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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

진기십이

제 12 편

《자치통감》 제90권 【진기십이】 강유적약연(强圉赤奋若)那年부터 시작하여 저옹섭제격(著雍摄提格)那年까지, 모두 2년간을 기록한다.

중종 원황제 상(上)

태흥 원년(무인, 서기 318년)

봄, 정월 무신 삭일, 원제가 강동에서 정식으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고, 연호를 태흥으로 고쳤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좌우에 늘어서자, 원제가 왕도(王弼)에게 명하여 어좌에 올라 함께 앉으려 하였으나, 왕도가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만약 태양이 만물과 함께 빛난다면, 백성들은 또 누구를 우러러보겠습니까?" 원제가 이에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다.

2월, 신미일, 조정에서 초왕 승(氶)을 상주자사로 임명하였다. 경진일, 황자 사마욱을 낭야왕으로 봉하였다. 조정에서 왕도를 승상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무자일,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요즈음 재난을 당하여 세월이 동요하고 불안하니, 비록 은덕을 널리 베풀고자 하나 군국(軍國)의 일이 많아, 급하지 않은 부역과 조세는 잠시 면제한다."

신묘일, 왕자 사마환을 낭야왕으로 봉하였다. 사마환은 정부인(鄭夫人)의 아들이었는데, 당시 이미 죽었다.

신묘일, 조정에서 전장군 왕돈을 대장군·강주목으로, 왕도를 표기장군·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였다. 무술일, 왕자 사마욱을 무릉왕으로 봉하였다.

처음에 왕도가 조정을 보좌할 때는 관대하고 인자함으로 민심을 얻었다. 왕돈이 정무를 처리할 때에 이르러서는 엄격함을 숭상하여, 자주 자신의 측근들을 벌주었다. 왕도가 일찍이 왕돈을 권유하였으나, 왕돈은 따르지 않았다.

3월, 병진일, 황제가 태학에 가서 강론을 듣고,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지금 천하가 전란으로 예교(禮敎)가 쇠퇴하였으니, 내가 학문을 숭상하여 교화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다." 이에 박사를 설치하고, 학생 120명을 두었다. 조정에서 또 조서를 내려 낭야왕 사마포(裒)가 항상 여러 군을 통솔하여 광릉에 주둔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제갈회를 회계내사로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강을 건너온 북방 사람들이 대부분 남쪽에 임시로 살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회계에 교군(僑郡)을 설치하여 그들을 안치하였다. 백성들이 제갈회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였다. 제갈회가 부임한 후, 관대하고 온화하게 정무를 다스리니, 백성들이 모두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전기도위 양국(梁國) 유외(劉隗)는 단양(丹楊)에 있을 때, 왕도가 일찍이 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유외가 손님 접대를 매우 간략하고 소홀히 하여, 왕도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왕도가 집권하게 되자, 어떤 사람이 왕도에게 참소하자, 왕도가 유외를 진북장군·도독청서유평사주제군사·사례교위로 임명하여, 사구(泗口)에 주둔하게 하였다. 유외가 표문을 올려 사은하며 말하였다. "신은 비록 재주가 부족하오나, 이미 폐하의 발탁을 입었사오니, 어찌 감히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에 조정에서 또 왕도를 사도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왕도가 굳이 사양하였다. 황제가 그의 청을 따랐다.

황제가 일찍이 연회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을 대접하였는데, 술이 취할 무렵에 황제가 말하였다. "여러 경들은 나와 함께 대업을 창업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답도다." 왕도 등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오직 회계내사 제갈회만이 자리에 있다가 아뢰었다. "폐하께서 비록 성명하시나, 고대 성왕과 비교하면 여전히 여러 신하의 보좌에 의지하셔야 합니다. 옛날 요(堯)와 순(舜)이 즉위하였을 때도 직(稷)과 설(契) 같은 현신을 중용하였으니, 이들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병자일, 왕태자 사마소를 황태자로 세웠다. 태자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문장과 사부(辭賦)를 좋아하고, 무예를 좋아하며, 선비를 좋아하고 현자를 공경하여, 조정의 대신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그는 《노자》와 《장자》를 강론하는 듣기를 좋아하고, 또 학문을 좋아하여, 하순(賀循)·고영(顧榮)·기첨(紀瞻) 등과 우호적이었다. 하순은 하소(賀劭)의 아들이고, 고영은 고옹(顧雍)의 손자이며, 기첨은 기치(紀騭)의 아들이었다. 태자는 또 왕자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여, 항상 그들과 함께 문장을 논하며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태자를 칭송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옛날 한고조가 기업을 창건하고,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모두 현신의 보좌에 힘입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나도 여러 신하들에게 의지하여 함께 태평을 열고자 한다. 원컨대 공경 대신들은 고대 성현처럼 나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라." 이에 조정에서 왕도를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임명하고, 또 왕돈을 대장군·도독강양형초교광육주제군사·형주자사로, 왕도를 표기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하고, 여전히 중서감을 겸하게 하였다. 왕도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은 재주가 부족하여 이와 같은 큰 직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왕돈이 무창(武昌)에 있을 때, 위세가 드러나게 커서 조정에서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왕도가 일찍이 왕돈에게 말하였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니, 우리 왕씨 형제는 마음을 합쳐 왕실을 도와야 하거늘, 어찌 이러한 충성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왕돈이 듣지 않았다.

처음에 유곤(劉琨)이 다른 이들과 맹약을 맺었는데, 진묘(陳眇)가 유곤에게 유총(劉聰)과 석륵(石勒)과는 맹약을 맺지 말아야 한다고 권유하였으나, 유곤이 듣지 않았다. 유곤이 실패한 후에 진묘가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석륵이 그를 모주(謀主)로 삼아 매우 신임하였다. 진묘가 석륵을 위해 계책을 내놓으면, 대부분 채택되었다.

석륵의 부장 공잠(孔苌)이 유곤의 부장 윤무(尹武)를 공격하여, 윤무가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공잠이 또 유곤의 다른 부장을 공격하여, 또한 그를 격파하였다. 유곤의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유곤의 장자 유군(劉群)이 석륵에게 사로잡혔다. 유군은 유곤의 서자였는데, 석륵이 그를 중서령으로 삼았다. 유곤이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진묘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더욱 근심하고 분개하였다.

5월, 조정에서 전장군·병주자사 유곤을 시중·태위로 임명하였다. 유곤이 표문을 올려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은 재주가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사오니, 원컨대 전장에서 죽어 국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곤이 단씨(段氏)와 맹약을 맺어, 함께 석륵을 치기로 하였다. 단씨의 수령 단말배(段末柸)는 단질록권(段疾陸眷)의 손자였는데, 그는 용맹하고 강하여 민심을 크게 얻었다. 단말배의 형 단비제(段匹䃅)는 단질록권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 단말배가 단비제와 권력을 다투며 서로 공격하였다. 단비제가 패배하여 유곤에게 도망쳐 왔다. 유곤이 그를 받아들이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단말배가 단비제를 추격하여 계성(薊城)에 이르러, 계성을 포위하였다. 유곤이 출병하여 맞서 싸워 단말배를 격파하였다. 단말배가 퇴각하였다.

유곤이 단비제와 함께 계성에서 석륵을 칠 계책을 세웠다. 단비제가 유곤을 대도독으로 추대하고, 피를 마셔 맹세하며 함께 석륵을 토벌하였다. 유곤이 부하를 거느리고, 단비제가 본부 병마를 거느리고 함께 양국(襄國)으로 진격하였다.

석륵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는 부장들을 모아 계책을 의논하였다. 우사마 장빈(張賓)이 말하였다. "유곤과 단비제는 비록 인원이 많으나, 오합지중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을 굳게 지키며, 그들의 군량이 다 떨어져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륵이 그의 건의를 따라, 성벽을 보강하고 해자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로 준비하였다.

