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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 오십이

제 52 편

자치통감 제060권

【한기오십이】 기광화협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양작액에 이르기까지, 모두 3년이다.

효헌황제 을 초평 2년(신미, 서기 191년)

봄 정월 신축일, 대사면을 행하였다.

관동의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정의 황제가 나이가 어리고 동탁에게 핍박받고 있으며, 또 관새(關塞)가 멀리 떨어져 있어 황제가 아직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유주목 유우(劉虞)가 종실 중에서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므로 함께 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자고 하였다. 조조가 말하였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원근에서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은 정의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어린 임금은 미약하고 간신에게 제압당하고 있을 뿐, 창읍왕(昌邑王)과 같이 나라를 망하게 한 죄는 없는데, 한 번에 황제를 바꾸자고 하면 천하가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그대들은 북쪽으로 향하시오, 나는 홀몸으로 서쪽으로 향하겠소." 한복과 원소가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황제는 효령제의 아들이 아닙니다. 옛날 강후 주발과 관영이 소주(少主)를 주살하고 폐하며 대왕(代王)을 맞이한 고사를 본받아 대사마 유우를 황제로 받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술은 마음에 신하로서의 도리를 품지 않아, 국가에 나이 많은 군주가 있으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겉으로는 공의를 빙자하여 그들을 거절하였다. 원소가 다시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서쪽에는 명목상 어린 임금이 있지만 혈연 관계가 없고, 삼공 이하가 모두 동탁에게 아첨하고 섬기니 어찌 다시 그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병사를 보내 관애(關隘) 요지에 주둔시키면 그들은 스스로 곤궁해져 죽을 것입니다. 동쪽에서 성명(聖明)한 군주를 옹립하면 태평성대를 기대할 수 있으니,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대의 온 집안이 살해되었으니, 어찌 오자서(伍子胥)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북쪽을 향해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성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주성왕(周成王)과 같은 자질을 지니셨소. 적신 동탁이 국가의 위란을 틈타 위세로 백관을 굴복시킨 것은 한나라의 작은 재앙에 불과할 뿐인데, 그대가 감히 지금의 황제를 일러 '혈연 관계가 없다'고 하니, 이 어찌 무함이 아니겠소! 또 '온 집안이 살해되었으니 다시 북쪽을 향해 신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는데, 이는 동탁이 저지른 일이지 어찌 국가의 뜻이겠소! 나는 한 조각 적성(赤誠)으로 뜻을 오직 동탁을 소멸하는 데 두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알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한복과 원소는 마침내 전 낙랑태수 장기(張岐) 등을 보내 그들의 의안을 가지고 가서 유우에게 올리며 존호를 받들었다. 유우가 장기 등을 보고 엄한 목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분열되고 주상께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내가 조정의 큰 은혜를 입고도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고 있소. 그대들은 각기 주와 군을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왕실에 충성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역모를 꾸며 나를 더럽히려 하느냐!" 하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한복 등이 다시 유우에게 상서사(尚書事)를 겸하게 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관작을 봉하고 벼슬을 내리게 청하였으나, 유우가 또 따르지 않고 흉노로 도망가 그들의 뜻을 끊으려 하자, 원소 등이 비로소 그만두었다.

2월 정축일, 동탁을 태사(太師)로 임명하고 지위를 제후왕 위에 두었다.

손견이 군사를 옮겨 양현(梁縣) 동쪽에 주둔하였다가 동탁의 부장 서영(徐榮)에게 패배하고, 다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양인(陽人)으로 들어갔다. 동탁이 동군태수 호진(胡軫)을 보내 보병과 기병 오천 명을 이끌고 그를 공격하게 하고, 여포를 기병 도독(騎兵督)으로 삼았다. 호진과 여포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자, 손견이 병사를 내어 반격하여 호진을 크게 무찌르고 그의 도독 화웅(華雄)을 참수하였다. 어떤 사람이 원술에게 말하기를: "손견이 만약 낙양을 함락시키면 다시는 그를 제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이리를 제거하고 호랑이를 얻는 격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술이 의심하여 군량을 보내지 않았다. 손견이 밤에 말을 타고 원술을 만나러 가서 땅에 그림을 그으며 분석하여 말하기를: "제가 몸을 돌보지 않고 나선 것은 위로는 국가를 위해 역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을 위해 집안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동탁 사이에는 골육의 원한이 없는데, 장군께서 참언을 듣고 도리어 저를 의심하시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원술이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즉시 군량을 조달하여 보냈다.

손견이 주둔지로 돌아가자, 동탁이 장군 이각(李傕)을 보내 손견을 설득하며, 그와 혼인을 맺고자 하여 손견으로 하여금 자사나 군수가 될 만한 자제들의 명단을 적어 내게 하면 표를 올려 임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손견이 말하기: "동탁은 하늘을 거스르고 도리가 없도다. 지금 너의 삼족을 멸하고 네 목을 베어 사해에 효시하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거늘, 어찌 감히 너와 화친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대곡(大谷)에 이르니 낙양에서 구십 리 떨어진 곳이었다. 동탁이 친히 출전하여 손견과 여러 황릉(皇陵) 사이에서 교전하였다. 동탁이 패주하여 면지(澠池)로 퇴각하고, 섬현(陝縣)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손견이 낙양으로 진군하여 여포를 공격하고, 또 그를 격파하여 쫓아냈다. 손견이 이에 종묘를 청소하고 태뢰(太牢)의 예로 제사를 지냈으며, 성남 진궁정(甄宮井)에서 전새(傳璽)를 얻었다. 또 병력을 나누어 신안(新安)과 면지 사이에서 동탁을 요격하였다.

동탁이 장사(長史) 유애(劉艾)에게 말하기를: "관동군이 여러 번 패배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별다른 성과가 없다. 오직 손견만이 조금 경솔하지만 사람을 잘 쓸 줄 아니, 마땅히 제장들에게 알려 그를 조심하여 경계하게 하라. 내가 옛날 주신(周慎)과 함께 서쪽으로 가서 금성(金城)에서 변장(邊章)과 한수(韓遂)를 정벌할 때, 내가 장온(張溫)에게 청하여 내가 거느린 부대를 이끌고 주신의 후원이 되겠다고 하였으나 장온이 듣지 않았다. 장온이 또 나를 시켜 선령(先零) 반강(叛羌)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나는 이길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만둘 수 없어 출발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 보병과 기병 사천 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시켜 성원이 되게 하였다. 반강이 귀로를 끊으려 하자 내가 조금 공격하니 그들이 물러났는데, 이는 안정에 병력이 있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적들은 안정에 수만 명의 병력이 있는 줄 알았지, 오직 유정만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손견이 주신을 따라 행동하면서 주신에게 먼저 일만 명을 이끌고 금성으로 바로 쳐들어가고 주신이 이만 명을 거느리고 후원하자고 청하였다. 변장과 한수는 주신의 대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손견과 쉽게 교전하지 못했고, 손견의 병력은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끊기에 충분했다. 그 자식이 그 계책을 채택했다면 양주(涼州)는 아마 평정되었을 것이다. 장온이 나를 쓰지 못했고, 주신이 손견을 쓰지 못하여 결국 패주하고 말았다. 손견은 좌군사마(佐軍司馬)로서 식견이 대체로 보통 사람과 같아 본래 그런 대로 괜찮지만, 까닭 없이 원씨(袁氏) 집안의 그 자식들을 따르니 결국에는 죽을 길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동중랑장(東中郎將) 동월(董越)을 면지에 주둔시키고, 중랑장 단외(段煨)를 화음(華陰)에 주둔시키고, 중랑장 우보(牛輔)를 안읍(安邑)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제장들은 각 현에 나누어 주둔시켜 산동(山東) 연합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우보는 동탁의 사위였다. 동탁이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손견이 여러 황릉을 수리하고 군사를 이끌고 노양(魯陽)으로 돌아갔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에 도착하자, 삼공과 경(卿)들이 모두 수레에서 내려 수레 앞에 나아가 알현하고 절하였다. 동탁이 손뼉을 치며 어사중승(御史中丞) 황보숭(皇甫嵩)에게 말하기를: "의진(義真)아, 두렵느냐?"라고 하였다. 황보숭이 말하기를: "명공(明公)께서 덕행으로 조정을 보좌하시니 큰 복이 곧 올 터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만약 형벌을 남용하여 위세를 부리신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저 황보숭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탁의 당여들이 동탁을 태공(太公)에 견주어 숭상하고자 하여 그를 상보(尚父)라 부르려 하였다. 동탁이 이 일로 채옹(蔡邕)에게 묻자, 채옹이 말하기를: "명공의 위덕은 참으로 높고 크지만, 태공에 견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관동이 평정되고 황제의 수레가 옛 서울로 돌아온 뒤에 이 일을 의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동탁이 비로소 그만두었다. 동탁이 사례교위(司隸校尉) 유기(劉器)를 시켜 관리 백성 중에서 자식으로서 효도하지 않고, 신하로서 충성하지 않고, 관리로서 청렴하지 않고, 동생으로서 공손하지 않은 자들을 등록하게 하여, 모두 일률적으로 사형에 처하고 재물은 관청에 몰수하게 하였다. 이에 서로 무고하고 연루시켜 원통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백성들이 시끄럽고 불안하여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만 의사소통할 지경이었다.

