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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한기 오십사

제 54 편

유조곤돈(柔兆困敦)의 해(병자년, 서기 196년)부터 저옹섭제격(著雍攝提格)의 해(무인년, 서기 198년)까지, 모두 3년간이다.

효헌황제 정(丁)

건안 원년(병자년, 서기 196년)

1 봄 정월 계유일, 천하에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2 동승(董承)과 장양(張楊)이 천자를 낙양(洛陽)으로 호종하여 돌아가려 하였으나, 양봉(楊奉)과 이악(李樂)이 따르지 않아, 장수들 사이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2월, 한선(韓暹)이 동승을 공격하자, 동승은 야왕(野王)으로 도망쳤다. 한선은 문희(聞喜)에 주둔하고, 호재(胡才)와 양봉은 오향(塢鄉)에 주둔하였다. 호재가 한선을 공격하려 하자, 황상이 사람을 보내 그를 말렸다.

3 여남(汝南)과 영천(潁川)의 황건적(黃巾賊) 하의(何儀) 등이 무리를 이끌고 원술(袁術)에게 귀부하자, 조조(曹操)가 군대를 내어 그들을 격파하였다.

4 장양이 동승으로 하여금 먼저 낙양의 궁전을 수리하게 하였다. 태복(太僕) 조기(趙岐)가 동승을 대신하여 유표(劉表)를 설득하여 병사를 낙양에 보내 궁실 건축을 돕게 하였고, 군수 물자 수송이 앞뒤로 끊이지 않았다. 여름 5월 병인일, 헌제(獻帝)가 사자를 양봉, 이악, 한선의 영채에 보내 자신을 낙양으로 호종해 줄 것을 청하니, 양봉 등이 조서를 따랐다. 6월 을미일, 헌제의 수레가 문희에 도착하였다.

5 원술이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서주(徐州)를 다투자, 유비는 사마(司馬) 장비(張飛)를 시켜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서이(盱眙), 회음(淮陰) 일대에서 원술을 막아 한 달여 동안 서로 대치하며 승패를 주고받았다. 하비상(下邳相) 조표(曹豹)는 도겸(陶謙)의 옛 부하로 장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자 성중에 변란이 일어났다. 원술이 여포(呂布)에게 편지를 보내 하비를 습격하도록 권하며 군량 지원을 약속하였다. 여포가 크게 기뻐하며 군대를 이끌고 수로와 육로를 통해 동쪽으로 내려갔다. 유비의 중랑장(中郎將)이자 단양(丹陽) 사람인 허침(許耽)이 성문을 열어 여포를 맞이하였다. 장비는 싸움에 져 도망쳤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와 장리(將吏)의 가족들을 사로잡았다. 유비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렸으나, 하비에 도착했을 때는 군대가 이미 흩어져 버렸다. 유비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동쪽으로 광릉(廣陵)을 공격했으나 원술과 싸워 또 패배하여 해서(海西)에 주둔하였다. 군대는 굶주리고 지쳐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종사(從事)인 동해(東海) 사람 미축(麋竺)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 군대를 도왔다. 유비가 여포에게 항복을 청하자, 여포도 원술이 군량을 계속 보내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유비를 불러들여 다시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 그와 군대를 합쳐 원술을 치게 하며,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하였다. 여포는 스스로 서주목(徐州牧)을 칭하였다.

여포의 부장인 하내(河內) 사람 학맹(郝萌)이 밤에 여포를 공격하였다. 여포는 맨머리에 옷을 풀어헤친 채 도독(都督) 고순(高順)의 군영으로 도망쳤다. 고순은 즉시 군대를 정돈하여 여포의 부중으로 들어가 학맹을 토벌하니, 학맹은 싸움에 져 도망쳤다. 날이 밝을 무렵, 학맹의 부장 조성(曹性)이 그를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6 경자일, 양봉과 한선이 헌제를 호종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고, 장양이 길에서 식량을 공급하였다. 가을 7월 갑자일, 헌제의 수레가 낙양에 도착하여 옛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의 집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정축일, 천하에 사면을 내렸다. 8월 신축일, 헌제가 남궁(南宮) 양안전(楊安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장양이 이를 자신의 공로로 여겨 전각 이름을 양안이라고 지었다. 장양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천자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유해야 하는 것이니, 조정에는 자연히 공경대신(公卿大臣)이 있을 것이며, 나 장양은 마땅히 나가서 외적을 막아야 한다."라고 하고는 야왕으로 돌아갔다. 양봉도 나가 양(梁) 땅에 주둔하고, 한선과 동승이 함께 남아 궁중을 호위하였다. 계묘일, 안국장군(安國將軍) 장양을 대사마(大司馬)로, 양봉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한선을 대장군(大將軍) 겸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임명하고 모두 부월(符節)과 부월(斧鉞)을 하사하였다.

당시 낙양의 궁전은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백관들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담벼락 사이에 의지해 살았으며, 각 주군(州郡)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물자를 보내오는 자가 없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상서랑(尚書郎) 이하의 관원들은 스스로 나가 들나물을 캐다 먹었고, 어떤 이는 담벼락 사이에서 굶어 죽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사들에게 살해되기도 하였다.

7 원술이 참위(讖緯)에 "한(漢)을 대신할 자는 도고(塗高) 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음을 듣고 자신의 이름이 이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또 원씨(袁氏)는 진(陳)나라에서 나와 순(舜)의 후예이므로, 토덕(土德, 황색)이 화덕(火德, 적색)을 대신하는 것이 오행(五行)의 차례에 부합한다고 여겨, 참월하고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손견(孫堅)이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견의 아내를 가두어 옥새를 빼앗았다. 헌제가 조양(曹陽)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하들을 모아 제위에 오를 일을 의논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주부(主簿) 엄상(閻象)이 나아가 말하기를 "옛날 주(周)나라는 후직(后稷)으로부터 문왕(文王)에 이르기까지 공덕을 쌓아 천하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서도 여전히 은(殷)나라를 섬겼습니다. 명공(明公)께서 비록 대대로 번창하셨지만 아직 주나라와 같은 성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한실(漢室)이 비록 쇠미하기는 하였으나 은나라 주왕(紂王)과 같은 포학함은 없습니다!"라고 하니, 원술은 침묵하였다.

원술이 은사(隱士) 장범(張範)을 초빙하였으나 장범이 가지 않고, 대신 그의 동생 장승(張承)을 보내 사절하였다. 원술이 장승에게 말하기를 "내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음을 믿고, 제환공(齊桓公)의 패업(覇業)을 본받고 한고조(漢高祖)의 행적을 모방하려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장승이 말하기를 "덕(德)에 달려 있을 뿐 강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덕으로써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면, 비록 필부(匹夫)의 신분으로도 패왕(霸王)의 업을 이룰 수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참월하고 견주기만을 바라며, 시국의 혼란을 틈타 움직인다면, 이는 뭇사람들이 버리는 바이니, 누가 그를 성공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원술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손책(孫策)이 이 소식을 듣고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탕(成湯)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토벌할 때는 ‘하나라 걸왕이 죄가 많다’고 일렀고,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할 때는 ‘은나라 주왕이 큰 죄를 지었다’고 일렀습니다. 이 두 임금은 비록 성스러운 덕이 있었으나, 그 당시 군주에게 도를 잃은 허물이 없었다면 감히 핍박하여 대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황상은 천하 사람들에게 악을 행한 바가 없고, 다만 나이가 어려 강한 신하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을 뿐이니, 이는 상탕(商湯)과 주무(周武)의 시대와는 다릅니다. 더구나 동탁(董卓)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교만하고 횡포하여 그 야망이 끝이 없었고, 급기야 임금을 폐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대신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천하 사람들이 오히려 한마음으로 그를 통탄히 여겼습니다. 하물며 그를 본받아 더욱 심하게 하는 자이겠습니까! 또 듣자하니 어린 군주(幼主)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일찍부터 덕이 있다 하여, 천하가 아직 그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나 모두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명공의 집안은 5대에 걸쳐 재상(宰相)을 지내며 한실(漢室)의 보좌 신하가 되었으니, 받은 영광과 총애의 성대함은 비길 데가 없습니다. 마땅히 충성과 절개를 다하여 왕실에 보답해야 하며, 그리하면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과 같은 아름다운 이름이 천하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도참(圖讖)과 위서(緯書)의 말에 미혹되어, 아무 관련 없는 글자를 억지로 끌어다 대며, 단지 주상을 기쁘게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뿐, 성패(成敗)의 큰 계획을 고려하지 않으니, 이는 고금(古今)이 마땅히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리고, 다른 의견은 증오를 불러일으키지만, 만약 명공의 지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제가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술은 처음에 스스로 회남(淮南)의 무리를 소유하고 있어 손책이 반드시 자신과 함께 모의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의 편지를 받고는 근심과 낙담으로 병이 났다. 그는 손책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손책은 그와 관계를 끊었다.

