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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 사십이

제 42 편

자치통감 제050권

【한기사십이】 병진년(서기 116년)부터 신유년(서기 120년)까지, 모두 9년이다.

효안황제 원초 3년(丙辰, 서기 116년)

봄 정월, 창오·울림·합포의 만이(蠻夷)가 반란을 일으켰다. 2월에 시어사(侍御史) 임착(任逴)을 보내 주군(州郡)의 군대를 감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군국(郡國)에서 열 번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3월 신해일, 일식이 발생하였다.

여름 4월, 경성(京城)에 가뭄이 들었다.

5월, 무릉(武陵)의 만인(蠻人)이 반란을 일으키니, 주군의 군대가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계유일,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이 남선우(南單于)를 거느리고 영주(靈州)에서 영창(零昌)을 공격하여 목을 벤 자가 800여 명이었다.

월수(越巂) 국경 밖의 이인(夷人)이 온 종족이 내지(內地)로 귀부하였다.

6월, 중랑장(中郎將) 임상(任尚)이 군대를 보내 정계성(丁奚城)에서 선령강(先零羌)을 격파하였다.

가을 7월, 무릉의 만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군의 군대가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9월, 풍익(馮翊) 북쪽 경계의 후오(候塢) 5백 곳을 수축하여 강족(羌族)을 방비하게 하였다.

겨울 11월, 창오·울림·합포의 만이가 항복하였다. 옛 제도에 공경(公卿)·이천석(二千石) 관료·자사(刺史)는 3년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사도(司徒) 유개(劉愷)가 이것이 "백성의 모범이 되고 아름다운 풍속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여겼다. 병술일, 비로소 대신들이 3년상을 치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계묘일, 아홉 개의 군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12월 정사일, 임상이 군대를 보내 북지(北地)에서 영창을 공격하여 그의 처자식을 죽이고 그의 장막 촌락을 불태웠으며, 목을 벤 자가 7백여 명이었다.

효안황제 원초 4년(丁巳, 서기 117년)

봄 2월 을사 삭일, 일식이 발생하였다.

을묘일, 사면령을 내렸다.

임술일, 무고(武庫)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임상이 당전종(當闐種)의 강족(羌人) 유귀(榆鬼) 등을 시켜 두계공(杜季貢)을 자객으로 암살하게 하고, 유귀를 파강후(破羌侯)로 봉하였다.

사공(司空) 원창(袁敞)은 청렴하고 강직하여 권귀(權貴)에 아첨하지 않아 등씨(鄧氏)의 뜻을 거슬렀다. 상서랑(尚書郎) 장준(張俊)이 원창의 아들 원준(袁俊)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가 있었는데, 원수가 그 편지를 봉하여 상부(上府)에 올렸다. 여름 4월 무신일, 원창이 죄로 인해 관직을 파면당하고 자살하였다. 장준 등은 옥에 갇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장준이 상소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형장에 임했을 때 태후가 조서를 내려 사형을 감면해 주었다.

기사일, 요서(遼西)의 선비(鮮卑)인 연휴(連休) 등이 침입하니, 군병(郡兵)이 오환(烏桓) 수령 우질거(于秩居) 등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목을 벤 자가 1천 3백 명이었다.

6월 무진일, 세 군(郡)에 우박이 내렸다.

윤취(尹就)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지 못한 죄로 징소되어 수도로 압송되어 죄를 받았다. 익주자사(益州刺史) 장교(張喬)를 임명하여 그의 군대를 겸하여 주둔하게 하고, 반란을 일으킨 강족들을 초유하고 회유하자 그들이 점차 항복하고 흩어졌다.

가을 7월, 경성 및 열 개의 군국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였다.

9월, 호강교위(護羌校尉) 임상이 또 효공종(效功種)의 강족 호봉(號封)을 모집하여 영창을 암살하게 하였다. 호봉을 강왕(羌王)으로 봉하였다.

겨울 11월 기묘일, 팽성정왕(彭城靖王) 유공(劉恭)이 죽었다.

월수(越巂)의 이인(夷人)들이 군현(郡縣)의 부세(賦稅) 징수가 빈번하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12월에 대우종(大牛種) 봉리(封離) 등이 반란을 일으켜 수구현령(遂久縣令)을 살해하였다.

갑자일, 임상이 기도위(騎都尉) 마현(馬賢)과 함께 선령강 낭막(狼莫)을 공격하여 북지까지 추격하고 60여 일 동안 대치하다가 부평(富平)의 하가(河上)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여 목을 벤 자가 5천 명이었으며, 낭막은 도망갔다. 이에 서하(西河) 건인종(虔人種) 강족 1만 명이 등준에게 항복하니, 농우(隴右)가 평정되었다.

이 해에 열세 개의 군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효안황제 원초 5년(戊午, 서기 118년)

봄 3월, 경성 및 다섯 개의 군국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6월, 고구려(高句驪)와 예맥(濊貊)이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였다.

영창(永昌)·익주(益州)·촉군(蜀郡)의 이인(夷人)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봉리(封離)에 호응하였고, 무리가 10여만 명에 이르렀으며, 20여 개의 현을 함락시키고 지방 장관을 죽이며 백성을 약탈하고 불태워 시체가 쌓이고 천 리 안에 인적이 끊어졌다.

가을 8월 병진 삭일, 일식이 발생하였다.

대군(代郡)의 선비(鮮卑)가 침입하여 장사(長史)를 죽였다. 연변의 병사와 여양영(黎陽營)의 군대를 발동하여 상곡(上谷)에 주둔시켜 방비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선비가 상곡을 침범하여 거용관(居庸關)을 공격하니, 다시 연변 각 군의 여양영병과 적사사(積射士)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발동하여 여러 교통 요로에 주둔시켰다.

등준이 상군(上郡) 전무종(全無種)의 강족 조하(雕何)를 모집하여 낭막을 암살하게 하였다. 조하를 강후(羌侯)로 봉하였다. 강족이 반란을 일으킨 지 10여 년 동안 군사 비용이 모두 240여 억에 달하여 국고가 비었고, 변경 백성과 내지 군현의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병주(幷州)와 양주(涼州) 두 주는 결국 비어 쇠약해졌다. 영창과 낭막이 죽은 후에 각 부족의 강족들은 와해되었고, 삼보(三輔)와 익주에는 더 이상 침입의 경보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등준을 무양후(武陽侯)로 봉하고 식읍 3천 호를 내렸다. 등준은 태후의 종제(從弟)였기 때문에 작위와 봉록이 매우 후했다. 임상이 등준과 공(功)을 다투었고, 또 참수한 숫자를 허위로 보고하고 뇌물을 받으며 법을 어기고 탐오하여 천만 이상을 저지른 죄로 기소되었다. 12월, 수레에 가두어 임상을 압송하고 시장에서 참수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등치(鄧騭)의 아들 시중(侍中) 등봉(鄧鳳)이 일찍이 임상에게 말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등치는 아내와 등봉의 머리를 깎아 사죄하였다.

이 해에 열네 개의 군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태후의 동생 등리(鄧悝)와 등려(鄧閭)가 모두 죽었다. 등리의 아들 등광종(鄧廣宗)을 엽후(葉侯)로, 등려의 아들 등충(鄧忠)을 서화후(西華侯)로 봉하였다.

효안황제 원초 6년(己未, 서기 119년)

봄 2월 을사일, 경성 및 마흔두 개의 군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여름 4월, 패국(沛國)과 발해(勃海)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5월, 경성에 가뭄이 들었다.

6월 병술일, 평원애왕(平原哀王) 유득(劉得)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가을 7월, 선비(鮮卑)가 마성새(馬城塞)를 침범하여 지방 장관을 죽이니, 도료장군 등준 및 중랑장 마속(馬續)이 남선우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9월 계사일, 진회왕(陳懷王) 유송(劉竦)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겨울 12월 무오 삭일, 일식이 발생하였는데, 개기일식이었다.

여덟 개의 군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해에 태후가 화제(和帝)의 동생 제북혜왕(濟北惠王) 유수(劉壽)와 하간왕(河間王) 유개(劉開)의 자녀 중 나이 5세 이상인 40여 명과 등씨(鄧氏)의 가까운 친척 자손 30여 명을 불러들여 그들을 위해 저택을 열고 경서(經書)를 가르치며 직접 시험을 감독하였다. 조서를 내려 종형(從兄) 하남윤(河南尹) 등표(鄧豹)와 월기교위(越騎校尉) 등강(鄧康) 등에게 말하기를 "말세의 황실 외척이나 녹봉을 받는 집안은 따뜻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견고한 수레를 타고 준마를 몰지만, 벽을 마주하고 앉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여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이 재앙과 패망이 이르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예장(豫章)에서 영지(靈芝)가 자라났는데, 태수 유지(劉祗)가 이를 조정에 바치려 하여 군인 당단(唐檀)에게 물으니, 당단이 말하기를 "지금 외척이 강성하고 군주의 권력이 미약하니, 이것이 어찌 길조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지가 이에 그만두었다.