6월 병술일, 지진이 일어났다.

가을 7월, 사공 종불(種拂)이 파면되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제남(濟南) 사람 순우가(淳于嘉)를 사공으로 임명하고, 태위 조겸(趙謙)이 파면되었다. 태상(太常) 마일제(馬日磾)를 태위로 임명하였다.

당시 하진(何进)은 운중(雲中) 사람 장양(張楊)을 보내 병주(并州)로 돌아가 군사를 모집하게 했는데, 마침 하진이 실패하자 장양은 상당(上黨)에 머물며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원소(袁紹)가 하내(河內)에 있을 때 장양이 그에게 가서 귀부하였고, 남선우(南單于) 우부라(于扶羅)와 함께 장수(漳水)에 주둔하였다. 한복(韓馥)은 호걸들이 대부분 원소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꺼려하여, 은밀히 그의 군량 보급을 줄여 부하들을 흩어지게 하려 했다. 마침 한복의 부장 곡의(曲義)가 반란을 일으켜 한복이 그와 싸워 패하자, 원소는 이에 곡의와 교류하게 되었다.

원소의 빈객 봉기(逢紀)가 원소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큰 일을 일으키면서도 남의 도움과 지원에 의존하시니, 한 주(州)를 차지하지 않으시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습니다.” 원소가 말했다: “기주(冀州)는 병사가 강하고, 내 장수와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어, 만약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봉기가 말했다: “한복은 평범한 재주일 뿐이니, 비밀리에 공손찬(公孫瓚)과 약속하여 그로 하여금 기주를 공격하게 하면 한복은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변설에 능한 사람을 보내 화와 복을 설명하게 하면, 한복은 갑작스러운 압박 속에서 반드시 자리를 양보할 것입니다.” 원소가 옳게 여겨 곧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냈다. 공손찬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겉으로는 동탁(董卓)을 토벌한다고 핑계대고 속으로는 한복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한복이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마침 동탁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자, 원소는 군사를 연진(延津)으로 돌려, 조카 진류(陳留) 사람 고간(高干)과 한복의 측근 영천(潁川) 사람 신평(辛評), 심심(荀諶), 곽도(郭圖) 등을 보내 한복을 설득하게 했다: “공손찬이 연(燕)과 대(代) 지역의 병졸을 이끌고 승세를 타고 남하하는데, 각 군이 다 호응하여 그 예봉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거기장군(袁車騎將軍)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오니, 그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희가私下으로 장군을 위해 걱정합니다!” 한복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심심이 말했다: “장군께서 스스로 헤아려 보소서, 너그럽고 인자하며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천하의 귀의를 받는 점에서 원씨(袁氏)와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한복이 말했다: “不如(같지 않다).” 심심이 또 물었다: “위난에 임해 과단성 있게 결정하고 지혜와 용기가 남보다 뛰어난 점에서는 원씨와 비교하면 또 어떠합니까?” 한복이 말했다: “不如(같지 않다).” 심심이 말했다: “원씨는 당대의 호걸입니다. 장군께서 세 가지 부족한 형세로 오랫동안 그 위에 군림하시니, 그는 반드시 장군 아래에 있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주는 천하의 중요한 자원입니다. 그가 만약 공손찬과 힘을 합쳐 공격해 온다면, 멸망이 바로 닥칠 것입니다. 원씨는 장군의 오랜 친구이자 동맹이기도 합니다. 지금 계책으로 기주를 원씨에게 넘겨준다면, 그는 반드시 장군께 은혜를 느껴 보답할 것이고, 공손찬도 그와 다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장군께는 현명함을 양보한 아름다운 명성이 있고, 자신은 태산처럼 안전할 것입니다.” 한복은 성격이 나약하여 마침내 그 계책을 따랐다.

한복의 장사(長史) 경무(耿武), 별가(別駕) 민순(閔純), 치중(治中) 이력(李歷)이 이를 듣고 간언했다: “기주에는 갑옷 입은 병사가 백만 명이고, 식량은 십 년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원소는 외로운 손님처럼 군세가 빈약하여 저희의 숨결에 의지하고 있으니, 마치 젖먹이가 무릎과 손바닥 위에 있는 것과 같아, 그 젖을 끊으면 곧 굶어 죽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주군(州郡)을 그에게 넘겨줍니까!” 한복이 말했다: “나는 원씨의 옛 부하였고, 재주도 원본초(袁本初)만 못하니, 덕을 헤아려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바이다. 너희들은 어찌 꾸짖는가!” 이보다 앞서 한복의 종사(從事) 조부(趙浮), 정환(程渙)이 일만 명의 강노(強弩) 병사를 이끌고 맹진(孟津)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급히 돌려 돌아왔다. 당시 원소는 조가(朝歌)의 청수(清水)에 있었는데, 조부 등이 뒤에서 쫓아와 수백 척의 배와 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군장을 정비하고 북을 치며 소리 지르며 밤에 원소의 군영을 지나가니, 원소가 매우 싫어했다. 조부 등이 도착하여 한복에게 말했다: “원본초 군중에는 식량이 없어 무리가 이미 흩어졌고, 비록 장양과 우부라가 새로 귀부했으나 반드시 그를 위해 쓰이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를 당해내기에 부족합니다. 소종사(小從事) 등이 청컨대 현재의 군사로 그를 막아내겠습니다. 열흘 안에 반드시 토사구팔될 것입니다. 명장군께서는 부디 문을 열고 편안히 누워 계시면 되니,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십니까!” 한복이 또 따르지 않고, 마침내 자리를 내주고 관청을 나와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의 옛집에 거처하며, 아들을 보내 인수(印綬)를 원소에게 넘겼다. 원소가 막 도착하려 할 때, 종사 열 명이 다투어 한복을 떠나 도망갔고, 오직 경무와 민순만이 칼을 잡고 저항했으나 막지 못해 그만두었고, 원소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

원소가 이어 기주목(冀州牧)을 겸임하고, 황제의 명의로 한복을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임명했으나, 병사도 주지 않고 관속도 주지 않았다. 원소는 광평(廣平) 사람 저수(沮授)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임명하여 모든 장수를 감독하고 통솔하게 하며, 그를 매우 총애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위군(魏郡) 사람 심배(審配), 거록(巨鹿) 사람 전풍(田豐)은 모두 강직함 때문에 한복 밑에서 뜻을 얻지 못했는데, 원소는 전풍을 별가(別駕)로, 심배를 치중(治中)으로 임명하고, 남양(南陽) 사람 허유(許攸), 봉기(逢紀), 영천(潁川) 사람 심심(荀諶) 등이 모두 원소의 주요 모사가 되었다. 원소는 하내(河內) 사람 주한(朱漢)을 도관종사(都官從事)로 임명했다. 주한은 이전에 한복에게 업신여김과 무례를 당한 적이 있었고, 또 원소의 마음에 들려고 하여,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켜 한복의 집을 포위하고 칼을 빼들고 지붕에 올랐다. 한복은 누각으로 도망쳤고, 주한은 한복의 큰아들을 잡아 목도리로 그의 두 다리를 부러뜨렸다. 원소가 즉시 주한을 체포하여 죽였다. 한복은 여전히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원소에게 떠나기를 청하고, 가서 장막(張邈)에게 의탁했다. 후에 원소가 사자를 장막에게 보내 일을 의논하며 장막과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한복이 그때 자리에 있다가 이것이 자신을 해하려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글자를 다듬는 칼로 자살했다.

포신(鮑信)이 조조(曹操)에게 말했다: “원소는 맹주(盟主)로서 권력을 이용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니, 스스로 화란을 일으킬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동탁입니다. 만약 그를 억누르려 해도 우리 힘이 부족하여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잠시 하수(河水) 이남 지역을 경영하며 그의 변고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조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마침 흑산(黑山),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 등 십여만 명이 동군(東郡)을 침략하자, 왕굉(王肱)이 막아내지 못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원소가 이에 표를 올려 조조를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추천하고, 치소를 동무양(東武陽)에 두게 했다.

