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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삼

제 3 편

저무옹돈탄(著雍涒灘)의 해부터 시작하여 상장염무(上章閹茂)의 해에 끝나니, 모두 3년이다.

열조명황제 상지하(烈祖明皇帝 上之下)

태화 2년(무신, 서기 228년)

1 봄, 정월에 사마의(司馬懿)가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16일 만에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하였다. 신의(申儀)는 오랫동안 위흥군(魏興郡)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황제의 이름을 빌려 인신(印信)을 새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제멋대로 수여하였다. 사마의가 그를 불러 체포하여 낙양(洛陽)으로 압송하였다.

2 당초,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夏侯淵)의 조카 하후무(夏侯楙)가 조조(曹操)의 딸 청하공주(清河公主)와 혼인하였고,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젊었을 때부터 그와 가깝고 친하게 지냈다. 문제가 즉위한 후,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임명하고 관중(關中) 군사를 독촉(都督)하게 하여 장안(長安)을 진수(鎭守)하게 하니, 하후연의 직위를 계승하게 한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장차 위(魏)나라를 침략하려 하여 부하들과 함께 계책을 의논하였다. 승상사마(丞相司馬) 위연(魏延)이 말했다. "듣자하니 하후무는 위나라 군주의 사위로서 겁이 많고 지략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 5천 명과 식량을 운반할 자 5천 명을 주시면, 바로 포중(褒中)에서 출발하여 진령(秦嶺)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이른 후 북쪽으로 나아가면, 열흘이 채 못 되어 장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가 제가 갑자기 오는 것을 듣고 반드시 성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장안성에는 어사(御史)와 경조태수(京兆太守)만 남게 될 것입니다. 횡문(橫門)의 창고와 백성들의 식량으로 군량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 동쪽의 원군이 집결하는 데까지는 20여 일이 더 걸릴 터이니, 그때 각하께서 사곡(斜谷)으로 출병하여 오시기에도 충분히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함양(咸陽) 이서(以西) 지역을 한 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이것이 모험적인 계책이라고 여겨, 평탄한 큰길로 안정되게 나아가 농우(隴右)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십중팔구 승산이 있고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여 위연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사곡도를 따라 미현(郿縣)을 취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운(趙雲)과 양무장군(揚武將軍) 등지(鄧芝)를 파견하여 의병(疑兵)을 삼아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하였다. 위명제(魏明帝)는 조진(曹真)을 관우(關右)의 모든 군사를 독촉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기산(祁山)을 공격하였는데, 군진(軍陣)이 정제되고 호령이 엄명하였다. 처음에 위나라에서는 한소열제(漢昭烈帝) 유비(劉備)가 죽고 촉한(蜀漢)이 여러 해 동안 움직임이 없었으므로 거의 방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제갈량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 상하가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에 천수(天水), 남안(南安), 안정(安定) 세 군이 모두 위나라에 반역하여 제갈량에 호응하였고, 관중 지역이 크게 흔들리자 조정의 신하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명제는 말했다. "제갈량은 산의 험함을 믿고 굳게 지키는데, 지금 친히 나온 것은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적을 끌어내는 계책'에 부합하니, 반드시 제갈량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배치하고 우장군(右將軍) 장합(張郃)을 보내 독촉하게 하여 서쪽으로 가서 제갈량을 막게 하였다. 정미일(丁未日)에 명제는 장안으로 출발하였다.

당초, 월수태수(越巂太守) 마속(馬謖)은 재주와 기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군사 계략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 제갈량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한소열제 유비가 임종할 때 제갈량에게 말했다. "마속은 말이 실제 재주보다 과장되어 있으니 중용할 수 없소. 그대는 자세히 살펴보시오!" 제갈량은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여겨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매번 불러 이야기하며 밤낮으로 지냈다. 기산에 출병할 때에 이르러 제갈량은 노장 위연, 오의(吳懿) 등을 선봉으로 쓰지 않고 마속으로 하여금 각군을 독촉하여 앞서게 하고, 장합과 가정(街亭)에서 교전하게 하였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휘와 조치를 어기고 행동이 어지럽고 번잡하였으며, 물을 버리고 산 위에 주둔하고 산 아래 성을 지키지 않았다. 장합이 그에게 물을 길러 오는 길을 끊고 공격하여 마속을 크게 무찌르니 병사들이 흩어졌다. 제갈량이 나아갈 거점이 없어지자 서현(西縣)의 천여 호를 빼앗아 한중(漢中)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속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죽였다. 제갈량이 친히 가서 조문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의 남은 자식을 길러 주었으며, 은혜는 평소와 같았다. 장완(蔣琬)이 제갈량에게 말했다. "옛날 초성왕(楚成王)이 득신(得臣)을 죽였을 때 진문공(晉文公)의 기쁨은 짐작할 만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 있는 사람을 죽인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습니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손무(孫武)가 천하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법을 엄격히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간(揚干)이 법을 어기자 위강(魏絳)이 그의 시종을 죽였습니다. 지금 사해가 분열되어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또 법을 폐기한다면 무엇으로 적을 토벌하겠습니까!"

마속이 아직 패하지 않았을 때, 비장군(裨將軍) 파서(巴西) 사람 왕평(王平)이 여러 번 마속을 간언하였으나 마속이 듣지 않았다. 패배에 이르자 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오직 왕평이 거느린 천여 명만이 북을 치며 스스로 지켰다. 장합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이에 왕평이 천천히 각 영(營)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장수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제갈량이 마속과 장군 이성(李盛)을 주살하고 장군 황습(黃襲) 등의 병권을 빼앗은 후, 왕평이 특히 존중받아 참군에 임명되어 오부(五部)의 군사를 통솔하고 영중(營中) 사무를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하고 정후(亭侯)에 봉해졌다. 제갈량은 상소하여 자신을 3등급 강등시켜 줄 것을 청하였고,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제갈량을 우장군(右將軍)으로 임명하고 승상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이때 조운과 등지의 군대도 기곡에서 패배하였는데, 조운이 군대를 수습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손실이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운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제갈량이 등지에게 물었다. "가정의 군대가 철수할 때는 병사와 장수가 서로 통솔되지 않았는데, 기곡의 군대가 철수할 때는 병사와 장수가 끝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등지가 말했다. "조운 장군이 친히 후미를 막아 군수 물자가 거의 버려지지 않았으므로 병사와 장수가 자연히 흩어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조운에게 남은 군수 비단이 있었는데, 제갈량이 그에게 나누어 장수와 병사들에게 하사하게 하였다. 조운이 말했다. "군사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는데 어찌 상이 있겠습니까! 이 물자는 모두 적안부고(赤岸府庫)에 넣어 두었다가 10월이 되면 겨울 상으로 내려 주십시오." 제갈량이 이에 대해 매우 칭찬하였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다시 병사를 내기를 권하였다. 제갈량이 말했다.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있었을 때, 적보다 많았음에도 적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적에게 패하였으니, 문제는 병사가 적은 데 있지 않고 오직 나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지금 나는 병졸과 장수를 줄이고 형벌을 엄격히 하며 잘못을 반성하여 장래를 위해 변통할 방도를 생각하려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병사가 많아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지금부터 이후로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마땅히 나의 허물을 힘써 비판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면 큰일이 안정되고 적은 소멸되며 공업은 발돋움하여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미세한 공로도 살피고 장렬한 선비를 선별하며, 스스로 잘못을 꾸짖고 나라 안에 자신의 허물을 공표하며, 병기를 갈고 무예를 닦아 장래를 도모하니, 병사들은 정예하고 능숙해졌으며 백성들은 이전의 패배를 잊었다.

