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에서 더 편하게 《자치통감》 앱: 전문 검색, 책갈피, TTS, 오프라인
테마
글자 크기 18
진기

진기사

제 4 편

【진기사】 은유작액(屠维作噩)에서 시작하여 저옹과장(著雍郭牂)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년이다.

세조무황제 하(世祖武皇帝下)

여름, 4월에 태묘(太庙)가 완공되었다. 을사일에 합제(合祭)를 거행하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모용외(慕容廆)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5월, 조서를 내려 모용외를 선비도독(鲜卑都督)으로 임명했다. 모용외가 하감(何龛)을 알현할 때 사대부의 예절을 갖추어 두건과 관복을 착용하고 문을 두드렸으나, 하감은 군대를 배치한 채 그를 맞이했다. 이에 모용외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갔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모용외가 말했다. "주인이 예로써 손님을 대하지 않는데, 손님이 어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며, 이후로 그를 깊이 존경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다. 당시 선비족 우문씨(宇文氏)와 단씨(段氏)가 강성하여 여러 차례 모용외를 침략하자, 모용외는 겸손한 말과 후한 재물로 그들을 섬겼다. 단국(段国) 선우(单于) 단계(段阶)가 딸을 모용외에게 시집보내, 모용황(慕容皝), 모용인(慕容仁), 모용소(慕容昭)를 낳았다. 모용외는 요동(辽东)이 편벽하고 멀다는 이유로 도하(徒河)의 청산(青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에 명당(明堂)과 남교(南郊) 오제(五帝)의 제단을 복원했다.

11월, 병진일에 상서령(尚书令) 제북성후(济北成侯) 순욱(荀勖)이 사망했다. 순욱은 재주와 식견이 있었고, 임금의 마음을 잘 살펴 총애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중서성(中书省)에 있으면서 기밀을 전담했다. 상서(尚书)로 승진하자 매우 낙담하고 실의에 찼다. 어떤 이가 축하하자, 순욱이 말했다. "내 봉황지(凤凰池)를 빼앗아 갔으니, 그대들은 무슨 축하할 일이 있겠는가!"

황제가 지나치게 음탕한 여색에 빠져 병이 났다. 양준(杨骏)이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马亮)을 꺼려 그를 밀어내고자 했다. 갑신일에 사마량을 시중(侍中), 대사마(大司马), 가황월(假黄钺), 대도독(大都督), 독예주제군사(督豫州诸军事)로 임명하여 허창(许昌)을 진수하게 하고, 남양왕(南阳王) 사마동(司马柬)을 진왕(秦王)으로 옮겨 도독관중제군사(都督关中诸军事)로 삼았으며, 시평왕(始平王) 사마위(司马玮)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荆州诸军事)로, 복양왕(濮阳王) 사마윤(司马允)을 회남왕(淮南王)으로 삼아 도독양주강주이주제군사(都督扬州江州二州诸军事)로 임명하고, 모두 가절(假节)하여 봉국으로 가게 했다. 황자 사마애(司马乂)를 장사왕(长沙王)으로, 사마영(司马颖)을 성도왕(成都王)으로, 사마안(司马晏)을 오왕(吴王)으로, 사마치(司马炽)를 예장왕(豫章王)으로, 사마연(司马演)을 대왕(代王)으로, 황손 사마적(司马遹)을 광릉왕(广陵王)으로 책봉했다. 또 회남왕의 아들 사마적(司马迪)을 한왕(汉王)으로, 초왕의 아들 사마의(司马仪)를 비릉왕(毗陵王)으로, 부풍왕(扶风王) 사마창(司马畅)을 순양왕(顺阳王)으로, 사마창의 아우 사마흠(司马歆)을 신야공(新野公)으로 옮겨 봉했다. 사마창은 양준의 아들이다. 낭야왕(琅邪王) 사마근(司马觐)의 아우 사마담(司马澹)을 동무공(东武公)으로, 사마유(司马繇)를 동안공(东安公)으로 삼았다. 사마근은 사마주(司马伷)의 아들이다.

당초 황제가 재인(才人) 사구(谢玖)를 태자에게 주어 황손 사마적을 낳게 했다. 궁중에서 밤중에 불이 났는데, 황제가 누각에 올라 바라보았다. 당시 사마적은 다섯 살이었는데, 황제의 옷자락을 끌며 어두운 곳으로 가서 말했다. "밤중에 급작스러우니, 뜻밖의 상황을 경계해야 합니다. 불빛이 임금님을 비추게 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이에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사마적이 선제(宣帝)를 닮았다고 칭송하여, 천하 사람들이 마음으로 귀의하고 우러러보았다. 황제는 태자가 무능함을 알았지만, 사마적이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여 태자를 폐할 마음이 없었다. 또 왕우(王佑)의 계책을 받아들여, 태자의 동모제(同母弟)인 사마동, 사마위, 사마윤을 각각 요충지에 진수하게 했다. 또 양씨(杨氏)의 핍박이 두려워 다시 왕우를 북군중후(北军中候)로 임명하여 금군을 관장하게 했다. 황제가 황손 사마적을 위해 요원(僚属)을 엄선하여, 산기상시(散骑常侍) 유식(刘寔)이 지조와 행실이 맑고 소박하다 하여 그를 광릉왕의 사부(师傅)로 임명했다.