8 손책이 회계(會稽)를 취하려 하자, 오(吳) 사람 엄백호(嚴白虎) 등이 각각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곳곳에 주둔하며 집결해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엄백호 등을 공격하려 하자, 손책이 말하기를 "엄백호 등은 단지 도적떼일 뿐, 큰 뜻이 없으니 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라고 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넜다. 회계 공조(功曹) 우번(虞翻)이 태수(太守) 왕랑(王朗)에게 권하기를 "손책은 용병(用兵)에 능하니, 그를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왕랑이 듣지 않고 군대를 내어 고릉(固陵)에서 막았다.

손책이 여러 차례 강을 건너 싸웠으나 모두 함락시키지 못했다. 손책의 숙부 손정이 손책에게 권하며 말했다: "왕랑이 험준한 성을 의지해 굳게 지키니, 단번에 깨뜨리기 어렵습니다. 사독은 남쪽으로 여기서 수십 리 떨어져 있으니, 그곳에서 공격하여 그의 내부를 장악해야 합니다. 이른바 '그가 준비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그가 뜻하지 않은 때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손책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 밤에 많은 횃불을 켜서 의병으로 삼고, 한 부대를 갈라 사독도로 보내 고천둔을 기습했다. 왕랑이 크게 놀라, 전 단양태수 주흔 등에게 병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게 했으나, 손책이 주흔 등을 격파하고 그를 참수했다. 왕랑이 도망가자 우번이 뒤쫓아 왕랑을 보호하며 바다를 건너 동야에 이르렀다. 손책이 추격하여 왕랑을 크게 무찌르니, 왕랑이 마침내 손책에게 항복했다.

손책이 스스로 회계태수를 겸하고, 또 우번을 공조로 임명하여 벗의 예로 대우했다. 손책이 사냥 나가기를 좋아하자, 우번이 간하며 말했다: "명부께서 가벼운 차림으로 나가시고 사복 차림으로 은밀히 방문하시니, 따르는 관원들이 경계할 겨를이 없어 이졸들이 항상 이를 괴로워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장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룡이 물고기 모습으로 변해 어부 서저에게 곤란을 당했고, 백사가 스스로 방탕하다가 유방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원하옵건대 조금만 유의하소서!" 손책이 말했다: "그대 말이 옳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다.

9 조조가 허현에 있으면서 천자를 맞이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산동 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과 양봉이 공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한 번에 제압할 수 없습니다." 순욱이 말했다: "옛날 진문공이 주양왕을 맞이하자 제후들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한고조가 의제를 위해 복상하자 천하 사람들이 마음으로 귀의했습니다. 천자가 유랑하신 이래로 장군께서 먼저 의병을 일으키셨으나, 다만 산동 지역이 혼란하여 멀리까지 가서 맞이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천자의 수레가 돌아오고 낙양에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으니, 의사는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백성은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주상을 받들어 백성의 마음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큰 순종이며, 가장 공정한 마음을 지녀 천하를 믿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모략이며, 큰 의리를 붙잡아 영준을 불러들이는 것이 가장 큰 덕행입니다. 사방에 거역하는 세력이 있더라도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섬과 양봉, 어찌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때를 놓쳐 다른 호걸이 이 생각을 품게 하면, 나중에 다시 생각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양무중랑장 조홍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천자를 맞이하게 했으나, 동승 등이 험한 지형을 점거하고 저항하여 조홍이 나아갈 수 없었다.

의랑 동소가 양봉의 병마가 가장 강하지만 당파의 원조가 부족함을 보고, 조조의 명의로 양봉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다: "저와 장군께서는 명성을 듣고 도의를 사모하여 서로 마음을 터놓았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천자를 어려움에서 구하여 옛 도성으로 돌려보내셨으니, 보좌하는 공로가 당대에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 흉악한 무리가 중국을 어지럽히고 사해가 평온하지 않으며, 황위가 지극히 중요하여 일은 유지와 보좌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 현명한 이들에게 의지해 왕실의 길을 맑게 해야 하니, 이는 진실로 한 사람이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복과 사지는 실제로 서로 의지하며 하나가 빠지면 결함이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조정 안의 주관자가 되시고, 저는 외부의 지원자가 되겠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식량이 있고 장군에게는 병마가 있으니, 서로 유무를 통해 충분히 서로를 도울 수 있으며,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을 우리 함께 나누겠습니다." 양봉이 편지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연주의 군대가 허현 가까이에 있어 병사와 식량이 있으니, 바로 국가가 의지하고 바랄 바이다." 이에 함께 상소하여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추천하고, 그의 아버지 작위인 비정후를 계승하게 했다.

한섬이 공을 믿고 교만하며 제멋대로 방자하니, 동승이 매우 걱정하여 은밀히 조조를 불렀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갔다. 도착한 후, 한섬과 장양의 죄를 상주했다. 한섬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단기로 양봉에게 달아났다. 헌제가 한섬과 장양이 호가한 공로가 있다하여 조서를 내려 모두 추궁하지 않았다. 신해일에 조조를 사례교위 겸 녹상서사로 임명했다. 조조가 이에 상서 풍석 등 세 사람을 주살했으니, 이는 죄 있는 자를 토벌한 것이며, 위장군 동승 등 열세 사람을 열후로 봉했으니, 이는 공 있는 자를 상준 것이며, 사성교위 저준을 홍농태수로 추증했으니, 이는 절개를 위해 죽은 자를 표창한 것이다.

조조가 동소를 끌어당겨 함께 앉으며 물었다: "지금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동소가 말했다: "장군께서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멸하고,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고 왕실을 보좌하셨으니, 이는 춘추 오패의 공업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여러 장수들은 인심이 각기 달라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남아 천자를 바로잡는 것은 형세상 여러 불편함이 있으니, 오직 천자를 허현으로 옮기시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조정이 유랑 천도하다가 막 낙양으로 돌아왔으니, 원근의 사람들이 목을 빼고 바라보며 하루아침의 안정을 기대합니다. 지금 다시 도읍을 옮기면 여러 사람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상한 일을 해야 비상한 공을 이룰 수 있으니, 장군께서 이로움과 해로움 중에서 더 나은 쪽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조조가 말했다: "이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양봉이 가까운 양현에 있는데, 그의 군대가 정예하다고 들었으니, 나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는가?" 동소가 말했다: "양봉은 동당과 원조가 부족하여 마음속으로 장군과 사귀고자 합니다. 진동장군과 비정후의 임명은 모두 양봉이 결정한 것입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후한 예물로 답례하여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에게 '경성에 식량이 없어 천자를 잠시 노양으로 옮기시려 합니다. 노양은 허현과 가까워 식량 운반이 조금 쉬워 결핍과 단식의 걱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양봉은 용감하지만 꾀가 부족하여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자가 한 번 왕래하는 사이에 큰 계획을 정하기에 충분하니, 양봉이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좋다!" 곧바로 사자를 보내 양봉을 만나게 했다. 경신일에 천자의 수레가 환원고개를 나와 동쪽으로 행진하여 마침내 허현으로 천도했다. 9월 기사일에 천자의 수레가 허현에 도착하여 조조의 군영에 머물렀다. 갑술일에 조조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무평후로 봉했다. 허현에 종묘와 사직단을 세우기 시작했다.

9월, 사도 순우가, 태위 양표, 사공 장희가 모두 파면되었다.

천자의 수레가 동쪽으로 천도할 때, 양봉이 양현에서 요격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조조가 양봉을 정벌하자 양봉은 남쪽으로 원술에게 달아났고, 조조가 이에 양봉이 양현에 둔 병사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서가 원소에게 내려져 꾸짖어 말했다: "땅은 넓고 병력은 많으면서도 오직 자신의 당파만 키우고, 부왕하는 군대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다만 제멋대로 서로 공격할 뿐이다." 원소가 상소하여 힘껏 스스로 변명했다. 11월 무진일에 원소를 태위로 임명하고 업후로 봉했다. 원소가 관직이 조조 아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노하여 말했다: "조조가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내가 항상 그를 살렸다. 지금 그가 천자를 협박해 나에게 명령하려는가!"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조가 두려워하여 대장군의 자리를 원소에게 양보할 것을 청했다. 병술일에 조조를 사공으로 임명하고 거기장군의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조조가 순욱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상서령을 대행하게 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지략 있는 인재를 묻자, 순욱이 그의 조카인 촉군태수 순유와 영천인 곽가를 추천했다. 조조가 순유를 상서로 징소하여 그와 이야기하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공달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와 함께 큰일을 꾀할 수 있다면, 천하에 무엇을 걱정하랴!" 그를 군사로 임명했다.

当初,郭嘉이 원소를 알현하자 원소가 그를 매우 존중하고 예우하였다. 수십 일을 머무른 뒤, 곽가는 원소의 모신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군을 신중히 헤아리므로 만전을 기해 공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원공은 겉으로는 주공이 현사를 예우한 것을 본받을 뿐, 인재를 쓰는 요체를 알지 못합니다. 일이 많아도 요령이 없고,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나 결단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천하의 큰 어려움을 구하고 패왕의 업을 이루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나는 다른 주인을 찾으려 하는데, 그대들은 어찌 떠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말했다. “원씨는 천하에 은덕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또 지금 그가 가장 강성한데, 그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곽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함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들을 떠났다. 조조가 곽가를 불러 천하의 큰일을 논하며 기뻐하며 말했다. “나로 하여금 대업을 이루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곽가가 나와서도 기뻐하며 말했다. “참으로 나의 주인이다!” 조조가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사제주로 임명하였다.