제갈량이 기산에 출병했을 때, 천수참군(天水參軍) 강유(姜維)가 와서 제갈량에게 항복하였다. 제갈량은 강유의 담력과 지모를 칭찬하여 창조연(倉曹掾)으로 불러 등용하고 군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진이 안정 등 세 군을 토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좌절한 후, 장차 반드시 진창(陳倉)으로 출병할 것이라고 여겨 장군 학소(郝昭) 등을 보내 진창을 방어하게 하고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3 여름, 4월 정유일(丁酉日)에 명제가 낙양으로 돌아왔다.

4 명제는 연국(燕國) 사람 서막(徐邈)을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았다. 서막은 농업에 힘쓰고 식량을 저축하며 학교를 세우고 가르침을 밝히고 선한 사람을 발탁하고 악한 사람을 내쫓았으며, 강(羌)과 호(胡)와 교류할 때 작은 잘못은 추궁하지 않았다. 만약 큰 죄를 지으면 먼저 그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통보하여 사형당할 사람을 알게 한 후에야 목을 베어 내보였다. 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의 위엄과 신뢰에 복종하여 양주 경내가 안정되고 평화로웠다.

5 5월에 큰 가뭄이 들었다.

6 오왕(吳王) 손권(孫權)은 파양태수(鄱陽太守) 주방(周魴)에게 명하여 비밀리에 산중에서 북위(北魏)에 알려진 옛 부족의 우두머리들을 찾아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속임수를 써서 양주목(揚州牧) 조휴(曹休)를 꾀어내게 하였다. 주방이 말했다. "이 우두머리들은 하찮은 무리일 뿐이어서 믿고 의지하기에 부족하며, 만약 일이 새어 나가면 조휴를 유인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심복을 보내 편지를 가지고 가서 조휴를 속이되, 제가 책망을 받아 죽음이 두려워 파양군을 바치고 북쪽에 투항하려 하니 병사를 보내 맞아 주기를 청한다고 하게 하소서." 오왕이 허락하였다. 당시에 자주 낭관(郎官)이 주방에게 와서 여러 가지 일을 조사하였는데, 주방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군의 문 앞에 나가 머리카락을 잘라 사죄하였다. 조휴가 이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예성(皖城)으로 향해 주방을 맞이하려 하였고, 명제는 또 사마의로 하여금 강릉(江陵)으로 나아가게 하고, 가규(賈逵)는 동관(東關)으로 나아가게 하여 세 길의 군대가 동시에 진군하였다.

가을 8월, 오왕이 예성에 이르러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황월을 하사하였으며, 직접 채찍을 잡고 그를 접견하였다. 주환과 전종을 좌우도독으로 임명하여 각각 3만 명을 거느리고 조휴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휴는 자신이 속은 줄 알았으나 병력이 많음을 믿고 오군과 결전을 벌이려 하였다. 주환이 오왕에게 말하였다. “조휴는 본래 황실 외척이라 임용된 것이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장이 아닙니다. 지금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이고, 패하면 반드시 도망칠 것이며, 도망갈 때 반드시 협석과 괘차를 지날 것입니다. 이 두 길은 모두 험준하니, 만약 1만 병사로 나무를 베어 길을 막으면 그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조휴도 생포할 수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부대를 이끌고 그의 퇴로를 차단하겠습니다. 만약 천위를 입어 조휴로 국가에 보답할 수 있다면 승세를 타고 직진하여 수춘을 취하고 회남을 점거하며 허창과 낙양을 도모할 수 있으니, 이는 만세에 다시없을 기회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손권이 이 일로 육손에게 물으니, 육손이 불가하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상서 장제가 상소하여 말하였다. “조휴가 적진 깊이 들어가 손권의 정예병과 대치하고 있는데, 주연 등이 상류에서 후방을 공격하고 있으니, 신은 유리함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전장군 만총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조휴는 명철하고 과단성이 있으나 용병 경험이 적습니다. 지금 그가 가는 길은 뒤로 호수를 등지고 강에 가까워 전진은 쉬우나 후퇴는 어렵습니다. 이는 병가에서 말하는 ‘반지’입니다. 만약 무강구에 들어간다면 충분히 대비해야 합니다!” 만총의 표문이 아직 회답을 받지 못했는데, 조휴가 석정에서 육손과 교전하였다. 육손은 자신이 중군을 맡고 주환과 전종에게 좌우익을 명하여 세 길이 나란히 전진, 조휴의 복병을 돌파하고 그들을 추격하였다. 패주하는 적을 협석까지 추격하여 1만여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으며, 소와 말, 노새, 당나귀, 수레 1만 대를 노획하고 군수물자와 기계를 거의 다 획득하였다.

당초 조휴가 표문을 올려 깊이 들어가 주방을 접응할 것을 청하자, 명제는 가규에게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 조휴와 합류하도록 명령하였다. 가규가 말하였다. “적군이 동관에 방비가 없으니 반드시 병력을 예성에 집결시킬 것입니다. 조휴가 깊이 들어가 적과 교전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고 수륙병진하여 200리를 가서 오나라 사람을 잡았는데, 조휴가 패하고 오나라가 병사를 보내 협석 길을 끊었다고 말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후속 부대를 기다리려는 자도 있었다. 가규가 말하였다. “조휴가 경외에서 패하고 퇴로가 경내에서 끊겼으니, 전진하여 싸울 수도 없고 후퇴하여 돌아갈 수도 없어 생사존망의 갈림길이 눈앞에 있습니다. 적군은 우리에게 후속 부대가 없다고 여겨 감히 이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속히 진군하여 그들의 예상을 깨는 것이 이른바 ‘선제공격’으로 그들의 군심을 흔드는 것입니다. 적군이 우리 군대를 보면 반드시 도망칠 것입니다. 만약 후속 부대를 기다린다면 적군이 이미 험요한 곳을 차단했을 터이니, 병사가 많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밤낮으로 행군하여 깃발과 북을 많이 설치해 의병을 만들었다. 오나라 사람들이 멀리서 가규의 군대를 보고 놀라 도망쳐, 조휴가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 가규가 협석을 점거하고 군량을 조휴에게 공급하자, 조휴의 부대가 비로소 진정되었다. 당초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조휴가 패하자 온전히 가규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다.