익주자사 장교가 종사(從事) 양송(楊竦)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섭유(楪榆)에 도착하여 봉리(封離) 등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벤 자가 3만여 명, 생포한 자가 1천 5백 명이었다. 봉리 등이 두려워하여 그들과 함께 모의한 우두머리들을 참수하고 양송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 양송이 후하게 위로하고 받아들였으며, 나머지 36종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고 귀부하였다. 양송이 이에 간사하고 만이(蠻夷)를 침범한 지방 장관 90명을 탄핵하여 보고하니, 모두 사형을 감면하고 논죄하였다.

당초, 서역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관계를 끊은 후, 북흉노(北匈奴)가 다시 무력으로 위협하고 부려 그들과 함께 변경을 침범하였다. 돈황태수(敦煌太守) 조종(曹宗)이 이를 근심하여, 이에 상주하여 대장사(代長史) 색반(索班)을 보내 1천여 명을 이끌고 이오(伊吾)에 주둔시키며 그들을 초유하게 하였다. 이에 차사전왕(車師前王) 및 선선왕(鄯善王)이 다시 와서 항복하였다.

당초, 소륵왕(疏勒王) 안국(安國)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그의 외삼촌의 아들 유복(遺腹)을 왕으로 세웠다. 유복의 숙부 신반(臣磐)이 월지(月氏)에 있었는데, 월지가 그를 보내 왕으로 세웠다. 후에 사차(莎車)가 우전(于闐)을 배반하고 소륵에 귀부하니, 소륵이 이에 강성해져서 구자(龜茲) 및 우전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효안황제 영녕 원년(庚申, 서기 120년)

봄 3월 정유일, 제북혜왕(濟北惠王) 유수(劉壽)가 죽었다.

북흉노가 거사후왕 군지를 이끌고 함께 후부사마 및 돈황장색 색반 등을 죽이고, 이어 거사전왕을 쫓아내 북도를 장악했다. 선선이 위급함에 쫓겨 조종에게 구원을 청하자, 조종이 이에 오천 병사를 출동시켜 흉노를 공격해 색반의 원한을 갚고 겸해 서역을 다시 차지할 것을 청했다. 공경들은 대부분 옥문관을 닫고 서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여겼다. 태후가 군사마 반용이 그의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조당으로 불러 물었다. 반용이 의견을 올려 말했다: “옛날 효무황제께서 흉노가 강성함을 근심하시어 서역을 개통하셨고, 의논하는 자들은 이것이 흉노의 창고를 빼앗고 오른팔을 자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광무중흥 때는 외부 일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 흉노가 강대함에 의지해 여러 나라를 몰아 부렸습니다. 영평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돈황을 공격해 하서 여러 군은 성문을 낮에도 닫았습니다. 효명황제께서 조정의 전략을 깊이 생각하시어 맹장을 명해 서역으로 출병하게 하시니 흉노가 멀리 도망쳐 변경이 안정되었습니다. 영원 연간에 이르러서는 내속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마침 근래 강족이 난을 일으켜 서역이 또 조정과 끊어지자, 북로가 사자를 보내 여러 나라를 꾸짖으며 그들이 빚진 조세를 추궁하고 값을 높이며 엄격히 기한을 정해 회합을 강요하니, 선선과 거사 모두 원한을 품고 한나라를 섬기고자 바라면서도 길이 막혀 통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반역이 자주 일어난 것은 모두 지방관이 다스림을 잘못하여 도리어 그들에게 화를 끼친 까닭입니다. 지금 조종은 다만 이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해 흉노에게 원한을 갚고자 하나, 출병의 옛 예를 살피지 않고 당시의 적합함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황원한 땅에서 공을 세우려 하니 만 번 시도해도 한 번 성공할까 말까 합니다. 만약 전쟁이 끊이지 않고 화가 계속된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국고는 충실하지 못하고 군대는 후속이 없으니, 이는 먼 오랑캐에게 약함을 드러내고 국내에 단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게 생각하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옛 제도에 돈황군에 영병 삼백 명이 있었으니, 지금 마땅히 회복하고 다시 호서역부교위를 두어 돈황에 주둔하게 하되 영원 연간의 옛 예와 같이 하고, 또 마땅히 서역장사 오백 명을 보내 누란에 주둔하게 하여 서쪽으로 언기와 구자의 길을 막고, 남쪽으로 선선과 우전의 담력을 강하게 하며, 북쪽으로 흉노를 막고, 동쪽으로 돈황에 가깝게 하면 참으로 편리할 것입니다.”

상서가 또 반용에게 물었다: “이해와 손해가 어떠합니까?” 반용이 대답했다: “옛날 영평 말년에 처음으로 서역과 교통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중랑장을 보내 돈황에 주둔하게 하고, 나중에 거사에 부교위를 두어 호로를 제어함과 동시에 한나라 사람이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금지하니, 그래서 외이가 마음을 돌리고 흉노가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선선왕 유환은 한나라 사람의 외손입니다. 만약 흉노가 세력을 얻으면 유환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금수 같아도 화를 피하는 것을 압니다. 만약 누란에 둔전을 한다면 그들의 귀순하는 마음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하니, 저는 이것이 이롭다고 생각합니다.” 장락위위 담현, 정위 기모참, 사례교최 최거가 반박하며 말했다: “조정이 이전에 서역을 버린 까닭은 중원에 이익이 없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사가 이미 흉노에 귀부했고 선선도 믿을 수 없어, 한 번이라도 반복하면 반 장군이 북로가 변방의 근심이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반용이 대답했다: “지금 중원에서 주목을 두는 것은 군현의 간사하고 교활한 도적을 금지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주목이 도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다면, 나도 또한 요참의 형벌을 받아들이며 흉노가 변방의 근심이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습니다. 지금 서역과 교통하면 노의 세력이 반드시 약해지고, 노의 세력이 약해지면 해가 작아집니다. 이는 그들의 창고를 돌려주고 그들의 끊긴 팔을 이어주는 것과 비교해 어떤 것이 낫습니까? 지금 교위를 두어 서역을 지키고 어루만지며, 장사를 세워 여러 나라를 초무하되, 만약 버려두고 세우지 않으면 서역이 절망할 것이고, 절망한 뒤에는 북로에게 굴복할 것이며, 연변의 군현이 곤란을 당할 것이니, 아마도 하서의 성문은 다시 낮에도 닫는 경계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조정의 은덕을 널리 펴지 않고 둔전의 비용에 얽매인다면, 이와 같다면 북로가 더욱 창궐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변방을 안정시키는 오랜 계책이겠습니까!” 태위속 모진이 반박하며 말했다: “지금 만약 교위를 두면 서역이 끊임없이 사자를 보내 요구가 끝이 없을 것이고, 주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주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을 잃을 것이며, 한 번 흉노에게 핍박받으면 또 와서 구원을 청할 것이니, 그렇다면 노역이 커질 것입니다.” 반용이 대답했다: “지금 가령 서역을 흉노에게 넘겨주고 그들로 하여금 대한의 은덕을 생각하게 하여 약탈을 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서역의 부유한 조세와 많은 병마를 이용해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것은 원수에게 재물을 풍부하게 하고 포악한 오랑캐의 세력을 더하는 것입니다. 교위를 두는 것은 위덕을 선양하고 여러 나라가 조정으로 향하는 마음을 유지하며 흉노의 엿보는 뜻을 미혹하게 하고, 재물을 소모하고 국가를 손상시킬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서역 사람들은 다른 요구가 없고, 오는 자들은 다만 식량을 받아갈 뿐입니다. 지금 만약 거절하면 그들은 반드시 북방의 오랑캐에게 귀부해 합세해 병주와 양주를 침범할 것이니, 그렇다면 중원의 비용이 십억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위를 두는 것이 참으로 이롭습니다.” 이에 반용의 건의를 채택해 돈황군 영병 삼백 명을 회복하고 서역부교위를 두어 돈황에 주둔하게 했으나, 서역을 기미할 수는 있었지만 출병하여 둔전하지는 못했다. 이후 흉노가 과연 여러 차례 거사와 함께 침입해 약탈해 하서 지역이 그 해를 심하게 입었다. 심저강이 장액을 침범했다.

여름 4월 병인일에 황자 유보를 태자로 세우고 연호를 고치고 대사면을 내렸다.

기사일에 진경왕의 아들 유숭을 진왕으로, 제북혜왕의 아들 유장을 낙성왕으로, 하간효왕의 아들 유익을 평원왕으로 잇달아 봉했다.

6월에 호강교위 마현이 만 명을 이끌고 장액에서 심저강을 토벌해 격파하고, 1800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나머지 도적은 모두 항복했다. 이때 당전종의 대추장 기오 등이 마현의 군대가 장액에 있는 것을 틈타 빈 허를 찔러 금성을 침범하자, 마현이 군대를 돌려 추격해 새외까지 나가 수천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소당과 소하종이 마현이 군대를 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장액을 침범해 장리를 죽였다.