유식은 당시 세속이 명예와 이익을 쫓고 청렴과 겸양이 부족함을 개탄하여, 일찍이 《숭양론(崇让论)》을 지어, 처음 관직을 받아 사은표(谢恩表章)를 올리는 자는 반드시 현인을 천거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 양보해야만 통과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한 자리가 비면 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양한 사람을 골라 임용하자고 주장하며, "사람의 상정(常情)은, 다투면 자기가 미치지 못하는 자를 비방하려 하고, 겸양하면 자기를 능가하는 자를 다투어 천거하려 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다투면 우열을 분별하기 어렵고, 시대가 겸양하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드러난다. 이때에 몸을 물러나 자신을 닦으면, 그를 사양하는 자가 많아져 비록 가난하고 천하게 지내려 해도 할 수 없게 된다. 이익을 쫓아 달리면서 남이 자신을 사양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뒤로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회남상(淮南相) 유송(刘颂)이 상소하기를, "폐하께서는 법령과 금령이 느슨하고 방임된 지 오래되어, 갑자기 엄한 법으로 신하들을 단속할 수 없음을 아시니, 이는 진실로 시의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로잡고 폐단을 구제함에 있어서는 자연히 점차 청렴하고 엄정한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배를 저어 급류를 건너려 함에 있어 비록 곧바로 건널 수는 없어도, 점차 흐름을 따라 천천히 목표를 향해 나아간 뒤에야 건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태시(泰始) 연간 이래로 거의 30년, 모든 사업이 이전보다 번성하지 못하고, 폐하의 명철하고 성스러우심으로도 쇠미한 세상의 폐단을 바로잡아 개국 초기의 융성을 이루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약 장래에 대업(大业)이 편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그 근심과 책임은 여전히 폐하께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사직(社稷)을 위해 생각한다면, 친족과 현인을 분봉(分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형세를 신중히 헤아려, 제후 중 도의를 따라 행동하는 자는 그 힘으로 서울을 지탱할 수 있고, 간흉한 마음을 품은 자는 그 세력으로 홀로 무언가를 꾀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이루기는 매우 어려우니, 폐하께서는 고금에 통달한 인사들과 함께 깊이 공모하셔야 합니다. 주(周)나라의 제후는 죄가 있으면 그 몸만 주살하고 유배할 뿐, 봉국은 끊지 않았습니다. 한(汉)나라의 제후는 죄가 있거나 자식이 없으면 봉국이 따라서 멸망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도리어 한나라의 폐단을 바로잡고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라야, 아래가 안정되고 위가 편안해집니다. 천하가 지극히 넓고, 만사가 지극히 많으며, 임금은 지극히 적어서 마치 하늘의 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왕(圣王)의 교화는 스스로 요령을 잡고 사무를 신하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이는 수고를 두려워하고 편안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실로 정체(政体)가 마땅히 그러한 것입니다. 일이 시작될 때 능력을 분별하기는 어렵지만, 성패에 따라 공과를 나누기는 쉽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매번 시작할 때는 정성을 다하시되, 최종 결과를 살피는 데는 소홀하시니, 이것이 정치가 완성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임금이 진실로 편안한 자리에서 요점을 잡고, 성패 이후에 공과를 고찰한다면, 여러 신하들은 상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육경(六卿)이 직무를 나누어 맡고, 총재(冢宰)가 그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진(秦)나라와 한(汉)나라 이래로는 구경(九卿)이 사무를 집행하고, 승상(丞相)이 총괄했습니다. 지금은 상서성(尚书省)이 일을 결재하고, 각 경(卿)은 단지 성명(成命)을 받들어 행할 뿐이니, 고제(古制)에 비해 권력이 너무 무겁습니다. 모든 사무를 외정(外廷)의 각 사(寺)에 맡겨 그들이 전결(专决)하게 하고, 상서성은 대강을 통괄하여 마치 승상이 하듯이 하고, 연말에 공적을 고사(考査)하며 부적(簿籍)을 대조하여 상벌을 시행할 뿐이라면, 이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일이 위에서 명을 받들어 행해져, 위에서 실수가 있으면 다시 아래에 죄를 돌릴 수 없고, 연말에 사업이 성취되지 않아도 누구를 책망해야 할지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 과실과 착오는 인정(人情)상 반드시 있는 것이니, 만약 모두 법으로 규찰한다면 조정과 민간에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근세 이래로 감찰(监察)을 맡은 관원들은 대체로 큰 기강은 잡지 못하고 작은 과실만을 반드시 추궁하는데, 이는 아마도 호강(豪强)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며, 또 직무가 해이해질까 두려워하여, 법망을 촘촘히 하여 작은 죄를 얽어매어, 탄핵하는 장문(章文)이 끊이지 않게 하여, 표면으로는 충성을 다하고 공을 위하는 듯하나,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왕(圣王)은 번쇄하고 엄밀한 옥사(狱事)를 칭송하지 않고, 반드시 간사한 장문을 배척하여, 정사를 해치는 간악한 무리가 자연히 사로잡히도록 합니다. 창업(创业)의 공훈은 교화를 세우고 제도를 정하여, 남긴 풍모가 사람 마음을 붙잡고, 남긴 공업이 유약한 이를 도와, 후세가 그것에 의지하여 혼미해도 맑아지고, 어리석어도 지혜로운 듯하게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숭상할 만한 것입니다. 관청을 수리하고 여러 공사를 하는 것은 항상 지나치게 해서, 일으키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으며, 이는 장래에 폐하께서 하시지 않아도 자연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필요 없는 일에 수고하여 의지할 근본을 해치고 있으니, 신은 은밀히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으나, 황제는 모두 채택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유연(刘渊)을 흉노북부도위(匈奴北部都尉)로 임명했다. 유연은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마음을 다해 사람을 대하니, 오부(五部)의 호걸들과 유주(幽州) 기주(冀州)의 명망 높은 유생(儒生)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부했다.

해고족(奚轲部落) 남녀 10만 명이 와서 항복하였다.

효혜황제(孝惠皇帝) 상지상(上之上)

봄, 정월(正月) 신유삭(辛酉朔)에 연호를 태희(太熙)로 고쳤다.

기사(己巳)일에 왕혼(王渾)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였다.

사공(司空)·시중(侍中)·상서령(尚書令) 위관(衛瓘)의 아들 위선(衛宣)이 번창공주(繁昌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위선은 술을 좋아하고 과실이 많았는데, 양준(楊駿)이 위관을 미워하여 쫓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황문환관(黃門宦官)과 함께 모의하여 위선을 비방하고, 무제(武帝)에게 공주를 빼앗도록 권하였다. 위관은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늙었다고 사직하였다. 조서를 내려 위관을 태보(太保)로 승진시키고, 공작(公爵)의 신분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극양강자(劇陽康子) 위서(魏舒)가 죽었다.

3월 갑자(甲子)일에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 석감(石鑑)을 사공(司空)으로 임명하였다.

황제가 병이 위독해져 유조(遺詔)를 남기지 못하였고, 공신들은 대부분 이미 죽었으며, 오직 시중(侍中)·거기장군(車騎將軍) 양준만이 홀로 궁중에서 병간호를 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황제의 곁에 있을 수 없었고, 양준은 이에 멋대로 사사로운 뜻으로 중요하고 가까운 직위들을 바꾸어 자신의 심복을 배치하였다. 마침 황제의 병이 잠시 나아져 새로 임명된 사람들을 보고 엄숙하게 양준에게 말하였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 그때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므로, 중서성(中書省)에 조서를 초안하게 하여 사마량과 양준이 함께 보정(輔政)하게 하고, 또 조정에서 명망 있는 몇 사람을 뽑아 그들을 보좌하게 하려 하였다. 양준이 중서성에서 조서를 빌려 보더니, 가져간 후 곧 숨겨버렸다. 중서감(中書監) 화의(華廙)가 두려워하여 직접 가서 되찾으려 하였으나, 양준이 끝내 주지 않았다. 마침 황제가 다시 혼미해지자, 황후가 상주하여 양준이 보정하게 하였고,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였다. 여름, 4월 신축(辛丑)일에 황후가 화의와 중서령(中書令) 하소(何劭)를 불러 구두로 황제의 뜻을 전하여 조서를 초안하게 하였으니, 양준을 태위(太尉)·태자태부(太子太傅)·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시중(侍中)·록상서사(錄尚書事)로 임명하는 내용이었다. 조서가 완성되자 황후가 화의와 하소가 있는 자리에서 황제에게 올렸고, 황제는 바라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화의는 화흠(華歆)의 손자이고, 하소는 하증(何曾)의 아들이다. 이에 여남왕 사마량을 재촉하여 진(鎭)으로 가게 하였다. 황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나아져 묻기를: "여남왕이 왔느냐?" 좌우에서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이내 병이 위독해져 기유(己酉)일에 함장전(含章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도량이 너그럽고 명철하며 모략을 잘하고, 직언을 받아들였으며, 사람에게 실례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고쳤으며, 황후를 존숭하여 황태후로 삼고, 비(妃) 가씨(賈氏)를 황후로 세웠다.

양준이 입궐하여 태극전(太極殿)에 머물렀다. 영구(靈柩)가 발인(發靷)될 때 후궁 비빈들이 나와 작별하였으나, 양준은 내려오지 않고 백 명의 호분(虎賁) 무사들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석감과 중호군(中護軍) 장소(張劭)에게 능묘 조성을 감독하게 하였다.

여남왕 사마량이 양준을 두려워하여 곡(哭)을 하러 가지 못하고, 사문(司馬門) 밖에서만 울었다. 그는 부(府)를 떠나 성 밖에 주둔하며, 상소하여 장례가 끝난 후 출발하겠다고 청하였다. 어떤 사람이 사마량이 군사를 일으켜 양준을 토벌하려 한다고 보고하자, 양준이 매우 두려워하여 태후에게 고하고, 혜제(惠帝)가 친히 조서를 써서 석감과 장소에게 내리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능(陵)의 병사를 이끌고 사마량을 토벌하게 하였다. 장소는 양준의 생질(甥)로서 즉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석감에게 속히 출병하기를 재촉하였다. 석감은 그 일이 그렇지 않다고 여겨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사마량이 정위(廷尉) 하욱(何勖)에게 계책을 묻자, 하욱이 말하였다: "지금 조정 안팎이 모두 그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데, 그대가 남을 토벌하지 않고, 도리어 남이 그대를 토벌할까 두려워하십니까!" 사마량이 감히 출병하지 못하고, 밤에 달려 허창(許昌)으로 가서 겨우 화를 면하였다. 양준의 아우 양제(楊濟)와 생질 하남윤(河南尹) 이빈(李斌)이 모두 양준에게 사마량을 머물게 하기를 권하였으나, 양준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상서좌승(尚書左丞) 부함(傅咸)에게 말하였다: "가형(家兄)이 만약 대사마(大司馬) 사마량을 불러들이고 스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한다면, 문호(門戶)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함이 말하였다: "종실(宗室)과 외척(外戚)이 서로 의지해야 안정될 수 있습니다. 그저 대사마를 불러들여 함께 지극한 공도(公道)를 숭상하여 조정을 보좌하게 하면 될 뿐이지, 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양제가 또 시중(侍中) 석숭(石崇)을 시켜 양준에게 가서 이 일을 설명하게 하였으나, 양준은 여전히 따르지 않았다.