남선우(南單于)가 장양을 협박하여 원소를 배반하고 여양(黎陽)에 주둔했다. 동탁이 장양을 건의장군(建義將軍)과 하내태수(河内太守)로 임명했다.

태사(太史)가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마땅히 대신이 사형당할 징조가 있다고 말했다. 동탁이 사람을 시켜 위위(衛尉) 장온(張溫)이 원술(袁術)과 결탁했다고 무고하게 했다. 겨울 10월 임술일(壬戌日)에, 저자에서 장溫을 채찍으로 때려 죽여 천문의 징조에 응하게 했다.

청주(青州)의 황건적(黃巾軍)이 발해군(勃海郡)을 침범했는데, 무리가 30만 명이었고 흑산군과 합류하려 했다.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맞아, 동광현(東光縣) 남쪽에서 황건적을 크게 격파하여 3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황건적은 그들의 군수 물자를 버리고 달려 강을 건너려 했다. 공손찬이 그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를 틈타 가까이 가서 공격하자, 황건적이 다시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고,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으며, 7만여 명을 사로잡았고, 수레, 갑옷, 재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공손찬의 위명이 크게 떨쳤다.

유우(劉虞)의 아들 유화(劉和)가 시중(侍中)으로 있었는데, 황제가 낙양(洛陽)으로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유화를 보내 동탁을 속여 도망치게 하고, 비밀히 무관(武關) 밖으로 나가 유우에게 가서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게 했다. 유화가 남양(南陽)에 도착했을 때, 원술이 유우를 후원자로 이용하려 하여 유화를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고, 군사가 도착하면 함께 서쪽으로 가겠다고 약속하며 유화로 하여금 유우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유우가 편지를 받고 수천 기병을 보내 유화에게 가게 했다. 공손찬은 원술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 유우에게 말렸으나 유우는 듣지 않았다. 공손찬은 원술이 듣고 자신을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또한 그의 종제 공손월(公孫越)을 시켜 천 기병을 이끌고 원술에게 가게 했다. 또 은밀히 원술을 꾀어 유화를 붙잡아 그의 군대를 합병하게 하니, 이로부터 유우와 공손찬 사이에 틈이 생겼다. 유화가 원술에게서 도망쳐 북쪽으로 갔으나, 또 원소에게 붙잡혔다.

이때 관동(關東)의 주와 군들은 모두 서로를 병합하여 세력을 키우는 데 힘썼고,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또한 서로 등을 돌렸다. 원술이 손견(孫堅)을 보내 동탁(董卓)을 공격하게 했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원소는 회계(會稽) 사람 주앙(周昂)을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임명하고 손견의 양성(陽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손견이 탄식하며 말했다.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니, 이는 사직(社稷)을 구원하기 위함인데, 역적이 장차 멸망하려 하자 모두가 이와 같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함께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주앙을 공격하여 쫓아냈다. 원술이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손견을 도와 주앙을 공격하게 했는데, 공손월이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공손찬(公孫瓚)이 분노하여 말했다. "내 동생이 죽었으니, 그 화근은 원소가 일으킨 것이다." 이에 군사를 내어 반하(磐河)에 주둔하고, 상소를 올려 원소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며 군사를 내어 원소를 공격했다. 기주(冀州)의 여러 성들은 대부분 원소를 배반하고 공손찬에게 따랐다. 원소가 두려워하여 자신이 차고 있던 발해태수(勃海太守)의 인수(印綬)를 공손찬의 종제(從弟) 공손범(公孫範)에게 주어 그 군에 부임하게 했으나, 공손범은 도리어 원소를 배반하고 발해군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손찬을 도왔다. 공손찬이 이에 스스로 그의 장수 엄강(嚴綱)을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전개(田楷)를 청주자사(青州刺史)로, 단경(單經)을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임명했다. 또 군과 현의 수령과 현령들을 모두 바꾸어 임명했다.

당초, 탁군(涿郡) 사람 유비(劉備)는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와 함께 짚신을 팔며 살았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였고, 두 손을 내리면 무릎을 넘었으며, 고개를 돌리면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큰 뜻을 품었으나 말수가 적었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공손찬과 함께 노식(盧植)에게 배웠으므로, 이에 가서 공손찬에게 의탁했다. 공손찬은 유비와 전개를 보내 청주(靑州)를 공략하게 하여 공을 세우자, 유비를 평원상(平原相)으로 임명했다. 유비가 젊었을 때 하동(河東) 사람 관우(關羽)와 탁군 사람 장비(張飛)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이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하여 각각 부대를 통솔하게 했다. 유비가 두 사람과 함께 잘 때는 같은 침상을 쓰며 형제처럼 지냈고, 대중 앞에서는 종일토록 유비의 곁에 모시며 유비를 따라 주위를 분주히 돌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상산(常山) 사람 조운(趙雲)이 본군의 관리와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투항하자, 공손찬이 말했다. "듣자니 그대의 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에게 귀부하려 한다 하는데, 어찌하여 홀로 그대가 잘못된 길을 깨닫고 돌아왔는가?" 조운이 말했다. "천하가 어지러워 누가 옳은지 알 수 없고 백성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을 겪고 있사옵니다. 저희 주의 논의는 인정(仁政)을 행하는 곳을 따르려 한 것일 뿐, 원공(袁公)을 가볍게 여기고 명장군(明將軍)께 치우친 것이 아니옵니다." 유비가 조운을 보고 그 재주가 뛰어나다고 여겨 깊이 사귀고 접대하였고, 조운이 이에 유비를 따라 평원(平原)에 이르러 유비를 위해 기병을 통솔했다.

당초, 원술이 남양(南陽)에 웅거할 때 호구가 수백만이었으나, 원술이 사치하고 음란하며 욕망을 따르고 세금을 징수하는 데 한도가 없어 백성들이 그 고통을 심하게 겪어 점차 흩어져 떠나갔다. 원소와 원한을 맺은 뒤로는 각자 당여와 원조를 세워 서로를 도모하고 계략을 꾸몄다. 원술은 공손찬과 결탁하고 원소는 유표(劉表)와 연합하였으며, 호걸들은 대부분 원소에게 귀부했다. 원술이 분노하여 말했다. "이 소자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우리 집 노비를 따르다니!" 또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원소는 원씨의 아들이 아닙니다." 원소가 듣고 크게 노했다.

원술이 손견을 보내 유표를 공격하게 하자, 유표는 그의 부장 황조(黃祖)를 보내 번성(樊城)과 등현(鄧縣) 사이에서 맞서 싸우게 했다. 손견이 황조를 격파하고 이어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유표가 밤에 황조를 몰래 성 밖으로 내보내 구원병을 모집하게 했는데, 황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려 하자 손견이 맞아 싸웠다. 황조가 패하여 도망쳐 현산(峴山) 속으로 들어갔다. 손견이 승세를 타고 밤에 황조를 추격하다가, 황조의 부하 병사들이 대나무 숲과 나무 사이에서 숨어 손견을 활로 쏘아 죽였다. 손견이 천거한 효렴(孝廉)이었던 장사(長沙) 사람 환계(桓階)가 유표에게 가서 손견의 시신을 돌려주어 장사 지내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유표가 그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허락했다. 손견의 형의 아들 손분(孫賁)이 손견의 부하 무리를 이끌고 원술에게 의탁했고, 원술이 또 상주하여 손분을 예주자사로 추천했다. 원술은 이로부터 유표를 이길 수 없었다.

당초, 동탁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면서 주준(朱儁)을 남겨 낙양(洛陽)을 지키게 했는데, 주준이 은밀히 산동(山東)의 여러 장수들과 연락하여 도모하다가 동탁에게 습격당할까 두려워하여 형주(荊州)로 달아났다. 동탁이 홍농(弘農) 사람 양의(楊懿)를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았고, 주준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와 양의를 공격하여 쫓아냈다. 주준이 낙양이 파괴되어 의지할 물자가 없음을 알고 동쪽으로 가서 중모(中牟)에 주둔하며 여러 주와 군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것을 청했다. 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이 상주하여 주준을 가거기장군(假車騎將軍)으로 추천하고 정병 삼천 명을 보내 그를 도왔으며, 다른 주와 군들도 많든 적든 도움을 보냈다. 도겸은 단양(丹楊) 사람이다. 조정이 황건적(黃巾賊)이 서주를 침략하자 도겸을 자사로 임명했다. 도겸이 부임한 후 황건적을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쫓아내니, 서주 경내가 평안을 되찾았다.