가을 7월 을유 삭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기사일에 사공 이합이 파직되었다. 계유일에 위위 여강 사람 진포를 사공으로 임명했다.

경성 및 33개 군국에 큰 수재가 났다.

12월에 영창 국경 밖의 선국왕 옹곡조가 사자를 보내 음악과 환술사를 바쳤다.

무진일에 사도 유개가 치사를 청원하자, 황제가 허락해 천석 봉록으로 고향에 돌아가 봉양하게 했다.

요서 선비 추장 오륜과 기지건이 각자 부중을 이끌고 도료장군 등준에게 항복했다.

계유일에 태상 양진을 사도로 임명했다.

이 해에 23개 군국에 지진이 났다.

태후의 종제 월기교위 등강이 태후가 오랫동안 섭정하고 집안의 권세가 지나치게 성하자, 여러 차례 태후에게 상소해 황실을 존중하고 사사로운 권력을 스스로 줄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등강이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자, 태후가 내시를 보내 문안하게 했다. 보낸 사람이 등강 집의 옛 비자였는데, 스스로 ‘중대인’이라 칭하자 등강이 듣고 그를 꾸짖었다. 비자가 원한을 품고 돌아가 등강이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말이 불손하다고 고했다. 태후가 크게 노해 등강의 관직을 면하고 봉국으로 돌려보내며 족적을 없앴다.

당초에 당전종 기오의 동족 대추장 노총심과 인량 등 1000여 호가 따로 윤가에 머물며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

효안황제 건광 원년(신유년, 서기 121년)

봄에 호강교위 마현이 노총심을 불러 죽이고 군대를 보내 그의 부중을 공격해 20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인량 등은 모두 새외로 도망쳤다.

유주자사 파군 사람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대를 이끌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구려왕 궁이 후계자 수성을 보내 거짓 항복하고 현도와 요동을 습격해 2000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2월, 황태후의 병이 위중해졌다. 계해일, 사면령을 내렸다. 3월 계사일, 황태후 등씨가 세상을 떠났다. 아직 대렴(大殮)을 하기 전에, 황제가 이전의 명을 거듭 밝혀 등지를 상채후(上蔡侯)로 봉하고, 지위는 특진(特進)으로 삼았다. 병오일, 화희황후(和熹皇后)를 안장했다. 태후가 섭정한 이후로, 수해와 가뭄이 10년 동안 계속되었고, 사방의 오랑캐가 외부에서 침입하고 도적이 내부에서 일어났다.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때로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직접 식비를 줄여 재해를 구제했기 때문에, 천하는 다시 평안을 되찾고 풍년도 회복되었다.

황제가 직접 정사를 처리하기 시작하자, 상서 진충(陳忠)은 은일과 정직한 선비, 예를 들어 영천(穎川) 사람 두근(杜根), 평성(平成) 사람 성익세(成翊世) 등을 추천했고, 황제는 모두 채용했다. 진충은 진총(陳寵)의 아들이다. 처음에 등태후가 섭정할 때, 두근은 낭중(郎中)으로 재직 중, 같은 시랑(侍郞)과 함께 상소하여 “황제의 나이가 이미 많아졌으니, 친히 정사를 처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태후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그들을 모두 견낭(縑囊)에 넣어 전(殿) 위에서 때려 죽이고 수레로 성 밖으로 내보냈다. 두근이 깨어났으나, 태후가 사람을 보내 확인하자, 두근은 죽은 척하여 사흘 후 눈에서 구더기가 생겼고, 이에 도망쳐 의성(宜城) 산중에서 술집 종으로 15년을 지냈다. 성익세는 군리(郡吏) 신분으로 또한 태후에게 정권을 돌려줄 것을 간언하다 죄를 얻었다. 황제가 모두 공거(公車)로 불러들여, 두근을 시어사(侍御史)로, 성익세를 상서랑(尚書郞)으로 임명했다. 어떤 사람이 두근에게 물었다. “예전에 화를 당했을 때, 천하 사람들이 동정하였고, 친구와 옛 벗이 적지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혔습니까?” 두근이 대답했다. “민간에서 활동하는 것은 자취를 감추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연히 드러나면 화가 친척과 벗에게 미칠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무신일, 청하효왕(清河孝王)을 효덕황(孝德皇)으로 추존하고, 생모 좌씨를 효덕후(孝德后)로, 조모 송귀인을 경은후(敬隱后)로 추존했다. 처음에 장락태복(長樂太僕) 채륜(蔡倫)이 두황후의 암시를 받아 송귀인을 무고했으므로, 황제는 명하여 그를 정위(廷尉)로 가게 하니, 채륜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여름 4월, 고구려가 또 선비(鮮卑)와 함께 요동을 침입하자, 채풍(蔡諷)이 신창(新昌)에서 추격하다 전사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다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정사일, 황제의 적모(嫡母) 경희(耿姬)를 감릉대귀인(甘陵大貴人)으로 높였다.

갑자일, 낙성왕(樂成王) 유장(劉萇)이 사치하고 음란하며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호후(蕪湖侯)로 강등되었다.

기사일, 명하여 공경 이하 군국수상(郡國守相)에게 각각 유도지사(有道之士) 한 사람씩 천거하게 했다. 상서 진충은 조서가 이미 간쟁(諫爭)을 개방했으므로,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고 격렬하며 직설적일 것을 걱정하여, 혹시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상소하여 미리 황제의 마음을 위로했다. “신이 듣건대, 인군(仁君)은 산택(山澤)과 같은 넓은 가슴으로 간절하고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충신(忠臣)은 건악(謇諤)의 절개를 다하여 귀에 거슬리는 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고조(高祖)는 주창(周昌)의 걸주(桀紂) 비유를 용납하고, 문제(文帝)는 원앙(袁盎)의 인체(人彘) 풍자를 칭송하였으며, 무제(武帝)는 동방삭(東方朔)의 선실(宣室)에 대한 간언을 채택하고, 원제(元帝)는 설광덕(薛廣德)의 자결을 간청하는 간절함을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명조(明詔)는 고종(高宗)의 덕을 높이고, 송경(宋景)의 성의를 중히 여겨, 스스로 허물을 탓하며 여러 신하에게 자문을 구하십니다. 말하는 자는 두근, 성익세 등이 최근에 표창되고 등용되어 현저한 지위가 이태(二臺)에 오른 것을 보고, 반드시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다투어 간절하고 정직하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유익한 계략과 기이한 대책이라면 즉시 채택하셔야 하고, 만약 관규(管窺)의 견해로 함부로 비난하여 비록 고통스럽고 귀에 거슬리며 사실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또한 너그럽게 대우하여 성조(聖朝)의 휘(諱)함이 없는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만약 유도지사가 탁월하게 대답하면, 마땅히 심사하여 특별히 한 등급 올려주어, 직언(直言)의 길을 넓히소서.” 상소가 올라가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도고제사(有道高第士) 패국(沛國) 사람 시정(施延)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

처음에 여남(汝南) 사람 설포(薛包)는 어릴 적부터 지극한 효행이 있었다. 아버지가 후처를 맞이하여 설포를 미워해 그를 쫓아내었다. 설포는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떠나지 않으려 하다가, 쫓겨나고 매질까지 당하여 어쩔 수 없이 집 밖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아침에 들어가 청소했다. 아버지가 노하여 또 쫓아내자, 이에 마을 문 밖에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 문안을 폐하지 않았다. 1년여가 지나자, 부모가 부끄러워하여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했다. 설포는 막을 수 없어 재산을 나누는데, 노비는 늙은 이를 취하며 말했다. “그들이 나와 함께 일한 지 오래되어, 당신은 부릴 수 없소.” 전답과 집은 거칠고 황폐한 것을 취하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젊었을 때 경작한 것이라 마음에 연연하오.” 그릇은 썩고 부서진 것을 취하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쓰고 먹던 것으로, 몸과 입이 편안히 여기오.” 동생이 여러 번 파산하자, 그는 항상 또 그를 구휼했다. 황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공거(公車)로 특별히 부르도록 명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 설포가 죽음으로써 사양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고, 모의(毛義)의 예로 대우했다.