유곤과 단비제의 군대가 양국성 아래에 이르러,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석륵이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유곤 군대의 군량이 점차 떨어져 사기가 떨어졌다. 석륵이 틈을 타 출병하여 습격하여, 유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유곤과 단비제가 패퇴하여 계성으로 돌아갔다.

유곤이 계성에 있으면서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단비제가 그를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단비제의 아우 단말배가 일찍이 유곤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유곤에게 단비제를 도모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곤이 허락하지 않았다.

단비제가 이를 알고 더욱 유곤을 의심하였다. 그는 거짓으로 유곤을 연회에 초대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유곤의 부하들이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유곤이 말하였다. "내가 단비제와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갔다. 연회 석상에서 단비제가 매복한 무사들이 나와 유곤을 붙잡았다. 유곤의 부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통곡하였다. 단비제가 유곤을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처음에 유곤의 부하 온교(溫嶠)는 유곤의 모사였다. 그가 유곤이 갇힌 것을 보고, 거짓으로 단비제에게 투항하여, 단비제를 위해 계책을 내놓아 단비제의 신임을 깊이 얻었다. 온교가 은밀히 단비제의 심복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유곤을 석방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단비제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단비제가 또 유곤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유곤을 죽였다. 유곤의 부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슬퍼하여 울부짖었다. 유곤의 아들 유군은 그때 석륵에게 있었는데, 석륵이 그를 중서령으로 삼았다.

유곤이 죽은 후, 단필제는 홀로 지탱하기 어려워 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석륵의 부장 공잠이 단필제를 추격하여 염차에서 그를 격파했다. 단필제는 소속에게 달아났다. 소속은 유곤의 부장으로 당시 염차에 있었다. 단필제와 소속은 군사를 합쳐 함께 염차를 지켰다.

석륵의 부장 공잠이 염차를 공격하자, 소속이 출전했다가 공잠에게 패했다. 소속은 사로잡혀 양국으로 보내졌다. 석륵은 소속을 종사중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소속이 완강히 사양했지만 석륵이 허락하지 않았다.

단필제는 염차에서 세력이 고립되었다. 석륵의 부장 공잠이 다시 염차를 공격하자, 단필제가 출전했다가 공잠에게 패했다. 단필제는 사로잡혀 양국으로 보내졌다. 석륵은 단필제를 관군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단필제도 완강히 사양했지만 석륵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초 유곤이 단필제와 맹약을 맺었을 때, 온교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온교는 유곤이 피살된 것을 보고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유곤을 위해 복수하려 했으나 힘이 부족했다. 이에 그는 강남으로 투항했다.

온교가 강남에 도착하자, 황제는 그를 산기상시로 임명했다. 온교가 상소하여 말했다: "유곤은 진나라의 충신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지금 그가 단필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폐하께서 유곤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그의 가족을 위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유곤을 태위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이라 하였다.

온교가 다시 상소하여 말했다: "유곤의 부하들은 모두 충의之士입니다. 지금 그들이 유리하고 흩어져 있으니, 마땅히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온교는 강남에서 왕도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자주 북방의 일을 이야기하며 격앙되어 눈물을 흘렸다. 왕도 등도 모두 감동했다.

봄, 정월에 한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홍농군을 약탈하자, 태수 송철은 강동으로 도망쳤다. 황문랑 사숙, 시어사 왕충이 장안에서 량주로 도망쳐 와서, 민제가 성을 나가 항복하기 전날 그들이 조서를 받들어 장식을 찾아와서, 장식을 대도독, 량주목, 시중, 사공으로 임명하고 승제를 받들어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고 말하며, 또한 "짐이 이미 낭야왕에게 잠시 제위를 통섭하라고 조서를 내렸으니, 너는 낭야왕을 도와 함께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숙 등이 고장에 도착하자, 장식은 사흘 동안 크게 울고 관직을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초 장식의 숙부 장숙이 서해태수로 있으면서 장안의 위급함을 듣고 선봉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입원하기를 청했다. 장식이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장안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숙은 비분하여 죽었다. 장식은 태부사마 한박, 무융장군 장랑 등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하고, 토로장군 진안, 안고태수 가건, 농서태수 오소에게 각각 군현의 병사를 거느려 선봉이 되게 명령했다. 또 상국 사마보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왕실이 위난을 당하자, 나는 목숨을 바칠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가건을 보내 그대의 동향을 살피게 했는데, 중간에 부명을 받아 가건을 회군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장안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숭이 나아가지 않으며, 곡윤이 오백 금을 가지고 호숭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건 등에게 명하여 농산을 넘어 진군하게 했습니다. 마침 조정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비분통한 마음이 깊어 죽어도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다시 한박 등을 보내니, 모든 것은 그대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한박 등은 결국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남안에 이르렀을 때 여러 강족이 길을 막아 서로 백여 일 동안 대치하며 식량이 떨어지고 화살이 다했다. 한박은 수레 속의 소를 죽여 사졸을 위로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부모를 그리워하는가?" 사졸들이 말했다: "그리워합니다." "처자식을 그리워하는가?" 말했다: "그리워합니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 명령을 따르겠는가?"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이에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진군하여 싸웠다. 마침 장랑이 금성병을 이끌고 뒤따라 도착하여, 앞뒤로 협공하여 강족을 크게 무찌르고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이보다 앞서 장안에 동요가 있어 말하기를: "진천중, 혈몰완, 유유량주의주관"이라 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관중을 점령하고, 저족과 강족이 농우를 약탈하자, 옹주와 진주의 백성들 중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으나, 오직 량주만이 안전했다.

2월, 한나라 주유총은 당질 유창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형양을 공격하게 했다. 태수 이구는 한왕고루에 주둔하며 7리 떨어져 있었고, 유창은 사자를 보내 이구를 항복시키려 했다. 당시 유창의 군대가 갑자기 도착하여 이구가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이에 사자를 보내 유창에게 거짓 항복했다. 유창은 더 이상 방비하지 않고 크게 연회를 베풀어 장수들이 모두 취했다. 이구가 야습을 하려 하자, 사졸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이구는 이에 부장 곽송을 자산 사당에 보내 기도하게 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말하기를: "자산이 명령하여 신병을 보내 도와주겠다고 하였다"고 떠들게 하니, 사졸들이 모두 앞다투어 나아갔다. 이구는 용감한 자 천 명을 뽑아 곽송에게 이끌게 하여 유창의 영채를 기습하여 수천 명의 목을 베고, 유창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갔다.

신사일에 송철이 건강에 도착하여, 민제의 조서를 받들어 승상 낭야왕 사마예가 국가 대사를 통섭하라고 명했다고 칭했다. 3월에 낭야왕은 소복을 입고 별실로 나가 사흘 동안 곡을 했다. 이에 서양왕 사마양과 관속 등이 함께 존호를 올렸으나, 사마예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양 등이 끊임없이 간청하자, 사마예는 감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죄 있는 사람이다. 여러 현인들이 끊임없이 나를 핍박하니, 나는 낭야로 돌아가겠다!" 하고 집노를 불러 수레를 준비시켜 봉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사마양 등이 이에 위, 진의 예에 따라 진왕이라 칭하기를 청하자, 사마예가 허락했다. 신묘일에 진왕의 자리에 오르고,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비로소 백관을 설치하고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수리했다.