조조가 산양 사람 만총을 허현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조조의 사촌형 조홍에게 허현 경계에서 여러 번 법을 어기는 빈객이 있었는데, 만총이 체포하여 징계하였다. 조홍이 만총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부탁했으나 만총이 듣지 않았다. 조홍이 이 일을 조조에게 알리자, 조조가 곧 허현의 주사 관리들을 불렀다. 만총은 조조가 그 빈객들을 사면하려 할 것을 알고는 재빨리 그들을 처형하였다. 조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일을 처리함에 어찌 이와 같이 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북해태수 공융은 높은 뜻에 의지하여 난을 평정하려 했으나, 재주는 소략하고 뜻은 커서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고담준론과 청담으로 가르침을 베풀어 관청에 가득했으며, 말투와 기품이 온화하고 우아하여 음미하고 읽을 만했지만, 구체적인 일을 논하고 실제를 고찰함에 있어서는 다 시행하기 어려웠다. 그는 오직 큰 그물을 치되 그물코는 매우 성글게 할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인심을 얻을 수 있었으나, 오래되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가 임용한 사람들은 기재이사를 좋아하여 대부분 경박하고 날랜 소재들이었다. 덕망 높은 명유 정현에게는 자손의 예를 행하며, 정현의 고향을 정공향으로 개명하였다. 청렴하고 준수한 선비 좌승조, 유의손 등은 단지 자리만 차지하게 할 뿐, 그들과 정사를 논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백성이 우러러보니 잃을 수 없다.”

황건적이 침략해오자 공융이 패하여 도창으로 도망쳐 굳게 지켰다. 당시 원소와 공손찬이 서로 호응하고 있었는데, 공융은 병력이 약하고 식량이 부족하여 한 구석에 고립되어 그들과 통할 수 없었다. 좌승조가 공융에게 강한 세력에 의탁하라고 권했으나, 공융이 듣지 않고 그를 죽였다. 유의손은 그를 떠났다. 청주자사 원담이 공융을 공격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이르렀고, 남은 병사는 겨우 수백 명뿐이었으며, 화살이 빗발쳤지만 공융은 여전히 책상에 기대어 글을 읽으며 담소를 태연히 하였다. 성이 밤에 함락되자 공융은 동산으로 도망갔고, 처자는 원담에게 사로잡혔다. 조조는 공융과 옛 교분이 있어 그를 불러 장작대장으로 삼았다.

원담이 처음 청주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영토는 황하에서 서쪽으로 평원현에 지나지 않았다. 원담이 북으로 전해를 밀어내고 동으로 공융을 격파하여 위엄과 은혜가 매우 뚜렷했다. 그러나 후에 소인배들을 믿고 방탕하고 사치하며 음란해져 명성이 쇠퇴하였다.

중평 연간 이후로 천하가 동란하여 백성들은 농업을 버렸고, 각 군대가 함께 일어나 대부분 곡식이 부족하여 종년의 계획이 없었다. 배고프면 약탈하고, 배부르면 남은 것을 버려 토붕와해하고 흩어져 적도 없이 스스로 무너진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소는 황하 이북에서 군대가 뽕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고, 원술은 장강과 회하 사이에서 조개를 먹었다.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었고, 주와 현은 쓸쓸해졌다. 우림감 조지는 둔전제를 세우기를 청했고, 조조가 이를 따라 조지를 둔전도위로, 기도위 임준을 전농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백성을 모집하여 허현 근처에 둔전을 하여 수백만 곡의 곡식을 거두었다. 이에 주와 현에서도 관을 설치하여 각처에 곡식을 비축하여 창고가 가득 찼다. 그러므로 조조가 사방을 정벌할 때 수송의 고통이 없어 마침내 군웅을 병합할 수 있었다. 군대와 나라의 부유함은 조지로부터 시작되어 임준이 완성하였다.

원술이 여포가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여 아들의 혼사를 청하자, 여포가 또 승낙하였다. 원술이 장군 기령 등을 보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게 하자, 유비가 여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여포의 장수들이 말했다. “장군께서 항상 유비를 죽이려 하셨는데, 지금 원술의 손을 빌려 제거하심이 좋겠습니다.” 여포가 말했다. “아니다. 원술이 유비를 이기면 북으로 태산의 여러 장수들과 연합할 것이니, 나는 원술의 포위 속에 놓이게 된다.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급히 달려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오자 모두 군대를 거두고 공격을 멈추었다. 여포가 패성 서남쪽에 주둔하고, 시자를 보내 기령 등을 청하니, 기령 등도 여포를 청하였다. 여포가 가서 그들과 만나 유비와 함께 술을 마시며 식사하였다. 여포가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은 나 여포의 아우인데, 여러분에게 포위되었으므로 내가 구하러 온 것이다. 나 여포는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싸움을 푸는 것을 좋아한다.” 이에 군후에게 명하여 영문에 창을 세우게 하고, 여포가 활을 당겨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내가 창의 작은 가지를 쏘는 것을 보라. 맞히면 각자 군대를 거두고, 맞히지 못하면 결투를 하라.” 여포가 곧 한 발을 쏘아 정확히 창의 작은 가지를 맞혔다. 기령 등이 모두 놀라며 말했다. “장군께서는 참으로 하늘의 위엄이십니다!” 다음 날 다시 즐거이 모이고 나서 각자 군대를 거두었다.

유비가 군사를 모아 1만여 명을 얻자, 여포가 그를 싫어하여 친히 병사를 내어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가 패하여 달아나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조조가 후하게 대우하여 예주목으로 임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영웅의 뜻이 있으니, 지금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이 일을 곽가에게 묻자, 곽가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의병을 일으켜 백성을 위해 포악한 자를 제거하고, 진심과 신의로 준걸을 초빙하시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십니다. 지금 유비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궁지에 몰려 와서 귀의하였는데, 그를 죽이면 현자를 죽인다는 명분이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지모 있는 선비들이 스스로 의심하여 다른 주인을 선택할 것이니, 공께서 누구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시겠습니까! 한 사람의 화를 없애려다 천하의 기대를 막는 것은, 안위의 관건이니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 말이 옳다!” 이에 유비에게 병력을 더하고 군량을 공급하여 동쪽 패현으로 가서 흩어진 병사를 모아 여포를 도모하게 하였다.

当初, 유비가 예주에 있을 때 진군 사람 원환을 모재로 천거하였다. 원환이 여포에게 억류되었는데, 여포가 원환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유비를 욕하려 했으나 원환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강요해도 여전히 따르지 않았다. 여포가 크게 노하여 병기로 위협하며 말했다. “쓰면 살고, 쓰지 않으면 죽는다!” 원환이 안색도 변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덕만이 사람을 욕되게 할 수 있다고 들었을 뿐, 욕설로는 그렇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가 군자라면 장군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가 참으로 소인이라면 장군의 뜻을 되받아칠 것이니, 욕을 당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장군입니다. 게다가 내가 전에 유 장군을 섬길 때도 지금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약 언젠가 내가 이곳을 떠나 다시 장군을 욕한다면, 괜찮겠습니까?” 여포가 부끄러워하며 그만두었다.

장제가 관중에서 군대를 이끌고 형주 경내로 들어와 양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죽었다.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하러 오자, 유표가 말했다. “장제가 궁지에 몰려 왔는데, 주인이 예의가 없어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니다. 나는 조문을 받고 축하는 받지 않는다.” 사람을 보내 장제의 부하들을 받아들였다. 부하들이 듣고 기뻐하여 모두 유표에게 마음을 돌렸다. 장제의 족자이며 건충장군인 장수가 대신 부하들을 거느려 완성에 주둔하였다.

当初,헌제가 장안을 떠난 후, 선위장군 가후는 인수를 반납하고 화음으로 가서 단외에게 의탁했다. 가후는 평소 명망이 있어 단외의 부하들에게 존경받았고, 단외는 그에게 예우를 지극히 갖추었다. 가후는 은밀히 장수에게 투신할 계획을 세우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단외가 그대를 후하게 대하는데, 떠나서 어디로 가려는가?” 가후가 말했다. “단외는 성품이 의심이 많아 나를 꺼리는 뜻이 있으니, 예우가 비록 두터워도 오래 의지할 수 없어 결국 그에게 해를 입을 것이다. 내가 떠나면 그는 반드시 기뻐하고, 또 내가 외부의 강력한 원조를 맺을 것을 바라므로 반드시 내 처자를 후하게 대할 것이다. 장수는 주모할 사람이 없어 나를 얻고자 하니, 이렇게 하면 집과 몸이 모두 보전될 것이다.” 가후가 마침내 떠나자, 장수는 자손의 예로 대우했고, 단외는 과연 그의 가족을 잘 대우했다. 가후는 장수에게 유표에게 의탁할 것을 권했고, 장수는 따랐다. 가후가 가서 유표를 만나니, 유표는 빈객의 예로 그를 접대했다. 가후가 말했다. “유표는 태평 시대의 삼공 재목이지만, 변고를 보지 못하고 의심이 많아 결단하지 못하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유표는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길렀으며, 한가로이 자보하여 경내가 안정되고 조용했으며, 관서, 연주, 예주의 학자들이 귀순해 온 자가 천 명에 이르렀다. 유표는 이에 학교를 세우고 경술을 강습하고 밝혔으며, 옛 아악랑 하남 사람 두기를 불러 아악을 제작하게 했다. 악곡이 완비되자, 유표는 뜰에서 감상하려 했다. 두기가 말했다. “지금 장군의 칭호는 천자가 아닌데, 악을 합쳐 뜰에서 연주하는 것은 아마도 안 될 일입니다!” 유표가 이에 그만두었다.