5월 신미(辛未)일에 무제를 준양릉(峻陽陵)에 안장하였다.

양준은 스스로 평소에 좋은 명망이 없음을 알고, 위명제(魏明帝)가 즉위할 때의 전례를 본받아 널리 작위를 더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하였다. 좌군장군(左軍將軍) 부지(傅祗)는 모든 신하들이 한 등급씩 작위를 더하고, 상사(喪事)에 참여한 자는 두 등급을 더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천석(二千石) 이상의 관리는 모두 관중후(關中侯)로 봉하고, 1년간의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석숭과 산기시랑(散騎侍郎) 하반(何攀)이 함께 상소하여 말하였다: "황제께서 동궁(東宮)에서 태자로 지낸 지 20여 년이었는데, 지금 대업을 계승하였으나 포상과 작위 수여가 태시(泰始) 연간의 혁명 초기와 여러 장수들이 오(吳)를 평정한 공로보다도 후하여, 경중(輕重)이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대진(大晉)의 국운이 무궁하니, 지금 창시하는 제도가 후세에 전해져야 합니다. 만약 작위가 있으면 반드시 승진시킨다면, 몇 대 후에는 공작(公爵)이나 후작(侯爵)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태위 양준을 태부(太傅)·대도독(大都督)·가황월(假黃鉞)로 삼아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게 하고, 백관(百官)은 각기 자신의 직무를 통솔하여 그에게 명령을 받게 하였다. 부함이 양준에게 말하였다: "상중(喪中)에 정사를 처리하지 않는 규칙은 이미 오래도록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聖上)께서 겸손하시어 정사를 명공(明公)께 위임하셨으나, 천하 사람들이 이를 좋게 여기지 않으니, 아마 명공께서 감당하기 어려우실까 두렵습니다. 주공(周公)은 위대한 성인(聖人)이었음에도 오히려 유언비어를 초래하였거늘, 하물며 성상의 나이가 성왕(成王)과 같지 않음에랴!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능묘 수리가 끝난 후에는 명공께서 진퇴(進退)의 적절한 방도를 신중히 생각하셔야 하며,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그 충성을 살필 수 있게 한다면, 말이 어찌 많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양준이 듣지 않았다. 부함이 여러 번 양준을 간언하자, 양준이 점차 불만을 품고 부함을 외직(外職)인 군수(郡守)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빈이 말하였다: "정직한 사람을 쫓아내면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양준이 이에 그만두었다. 양제가 부함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아들을 낳아야 관청 일을 끝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청 일은 쉽게 끝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대가 이 일로 인해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기에, 특별히 그대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함이 답장하여 말하였다: "위공(衛公)께서 말씀하시기를 '술과 여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강직함보다는 심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술과 여자로 죽는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강직함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구차하게 행동함으로써 명철보신(明哲保身)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강직함 때문에 화를 입은 사람들은 대개 정도를 지나치게 바로잡으려 하거나, 충성이 독실하지 못하여 격렬하고 엄격한 태도로 명예를 얻으려 하였기 때문에 원한을 초래한 것이지, 어찌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서 도리어 원망과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양준이 가후(賈后)가 음흉하고 사나우며 모략과 권술이 많음을 알고 그녀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생질 단광(段廣)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하여 기밀을 관장하게 하고, 장소를 중호군(中護軍)으로 삼아 금군(禁軍)을 통솔하게 하였다. 모든 조서와 명령은 황제가 검토한 후 궁중에 들여보내어 태후에게 보고한 뒤에야 시행되었다.

양준이 집정(執政)하면서 엄격하고 자질구레하며 전횡하고 고집이 세었으므로, 조정 안팎에서 대부분 그를 싫어하였다. 풍익태수(馮翊太守) 손초(孫楚)가 양준에게 말하였다: "공께서는 외척(外戚)의 신분으로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과 같은 중임을 맡으셨으니, 마땅히 대공무사(大公無私)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지금 종실의 세력이 강성한데, 공께서 그들과 함께 조정 일에 참여하지 않고, 마음에 의심과 시기를 품고 밖으로 사사로운 당파를 세우니, 화가 올 것이 멀지 않았습니다!" 양준이 듣지 않았다. 손초는 손자(孫資)의 손자이다.

홍훈소부(弘訓少府) 괴흠(蒯欽)은 양준의 고모의 아들로서, 여러 번 직언으로 양준을 거슬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걱정하였으나, 괴흠이 말하였다: "양문장(楊文長)은 비록 어리석지만,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함은 알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나를 멀리할 뿐인데, 내가 멀리할 수 있다면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함께 멸족(滅族)을 당할 것입니다."

양준이 흉노(匈奴) 동부(東部) 사람 왕창(王彰)을 불러 사마(司馬)로 삼으려 하였으나, 왕창이 피하여 받지 않았다. 그의 벗 신흥(新興) 사람 장선자(張宣子)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왕창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한 집안에서 두 명의 황후가 나온 경우, 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양태부(楊太傅)는 소인(小人)을 가까이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망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다를 건너 변방을 넘어 피하려 해도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그 불러줌을 받겠습니까! 게다가 무제(武帝)께서 국가의 대계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계승할 아들이 이미 중임을 감당할 수 없으며, 고명(顧命)을 받은 자도 적임자가 아니니, 천하의 난리가 곧 다가올 것입니다."

가을 8월 임오일, 광릉왕 사마유를 황태자로 세웠다. 중서감 하소를 태자태사로, 위위 배개를 소사로, 이부상서 왕융을 태부로, 전태상 장화를 소부로, 위장군 양제를 태보로, 상서 화교를 소보로 임명했다. 태자의 어머니 사씨를 숙원으로 봉했다. 가후는 항상 사씨를 별실에 두어 태자와 만나지 못하게 했다. 처음에 화교가 일찍이 무제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황태자는 순박하고 고아한 풍모가 있으나 말세에는 거짓이 많아, 아마 폐하의 집안일을 끝마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무제가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후에 화교가 순욱 등과 함께 무제를 모시는데, 무제가 말하기를 “태자가 근래 조정에 들어와 자못 진보가 있으니, 그대들이 함께 가서 보고 대략 세상 일을 논해 보라.”라고 했다. 돌아와서 순욱 등은 모두 태자의 식견이 높고 도량이 넓어 성명하신 조서와 같다고 칭송했다. 화교가 말하기를 “자질은 여전히 본래와 같습니다.”라고 하니, 무제가 불쾌하게 일어났다. 혜제가 즉위하자, 화교가 태자 사마유를 따라 조정에 들어갔는데, 가후가 혜제에게 화교에게 묻도록 하여 “그대가 전에 내가 집안일을 끝마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날은 과연 어떠한가?”라고 하니, 화교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선제를 모실 적에 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이 응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했다.

겨울 10월 신유일, 석감을 태위로, 농서왕 사마태를 사공으로 임명했다. 유연을 건위장군, 흉노오부대도독으로 임명했다.