유관 부서에서 태자를 세우길 청하자, 진왕이 둘째 아들 선성공 사마구를 사랑하여 그를 세우려 하며, 왕도에게 말했다: "아들을 세우는 것은 덕행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왕도가 말했다: "세자 사마소와 선성공 사마구는 모두 총명하고 준수한 미덕이 있으나, 세자가 연장자입니다." 진왕이 따랐다. 병진일에 세자 사마소를 왕태자로 세우고, 사마구를 낭야왕으로 봉하여 공왕의 후사로 삼았다. 또한 사마구로 하여금 청주, 서주, 연주 삼주 모든 군사를 통할하게 하고, 광릉을 진수하게 했다. 서양왕 사마양을 태보로 임명하고, 초강왕 사마손의 아들 사마승을 초왕으로 봉했다. 사마손은 선제의 동생의 아들이다. 또 정남대장군 왕돈을 대장군, 강주목으로, 양주자사 왕도를 표기장군, 도독중외제군사, 영중서감, 녹상서사로, 승상좌장사 조협을 상서좌복야로, 우장사 주의를 이부상서로, 군자모제사 하순을 중서령으로, 우사마 대연, 왕수를 상서로, 사직 유외를 어사중승으로, 행참군 유초를 중서사인으로, 참군사 공유를 장겸중서랑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참군은 모두 봉거도위, 원속은 부마도위, 행참군사인은 기도위를 주었다. 왕돈이 주목을 사양하고, 왕도가 왕돈이 육주를 통솔하는 까닭에 중외도독을 사양하고, 하순이 늙고 병들어 중서령을 사양하자, 진왕이 모두 허락하고 하순을 태상으로 임명했다. 이때는 상란 이후라 강동이 막 기업을 창건한 때라, 조협은 오래 중원 조정에서 벼슬하여 옛 일에 익숙했고, 하순은 당세의 유학 종사로서 예학에 통달하여, 무릇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모두 그들이裁决했다.

刘琨과 단필제는 서로 피를 마시며 맹세를 하고, 함께 진실을 도와 받들기로 약속하였다. 신축일, 유곤은 격문을 발표하여 화하와 이적에게 알리고, 겸좌장사·우사마 온교를 보내고, 단필제는 좌장사 영소를 보내어 상표와 맹문을 받들어 건강으로 가서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온교는 온선의 동생의 아들이다. 온교의 이모는 유곤의 아내였는데, 유곤이 온교에게 말하기를 “진나라의 국운이 비록 쇠약해졌으나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나는 하삭에서 공업을 세우고, 너는 강남에서 아름다운 명성을 얻도록 하라. 가거라, 힘써라!” 하였다. 진왕은 선비족 대도독 모용외를 도독요좌잡이류민제군사·용양장군·대선우·창려공으로 임명하였으나, 모용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로장군 노창이 모용외에게 권하기를 “지금 두 수도가 함락되고 천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낭야왕이 강동에서 뜻을 받들어 행사하니 사해의 사람들이 귀부하고 있습니다. 명공은 비록 한 지역에 웅거하고 있으나 각 부족이 아직 병력을 거느리고 복종하지 않는 이유는 관직이 진왕의 임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사자를 낭야왕에게 보내어 대통을 잇도록 권하고, 그 후에 조령을 받들어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은사 요동 사람 고후가 말하기를 “패왕의 기업을 이루려면 대의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진실이 비록 쇠약해졌으나 인심은 여전히 그에게 귀의하고 있으니, 사자를 강동에 보내어 받드는 바가 있음을 표시하고, 그 후에 대의에 의지하여 각 부족을 토벌한다면 이유가 없을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모용외가 이를 따르고, 장사 왕제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건강으로 가서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한나라 상국 유찬은 그의 당우 왕평을 보내어 태제 유의에게 말하기를 “방금 궁중에서 조서를 받았는데, 경사에 변고가 있을 것이니 안에 갑옷을 입고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의가 믿고, 동궁 관원들에게 모두 안에 갑옷을 입고 거주하도록 명령하였다. 유찬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근준과 왕침에게 알렸다. 근준이 한주 유총에게 아뢰기를 “태제가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이미 안에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유총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침 등이 모두 말하기를 “신 등은 듣기를 오래되었으나 여러 번 아뢰어도 폐하께서 믿지 않으셨습니다.” 하였다. 유총은 유찬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동궁을 포위하게 하였다. 유찬은 근준과 왕침을 보내어 저, 강 족장 10여 명을 체포하고 가혹한 고문을 하여, 그들의 머리를 높은 가마에 매달고 쇠를 달궈 눈을 지지니, 족장들은 억지로 자신과 유의가 모반했다고 자백하였다. 유총이 왕침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야 너희의 충성을 알겠다! 너희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도록 명심하고, 예전에 말했으나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라!” 하였다. 이에 동궁 관속과 유의가 평소에 가까이하고 후대하며 근준·왕침 등이 평소에 미워하고 원망하던 대신 수십 명을 주살하고, 사졸 1만 5천여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 여름, 4월에 유의를 폐하여 북해왕으로 삼고, 유찬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근준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였다. 유의는 형신이 준수하고 상쾌하며 너그럽고 인자하며 도량이 있어 선비들의 마음이 대부분 그에게 귀의하였다. 유총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매우 슬피 울며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단 둘만 남았는데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저, 강 중에 반란한 자가 많았는데, 유총은 근준을 대행거기대장군으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5월, 임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6월, 병인일에 온교 등이 건강에 도착하자, 왕도·주의·유량 등이 모두 온교의 재주를 사랑하여 서로 다투어 사귀었다. 이때, 태위·예주목 순조, 기주공 소속, 청주공 조의, 녕주공 왕손, 동이교위 최비 등이 모두 상표하여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진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에 유민 장평과 번아가 각각 수천 명을 모아 초군에서 원주가 되었다. 진왕이 승상일 때, 행참군 초국 사람 선선을 보내어 장평과 번아를 설득하니, 두 사람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예주자사 조적이 출병하여 여주에 주둔할 때, 참군 은의를 보내어 장평과 번아를 만나게 하였다. 은의가 마음속으로 장평을 얕보고, 그의 집을 보며 말하기를 “마구간으로 쓸 만하군.” 하고, 가마솥을 보고 말하기를 “쇠로 주조할 수 있겠군.” 하였다. 장평이 말하기를 “이것은 제왕의 가마솥이니, 천하가 청명해야 쓸 수 있는데, 어찌 그것을 부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은의가 말하기를 “너는 네 목숨도 보전하지 못할 텐데, 이 가마솥을 아까워하느냐!” 하였다. 장평이 크게 노하여 자리에서 은의를 죽이고, 군사를 정비하여 굳게 지켰다. 조적이 그를 공격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이에 장평의 부장 사부를 꾀어 장평을 죽이게 하였다. 조적이 진군하여 태구를 점거하였다. 번아는 여전히 초성을 점거하고 조적과 대항하였다. 조적이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중랑장 왕함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선선은 당시 왕함의 참군이었는데, 왕함이 선선을 보내어 군사 500명을 이끌고 조적을 돕게 하였다. 조적이 선선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신의는 이미 저 사람에게 드러났으니, 지금 다시 나를 대신하여 번아를 설득하라.” 하였다. 선선이 이에 단기로 두 사람만 데리고 번아를 만나 말하기를 “조예주께서 바야흐로 유총·석륵을 평정하려 하여 그대를 도움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서 은의가 경박하고 무례했던 것은 예주의 본의가 아닙니다.” 하였다. 번아가 즉시 조적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조적이 초성에 들어간 후, 석륵이 석호를 보내어 초성을 포위하자, 왕함이 다시 선선을 보내어 구원하니 석호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조적이 상표하여 선선을 초국내사로 추천하였다.

기사일, 진왕이 천하에 격문을 발표하여 이르기를 “석호가 감히 개양 무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제멋대로 학살하니, 지금 낭야왕 사마포 등 9군, 정예 군사 3만 명을 보내어 수륙 사로로 직접 적진을 공격하여 조적의 조절을 받게 하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포를 불러들여 건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가을, 7월에 큰 가뭄이 들었고, 사주·기주·병주·청주·옹주에 심각한 황충이 발생하였으며, 황하와 분수가 범람하여 1천여 호가 떠내려갔다.