유언(劉焉)이 익주(益州)에서 은밀히 불궤(不軌)를 도모했다. 패국(沛國) 사람 장로(張魯)는 조부 장릉(張陵) 이래로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믿었으며, 객지에서 촉(蜀) 땅에 살고 있었다. 장로의 어머니가 귀도(鬼道)에 능하여 자주 유언의 집을 드나들었고, 유언이 이에 장로를 도의사마(督義司馬)로, 장수(張修)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하여 그들과 군사를 합쳐 한중태수(漢中太守) 소고(蘇固)를 습격하여 죽이고, 사곡각도(斜谷閣道)를 끊고 조정의 사자를 살해했다. 유언이 상주하여 말했다. "미적(米賊)이 길을 끊어 다시는 조정과 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일을 빌미로 주 중의 호강(豪强) 왕함(王咸)과 이권(李權) 등 십여 명을 죽여 위엄과 형벌을 세웠다. 건위태수(犍為太守) 임기(任岐)와 교위(校尉) 가룡(賈龍)이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켜 유언을 공격했으나, 유언이 임기와 가룡을 쳐서 죽였다. 유언의 야심이 점차 커져 천자의 수레와 의장(儀仗) 천여 대를 만들었고, 유표가 상주하여 말했다. "유언에게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서 성인으로 의심받은 것과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당시 유언의 아들 유범(劉範)은 좌중랑장(左中郎將)이었고, 유탄(劉誕)은 치서어사(治書御史)였으며, 유장(劉璋)은 봉거도위(奉車都尉)였는데, 모두 황제를 따라 장안(長安)에 있었고, 작은 아들 별부거마(別部車馬) 유모(劉瑁)만이 항상 유언을 따랐다. 황제가 유장을 보내 유언을 깨우쳐 타일렀으나, 유언은 유장을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았다.

공손도의 위세가 해외를 진동시키자, 중원 지역에서 전란을 피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부하였고, 북해 사람 관녕(管寧), 병원(邴原), 왕열(王烈)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의탁하였다. 관녕은 젊었을 때 화흠(華歆)과 벗이었으며, 일찍이 함께 땅을 갈고 채소를 심다가 땅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보았다. 관녕은 호미를 휘두르며 개의치 않고, 그것을 기왓장이나 돌처럼 여겼으나, 화흠은 그것을 집어 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이로써 그들의 품행의 높낮이를 알게 되었다. 병원은 멀리 유학하여 팔구 년 만에 돌아왔는데, 스승과 벗들이 병원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여겨, 곡식과 고기를 모아 그에게 보냈다. 병원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술을 마실 수 있으나, 다만 학문을 게을리하고 생각을 방해할까 두려워하여 끊었을 뿐이다. 이제 장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함께 한 번 마실 수 있다.” 이에 함께 자리하여 술을 마셨는데, 하루 종일 마셨어도 취하지 않았다. 관녕과 병원은 모두 절개가 고상하다고 칭송되었고, 공손도는 허물없이 관사(館舍)를 마련하여 그들을 기다렸다. 관녕은 공손도를 만난 후, 골짜기에 집을 지었다. 당시 피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군(郡)의 남쪽에 살았으나, 관녕은 홀로 북쪽에 살며 돌아갈 뜻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이후 점차 그를 따르는 자들이 생겨 한 달 만에 마을을 이루었다. 관녕은 공손도를 볼 때마다 오직 경전(經典)에 관한 이야기만 할 뿐, 세상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산으로 돌아와서는 오직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가르치고, 제사 의례를 익히며, 배움을 구하는 자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손도는 그를 현명하다 여겨 편안히 여겼고, 백성들도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병원은 성격이 강직하고 바르며, 맑은 논의로 사물을 규범화하였기에, 공손도 이하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불안해하였다. 관녕이 병원에게 말하였다. “숨은 용은 남에게 보이지 않음으로써 덕을 이룬다. 말이 시의(時宜)에 맞지 않으면, 모두 화를 부르는 길이다.” 은밀히 병원을 도망쳐 돌아가게 하였고, 공손도가 듣고도 다시 쫓지 않았다. 왕열의 도량과 학문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 명성이 병원과 관녕 위에 있었다. 사람을 가르치고 감화시키는 데 능하여, 고을에 소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주인에게 붙잡혔다. 도둑은 벌을 청하며 말하였다. “저는 죽음을 당해도 마땅하오나, 오직 왕언방(王彦方, 왕열의 자)께서 이 사실을 아시지 않게 해주십시오!” 왕열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사례하고, 그에게 베 한 필을 주었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왕열이 말하였다. “소를 훔친 자가 내가 그 잘못을 알까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악을 부끄러워한다면 선한 마음이 생길 것이니, 그러므로 베를 주어 그를 권면한 것이다.” 후에 한 노인이 길에 칼을 잃어버렸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그것을 보고 칼 옆에서 지켰다. 저녁이 되어 노인이 돌아와 칼을 찾자, 이상하게 여겨 왕열에게 이 일을 알렸다. 왕열이 사람을 보내 조사해보니, 바로 그전의 소도둑이었다. 무릇 송사가 있어 왕열에게 판결을 받으러 가려는 자들은, 어떤 이는 길을 가다 중간에 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왕열의 집을 바라보고 되돌아가기도 하며, 서로 사양하며 상대방이 이치에 맞다고 여겨 감히 왕열이 알게 하지 않았다. 공손도가 왕열을 장사(長史)로 임명하려 하자, 왕열은 사양하고 상인이 되어 스스로를 더럽힘으로써 면직되었다.

효헌황제 을(孝獻皇帝 乙) 초평 3년(初平三年, 임신년, 서기 192년)

봄, 정월(正月) 정축일(丁丑日)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동탁(董卓)이 우보(牛輔)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섬현(陝縣)에 주둔하게 하였다. 우보는 다시 교위(校尉) 북지인(北地人) 이각(李傕), 장액인(張掖人) 곽사(郭汜), 무위인(武威人) 장제(張濟)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나누어 이끌게 하여 중모(中牟)에서 주준(朱儁)을 격파하고, 이어 진류(陳留), 영천(潁川) 여러 현을 약탈하며 지나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살아있는 자를 남기지 않았다.

당초, 순숙(荀淑)의 손자 순욱(荀彧)이 있었는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하옹(何顒)이 그를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말하였다. “이는 임금을 보좌할 인재이다!” 천하가 크게 혼란해지자, 순욱이 부로(父老)들에게 말하였다. “영천은 사방으로 적을 맞이하는 곳이니, 빨리 피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기를 망설였으나, 순욱은 홀로 종족을 이끌고 한복(韓馥)에게 의탁하러 갔다. 마침 원소(袁紹)가 이미 한복의 자리를 빼앗아, 상빈(上賓)의 예로 순욱을 대우하였다. 순욱은 원소가 결국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조(曹操)가 웅대한 계략과 큰 재주가 있음을 듣고, 원소를 떠나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조조가 그와 이야기하고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바로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로다!” 그를 분무사마(奮武司馬)로 임명하였다. 고향에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각, 곽사 등에게 살해되었다.

원소가 친히 군사를 내어 공손찬(公孫瓚)을 막아, 공손찬과 계교(界橋) 남쪽 20리 지점에서 싸웠다. 공손찬의 군사는 3만 명으로, 그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원소는 곡의(麴義)에게 정예 병사 800명을 이끌고 먼저 공격하게 하고, 강노(強弩) 1,000장으로 좌우를 엄호하게 하였다. 공손찬은 적군이 적음을 얕보고, 기병을 놓아 돌격하게 하였다. 곡의의 병사들은 방패 아래 엎드려 꼼짝하지 않다가, 적군이 10여 보 거리에 이르자 일제히 공격하여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니, 공손찬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그가 세운 기주자사(冀州刺史) 엄강(嚴綱)을 참수하고, 갑옷과 목급(首級) 1천여 개를 노획하였다. 계교까지 추격하자, 공손찬이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싸웠으나, 곡의가 또 그를 격파하고 마침내 공손찬의 영채(營寨)에 이르러 그의 아문기(牙門旗)를 뽑았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당초,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가 원소 및 공손찬과 연합하였는데, 원소는 처자식을 유대에게 맡겼고, 공손찬 또한 종사(從事) 범방(范方)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유대를 돕게 하였다. 공손찬이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자, 유대에게 원소의 처자식을 쫓아내라고 명하고, 따로 범방에게 명령하기를 “유대가 원소의 가족을 쫓아내지 않거든, 그대는 기병을 이끌고 돌아오라! 내가 원소를 평정한 뒤, 유대를 치려 한다.”고 하였다. 유대가 속관(屬官)들과 의논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동군인(東郡人) 정욱(程昱)이 지혜가 있음을 듣고 그를 불러 물었다. 정욱이 말하였다. “멀리 있는 공손찬의 도움을 구하려다 가까이 있는 원소의 지원을 버리는 것은, 마치 월(越)나라 사람에게 배를 빌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공손찬은 원소의 상대가 아닙니다. 지금 비록 원소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결국에는 원소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유대가 그의 말을 따랐다. 범방이 그의 기병을 이끌고 돌아갔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아 공손찬은 이미 패배하였다.