황제는 젊어서 총명하다고 일컬어졌기에 등태후가 그를 세웠다. 그가 자란 후에는, 여러모로 덕이 없는 행실이 많아 점차 태후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황제의 유모 왕성(王聖)이 이를 알고 있었다. 등태후는 제북왕(濟北王)과 하간왕(河間王)의 아들들을 서울로 불렀는데, 하간왕의 아들 유익(劉翼)이 용모가 준수하여 태후가 그를 보통 사람과 다르게 여겨, 그를 평원회왕(平原懷王)의 후사로 삼아 서울에 머물게 했다. 왕성은 태후가 오랫동안 정권을 돌려주지 않는 것을 보고, 황제가 폐위되거나 바뀔까 두려워하여, 항상 중황문(中黃門) 이윤(李閏), 강경(江京)과 함께 황제 곁에서 상황을 살피며, 함께 황제 앞에서 태후를 비방했고, 황제는 항상 분노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전에 처벌을 받은 궁인(宮人)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태후의 형제 등치(鄧悝), 등홍(鄧弘), 등창(鄧閶)이 일찍이 상서(尙書) 등방(鄧訪)에게서 폐위시키는 옛 예를 취하여, 평원왕(平原王)을 세울 음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지난 일을 생각하며 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등치 등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범했다고 탄핵하게 하여, 마침내 서평후(西平侯) 등광종(鄧廣宗), 섭후(葉侯) 등광덕(鄧廣德), 서화후(西華侯) 등충(鄧忠), 양안후(陽安侯) 등진(鄧珍), 도향후(都鄉侯) 등보덕(鄧甫德)을 폐하여 모두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등지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특진(特進)만 빼앗고 나라로 돌려보냈다. 등씨 종족은 관직을 빼앗기고 본군(本郡)으로 돌아갔으며, 등지 등의 재산과 전택은 몰수되었다. 또 등방과 그 가족을 변경 군현으로 이주시켰는데, 군현 관리가 핍박하여 등광종과 등충은 모두 자살했다. 또 등지를 나후(羅侯)로 고쳐 봉했다. 5월 경진일, 등지와 그의 아들 등봉(鄧鳳)은 모두 굶어 죽었다. 등지의 종제(從弟) 하남윤(河南尹) 등표(鄧豹), 도료장군(度遼將軍) 무양후(舞陽侯) 등준(鄧遵), 장작대장(將作大匠) 등창(鄧暢)은 모두 자살했다. 오직 등광덕 형제만이 어머니가 염황후(閻皇后)와 이복 자매였기 때문에 서울에 머물 수 있었다. 또 경기(耿夔)를 도료장군으로 임명하고, 낙안후(樂安侯) 등강(鄧康)을 불러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병신일, 평원왕 유익을 도향후(都鄉侯)로 강등시켜 하간(河間)으로 돌려보냈다. 유익이 손님을 사절하고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 지켰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당초, 등황후가 세워졌을 때 태위 장우와 사도 서방은 사공 진총과 함께 황후의 아버지 등훈을 추증(追贈)하자는 주문을 올리려 하였다. 진총은 전대에 추증을 청하는 선례가 없다고 여겨 그들과 논쟁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등훈이 추증되고 시호가 더해지자, 장우와 서방은 또 진총과 함께 아들을 호분중랑장 등치에게 보내 예물을 전하자고 약속하였으나 진총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진총의 아들 진충은 등씨 가문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등치 등이 몰락한 후, 진충은 상서가 되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등씨를 모함하여 그들의 죄명을 이루게 하였다.

대사농 경조 사람 주총은 등치가 죄 없이 화를 입은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드디어 웃통을 벗고 관을 이고 상소하기를 “저는 개인적으로 화희황후께서 성스럽고 선량한 덕을 지니셔서 한나라의 문모(文母)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형제들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마음을 합쳐 나라를 걱정하여, 종묘가 의지할 바를 얻었고 왕실이 그들을 믿었습니다. 공을 이루고 몸을 물러나 봉국과 작위를 사양하였으니, 역대의 외척 가운데 그들과 견줄 자가 없었으며, 마땅히 선을 쌓고 겸양하는 복을 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궁녀의 일방적인 말로 무고를 당하고, 교묘한 말로 참소하고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나라를 어지럽혀, 죄상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옥사도 심리되지 않았는데, 등치 등이 이렇게 혹독하고 지나친 형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한 집안 일곱 사람이 모두 명백하지 않게 죽어 시골이 흩어지고 원혼이 돌아오지 못하니,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온 천하가 낙담하였습니다. 마땅히 매장지를 거두어 다시 안장하고 그 남은 자식들을 구휼하고 길러 제사를 잇게 하여, 이로써 원령을 위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주총은 자신의 말이 직설적임을 알고 스스로 정위에 가서 자수하였고, 진충이 다시 주총을 탄핵하여 상주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를 파면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백성들 중 등치를 위해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많아, 황제가 점차 깨달아, 드디어 주군의 관리들을 책망하고 등치 등을 북망산으로 이장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종형제들도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황제는 경귀인의 오빠 모평후 경보를 감우림좌군거기(監羽林左軍車騎)로 삼고, 송양의 네 아들을 모두 열후로 봉하였으며, 송씨 가문에서 경(卿), 교(校), 시중(侍中), 대부(大夫), 알자(謁者), 낭리(郎吏)가 된 자가 십여 명이었다. 염황후의 형제 염현, 염경, 염요는 모두 경, 교가 되어 금군을 관장하였다. 이에 내시의 총애가 비로소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강경이 일찍이 저택에서 자신을 맞이한 것을 강경의 공으로 여겨 도향후로 봉하고, 또 이윤을 옹향후로 봉하였다. 이윤과 강경은 모두 중상시로 승진하였고, 강경은 겸하여 대추추가 되었으며, 중상시 번풍, 황문령 유안, 구둔령 진달, 그리고 왕성과 왕성의 딸 백영과 함께 안팎에서 선동하고 미혹하여 다투어 사치하고 포학하게 굴었다. 백영은 궁궐을 출입하며 소식을 전하고 뇌물을 받았다.

사도 양진이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정치를 함은 현명한 이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나라를 다스림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을 요긴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요와 우순 때에 준걸한 선비들이 벼슬자리에 있고 사흉(四凶)이 추방되어 천하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여 이로써 태평성세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구덕(九德)의 사람이 등용되지 않고 총애받는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합니다. 유모 왕성은 출신이 미천하여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성상을 받들어 봉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젖을 먹이고 잠자리를 돌본 수고로움이 있으나, 전후의 상과 은혜는 이미 그 노고에 보답하기에 훨씬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 밖에서는 청탁을 통해 사귀고 안에서는 천하를 어지럽히며 맑은 조정을 더럽히고 손상시켜 해와 달에 먼지를 덮어씌웠습니다.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하면 기뻐하고 멀리하면 원망하여 진실로 기르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속히 유모를 궁 밖으로 내보내어 밖에 살게 하고 백영과의 왕래를 끊어 다시는 궁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러하면 은혜와 덕이 모두 온전해져 위아래가 모두 아름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황제가 유모 등에게 보여주었고, 궁중의 총애받는 자들이 모두 마음에 원한을 품었다.

그런데 백영은 더욱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여, 전임 조양후 유호의 종형 유회와 사통하여 유회가 드디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벼슬은 시중에 이르렀으며 유호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양진이 상소하기를 “경제(經制)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승하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니, 이는 찬탈을 막기 위함입니다. 신이 조서를 보니, 전임 조양후 유호의 재종형 유회에게 유호의 작위를 이어 후(侯)로 봉하라고 하였습니다. 유호의 동복 아우 유위가 지금 살아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천자는 상을 주는 것을 주관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제후는 작위를 주는 것을 주관하여 덕이 있는 자에게 작위를 준다고 합니다. 지금 유회는 다른 공로나 행실이 없고 다만 유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여 한때에 시중의 벼슬에 오르고 또 후에 봉해졌으니, 옛 제도를 살피지 않고 경전의 뜻에 맞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떠들썩하고 백성들이 불안해합니다. 폐하께서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제왕의 법도를 따르소서.”라고 하였다. 상서 광릉 사람 적주가 상소하기를 “옛날 두씨와 등씨의 총애는 온 세상을 뒤흔들었는데, 그들은 벼슬을 겸하고 인끈을 차고 금전과 재물을 모아 심지어는 신기를 논의하고 조작하며 사직을 바꾸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어찌 권세가 높고 위세가 커서 이렇게 화를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패망할 때에 목이 땅에 떨어져 외로운 돼지가 되고자 하여도 어찌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귀함이 점진적인 과정이 없으면 잃음이 반드시 빠르고, 작위가 도의에 맞지 않으면 재앙이 반드시 급합니다. 지금 외척이 총애를 받아 공로가 천지와 같아 한나라 개국 이래로 견줄 이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인자하고 은혜를 두루 베푸셔서 구족을 화목하게 하시나, 녹이 공실(公室)을 떠나고 정권이 사문(私門)으로 옮겨져, 전복된 수레를 다시 밟으니 어찌 꺾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안위에 관한 가장 큰 경계이며 사직을 위한 깊고 먼 계책입니다. 옛날 한문제가 누대를 만드는 데 백금이 든다는 이유로 아껴 조낭(皂囊)으로 휘장을 꾸몄는데, 어떤 이가 그 검소함을 비웃자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천하를 위하여 재물을 지키는 것이니 어찌 함부로 낭비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시간이 오래지 않았는데도 비용과 상이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천하의 재물을 긁어모아 공로 없는 집에 쌓아두니, 국고는 비었고 백성들의 재물은 피폐해져, 갑자기 뜻밖의 일이 생기면 다시 세금을 더 무겁게 할 것이며, 백성들의 원망과 반란이 이미 생겼으니 위망의 적을 하루아침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힘써 충성된 신하를 구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주살하며, 정욕의 즐거움을 끊고 사사로운 잔치의 좋아함을 그치며, 마음속으로 항상 망국이 천하를 잃은 까닭을 생각하고 흥왕하는 자가 천하를 얻은 까닭을 살피소서. 아마 재앙이 그치고 풍년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갔으나 황제는 모두 살피지 않았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하였다.