7 9월 을유일에 황자 조목을 번양왕으로 세웠다.

8 장평장후 조휴가 상소하여 사죄하자, 명제가 그가 종실임을 이유로 추궁하지 않았다. 조휴는 부끄럽고 분하여 등에 큰 종기가 났고, 경자일에 세상을 떠났다. 명제가 만총으로 양주 도독을 삼아 조휴의 직무를 대신하게 하였다.

9 호오환교위 전예가 선비족 수령 울축건을 공격하자, 울축건의 장인 가비능이 그를 구원하여 3만 기병을 이끌고 전예를 마성에 포위하였다. 상곡태수 염지는 염유의 동생으로 평소 선비족의 신임을 받아 가서 설명하고 타일렀더니, 선비족이 비로소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0 겨울 11월, 난릉성후 왕랑이 세상을 떠났다.

11 촉한 제갈량이 조휴가 패하고 위군이 동쪽으로 내려가 관중의 병력이 허술함을 듣고 출병하여 위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의심하였다. 제갈량이 한왕에게 상주하여 말하였다. “선제께서 한나라와 적이 양립할 수 없고 왕업이 한쪽에 치우쳐 있을 수 없음을 깊이 우려하셨기에, 신에게 적을 토벌할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선제의 명철하심으로 신의 재능을 헤아리셨으니, 신이 적을 토벌하려 해도 재능은 약하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분명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도 망할 것이니, 앉아서 망하는 것과 어찌 맞서 싸우는 것을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제께서는 주저 없이 신에게 맡기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래 잠자리에 편히 눕지 못하고 밥을 달게 먹지 못하였으며, 북벌을 고려하려면 먼저 남방을 평정해야 하므로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지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업이 촉에 치우쳐 있을 수 없음을 고려하여 감히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의 유지를 받든 것입니다. 그러나 논의하는 자들은 이를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 적은 서쪽에 시달리고 동쪽에도 바쁘니, 병법에 적이 피로할 때 공격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격할 기회입니다. 신이 삼가 이 일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고제의 명철함은 해와 달과 같고 모신들의 계책은 깊고 멀었으나, 여전히 험난을 겪고 상처를 입은 뒤에야 안정을 얻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고 모신들은 장량과 진평만 못한데, 오랜 계책으로 승리를 취하고 앉아서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첫째입니다. 유요와 왕랑이 각기 주군을 차지하고 안위를 논하며 계책을 세울 때마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였으나, 모두 의혹에 가득 차 올해 싸우지 않고 내년에 정벌하지 않아 손책이 점차 강성해져 강동을 삼키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둘째입니다. 조조의 지혜와 계책은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었고, 용병은 손자와 오기와 같았으나, 여전히 남양에서 곤란을 겪고 오소에서 위험에 빠지고 기련에서 위태로우며 여양에서 핍박받고 백산에서 거의 패하고 동관에서 죽을 뻔한 뒤에야 잠시 안정을 얻었습니다. 하물며 신의 재능이 약하여 위험을 겪지 않고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셋째입니다. 조조가 다섯 번 창패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네 번 소호를 넘어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이복을 임용하자 이복이 그를 해치려 하고, 하후연을 위임하자 하후연이 패사하였습니다. 선제께서 늘 조조의 재능을 칭송하셨으나, 그래도 이러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신의 재능이 낮아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넷째입니다. 신이 한중에 도착한 지 겨우 1년 만에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동동 등과 곡장, 둔장 70여 명, 돌장, 무전, 종수, 청강, 산기, 무기 1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은 정예로, 한 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몇 년이 더 지나면 3분의 2를 잃을 것이니, 그때 무엇으로 적을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째입니다. 지금 백성은 곤궁하고 병사는 피로하며 전쟁을 그칠 수 없고, 전쟁을 그칠 수 없다면 주둔과 공격의 노고와 비용은 같습니다. 그런데 적의 허를 틈타 도모하지 않고, 한 주의 땅으로 적과 오래 버티려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째입니다.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일의 전개입니다. 옛날 선제께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당시 조조가 박수 치며 천하가 이미 정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후 선제께서 동으로 오와 월을 연합하고 서로 파와 촉을 취하여 북벌을 나서자 하후연이 참수되었으니, 이는 조조의 실책으로 한나라의 대업이 장차 성공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오나라가 맹약을 저버려 관우가 패사하고 자귀에서 좌절하며 조비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몸을 굽혀 힘을 다해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며, 성패와 순역은 신의 지혜로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12월,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산관을 출발하여 진창을 포위했다. 진창에는 이미 방비가 갖추어져 있어 제갈량이 함락시키지 못했다. 제갈량은 학소의 동향인 근상을 보내 성 밖 멀리서 학소를 설득하게 했다. 학소는 성루에서 대답했다: “위나라의 법률은 네가 잘 알고 있고, 나의为人도 네가 알고 있다. 나는 국가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가문도 중요하니, 네가 할 말은 없다. 오직 죽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너는 돌아가 제갈량에게 말하라, 공격해 와도 좋다고.” 근상이 학소의 말을 제갈량에게 알리자, 제갈량은 다시 근상을 보내 학소를 설득하게 하며 “병력이 적으니 어찌 헛되이 스스로 패망을 취하겠는가”라고 말하게 했다. 학소가 근상에게 말했다: “아까 한 말은 이미 결정되었다. 나는 너를 알지만, 화살은 너를 모른다.” 근상이 이에 떠났다. 제갈량은 자신이 수만 명의 군사를 가졌고 학소의 병력은 겨우 천여 명이며, 또 동쪽의 구원병이 곧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진군하여 학소를 공격하며 운제와 충거를 성에 가까이 세웠다. 학소는 이에 화살에 불을 붙여 운제를 거꾸로 쏘았고, 운제에 불이 붙자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다. 학소는 또 줄로 맷돌을 연결하여 충거를 들이받아 충거를 부러뜨렸다. 제갈량은 다시 백 자 높이의 정루를 만들어 성 안으로 화살을 쏘고, 흙으로 해자를 메워 곧장 성에 오르려 했으나, 학소는 성 안에 다시 중벽을 쌓았다. 제갈량은 또 지하도를 파서 성 안에서 갑자기 나타나려 했으나, 학소는 성 안에서 가로로 해자를 파서 지하도를 끊었다. 밤낮으로 공격과 수비가 2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조진은 장군 비요 등을 보내 진창을 구원하게 했다. 위 명제는 방성에서 장합을 불러들여 그를 보내 제갈량을 치게 했다. 명제는 친히 하남성에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장합을 전송하며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도착할 때쯤이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함락하지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고립된 군대로 깊이 들어와 군량이 없음을 알고 손꼽아 계산하며 말했다: “제가 도착할 때쯤이면 제갈량은 이미 철수했을 것입니다.” 장합은 밤낮으로 길을 달려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제갈량이 군량이 다 떨어져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다. 장군 왕쌍이 추격하자, 제갈량이 군사를 돌려 왕쌍을 참수했다. 명제는 조서를 내려 학소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12. 처음에 공손강이 죽자, 아들 공손황과 공손연 등이 모두 어렸으므로, 부하들이 그의 동생 공손공을 세웠다. 공손공은 나약하고 무능하여 군국을 다스리지 못했고, 공손연이 자란 후에는 협박하여 공손공의 직위를 빼앗고 상황을 보고했다. 시중 유섭이 말했다: “공손씨는 한나라가 임용한 이래로 대대로 관직을 세습했으며, 수로로는 바다를 의지하고 육로로는 산의 험준함을 의지하여 밖으로는 호인과 이족과 결탁하여 멀리 떨어져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대대로 권력을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지금 만약 주멸하지 않으면 후일에 반드시 화근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두 마음을 품고 무력을 의지한 후에야 토벌한다면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가 막 즉위하여 동당도 있고 원수도 있으니, 뜻밖에 병력을 보내 국경에 압박하고 상을 걸어 모집한다면,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명제는 듣지 않고 공손연을 양렬장군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13. 오왕이 양주목 여범을 대사마로 임명했으나, 인수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는데 여범이 죽었다. 처음에 손책이 여범에게 재물을 관리하게 했는데, 그때 오왕이 어려 사사로이 여범에게 무엇을 청구하면 여범이 반드시 아뢰고 감히私自로 허락하지 않아, 당시에 이로 인해 원망을 샀다. 오왕이 양현 장관을 대행할 때 사사로이 쓴 비용이 있어 손책이 때때로 장부를 조사했는데, 공조 주곡이 항상 그를 위해 허위 장부를 만들어 책망을 받지 않게 하니, 오왕이 당시에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후에 통치를 맡은 후에는 여범이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깊은 신임을 받았고, 주곡이 허위로 장부를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태화 3년(기유, 서기 229년)