평원 사람 미형은 나이가 어렸으나 재주와 변론이 뛰어났지만, 기개를 숭상하고 강직하고 오만했다. 공융이 그를 조조에게 추천했다. 미형이 조조를 욕하자, 조조가 노하여 공융에게 말했다. “미형 그 놈, 내가 죽이는 것은 참새나 쥐를 죽이는 것과 같을 뿐이지만, 이 사람이 평소 허명이 있어 원근 사람들이 내가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두렵다.” 이에 미형을 유표에게 보냈고, 유표는 맞이하여 예우하고 상빈으로 대접했다. 미형은 유표의 미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지만, 좋아하기를 유표의 좌우 측근을 논하며 깎아내렸다. 이에 측근들이 기회를 타서 참언하여 말했다. “미형이 장군의 인덕을 칭송하여 서백(周文王)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으나, 다만 장군이 결단하지 못하여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반드시 이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유표의 단점을 지적한 것이지만, 미형이 말한 것은 아니었다. 유표가 이에 노하여, 강하태수 황조의 성격이 급하다는 이유로 미형을 그에게 보냈고, 황조도 미형을 잘 대우했다. 후에 미형이 공공연히 황조를 모욕하자, 황조가 그를 죽였다.

건안 2년(정축, 서기 197년)

1 봄, 정월, 조조가 장수를 토벌하고 욱수에 주둔하자,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다.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취하자, 장수가 이를 원망했다. 조조가 또 장수의 맹장 호아에게 금을 주자, 장수가 듣고 의심하여 두려워하며 조조의 군대를 습격하여 조조의 장남 조앙을 죽였다. 조조가 유시에 맞아 패퇴하여 달아났고, 교위 전위가 장수와 힘껏 싸웠으나 좌우가 거의 모두 죽거나 다쳤으며, 전위는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장수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 그를 공격하자, 전위가 두 팔로 두 사람을 끼어 죽이고 눈을 부릅뜨고 욕하며 죽었다. 조조가 흩어진 병사를 모아 무음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오자, 조조가 그를 격파했고, 장수는 양성으로 도망가 다시 유표와 연합했다.

이때 각 군대가 크게 혼란했으나, 평로교위 태산 사람 우금만이 부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는 길에 청주병이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 우금이 그 죄목을 열거하고 공격했다. 청주병이 도망가 조조에게 고발했다. 우금이 도착한 후, 먼저 진영을 세우고 즉시 조조를 알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우금에게 말했다. “청주병이 이미 당신을 고발했으니, 빨리 가서 조공께 분별해야 합니다.” 우금이 말했다. “지금 적병이 뒤에 있고 추격병이 언제든지 올 터인데, 먼저 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대적하겠습니까! 게다가 조공께서는 명찰하시니, 참언이 어찌 통하겠습니까!” 그는 태연히 참호를 파고 진영을 안정시킨 후에야 조조를 알현하여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조조가 매우 기뻐하며 우금에게 말했다. “욱수의 재난에 나조차도 곤란했는데, 장군이 혼란 속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폭란을 토벌하며 진영을 견고히 하여 흔들리지 않는 절개를 보였으니, 비록 고대의 명장이라도 어찌 능가하겠는가!” 이에 우금의 전후 공로를 기록하여 익수정후에 봉했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허도로 돌아갔다.

2 원소가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투가 거만했다. 조조가 순욱과 곽가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불의한 자를 토벌하려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사람이 대답했다. “유방과 항우의 불리함은 폐하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한 고조는 지혜로 항우를 이겼으므로, 항우가 비록 강했으나 끝내 사로잡혔습니다. 지금 원소는 열 가지 패배가 있고, 폐하께는 열 가지 승리가 있으니, 원소가 비록 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원소는 번잡한 예절과 많은 의례를 숭상하나, 폐하께서는 자연스러움을 체현하시니, 이것이 도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역으로 움직이나, 폐하께서는 순리에 따라 천하를 통솔하시니, 이것이 의에서 이깁니다. 환제와 영제 이래로 정령이 너그러움에 잘못되어 원소는 너그러움으로 너그러움을 구제하므로 통제하지 못하나, 폐하께서는 강맹으로 바로잡아 상하가 절도를 알게 하시니, 이것이 다스림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너그럽고 속으로는 시기하여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하며, 임용하는 자는 친척 자제뿐이나, 폐하께서는 겉으로는 평이하고 속으로는 민첩하고 명찰하여 사람을 쓰면서 의심하지 않고 오직 재능만을 쓰며 친소를 가리지 않으시니, 이것이 도량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계획이 많으나 결단이 적어 실수가 일을 마친 뒤에 있으나, 폐하께서는 계책을 얻으면 즉시 시행하여 변화에 무궁히 응하시니, 이것이 모략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고담준론과 공손한 사양으로 명예를 얻고, 헛된 말을 좋아하고 외면을 꾸미는 자가 많이 따르나,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허명을 구하지 않아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원대한 안목을 가진 실무적인 자들이 모두 쓰이기를 원하니, 이것이 덕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사람이 굶주리고 추움을 보면 가엾게 여기고 생각하여 얼굴에 나타내나, 보지 못한 곳에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폐하께서는 작은 일에 대해서는 때로 소홀히 하시나, 큰 일에 이르러서는 사해와 연결되어 은혜를 베푸심이 모두 그들의 기대를 넘으며, 보지 못한 곳에서도 생각이 빠짐없으시니, 이것이 인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대신들이 권력을 다투고 참언이 어지럽히나, 폐하께서는 부하를 도로써 통제하시어 참언이 스며들지 못하니, 이것이 명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나, 폐하께서는 옳다고 여기면 예로써 등용하고, 그르다고 여기면 법으로써 바로잡으시니, 이것이 문에서 이깁니다. 원소는 허장성세를 좋아하여 병법의 요결을 알지 못하나, 폐하께서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이기고 병법을 신처럼 써서 군인이 의지하고 적이 두려워하니, 이것이 무에서 이깁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내가 무슨 덕이 있어 감당하겠는가!” 곽가가 또 말했다. “원소가 지금 북쪽으로 공손찬을 치고 있으니, 그가 원정 간 틈을 타 동쪽으로 여포를 공략하십시오. 만약 원소가 쳐들어오면 여포가 그의 원군이 되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말했다. “먼저 여포를 취하지 않으면 하북을 도모하기 쉽지 않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옳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또 원소가 관중을 침범하여 서쪽으로 오랑캐와 강족을 어지럽히고, 남쪽으로 촉과 한을 꾀면, 내가 홀로 연주와 예주로 천하의 6분의 5를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욱이 말했다. “관중의 장수는 열 명이 넘지만 통일되지 않았고, 오직 한수와 마등이 가장 강합니다. 그들은 산동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반드시 각자 병력을 거느리고 스스로를 보전할 것입니다. 지금 은덕으로 회유하고 사자를 보내 연합하면 비록 오래 안정되지는 못하나, 폐하께서 산동을 안정시키실 때까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시중, 상서복야 종요는 지혜와 모략이 있으니, 서방의 일을 그에게 맡기시면 폐하께서는 근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표문을 올려 종요를 시중으로서 사례교위를 대행하게 하고, 부절을 주어 관중의 모든 군대를 감독하게 하며, 특별히 제도에 구속받지 않도록 명했다. 종요가 장안에 도착하여 마등, 한수 등에게 편지를 보내 화복을 설명하자, 마등과 한수가 각자 아들을 입조시켰다.

3 원술이 수춘에서 황제라 칭하며 스스로 중가라 하고, 구강태수를 회남윤으로 임명하고, 공경 백관을 설치하여 남교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패상 진규는 진구의 동생의 아들로, 젊었을 때 원술과 교류했다. 원술이 편지를 보내 진규를 부르고, 또 그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반드시 진규를 불러오려 했다. 진규가 답장하여 말했다. “조 장군이 전장 법도를 부흥하여 흉악하고 간사한 자를 쓸어버리려 하니, 나는 그대가 마땅히 마음을 합쳐 한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대가 도리어 음모를 꾸며 화를 자초하고, 나를 사사로이 아첨하게 하려 하니, 나는 차라리 죽어도 따르지 못합니다.” 원술이 원 연주자사 김상을 태위로 임명하려 했으나, 김상이 따르지 않고 도망가자, 원술이 그를 죽였다.