조조의 군대가 돈구(頓丘)에 주둔하였는데, 우독(于毒) 등이 동무양(東武陽)을 공격하였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산속으로 진군하여 우독 등의 본거지를 공격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양을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조조가 말하였다. “도적들로 하여금 내가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게 하면, 무양은 자연히 포위가 풀릴 것이다. 만약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들의 본거지를 격파할 수 있다. 도적들은 반드시 무양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에 출발하였다. 우독이 이 소식을 듣고 무양을 버리고 군사를 돌렸다. 조조가 이에 수고(眭固)와 흉노(匈奴)의 우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에서 공격하여, 모두 크게 격파하였다.

동탁은 그의 동생 동민을 좌장군으로, 조카 동황을 중군교위로 임명하여 모두 군사를 관장하게 하였고, 종족 안팎이 모두 조정의 요직에 몸담았다. 동탁의 시첩이 품에 안고 있던 아기들까지도 후작에 봉해져 금인 자수를 장난감으로 삼았다. 동탁의 수레와 의복은 본분을 넘어 천자에 비견되었으며, 삼태의 관원들을 불러들이되 상서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직접 동탁의 저택에 가서 일을 아뢰어야 했다. 그는 또 미현에 성채를 수축하였는데, 높이와 두께가 모두 칠 장이었고, 삼십 년 동안 쓸 식량을 저장해 두고 스스로 말하기를 "큰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웅거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해도 이곳을 지키며 족히 늙어 죽을 수 있다"고 하였다. 동탁은 잔혹하여 살육을 좋아하여, 장수들이 말을 조금만 잘못해도 그 자리에서 죽였으므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었다. 사도 왕윤은 사례교위 황완, 복야 사손서, 상서 양찬과 함께 은밀히 동탁 주살을 모의하였다. 중랑장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동탁은 스스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함을 깨닫고 행동하고 머물 때마다 항상 여포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여 매우 총애하고 신임하여 맹세코 부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동탁의 성정은 강퍅하고 편협하여, 일찍이 사소한 일로 동탁의 뜻에 맞지 않자 동탁이 손에 쥔 수극을 여포에게 던졌는데, 여포는 재빨리 피한 뒤 얼굴빛을 고쳐 돌아서서 사과하자 동탁의 노기도 가라앉았다. 여포는 이로부터 은근히 동탁을 원망하였다. 동탁은 또 여포로 하여금 내실을 지키게 하였는데,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간통하여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왕윤은 평소 여포를 잘 대우하였는데, 여포가 왕윤을 만나 자기가 동탁에게 거의 죽을 뻔한 일을 스스로 진술하자, 왕윤은 그 기회에 동탁 주살 계획을 여포에게 알리고 내응하게 하였다. 여포가 말하기를 "그 부자 관계는 어찌합니까?" 하니, 왕윤이 말하기를 "그대는 본래 여씨 성을 가졌으니 골육지친이 아닙니다. 지금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부자를 말합니까? 그가 극을 던질 때 어디에 부자의 정이 있었습니까!" 여포가 이에 승낙하였다.

여름, 4월 정사일에 황제의 병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 미앙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크게 모았다. 동탁은 조복을 입고 수레를 타고 입궁하였는데, 병사들이 길 양옆에 늘어서서 영채에서 궁문까지 좌우에 보병과 기병을 배치하여 수비를 빈틈없이 하고, 여포 등에게 명하여 앞뒤로 호위하게 하였다. 왕윤은 사손서로 하여금 친히 조서를 써서 여포에게 주게 하고, 여포는 같은 군 사람 기도위 이숙과 용사 진의, 진위 등 십여 명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위사의 옷을 입고 북액문 안에 숨어 동탁을 기다리게 하였다. 동탁이 문에 들어서자 이숙이 극으로 찔렀으나, 동탁은 안에 갑옷을 입고 있어 찔리지 않고 팔만 다쳤으며, 수레에서 떨어져 고개를 돌려 크게 외치기를 "여포가 어디 있느냐?" 하였다. 여포가 말하기를 "조서가 있어 적신을 토벌하라 하였소!" 하니, 동탁이 크게 꾸짖기를 "개 같은 놈아,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여포는 응하여 창으로 동탁을 찌르고 병사들을 재촉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다. 주부 전의와 동탁의 노복이 앞으로 달려들어 그의 시체에 엎드리자, 여포가 또 그들을 죽여 모두 세 명을 죽였다. 여포는 이내 품속에서 조판을 꺼내 관리와 병사들에게 고하기를 "조서는 오직 동탁만을 토벌할 뿐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묻지 않는다" 하였다.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단정히 서서 움직이지 않으며 크게 만세를 불렀다. 백성들은 길에서 춤추고 노래하였으며, 장안성 안의 선비와 부녀자들은 그들의 구슬과 옷을 팔아 술과 고기를 사서 서로 축하하며 거리와 점포를 가득 메웠다. 동탁의 아우 동민, 조카 동황 등과 종족의 노소가 미현에 있던 자들은 모두 그들의 부하에게 칼에 맞고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 동탁의 시체는 저자에 버려졌다. 당시 날씨가 점차 더워지기 시작했는데, 동탁은 평소 몸이 뚱뚱하여 기름이 땅에 흘렀고, 지키는 관리가 큰 심지를 만들어 동탁의 배꼽에 넣어 불을 붙이니 불빛이 밤새도록 밝았으며, 이렇게 여러 날을 계속하였다. 원씨의 문생들이 동씨의 시체를 모아 태워 재를 길에 뿌렸다. 성채 안에는 황금 2, 3만 근, 백은 8, 9만 근, 금수 비단과 진기한 완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왕윤을 녹상서사로, 여포를 분위장군, 가절, 의례를 삼공에 비준하여 온후에 봉하고 함께 조정의 정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동탁이 죽임을 당했을 때, 좌중랑장 고양후 채옹이 왕윤의 자리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놀라 탄식하였다. 왕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동탁은 나라의 큰 도적이었다! 거의 한나라를 뒤엎을 뻔하였다. 네가 군왕의 신하로서 마땅히 함께 그를 미워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그 사사로운 은혜를 생각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니, 이 어찌 함께 역적질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곧바로 그를 정위에 넘겼다. 채옹이 사죄하며 말하기를 "제가 비록 충성스럽지 못하나, 고금의 대의를 귀로 익히 듣고 입으로 항상 말해 왔으니, 어찌 나라를 배반하고 동탁에게로 나아가겠습니까! 원컨대 형벌을 받더라도 한나라 역사서를 완성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사대부들이 많이 가엾게 여겨 구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태위 마일제가 왕윤에게 말하기를 "채백개는 세상에 드문 기재로, 한나라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 마땅히 그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여 일대의 대전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그가 저지른 죄는 매우 작습니다. 그를 죽인다면 아마 인심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윤이 말하기를 "옛날 한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아 그로 하여금 비방하는 사서를 지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소. 지금 나라의 운세가 쇠하고 전쟁이 교외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간사한 신하로 하여금 어린 군주 곁에서 붓을 잡게 할 수 없소. 이는 성상의 덕에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무리들이 그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오" 하였다. 마일제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윤은 아마 자손이 끊어질 것이다! 선량한 사람은 나라의 기강이요, 사서의 편찬은 나라의 전범인데, 기강을 무너뜨리고 전범을 폐기한다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채옹은 결국 옥에서 죽었다.