1. 봄, 촉한 제갈량이 부장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 두 군을 공격하게 하자, 옹주자사 곽회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량이 직접 출병하여 건위로 가자, 곽회가 철수했고, 제갈량은 이에 두 군을 함락시키고 돌아갔다. 한주는 또 조서를 내려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2. 여름, 4월, 병신일, 오왕이 황제에 즉위하여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황룡으로 고쳤다. 백관이 모두 조회했고, 오주가 공을 주유에게 돌렸다. 수원장군 장소가 홀을 들고 덕을 찬양하려 했으나 아직 입을 열지 못했는데, 오주가 말했다: “장공의 계책을 따랐다면 지금쯤 밥을 빌어먹고 있었을 것이다.” 장소가 매우 부끄러워 땅에 엎드려 땀을 흘렸다. 오주가 아버지 손견을 추존하여 무열황제로 하고 묘호를 시조로 하였으며, 형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하고, 아들 손등을 황태자로 세우고, 장사환왕의 아들 손소를 오후로 봉했다. 제갈각을 태자좌보로, 장휴를 우보로, 고담을 보정으로, 진표를 익정도위로 임명하고, 사경, 범신, 양도 등이 모두 빈객이 되어, 이에 동궁이 인재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태자가 시중 호종에게 『빈우목』을 짓게 하여 말했다: “영재가 뛰어나 동료를 능가하는 이는 제갈각이요, 시기를 정확히 식별하고 은미한 것을 꿰뚫는 이는 고담이요, 논변에 능하고 통달하여 말로 난제를 풀어내는 이는 사경이요, 학문을 연구하고 정미하게 깊이 들어가 자유, 자하와 같은 부류는 범신이다.” 양도가 사사로이 호종을 논박하며 말했다: “제갈각(원손)은 재주가 있지만 소략하고, 고담(자흑)은 정밀하지만 독하고, 사경(숙발)은 말 잘하지만 경박하고, 범신(효경)은 침착하지만 편협하다.” 양도는 결국 이 말들로 인해 제갈각 등에게 미움을 샀고, 후에 이 네 사람이 모두 실패했는데, 양도의 말과 같았다.

오주가 사람을 보내 쌍방이 모두 황제를 칭하는 의견을 촉한에 알리게 했다. 촉한 사람들은 오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이익이 없고 명분과 체통이 순조롭지 않으니, 마땅히 정의를 밝히고 맹약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여겼다. 승상 제갈량이 말했다: “손권이 참월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품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의 죄과를 무시하는 이유는 서로 지원하는 원조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만약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그는 반드시 우리에 대한 증오를 깊게 할 것이고, 우리는 군대를 옮겨 동쪽 방어에 전념하며 그와 겨루어야 하며, 반드시 그의 땅을 병합한 후에야 중원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현명한 인재가 아직 많고 장수와 재상이 화목하여 하루아침에 평정할 수 없습니다. 군대를 주둔시켜 서로 지키며 앉아서 소모하게 하여 북쪽 도적이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옛날 효문제가 겸손한 말로 흉노를 대하고, 선제가 몸을 낮추어 오나라와 맹약한 것은 모두 때에 순응하여 융통성 있게 변통하고, 먼 이익을 깊이 생각한 것이지, 보통 사람처럼 감정에 휩쓸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권이 오직 삼분 정립을 구할 뿐 합력할 수 없고, 뜻이 이미 만족하여 강을 건널 계획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추구하면 모두 옳은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와 힘이 서로 같지 않아서 오직 강으로 스스로를 보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권이 강을 넘을 수 없는 것은 위 도적이 한수를 건널 수 없는 것과 같아서, 힘이 남아돌면서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대군이 정벌하면, 그의 상책은 우리 땅을 분할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고, 하책은 백성을 약탈하여 영토를 넓히고 국내에서 무력을 보이는 것이니,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이에 움직이지 않고 우리와 화목하면, 우리가 북벌할 때 동쪽의 근심이 없어지고, 황하 이남의 위군도 전부 서쪽으로 이동할 수 없으니, 이러한 이익도 이미 매우 큽니다. 손권이 참월하고 반역한 죄명은 공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에 위위 진진을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손권이 황제를 칭한 것을 축하하게 했다. 오주가 촉한과 맹약을 맺고 천하를 반분하기로 약속하여, 예주, 청주, 서주, 유주는 오나라에 귀속시키고, 연주, 기주, 병주, 양주는 촉한에 귀속시키며, 사주의 땅은 함수관을 경계로 하기로 했다.