4 3월, 헌제가 조서를 내려 장작대장(將作大匠) 공융(孔融)에게 절(節)을 지니고 원소(袁紹)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기주(冀州)·청주(青州)·유주(幽州)·병주(并州)를 감독하게 하였다.

5 여름 5월, 메뚜기 떼가 발생하였다.

6 원술(袁術)이 사자 한윤(韓胤)을 보내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여포(呂布)에게 알리고, 며느리를 맞아들이기를 청하였다. 여포는 딸을 한윤과 함께 가게 하였다. 진규(陳珪)는 서주(徐州)와 양주(揚州)가 연합하여 화근이 끊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포에게 가서 설득하였다. “장군은 조공(曹公)이 천자를 받들어 나라의 정치를 보좌하니, 마땅히 그와 함께 계책을 세우고 큰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반드시 불의(不義)의 명성을 얻어 알이 쌓인 듯한 위태로움(累卵之危)이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또한 원술이 당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딸이 이미 길에 나섰으므로 쫓아가서 데려와 혼인을 끊고, 한윤을 압송하여 허도(許都) 저자에서 목을 베어 효수하였다.

진규는 아들 진등(陳登)이 조조(曹操)를 만나게 하려 하였으나, 여포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조서가 내려져 여포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하고, 조조가 또 여포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 깊이 위로하고 받아들였다. 여포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진등을 보내 장계를 올려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아울러 조조의 편지에 답장하게 하였다. 진등이 조조를 만나자, 이 기회에 여포가 용맹은 있으나 지혜가 없고 쉽게 배반하니, 마땅히 일찍 도모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조조가 말하였다. “여포는 승냥이 같은 마음을 가진 들짐승이라, 참으로 오래 기르기 어렵다. 그대가 아니면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다.” 즉시 진규의 봉록을 중이천석(中二千石)으로 올리고, 진등을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임명하였다. 이별할 때 조조가 진등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동쪽 일은 그대에게 맡기노라.” 그에게 은밀히 부하를 모아 내응하게 하였다.

처음에 여포는 진등을 통해 서주목(徐州牧)을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진등이 돌아오자 여포가 노하여 극을 빼어 책상을 내리치며 말하였다. “네 아비가 나에게 조조와 협력하여 원술과의 혼인을 끊도록 권하였는데, 지금 내가 청한 것은 얻지 못하고 너희 부자는 모두 벼슬이 높고 중하게 쓰이니, 이는 다만 너에게 속은 것이다!” 진등은 놀라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제가 조공을 뵙고 말하기를 ‘장군을 기르기를 마치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이 하여, 그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며,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먹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조공이 말씀하시기를 ‘네 말과 같지 않다. 마치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굶주리면 쓸 수 있고 배부르면 날아가 버린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여포의 노여움이 비로소 풀렸다.

원술이 휘하 대장 장훈(張勳), 교기(橋蕤) 등을 보내 한섬(韓暹)과 양봉(楊奉)과 연합하게 하니,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곧바로 하비(下邳)로 향하여 일곱 길로 나누어 여포를 공격하였다. 당시 여포는 병사가 겨우 삼천 명, 말이 사백 필뿐이어서 적을 당해내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진규에게 말하였다. “지금 원술의 대군을 불러들인 것은 모두 그대가 낸 계책 때문인데, 지금 어찌해야 하는가?” 진규가 말하였다. “한섬과 양봉은 원술과 급히 맺은 군대일 뿐, 계책이 미리 정해지지 않아 서로 붙들어 매지 못합니다. 제 아들 진등이 보기에, 그들은 마치 함께 묶인 닭과 같아서 반드시 함께 머물지 못할 것이니, 곧 흩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따라 편지를 써서 한섬과 양봉에게 보내 말하였다. “두 장군은 일찍이 친히 천자를 구출하였고, 나는 손수 동탁(董卓)을 죽였으니, 모두 공명을 세웠거늘, 지금 어찌 원술과 함께 도적이 되려 하는가! 우리가 힘을 합쳐 원술을 깨뜨려 국가를 위해 해를 제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원술의 모든 군수 물자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한섬과 양봉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마음을 바꾸어 여포에게 붙었다. 여포가 진군하여 장훈의 진영에서 백 보쯤 떨어졌을 때, 한섬과 양봉의 병사들이 함께 큰 소리로 외치며 일제히 장훈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장훈 등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여포의 군대가 추격하여 적장 열 명의 목을 베었으며,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거의 전군이 전멸할 정도였다. 여포는 이에 한섬, 양봉과 합병하여 수춘(壽春)으로 진군하며 수로와 육로로 나아가 종리(鍾離)에 이르러 노략질을 한 후 회수(淮水) 북쪽으로 철수하며 편지를 남겨 원술을 욕보였다. 원술이 친히 보병과 기병 오천 명을 거느리고 회수 가에서 군세를 과시하였으나, 여포의 기병들은 모두 회수 북쪽 기슭에서 그를 크게 비웃고는 돌아갔다.

태산(泰山)의 도적 괴수 장패(臧霸)가 거현(莒縣)에서 낭야상(琅邪相) 소건(蕭建)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장패는 소건의 물자와 보물을 노획하여 그 일부를 여포에게 주기로 약속하였으나 보내지 않자, 여포가 직접 가서 요구하였다. 여포의 부장 고순(高順)이 간하여 말하였다. “장군의 위명은 사방에 떨쳐져 원근에서 두려워하니,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못 얻을 것이 없는데, 어찌 직접 가서 재물을 구하십니까!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장군의 위명을 해치지 않겠습니까?” 여포가 듣지 않았다. 거현에 이르렀을 때, 장패 등은 여포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성을 굳게 지키며 저항하였고, 여포는 얻은 것 없이 돌아갔다.

고순은 성품이 청렴하고 위엄이 있으며 말수가 적었다. 그가 거느린 칠백여 명의 병사는 호령이 엄격하고 명확하여,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겼으며,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렸다. 여포는 나중에 고순을 멀리하고, 위속(魏續)이 자신과 내외 친척 관계에 있으므로 고순의 병권을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가, 싸울 때가 되면 다시 고순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으나, 고순은 끝내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여포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일에 일정함이 없었다. 고순이 자주 간하여 말하였다. “장군의 거동은 자세히 생각하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실수가 있으면, 곧잘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잘못을 어찌 거듭할 수 있습니까!” 여포는 그의 충성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았다.

조조가 의랑(議郎) 왕부(王誧)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손책(孫策)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고, 오정후(烏程侯)의 작위를 잇게 하며,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하게 하고, 여포 및 오군태수(吳郡太守) 진우(陳瑀)와 함께 원술을 토벌하게 하였다. 손책은 장군의 칭호를 얻어 위세를 높이고자 하였고, 왕부는 마음대로 조정의 명의로 임시로 손책을 명한장군(明漢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손책이 행장을 정리하고 전당(錢唐)에 이르렀을 때, 진우가 은밀히 손책을 습격하려 하여, 몰래 조랑(祖郎), 엄백호(嚴白虎) 등과 결탁하여 내응하게 하였다. 손책이 이를 알아차리고, 부장 여범(呂范)과 서일(徐逸)을 보내 해서(海西)에서 진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진우가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원소에게 달아났다.

당초 진왕(陳王) 유총(劉寵)은 용력이 있고 활과 쇠뇌 쏘기를 잘하였다.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자 유총은 군대를 정비하여 스스로 방어하였고, 진국(陳國)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진국상(陳國相) 회계(會稽) 사람 준준(駱俊)은 일찍이 위엄과 덕망이 있었는데, 당시 왕후들은 조세와 봉록이 없었고 또 자주 약탈을 당하여, 어떤 이는 이틀에 한 끼를 먹으며 구렁텅이에서 죽어갔다. 오직 진국만이 부유하고 강성하여 이웬 군현의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붙었고, 무리 십여만 명을 거느렸다. 주군(州郡)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총은 무리를 거느리고 양하(陽夏)에 주둔하며 자칭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이라 하였다. 원술이 진국에 곡식을 요구하였으나 준준이 거절하자, 원술이 성을 내어 원한을 품고 자객을 보내 거짓으로 준준과 유총을 죽였고, 진국은 이로부터 무너졌다.

가을 9월, 사공(司空) 조조가 동쪽으로 원술을 정벌하였다. 원술은 조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며, 부장 교기 등을 기양(蘄陽)에 남겨 조조를 막게 하였으나, 조조가 교기 등을 격파하여 모두 참수하였다. 원술은 회수를 건너 도망쳤는데, 당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사민(士民)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원술은 이로부터 쇠퇴하였다.