임인일에 태위 마영이 죽었다.

소당강족 인량 등은 마노 형제가 본래 소당강의 적통인데 교위 마현이 위로하고 어루만짐이 부족하여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으므로, 서로 결탁하여 함께 여러 부족을 협박하여 황중을 침범하고 금성 여러 현을 공격하였다. 8월에 마현이 선령강 부족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목원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노 등이 또 영거에서 무위와 장액의 군병을 격파하고, 드디어 선령, 심저 각 부족 4천여 호를 협박하여 산을 따라 서쪽으로 도망쳐 무위를 침범하였다. 마현이 난조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회유하니, 각 부족 중 항복한 자가 수천 명이었고, 마노는 남쪽으로 돌아와 황중으로 갔다.

갑자일에 전임 사도 유개를 태위로 삼았다. 당초에 청하상 숙손광이 장죄로 죄를 얻어 금고의 기한을 2대까지 늘렸다. 이때에 이르러 거연도위 범빈이 또 장죄를 범하자, 조정에서는 숙손광의 예에 따라 처리하려 하였다. 유개가 홀로 생각하기를 “《춘추》의 대의는 선은 자손에게까지 미치고 악은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지금 장죄를 저지른 관리의 자손까지 금고시키는 것은 가벼운 죄로 무거운 처벌을 하는 것이니, 아마도 선량한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 이는 선왕이 형벌을 신중히 하는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상서 진충도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조서가 내려져 말하기를 “태위의 의견이 옳다.”라고 하였다.

선비족 기지건이 거용관을 침범하였다. 9월에 운중태수 성엄이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공조 양목이 몸으로 성엄을 지켜 함께 싸우다 죽었다. 선비족이 드디어 오환교위 서상을 마성에 포위하였다. 도료장군 경기와 유주자사 방참이 광양, 어양, 탁군의 갑병을 징발하여 구원하니, 선비족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

戊子일, 황제가 위위 풍석의 저택에 이르러 열흘 넘게 머물며 술을 마시고, 하사한 은혜가 매우 후하였으며, 그의 아들 풍세를 황문시랑으로 임명하고, 풍세의 두 동생을 모두 낭중으로 삼았다. 풍석은 양읍후 풍방의 손자이며, 아버지 풍주는 현종의 딸 획가공주와 혼인하였고, 풍석은 공주의 작위를 이어받아 획가후가 되었으며, 그는 당시 사람들을 잘 기쁘게 하였으므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서울과 스물일곱 개 군국에 수재가 발생하였다.

겨울, 11월 기축일, 서른다섯 개 군국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선비가 현도군을 침범하였다.

상서령 수범 등이 상주하여, "효문황제가 간소한 예제를 제정하였고, 광무황제가 고유제도를 폐지하였으니, 이 규정들을 후세에 남겨 참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대신들이 삼년상을 행하는 것을 다시 금지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서 진충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고조께서 천명을 받으시고 소하가 제도를 창립하여 대신들에게 고유의 조례가 있게 하였으니, 이는 슬픔을 표하는 의리에 부합합니다. 건무 초년에는 갓 큰 혼란을 겪은 뒤라 모든 국가 정무가 대부분 간소함을 따랐고, 대신들은 이미 고유할 수 없었으며, 각 부서는 오직 사익만을 경영하여 삼년상을 따라 양육의 은혜를 갚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예의에 있어 참으로 손상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대신들에게 상기를 마치도록 허락하신 것은 성스러운 덕이 이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자기 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어른에게 미루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여 남의 자식에게 미루면 천하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듯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높은 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시며, 감릉에 대한 그리움으로 신하의 마음을 헤아리신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질 것입니다." 당시 환관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결국 진충의 상주문을 묵살하였다. 경자일, 다시 이천석 이상의 관원이 삼년상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굉이 논평하기를: 고대의 제왕이 교화를 깊이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백성을 선으로 이끈 것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품을 따르고 그 감정을 빼앗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백성들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예법을 훼손하고 슬픔을 막으며 인간의 본성을 끊어버림이랴!

12월, 고구려왕 궁이 마한, 예맥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우구태를 보내 2만여 명을 이끌고 주군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 해에 궁이 죽고, 그의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현도태수 요광이 상주하여 이 상기를 틈타 출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려 하자, 의논하는 대신들은 모두 가하다고 여겼다. 진충이 말하기를, "궁이 이전에 흉악하고 교활하였으나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공격하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며, 그 틈에 이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죽이지 않음으로써, 이후에 선을 행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따랐다.

효안황제 연광 원년(임술년, 서기 122년)

봄, 3월, 병오일, 연호를 고치고 대사면하였다.

호강교위 마현이 마노를 추격하여 황중에 이르러 그를 격파하니, 그의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여름, 4월, 계미일, 서울과 스물한 개 군국에 우박이 내렸고, 서하 지역에서 가장 큰 우박은 둥근 돌만 하였다.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이 여러 차례 간악한 자들을 적발하고 고발하자, 그들을 원망하는 자들이 조서를 위조하여 풍환과 요광을 꾸짖고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칼을 내리며, 또 요동도위 방분에게 명하여 신속히 형벌을 집행하게 하였다. 방분이 즉시 요광을 죽이고 풍환을 체포하였다. 풍환이 자살하려 하자, 그의 아들 풍곤이 조서에 이상함이 있다고 의심하여 풍환을 막으며 말하기를, "대인께서 주에 계시면서 뜻은 간악함을 제거하는 데 있었을 뿐, 실로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반드시 흉악한 자들이 함부로 위조하여 간계를 펴려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일을 스스로 조정에 아뢰어 죄를 달게 받아도 늦지 않습니다." 풍환이 그의 말을 따라 스스로 변호하는 글을 올리니, 과연 위조한 자의 소행이었으며, 조정에서 방분을 불러들여 죄를 다스렸다.

계사일, 사공 진포가 면직되었다. 5월, 경술일, 종정 팽성 사람 유수가 사공이 되었다.

기사일, 하간효왕의 아들 유덕을 안평왕으로 봉하여 낙성정왕의 후사로 삼았다.

6월, 여러 군국에 메뚜기 떼가 발생하였다.

가을, 7월, 계묘일, 서울과 열세 개 군국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고구려왕 수성이 한나라의 백성을 돌려보내고 현도에 항복하였으며, 이후 예맥도 귀순하여 동부 변방의 전란이 줄어들었다.

건인강과 상군의 호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료장군 경기각이 그들을 격파하였다. 8월, 양릉의 능원 침실에 불이 났다.

9월, 갑술일, 스물일곱 개 군국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선비가 여러 차례 군수를 살해한 후 담력이 더욱 커져 수만 기병을 보유하게 되었고, 겨울, 10월, 다시 안문과 정양을 침범하였으며, 11월, 태원을 침범하였다.

소당강의 마노가 굶주림과 곤궁으로 인해 무리를 이끌고 한양태수 경충에게 항복하였다.

이 해에 서울과 스물일곱 개 군국에 수재가 발생하였다.