장소(張昭)는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관직과 그가 통솔하던 직무를 사임하고, 보오장군(輔吳將軍)으로 개임되어 지위는 삼공(三公)에 버금갔으며, 루후(婁侯)로 고쳐 봉해지고 식읍(食邑)은 만 호(萬戶)를 받았다. 장소는 조회에 나아갈 때마다 언사와 어조가 매우 엄격했고, 의연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으며, 일찍이 직언(直言)으로 오주(吳主)의 뜻을 거슬러 한동안 알현하지 못했다. 후에 한(漢)나라 사자가 와서 한나라의 덕행이 아름다움을 칭송했는데, 신하들 중에 그를 반박할 자가 없었다. 오주가 탄식하며 말했다. "만약 장공(張公)이 자리에 계셨다면, 그 사자가 굴복하지 않더라도 정신이 쇠잔해져서 어찌 감히 자랑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 날, 오주는 궁중 사자를 보내 장소를 위문하고, 기회를 타서 장소를 알현하게 했다. 장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죄했고, 오주는 무릎을 꿇고 그를 말렸다. 장소가 자리 잡은 후 고개를 들어 말했다. "예전에 태후(太后)와 환왕(桓王)께서 늙은 신을 폐하께 맡기지 않으시고, 폐하를 늙은 신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항상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 깊은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생각이 얕고 소견이 짧아 폐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마음으로 나라를 섬긴 지향은 오직 충성되고 유익하며 목숨을 다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달리하여 구차하게 영화를 구하고 아첨하여 용납받는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주가 그에게 사과했다.

3 원성애왕(元城哀王) 조례(曹禮)가 죽었다.

4 6월 계묘일(癸卯日)에 번양왕(繁陽王) 조목(曹穆)이 죽었다.

5 무신일(戊申日)에 고조(高祖) 대장추(大長秋)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고, 부인 오씨(吳氏)를 고황후(高皇后)로 추존했다.

6 가을 7월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예제(禮制)에 따르면, 왕후(王后)에게 후사가 없으면 방계(旁系)의 아들을 택하여 세워 대종(大宗)을 잇게 하는데, 이는 마땅히 정통을 이어받아 공의(公義)를 행해야 하니, 어찌 다시 사친(私親)을 돌볼 수 있겠는가! 한선제(漢宣帝)는 한소제(漢昭帝)의 뒤를 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황호(皇號)를 더했고, 한애제(漢哀帝)는 제후왕의 신분으로 맞이되어 즉위했는데, 동굉(董宏) 등은 망한 진(秦)나라의 예를 인용하여 당시 군주를 미혹하고 오도했다. 이미 공황(恭皇)을 높이고 경성(京城)에 묘우(廟宇)를 세웠으며, 또 번첩(藩妾)을 총애하여 장신궁(長信宮)에 비유하게 하고, 전전(前殿)에서 소목(昭穆)을 배열하고 동궁(東宮)에서 네 명을 나란히 하여 등급을 넘고 절도가 없었다. 인신(人神)이 모두 복(福)을 내리지 않아 도리어 사단(師丹)의 충정(忠正)한 간언(諫言)을 허물로 여겨 정(丁), 부(傅) 두 집안이 불태워지는 화를 입게 했다. 이로부터 이후로 잇달아 이런 일을 하는 자가 있었다. 옛날 노문공(魯文公)이 제사 순서를 어긴 죄는 하보(夏父)에게 있었고, 송(宋)나라에 법도가 없었던 것은 화원(華元)이 비난받았다. 지금 공경(公卿) 및 관련 관원들에게 명하노니, 깊이 이전 왕조의 일을 경계로 삼아, 후대 자손이 만일 제후의 신분으로 입조하여 대통을 이으면 마땅히 사람의 후사가 되는 도리를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감히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로 당시 군주를 인도하여 미혹하고, 함부로 정통에 맞지 않는 명호를 세워 정통을 어지럽히며, 아버지를 황(皇)이라 칭하고 어머니를 후(后)라 칭한다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그를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말라. 이것을 금책(金策)에 써서 종묘(宗廟)에 보관하고 법전(法典)에 기록하라!"

7 9월에 오주(吳主)가 건업(建業)으로 천도하여 모두 옛 관저를 그대로 사용하고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았다. 태자(太子) 손등(孫登)과 상서구관(尚書九官)을 무창(武昌)에 남겨두고, 상대장군(上大將軍) 육손(陸遜)을 보내 태자를 보좌하게 하고, 겸하여 형주(荊州)와 예장(豫章) 두 군(郡)의 일을 관장하며, 군국(軍國)의 큰일을 감독하고 통솔하게 했다.

남양(南陽) 사람 유영(劉廙)이 일찍이 《선형후례론(先刑後禮論)》을 지었는데, 같은 군(郡)의 사경(謝景)이 육손에게 이 글을 칭찬했다. 육손이 사경을 꾸짖으며 말했다. "예(禮)가 형(刑)보다 중요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유영이 지엽적인 변론으로 선성(先聖)의 가르침을 왜곡했다. 지금 네가 동궁(東宮)을 섬기니 마땅히 인의(仁義)를 준행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니, 그와 같은 언론은 말할 필요도 없다!"