효혜황제 상지상

봄 정월 을유삭일, 연호를 영평으로 고쳤다.

처음에 가후가 태자비가 되었을 때, 질투로 인해 친히 여러 사람을 죽이고, 또 창으로 임신한 첩을 던져 태아가 칼날과 함께 떨어졌다. 무제가 크게 노하여 금용성을 수리하고 그녀를 폐하려 했다. 순욱, 풍홍, 양협 및 충화 조찬이 함께 그녀를 구하며 말하기를 “가비는 나이가 어리고, 질투는 여자의 떳떳한 일이니, 자라면 자연히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양후가 말하기를 “가공려는 나라에 큰 공이 있고, 가비는 그의 친딸이니, 비록 질투하더라도 어찌 그 선인의 공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가비는 이로 인해 폐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양후가 여러 번 가비를 경계하고 권면했으나, 가비는 양후가 자신을 도운 줄 모르고, 도리어 양후가 무제 앞에서 자신을 모함한다고 생각하여 더욱 원망했다. 혜제가 즉위하자, 가후는 며느리의 예로 태후를 섬기지 않으려 했고, 또 정사에 간여하려 했으나 태부 양준에게 억눌렸다. 전중중랑 발해인 맹관과 이조는 모두 양준이 예우하지 않는 자들로, 은밀히 양준이 장차 국가를 해치려 한다고 모함했다. 황문 동맹은 평소 동궁에서 근무하며 사인감을 지냈는데, 가후가 비밀리에 동맹을 시켜 맹관, 이조와 함께 양준을 주살하고 태후를 폐할 계책을 꾸미게 했다. 또 이조를 시켜 여남왕 사마량에게 알려 군사를 일으켜 양준을 토벌하게 했으나, 사마량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조가 도독형주제군사 초왕 사마위에게 알리니, 사마위가 기꺼이 응하여 곧 입조를 청했다. 양준이 평소 사마위의 용맹하고 날카로움을 꺼려 불러들이고 싶으면서도 감히 하지 못하다가, 그가 조현하기를 청하자 승낙했다. 2월 계유일, 사마위 및 도독양주제군사 회남왕 사마윤이 조현했다.

3월 신묘일, 맹관과 이조가 혜제에게 계문하여 밤에 조서를 작성하고, 양준이 모반했다고 무고하여 경성 내외를 경계하고, 사자를 보내 조서를 받들어 양준을 폐하여 후작 신분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동안공 사마유에게 전중 400명을 거느리고 양준을 토벌하라고 명하고, 초왕 사마위는 사마문에 주둔하게 하며, 회남상 유송을 삼공상서로 임명하여 전중을 호위하게 했다. 단광이 혜제에게 꿇어앉아 말하기를 “양준은 외로운 몸에 아들이 없는데, 어찌 모반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살피소서!”라고 하니, 혜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 양준은 조상의 옛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무고 남쪽에 있었다. 궁중에 변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관료를 모아 의논했다. 태부주부 주진이 양준에게 권하며 말하기를 “지금 궁중에 변고가 있으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반드시 환관들이 가후를 위해 계책을 세워 공에게不利를 끼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운룡문을 불태워 그들을 위협하고, 사건을 일으킨 주범을 요구하며, 만춘문을 열고 동궁 및 외영의 군사를 거느려 황태자를 옹위하고 입궁하여 간인을 잡으면, 전내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반드시 간인의 머리를 베어 보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양준이 본래 나약하고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운룡문은 위명제가 세운 것으로 공사 비용이 매우 컸는데, 어찌 불태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시중 부지는 양준에게 아뢰어 상서 무무와 함께 입궁하여 상황을 살피기를 청하고, 이어 여러 관료에게 말하기를 “궁중은 비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며 읍하고 섬돌을 내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고, 무무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부지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은 어찌 천자의 신하가 아닙니까? 지금 내외가 막혀 국가의 소재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무무가 비로소 놀라 일어났다. 양준의 동당 좌군장군 유예가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군장군 배위를 만나 태부가 어디 있는지 묻자, 배위가 그를 속여 말하기를 “아까 서액문에서 태부가 소소한 수레를 타고 두 사람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소.”라고 했다. 유예가 말하기를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하니, 배위가 말하기를 “정위에게 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예가 배위의 말을 따라 군사를 버리고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서로 배위를 대신하여 좌군장군을 겸하게 하고 만춘문에 주둔하게 했다. 배위는 배수의 아들이다.

황태후가 비단에 글을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 밖으로 쏘며 말하기를 “태부를 구하는 자는 상이 있다.”라고 했다. 가후가 이에 태후가 양준과 함께 모반했다고 선언했다. 얼마 후 전중의 군사가 출동하여 양준의 저택을 불태우고, 또 노수를 시켜 누각 위에서 양준의 저택을 향해 화살을 쏘게 하니, 양준의 군사들이 나올 수 없었다. 양준이 마구간으로 도망갔다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맹관 등이 이어 양준의 동생 양협, 양제, 장소, 이빈, 단광, 유예, 무무 및 산기상시 양막, 중서령 장준, 동이교위 문앙을 체포하여 모두 삼족을 멸하였고,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양협이 형을 받을 때, 동안공 사마유에게 말하기를 “나의 주표는 석함 속에 보관되어 있으니, 장화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종요의 선례에 따라 그를 변호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사마유가 듣지 않고, 가씨의 당여가 형 집행을 재촉했다. 양협이 울부짖으며 그치지 않자, 행형자가 칼로 그의 머리를 쪼갰다. 사마유는 제갈탄의 외손자이므로 문앙을 꺼려, 그를 양준의 동당이라고 무고하여 죽였다. 그날 밤, 주살과 상벌이 모두 사마유의 결정에 달려 위세가 조정 내외를 진동시켰다. 왕융이 사마유에게 말하기를 “큰일을 마친 후에는 멀리 권세를 두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사마유가 듣지 않았다.

임진일,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고쳤다.

가후가 조서를 위조하여, 후군장군 순칙을 보내 태후를 영녕궁으로 옮기게 하고, 특별히 태후의 어머니 고도군 방씨의 목숨을 보전하여 그녀가 태후에게 가서 살도록 허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신하와 유관 부서에 암시하여 상주하게 하였다. “황태후가 은밀히 간흉한 모의를 도와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고, 날아가는 화살로 편지를 전달하며 장수와 병사를 모집하고, 악인과 서로 결탁하여 스스로 하늘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노장공이 문강과의 관계를 끊은 것을 《춘추》에서 칭송하였습니다. 이는 선조를 받들고 천하에 지극한 공정을 보이는 일이니, 폐하께서 비록 끝없는 친정을 품고 계시나 신하들은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조서에서 이르기를 “이는 중대한 일이니 다시 자세히 의논하라.” 하였다. 유관 부서가 다시 상주하였다. “마땅히 황태후를 폐하여 준양서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중서감 장화가 논의하여 아뢰었다. “황태후가 선제에게 죄를 얻은 것이 아닌데, 지금 그 친족에게 편들어 성스러운 세상에서 어머니가 될 수 없으니, 한나라의 예에 따라 조태후를 폐하여 효성후로 삼은 전례를 본받아 황태후의 칭호를 낮추고 다시 무황후로 칭하며,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시작과 끝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함이 마땅하나이다.” 좌복야 순개와 태자소사 하비왕 사마황 등이 논의하여 아뢰었다. “황태후가 국가를 위태롭게 할 계획을 도모하였으니, 다시는 선제에게 배향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존호를 낮추고 폐출하여 금용성으로 보내야 합니다.” 이에 유관 부서가 상주하여 사마황 등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하니, 태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조서가 이를 허락하였다. 또 상주하였다. “양준이 화란을 일으켰으니 그 가속은 마땅히 주살해야 하나, 조서에서 그 아내 방씨의 목숨을 용서하여 태후의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지금 태후가 폐하여 서인이 되었으니, 방씨를 정위에게 넘겨 형을 집행하기를 청하나이다.” 조서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관 부서가 또 굳이 청하니, 이내 따랐다. 방씨가 형을 받을 때, 태후가 그녀를 안고 통곡하며,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조아려, 가후에게 표를 올려 스스로 첩이라 칭하며 어머니의 목숨을 보전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돌보지 않았다. 동양이 태학에서 유학하며 당에 올라 탄식하며 말하였다. “조정이 이 당을 지은 것은 장차 무엇에 쓰려 함인가! 매번 국가의 사서를 보면, 모반 대역은 모두 사면하나, 조부모나 부모를 죽인 자는 사면하지 않음은, 왕법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공경들이 의논하며 예전을 꾸미고 다스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천리와 인륜이 이미 끊어졌으니,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나리라.”