조조가 진국 사람 하기(何夔)를 불러 속관으로 삼고, 원술이 어떠한지 물었다. 하기가 대답하였다. “하늘이 돕는 것은 때에 순응하는 자요, 백성이 돕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원술은 믿음과 때에 순응하는 실제 행실이 없으면서 하늘과 백성의 도움을 바라니,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조조가 말하였다. “나라를 다스림에 어진 이를 잃으면 망하나니, 네가 원술에게 쓰이지 않은 것 보면, 그가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조조의 성격이 엄격하여 속관들이 공무를 볼 때 자주 곤장을 맞곤 하였다. 하기는 항상 독약을 준비하여 죽기로 욕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기에, 끝내 매를 맞지 않았다.

패국(沛國) 사람 허저(許褚)는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소년과 종족 수천 집을 모아 성벽을 굳게 지키며 외적을 막았고, 회수(淮水)·여수(汝水)·진국(陳國)·양국(梁國) 일대의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조조가 회수와 여수 지방을 순시할 때, 허저가 무리를 거느리고 조조에게 귀부하자, 조조가 말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번쾌(樊噲)로다!” 당일에 그를 도위(都尉)로 임명하고, 궁중에 들어와 경호하게 하였다. 허저를 따르던 협객들은 모두 호사(虎士)로 임명되었다.

전태위 양표(楊彪)는 원술(袁術)과 인척 관계였는데, 조조(曹操)가 그를 싫어하여, 그가 황제를 폐립하려 음모했다고 무고하고, 주청하여 그를 체포해 옥에 가두고 대역무도한 죄명으로 탄핵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공융(孔融)이 이 소식을 듣고 조복(朝服)도 입을 겨를 없이 조조를 찾아가 말했다. “양공(楊公)은 사대(四代)에 걸쳐 청정한 덕행을 지녀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봅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부자형제가 범죄하더라도 서로 연좌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원씨(袁氏)의 죄과를 양공에게 돌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이는 국가의 뜻이오.” 공융이 말했다. “가령 성왕(成王)이 소공(召公)을 죽였다면, 주공(周公)이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허현현령(許縣縣令) 만총(滿寵)을 보내 양표의 사건을 심리하게 했다. 공융과 상서령(尚書令) 순욱(荀彧)은 모두 만총에게 당부했다. “마땅히 공술(供述)만 받고 고문을 가하지 마시오.” 만총은 일체 개의치 않고 법대로 고문하며 신문했다. 며칠 후, 만총이 조조를 찾아가 아뢰었다. “양표를 고문했으나 다른 공술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천하에 명망이 높아, 만약 그의 죄과가 분명하지 않다면 반드시 민심을 크게 잃을 것입니다. 제가 사사로이 명공(明公)을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조조는 그날로 양표를 사면하고 석방했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고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했으나, 양표가 이로 인해 석방되자 오히려 만총을 더욱 후하게 대했다. 양표는 한나라 황실이 쇠미해지고 정권이 조씨(曹氏)의 손에 장악된 것을 보고,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다고 칭하며 십여 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마일제(馬日䃅)의 영구가 서울에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예우를 더하려고 의논했다. 공융이 말했다. “마일제는 상공(上公)의 존귀한 지위에, 모절(旄節)을 손에 쥐고 사신으로 나갔으면서도, 마음을 굽혀 간신에게 아첨하고 그에게 견제당했습니다. 왕실 대신으로서 어찌 협박당했다는 것을 핑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옛 신하를 가엾게 여겨 추궁을 참으셨으나, 예우를 더해서는 안 됩니다.” 조정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금상(金尚)의 영구가 서울에 도착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백관들에게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고, 그의 아들 금위(金瑋)를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겨울, 11월에 조조가 다시 장수(張繡)를 공격하여 호양(湖陽)을 함락시키고, 유표(劉表)의 부장 등제(鄧濟)를 사로잡았다. 또 무음(舞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한섬(韓暹)과 양봉(楊奉)이 하비(下邳)에 있다가 서주(徐州)와 양주(揚州) 일대에서 약탈하던 중, 군량이 떨어져 여포(呂布)에게 작별을 고하고 형주(荊州)로 가고자 했다. 여포가 허락하지 않았다. 양봉은 유비(劉備)가 여포와 옛 원한이 있음을 알고, 사사로이 유비와 연락하여 함께 여포를 공격하려 했다. 유비는 거짓으로 승낙했다. 양봉이 군대를 이끌고 패현(沛縣)에 이르자, 유비가 양봉을 성 안으로 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반도 못 되어 자리에서 양봉을 결박하여 죽였다. 한섬은 양봉을 잃고 고립무원이 되어, 열 명 남짓한 기병을 데리고 병주(幷州)로 도망쳤으나, 추추현령(抒秋縣令) 장선(張宣)에게 살해당했다. 호재(胡才)와 이락(李樂)은 하동(河東)에 남아 있었는데, 호재는 원수에게 살해당하고, 이락은 스스로 병사했다. 곽사(郭汜)는 그의 부장 오습(伍習)에게 살해당했다.

영천(潁川) 사람 두습(杜襲), 조엄(趙儼), 번흠(繁欽)이 형주로 피난하여 유표를 의지했는데, 유표는 모두 빈객의 예로 대접했다. 번흠이 여러 번 유표 앞에서 재능을 드러내자, 두습이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내가 그대와 함께 온 이유는 다만 자신을 보전하여 때를 기다리려는 것일 뿐인데, 어찌 유목(劉牧)이 난을 바로잡을 주인공이라 생각하여 종신토록 의탁하려는 것이겠소! 그대가 이처럼 쉬지 않고 재능을 드러낸다면, 나와 같은 무리가 아니니, 나는 그대와 절교하겠소!” 번흠이 감탄하며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후에 조조가 천자를 맞이하여 허현(許縣)에 도읍을 정하자, 조엄이 번흠에게 말했다. “조진동(曹鎭東, 조조)이 반드시 천하를 바로잡고 구제할 것이니, 나는 누구에게 귀의해야 할지 알겠소!” 이에 돌아가 조조에게 귀의했고, 조조는 조엄을 낭릉현장(朗陵縣長)에 임명했다.

양안도위(陽安都尉) 강하(江夏) 사람 이통(李通)의 장인의 백부가 법을 범하자, 조엄이 그를 체포하여 처벌하고 사형에 처했다. 당시 생살대권(生殺大權)은 주목과 군수에게 장악되어 있었는데, 이통의 처자식이 울며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통이 말했다. “나는 지금 조공(曹公)과 마음을 합쳐 힘을 모으고 있으니, 의리상 사사로움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칠 수 없소!” 그는 조엄이 법을 굽히지 않음을 칭찬하고, 조엄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건안 3년(무인, 서기 198년)

봄, 정월에 조조가 허현으로 돌아왔다. 3월에 다시 장수를 공격하려 했다. 순유(荀攸)가 말했다. “장수는 유표와 서로 의지하여 강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장수는 유랑하는 군대라 유표에게 군량을 의존하는데, 유표가 장기간 공급할 수 없어 그들은 반드시 분열할 것입니다. 차라리 공격을 늦추어 때를 기다리면 그를 항복하게 유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너무 급박하게 몰아가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입니다.” 조조가 듣지 않고 장수를 양현(穰縣)에 포위했다.

여름, 4월에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裴茂)를 보내 황제의 조서로 관중(關中)의 여러 장수 단외(段煨) 등에게 이각(李傕)을 토벌하게 하여 그의 삼족(三族)을 모두 주멸했다. 단외를 안남장군(安南將軍)에 임명하고 문향후(閿鄕侯)에 봉했다.

당초 원소(袁紹)는 조서를 받을 때마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을까 걱정하여, 천자를 자기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조조에게 “허현은 지대가 낮고 습하며, 낙양(洛陽)은 파괴되어 쓸 수 없으니, 도읍을 연성(鄄城)으로 옮겨 풍부하고 완비된 지역에 가까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게 했다. 조조가 거절했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권했다. “천도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일찍 허현을 도모하여 천자를 맞이하고, 행동은 조서라고 칭탁하여 천하에 호령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침내 남에게 사로잡힐 것이니, 비록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마침 원소의 도망병이 조조에게 가서 “전풍이 원소에게 허현을 습격하도록 권했다”고 알리자, 조조는 양현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했다. 5월에 유표가 병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여 안중(安衆)에 주둔하고, 험한 지형을 차단하여 조군의 후퇴로를 막았다. 조조가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내가 안중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물리칠 것이다.” 안중에 이르자, 조군은 앞뒤로 적에게 포위당했다. 조조는 밤에 험한 길을 뚫어 도망치는 척했다. 유표와 장수가 전군을 이끌고 추격하자, 조조는 기병을 배치하여 보병과 기병이 협공해 대패시켰다. 후에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공께서 적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셨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적이 아군의 퇴로를 끊어 아군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었기에, 나는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장수가 조조를 추격할 때, 가후(賈詡)가 말렸다. “추격할 수 없습니다. 추격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장수가 듣지 않고 진격하여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가후가 성루에 올라 장수에게 말했다. “급히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장수가 사양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미 패했는데 어찌 다시 추격하겠소?” 가후가 말했다. “병세(兵勢)에 변화가 있습니다. 급히 추격하십시오.” 장수는 평소 가후의 말을 믿었기에, 흩어진 병사를 모아 다시 추격하여 싸우니, 과연 이기고 돌아왔다. 이에 가후에게 물었다. “내가 정예병으로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했는데, 그대는 반드시 패한다고 했소. 패잔병으로 승리한 군대를 공격했는데, 그대는 반드시 이긴다고 했소. 결과가 모두 그대의 말과 같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이오?” 가후가 말했다. “이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장군은 비록 용병에 능하지만, 조공(曹公)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조공의 군대가 막 철수할 때는 반드시 직접 후미를 막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조공이 장군을 공격할 때는 실책이 없었고, 힘이 다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퇴각한 것은 반드시 국내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장군을 격파한 뒤에는 반드시 가볍게 장비하고 빠르게 전진하여 여러 장수에게 후미를 맡겼을 터인데, 여러 장수는 비록 용맹하지만 장군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패잔병으로 싸우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장수는 이에야 마음으로 복종했다.