당초, 황문시랑 순유가 상서 정태, 시중 종식 등과 함께 모의하여 말하기를 "동탁은 교만하고 잔혹하여 친신이 없으니, 비록 강병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한낱 필부에 불과하므로 곧바로 그를 찔러 죽일 수 있다" 하였다. 일이 장차 성공하려 할 때 발각되어 순유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정태는 원술에게로 도망쳤다. 순유는 옥중에서 언변과 음식이 평소와 같았으며, 마침 동탁이 죽임을 당하여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청주의 황건적이 연주를 침범하자, 유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제북상 포신이 간하며 말하기를 "지금 적의 무리는 백만에 이르고 백성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병사들은 싸울 뜻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군은 보급품이 없어 오직 약탈로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은 차라리 무리의 힘을 기르고 먼저 굳게 지키는 것을 시행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들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공격하려 해도 빼앗지 못하면 형세가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그런 뒤에 정예를 선발하여 요해를 점거하고 공격하면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유대가 따르지 않고 마침내 출전하였다가 과연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부장 동군 사람 진궁이 조조에게 말하기를 "주에 지금 장관이 없고 조정의 명령도 끊어졌으니, 제가 청하여 주중의 주사 관원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명공께서는 뒤따라 가서 이 주를 다스리시어 그것으로 천하를 거두는 것이 패왕의 사업입니다" 하였다. 진궁이 이에 가서 별가와 치중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에 장관이 없습니다. 조동군은 당세에 보기 드문 인재이니, 그를 맞이하여 주의 일을 관장하게 하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포신 등도 옳게 여겨, 이에 주리 만잠 등과 함께 동군에 가서 조조를 맞이하여 연주자사 겸임을 청하였다. 조조가 이에 진군하여 수장 동쪽에서 황건적을 공격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였다. 적의 무리는 정예하고 강맹하였으며, 조조의 병력은 적고 약하였다. 조조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명확히 상벌을 정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기묘한 계책을 세워 주야로 회전하여 싸울 때마다 포로를 얻자 적의 무리는 마침내 물러갔다. 포신은 전사하였고, 조조는 현상금을 걸어 그의 시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나무로 포신의 형상을 깎아 제사를 지내고 곡하였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경조 사람 김상을 연주자사로 삼아 장차 주로 가려 하였으나, 조조가 그를 맞아 공격하자 김상은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5월, 정서장군 황보숭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여포가 왕윤에게 동탁의 부곡을 모두 죽이자고 권했으나, 왕윤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으니 죽일 수 없소." 여포가 동탁의 재물을 공경과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으나 왕윤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왕윤은 평소 여포를 검객으로 대우했고, 여포는 공을 믿어 항상 스스로 자랑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점점 불만을 품었다. 왕윤의 성품은 강직하고 엄격하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는데, 처음에는 동탁을 두려워하여 몸을 굽혀 따랐다. 동탁이 제거된 후에는 스스로 더 이상 화가 없을 것이라 여겨 매우 교만해졌고, 이로 인해 부하들이 그에게 잘 따르지 않았다. 왕윤이 처음에 사손서와 의논하여 특별히 조서를 내려 동탁의 부곡을 사면하려 했으나, 곧 의심하며 말했다. "부곡들은 다만 그들의 주장을 따랐을 뿐이다. 지금 만약 그들을 악역한 죄로 규정했다가 사면한다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깊이 의심하게 할 것이니, 이는 그들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아니다." 마침내 그만두었다. 또 그들의 군대를 모두 해산시키는 일을 의논했는데, 어떤 사람이 왕윤에게 권했다. "양주 사람들은 평소 원씨를 두려워하고 관동을 무서워합니다. 지금 만약 한 번에 군대를 해산시키고 관문을 열어버리면 반드시人人이 스스로 위태롭게 여길 것입니다. 황보의진을 장군으로 삼아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그를 섬 지역에 머물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윤이 말했다. "옳지 않소. 관동에서 일어난 군사들은 모두 우리의 동지들이오. 지금 만약 험한 곳을 차지하고 섬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키면, 비록 양주를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관동 사람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니, 안 되오."

당시 백성들 사이에 양주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동탁의 옛 장교들은 서로 놀라며 모두 병력을 거느리고 스스로 지켰으며, 서로 말했다. "채백개는 다만 동공과 친했을 뿐인데도 연좌되어 벌을 받았소. 지금 이미 우리를 사면해 주지 않으면서 우리 군대를 해산시키려 하니, 오늘 군대를 해산하면 내일은 또 고기 조각이 될 것이오!" 여포가 이숙을 섬 지역에 보내 조서의 명령으로 우보를 죽이려 하자, 우보 등이 맞서 싸워 이숙을 패배시켰고, 이숙은 홍농으로 도망쳤으며, 여포가 이숙을 죽였다. 우보는 겁에 질려 방어를 잃었는데, 마침 영채 안에서 까닭 없이 서로 놀라는 일이 일어나자 우보가 도망가려다 좌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각 등이 돌아왔을 때 우보는 이미 죽었고, 이각 등은 의지할 데가 없어 사자를 장안에 보내 사면을 청했다. 왕윤이 말했다. "일 년 안에 두 번 사면할 수는 없다." 허락하지 않았다. 이각 등은 더욱 두려워져 어찌할 바를 몰라, 각자 흩어져 좁은 길로 고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토로교위 무위 사람 가후가 말했다. "여러분이 만약 군대를 버리고 홀로 도망간다면, 한 명의 정장이 여러분을 묶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함께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공격하여 동공의 원수를 갚는 것이 낫습니다. 일이 성공하면 왕실을 받들어 천하를 바로잡고, 만약 안 되면 그때 가도 늦지 않습니다." 이각 등이 옳게 여겨 서로 맹세하고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밤낮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왕윤은 호문재와 양정수가 모두 양주에서 명망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 그들을 불러 동쪽으로 가게 하여 해명하게 하였으나, 좋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말했다. "관동의 쥐새끼들이 무얼 하려는가? 너희들이 가서 불러오너라!" 이에 두 사람이 갔으나, 실제로는 군대를 불러 모아 돌아왔다. 이각은 길을 따라 병사를 모아 장안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십여만 명이 되었고, 동탁의 옛 부곡 번주, 이몽 등과 함께 장안성을 포위했으나 성벽이 견고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팔 일 동안 포위했다.

여포의 군대 안에 있는 수병(叟兵)이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오일(六月戊午)에 이각의 무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 병사들이 약탈을 마음대로 하게 했다. 여포가 성 안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수백 기병을 이끌고 동탁의 목을 안장에 매달아 달아나 청쇄문 밖에 말을 멈추고 왕윤에게 함께 가자고 불렀다. 왕윤이 말했다. "만약 사직의 신령이 도우셔서 나라가 편안해진다면 그것이 나의 소원이오. 그렇지 못하다면 몸을 바쳐 죽을 것이오. 조정이 어린데 오직 나만을 의지하고 있소. 어려움을 만나 구차히 목숨을 도망치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오. 힘써 관동의 여러분께 사절하고, 부지런히 나랏일을 생각하시오!" 태상 충불이 말했다. "국가의 대신으로서 폭력을 막고 외적을 제압하지 못하여 칼날이 궁실에 이르게 했으니,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마침내 싸우다 죽었다. 이각과 곽사는 남궁 예문에 주둔하며 태복 노괴, 대홍려 주환, 성문교위 최열, 월기교위 왕기를 죽였다. 관리와 백성들이 만여 명이나 죽었고, 시체가 길에 가득했다.

왕윤이 황제를 부축하여 선평문에 올라 군대를 피했고, 이각 등이 성문 아래서 땅에 엎드려 절했다. 황제가 이각 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병사들을 놓아 제멋대로 굴게 하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이각 등이 말했다. "동탁은 폐하께 충성하였으나 무고하게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동탁을 위해 원수를 갚을 뿐, 감히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정위에게 가서 죄를 받겠습니다." 이각 등이 문루를 에워싸고 함께 표문을 올려 사도 왕윤이 나오기를 청하며 물었다. "태사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왕윤이 곤란해져 마침내 내려가 그들을 만났다. 기미일(己未)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이각을 양무장군, 곽사를 양열장군, 번주 등을 모두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이각 등이 사례교위 황완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죽였다.

당초 왕윤은 같은 고을 사람 송익을 좌풍익, 왕굉을 우부풍으로 임명했는데, 이각 등이 왕윤을 죽이려 하면서도 이 두 군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먼저 송익과 왕굉을 소환했다. 왕굉이 사자를 보내 송익에게 말했다. "곽사와 이각이 우리 두 사람이 밖에 있기 때문에 감히 왕공을 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소환에 응하면 내일 함께 멸문할 것이니, 계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송익이 말했다. "화와 복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군명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굉이 말했다. "관동의 의병이 들끓어 동탁을 주살하려 합니다. 지금 동탁은 이미 죽었고 그 당여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함께 이각 등을 토벌하고 산동과 호응한다면, 이는 화를 복으로 바꾸는 계책입니다." 송익이 따르지 않았고, 왕굉이 홀로 움직일 수 없어 모두 소환에 응했다. 갑자일(甲子)에 이각이 왕윤과 송익, 왕굉을 체포하여 함께 죽였고, 왕윤의 처자도 모두 죽었다. 왕굉이 임종 때 욕하며 말했다. "송익은 그 융통성 없는 선비라, 큰 계획을 논의할 가치가 없도다!" 이각이 왕윤의 시체를 저자에 내걸었으나 감히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고, 옛 관리 평릉령 경조 사람 조천이 벼슬을 버리고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 당초 왕윤이 홀로 동탁 토벌의 공을 자처했으나, 사손서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스스로 후작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신 사마광이 말한다: 《주역》에 "근면하고 겸손한 군자는 끝내 길함이 있다"고 했는데, 사손서는 공이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아 몸을 온전히 지켰으니, 그를 지혜롭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각 등이 가후를 좌풍익으로 임명하고 후작으로 봉하려 했다. 가후가 말했다. "이는 다만 목숨을 구하기 위한 계책일 뿐,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로 임명하려 하자, 가후가 말했다. "상서복야는 관리의 스승이요,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인데, 제 명성이 본래 무겁지 않아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상서로 임명되었다.