유관 부서가 양준의 속관을 체포하여 모두 주살하려 하였다. 시중 부지가 상주하였다. “옛날 노지가 조상의 사마가 되어 관문을 베고 조상에게 달려갔으나, 선제가 그를 청주자사로 임용하였습니다. 양준의 요속들을 모두 죄줄 수 없나이다.” 조서가 그들을 사면하였다.

임인일, 여남왕 사마량을 태재로 부르고, 태위 위관과 함께 모두 녹상서사로 삼아 조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진왕 사마간을 대장군으로, 동평왕 사마무를 무비대장군으로, 초왕 사마위를 위장군 겸 북군중후로, 하비왕 사마황을 상서령으로, 동안공 사마요를 상서좌복야로 삼고, 진을 높여 왕으로 삼았다. 사마무는 사마망의 아들이다. 동맹을 무안후로 봉하고, 그의 세 형을 모두 정후로 봉하였다.

사마량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양준을 주살한 공로를 논하여 독장 중 봉후된 자가 천팔십일 명이었다. 어사중승 부함이 사마량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지금 봉상이 드러나고 뛰어나, 천지를 진동시키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공로 없이 후한 상을 얻으면, 누구인들 나라에 화가 있기를 즐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화근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일을 한 자는 동안공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도착하신 후에는 마땅히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있을 것이며, 정도로 바로잡으면 여러 사람들이 또 무엇을 분노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분노하는 바는,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인데, 지금 도리어 공로를 배가하여 논하니,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마량이 꽤 전권을 행사하자, 부함이 또 간언하였다. “양준이 임금을 진동시키는 위엄을 가지고 친척에게 임무를 맡긴 것이, 천하가 시끄러운 까닭입니다. 지금 중대한 자리에 계시니, 마땅히 도리어 이러한 과실을 피하고, 고요히 덕을 기르며, 큰 득실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유지하고, 큰 일이 아니면 일체 억누르고 흩어 버리소서. 요즘 전하의 문을 지나니, 관과 수레와 말이 거리를 막았으니, 이러한 모임의 시끄러움은 마땅히 그쳐야 합니다. 또 하후장용이 공로 없이 갑자기 소부로 발탁되었으니, 의논하는 이들이 장용은 전하의 인척이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 사방에 소문이 퍼지면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사마량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가후의 족형 거기사마 모와 종구 우위장군 곽장, 여동생의 아들 가밀, 그리고 초왕 사마위, 동안왕 사마요가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가후의 포악함이 날로 심해지자, 사마요가 밀모하여 황후를 폐하려 하니, 가씨가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마요의 형 동안무공 사마담이 평소 사마요를 미워하여, 여러 차례 태재 사마량에게 참소하였다. “사마요가 주살과 상벌을 독단하여 조정의 권력을 독차지하려 합니다.” 경술일, 조서로 사마요의 관직을 파면하고, 또 패역한 말이 있다는 죄로 폐출하여 대방으로 유배 보냈다.

이에 가밀과 곽장의 권세가 더욱 성대해져, 빈객이 문에 가득하였다. 가밀이 비록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사대부를 초청하기를 즐겼다. 곽장, 석숭, 육기, 육기의 아우 육운, 화욱, 그리고 형양 반악, 청하 최기, 발해 구양건, 난릉 목징, 경조 두빈, 지우, 낭야 제갈전, 홍농 왕췌, 양성 두육, 남양 추첩, 제국 좌사, 패국 유괴, 주회, 안평 견수, 영천 진□□, 고양 허맹, 팽성 유눌, 중산 유여, 유여의 아우 유곤이 모두 가밀에게 의탁하여, 이십사우라 일컬어졌다. 화욱은 화교의 아우이다. 석숭과 반악이 특히 아첨하며 가밀을 섬겨, 가밀과 광성군 곽회가 출행할 때마다 모두 수레 아래에 내려 길 왼쪽에서 먼지 바라보고 절하였다.

태재 사마량과 태보 위관이 초왕 사마위가 강직하고 고집스러우며 살육을 좋아함을 꺼려, 그의 병권을 빼앗고자 임해후 배해로 하여금 사마위를 대신하여 북군중후로 삼게 하였다. 사마위가 노여워하였다. 배해가 이를 듣고 감히 임명을 받지 않았다. 사마량이 또 위관과 함께 모의하여, 사마위와 여러 왕들을 봉국으로 보내려 하니, 사마위가 더욱 원망하였다. 사마위의 장사 공손홍과 사인 기성이 모두 사마위의 총애를 받아, 사마위에게 가후와 가까이하기를 권하였다. 가후가 사마위를 머물러 태자태부를 겸하게 하였다. 기성이 평소 양준과 가까이 지내니, 위관이 그의 반복됨을 싫어하여 장차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기성이 이에 공손홍과 함께 모의하여, 적노장군 이조를 통해 사마위의 명령을 빙자하여, 사마량과 위관을 가후에게 무고하며 장차 폐립을 도모한다고 하였다. 가후가 평소 위관을 원망하고, 또 두 공이 집정하여 자신이 전횡할 수 없음을 걱정하였다. 여름 6월, 가후가 황제로 하여금 친필로 조서를 써서 사마위에게 내리며 말하였다. “태재와 태보가 이윤이나 곽광과 같은 일을 하려 하니, 왕은 마땅히 조서를 반포하여 회남왕, 장사왕, 성도왕에게 명하여 각 궁문을 지키게 하고, 사마량과 위관의 관직을 면제하라.” 밤에 황문환관을 보내어 사마위에게 주었다. 사마위가 다시 상주하려 하자, 황문이 말하였다. “일이 새어나갈까 두려우니, 이는 밀조의 본의가 아닙니다.” 사마위도 이에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에 자기의 부대를 거느리고, 또 조서를 위조하여 36군을 소집하며 그들에게 고하였다. “두 공이 은밀히 불궤를 꾀하니, 나는 이제 조서를 받들어 중외 모든 군을 도독하노니, 모든 직숙하고 수위하는 자는 엄중히 경계하고, 그 밖의 영에 있는 자는 서로 인솔하여 곧바로 행부로 가서, 순천자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도우라.” 또 조서를 위조하여 “사마량과 위관의 속관은 일체 묻지 않고, 모두 파면하여 해산시키라.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군법으로 처단하리라.” 하였다. 공손홍과 이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사마량의 부제를 포위하고, 시중 청하왕 사마하가 위관을 체포하게 하였다. 사마량의 장하독 이룡이 “밖에 변고가 있으니 항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보고하였으나, 사마량이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담에 올라 크게 외치니, 사마량이 놀라 말하였다. “내가 두 마음이 없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조서를 나에게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공손홍 등이 허락하지 않고 병사들을 재촉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장사 유준이 사마량에게 말하였다. “보건대 이는 반드시 간모입니다. 부중의 준걸이 숲과 같으니, 오히려 힘껏 싸울 수 있습니다.” 또 듣지 않았다. 이내 이조에게 붙잡혀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의 적성은 천하 사람에게 베어 보일 수 있다.” 세자 사마구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위관(衛瓘)의 좌우측 인물들도 사마하(司馬遐)가 조서를 위조했다고 의심하며 저항할 것을 청했고, 자신이 상소를 올려 회답을 얻은 후에 죽어도 늦지 않다고 말했으나, 위관이 듣지 않았다. 당초, 위관이 사공(司空)을 맡고 있을 때, 장하독(帳下督) 영회(榮晦)가 죄가 있어 쫓겨나 파면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회가 사마하를 따라 위관을 체포하고, 제멋대로 위관과 그의 자손 아홉 명을 죽였으나, 사마하가 금하지 못했다.