한주 유총은 진왕 유찬을 황태자로 세우고, 겸하여 상국·대선우를 맡기고, 총리 조정 정무는 이전과 같이 하게 하였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단필제는 유곤을 대도독으로 추천하고, 격문을 보내어 그의 형 요서공 질륙권과 숙부 섭복신, 동생 단말배 등을 고안에 모이게 하여 함께 석륵을 토벌하려 하였다. 단말배가 질륙권과 섭복신에게 권하기를 “아버지와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은 수치입니다. 더욱이 요행히 공을 세워도 단필제가 홀로 취할 터인데, 우리에게 무슨 몫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각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유곤과 단필제는 홀로 남을 수 없어 역시 계성으로 돌아갔다.

순조를 사도로 임명하였다.

8월, 한나라 장수 조고가 임영에서 위장군 화회를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처음에 조고는 장사 주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주진이 은밀히 한주 유총에게 조고를 무고하였다. 이거가 유창을 격파했을 때, 영장 안에서 유총의 조서를 얻었는데, 명령은 유창이 이거를 이긴 후에 회군하여 낙양을 지나면서 조고를 체포하여 참수하고 주진으로 조고를 대체하라는 것이었다. 이거가 그 조서를 조고에게 보여주자, 조고는 주진 부자를 죽이고,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거는 다시 조고로 하여금 낙양을 지키게 하였다.

정반 등이 함께 왕창을 거역하였으나, 군심이 통일되지 않아 흩어져 횡상구로 돌아가 두증에게 투항하려 하였다. 왕돈은 무창태수 조유와 양양태수 주궤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니, 정반 등이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두증도 양양으로 가서 제5의를 공격하여 죄를 씻겠다고 청하였다.

왕곡이 형주로 가려 하면서 장사 유준을 남겨 양구루를 지키게 했다. 경릉내사 주사가 왕곡에게 말했다: "두증은 교활한 도적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관군을 서쪽으로 유인한 뒤, 전속력으로 돌아와 양구를 습격하려는 것입니다. 병력을 강화하여 배치해야 하며, 곧바로 서진해서는 안 됩니다." 왕곡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엄격하며 자부심이 강해, 주사가 늙고 겁이 많다고 여겨 서진했다. 두증 등은 과연 군사를 돌려 양구로 직진했다. 이에 왕곡은 주사를 돌려보냈으나, 주사가 막 성루에 도착했을 때, 두증에게 포위당했다. 유준은 스스로 북문을 지키고, 주사에게 남문을 지키게 했다. 마준이 두증을 따라 성루를 공격하러 왔는데, 마준의 처자식이 먼저 성루 안에 있었다. 어떤 이가 그들의 얼굴 가죽을 벗겨 마준에게 보여주려 하자, 주사가 말했다: "그의 처자식을 죽인다고 포위가 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분노만 더할 뿐입니다."于是 그만두었다. 두증이 북문을 함락시키자, 주사는 부상을 입고 배 안으로 물러나 배 밑바닥을 열고 잠수하여 나와, 물속에서 쉰 걸음을 잠수한 끝에 겨우 탈출했다. 두증이 사람을 보내 주사에게 항복을 권하며 말했다: "마준은 그대가 그의 처자식을 보전해 준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지금 그대의 집안 내외 백여 명을 모두 마준에게 맡겼는데, 마준이 이미 마음을 다해 수용하고 보살피고 있으니 그대가 올 수 있습니다." 주사가 대답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는데, 다시 그대와 함께 도적이 될 수 없다. 나는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처자식은 그대 마음대로 하라." 마침내 증산으로 가서 왕곡에게 의탁했으나, 상처가 중하여 죽었다.

무인일, 조유, 주궐 및 능강장군 황준이 여관호에서 두증과 교전하여 조유 등은 모두 패사했다. 두증은 승세를 타고 면구로 직진하여 강과 면수 일대를 위압했다. 진왕은 예장태수 주방을 보내 그를 공격하게 했다. 주방은 부중 8천 명을 거느리고 둔양으로 진군했다. 두증의 예기가 왕성하자, 주방은 장군 이항에게 좌익을 독전하게 하고, 허조에게 우익을 독전하게 하며, 자신은 중군을 통솔했다. 두증이 먼저 좌우익을 공격하자, 주방은 진영 뒤에서 꿩을 쏘아 군심을 안정시키며 부중에게 명령했다: "한 익이 패하면 북을 세 번 울리고, 두 익이 패하면 북을 여섯 번 울리라." 조유의 아들 조윤은 아버지의 남은 부대를 이끌고 좌익에 속하여 힘껏 싸웠으나 패하자 다시 집결하여 말을 달려 주방에게 보고했다. 주방이 노하여 그를 꾸짖으며 다시 진격하게 하니, 조윤은 울부짖으며 군사를 돌려 다시 싸웠다. 아침부터 신시까지 싸워 좌우익이 모두 패했다. 주방은 정예 8백 명을 선발하여 손수 술을 따라 마시게 하고, 명령하여 경솔히 움직이지 말고 북소리를 듣고 나아가게 했다. 두증의 군대가 주방군과 30보도 채 못 미쳤을 때, 주방이 직접 북을 울리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뛰어오르며 달려가니, 두증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주방이 밤에 추격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음 날을 기다리자고 청했다. 주방이 말했다: "두증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한다. 앞서는 그가 힘들고 우리가 편안했으므로 이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가 쇠약해진 틈을 타 추격해야 그를 소멸시킬 수 있다."于是 북을 울리며 진격하여 한수와 면수 일대를 평정했다. 두증은 무당으로 도망쳐 지켰다. 왕곡이 비로소 형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방은 공으로 양주자사에 승진하여 양양에 주둔했다.

겨울, 10월, 정미일, 낭야왕 사마포가 사망했다. 11월, 기유 삭일, 일식이 발생했다.

정묘일, 유곤을 시중, 태위로 임명했다.

정남군사 대옹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상란 이후로 학교가 훼손되고 폐지되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태평 시대에는 문치를 숭상하고 난세에는 무공을 숭상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은 이치가 있는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의 도는 심오하여 급히 배울 수 없습니다. 천하가 평안해진 후에 다시 닦는다면, 이미 오래도록 폐지된 것입니다. 더욱이 귀족 자제들이 반드시 장수를 참수하고 깃발을 뽑는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며, 종군 전쟁의 노역을 시키지 않고 젊은 시절에 도의를 강습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세도가 쇠퇴한 지 오래되어 예속이 날로 패괴해지니, 마치 불이 기름을 녹이는 듯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왕업이 막 세워져 만사가 시작되는 때이니, 신은 도를 돈독히 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교화와 풍속을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왕이 이를 따르고 비로소 태학을 세웠다.

한 주 유총이 사냥을 나가면서 민제를 거기장군으로 삼아 무복을 입고 창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보는 이들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예전 장안의 천자다." 사람들이 모여 구경했고,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태자 유찬이 유총에게 말했다: "옛날 주 무왕이 어찌 주왕을 죽이기를 좋아했겠습니까? 바로 동류가 서로 구하여 화근이 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무리를 모은 자들이 모두 자업을 명분으로 삼고 있으니, 빨리 그를 제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총이 말했다: "내가 앞서 유민 등을 죽였으나 민심이 여전히 이렇다. 내가 차마 다시 죽이지 못하겠으니, 잠시 더 지켜보자." 12월, 유총이 광극전에서 신하들을 연회하면서 민제에게 술을 따르고 잔을 씻게 하고, 잠시 후에는 옷을 갈아입게 하며, 또 우산을 들게 했다. 진나라의 옛 신하들은 대부분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목 놓아 울었다. 상서랑 농서 사람 신빈이 일어나 민제를 껴안고 크게 울자, 유총이 명령하여 그를 끌어내어 참수했다.