태자가 서릉도독(西陵都督) 보즐(步騭)에게 편지를 보내 가르침과 계발을 청하니, 보즐이 당시 형주(荊州) 경내의 일과 여러 속관(屬官)과 관리들의 행실과 능력을 조목조목 나열하여 답하고, 이에 상소하여 권면했다. "신이 듣기로 군주는 친히 작은 일을 처리하지 않고, 백관(百官)과 각 유관 부서로 하여금 각자 그 직책을 담당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舜)이 아홉 현인(賢人)을 임명하고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므로 현인이 있는 곳은 만 리 밖에서도 적군을 물리칠 수 있으니, 참으로 나라의 이기(利器)이며 국가의 흥망성쇠의 원인입니다. 바라건대 명태자(明太子)께서 더욱 유의하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장굉(張紘)이 오(吳) 땅으로 가족을 데리러 갔다가 도중에 병들어 죽었다. 임종할 때, 아들 장정(張靖)에게 유서 한 통을 남겼다.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들은 모두 덕정(德政)을 닦아 융성한 시대에 비기려 했으나,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아름답지 못했다. 이는 충신과 현능한 보좌가 없어서가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사사로운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들을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상정(常情)은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쉬운 쪽으로 나아가며, 같은 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싫어하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와 반대된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선(善)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 같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군주는 역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고, 자연의 형세를 점유하며, 여덟 가지 권병(權柄)의 위세를 쥐고, 쉽고 같은 즐거움을 누리며, 남에게 빌릴 근심이 없는데, 충신이 쓰기 어려운 방법을 품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니, 그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맞지 않으면 틈이 생기고, 교묘한 말이 그 틈을 타고 들어온다. 군주가 작은 충성에 미혹되고, 은애(恩愛)에 연연하며, 현인과 어리석은 자가 뒤섞이고, 파면과 승진이 순서를 잃게 되니, 이러한 상황의 연유는 모두 사사로운 정이 어지럽힌 결과이다. 그러므로 명철한 군주는 이 점을 깨닫고, 현인을 구하기를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듯이 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지 않고, 사사로운 정을 억제하고 욕심을 줄이며, 도의(道義)로 은애를 끊는다면, 위에는 치우치고 잘못된 임명이 없고, 아래에는 분수에 넘치는 기대가 없을 것이다!" 오주가 이 글을 보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8 겨울 10월에 평망관(平望觀)을 고쳐 청충관(聽充觀)이라 이름했다. 황제가 항상 말하기를, "감옥은 천하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곳이다."라고 하며, 매번 중대한 옥사(獄事)를 판결할 때면 자주 청충관에 가서 친히 심리했다. 처음에 위문후(魏文侯)의 스사(師事)하였던 이회(李悝)가 《법경(法經)》 6편을 지었고, 상앙(商鞅)이 그것을 받아들여 진(秦)나라에서 변법(變法)을 시행하는 데 사용했다. 소하(蕭何)가 《한율(漢律)》을 제정하여 9편으로 늘렸고, 후에 점차 60편으로 늘어났다. 또 《령(令)》 300여 편과 《결사비(決事比)》 906권이 있었으며, 후세에 더하고 줄임이 있어 뒤섞여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후인들이 각자 장구(章句)로 해석을 지었는데,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 유생(儒生)들이 10여 집에 이르렀고, 위(魏)나라 때까지 이르렀다.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조문은 합계 26,272조, 773만여 자에 달하여, 읽는 자가 더욱 어려워졌다. 황제가 이에 조서를 내려 오직 정현의 장구만을 사용하게 했다. 상서(尚書) 위기(衛覬)가 상주하여 말했다. "형법(刑法)은 국가가 중시하지만 사사로운 의논이 가벼이 여기는 바이고, 감옥 관리(官吏)는 백성이 목숨을 맡기는 바이지만 관리 선발자가 가벼이 여기는 바입니다. 군왕(君王) 정치의 폐단이 반드시 여기서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청컨대 율박사(律博士)를 설치하소서." 황제가 따랐다. 또 조서를 내려 사공(司空) 진군(陳群),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소(劉邵) 등에게 한나라 법률을 삭감하고 간소화하여 《신율(新律)》 18편, 《주군령(州郡令)》 45편, 《상서관령(尚書官令)》, 《군중령(軍中令)》 합계 180여 편을 제정하게 하여, 《정율(正律)》 9편에 대해서는 증가하고, 방장과 과령(科令)에 대해서는 감축했다.

9 11월에 낙양(洛陽)의 조묘(祖廟)가 완성되어, 업성(鄴城)에서 고조(高祖), 태조(太祖), 세조(世祖), 고조(高祖) 네 신주(神主)를 맞이했다.

10 12월에 옹구왕(雍丘王) 조식(曹植)이 동하(東河)로 고쳐 봉해졌다.

11 한(漢)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부서와 영채를 남산(南山) 아래 들판으로 옮기고, 면양(沔陽)에 한성(漢城)을 쌓고, 성고(成固)에 악성(樂城)을 쌓았다.

태화(太和) 4년(경술년, 서기 230년)

1 봄 정월에 오주(吳主)가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보내 갑옷 입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주(夷洲)와 단주(亶洲)를 찾아가 그곳 백성들을 잡아와 인구를 늘리려 했다. 육손(陸遜)과 전종(全琮)이 모두 간언하며 "환왕(桓王)께서 기업(基業)을 창시할 때 병력이 일려(一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강동(江東)의 현존 군대만으로도 큰일을 도모하기에 충분하니, 마땅히 불모지(不毛之地)를 원정하여 만 리 밖에서 다른 이를 습격해서는 안 되며, 풍파(風波)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또 백성이 수토(水土)를 바꾸면 반드시 질병과 온역(瘟疫)을 일으켜, 늘리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고, 이익을 얻으려다가 도리어 해를 입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곳 백성은 금수(禽獸)와 같아서 얻는다 해도 큰일을 이루는 데 부족하고, 없어도 병력을 줄이는 데 부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오주는 듣지 않았다.

2. 상서랑(尙書郞) 낭야(琅邪) 사람 제갈탄(諸葛誕), 중서랑(中書郞) 남양(南陽) 사람 등양(鄧颺) 등이 서로 결탁하여 당우(黨友)가 되고, 서로 품평하고 표방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 하후현(夏侯玄) 등 네 사람을 ‘사총(四聰)’이라 하고, 제갈탄 등 여덟 사람을 ‘팔달(八達)’이라 불렀다. 하후현은 하후상(夏侯尙)의 아들이다.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의 아들 유희(劉熙), 중서령(中書令) 손자(孫資)의 아들 손밀(孫密), 이부상서(吏部尙書) 위진(衛臻)의 아들 위열(衛烈), 이 세 사람은 그들과 견줄 만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권세 있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너그럽게 열 명에 포함되어 ‘삼예(三豫)’라 불렀다.