황제가 여러 차례 황문상시 및 중사 백영을 감릉에 왕래하게 하자, 상서복야 진충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하늘의 뜻이 아직 만족하지 않아 재해가 잇따라 발생하고, 청주와 기주 일대는 큰비로 강물이 넘치고, 서주와 태산 부근은 바닷물이 범람하며, 연주와 예주에는 메뚜기가 생기고, 형주와 양주는 벼 수확이 줄어들며, 병주와 양주 두 주는 강족과 융족이 반역하고, 여기에 백성의 생활이 부족하고 국고가 비었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효덕황의 능원 사당을 봉사하지 못하여, 잇달아 중사를 감릉에 보내어 공경을 표하시니, 붉은 수레에 짝을 이룬 말들이 길에 끊이지 않으니, 효도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듣건대 사자가 지나는 곳마다 위세와 권세가 드러나 군현을 뒤흔들고, 왕, 후, 이천석 관원이 한 사람 백영을 위해 수레 아래에 무릎 꿇고 절하며, 백성을 징발하여 도로를 수리하고 역참 관사를 정비하며, 저장을 많이 설치하고 부역을 끝없이 징발하여 늙고 약한 자들이 서로 따르며 매번 수만 명에 이르고, 하인들에게 뇌물과 선물로 바치는 것이 사람마다 수백 필의 비단이며, 사람들은 엎어지며 탄식하고 가슴을 치며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간왕은 숙부의 친족 신분으로, 청하왕은 능묘의 존귀한 지위로, 그리고 부절을 가진 대신들까지도 스스로를 낮추어 백영을 위해 수레 아래에서 몸을 굽히니, 폐하께서 이를 묻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반드시 폐하께서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고 여길 것입니다. 백영의 위세가 폐하보다 무겁고, 폐하의 권병이 신첩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수재의 발생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옛날 한언이 부거의 승여를 타고 달리며 시찰하는 명을 받들었을 때, 강도왕이 그를 천자로 잘못 알고 절을 하였고, 한언은 이로 인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바라옵건대 명군께서 천자의 존엄을 엄정히 하고 건강의 지위를 바르게 하여, 다시는 여사로 하여금 여러 정무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소서. 다시 좌우를 살펴보건대, 어찌 석현처럼 비밀을 누설하는 간인이 없겠습니까? 상서가 말을 올림에 어찌 조창이 정도를 무고한 것과 같은 속임수가 없겠습니까? 공경 대신 중에 어찌 주박이 부태후의 세력에 의탁한 것과 같은 자가 없겠습니까? 외척 근친 중에 어찌 왕봉이 왕상을 해친 음모와 같은 자가 없겠습니까? 만약 국가의 정령이 모두 황제께서 반포하시고, 조정의 큰일이 매번 스스로 결단하신다면, 아래 사람이 위를 핍박하지 못하고 신하가 군주를 간섭하지 못할 것이니, 오래 내린 큰 비와 큰 물이 반드시 그치고, 사방의 여러 재이도 해를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상주문이 올라갔으나 황제는 돌보지 않았다.

당시 삼부(三府)의 권력은 미미했고, 기밀 사무는 오로지 상서(尚書)에게 위탁되었으며, 한번 재해나 변이가 발생하면 즉시 삼공(三公)을 책망하고 파면시켰다. 진충(陳忠)이 상소하여 말했다: "한나라의 전례에 의하면, 승상이 요청한 것은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삼공은 비록 그 명칭은 있으나 실제 권력은 없으며, 선발과 천거, 주살과 상벌이 모두 상서에 의해 결정됩니다. 상서가 임용되면 그 권력이 삼공보다 무거워집니다. 국가가 쇠퇴한 이후로 이러한 추세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항상 홀로 불안했습니다. 요사이 지진 때문에 책서(策書)로 사공(司空) 진포(陳褒)를 파면했는데, 지금 또 재이가 발생하여 다시 삼공을 엄중히 책망하려 합니다. 옛날 효성황제(孝成皇帝)가 요성이 심수(心宿)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 죄를 승상에게 돌렸으나, 결국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하고 헛되이 송경공(宋景公)의 성의를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시비의 구분이 분명히 귀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상서가 일을 결단할 때 대부분 옛 전장을 어기고, 죄를 정하고 벌을 내림에 조례가 없으며, 모함과 속임을 먼저 삼아 문사가 가혹하고 말이 추하여 규정과 법도를 어깁니다. 마땅히 그들에게 본의를 탐구하고, 잘라내어 따르지 않게 하여, 위로는 국가의 전장에 순응하고 아래로는 제멋대로 위엄과 복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 방원(方圓)을 규구(規矩) 안에 두고 형석(衡石)으로 경중을 심정(審定)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국가의 전장이요, 만세의 법칙입니다!"

여남태수(汝南太守) 산양(山陽) 사람 왕공(王龔)은 정사를 시행함에 온화함을 숭상하고, 인재를 사랑하며 선비를 아꼈다. 그는 원랑(袁閬)을 공조(功曹)로 임용하고, 같은 군 사람 황헌(黃憲), 진번(陳蕃) 등을 천거했다. 황헌은 비록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진번은 관리가 되었다. 원랑은 특별한 절개를 닦지 않았으면서도 당시에 명성이 있었고, 진번은 성품과 기개가 높고 명랑하였으며, 왕공은 모두 예로 대우하였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헌의 집은 대대로 빈천하여 그의 아버지는 소의사(牛醫)였다. 영천(潁川) 사람 순숙(荀淑)이 신양(慎陽)에 이르러 여관에서 황헌을 만났는데, 당시 황헌의 나이는 열넷이었다. 순숙은 놀라서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여기고 읍하며 그와 이야기했는데,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황헌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의 스승입니다." 얼마 후 순숙이 원랑에게 갔는데, 위문도 하기 전에 맞아들이며 말했다: "그대의 고을에 안회(顏回) 같은 사람이 있는 줄 아는가?" 원랑이 말했다: "우리 숙도(叔度)를 보셨습니까?" 당시 같은 군의 대량(戴良)은 재주가 높고 교만했으나, 황헌을 볼 때는 일찍이 단정한 용모를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망연자실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또 소의사의 아들에게서 돌아왔느냐?" 대량이 대답했다: "내가 숙도를 보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그에게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으나, 그 사람을 보니 앞에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뒤에 있는 듯하여 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진번과 같은 군의 주거(周舉)는 항상 서로 말했다: "한동안 황생(黃生)을 보지 않으면, 속되고 인색한 생각이 다시 마음속에서 싹트게 됩니다." 태원(太原) 사람 곽태(郭泰)는 젊어서 여남(汝南)을 유람할 때, 먼저 원랑을 방문하여 하룻밤도 묵지 않고 떠났다. 그런 다음 황헌을 방문하여 여러 날을 묵다가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곽태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말했다: "봉고(奉高, 원랑의 자)의 그릇은 샘물과 같아서 맑기는 하지만 쉽게 퍼낼 수 있습니다. 숙도는 천 이랑의 연못과 같아서 맑게 하여도 맑아지지 않고,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아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황헌은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또 공부(公府)에 초빙되었다. 친구가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그는 거절하지도 않고 잠시 서울에 갔다가 곧 돌아와 결국 취임하지 않고 마흔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범엽(范曄)이 논평하여 말했다: 황헌의 언론과 풍채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비 군자들이 그를 본 자는 그가 식견이 원대하고 인색한 마음을 제거한 것에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대개 그의 도덕이 두루 갖추어지고 본성이 완전하여 칭송할 만한 덕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증조 목후(穆侯)는 이렇게 말했다: "황헌은 편안히 자연에 순응하고, 깊이 도(道)와 같아서, 깊고 얕음이 그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맑고 흐림이 그의 기준을 판단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공자의 문하에 갈 수 있었다면, 아마도 안회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효안황제(孝安皇帝) 연광(延光) 2년(계해년, 서기 123년)

봄, 정월에 척우이(旄牛夷)가 반란을 일으키자, 익주자사(益州刺史) 장교(張喬)가 그들을 격파했다.

여름, 4월 무자일(戊子日)에 황제의 유모 왕성(王聖)을 야왕군(野王君)으로 봉했다.

북흉노(北匈奴)가 연이어 차사(車師)와 함께 하서(河西) 지역을 침략하자, 논의하는 사람들이 다시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폐쇄하여 화근을 끊으려고 했다. 돈황태수(敦煌太守) 장당(張珰)이 글을 올려 말했다: "신이 서울에 있을 때에도 또한 서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지금 친히 이 땅에 이르러 보니 서역을 포기하면 하서 지역이 스스로 보존될 수 없음을 알겠습니다. 삼가 서역에 관한 세 가지 책략을 진술하옵니다. 북로(北虜) 호연왕(呼衍王)은 항상 포류해(蒲類海)와 진해(秦海) 사이를 전전하며 서역을 전제하고 함께 약탈을 자행합니다. 지금 주천속국(酒泉屬國)의 관리와 병사 2천여 명을 곤륜새(昆侖塞)에 집결시켜 먼저 호연왕을 공격하여 그의 근본을 끊고, 그런 다음 선선(鄯善) 병사 5천 명을 징발하여 차사후부(車師後部)를 협박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약 출병할 수 없다면, 군사마(軍司馬)를 설치하여 장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사군(四郡)이 그들에게 이우(犁牛)와 곡식 양식을 공급하여 유중(柳中)을 점거하고 출병하는 것이 중책입니다.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교하성(交河城)을 버리고 선선 등 여러 나라의 백성들을 모아 모두 변새(邊塞) 안으로 들이는 것이 하책입니다."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아래에 내려 의논하게 했다. 진충이 상소하여 말했다: "서역이 내지에 귀부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여러 번 간절히 동쪽을 바라보고 변관을 두드렸으니, 이는 그들이 흉노를 좋아하지 않고 한(漢)을 사모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북로가 이미 차사를 격파하였으니, 형세상 남쪽으로 선선을 공격할 것입니다. 만약 버리고 구원하지 않는다면, 여러 나라들이 흉노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적의 재물은 더욱 많아지고, 담력과 기세는 더욱 커져서, 위세로 남강(南羌)을 핍박하고 그들과 결탁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하서 사군이 위태로워집니다. 하서가 이미 위태로우면 구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백 배의 노역이 일어나고 헤아릴 수 없는 비용이 징발될 것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다만 서역이 지극히 멀고, 그것을 돌보면 번거롭고 소모된다는 것만 생각할 뿐,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서역을 경영한 고심과 의도를 보지 못합니다. 지금 돈황이 고립되어 위급하여 먼 곳에서 급보를 전해옵니다. 만약 다시 돕지 않는다면, 안으로는 관리와 백성을 위로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여러 족속과 오랑캐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하며, 국토를 줄이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건대 돈황에 교위(校尉)를 설치하고, 구례에 따라 사군의 둔병을 늘려서 서역 여러 나라를 위무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채택하여, 이에 반드시 반용(班勇)을 서역장사(西域長史)로 임명하고,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유중에 둔전하게 했다.

