남에서 이전부터 신선한 용안과 여지를 진상하였는데, 10리에 하나의 역참을 두고 5리에 하나의 초소를 두어 밤낮으로 전송하였다. 임무현장 여남 사람 당요가 상소하여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위에 있는 자는 맛있는 음식을 덕으로 여기지 않고, 아래에 있는 자는 음식을 진상하는 것을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교지 7군에서 신선한 용안 등을 진상하는 것을 보니, 새가 놀라고 바람이 일듯 합니다. 남쪽 주군은 땅이 뜨겁고 악한 벌레와 맹수가 길에 끊이지 않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나, 아직 오지 않은 자는 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물건이 조정에 올려져도 반드시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먼 나라의 진기한 음식은 본래 종묘에 받들어 바치는 것인데, 만약 해를 끼친다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이겠는가. 태관에게 명하여 다시는 진상을 받지 말라!”

이 해에, 처음으로 군국에 명하여 하지일에 경한 형벌의 사건을 심리하게 하였다.

효화황제 영원 16년(갑진, 서기 104년)

가을, 7월, 가뭄이 발생하였다.

신유일, 사도 노공이 파직되었다.

경오일, 광록훈 장포를 사도로 임명하였고, 8월, 기유일, 장포가 죽었다.

겨울, 10월, 신묘일, 사공 서방을 사도로, 대홍려 진총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11월, 기축일, 황제가 순행하여 구씨현에 이르러 백비산에 올랐다.

북흉노가 사신을 보내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고, 호한야선우의 옛 약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옛 예법이 완비되지 않았다 여겨 허락하지 않았으나, 후하게 상을 내리고 그들의 사신에게는 답하지 않았다.

효화황제 원흥 원년(을사, 서기 105년)

봄, 고구려 왕 궁이 요동 새를 넘어 여섯 개의 현을 침략하였다. 여름, 4월, 경오일,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가을, 9월, 요동태수 경기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겨울, 12월, 신미일, 화제가 장덕전전에서 붕어하였다. 처음에 화제가 황자를 잃은 것이 전후로 열 명이 넘었고, 이후에 태어난 황자는 비밀리에 민간에서 길러져 신하들 중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화제가 붕어하자, 등황후가 비로소 민간에 가서 황자를 데려왔다. 맏아들 유승은 오래도록 낫지 않는 병이 있었고, 어린 아들 유륭은 태어난 지 백여 일 만에 맞아들여 황태자로 세웠으며, 그날 밤 곧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후를 황태후로 높이고, 태후가 섭정하였다. 당시 막 큰 상사를 당하여 법령과 제도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데, 궁중에서 한 상자의 큰 구슬을 잃어버렸다. 태후는 만약 고문하여 추궁하면 반드시 무고히 억울한 사람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 궁중의 시종들을 살펴 그들의 표정을 관찰하니, 구슬을 훔친 자가 즉시 자수하여 죄를 인정하였다. 또한, 화제의 총애를 받던 사람 길성이 거마를 모는 자들에게 함께 무고를 당해 액정에 넘겨져 고문을 당하였는데, 자백과 증거가 모두 명백하였다. 태후는 길성이 선제의 측근으로 그에게 은덕을 베풀었고 평소에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사람의 정에 맞지 않는다 여겨, 직접 길성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니 과연 거마를 모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탄복하며 태후가 성명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북흉노가 다시 사신을 보내 돈황에 공물을 바치며, 국가가 가난하여 예법을 갖추지 못함을 핑계로 사절하며, 한나라가 대사를 보내주길 청하면 그들이 아들을 보내 조정에 시중들게 하겠다고 하였다. 태후도 그들의 사신에게 답하지 않고, 다만 후하게 상을 내렸을 뿐이다.

낙양령 광한 사람 왕환이 사람을 대함에 공평하고 바르며, 명철하게 간사하고 숨은 악을 적발할 수 있었고, 겉으로는 엄격한 정령을 시행하였으나 마음속에는 인자함을 품고 있었다. 그가 판결한 모든 사건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경성 사람들은 그에게 신명의 도움이 있다고 여겼다. 이 해에 그가 임지에서 죽자, 백성들이 저자거리나 길에서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환의 영구가 서쪽 고향으로 돌아가 홍농을 지날 때, 백성들이 길에 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니, 관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말하였다. “저희가 평소 쌀을 가지고 낙양에 갈 때면 항상 관리나 군사들에게 빼앗겨 항상 절반을 잃곤 하였는데, 왕 군이 주관한 이후로는 다시는 침탈이나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으러 온 것입니다.” 낙양 백성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시가를 지어, 제사 때마다 연주하고 노래하며 바쳤다. 태후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충성스럽고 선량한 관리야말로 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의지이며, 그들을 구하는 데는 매우 힘쓰지만 얻는 것은 매우 드물다. 이제 왕환의 아들 왕석을 낭중에 임명하여 근면한 사람들을 권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