조고와 하내태수 곽묵이 한의 하동군을 침범하여 강현에 이르렀고, 우사예에 속한 백성들이 그들에게 도망간 자가 3만여 명이었다. 기병장군 유훈이 그들을 추격하여 1만여 명을 죽이니, 조고와 곽묵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태자 유찬이 장군 유아생 등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소평진에 주둔하자, 조고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반드시 유찬을 산 채로 잡아 천자를 되찾겠다." 유찬이 유총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자업이 죽으면 백성들에게 바랄 것이 없어져, 이구나 조고에게 이용되지 못하고 저절로 망할 것입니다." 무술일, 민제가 평양에서 피살되었다. 유찬이 유아생을 보내 낙양을 공격하자, 조고는 양성산으로 도망쳤다.

이 해, 진왕이 명령하여 농사를 감독하고 독려하게 하여, 이천석과 장리들은 곡물을 납부한 양을 기준으로 고과의 우열을 삼게 하고, 각 군은 각자 둔전을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군량으로 삼게 했다.

저왕 양무수가 사망하고, 장자 양난적이 즉위하여 작은아들 양견두와 각각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양난적은 좌현왕이라 칭하고 하변에 주둔했으며, 양견두는 우현왕이라 칭하고 하지에 주둔했다.

하남왕 토욕혼이 사망했다. 토욕혼은 모용외의 서형으로, 아버지 섭귀가 그에게 1천7백 호를 나누어 주어 예속시켰다. 모용외가 계위하자, 두 부족의 말이 서로 싸웠다. 모용외가 사자를 보내 토욕혼을 꾸짖으며 말했다: "선공이 나누어 설치한 바에 각각 구분이 있는데, 어찌 멀리 나누어 두지 않고 말이 싸워 상처를 입게 했는가?" 토욕혼이 화를 내며 말했다: "말은 육축으로, 싸우는 것은 그들의 일상사이다. 어찌 사람에게 화를 옮기는가! 멀리 나누어 두고 싶으면 쉽지만, 다만 이후에 만나기 어려울까 두려울 뿐이다! 지금 나는 만 리 밖으로 가려 한다."于是 부중을 이끌고 서쪽으로 천려했다. 모용외가 후회하여 장사 을나루풍을 보내 뒤쫓아 사과하게 했다. 토욕혼이 말했다: "선공께서 일찍이 점괘를 말씀하시기를 '나의 두 아들이 모두 번성하여 복록이 후세에 전해지리라' 하셨다. 나는 서자이니 이치상 함께 강성할 수 없다. 지금 말로 인해 헤어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于是 돌아가지 않고 서쪽으로 음산에 의지하여 살았다. 마침 영가의 난을 만나 예산을 넘어 서쪽으로 가서 도수 이서를 점거하고 백란에 이르니,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 선비인들은 형을 아간이라 불렀는데, 모용외가 그를 추모하며 《아간지가》를 지었다. 토욕혼에게는 예순 명의 아들이 있었고, 장자 토연이 계위했다. 토연은 자라면서 용력이 있어 강인과 호인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봄, 정월, 요서공 질육권이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어려서, 숙부 섭복진이 스스로 요서공이 되었다. 단필제가 계성에서 조문하러 가자, 단말배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단필제가 이번에 온 것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이다." 단필제가 우북평에 도착하자, 섭복진이 군사를 내어 그를 저지했다. 단말배가 허를 틈타 섭복진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의 자제와 당당을 병탄하여 스스로 선우라 칭했다. 단말배가 단필제를 맞아 싸워 그를 패배시키니, 단필제는 계성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삼월 계축일, 진민제의 사망 소식이 건강에 전해지자 진왕 사마예는 상복을 입고 초막에 거처하였다. 백관들이 그에게 황제의 존호를 오르기를 청했으나 사마예는 동의하지 않았다. 기첨이 말했다: "진나라의 황통이 끊어진 지 이미 2년이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대업을 계승하셔야 합니다. 종실의 친척들을 살펴보아도 감히 사양할 만한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속히 제위에 오르신다면 신령과 백성들이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천시를 거스르고 인사를 지체하여 대세를 한 번 잃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낙양과 장안 두 도성이 불타 없어지고 종묘에 주인이 없으며, 유총이 서북 지역에서 황제의 호칭을 도용하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동남 지역에서 한사코 사양만 하고 계시니, 이것이 이른바 '공손히 사양하며 불을 끄러 가는 것'입니다." 사마예가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전중장군 한적을 보내 어좌를 치우게 하였다. 기첨이 한적을 꾸짖으며 말했다: "황제의 자리는 하늘의 별자리에 응하는 것이니, 감히 움직이는 자는 목을 벤다!" 사마예가 이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봉조청 주숭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고대의 제왕들은 도의를 완비한 뒤에 천하를 얻고, 겸양을 마친 뒤에 제위를 얻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나라를 누리며 만대에 빛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선제의 영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옛 도성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의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사녀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마땅히 언로를 넓히고 좋은 계책을 받아들이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정비하여 먼저 국가의 큰 치욕을 씻고 천하 사람들의 소원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제위가 어찌 달리 갈 곳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뜻을 거슬러 신안태수로 좌천되었고, 또 원한을 품은 죄로 처벌받았다. 주숭은 주의의 아우이다.

병진일, 사마예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백관들이 모두 조정에 늘어섰다. 원제가 왕도에게 어좌에 올라 함께 앉기를 청했으나, 왕도가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만약 태양이 만물과 함께 나란히 있다면 백성들이 어찌 우러러 비춤을 바라겠습니까?" 원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바꾸었으며, 문무 관원들이 모두 두 등급씩 승진하였다. 원제는 자신에게 권진하는 명함을 투서한 모든 사람에게 한 등급의 관직을 더하고, 백성 중 명함을 투서한 자는 모두 관리로 임명하려 하였는데, 그 수가 20여만 명이었다. 산기상시 웅원이 말했다: "폐하께서 하늘에 응하여 대통을 계승하시니, 온 천하가 마음으로 귀의하여 받들고 있습니다. 어찌 가까운 자에게만 정이 두텁고 먼 자에게는 정이 박하겠습니까! 차라리 한나라의 법령에 따라 널리 천하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리시는 것이 은혜가 두루 미치고, 또 검핵의 번거로움을 덜며, 허위의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원제가 따르지 않았다.

경오일, 왕태자 사마소를 황태자로 세웠다. 태자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문장과 사조를 좋아하고 무예에 능숙하며, 현명한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하며, 간언과 진언을 받아들였고, 유량, 온교 등과 포의의 사귐을 맺었다. 유량은 풍채가 엄숙하고 기도가 정숙하며 노자와 장자를 잘 논하였고, 원제가 그를 중히 여겨 유량의 누이를 맞아 태자비로 삼았다. 원제가 하순을 태자태부 대리로 임명하고, 주의를 소부로, 유량을 중서랑의 신분으로 동궁에서 시강하게 하였다. 원제가 형명(刑名)의 학문을 좋아하여 《한비자》를 태자에게 하사하였다. 유량이 간하여 말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각박하고 인륜을 해치니, 성상께서 마음에 두실 가치가 없습니다." 태자가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원제가 또 사자를 보내 모용외에게 용양장군, 대선우, 창려공의 관직을 주었으나, 모용외는 공작의 작호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모용외는 유수를 용양장사로, 유상을 주부로 임명하고, 유수로 하여금 부서의 예법과 법도를 제정하게 하였다. 배의가 모용외에게 말했다: "진나라 왕실이 쇠미하여 강남에 편안히 머물러 위엄과 덕이 먼 곳에 미치지 못합니다. 중원의 화란은 명공께서 아니면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각 부가 비록 각자 군대를 가지고 있으나 모두 어리석은 무리들이 모인 것에 불과하니, 점차 그들을 병합하여 서쪽을 정벌할 자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용외가 말했다: "그대의 말씀은 너무 크고 웅장하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대는 중원의 명망 있는 덕 있는 선비로서, 나의 외지고 누추함을 꺼리지 않고 가르침을 주시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내게 주어 나라를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배의를 장사로 임명하고 군국의 중대사를 위임하였으며, 약소한 부족들은 점차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이거가 곽묵과 곽송을 보내 조고를 구원하여 낙수의 하구에 주둔하게 하였다. 곽송이 몰래 부장 경치 등을 보내 밤에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군영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한나라의 패구왕 유익광이 이를 정탐하여 태자 유찬에게 보고하고 방비를 청하였다. 유찬이 말했다: "그들은 조고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터이니, 자신을 보전하기에도 급급하여 어찌 감히 여기까지 오겠는가! 장수들을 놀라게 하지 마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치 등이 갑자기 이르러 열 길로 나누어 공격하니, 유찬의 부중이 놀라 흩어져 사상자가 반 이상이었고, 유찬은 양향으로 도망쳐 지켰다. 경치 등이 한나라의 군영을 점거하고 노획한 기계와 군자재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날이 밝자 유찬이 경치 등의 병력이 매우 적은 것을 보고, 또 유아생과 함께 남은 무리를 모아 그들을 공격하였다. 한나라의 주인 유총이 태위 범륭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지원하게 하여 경치 등과 대치하며 20여 일 동안 고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거가 병사를 진격시켜 구원하려 하였으나, 한나라 군대가 황하 가에서 막아서서 이거의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경치 등은 노획한 소와 말을 죽이고 군자재를 불태운 뒤 포위를 뚫고 호뢰로 도망쳤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이거를 하남삼군도독제군사로 임명하였다.