가을, 7월에 단양(丹楊)에서 산이 무너졌다.

9월에 다섯 군국(郡國)에 수재가 발생했다.

겨울 10월 신미일(辛未日), 태위(太尉) 유개(劉愷)가 면직되었다. 갑술일(甲戌日)에 사도(司徒) 양진(楊震)을 태위로, 광록훈(光祿勳) 동래(東萊) 사람 유희(劉熹)를 사도로 임명했다. 대홍려(大鴻臚) 경보(耿寶)가 직접 양진을 찾아가 중상시(中常侍) 이윤(李閏)의 형을 추천하며 말했다. “이 상시(李常侍)는 조정이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대가 그의 형을 불러 쓰길 바라며, 저는 단지 황상의 뜻을 전할 뿐입니다.” 양진이 말했다. “조정이 삼부(三府)로 하여금 불러 쓰게 하려면 본래 상서(尚書)의 칙명이 있어야 합니다.” 경보는 매우 원망하며 떠나갔다. 집금오(執金吾) 염현(閻顯)도 양진에게 자신의 측근을 추천했으나 양진은 또 따르지 않았다. 사공(司空) 유수(劉授)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이로부터 양진은 더욱 미움을 받았다. 당시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자를 보내 왕성(王聖)을 위해 대규모로 저택을 짓게 했다. 중상시 번풍(樊豐)과 시중(侍中) 주광(周廣)·사돈(謝惇) 등이 서로 선동하며 조정을 흔들었다. 양진이 상소하여 말했다. “신은 은밀히 생각하건대 지금 재해가 더욱 심해지고 백성은 공허하며, 삼변(三邊) 지역이 놀라고 불안해하며 국고는 부족하니, 이는 나라가 편안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조서로 아모(阿母, 왕성)를 위해 저택을 세우되 두 곳을 합쳐 한 곳으로 하고, 이와 마을을 잇고 길을 가로지르며 조각하고 장식하여 교묘한 기예를 다하고, 산을 깨고 돌을 캐며 번갈아 재촉하여 소비된 돈이 억(億) 단위에 이릅니다. 주광과 사돈 형제는 나라와 폐부나 가지 같은 친족 관계도 없이, 황제 곁의 간사한 소인들에게 의지하여 그들과 위세를 나누고 권력을 함께하며, 주와 군의 관리에게 부탁하여 대신들을 흔듭니다. 재보(宰輔) 부서에서 관리를 부를 때 그들의 뜻에 영합하여, 천하의 탐관오리를 불러들여 그들의 뇌물을 받아, 심지어 탐욕으로 인해 종신토록 금고(禁錮)되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다시 높은 자리를 얻게 되니, 흑백이 혼란되고 청탁이 같은 근원이 되어, 천하가 시끄럽게 논의하며 조정에 비난을 초래합니다. 신은 스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취함에 한도가 없으면 재물이 다하면 백성이 원망하고, 백성의 힘이 다하면 백성이 배반하며, 원망하고 배반하는 사람은 다시 부릴 수 없으니, 폐하께서 이 일을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선비(鮮卑)의 추장 기지건(其至鞬)이 직접 1만여 기병을 이끌고 만백(曼柏)에서 남흉노(南匈奴)를 공격하여,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이 전사하고 1천여 명이 죽었다.

12월 무진일(戊辰日)에 경성과 세 개의 군국(郡國)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진충(陳忠)이 여남(汝南) 사람 주섭(周燮)과 남양(南陽) 사람 풍량(馮良)의 학문과 품행이 깊고 순수하며,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아 명성이 당세에 중하다고 추천했다. 황제가 검고 붉은 비단과 어린 양 가죽과 폐백 등의 예물로 그들을 초빙했다. 주섭의 종족 사람들이 그를 권하며 말했다. “수양과 덕을 닦고 지조를 갈고 닦는 것은 나라를 위해 힘쓰기 위한 것이니, 그대는 어찌하여 홀로 동강(東岡)의 언덕을 지키려 하는가?” 주섭이 말했다. “수덕(修德)하는 사람은 시기를 헤아려 행동하나니, 행동해도 때에 맞지 않으면 어찌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와 풍량은 모두 스스로 수레를 타고 가까운 현(縣)에 이르러,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효안황제(孝安皇帝) 3년(갑자, 서기 124년)

봄 정월에 반용(班勇)이 누란(樓蘭)에 도착하여, 선선(鄯善)이 귀부했기 때문에 특별히 삼수(三綬, 세 가지 인수)를 더해 하사했으나, 구자왕(龜茲王) 백영(白英)은 여전히 망설이며 귀부하지 않았다. 반용이 은덕과 신의로 그를 깨우치자, 백영이 마침내 고묵(姑墨)과 온숙(溫宿)을 이끌고 스스로 결박하여 반용을 찾아왔다. 반용이 이에 그들의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징발하여 차사전왕정(車師前王庭)으로 가서, 이화곡(伊和谷)에서 흉노(匈奴)의 이리왕(伊蠡王)을 쫓아내고 전부(前部) 5천여 명을 수용하여, 이에 전부가 비로소 다시 통하게 되었다. 반용이 돌아와 유중(柳中)에서 둔전(屯田)을 실시했다.

2월 병자일(丙子日)에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했다. 신묘일(辛卯日)에 태산(泰山)에 도착했다. 3월 무술일(戊戌日)에 노(魯) 땅에 도착하여, 돌아오는 길에 동평(東平)에 이르고, 동군(東郡)에 이르러, 위군(魏郡)과 하내(河內)를 지나 돌아왔다.