사도(司徒)의 직무를 대행하던 동소(董昭)가 상소하여 말했다. "무릇 천하를 가진 자는 돈후하고 소박하며 충성스럽고 성실한 선비를 높이지 않는 이가 없고,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은 자를 깊이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는 이 무리들이 교화를 무너뜨리고 정치를 어지럽히며 풍속을 해치고 가르침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즘 위풍(魏諷)이 건안(建安) 말년에 법에 걸려 죽었고, 조위(曹偉)가 황초(黃初) 초년에 목 베였습니다. 생각건대, 앞뒤로 내린 성스러운 조칙은 부화하고 허위된 것을 깊이 미워하여, 이로써 사악한 당파를 무찌르고 해산시키려 하여 항상 분개하고 이로써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집법(執法)하는 관리들이 모두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적발하지 못하니, 풍속을 무너뜨리고 침탈하려는 욕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은밀히 살펴보건대, 지금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학문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사귀는 일을 업으로 삼습니다. 나라의 선비들은 효우(孝友)와 청렴한 수양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권세에 아첨하고 이익을 쫓는 것을 먼저 합니다. 그들은 당을 만들어 무리를 지어 서로 연결하고, 서로 칭찬하고 감탄하며, 헐뜯고 공격하는 것을 형벌로 삼고, 당여(黨與)의 칭찬을 작록(爵祿)과 상사(賞賜)로 삼습니다. 붙좇는 자에게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붙좇지 않는 자에게는 허물과 잘못을 만들어 냅니다. 심지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어찌 건너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다만 인도(人道)가 부지런하지 않고, 그물이 넓지 않음을 걱정할 뿐이다. 사람이 어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걱정하랴? 다만 약을 삼켜 부드럽게 조섭하면 될 뿐이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집안의 노비나 문객으로 하여금 관리의 가족인 체 꾸며 신분을 속여 출입하게 하여, 궁중 금지 구역을 왕래하며 서신을 전하고, 알아보고 탐문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법이 허용하지 않고 형벌이 용서하지 않는 바이며, 비록 위풍, 조위의 죄악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2월, 임인일(壬寅日)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사회 풍기가 소박하거나 화려함은 교화를 따라 변한다. 전란 이후로 경학이 폐지되고 단절되어, 후배 젊은이들의 배움의 지향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다. 어찌 가르침과 훈계가 두루 미치지 못한 탓이겠는가? 아니면 등용하는 자가 덕행으로 현창되게 하지 않은 탓이겠는가! 낭관(郞官)과 이원(吏員) 중에서 한 가지 경전에 통달하고 백성을 다스릴 재능이 있는 자는 박사(博士)가 시험하여 그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즉시 임용하고, 부화하여 본업에 힘쓰지 않고 근본을 추구하지 않는 자는 파면하여 물리쳐라!" 이에 제갈탄, 등양 등을 파면하였다.

3. 여름, 4월, 정릉성후(定陵成侯) 종요(鍾繇)가 죽었다.

4. 6월, 무자일(戊子日)에 태황태후(太皇太后) 변씨(卞氏)가 죽었다. 가을, 7월, 무선황후(武宣皇后)를 장사 지냈다.

5. 대사마(大司馬) 조진(曹眞)이 "촉한(蜀漢)이 여러 차례 침입하니, 사곡(斜谷)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청하였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따라 조서를 내려 대장군(大將軍) 사마의(司馬懿)로 하여금 한수(漢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서성(西城)에서 출발하여 조진과 함께 한중(漢中)에서 합류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은 혹은 자오곡(子午谷)으로, 혹은 무위(武威)로 진군하게 하였다. 사공(司空) 진군(陳群)이 간언하며 말했다. "태조(太祖)께서 일찍이 양평(陽平)에 이르러 장로(張魯)를 칠 때, 콩과 보리를 많이 거두어 군량을 보충했으나 장로가 항복하기 전에 양식이 바닥났습니다. 지금은 의지할 만한 보급품도 없을 뿐더러, 사곡은 험준하여 나아가고 물러서기가 어렵고, 물자를 운반하다가는 반드시 가로막힐 것입니다. 많은 병력을 요충지에 지키게 하면 전투 병력이 줄어드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가 진군의 의견을 따랐다. 조진이 다시 표를 올려 자오도(子午道)로 진군하기를 청하였다. 진군이 또 그 불편함을 진술하고 군사 비용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진군의 의견을 조진에게 보냈으나, 조진은 조칙을 근거로 곧바로 출발하였다.

6. 8월, 신사일(辛巳日)에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하여, 을미일(乙未日)에 허창(許昌)에 도착하였다.

7. 한(漢)나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은 위군(魏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고(成固)의 적판(赤坂)에 주둔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는 이엄(李嚴)을 불러 2만 명을 이끌고 한중으로 가도록 명하고, 표를 올려 이엄의 아들 이풍(李豐)을 강주도독(江州都督)으로 삼아 군무를 감독하고 이엄의 후방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마침 큰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잔도(棧道)가 끊어졌다. 태위(太尉) 화흠(華歆)이 상소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성덕으로 성강(成康)의 다스림의 흥성을 이으셨으니, 바라건대 먼저 치도(治道)에 마음을 쓰시고 정벌은 뒤로 미루소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의식(衣食)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만약 중원에 추위와 굶주림의 근심이 없고, 백성에게 임금을 등질 마음이 없다면, 오(吳)와 촉(蜀) 두 도적의 틈은 앉아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답하여 말했다. "도적들은 산천의 험함을 의지하고, 두 선조께서 이전에 고생하며 정벌하셨어도 아직 평정하지 못하셨으니, 짐이 어찌 감히 자랑하여 반드시 그들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공취하지 않으면 스스로 쇠패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겨, 이에 출병하여 그들의 허점을 엿본 것이다. 만약 천시(天時)가 이르지 않았다면,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돌린 것이 바로 앞일의 거울이니, 짐은 공경히 그 경계를 잊지 않겠다."