4. 여포(呂布)가 다시 원술(袁術)과 결탁하여, 그의 중랑장(中郎將) 고순(高順)과 북지태수(北地太守) 안문(雁門) 사람 장료(張遼)를 보내 유비(劉備)를 공격하게 했다. 조조가 장군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순 등에게 패배했다. 가을, 9월에 고순 등이 패성(沛城)을 함락시키고,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았으며, 유비는 홀로 도망쳤다.

조조가 직접 여포를 공격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유표와 장수가 뒤에 있는데, 멀리 여포를 습격하는 것은 반드시 위험합니다." 순우가 말했다: "유표와 장수는 방금 패배했으니, 형세상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여포는 날래고 용맹하며 흉악하고, 또 원술을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회수와 사수 사이에서 종횡으로 활동한다면, 호걸들이 반드시 그에게 호응할 것입니다. 지금 그가 막 배반한 때를 틈타, 무리들의 마음이 통일되지 않았으니 쳐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다!" 이번 원정에, 태산에 주둔한 장수 장패, 손관, 오돈, 윤례, 창해 등이 모두 여포에게 귀부했다. 조조가 유비와 양 땅에서 만났다. 진군하여 팽성에 도착했다.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마땅히 맞아 싸워야 합니다. 편히 쉬면서 피로한 적을 기다리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여포가 말했다: "그들이 와서 공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사수에 밀어 넣는 것이 낫다." 겨울, 시월, 조조가 팽성을 학살했다. 광릉태수 진등이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선봉이 되어 진군하여 하비에 도착했다. 여포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조조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여, 성 안으로 물러나 지키며 감히 나와 싸우지 못했다.

조조가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 화복과 이해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여포가 두려워하여 항복하려 했다. 진궁이 말했다: "조조는 멀리서 왔으니, 형세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장군께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성 밖에 나가 주둔하시면, 제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성 안을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조조가 장군을 공격하면, 제가 군사를 이끌어 그의 뒤를 치겠습니다. 만약 그냥 성만 공격한다면, 장군께서 성 밖에서 구원하시면 됩니다. 길어야 한 달, 많아야 열흘이면 조조 군사의 식량이 떨어질 것이니, 그때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가 옳게 여겨, 진궁과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조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려 했다. 여포의 아내가 여포에게 말했다: "진궁과 고순은 평소부터 화목하지 않습니다. 장군께서 성 밖으로 나가시면, 진궁과 고순이 반드시 한마음으로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잘못이 생기면, 장군께서 어떻게 다시 설 자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조씨는 공대(진궁)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우했는데도, 그가 조씨를 버리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공대를 후대하는 것이 조씨만 못한데, 온 성을 그에게 맡기고 처자식을 버리고 홀로 먼 곳으로 나가신다면, 만약 한 번 변고가 생기면, 제가 어찌 다시 장군의 아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마침내 그만두고, 은밀히 그의 속관 허기와 왕개를 원술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다. 원술이 말했다: "여포가 내 딸을 주지 않았으니, 이치상 마땅히 패배해야 한다. 어찌하여 또 나를 찾아오는가?" 허기와 왕개가 말했다: "명상(원술)께서 지금 여포를 구하지 않으시면, 스스로 패배를 취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포가 격파되면, 명상께서도 또한 격파될 것입니다." 원술이 이에 군사를 정비하여 여포의 성원이 되었다. 여포는 원술이 딸이 오지 않아 구원병을 보내지 않을까 걱정하여, 솜으로 딸의 몸을 싸서 말에 묶고, 밤에 직접 딸을 성 밖으로 보내려 했으나, 조조의 수비병과 만나 창을 겨루고 화살을 쏘았으나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성 안으로 돌아왔다.

하내태수 장양은 평소 여포와 친했으나, 그를 구원할 수 없어 동시에 군사를 내어 동시에 주둔하며 멀리서 성원을 했다. 11월, 장양의 부장 양축이 장양을 죽이고 조조에게 호응했고, 다른 부장 수고가 다시 양축을 죽이고 무리를 이끌고 북쪽으로 원소와 연합했다. 장양은 성격이 인자하고 온화하며 위엄 있는 형벌이 없어, 부하 중에 모반하는 자가 있어 발각되어도 그들을 대면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고, 항상 용서하고 추궁하지 않아, 이 때문에 화를 불러들였다.

조조가 해자를 파서 하비를 포위했으나, 시간이 오래되어 병사들이 피로하고 지쳐, 군사를 거두려 하자, 순우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지만 지략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 차례 싸워 모두 패배했으니, 예기가 이미 쇠퇴했습니다. 삼군은 주장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는데, 주장이 쇠퇴하면 군대는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진궁은 지혜가 있지만 반응이 느립니다. 지금 여포의 사기가 회복되지 않고 진궁의 계책이 결정되지 않은 때를 틈타, 급히 공격하면 여포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이수와 사수를 끌어들여 성에 물을 채웠다. 한 달여가 지나자, 여포는 더욱 곤궁하고 급박해져, 성 위에 올라 조조 군사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나를 핍박하지 마라. 내가 가서 자수하여 명공(조조)을 뵙겠다." 진궁이 말했다: "역적 조조가, 무슨 명공이냐! 오늘 그에게 항복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여포의 부장 후성이 그의 명마를 잃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았다. 여러 장수들이 함께 후성에게 예물을 보내 축하했고, 후성은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먼저 성 안으로 여포에게 바쳤다. 여포가 노하여 말했다: "내가 금주를 명했는데 너희는 술을 빚었으니, 술을 빌려 함께 나를 도모하려는 것이냐?" 후성이 또 분노하고 두려워하여, 12월 계유일, 후성이 부장 송헌, 위속 등과 함께 진궁과 고순을 붙잡고,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여포는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에 올랐다. 조병의 포위가 급박해지자, 여포는 좌우 사람들에게 그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가져가라고 명령했으나, 좌우 사람들이 차마 하지 못하여, 마침내 누각 아래로 내려와 항복했다.

여포가 조조를 보고 말했다: "이제부터 천하를 평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여포가 말했다: "명공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오직 저 여포일 뿐인데, 지금 제가 이미 항복했습니다. 만약 저에게 기병을 맡기시고, 명공께서 보병을 거느리신다면, 천하를 평정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서서 유비에게 말했다: "현덕, 그대는 자리 위의 손님이요, 나는 항복한 포로인데, 나를 묶은 줄이 너무 팍 조입니다. 어찌 나를 위해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겠는가?"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호랑이를 묶으려면 팍 조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명하여 여포의 결박을 풀어주게 했다. 유비가 말했다: "안 됩니다.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긴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큰 귀를 가진 놈, 가장 믿을 수 없다!"

조조가 진궁에게 말했다: "공대, 그대는 평소에 지혜와 계략이 충분하다고 자부했는데,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진궁이 여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내 계책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내 말을 따랐더라면, 반드시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조가 말했다: "그대의 노모는 어찌하겠는가?" 진궁이 말했다: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남의 친척을 해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노모의 죽고 삶은 명공에게 달렸을 뿐,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대의 처자식은 어찌하겠는가?" 진궁이 말했다: "어진 정치를 천하에 베푸는 사람은 남의 후손을 끊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처자식의 죽고 삶은 명공에게 달렸을 뿐,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조조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진궁이 형벌을 받기를 청하며 나가면서 뒤돌아보지 않았고, 조조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여포와 고순과 함께 목을 졸라 죽이고, 머리를 허도에 보내 효시했다. 조조가 진궁의 어머니를 불러와 평생 봉양하고, 진궁의 딸을 시집보내며, 그의 가족을 위로하고 돌보아 주니, 모두 처음보다 더 후하게 대우했다.

전임 상서령 진기와 그의 아들 진군이 여포의 군중에 있었는데, 조조가 모두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임용했다. 장료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장패는 스스로 도망쳐 숨었는데, 조조가 현상금을 걸고 수색하여 찾아내고, 장패로 하여금 오돈, 윤례, 공관 등을 불러 항복하게 하니, 모두 조조에게 와서 항복했다. 조조가 이에 낭야군과 동해군을 나누어 성양, 이성, 창려군을 설치하고, 모두 장패 등을 군수나 국상으로 임명했다.