한나라의 종사칙당에서 불이 나서 한나라의 주인 유총의 아들 회계왕 유강 등 21명이 불에 타 죽었다.

유총이 그의 아들 제남왕 유기를 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로, 제왕 유력을 대사도로 임명하였다.

초숭과 진안이 군사를 일으켜 상규로 진격하자, 상국 사마보가 사자를 보내 장식에게 급히 알렸다. 장식이 금성태수 두도에게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군대가 신양에 이르렀을 때, 민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려 꾀하였다. 파강도위 장고가 장식에게 말했다: "남양왕 사마보는 황실의 먼 지파로서 큰 치욕을 잊고 급히 스스로 높아지려 하니,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왕 사마예는 황실의 가까운 친척이면서 명망과 덕이 있으니, 마땅히 천하 사람들을 이끌어 그를 받들어야 합니다." 장식이 이를 따르고 아문 채충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건강으로 가게 하였는데, 도착했을 때는 원제가 이미 즉위한 뒤였다. 장식은 강동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여전히 건흥 연호를 칭하였다.

여름, 4월, 정축 삭일에 일식이 있었다.

조정에서 왕돈을 강주목으로, 왕도를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가봉하였다. 왕도가 여덟 명의 종사(從事)를 보내 양주 소속의 군국을 순찰하게 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동시에 소집하였다. 여러 종사들이 각각 이천석 장관들의 득실을 보고하였으나, 유독 고화만이 말이 없었다. 왕도가 그에게 묻자, 고화가 말했다: "명공께서는 보좌 대신이 되셨으니, 차라리 법망이 성글어 배를 삼키는 큰 물고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실지언정, 어찌 들리는 소문을 수집하여 가혹하게 다스리는 것을 일삼으십니까!" 왕도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고화는 고영의 동족 조카이다.

성한의 승상 범장생이 죽었다. 성한의 주인 이웅이 범장생의 아들 시중 범분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범장생은 박학다재하여 재주가 많았고, 나이가 거의 백 세였으며, 촉 사람들이 그를 신명으로 받들었다.

한나라 중상시 왕침의 양녀가 아름다운 용모를 지녀, 한주 유총이 그녀를 좌황후로 세웠다. 상서령 왕감, 중서감 최의지, 중서령 조순이 간언하며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황후를 세울 때에는 천지에 짝하여, 살아서는 종묘를 받들고 죽어서는 후토에 배향한다고 합니다. 반드시 대대로 덕행이 있는 명문 거족 중에서 고요하고 정숙하며 단아한 여자를 선택해야, 사해의 기대에 부응하고 신령의 뜻에 합당할 수 있습니다. 한 성제가 조비연을 황후로 세워 후사가 끊어지고 사직이 폐허가 된 것은 앞 수레의 교훈입니다. 인가 연간 이래로 중궁의 자리를 덕행에 따라 선발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왕침의 동생의 딸일지라도 겨우 형벌을 받은 신분의 하찮은 자에 불과하여, 오히려 후궁을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그 집의 노비이겠습니까! 육궁의 빈잉들은 모두 왕공 귀족의 딸인데, 어찌 갑자기 노비로 하여금 그들을 주재하게 하겠습니까! 신은 이것이 나라의 복이 아닐까 두렵나이다." 유총이 크게 노하여, 중상시 선회를 보내 태자 유찬에게 이르기를: "왕감 등의 소인배가 망령된 말로 오만하여, 더 이상 군신 상하의 예절이 없으니, 속히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이에 왕감 등을 체포하여 저자로 보내 모두 참수하였다. 금자광록대부 왕연이 말을 달려 궁에 들어가 간언하려 하였으나, 문을 지키는 자가 통보하지 않았다. 왕감 등이 형장에 임했을 때, 왕침이 몽둥이로 그들을 때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아, 아직도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느냐! 너희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왕감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말했다: "도둑놈아,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자는 바로 너희 같은 쥐떼와 근준이다! 내가 반드시 선제 앞에서 너를 고발하고, 저승에서 너를 벌하리라." 근준이 왕감에게 말했다: "내가 조서를 받들어 너를 체포했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기에 한나라의 멸망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가!" 왕감이 말했다: "네가 황태제를 죽여, 주상으로 하여금 불우한 명성을 입게 하였다. 나라가 너희 같은 자들을 기르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최의지가 근준에게 말했다: "네 마음은 효조와 파경과 같아, 반드시 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네가 이미 사람을 먹으니, 다른 사람도 너를 먹으리라." 유총이 또 선회의 양녀를 중황후로 세웠다.

사도 순조가 허창에 있다가 석륵에게 핍박을 받아, 그의 부속 수백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갔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순조와 태보 서양왕 사마양이 함께 상서사를 기록하게 하였다.

단필제가 질육근의 상을 당해 달려갔을 때, 유곤이 그의 세자 유군을 보내 그를 전송하였다. 단필제가 패배하여, 유군이 단말배에게 사로잡혔다. 단말배가 후한 예우로 대하며, 유곤에게 유주자사가 되기를 허락하고, 함께 단필제를 습격하려 하였다.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유군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유곤에게 내응을 요청하였으나, 단필제의 순찰 기병에게 가로채였다. 당시 유곤은 따로 정북소성에 주둔하고 있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단필제를 만나러 왔다. 단필제가 유군의 편지를 유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본래 그대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대에게 알리는 것이다." 유곤이 말했다: "나는 그대와 맹세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소. 비록 아들의 편지가 비밀리에 도착했을지라도, 끝내 한 아들을 이유로 그대를 저버리고 대의를 잊지 않을 것이오." 단필제가 평소 유곤을 존중하여, 처음에는 유곤을 해칠 뜻이 없었고, 그의 주둔지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의 동생 숙군이 단필제에게 말했다: "우리는 호이입니다. 진나라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인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골육이 분리되었으니, 바로 그들이 도모할 좋은 기회입니다. 만약 누군가 유곤을 받들어 일어난다면, 우리 집안은 망할 것입니다." 단필제가 이에 유곤을 머물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유곤의 서장자 유준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유곤의 좌장사 양교 등과 함께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으나, 단필제가 성을 함락시켰다. 대군태수 벽려숭, 후장군 한거가 또 몰래 단필제를 습격하려 모의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단필제가 벽려숭, 한거와 그 당당을 체포하여 모두 주살하였다. 5월 계축일에, 단필제가 거짓 조서를 내려 유곤을 체포하여 목을 졸라 죽이고, 그의 아들과 조카 등 네 명을 함께 죽였다. 유곤의 종사중랑 노심, 최열 등이 유곤의 남은 부하를 이끌고 요서로 도망쳐 단말배에게 의탁하며, 유군을 주인으로 받들었다. 장좌들은 대부분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최열은 최림의 증손이다. 조정에서는 단필제가 아직 강성하여 하삭 지방을 평정할 수 있기를 바랐기에, 유곤을 위해 발상을 하지 않았다. 온교가 상표하여 말했다: "유곤이 왕실에 충성을 다하다 집이 파괴되고 몸이 죽었으니, 마땅히 포양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노심과 최열이 단말배의 사자를 통해 또한 상표하여 유곤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유곤에게 추증하여 태위, 시중을 내리고, 시호를 민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이인과 진인들이 유곤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모두 단필제에게 귀부하려 하지 않았다. 단말배가 그의 동생을 보내 단필제를 공격하자, 단필제가 그의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소속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나, 석륵의 장수 석월이 염산에서 요격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단필제가 다시 돌아와 계성을 지켰다. 단말배가 스스로 유주자사라 칭하였다.