소부(少府) 양부(楊阜)가 상소하여 말했다. "옛날 무왕(武王) 때에 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들자 군신(君臣)이 얼굴빛을 바꾸었고, 행동에 길조가 있어도 오히려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물며 재이(災異)가 있는데도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오와 촉이 평정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여러 번 재변을 내리고, 각 군이 막 진군하려는데도 큰비의 재앙이 있어 산골짜기의 험한 곳에 머물게 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운반하는 수고로움과 지고 나르는 고통으로 소모가 이미 많으니, 만약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본래의 계획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좌전(左傳)》에 이르기를, '가능함을 보고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는 것이 군대의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헛되이 육군(六軍)을 골짜기 사이에 곤궁하게 하여, 나아가도 취할 것이 없고 물러나지도 못한다면, 이는 제왕이 병사를 쓰는 도리가 아닙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숙(王肅)이 상소하여 말했다. "전대(前代)의 지책(志策)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 리 길에 양식을 수송하면 병사들은 굶주린 얼굴을 하고, 땔나무를 해서 밥을 지으면 군대가 매일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 이는 평탄한 길을 행군하는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하물며 험준한 곳에 깊이 들어가 길을 뚫고 나아간다면 그 수고로움이 반드시 백 배나 될 것입니다. 지금은 또 연이은 큰비에 산이 가파르고 미끄러워, 군사들은 핍박받아 펼쳐지지 못하고, 양식은 멀어서 잇대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진실로 행군의 큰 금기입니다. 듣자니 조진이 출발한 지 이미 한 달이 지나서야 반곡(半谷)에 이르렀고, 길을 닦는 공사에 병사들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적들은 오히려 편안히 쉬면서 오는 자를 기다리게 되니, 이는 바로 병가(兵家)가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대로 말하면 무왕이 주(紂)를 정벌하다가 관(關)을 나섰다가 돌아왔고, 근대로 말하면 무(武)・문(文) 두 황제(武帝, 文帝)가 손권(孫權)을 정벌하여 강가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천시에 순응하고 권변(權變)에 통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성들은 폐하께서 성명(聖明)하시고, 수재와 비의 어려움 때문에 군사를 멈추어 그들을 쉬게 하셨다가, 후일에 틈이 생기면 다시 형세를 타고 그들을 사용하실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른바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위난에 달려가게 하여 백성들이 죽는 것을 잊게 하는 것입니다." 왕숙은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9월, 조서를 내려 조진 등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오게 하였다.

8. 겨울, 10월, 을묘일(乙卯日)에 황제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당시 좌복야(左僕射) 서선(徐宣)이 유수(留守)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돌아오자 주관 관리가 문서를 올렸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보는 것과 복야가 보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끝내 보지 않았다.

9. 12월, 신미일(辛未日)에 문소황후(文昭皇后)를 조양릉(朝陽陵)으로 이장(移葬)하였다.

10. 오(吳)나라 주(主)가 합비(合肥)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자,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이 표를 올려 연주(兗州)와 예주(豫州)의 여러 군대를 모두 집결시킬 것을 청하였고, 오군이 곧 퇴병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군사를 철수시켰다. 만총은 생각하기를, "지금 적이 크게 쳐들어왔다가 물러난 것은 그들의 본의가 아니다. 이는 반드시 퇴각하는 척하여 우리 군대를 철수시킨 뒤, 다시 방향을 돌려 허술한 틈을 타 공격하여, 우리의 무비(無備)를 찌르려는 것이다."라고 여겨, 표를 올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그 후 십여 일 만에 오군이 과연 다시 왔다. 합비성에 도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병하였다.

11. 한(漢)나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장완(蔣琬)을 장사(長史)로 임명하였다. 제갈량이 여러 번 외출할 때마다 장완은 항상 양식이 넉넉하고 병력이 충분하도록 보장하여 제갈량에게 공급하였다. 제갈량은 항상 말하기를, "공염(公琰, 장완의 자)은 지향이 충성스럽고 단아하여,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12. 청주 사람 은번(隱蕃)이 오나라로 도망쳐와 오주(吳主)에게 상소를 올리며 말했다: "신이 듣기에 주왕(紂王)이 무도하자 미자(微子)가 먼저 떠났고, 고조(高祖)가 너그럽고 영명하자 진평(陳平)이 먼저 투항했다고 합니다. 신은 나이 스물두 살에 고향을 버리고 유도(有道)한 군주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며, 하늘과 신령의 도움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하여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신이 오나라에 온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주관하는 관료들이 신을 항복한 사람과 동일하게 여겨 정밀히 분별하지 않아, 신의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이 위에 전달되지 못하고, 근심하고 탄식하며 여러 번 그만두려 해도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삼가 궁문(宮門) 아래에 나아가 상주문을 올리오니, 부디 인견(引見)을 받아들이소서." 오주가 즉시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자, 은번이 나아가 사은하고 질문에 대답하며 시무(時務)를 진술하니, 말과 풍채가 매우 훌륭했다. 시중(侍中) 우영군(右領軍) 호종(胡綜)이 곁에서 배석하며, 오주가 묻기를 "그는 어떤가?" 하니, 호종이 대답하여 말했다: "은번의 상소는 과장된 말이 동방삭(東方朔)을 닮았고, 말재주와 변설은 예형(禰衡)을 닮았으나, 재능은 모두 그들만 못합니다." 오주가 다시 묻기를 "무슨 관직을 맡길 수 있겠는가?" 하니, 호종이 대답하여 말했다: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잠시 서울 안의 작은 직무를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주가 은번이 형옥(刑獄)에 대해 크게 말했으므로, 그를 정위감(廷尉監)으로 임명했다. 좌장군(左將軍) 주거(朱據)와 정위(廷尉) 학보(郝普)가 여러 번 은번을 보필하는 군주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했으며, 학보는 특히 그와 친하고 가까이 지내며, 자주 그가 재능을 제대로 쓰지 못함을 탄식했다. 이에 은번의 집 앞에는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빈객이 집에 가득하여, 위장군(衛將軍) 전종(全琮)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을 기울여 접대했다. 오직 양도(羊衜)와 선조랑(宣詔郎) 예장(豫章) 사람 양적(楊迪)만이 그와의 교제를 거절했다. 반준(潘濬)의 아들 반기(潘翥)도 은번과 교제하며 그에게 재물을 보냈다. 반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편지를 써서 반기를 꾸짖어 말했다: "내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뜻을 목숨으로 갚기로 하였거늘, 너희들이 도성에 있으면서 마땅히 공손하고 순종하며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한 이를 사모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항복한 적과 교제하며, 또한 곡식을 보내느냐! 내가 먼 곳에서 이 일을 듣고 마음속으로 놀라고 얼굴에 열이 올라, 여러 날 동안 근심하고 슬퍼하였다. 편지가 도착하는 대로, 즉시 사자(使者)에게 가서 곤장 100대를 맞고, 보낸 재물을 추징하라!"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번이 오나라에서 반란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도망쳤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오주가 엄하게 학보를 꾸짖자, 학보는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주거는 연금되었다가 한참 만에 풀려났다.

13. 무릉(武陵)의 오계(五溪) 만이(蠻夷)가 오나라를 배반하자, 오주는 남방이 이미 평정되고 안정되었다고 여겨, 교주자사(交州刺史) 여대(呂岱)를 소환하여 군대를 주둔시켜 장사구구(長沙漚口)에 머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