처음에 번풍(樊豐)·주광(周廣)·사돈(謝惇) 등은 양진이 계속 간언해도 황제가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거리낄 것이 없어, 이에 위조 조서를 만들어 사농(司農)의 전곡(錢穀)과 대장(大匠)의 현역 도례(徒隸)와 목재를 징발하여, 각자 사저(私邸)·원지(園池)·여관(廬觀)을 세우며 부리고 소비함이 무수했다. 양진이 또 상소하여 말했다. “신이 충원되어 대보(臺輔,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음양을 조화시키지 못하여, 지난해 12월 4일에 경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날이 무진일(戊辰日)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12월, 4일, 무진)는 모두 토(土)와 관련되며, 위치가 중궁(中宮)이니, 이는 궁중의 가까운 신하와 근시(近侍) 관원이 권력을 잡고 정사를 쥐고 있는 징조입니다. 신은 은밀히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변경이 편안하지 않음을 이유로 스스로 검소하게 지내며, 궁전의 담장과 집이 기울어져도 단지 기둥으로 지탱할 뿐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총신들은 단금(斷金, 마음을 합함)의 의리를 숭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법도를 넘어, 여러 차례 도례를 징발할 것을 청하며 대규모로 저택을 세우고, 위세와 복을 팔아 길 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니, 지진의 변고는 아마도 이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또 겨울에 눈이 쌓이지 않고, 봄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아, 백관이 근심하며 걱정하는데도 수선 공사가 멈추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가뭄을 부르는 징조입니다. 폐하께서 굳센 결단의 강한 덕을 떨치시어, 교만하고 사치한 신하를 물리쳐서, 황천의 경고를 받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양진이 전후로 말한 것이 점점 절박해지자, 황제는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었고, 번풍 등도 모두 눈을 흘기며 분노하고 원망했으나, 양진이 명유(名儒)였기 때문에 감히 해치지 못했다. 마침 하간(河間)의 남자 조등(趙騰)이 상서하여 조정의 득실을 지적하자, 황제가 노하여 그를 체포하여 조옥(詔獄)에 가두고 심문하여, 기망군상대역부도(欺罔君上大逆不道)의 죄로 정했다. 양진이 상소하여 그를 구하며 말했다. “신은 은(殷)과 주(周)의 성명한 군주가 소인의 원망과 비방을 듣고 도리어 자신의 덕행 수양을 강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조등이 범한 죄는 격렬히 비판하고 헐뜯는 말일 뿐, 직접 사람을 죽인 범법과는 다릅니다. 그를 위해 형을 감해 주어 조등의 목숨을 온전히 하여, 평민과 초동(樵童)들이 말을 하도록 장려해 주시길 청합니다.” 황제가 듣지 않았고, 조등은 결국 시장에서 처형되었다.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할 즈음, 번풍 등은 황제가 밖에 있음을 이유로 다투어 저택을 세웠다. 태위부연(太尉部掾) 고서(高舒)가 대장령사(大匠令史)를 불러 핵심을 조사하여, 번풍 등이 위조한 조서를 얻어내어 상세히 주주(奏奏)하여,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올리려 하자, 번풍 등이 매우 두려워했다. 마침 태사(太史)가 별자리에 변고가 있어 역행(逆行)이 나타난다고 하자, 함께 양진을 무고하며 말했다. “조등이 죽은 후로 양진이 깊이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등씨(鄧氏, 등즐)의 옛 부하로서,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임술일(壬戌日)에 황제의 수레가 경성에 돌아와 태학(大學)에서 잠시 쉬다가, 그날 밤 사자를 보내 부절(符節)을 거두어 양진의 태위 인수를 빼앗았다. 양진이 이에 문을 닫고 빈객을 사절했다. 번풍 등이 또 그를 미워하여, 대홍려 경보로 하여금 상주하게 했다. “양진은 대신으로서 죄를 복종하지 않고,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를 본군(本郡)으로 쫓아보냈다. 양진이 성 서쪽의 기양정(幾陽亭)에 이르러, 그의 아들들과 문생들에게 감개하여 말했다. “죽음은 선비의 떳떳한 분수이다. 나는 황은을 입어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간신들이 교활함을 통탄하면서도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총애하는 첩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금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해와 달을 보겠는가! 내가 죽으면, 잡목으로 관을 만들고 베 홑이불로, 몸을 가릴 정도로만 하고, 집안 묘지로 보내지 말며, 제사를 지내지도 말라!” 이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홍농태수(弘農太守) 이량(移良)이 번풍 등의 뜻을 받들어, 관리들을 보내 섬현(陝縣)에서 양진의 영구(靈柩)를 저지하여, 관을 길가에 노출시키고, 양진의 아들들에게 역졸(驛卒)을 대신해 편지를 보내게 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태복(太僕) 정강후(征羌侯) 내력(來歷)이 말했다. “경보는 대구(大舅, 황제의 외삼촌)의 친족 관계를 이용하여 영광과 총애가 지나치게 후한데, 나라의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간신에게 붙어 충량을 해치니, 그의 하늘이 내리는 재앙도 곧 닥칠 것이다.” 내력은 내흡(來歙)의 증손자이다.

여름 4월 을축일(乙丑日)에 황제의 수레가 황궁으로 들어갔다.

무진일(戊辰日)에 광록훈(光祿勳) 풍석(馮石)을 태위로 임명했다.

남단우(南單于) 선(檀)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발(拔)이 즉위하여 오계후시축제단우(烏稽侯尸逐鞮單于)라 불렀다. 당시 선비(鮮卑)가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하자, 도료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와 온우독왕(溫禺犢王) 호유휘(呼尤徽)가 새로 귀순한 무리를 이끌고 여러 해 연속으로 새외(塞外)로 나가 선비를 공격하였고, 돌아온 후에는 그들을 요해지(要害之地)에 주둔시켰다. 경기가 징발과 파견을 자주 하자, 새로 귀순한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여, 대인(大人) 아족(阿族) 등이 이에 반란을 일으켜 호유휘를 협박하여 함께 가자고 하였다. 호유휘가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나 한(漢)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희를 따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무리가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아족 등은 이에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떠났다. 중랑장(中郎將) 마익(馬翼)이 호인(胡人) 기병과 함께 추격하여 격파하였고, 참수하고 사로잡은 자가 거의 전부였다.

일남군(日南郡) 경계 밖의 만이(蠻夷)가 내지(內地)에 귀부하였다.

6월, 선비가 현토군(玄菟郡)을 침범하였다.

경오일(庚午日), 낭중(閬中)에서 산이 무너졌다.

가을 8월 신사일(辛巳日), 대홍려(大鴻臚) 경보(耿寶)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왕성(王聖), 강경(江京), 번풍(樊豐) 등이 태자(太子) 유보(劉保)의 유모(乳母) 왕남(王男), 주감(廚監) 병길(邴吉) 등을 무함하여 그들을 죽였고, 가족은 비경(比景)으로 유배되었다. 태자는 왕남과 병길을 생각하여 여러 번 이를 탄식하였다. 강경과 번풍은 훗날 화근이 남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염황후(閻皇后)와 함께 허위를 조작하고 무고를 꾸며 태자와 동궁(東宮)의 관원들을 모함하였다. 한안제(漢安帝)가 크게 노하여, 공경(公卿) 이하의 관원들을 소집하여 태자를 폐할 것을 의논하였다. 경보 등이 황제의 뜻에 영합하여 모두 폐해야 한다고 여겼다. 태복(太僕) 내력(來歷)이 태상(太常) 환언(桓焉), 정위(廷尉) 건위인(犍爲人) 장호(張皓)와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경서에 이르기를, 나이가 15세가 되지 않았으면 과실과 악행을 그가 스스로 감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왕남과 병길의 음모에 대해 황태자가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충성되고 어진 보사(保傅)를 가려 예의로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태자를 폐하고 세우는 것은 큰일이니, 이는 진실로 성은(聖恩)으로 삼가 헤아리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한안제가 듣지 않았다. 환언은 환욱(桓郁)의 아들이다. 장호는 물러난 후에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옛날 간신 강충(江充)이 무고와 반역을 꾸며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를 전복시켰으나,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오랜 후에야 깨달았으나 비록 지난 잘못을 뉘우쳤지만 후회해도 어찌 미치겠습니까! 지금 황태자는 겨우 열 살로, 아직 보사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는데, 어찌 곧바로 그를 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소문이 올라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월 정유일(丁酉日), 황태자 유보를 폐하여 제음왕(濟陰王)으로 삼고, 덕양전(德陽殿) 서쪽 종루(鐘樓) 아래에 거처하게 하였다. 이에 내력이 광록훈(光祿勳) 대풍(祋諷), 종정(宗正) 유위(劉瑋), 장작대장(將作大匠) 설호(薛皓), 시중(侍中) 여구홍(閭丘弘), 진광(陳光), 조대(趙代), 시연(施延), 태중대부(太中大夫) 구강인(九江人) 주창(朱倀) 등 10여 명과 함께 연명으로 홍도문(鴻都門)에 나아가 태자를 위해 변호하며 그가 죄가 없다고 하였다.

한안제와 측근 신하들이 이를 근심하여, 이에 중상시(中常侍)를 보내 조서를 받들어 여러 신하들에게 위협하며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한 몸으로, 천성(天性)은 자연이다. 대의(大義)에 따라 사사로운 은혜를 끊는 것은 천하를 위함이다. 내력, 대풍 등은 국가의 대전(大典)을 알지 못하고, 한 무리의 소인(小人)들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며, 겉으로는 충직한 듯하나 속으로는 훗날의 복을 바라고, 사설(邪說)을 감추고 도의(道義)를 어기니, 이것이 어찌 군주를 섬기는 예절이겠는가! 조정은 간언하는 길을 넓게 열었으므로 잠시 너희를 용서하나, 만약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마땅히 공개적으로 형벌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간언한 자들은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설호가 먼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히 밝은 조서를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력이 분개하여 얼굴빛이 변하며 당장에 설호를 꾸짖어 말하기를 “아까 함께 간언할 때 무슨 말을 하였기에, 지금 와서 다시 번복하는가? 대신이 조정의 수레를 타고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는데, 어찌 이와 같이 무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각자 천천히 일어나 물러갔다. 오직 내력만이 홀로 궁궐 앞에 지키며 여러 날 떠나지 않았다. 한안제가 노하지 않았으나, 상서령(尚書令) 진충(陳忠)과 여러 상서(尚書)들이 함께 상주하여 내력 등을 탄핵하였고, 한안제는 이에 내력 형제의 관직을 면하고, 봉국(封國)의 조세를 삭감하였으며, 내력의 어머니 무안공주(武安公主)를 폐하여 궁에 들어와 알현하지 못하게 하였다.

농서군(隴西郡)이 비로소 적도(狄道)로 옮겨졌다.

소당강(燒當羌)의 추장 마노(麻奴)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서고(犀苦)가 뒤를 이었다.

경신일(庚申日), 그믐 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안제가 행차하여 장안(長安)에 순행하였다. 11월 을축일(乙丑日),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이 해에 서울과 여러 군국(郡國)에서 23번의 지진이 있었고, 36곳에서 큰물과 우박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