기성(岐盛)이 사마위(司馬瑋)에게 "마땅히 군세를 이용하여 이 기회에 가후(賈后)·곽씨(郭氏)를 주살하여 왕실을 바로잡고 천하를 안정시키소서"라고 권했다. 사마위가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했다. 마침 날이 밝자, 태자소부(太子少傅) 장화(張華)가 동맹(董猛)을 보내 가후에게 권하며 말했다. "초왕(楚王)이 이미 두 공을 죽였으니, 천하의 위엄과 권력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습니다. 인주(人主)께서 어찌 스스로 편안하시겠습니까! 마땅히 사마위가 제멋대로 살육한 죄명으로 그를 죽여야 합니다." 가후도 이 기회에 사마위를 제거하려 하여 깊이 옳게 여겼다. 이때 안팎이 어지럽고 조정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화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중장군(殿中將軍) 왕궁(王宮)이 추우도(騶虞幡)를 들고 나와 무리에게 명령하여 말했다. "초왕이 조서를 위조하였으니 따르지 말라!" 무리들이 모두 병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사마위의 곁에는 다시 한 사람도 없었고,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잡혀 정위(廷尉)에 넘겨졌다. 을축일(乙丑日)에 사마위를 참수했다. 사마위가 품속에서 청지조서(青紙詔書)를 꺼내어 눈물을 흘리며 감형을 감독하는 상서(尚書) 유송(劉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다행히 선제(先帝)의 몸에 붙어 태어났으나, 원통함을 당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공손홍(公孫宏)과 기성(岐盛)은 모두 삼족(三族)이 멸해졌다.

사마위가 거병했을 때, 농서왕(隴西王) 사마태(司馬泰)가 군대를 엄정히 정비하여 사마위를 도우려 하였다. 제주(祭酒) 정수(丁綏)가 간하여 말했다. "공은 재상이오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갑작스러우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 참정(參定)하여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마태가 그제야 그쳤다.

위관의 딸이 나라의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선공(先公)의 명호(名號)와 시호(諡號)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항상 한 나라 사람들이 묵묵히 말이 없는 것을 괴이하게 여깁니다. 《춘추(春秋)》의 잘못, 그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태보주부(太保主簿) 유요(劉繇) 등이 황번(黃幡)을 들고 등문고(登聞鼓)를 두드리며 상언(上言)했다. "당초, 위조한 조서를 가진 자가 이르자, 공이 곧 인수(印綬)를 바치고 단거(單車)로 명을 따랐습니다. 위조한 조서의 글자가 다만 공의 관직을 면하는 것일 뿐인데, 구일(舊日)의 급사(給使) 영회(榮晦)가 제멋대로 공의 부자와 손자를 체포하여 함께 참수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든 실정을 검증하여 밝게 정형(正刑)을 가하소서." 이에 조서를 내려 영회를 족멸(族滅)하고, 사마량(司馬亮)의 작위를 추복(追復)하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위관을 난릉군공(蘭陵郡公)으로 봉하고 시호를 성(成)이라 하였다.

이에 가후가 독단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친신과 당여를 임용하여 가모(賈模)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시중(侍中)을 가하였다. 가밀(賈謐)이 가후와 모의하여, 장화가 서족(庶族) 출신이라 황제를 핍박할 의심이 없고, 또 유아(儒雅)하고 모략이 있어 중망(衆望)이 돌아가므로, 조정의 일을 그에게 위탁하려 하였다.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배외(裴頠)에게 물으니, 배외가 이를 찬성하였다. 이에 장화를 시중·중서감(中書監)으로, 배외를 시중으로 삼고, 또 안남장군(安南將軍) 배해(裴楷)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아 시중을 더하고, 우복야(右僕射) 왕융(王戎)과 함께 기요(機要)를 관장하게 하였다. 장화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 조정의 잘못을 보완하니, 가후가 비록 흉험(凶險)하였으나 여전히 장화를 공경할 줄 알았다. 가모와 장화·배외가 마음을 같이하여 정사를 도왔으므로, 몇 년 동안 비록 혼군(昏君)이 위에 있었으나 조야(朝野)가 안정되고 평온하였으니, 이는 장화 등의 공로였다.

가을 7월, 형주(荊州)·양주(揚州)의 열 개 군(郡)을 나누어 강주(江州)를 설치하였다.

8월 신미일(辛未日)에 농서왕(隴西王) 사마태(司馬泰)의 세자(世子) 사마월(司馬越)을 동해왕(東海王)으로 세웠다.

9월 갑오일(甲午日)에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이 죽었다.

신축일(辛丑日)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을 불러 위장군(衛將軍)·녹상서사(錄尚書事)로 삼았다.

봄 2월 기유일(己酉日)에 전(前) 양태후(楊太后)가 금용성(金墉城)에서 죽었다. 당시 태후에게는 여전히 시중드는 십여 명이 있었으나, 가후가 모두 빼앗아 끊고 여덟 날 동안 먹을 것을 끊어 죽게 하였다. 가후가 태후가 영혼이 있어 혹시 선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할까 걱정하여, 그녀를 얼굴이 아래로 향하게 묻고, 또 여러 가지 진압과 저주하는 부적과 약물 등을 사용하였다.

가을 8월 임자일(壬子日)에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6월, 홍농군(弘農郡)에 우박이 내려 깊이가 석 자(三尺)나 되었다.

선비(鮮卑) 우문막괴(宇文莫槐)가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동생 우문보발(宇文普撥)이 이어 세워졌다.

탁발철(拓跋綽)이 죽고, 동생의 아들 탁발불(拓跋弗)이 이어 세워졌다.

봄 정월 정유일(丁酉日)에 안창원공(安昌元公) 석감(石鑒)이 죽었다.

여름 5월, 흉노(匈奴) 학산(郝散)이 반란하여 상당군(上黨郡)을 공격하고 장리(長吏)를 죽였다. 가을 8월, 학산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풍익도위(馮翊都尉)가 그를 죽였다.

이 해에 큰 기근이 들었다.

사례교위(司隸校尉) 부함(傅咸)이 죽었다. 부함은 성격이 강직하고 소박하며, 풍도가 엄숙하고 중후하였다. 막 사례교위가 되었을 때, 상서하여 말했다. "뇌물이 유행하니 마땅히 철저히 근절해야 합니다." 당시 조정의 기강이 느슨하고 해이하여 권귀와 호문(豪門)들이 방자하고 제멋대로 굴었으나, 부함이 상주(上奏)하여 하남윤(河南尹) 사마담(司馬澹) 등의 관직을 파면하니, 경성(京城)이 이로 인해 숙연해졌다.

모용외(慕容廆)가 대극성(大棘城)으로 옮겨 살았다.

탁발불(拓跋弗)이 죽고, 그의 숙부 탁발록관(拓跋祿官)이 이어 세워졌다.

여름 6월, 동해군(東海郡)에 우박이 내려 깊이가 오 촌(五寸)이나 되었다.

형주·양주·연주·예주·청주·서주 여섯 주에 큰 수재가 났다.

겨울 10월, 무기고(武器庫)에 불이 나 역대의 보물과 이백만 명의 병기와 장비가 불탔다. 12월 병술일(丙戌日)에 새로 무기고를 짓고, 크게 병기를 징발하였다.