여포가 무관을 통해 남양으로 도망쳐 원술에게 갔는데, 원술이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여포는 원씨에게 공이 있다고 자부하며 병사들을 놓아 약탈하게 했다. 원술이 이를 걱정하자, 여포가 마음이 편치 않아 떠나 하내로 가서 장양에게 의탁했다. 이각 등이 여포를 잡는 상금을 매우 급하게 걸자, 여포는 또 원소에게로 도망쳐 갔다.

병자일(丙子)에 전장군 조겸을 사도로 삼았다.

가을 7월 경자일(庚子)에 태위 마일제를 태부로 삼아 상서의 일을 총괄하게 하고, 8월에 거기장군 황보숭을 태위로 삼았다.

조서를 내려 태부 마일제와 태복 조기에게 절을 주어 관동을 진무하게 했다.

9월에 이각을 거기장병 겸 사례교위, 가절로 삼고, 곽사를 후장군, 번주를 우장군, 장제를 표기장군으로 삼고 모두 후작으로 봉했다. 이각, 곽사, 번주가 조정의 정사를 맡고, 장제는 서울을 나가 홍농에 주둔했다.

사도 조겸이 파면되었다. 갑신일(甲申)에 사공 순우가를 사도로, 광록대부 양표를 사공으로 삼아 상서의 일을 총괄하게 했다.

당초 동탁이 관중으로 들어와 한수와 마등을 설득하여 함께 산동을 도모하게 했는데, 한수와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에 왔다가 마침 동탁이 죽자, 이각 등이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아 금성으로 돌려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미현에 주둔하게 했다.

겨울 10월, 형주자사 유표가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유표를 진남장군 겸 형주목으로 삼고 성무후에 봉했다.

12월, 태위 황보숭이 파면되고, 광록대부 주충을 태위로 삼아 상서의 일에 참여하여 총괄하게 했다.

조조가 기북까지 황건군을 추격하여 모두 항복시키고, 병사 30여 만 명과 남녀 100여 만 명을 얻었으며, 그중 정예를 선발하여 청주병이라 불렀다.

조조는 진류 사람 모개를 불러 치중종사로 삼았다. 모개가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는 분열되고 천자는 유랑하며 백성들은 생업을 잃고 기근에 시달려 유랑하고 있습니다. 공가는 일 년 치 비축도 없고 백성들은 안정된 마음을 가지지 못하여 오래 견디기 어렵습니다. 군사를 쓰는 데는 도의로써 승리해야 하고 지위를 지키는 데는 재력이 필요하니, 마땅히 천자를 받들어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명령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군자금을 축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패왕의 업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조조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사자를 하내태수 장양에게 보내 서쪽으로 장안으로 가는 길을 빌리려 했으나 장양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도 사람 동소가 장양에게 권하며 말했다: "원소와 조조는 비록 한집안이지만 형세가 오래 연합할 수 없습니다. 조조가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실로 천하의 영웅이니, 일부러 그와 사귀어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인연이 있으니 그로 하여금 표를 올리게 하고 당신도 그를 천거하는 표를 올리십시오. 일이 성공하면 영원히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될 것입니다." 장양이 이에 조조로 하여금 표를 올리게 하고, 또한 표를 올려 조조를 천거했다. 동소가 조조를 대신하여 이각, 곽사 등에게 편지를 써서 각각 경중에 따라 정성을 표현했다. 이각과 곽사가 조조의 사자를 보고 관동에서 스스로 천자를 세우려 한다고 여겨, 지금 조조가 사명을 보냈으나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조의 사자를 억류할 것을 의논했다. 황문시랑 종요가 이각과 곽사를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영웅들이 함께 일어나 각각 명령을 빌려 전횡하고 있으나, 오직 조조주만이 왕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이 그의 충성을 거절한다면 이는 장래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각과 곽사가 이에 후하게 답례했다. 종요는 종호의 증손자이다.

서주자사 도겸이 각 군의 수상들과 함께 주기(奏記)를 올려 주준을 태사로 추대하고, 각 주목(州牧)에게 격문을 보내어 함께 이각 등을 토벌하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려 하였다. 마침 이각이 태위 주충과 상서 가후의 계책을 써서 주준을 조정으로 부르자, 주준이 도겸의 제의를 사양하고 응징하여 태복이 되었다.

공손찬이 다시 군사를 보내 원소를 공격하여 용수천에 이르렀으나 원소가 그를 격파했다. 공손찬은 이에 물러나 유주를 지키며 다시는 출병하지 않았다.

양주자사 여남 사람 진온이 죽자, 원소가 원유를 양주자사로 겸임하게 했다. 원술이 그를 격파하자 원유는 패현으로 도망갔다가 난병에게 살해당했다. 원술이 하비 사람 진우를 양주자사로 임명했다.

효헌황제 을 초평 4년(계유, 서기 193년)

봄 정월 갑인 초하루에 일식이 발생했다.

정묘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조조가 군대를 견성에 주둔시켰다. 원술이 유표에게 압박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봉구에 주둔했으며, 흑산군의 지류와 흉노 우부라가 모두 그에게 의탁했다. 조조가 원술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어서 봉구를 포위했다. 원술이 양읍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영릉으로 도망갔다. 조조가 추격하여 연이어 격파했다. 원술이 구강으로 도망가자 양주자사 진우가 그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술이 음릉으로 물러나 수비하며 회북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시 진군하여 수춘으로 향했다. 진우가 두려워하여 하비로 도망가자, 원술이 이에 양주자사를 겸임하고 스스로 서주백이라 칭했다. 이각이 원술과 사귀어 외부 원조로 삼고자 원술을 좌장군으로 임명하고 양구후에 봉하며 부절을 주었다.

원소가 공손찬이 임명한 청주자사 전해와 연이어 2년 동안 싸워 병사들은 지치고 굶주렸으며 양식도 떨어져 서로 백성들을 약탈하니 들판에는 풀 한 포기 없었다. 원소가 자신의 아들 원담을 청주자사로 삼자 전해가 그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었다. 마침 조기가 관동의 충돌을 조정하러 오자 공손찬이 원소와 화친하고 각자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3월, 원소가 박락진에 있었다. 위군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흑산적 우독 등 수만 명과 함께 업성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죽였다. 원소가 군대를 돌려 척구에 주둔했다.

여름, 조조가 군대를 정도로 돌렸다.

서주치중 동해 사람 왕랑과 별가 낭야 사람 조욱이 자사 도겸에게 권하며 말했다: "제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왕을 섬기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천자는 멀리 서경에 계시니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쳐야 합니다." 도겸이 이에 조욱이 주장을 가지고 장안으로 가게 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도겸을 서주목으로 임명하고 안동장군을 더하며, 이유후에 봉했다. 조욱을 광릉태수로, 왕랑을 회계태수로 임명했다. 이때 서주 지역은 백성들이 부유하고 곡식이 비교적 풍족하여 유민들이 많이 의지해 왔다. 그러나 도겸은 참소하고 아첨하는 소인을 믿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며 형벌과 정사가 적절하지 않아 서주가 점차 혼란해졌다. 허소가 광릉으로 피난하자 도겸이 그를 후하게 예우했으나, 허소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도공조는 겉으로는 명성을 흠모하는 듯하나 마음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나를 대우함이 비록 후하나 형세가 반드시 엷어질 것입니다." 이에 떠났다. 후에 과연 도겸이 객居하는 선비들을 체포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허소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6월, 부풍군에 큰 우박이 내렸다.

화산이 무너져 갈라졌다.

태위 주충이 면직되고 태복 주준을 태위로 삼아 총리상서사무를 맡겼다.