당초 조조가 연주에 있을 때, 서흘과 모휘를 장수로 임명했다. 연주의 난이 일어나자, 서흘과 모휘가 모두 배반했다. 연주가 평정된 후, 서흘과 모휘는 도망쳐 장패에게 의탁했다. 조조가 유비에게 말하여, 장패가 두 사람의 목을 보내게 하라고 이르자, 장패가 유비에게 말했다: "제가 스스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공(조조)께서 목숨을 살려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으니,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왕업과 패업을 이루는 군주는 도의로써 알릴 수 있으니, 장군께서 저를 대신하여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비가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가 탄식하며 장패에게 말했다: "이것은 옛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대가 그것을 해냈으니,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에 모두 서흘과 모휘를 군수로 임명했다. 진등은 공으로 인해 복파장군에 가봉되었다.

유표가 원소와 깊이 교류하며 결탁했다. 치중 등희가 유표를 간언했으나, 유표가 말했다: "안으로는 조공에게 조공을 바치는 직분을 잃지 않고, 밖으로는 맹주에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 천하의 통용되는 도의이다. 치중은 어찌하여 유독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가?" 등희가 이에 병을 칭탁하고 벼슬을 버리고 은퇴했다.

장사태수 장선은 성격이 강직하여, 유표가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군 사람 환계가 장선에게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이끌고 유표를 거스르고,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귀부하라고 권하니, 장선이 따랐다.

손책은 그의 정의교위(正議校尉) 장홍(張紘)을 보내어 지방 특산물을 진상하게 하였다. 조조(曹操)는 그를 회유하고 받아들이려 하여, 표문을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삼고 오후(吳侯)로 봉하였으며, 동생의 딸을 손책의 동생 손광(孫匡)에게 시집보내고, 또 자신의 아들 조창(曹彰)을 위하여 손분(孫賁)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다. 예를 갖추어 손책의 동생 손권(孫權)과 손익(孫翊)을 부르고, 장홍을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였다.

원술(袁術)은 주유(周瑜)를 거강현장(居巢縣長)으로, 임회(臨淮) 사람 노숙(魯肅)을 동성현장(東城縣長)으로 임명하였다. 주유와 노숙은 원술이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모두 관직을 버리고 강을 건너 손책에게 투항하였다. 손책은 주유를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으로 임명하였다. 노숙은 이에 곡아(曲阿)에 집을 잡았다.

조조가 표문을 올려 왕랑(王朗)을 부르자, 손책이 왕랑을 돌려보냈다. 조조는 왕랑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하고,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를 맡겼다.

원술은 밀사를 보내 인수(印綬)를 가지고 단양(丹陽)의 종수(宗帥) 조랑(祖郎) 등에게 가게 하여, 산월(山越)을 선동하여 함께 손책을 도모하게 하였다. 유요(劉繇)가 예장(豫章)으로 도망칠 때, 태자자(太史慈)는 오호(蕪湖) 산중에 숨어 스스로 단양태수(丹陽太守)라 칭하였다. 손책이 이미 선성(宣城) 이동 지역을 평정하였으나, 경현(涇縣) 이서 여섯 현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는데, 태자자는 경현에 주둔하며 많은 산월인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이에 손책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능양(陵陽)에서 조랑을 토벌하여 그를 생포하였다. 손책이 조랑에게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나를 습격하여 내 말안장을 베었으나, 지금 내가 군무를 창시하고 대업을 세움에 옛 원한을 버리고 오직 유능한 자만을 등용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따름이니, 너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였다. 조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자, 손책이 즉시 그의 차꼬를 풀어주고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임명하였다. 또 용리(勇里)에서 태자자를 토벌하여 그를 생포하고 결박을 풀어주며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신정(神亭)에서의 그 일을 아직 기억하느냐? 만약 그때 네가 나를 잡았다면 어찌하였겠느냐?" 하니, 태자자가 말하기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손책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마땅히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이다. 듣자니 그대는 강렬하고 충의로우며 천하의 지사이나, 다만 의탁한 사람이 옳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대의 지기(知己)이니, 뜻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고, 즉시 문하독(門下督)으로 임명하였다. 군대가 돌아올 때 조랑과 태자자가 모두 앞에서 인도하니, 군중의 장수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이때 유요가 예장에서 죽었는데, 부중 일만여 명이 예장태수 화흠(華歆)을 주인으로 세우려 하였다. 화흠은 때를 이용하여 사사로이 명을 내리는 것은 신하가 할 일이 아니라 여겨, 무리가 여러 달 동안 그를 지켰으나 끝내 사양하고 그들을 해산시켰다. 이 부중들은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었으므로, 손책이 태자자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게 하며 태자자에게 말하기를 "유목(劉牧, 유요)이 이전에 내가 원술을 위하여 여강(廬江)을 친 것을 책망하였는데, 나의 아버지가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모두 원술에게 있었으므로, 내가 공업을 세우고자 하는 뜻에 어찌 마음을 굽혀 원술에게 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후에 그가 신하의 절개를 지키지 않으므로 내가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장부가 의로 사귀다가 큰 변고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이다. 내가 원술과 사귀고 끝내 관계를 끊은 시말이 이와 같으니, 다만 그가 살아 있을 때 함께 변론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지금 그의 아들이 예장에 있으니, 그대가 가서 보아라. 또 내 뜻을 그의 부곡(部曲)에게 전하여라. 부곡 중에 오려는 자는 데리고 오고, 오지 않으려는 자는 위로하라. 또 화흠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방법이 어떠한지 살펴보아라. 그대에게 얼마나 많은 병마가 필요한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태자자가 말하기를 "제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사온데, 장군의 도량이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과 같사오니, 제가 마땅히 죽음으로써 은덕에 보답하겠나이다. 지금 쌍방이 모두 전쟁을 멈추고 군사를 쉬게 하였으니, 병사는 많을 필요 없이 수십 명만 데리고 가면 되겠나이다."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태자자가 반드시 북쪽으로 도망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손책이 말하기를 "자의(子義, 태자자)가 만일 나를 버린다면 다시 누구를 좇겠느냐!" 하고, 창문(昌門)에서 전별하며 그의 손목을 잡고 이별하며 말하기를 "언제 돌아오겠느냐?" 하니, 태자자가 대답하기를 "육십 일을 넘기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태자자가 떠난 후에도 의논하는 자들이 여전히 그를 보낸 것이 옳지 않다고 떠들었다. 손책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이미 자세히 결정하였다. 태자자는 비록 기운이 용맹하고 성격이 강렬하나, 종횡으로 날뛰는 자가 아니니, 반드시 도의를 지키고 약속을 중히 여겨, 한번 마음을 지기에게 허락하면 죽도록 배반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태자자는 과연 기한대로 돌아와 손책에게 말하기를 "화흠은 덕이 있는 사람이나, 다른 방략은 없고 다만 스스로 지키는 것뿐입니다. 또 단양 사람 치지(僮芝)가 스스로 여릉(廬陵)을 점거하고, 파양(鄱陽)의 민수(民帥)가 따로 종부(宗部)를 세워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이미 해혼상료(海昏上繚)에 별도로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징소를 받지 않겠다' 하니, 화흠은 다만 바라볼 뿐입니다." 하였다. 손책이 박수치며 크게 웃고, 이에 겸병할 뜻을 품었다.

원소(袁紹)가 여러 해 동안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편지를 보내어 그를 타일러 원한을 풀고 연합하여 화해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답하지 않고 오히려 수비를 강화하며 장사(長史) 태원(太原) 사람 관정(關靖)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방이 범처럼 싸우고 있으나, 아무도 내 성 아래에서 일 년을 버티며 앉아 있을 사람이 없음은 명백한 이치이니, 원본초(袁本初, 원소)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원소가 이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손찬의 별장(別將)이 적에게 포위된 자가 있었는데, 공손찬이 구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한 사람을 구원하면 후일의 사람들이 구원에 의지하여 힘써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였다. 원소가 쳐들어왔을 때, 공손찬의 남쪽 경계의 별영(別營)들은 스스로 지켜도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헤아리고, 또 반드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을 알자, 어떤 이는 항복하고 어떤 이는 흩어졌다. 원소의 군대가 곧장 성문까지 이르렀고, 공손찬은 아들 공손속(公孫續)을 흑산(黑山)의 여러 수령들에게 보내어 구원을 청하고, 자신은 돌격기병을 이끌고 서산(西山)으로 돌파하여 나가 흑산의 무리를 점거하고 기주(冀州)를 침략하여 원소의 후로를 가로막으려 하였다. 관정이 간하며 말하기를 "지금 장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마음이 무너져 흩어지려는 자가 없지 않으나, 그래도 서로 지키고 있는 것은 자신의 거처와 늙은이와 어린이를 생각하고 장군을 주인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굳게 지키며 오래 끌면 혹시 원소가 스스로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곳을 버리고 나간다면, 후방에 진중한 중심이 없게 되어 역경(易京)의 위망을 곧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손찬이 그제야 그만두었다. 원소가 점차 공격하여 핍박하자, 공손찬의 무리는 날로 곤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