당초, 온교가 유곤을 위해 표문을 받들고 건강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 최씨가 완강히 말렸으나, 온교가 옷자락을 찢고 떠났다. 건강에 도착한 후, 여러 번 다시 돌아가 명을 전할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유곤이 죽자, 조정에서 온교를 산기상시로 임명하였다. 온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전란이 막혀 돌아가 상을 치르고 장사 지낼 수 없어, 굳이 사양하며 임명을 받지 않고, 간절히 북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말했다: "무릇 예를 행하는 자는 도리가 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흉역이 아직 제거되지 않아, 여러 군대가 선제의 영구를 받들어 맞이하려 해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온교가 한 몸으로 어떻게 그의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온교가 어쩔 수 없이 임명을 받아들였다.

당초, 조의가 청주를 점거한 후, 한나라를 배반하고 와서 귀순하였다. 또 건강이 멀리 떨어져 있어 세력과 원조가 이어지지 못하자, 다시 석륵과 결탁하여, 석륵이 조의를 동주대장군, 청주목으로 임명하고, 낭야공에 봉하였다.

6월 갑신일에, 조정에서 조협을 상서령, 순숭을 좌복야로 임명하였다. 조협은 성격이 강하고 사나워 많은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였으며, 시중 유외와 함께 모두 원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시폐를 바로잡고자 하여, 항상 군주를 숭상하고 신하를 억제하며, 호족을 배척하고 타격하였기에, 이로 인해 왕씨 가문의 미움을 샀으며, 각종 가혹하고 자질구레한 정령들은 모두 유외와 조협이 만든 것이라 일컬어졌다. 조협이 또 술에 취해 방자히 굴며 공경들을 침범하고 비방하여, 그를 보는 자들은 모두 곁눈질하며 두려워하였다.

무술일에, 황자 사마희를 무릉왕에 봉하였다.

유호가 삭방에서 척발울율의 서쪽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척발울율이 유호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유호가 새외로 도망쳤고, 그의 종제 유로가가 부락을 이끌고 척발울율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척발울율이 서쪽으로 오손의 옛 땅을 빼앗고, 동쪽으로 물길 이서 지역을 병합하여, 병마가 정예하고 강대해져 북방에서 웅성거렸다.

한주 유총이 병상에 누워, 대사마 유요를 승상, 석륵을 대장군으로 소환하여, 모두 상서사를 기록하고 유조를 받들어 조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유요와 석륵이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유요를 승상 겸 옹주목, 석륵을 대장군 겸 유주, 기주 이주목으로 임명하였으나, 석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락왕 유경을 태재, 제남왕 유기를 대사마, 창국공 유의를 태사, 주기를 태부, 호연안을 태보로 임명하고, 모두 상서사를 기록하게 하였다. 범륭은 상서령, 의동삼사를 대행하고, 근준을 대사공 겸 사례교위로 임명하여, 모두 번갈아 상서의 주사를 결단하게 하였다. 계해일에 유총이 사망하였다. 갑자일에 태자 유찬이 즉위하였다. 황후 근씨를 황태후로, 번씨를 홍도황후, 무씨를 홍덕황후, 왕씨를 홍효황후로 높였다. 그의 아내 근씨를 황후로, 아들 유원공을 태자로 세웠다.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한창으로 고쳤다. 유총을 선광릉에 안장하고, 시호를 소무황제, 묘호를 열종이라 하였다. 근태후 등은 모두 나이가 20세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유찬의 행실은 예에 어긋난 일이 많았고, 애통하고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

靳准은 은밀히 반심을 품고, 사사로이 유찬에게 말했다: "듣자하니 여러 공경들이 이윤과 곽광의 일을 행하고자 하여, 먼저 태보와 저를 죽이고 대사마로 하여금 만기를 총괄하게 하려 한다 하오니, 폐하께서는 미리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유찬이 따르지 않았다. 진준이 두려워하여, 또 두 진씨(태후, 황후)로 하여금 권하게 하니, 유찬이 이에 따랐다. 이에 태재 유경, 대사마 유기, 유기의 동복동생 거기대장군 오왕 유정, 태사 유의, 대사도 제왕 유맹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주기와 범륭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8월, 유찬이 상림원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석륵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승상 유요를 상국,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하고 여전히 장안을 진수하게 하였으며, 진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았다. 유찬은 항상 후궁에서 놀며 연회를 즐겼다. 군국 대사는 모두 진준이 결단하였다. 진준이 가짜 조서를 내려 당제 진명을 거기장군으로, 진강을 위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준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하여 왕연과 의논하였다. 왕연이 따르지 않고 말을 달려 가서 고발하려 하다가, 진강을 만나 왕연을 잡아 돌아왔다. 진준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광극전에 올라, 갑사로 하여금 유찬을 잡아 그 죄를 낱낱이 꾸짖은 후 죽이고, 시호를 은제라 하였다. 유씨 남녀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동시에서 참수되었다. 영광, 선광 두 능을 파헤쳐 유총의 관을 베고, 그의 종묘를 불태웠다. 진준이 스스로 대장군, 한천왕이라 칭하고,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며 백관을 설치하고, 안정 사람 호숭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호인이 천자가 된 적이 없으니, 지금 전국옥새를 너에게 주어 진나라 집에 돌려주어라." 호숭이 감히 받지 않으니, 진준이 크게 노하여 그를 죽였다. 진준이 사자를 보내 사주자사 이유에게 말했다: "유연은 도각 부락의 소축으로, 진나라의 내란을 틈타 천명을 사칭하여 두 황제를 가두어 죽게 하였소. 내가 즉시 부중을 이끌고 선제의 영구를 호위하여 받들 터이니, 조정에 보고하시오." 이유가 급히 상표하여 원제에게 알리니, 원제가 태상 한윤 등을 보내 영구를 맞이하게 하였다. 한국 상서 북궁순 등이 진나라 사람들을 모아 동궁에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니, 진강이 쳐부수어 없앴다. 진준이 왕연을 좌광록대부로 임명하려 하자, 왕연이 욕하며 말했다: "도각의 역노야,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는가! 내 왼쪽 눈을 서양문에 두어 상국 유요가 성에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고, 내 오른쪽 눈을 건춘문에 두어 대장군 석륵이 성에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 진준이 그를 죽였다.

상국 유요가 변란을 듣고 장안에서 왔다. 석륵이 정예 병사 5만을 이끌고 진준을 토벌하여 양릉 북원을 점거하였다. 진준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석륵은 진을 굳게 지키며 나가지 않아 그의 예기를 꺾었다. 겨울, 10월, 유요가 적벽에 도착하였다. 태보 호연안 등이 평양에서 유요에게 귀부하여, 태부 주기 등과 함께 존호를 올렸다. 유요가 황제 자리에 오르고, 대사령을 내려 진준의 일문만은 사면에서 제외하였다. 연호를 광초로 고쳤다. 주기를 겸임 사도, 호연안을 겸임 사공, 태위 범륭 이하를 모두 전임 관직으로 복귀시켰다. 석륵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삼고, 구석을 더하고, 식읍 10군을 더하며, 작위를 조공으로 올렸다.