하비 사람 궐선이 수천 명을 모아 스스로 천자라 칭했다. 도겸이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큰비가 내려 밤낮으로 20여 일 동안 그치지 않아 백성들의 집이 물에 잠겼다.

원소가 군대를 내어 조가록장산으로 들어가 우독을 토벌하고 5일 동안 포위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우독과 그 부하 1만여 명을 참수했다. 원소가 이에 산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 다른 도적 좌치장팔 등을 공격하여 모두 참수했다. 또 유석, 청우각, 황룡좌교, 곽대현, 이대목, 우저근 등을 공격하여 또 수만 명을 참수하고 그들의 영채를 모조리 도륙했다. 이에 흑산적 장연 및 사영도각, 안문오환과 상산에서 교전했다. 장연은 정병 수만 명과 기병 수천 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원소가 여포와 함께 장연을 공격하여 열흘 넘게 연이어 싸웠다. 장연의 병사들은 사상자가 많았으나 원소의 군대도 지쳐서 마침내 양측 모두 물러났다.

여포의 장수와 병사들은 대부분 흉포하고 난폭하여 원소가 이를 걱정했다. 여포가 이에 낙양으로 돌아가길 청했다. 원소가 황제의 명의로 여포가 사례교위를 겸임하게 하고 장사를 보내 여포를 전송하면서 은밀히 해치려 꾀했다. 여포가 사람을 시켜 장막 안에서 쟁을 타게 하고 자신은 몰래 도망쳤다. 보낸 사람들이 밤중에 일어나 장막과 이불을 찢었다. 다음 날 아침, 원소가 여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문을 닫고 자위했다. 여포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가 장양에게 의탁했다.

전임 태위 조숭이 낭야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그의 아들 조조가 태산태수 응소에게 명하여 그를 맞이하게 했다. 조숭의 치중(수레)은 100여 대였다. 도겸의 부장이 음평을 지키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조숭의 재보를 탐내어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습격하여 그와 그의 작은아들 조덕을 죽였다. 가을,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하여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워 도겸의 군대가 패하여 담현으로 물러나 수비했다. 당초, 경사 낙양이 동탁의 난을 겪자 백성들이 동쪽으로 유랑하여 많이 서주 지역에 의지했는데, 조조가 이르러 사수 가에서 남녀 수십만 명을 생매장하여 사수가 끊어졌다. 조조가 담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떠나 응현, 수릉, 하구를 취하여 모두 도륙하고 닭과 개도 남기지 않았으며, 폐허가 된 마을에는 행인이 없었다.

겨울, 10월 초사흗날, 경사에 지진이 발생했다.

혜성이 천시성 관에 나타났다. 사공 양표가 면직되었다. 초아흗날, 태상 조온을 사공으로 삼아 총리상서사무를 맡겼다.

유우(劉虞)는 공손찬(公孫瓚)과 오래도록 불화하여, 공손찬이 여러 차례 원소(袁紹)와 서로 공격하자 유우가 이를 금지했으나 통하지 않아, 점차 그에게 지급하는 군량을 줄였다. 공손찬이 노하여 여러 번 지휘와 조치를 거역하고 또 백성을 침해하였다. 유우가 그를 제압할 수 없자, 역졸(驛卒)을 보내 주장(奏章)을 갖추어 그의 잔혹한 약탈 죄행을 진술하였고, 공손찬도 유우가 군량 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상주하였다. 두 주장이 번갈아 급히 조정에 도착하여 서로 비방하였으나, 조정은 그저 애매모호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공손찬은 이에 계(薊)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유우가 여러 번 그를 초청하여 만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항상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유우는 그가 결국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휘하 부대와 병사 총 10만 명을 이끌고 토벌하였다. 당시 공손찬의 부곡(部曲)은 흩어져 있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급히 동쪽 성을 파고 도망가려 하였다. 유우의 병사들은 편제가 없고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또 백성의 가옥을 아껴 불태우는 것을 금지하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고 오직 백규(伯珪, 공손찬의 자) 한 사람만 죽이라.” 하였다.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공손찬은 이에 정예 병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모집하고, 바람을 타고 불을 질러 직접 돌격하니 유우의 무리는 완전히 패주하였다. 유우는 관속들과 함께 북쪽으로 거용(居庸)으로 도망하였고, 공손찬이 추격하여 공격한 지 사흘 만에 성이 함락되어 유우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아 계성(薊城)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그에게 주(州)의 문서를 관리하게 하였다. 마침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자(使者) 단훈(段訓)을 보내 유우의 식읍(食邑)을 더하고 6주(州)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공손찬을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하고 역후(易侯)에 봉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유우가 이전에 원소 등과 함께 황제 칭호를 도모했다고 무고하고, 단훈을 협박하여 계성의 저자에서 유우와 그의 처자식을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전(前) 상산상(常山相) 손근(孫瑾), 연사(掾吏) 장일(張逸), 장찬(張瓚) 등이 함께 유우에게 나아가 공손찬을 통렬히 욕하고는 함께 순절하였으며, 공손찬은 유우의 목을 베어 경사(京師)로 보냈으나 유우의 옛 부하 미돈(尾敦)이 길에서 목을 가로채어 돌아가 장사 지냈다. 유우는 은덕(恩德)과 너그러움으로 민심을 깊이 얻어 북방 주군(州郡)의 백성들과 유랑하는 옛 부하들 중에 애통해하며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초, 유우는 사자를 보내 주장을 갖추어 장안(長安)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북평(右北平) 사람 전주(田疇)는 나이 22세로 비록 어리나 기이한 재능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우가 예물을 준비하여 그를 연사로 청하였다. 수레와 말이 이미 갖추어져 출발하려 하자 전주가 말하기를, “지금 길이 막히고 단절되며 도적이 횡행하니, 공식 사자의 명색을 띠고 가면 뭇사람의 지목 대상이 될 것입니다. 제가 사사로운 신분으로 출행하여 다만 도달하기만을 구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우가 그의 말을 따랐다. 전주는 이에 스스로 집객(家客) 20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함께 서관(西關)을 나서고, 변새를 따라 북산(北山)을 거쳐 곧바로 삭방(朔方)으로 향하여 지름길을 통해 장안에 도착하여 명을 복명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전주를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였다. 전주는 천자께서 유진(蒙塵)하시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영광스러운 관직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겨,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정의 회답을 얻은 후에 그는 말을 달려 급히 돌아왔는데, 도착했을 때는 유우가 이미 죽은 뒤였다. 전주는 유우의 무덤에 배알하여 제사를 지내고 주장을 진열하여 읽고는 울며 떠났다. 공손찬이 크게 노하여 현상금을 걸어 전주를 체포한 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주장과 조정의 회답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전주가 말하기를, “한 왕실이 쇠퇴하여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었으나, 오직 유공(劉公)만이 충절(忠節)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장과 회답에 적힌 말은 장군께 듣기에 좋지 않은 바라, 장군께서 즐겨 듣고자 하실 일이 아닐까 두려워하여 보고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구나 장군께서 이미 무죄한 군주를 죽이고 또 의리를 지키는 신하를 원수로 여기시니, 신은 연(燕), 조(趙) 지역의 선비들이 모두 동해(東海)에 투신하여 죽을지언정 장군을 따르는 이는 없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그를 풀어주었다.

전주는 북쪽으로 무종(無終)으로 돌아가 종족과 그를 따라온 수백 명을 거느리고 땅을 쓸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군주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나는 세상에 설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무산(徐無山)으로 들어가 깊고 험준하며 평탄하고 넓은 곳에 거주하며, 몸소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였고, 백성들이 그에게 귀부하여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에 이르렀다. 전주가 그곳의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여러분이 모여 성읍(城邑)을 이루었으나 통솔하는 이가 없고, 또 법령과 제도가 없어 다스리지 못한다면 오래도록 안정되게 살 방도가 아닐까 두렵습니다. 제가 졸렬한 계책이 있으니 여러분과 함께 시행하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모두가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주가 이에 규약(規約)을 정하여, 서로 상해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송사하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되, 무거운 것은 사형에 이르기까지 모두 십여 조목이었다. 또 혼인과 장가드는 예절,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칠 학업을 정하여 뭇사람에게 반포하고 시행하게 하니, 뭇사람이 매우 편리하게 여겨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이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북방 변경이 일제히 그의 위엄과 신의에 복종하여, 오환(烏桓)과 선비(鮮卑)가 각각 사자를 보내 예물을 보내왔고, 전주가 모두 위무하고 접수하여 그들이 침략하고 약탈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12월 초5일, 지진이 일어났다.

사공(司空) 조온(趙溫)이 면직되었다. 초9일, 위위(衛尉) 장희(張喜)를 사공으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