탁발록관이 그의 나라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한 부분은 상곡군(上谷郡) 이북, 유원(濡源) 이서에 살게 하여 자신이 직접 통솔하고, 한 부분은 대군(代郡) 참합피(參合陂) 이북에 살게 하여 그의 형 사막한(沙漠汗)의 아들 탁발의려(拓跋猗□)에게 통솔하게 하고, 한 부분은 정양군(定襄郡)의 성락고성(盛樂故城)에 살게 하여 탁발의려의 동생 탁발의호(拓跋猗戶)에게 통솔하게 하였다. 탁발의호는 용병에 능하여, 서쪽으로 흉노·오환(烏桓) 등 여러 부를 공격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대군 사람 위조(衛操)가 조카 위웅(衛雄) 및 같은 군 사람 기담(箕澹)과 함께 가서 탁발씨(拓跋氏)에게 의탁하며, 탁발의려와 탁발의호에게 진인(晉人)을 초빙하여 기용하도록 권하였다. 탁발의려가 매우 기뻐하여 그들에게 국사를 처리하게 하니, 의탁하는 진인이 점차 늘어났다.

봄 정월, 크게 사면하였다.

하비헌왕(下邳獻王) 사마황(司馬晃)이 죽었다. 중서감(中書監) 장화(張華)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태위(太尉) 농서왕(隴西王) 사마태(司馬泰)가 상서령(尚書令)을 대행하고, 고밀왕(高密王)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여름, 학산의 동생 학도원(郝度元)이 풍익군(馮翊郡)·북지군(北地郡)의 마란강(馬蘭羌)·노수호(盧水胡)와 함께 반란하여 북지태수 장손(張損)을 죽이고, 풍익태수 구양건(歐陽建)을 격파하였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총신(寵臣) 낭야인(琅邪人) 손수(孫秀)를 신임하고, 옹주자사(雍州刺史) 제남인(濟南人) 해계(解系)와 군사 지휘권을 다투며 서로 상표(上表)하여 보고하였고, 구양건도 상표하여 사마륜의 죄악을 진술하였다. 조정에서는 사마륜이 관우(關右) 지역을 어지럽혔다고 여겨, 사마륜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부르고,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도독옹주양주제군사(都督雍州涼州二州諸軍事)로 삼았다. 해계와 그의 동생 어사중승(御史中丞) 해결(解結)이 모두 상표하여 손수를 주살하여 저(氐)·강(羌)에게 사죄할 것을 청하였다. 장화가 이 일을 양왕 사마융에게 알려 그에게 손수를 주살하게 하니, 사마융이 승낙하였다. 손수의 친구 신염(辛冉)이 그를 위해 사마융에게 권하며 말했다. "저·강이 스스로 반란한 것이니, 손수의 죄가 아닙니다." 손수가 이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사마륜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손수의 계책을 써서 가후·곽씨와 깊이 교제하니, 가후가 매우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사마륜이 이에 녹상서사(錄尚書事)를 청하고, 또 상서령(尚書令)을 청하였다. 장화·배외가 단호히 반대하여 불가하다고 하니, 사마륜과 손수가 이로부터 그들을 원망하였다.

가을 8월, 해계가 학도원에게 패배하자, 진주와 옹주의 저족과 강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저족의 추장 제만년을 황제로 추대하고 경양을 포위했다. 어사중승 주처는 권귀와 외척을 피하지 않고 탄핵과 규찰을 행했는데, 양왕 사마융이 일찍이 법을 어긴 일이 있어 주처가 그를 심문하고 탄핵했다. 겨울 11월, 조서를 내려 주처를 건위장군으로 임명하고, 진위장군 노파와 함께 모두 안서장군 하후준의 휘하에 속하게 하여 제만년을 토벌하게 했다. 중서령 진준이 조정에서 말했다: "하후준과 양왕은 모두 귀척으로 장수의 재주가 없어, 공격할 때는 명성을 구하지 않고 후퇴할 때는 죄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처는 오나라 사람으로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용감하고 과감하나, 원수는 있으나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마땅히 조서를 내려 적노장군 맹관이 정예병 만 명을 이끌고 주처의 선봉이 되어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왕이 주처를 선봉으로 삼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해칠 것이니, 그의 패배는 필연적입니다." 조정은 듣지 않았다. 제만년이 주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주부군은 일찍이 신평태수를 지내며 문무의 재능이 있으니, 만약 그가 전권을 가지고 온다면 막기 어려울 것이나, 만약 남의 통제를 받는다면 이는 스스로 그물에 걸려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관중에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당초, 약양군 청수현의 저인 양구가 처음으로 구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구지는 사방 백 경(頃)으로, 옆에 평지가 이십여 리 있었고, 사면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으며, 양쪽으로 통하는 좁은 길이 서른여섯 번 꺾여 올라가야 했다. 그의 손자 양천만이 위나라에 의탁하여 백경왕에 봉해졌다. 양천만의 손자 양비룡이 점차 강성해져 약양으로 옮겨 살았다. 양비룡은 그의 생질 영호모수를 아들로 삼았는데, 모수가 제만년의 난을 피하기 위해 12월에 약양에서 부락 4천 가를 거느리고 돌아와 구지를 지키며 자칭 보국장군, 우현왕이라 칭했다. 관중에서 난을 피한 선비들이 많이 그에게 의탁하자, 모수는 그들을 맞이하고 위로하며 받아들였고, 떠나고자 하는 자들은 호송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떠나보냈다.

이 해에 양렬장군 파서인 조정을 익주자사로 임명하고, 양주와 익주의 병력과 양식을 징발하여 옹주가 저족과 강족을 토벌하는 것을 돕게 했다.

봄 정월, 제만년이 양산에 주둔하며 부중 7만 명을 거느렸다. 양왕 사마융과 하후준이 주처에게 5천 병사를 이끌고 그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주처가 말했다: "군대에 후속 부대가 없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니, 단지 헛되이 목숨을 버릴 뿐만 아니라 나라에 수치를 안겨줄 것입니다." 사마융과 하후준이 듣지 않고 그를 강제로 출발시켰다. 계축일, 주처가 노파, 해계와 함께 육막에서 제만년을 공격했다. 주처의 병사들은 아직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사마융이 재촉하여 급히 나아가게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워 참획한 것이 많았다.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도 다 떨어졌으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좌우의 사람들이 주처에게 퇴각을 권했으나, 주처가 칼을 짚으며 말했다: "이는 내가 나라에 보답하고 목숨을 바치는 날이다!" 그리고는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조정이 비록 이로 인해 사마융을 꾸짖었으나 그를 벌하지는 못했다.

가을 7월, 옹주와 진주 두 주에 큰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발생하여, 한 곡(斛)의 쌀이 만 전(錢)이 되었다.

정축일, 경릉원공 왕혼이 사망했다. 9월, 상서우복야 왕융을 사도로, 태자태사 하소를 상서좌복야로 임명했다. 왕융이 삼공이 되어 시세와 함께 부침하며 바로잡거나 보완하는 바가 없었고, 일을 아랫사람에게 위임하고 경솔하게 유람하며 방탕했다. 성품이 또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정원과 전답이 천하에 두루 있었으며, 항상 스스로 아침(牙籌)을 가지고 밤낮으로 계산하기를 항상 부족한 듯이 했다. 집에 좋은 오얏이 있어 팔 때 남이 씨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오얏 씨를 뚫었다. 무릇 그가 발탁하고 등용한 사람들은 오로지 허명에만 치중했다. 완함의 아들 완첨이 일찍이 왕융을 알현하자, 왕융이 그에게 물었다: "성인은 명교를 중시하고, 노자와 장자는 자연을 밝혔으니, 그 취지가 같은가 다른가?" 완첨이 말했다: "대략 같을 것입니다!" 왕융이 오래도록 감탄하며 그를 불러들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어연(三語掾)'이라 불렀다.