석륵이 평양에서 진준을 공격하니, 파인과 강인, 갈인이 항복한 자가 10여 만 부락에 이르렀고, 석륵이 모두 자신의 관할 군현으로 옮겼다. 한주 유요가 정북장군 유아, 진북장군 유책을 보내 분음에 주둔하게 하고, 석륵과 함께 진준을 토벌하게 하였다.

11월, 을묘일, 밤에 해가 나타나 높이가 삼 장이었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왕돈을 형주목으로 삼고, 도독을 더하여 도독교주제군사로 삼았다. 왕돈이 형주목 직을 굳이 사양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자사로 임명하였다.

경신일, 조서를 내려 여러 공경과 사대부들에게 각자 정사의 득실을 진술하게 하였다. 어사중승 웅원이 상소하여 아뢰었다: "호적이 중화를 어지럽히고 선제의 영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군대를 보내 진격하여 토벌하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허물이요; 백관들이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농담과 술자리 즐기기에만 힘쓰는 것이 두 번째 허물이요; 관리를 선발하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실제 덕행을 살피지 않고 허명만 중히 여기며, 재능을 구하지 않고 청탁만을 일삼아, 벼슬하는 자가 정사를 다스리는 것을 속리(俗吏)의 소행으로 여기고, 법을 받들어 지키는 것을 가혹함으로 여기며, 예절을 다하는 것을 아첨으로 여기고, 여유 있는 태도를 고상함으로 여기며, 방탕한 것을 달사(達士)로 여기고, 교만하고 태만한 것을 간략하고 고상함으로 여기는 것이 세 번째 허물이옵니다. 세속이 싫어하는 자는 진흙 속에 빠지고, 세속이 좋아하는 자는 구름 위를 날아다닙니다. 그러므로 만기가 정리되지 못하고 풍속이 허위와 천박함에 빠졌습니다. 조정의 각 부서는 순종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거스르는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니, 어찌 조정에 직언을 다투는 신하가 있고 선비에게 녹봉을 탐하지 않는 뜻이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선비를 선발할 때 그들의 정견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지금 광록훈이 시험을 보지 않으니 크게 고대의 뜻을 어긴 것입니다. 또 현량을 천거함에 있어 명문 세가를 벗어나지 않고, 형벌을 집행함에 있어 권귀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로 인해 재능 있는 자가 세상을 구제하지 못하고 간사한 자가 징계를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로써 화란을 구하려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에 앞서, 원제가 이간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 하여, 주군의 수재와 효렴이 오면 시험을 거치지 않고 모두 관직에 임명하였다. 상서 진의 또한 상언하여 말했다: "마땅히 점차 옛 제도를 따라 경서(經策)를 시험해야 합니다." 원제가 따랐으므로, 이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자사와 태수를 면직한다." 이에 수재와 효렴이 감히 오지 못하고, 비록 오는 자가 있어도 모두 병을 핑계 대어, 3년 연속 시험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 원제가 특별히 이미 도착한 효렴에게 관직을 주려 하자, 상서랑 공탄이 상주하여 논의하기를: "가까운 군현은 군장의 연루를 두려워하여 감히 오지 못하고, 먼 군현은 시험을 보지 않기를 바라며 무턱대고 옵니다. 지금 만약 편애하여 관직을 내린다면, 이는 삼가 법을 지키는 자는 기회를 잃고, 요행을 바라는 자는 벼슬을 얻게 되는 것이니,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해침이 아마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차라리 모두 돌려보내고 기한을 늦추어 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면, 법령이 공평해지고 정령에 신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원제가 따르고, 효렴이 7년까지 연기하여 시험을 보도록 허락하였다. 공탄은 공유의 조카이다.

진준이 시중 복태를 보내 황제의 수레, 의복, 기물을 석륵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니, 석륵이 복태를 가두어 한주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가 복태에게 말했다: "선제 말년에 참으로 인륜이 문란하였소. 사공이 이윤과 곽광의 권도를 행하여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공이 크오. 만약 능히 일찍 대가를 맞이한다면, 내가 정사를 모두 그에게 위임할 터이니, 죽음을 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않소!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성에 들어가 이 뜻을 자세히 전하시오." 복태가 평양으로 돌아가니, 진준이 자신이 유요의 어머니와 형을 죽인 일로 인해 망설이며 따르지 않았다. 12월, 좌우거기장군 교태, 왕등, 위장군 진강 등이 함께 진준을 죽이고, 상서령 진명을 추대하여 주인으로 삼고, 복태를 시켜 전국육새를 받들어 한나라에 항복하게 하였다. 석륵이 크게 노하여 진군하여 진명을 공격하니, 진명이 출병하여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하고, 이에 성을 에워싸고 굳게 지켰다.

정축일, 황자 사환을 낭야왕으로 봉하였다. 사환은 정부인의 아들로, 태어난 지 2년이 되었는데, 원제가 매우 사랑하여 병이 중하므로 왕으로 봉한 것이다. 기묘일, 사환이 죽었다. 원제가 성인의 예로 장사 지내고, 길흉 의장과 복장을 갖추고 능원을 조성하여, 소비되는 인력과 재물이 매우 많았다. 낭야국 우상시 회계 사람 손소가 상소하여 간언하기를: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예를 줄였사온데, 하물며 지금 해내가 상란 중이옵니다. 비록 옛 제도를 따르더라도 마땅히 절약해야 하옵니다. 그런데 예전典籍에 없는 것을 이토록 숭상하여 치장하시니, 이미 지친 백성을 다하여 무익한 일을 하고, 이미 곤핍한 재물을 다하여 무용한 지출을 하는 것이, 신이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바이옵니다." 원제가 따르지 않았다.

팽성내사 주무가 패국내사 주묵을 죽이고, 그 부중을 이끌고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하비내사 유하를 겸임 팽성내사로 삼고, 서주자사 채표, 태산태수 서감과 함께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채표는 채질의 현손이다.

석호(石虎)는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군사를 이끌고 석륵(石勒)과 합세하여 평양(平阳)을 공격했다. 진명(靳明)은 여러 차례 패배하여 사자를 보내 한(汉)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나라 주 유요(刘曜)는 유아(刘雅)와 유책(刘策)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했고, 진명은 평양의 남녀 만 오천 명을 이끌고 한나라로 도망쳤다. 유요는 서쪽으로 주둔지를 속읍(粟邑)으로 옮기고, 진씨(靳氏) 일족의 남녀를 노소 구분 없이 모두 참수했다. 유요는 평양에서 그의 어머니 호씨(胡氏)의 영구를 맞이하여 속읍에 안장하고, 능호를 양릉(阳陵)이라 하였으며, 시호를 선명황태후(宣明皇太后)라 하였다. 석륵은 평양의 궁실을 불태우고, 배헌(裴宪)과 사회(石会)를 보내 영광(永光), 선광(宣光) 두 능을 수리하게 하고, 한나라 주 유찬(刘粲) 이하 백여 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뒤, 수비를 설치하고 돌아갔다.

성한(成汉)의 양주자사(梁州刺史) 이봉(李凤)은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성한의 주 이웅(李雄)의 조카 이치(李稚)가 진수(晋寿)에 있으면서 그를 시기했다. 이봉이 파서(巴西)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웅은 친히 부성(涪城)에 이르러 태부(太傅) 이양(李骧)을 보내 이봉을 토벌하게 하여 그를 참수했다. 이수(李寿)를 전장군(前将军)으로 삼고, 도독파서군사(都督巴西军事)로 임명했다.