이때 왕연이 상서령이 되고, 남양인 악광이 하남윤이 되어, 모두 청담에 능하고 세상 일 밖에 몸을 두어 명성이 당대에 중하게 여겨졌으며,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들을 우러러보고 본받았다. 왕연이 아우 왕징과 함께 인물을 품평하기 좋아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왕연은 신명이 빼어나고 맑았는데, 어렸을 때 산도가 그를 보고 오래도록 감탄하며 말했다: "어떤 늙은 부인이 이렇게 지혜로운 아이를 낳았는가! 그러나 천하 백성을 해칠 자는 아마도 이 사람일 것이다!" 악광은 성품이 담박하고 간결하며 청아하고 고고하여 세상과 다투지 않았다. 매번 담론할 때 간결한 말로 이치를 분석하여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복종시켰으며, 그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잠자코 말하지 않았다. 무릇 사람을 평론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장점을 칭찬하여, 그 단점은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나게 했다. 왕징과 완함, 완함의 조카 완수, 태산인 호무보지, 진국인 사곤, 성양인 왕이, 신채인 필탁이 모두 방종하고 넉넉함을 통달함으로 여겨, 취하여 방탕하고 벌거벗기까지 하며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다. 호무보지가 일찍이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그의 아들 호무겸지가 엿보고는 그의 아버지의 자(字)를 크게 부르며 말했다: "언국! 나이가 늙었으니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호무보지가 기뻐하며 웃고 그를 불러들여 함께 술을 마셨다. 필탁이 일찍이 이부랑을 지냈는데, 이웃 낭관이 술을 익혔고, 필탁이 취하여 밤에 술독 사이로 가서 술을 훔쳐 마시다가 술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묶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바로 필이부였다. 악광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명교 안에 자연히 즐거운 곳이 있거늘, 어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는가!"

당초, 하안 등이 노자와 장자의 학설을 본받아 논하고 이론을 세워 말하기를: "천지 만물은 모두 '무(無)'를 근본으로 삼는다. '무'라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고 사무를 이루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음양이 그것에 의지하여 화생하고, 현자가 그것에 의지하여 덕을 이룬다. 그러므로 '무'의 작용은 작위 없이도 존귀한 것이다!" 왕연과 같은 무리들이 매우 좋아하여 숭상했다. 이로부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자신의 직분을 게을리하고 폐기했다. 배위가 《숭유론(崇有論)》을 지어 이 폐단을 분석하여 말했다: "이익과 욕망은 줄일 수 있으나 완전히 끊을 수는 없고, 일은 절제할 수 있으나 완전히 무(無)로 돌릴 수는 없다. 대개 어떤 이는 고담준론의 근거를 만들어, 유형 사물의 얽매임을 깊이 열거하고, 공허함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칭송한다. 유형 기물의 얽매임은 자취가 있어 찾을 수 있으나, 공허한 이치는 증험하기 어렵다. 교묘하게 변박하는 문사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그럴듯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기에 충분하다. 무리가 듣고 미혹되어 이미 굳어진 학설에 빠진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다르게 여기는 이가 있으나 말로는 변론하여 이기지 못하고, 습관적 세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허무의 이치가 참으로 가릴 수 없다고 여긴다. 한 사람이 창도하면 백 사람이 화답하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마침내 경세제민의 일을 가볍게 여기고 공명과 이익의 작용을 천하게 여기며, 허황된 행실을 숭상하고 경세치용의 현인을 얕본다. 인정이 쫓는 바에 명리가 따라오니, 문사는 그 사장을 연역하고 말재주가 없는 자는 그 취지를 찬송한다. 논리를 세우되 허무에 의탁하여 이를 현묘하다 하고, 벼슬하면서 직접 직무를 처리하지 않음을 고야하다 하고, 자신을 닦아 청렴한 지조를 잃어버림을 광달하다 한다. 그러므로 품행을 닦는 기풍이 더욱 쇠퇴한다. 방종한 자가 이로 인해 혹은 길흉의 예제를 어기고, 의용의 규범을 소홀히 하며, 장유의 차례를 더럽히고, 귀천의 등급을 혼란시켜, 심한 자는 나체로 경박하고 무례하기까지 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선비의 품행이 또 타락하였다."

만물은 형체를 지니고 있지만, 비록 무(無)로부터 태어났으나, 태어난 이후에는 ‘유(有)’를 자신의 분계(分際)로 삼으니, 그렇다면 ‘무’는 ‘유’가 버린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미 화생(化生)한 만물을 기르는 것은 ‘무’의 작용에 의지하여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존재하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무위(無爲)’에 의지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사무(事務) 그 자체가 아니지만, 사무를 처리하려면 반드시 마음이 주도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장인은 기물(器物) 그 자체가 아니지만, 기물을 만들려면 반드시 장인에게 의지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장인을 ‘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깊은 못의 물고기 비늘을 얻고자 한다면, 누워 쉬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높은 담 위의 새를 쏘아 떨어뜨리고자 한다면, 고요히 앉아 팔짱 끼는 것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보건대, ‘유’를 이루는 것은 모두 ‘유’일 뿐, 허무(虛無)가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풍속이 이미 형성되었기에, 배외(裴頠)의 논의도 구제하지 못하였다.

탁발의이(拓跋猗迤)가 사막을 건너 북쪽으로 순시하며, 틈을 타 서쪽으로 여러 나라를 공략하여, 5년을 지나는 동안 항복하여 귀부한 나라가 30여 개국이었다.

봄 3월 임술일(壬戌日)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가을 9월에 형주(荊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기주(冀州) 등 다섯 주에 큰 수해가 났다.

당초에 장로(張魯)가 한중(漢中)에 있을 때, 종인(賨人) 이씨(李氏)가 파서군(巴西郡) 탕거현(宕渠縣)으로부터 그에게 의탁하였다. 위무제(魏武帝)가 한중을 함락시킨 후, 이씨가 5백여 가를 이끌고 귀부하여 장군에 임명되었고, 약양(略陽) 이북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파저(巴氐)라 불렸다. 그의 손자 이특(李特), 이상(李庠), 이류(李流)는 모두 무예와 재능이 있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성격이 의협심이 강하여 주(州)의 향당(鄕黨) 대부분이 그들에게 의탁하였다. 제만년(齊萬年)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중(關中)은 여러 해 흉년이 들어, 약양, 천수(天水) 등 여섯 군의 백성들이 유망(流亡)하여 한천(漢川)으로 이주하여 생계를 구한 자가 수만 가에 이르렀고, 길에서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있으면 이특 형제가 항상 돌보고 구원하여, 이로 인해 민심을 얻었다. 유민들이 한중에 도착하여 파촉(巴蜀)에 기거하며 먹을 것을 구걸할 것을 상소하자, 조정에서는 의논한 끝에 허락하지 않고, 시어사(侍御史) 이비(李苾)를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위로하게 하고, 또한 그들을 감시하여 검각(劍閣)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비가 한중에 도착하여 유민들의 뇌물을 받고 상표(上表)하여 말하기를 “유민이 10만여 명이나 되니, 한중 한 군으로는 구제하고 공급할 수 없습니다. 촉 땅에는 창고에 비축이 있고, 백성들은 또 풍년이 들었으니,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생계를 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로부터 유민들은 양주(梁州)와 익주(益州)에 흩어져 살게 되어 금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특이 검각에 도착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유선(劉禪)이 이런 땅을 가지고도 오히려 손을 묶고 항복하였으니, 어찌 용렬한 인재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듣는 자들이 놀랍게 여겼다.

장화(張華)와 진준(陳準)은 조왕(趙王)과 양왕(梁王)이 잇달아 관중(關中)에 있으면서 모두 화려하고 교만하며 방탕하여 군대는 지치고 공적도 없었다고 여겨, 이에 막관(孟觀)이 침착하고 강직하며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고 추천하여, 그를 보내 제만년을 토벌하게 하였다. 막관이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크게 싸운 것이 열 번이 넘었고, 모두 적군을 격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